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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스크랩] 불탑(佛塔)의 분포로 보는 고려 강역(疆域)-2


불탑(佛塔)분포로 보는 고려 강역(疆域)-2


현 요령성 조양(朝陽)시에 있는 조양북탑은 사각형이다. 탑의 층수는 5, 7, 9, 13층 등 홀수로 쌓지마는 옆으로 면수는 4, 8 등 짝수로 설계되어 있다. 그간 조사한 바에 따르면, 사각형 탑은 매우 드물다.

사각형 탑의 예를 들면, 고구려 환도성(桓都城)으로 추정되는 현재의 하북성 석가장시 정정현에 있는 개원사 수미탑을 들 수 있는데, 개원사는 환도성 안에 위치하고 있으며, 수미탑의 모습은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다. 또 환도성의 위치는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 하북성 석가장시 정정현이다.


[그림 1] 개원사 수미탑



                                                                            [그림 2] 고구려 환도성의 위치(현 하북성 석가장시 정정현)


정정현에 있는 성을 현재 '정정영시성(正定影視城)'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영시성이란 영화세트장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본 연구원이 추정하고 있는 바로는 정정성이 바로 고구려 환도성으로서 그 남쪽에 있는 현재의 호타하를 바로 압록수로 추정하고 있다. 만약 단순히 영화세트장이라면 어찌 시내 한 군데에 지었겠는가?

'영시성(影視城)'의 뜻은 '그림자를 보는 성'이라는 뜻을 갖고 있으니 망한 나라의 유적을 보면서 세월의 무상함인가..... 

또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수미탑 옆에 있는 건물은 종루인데 전형적인 고구려 건축양식으로 추정하고 있다. 상기한 개원사는 540년에 세워졌으며, 수미탑은 636년에 쌓았다고 한다. 중화인민국은 마치 당(唐) 태종 정관(627~649년)중에  수미탑을 세운 것처럼 홍보하고 있다.

그런데 상기한 개원사 수미탑이 고구려가 쌓은 것이라면, 수미탑을 통하여 고구려 문물의 핵심 사유세계를  [그림 3]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가슴 뭉클하게 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림 3] 세계에서 가장 큰 거북이상과 수미탑을 떠밭이고 있는 역사들


사각형 탑은 몹시 단아(端雅)한 자태를 보여주고 있다. 탑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쓸데없이 어지러운 사념(思念)들이 모두 떨쳐나가는 것 같다.

만약 상기한 수미탑이 고구려가 쌓은 탑이라면, 현재의 요령성 조양시에 있는 조양북탑이 요()가 세운 탑이 될 수 있겠는가?

또 사각형 탑의 다른 예를 보자면, 현재 우리나라 경복궁에 위치하고 있는 국보 101호 지광국사(智光國師) 현묘탑(玄妙塔)인데 [그림 4]에서 보는 바와 같다.


[그림 4] 경복궁 지광국사 현묘탑


본래 강원도(江原道) 원주시(原州市) 부론면(富論面) 법천리 법천사(法泉寺)에 있었는데, 원래 위치에 보존되어 있는 탑비(塔碑)의 비문에 따르면, 지광국사의 입적이 고려 선종 2년인 1085년이므로 그 직후에 쌓은 탑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1911년 가을 일본인들이 현묘탑을 강제로 일본으로 무단 반출하였다. 그러나 여론이 악화되자 민족감정을 자극시킬 수 있다고 판단한 조선 총독부가 일본인 소유자에게 압력을 넣어 1912년 다시 한국으로 가져와 당시 총독부가 있던 경복궁 뜰에 세워놓았다.

하지만 그때 현묘탑 안에 모셔져 있던 사리장신구와 경전들은 행방이 묘연한 채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탑을 세운 이유는 바로 사리를 모시기 위함이었는데, 사리기를 잃어버렸으니 심장을 잃어버린 것과 마찬가지의 신세가 된 것이다.

아무튼 국가의 보물이 돌아오긴 했으나 6.25 전쟁 때 전쟁의 포화 속에서 어느 날 경복궁으로 날아온 포탄 하나가 현묘탑에 명중되었다. 그때의 모습이 [그림 5]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한 장의 사진으로 남아 끔찍했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그림 5] 현묘탑 파손 당시 모습


그 당시 1 2천 개의 조각으로 부서진 현묘탑을 복원시킨 것은 당시의 기술력으로는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하늘이 혹독한 세월을 예상했는지  우리나라에 뛰어난 문화재 전문가를 보내주셔서 복원할 수 있었다고 한다. 바로 그는 한국 고건축계와 수리복원의 선구자인 문화재기술자 임천(林泉, 1908~1965년) 선생이었다.

