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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이야기

에도시대 출판물 속 단군신화:『화한삼재도회』와 『에혼조선정벌기』를 중심으로(김영주외/숭실대)

고조선의 건국신화인 단군신화는 19세기부터 20세기에 걸쳐 일제강점기를 전
후로 한일 양국에서 크게 주목을 받았다. 특히 일본의 학자들을 중심으로 고려시
대 성립설과 일본신화 속의 신 스사노오와의 동일설을 둘러싼 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이러한 연구경향의 배경에는 식민지지배라는 정치적 요소가 강하
게 작용하고 있었다. 조선의 고대사를 부정하고, 일본과의 동일성을 강조하는 이
른바 일선동조론을 뒷받침하는 연구는 식민통치에 적극적으로 이용되었다.
단군신화가 일본에 처음으로 알려진 것은 에도시대였다. 에도시대는 목판인쇄
의 발달로 출판문화가 융성하던 시대였다. 서적의 대량생산과 소비가 이루어지는
환경에서 『화한삼재도회』와 『에혼조선정벌기』 등의 에도시대의 출판물에 단
군신화가 수록되었다는 사실은 큰 의의를 가진다. 식민주의사상의 영향을 받기
이전의 단군신화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임과 동시에, 이들 출판물은 학자층은 물
론 다수의 일반인 독자를 대상으로 대량으로 유통되었기에 그 속에 담긴 단군신
화는 당시의 일본인이 조선을 이해하는 주요한 매체로 작용했을 것이기 때문이
다. 특히 에도시대를 대표하는 백과사전으로 당대의 사상과 지식을 정리하여 수
록하고 있는 『화한삼재도회』는 에도시대의 보편적인 인식을 파악할 수 있는 절
호의 소재라고 할 수 있겠다. 본 논문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에도시대
출판물 속의 단군신화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수록화의 내용분석과 함께, 출
처문헌과의 비교를 통해서 작자 및 편자의 의도에 대해 고찰함으로써, 에도시대
단군신화에 대한 인식과 그 위상을 밝히고자 한다.
[에도시대, 단군, 동국통감, 화한삼재도회, 에혼조선정벌기

Ⅰ. 서론
단군은 고조선의 건국시조로 일찍부터 중요시되어 왔다. 특히 조선은 나라 이
름을 「조선」으로 정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고대의 조선을 계승했다는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의 단군은 동방에서 처음으로 천명(天命)을 받은
임금이고, 기자는 처음으로 교화(教化)를 일으킨 임금1)」이라는 인식을 바탕으
로 단군과 기자를 국가적으로 제사지냈으며, 국가적 차원에서 편찬된 본격적인
역사서에도 단군조선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단군에 대한 관심이 가장 뜨거웠던 시기는 19세기부터 20세기까지, 일제강점
기 전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단군신화는 이때 한일 양국 모두에게 큰 주목을
받았다. 특히 일본의 학자들을 중심으로 신화의 성립시기(고려시대 성립설)와 단
군과 스사노오노미코토 素戔嗚尊2)의 동일설을 둘러싼 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되
었다. 이러한 연구경향은 식민지지배라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실제로 조선의 고대사를 부정하고, 일본과의 동일성을 강조하는 이른바
일선동조론을 뒷받침하는 이들 연구는 일본의 식민지통치에 적극적으로 이용되
었다.
그렇다면 식민지사관의 영향을 받기 이전, 즉 일제강점기 이전의 일본은 단군
신화를 어떤 모습으로 접하고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을까? 단군신화가 일본에 본
격적으로 소개된 것은 에도시대로 추정된다. 이마니시 류 今西龍는 그의 논문
「단군고(檀君考)」에서 단군신화의 일본 전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자료1】왕검선인(王儉仙人)의 이름은 일본에 마침내 알려지게 되었으나,
단군의 이름은 도쿠가와 徳川 시대3)에 들어와서 알려진 듯하다. 단 아시카가
足利 시대4)에 고잔 五山5)의 승려들 가운데 조선에 왕래한 자에게 이미 그 이
름이 전해졌으리라 생각되어, 일단 조사를 했으나 그에 대해 기록한 것을 볼 수
없었다. 일본인으로서 단군에 대해 쓴 최초의 사람은, 이 또한 협소한 본인의
1)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 8월 11일 경신 2번째 기사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데
이터베이스)
2) 일본신화의 신들 중 가장 고귀하다고 여겨지는 삼귀자(三貴子) 중 하나. 황조신(皇祖神)
아마테라스 天照大神의 남동생으로, 『일본서기(日本書紀)』등에 한반도 방문기록이 전
해진다.
