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서술한대로 1974년 후반부터 1975년 3월 초까지 남베트남은 혼란과 동요의 연속이었다. 미 군사원조의 대폭 삭감 충격, 탄(Thanh) 신부의 부정고발 파동, 군부까지 파급된 인사이동, 푸옥롱(Phuoc Long) 성의 피탈 등 연속된 충격 속에서 미 의원단까지 방문하여 남베트남인과 티우(Thieu) 대통령에게 깊은 마음의 상처를 주고 마지막 방문단이 3월 2일 사이공을 떠나갔다.
1974년 12월 9일과 10일 이틀 동안 사이공 독립궁에서는 정부와 3군 수뇌, 전 군단장이 참석한 가운데 연말 최고회의가 열렸다. 1974년도의 상황을 분석하고 1975년도 남베트남의 안보대책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이 회의에서 적의 기도에 대하여 1975년은 그 해 10월에 예정되어 있는 대통령 선거를 방해하는 차원에서 1974년보다는 규모가 큰 공세를 실시하고 1976년도의 미국 대통령 선거전과 때를 맞추어 총공세를 필 것으로 판단하였다.
1975년도 적의 공세는 1968년도 구정공세와 같은 규모로는 공격할 수 없고 대도시를 점령해도 확보할 능력은 아직 없을 것으로 판단하고 1975녀도 공세는 구정 전후로 사이공 북서쪽 캄보디아 국경지대에 있는 타이닌(Tay Ninh) 성을 공격할 것으로 예상하였다. 이와 같은 남베트남의 판단은 첩자에 의해 즉시 하노이로 보고되었다.
남베트남군 참모총장 카오 반 비엔(Cao Van Vien)은 적의 공격 형태는 1968년 구정공세와 1972년 춘계공세의 복합형이 될 것으로 판단하고, 도시목표는 사이공, 후에(Hue), 다낭(Da Nang), 칸토(Can Tho)가 될 것이며 이를 공격하기 전에 남베트남군의 예비를 격멸하기 위해서 우선 제2군단 지역을 강타하고 적의 공격 시기는 3월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또한 정확한 정보를 근거로 이와 같이 판단하였으며 대통령의 특별한 지침이 없이 다음에 있을 적의 움직임에 스스로 대비책을 강구하여 일반예비를 강화하는 방책을 연구하였다고 했다. 훗날 반메투오 전투에서도 적이 반메투오를 공격하는 기도가 첩보에서 명백히 드러났으나, 제2군단장이 적의 주공방향을 오판하였다고 서술하였다. 그러나 이는 비엔이 적의 기도를 정확히 판단하였다면 대통령에 건의하여서라도(실제 지휘권은 없었음) 어떤 대책을 마련하였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조치를 강구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는 점에서 또한 반메투오가 공격을 받았을 때 사전 준비된 어떤 대책이 전혀 강구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적의 공격이 임박한 후에야 그 가능성을 판단했거나, 아니면 자기변명으로 밖에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카오 반 비엔
북베트남의 대공세는 1976년 미국의 대통령 선거전과 때를 맞추어 실시될 것이라는 판단은 북베트남이 이미 1964년, 1968년, 1972년 모두 공세를 폈다는 전례와 현재 북베트남의 전력이 충분하지 못하다는 데에 근거를 두고 판단한 것이며 미국 CIA도 동일한 판단을 하고 있었다.
남베트남은 북베트남이 대대적으로 신병을 모집하였고 최근에는 신병훈련 주기를 단축시켰고 최근 6개월 동안에 1973년도와 1974년도의 2배에 달하는 63,000여 명의 북베트남군이 남베트남 지역으로 침투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음에도 이를 간과하고 있었다.
또한 1974년 말 경에 소련 국방군 사령관 빅토르 쿨리코프(Viktor Kulikov)가 하노이를 방문하였다.(1971년 12월에도 소련 고위간부가 방문 후 1972년 춘계공세가 있었음) 1975년 2월에도 소련 외무차관과 중국 군사사절단이 방문하였고 이후 중국으로부터 공수량이 증가하고 소련 선박의 해상 수송량이 급증하고 있었으나 이것도 간과하고 말았다.
빅토르 쿨리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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