그는 예산 수덕사 대웅전, 춘천 청평사 극락전, 구례 화엄사 각황전 등을 해제 복원했으며, 6.25때 타버린 진주 촉석루의 재건과 서울 남대문도 그가 중수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그는 국립박물관 일원으로서 1957년 경복궁 뜰에 처참하게 쓰러진 현묘탑의 남아있는 조각을 붙이고 가루가 되어버린 부분은 원래 돌을 섞어 만든 재질로 복원을 시켜놓아 여러 상처투성이나마 기적적으로 복원에 성공했다고 한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개원사에 있던 거북이돌비석을 망가트리고, 국보를 도둑맞거나 전쟁의 포화로 박살이 나듯이 국가가 언제든지 망하거나 유린 당할 수 있는 것이다. 20세기에도 숫한 나라들이 멸망했으며, 백성들이 꼬치구이처럼 사슬에 꿰어져서 파리나 모기처럼 박살이 나서 쓰레기 더미에 버려지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지 않았는가?

대한민국이 영원할 것이라는 생각은 모자라는 이들의 방종이다. 나 하나 하는 짓이 전혀 표시가 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꾀가 있는 것이 아니라 천할 뿐이다.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이 전쟁의 포화로 모두 죽어 버리면, 나는 행복할 것인가?

그리 되어야 비로서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인가?

우리나라 백성들은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나라의 안위를 위해 근심할 줄 알아야 하고 부강한 미래를 위하여 힘을 보탤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상기한 지광국사 현묘탑은 온갖 탑 중에서도 고려인의 사유세계(思惟世界)와 예술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는데, [그림 6]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우주와 삶의 이치를 모두 포용하고 있는 듯하다.


[그림 6] 지광국사 현묘탑 부조 그림


 그런데 또다른 사각형 탑을 든다면, 현재 우리나라 경주에 있는 분황사(芬皇寺)  탑을 들 수 있다. 분황사는 선덕여왕 3년(634년)에 건립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우리 민족이 낳은 위대한 고승 원효와 자장이 거쳐간 사찰로 명성이 높다.

원효대사가 거주하면서 화엄경소(疏, 화엄경 주석)를 쓴 곳인데, 선덕여왕의 권유로 자장법사도 오래 머물렀으며, 원효의 아들인 설총은 원효대사가 돌아가신 후 아버님의 소상을 만들어 모셨고, 이 소상은 고려후기까지 있었다고 전해진다.

원효가 이곳에서 해동종을 완성했다고하여 해동종을 분황종이라고도 하며,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 경덕왕 14년(755년)에 불상 주조의 대가인 강고 내말이 만든 약사여래상이 있었다고 한다. 분황사 탑은 몇 층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현재 3층까지만 남아 있으며, 그 모습은 [그림 7]에서 보는 바와 같다.

[그림 7] 경주 분황사의 모습


그런데 그간 본 연구원이 연구한 바에 따르면, 신라의 마지막 수도 신월성은 현재의 강소성 양주시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현재 경상남도 경주시에 있는 분황사는 어느나라 탑인가?

비록 남아있는 기록이 전혀 없어서 알 수는 없지만, 신라의 강역이 현재의 산동성에서부터 강소성, 안휘성 등을 거쳐 현 양자강에 이르는 지역이었더라도 현재의 경상도 지역에는 어떤 알려지지 않은 나라가 있었을 수도 있으며, 국력이 약해 지방 호족이 다스리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을 지도 모른다. 또는 신라 말기에 왕실 관계자들이 왕실 고분들을 현재의 경상남도 경주시로 이장하고 신라로 이주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현재 불탑들의 분포를 보면, 사각형의 탑은 매우 드문 경우이지만,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사각형 탑은 매우 귀한 유적들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요점은 앞서 설명한 현 석가장시 개원사 수미탑이 당(唐)이 쌓은 것인가, 아니면 고구려가 쌓은 것인가에 따라  요(遼) 강역의 진위는 판가름 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개원사 시설들이 부서진 채로 남아있는 것을 볼 때, 당(唐)이 지은 절은 아닌 것 같다.<계속>

사진출처: 구글어스, 다음카페 서예세상, 다음카페 북경도사, 한국관광공사 등 



출처 : 동북아역사연구소
글쓴이 : 광화세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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