3) 도쿠가와 이에야스 徳川家康로 시작된 도쿠가와 막부, 즉 에도시대(1603-1867).
4) 아시카가 다카우지 足利尊氏로 시작된 무로마치 막부, 즉 무로마치 시대(1336-1573).
5) 특정 자격을 갖춘 5곳의 큰 절. 일본에서는 가마쿠라에서 무로마치 시대에 걸쳐서 막부
와 귀족의 우지데라 氏寺 중 5곳을 골라 원칙적으로 막부가 주지승을 임명했다. 각 시
대별로 변동이 있었는데, 무로마치 시대(1386)의 고잔은 天竜寺・相国寺・建仁寺・東福
寺・万寿寺의 다섯 곳이었다.(中村元ほか編,『岩浪仏教辞典』, 岩浪書店, 2009, p. 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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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문으로는 하야시 슌사이 林 春斉이다. 슌사이는 간분 寛文 6년(조선 현종왕
7년)에 신간(新刊)한 『동국통감(東國通鑑)』의 서문에
朝鮮多種類、在鸿荒之世、檀君開其国、而自中華入治之者、以箕子為祖、初
有朝鮮号(中略)若以我国史言之、則韓国之島新羅之国、是亦素戔嗚尊之所経歴
也、尊之雄偉、非朴赫・朱蒙・温祚可企及、則推為三韓之一祖亦不為誣乎
라 기록했다. 하야시는 스사노오 素尊에 대해서 기술하기 위해서 단군과 기
자를 적은 것이며, 그 사이에 관계가 있다고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6)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왕검선인」은 『삼국사기(三国史記)』에 보이는
「선인왕검(仙人王儉)」, 『삼국유사(三国遺事)』의 「단군왕검(壇君王儉)」이
다. 물론 에도시대 이전에 『삼국유사』와 『삼국사기』가 일본에 전해졌을 가
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현재까지 그에 관한 문헌자료가 발견되지 않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전해졌다 하더라도 사회적 영향력은 미미했을 것으로 추정
된다.
에도시대는 출판문화가 융성하던 시대였다. 쓰지모토 마사시 辻本雅史는 에
도시대 미디어의 특징을 「문자사회의 성립」과 「상업출판의 등장」으로 정의
한다7). 계속되는 내란과 대외전쟁(임진왜란)이 끝나고 에도막부가 시작되자, 정
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도시와 시장이 발달하고 도시상공업자 조닌 町人계층이
성장했다. 이들은 상거래의 기본이 되는 간단한 읽고 쓰기를 익혔고, 경제활동으
로 축척한 부로 문화의 대중화를 이끌었다. 한편 도시 밖에 거주하는 농민들 사
이에서도 식자층(識字層)이 증가했다. 병농분리 정책으로 병역에서 해방된 농민
들은 지연(地縁)을 바탕으로 지역공동체를 형성해 자치적인 사회를 구성했고, 막
부는 물론 각 지역의 영주(1主)들이 문서를 통해서 이들 공동체를 지배했다. 읽
고 쓰는 능력은 이제 농민들에게도 필요한 교양으로 자리 잡았고, 그 결과 도시
와 농촌을 아우르는 문자사회가 성립되었다.
대중문화의 발달과 식자층의 증가는 소설로 대표되는 상업출판을 발전시켰으
며, 교토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서적의 출판 및 판매구조가 성립되었다. 겐나 元
和(1615-1624)・간에이 寛永(1624-1645) 연간 전후에는 교토에 약 100개, 오
사카에 약 20개, 에도에는 약 40개에 달하는 서적의 출판판매업자 本屋가 활동
했다8).
이처럼 서적의 대량생산과 소비가 이루어지는 환경 속에서 단군신화가 출판
물에 수록되었다는 사실은 큰 의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먼저 식민지주의의
6) 今西龍,「檀君考」,『朝鮮古史の研究』, 国史刊行会, 1971, pp. 109-110. (필자역)
7) 辻本雅史,「思想を語るメディア」,『日本思想史講座』, ぺりかん社, 2012, pp. 234-238.
8) 今田洋三,「本屋」,『日本大百科全書』, 小学館 (http://japanknowledg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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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향을 받기 이전의 일본내 단군신화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또
한 당시의 출판물은 학자층은 물론 다수의 일반인 독자를 대상으로 대량으로 유
통되었기 때문에, 그 속에 담긴 단군신화는 당시의 일본인이 조선을 이해하는 주
요한 매체로 작용했음에 틀림없다. 사회적 영향력을 고려할 때도 에도시대 출판
물 속의 단군신화는 연구의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겠다. 덧붙여 일제강점기로
이어지는 단군인식의 변화를 파악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본 논문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에도시대 출판물에 기록된 단군신화
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단군신화가 기록된 출판물 중에서 백과사전 『화한
삼재도회(和漢三才図会)』와 대중소설(조선군기9)) 『에혼조선정벌기(絵本朝鮮
征伐記)』를 중심으로 수록화의 내용과 출처 원전의 비교를 통해서 작자 및 편
자의 의도에 대해 고찰함으로써, 에도시대 단군신화에 대한 인식과 그 위상을 밝
히고자 한다. 특히 『화한삼재도회』는 에도시대를 대표하는 백과사전으로 그
안에는 신화와 전설 등 이야기(문학)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당대의 사상과 지식
을 정리하여 수록하고 있는 만큼, 에도시대의 보편적인 인식을 파악할 수 있는
절호의 소재라고 할 수 있겠다.
Ⅱ. 『화한삼재도회』
Ⅱ.1. 성립과 특징
?화한삼재도회』는 에도중기10) 오사카 大阪에 거주하는 의사 데라시마 료안
寺島良安이 편찬한 백과사전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명나라 왕기
(王圻)와 왕사의(王思義) 부자의 『삼재도회(三才圖會)』(17세기 초)를 본떠 만
들어졌으나, 책의 구성은 물론 내용 면에서도 『삼재도회』와 구별되는 고유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화한삼재도회』는 총 105권의 방대한 양을 자랑하며, 「천(天, 1-6권)」,
「인(人, 7-54권)」, 「지(地, 55-105권)」의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천문・지
리・동식물・역사 등 다양한 항목에 대한 해설을 그림과 함께 싣고 있는데, 가장
큰 특징으로는 당대 독자들의 편의를 중시하고 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그 한
예로 오스미 가즈오 大隅和雄는 「인」부에 「인륜(人倫)」의 조를 추가하여
9) 일본의 전쟁소설(軍記物語) 중에서 임진왜란을 다루고 있는 작품군.
10) 쇼토쿠 正徳(1711-1715)에서 교호 享保(1716-1735) 연간에 걸쳐 간행된 것으로 추
정된다. 데라시마 료안이 적은 서문은 1712년, 책의 출간은 1713년부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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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일본의 농민을 비롯하여 여러 직업의 직업풍속에 대한 사회적인 다양성을
반영하고 있으며, 수십 권의 분량을 「어업과 수렵도구 漁 具」를 비롯한 일상
생활과 밀접한 도구류를 삽화와 함께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는 점을 들고 있
다11). 『화한삼재도회』는 처음부터 판매를 전제로 한 상업출판으로 출판된 대
규모 백과사전이기 때문에, 이러한 독자 중심의 편찬 자세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렇듯 데라시마 료안은 『삼재도회』의 단순 모방에 머무르지 않고, 현실세
계를 이해하기 위한 생활지 및 민속지로서의 관점에서 방대한 양의 지식을 새롭
게 집대성했다. 명나라 이시진(李時珍)의 『본초강목(本草綱目)』의 본문 및 삽
화를 비롯해, 『삼재도회』에 수록되지 않은 다수의 서적을 적극적으로 인용하
고 있는 점도 이러한 편집의도를 잘 드러내고 있다.
데라시마 료안은 자료의 선택에 있어서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해설이 동시대의 일본과 중국의 학설에 의거하고 있다. 『화한
삼재도회』는 정확한 내용과 명확한 해설을 인정받아, 성립 이후부터 메이지 明
治시대에 이르기까지 널리 읽히며 「지(知)」의 기준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18
세기 중엽에는 조선통신사를 통해 조선에도 전해져서 당시 조선 지식인의 학문
과 의식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12). 오늘날에도 여전히 에도중기 일본의 학
문수준을 보여주는 조감도적 성격을 가진 텍스트로 평가받으며 중요하게 여겨지
고 있다. 에도시대의 출판물의 경우는 출처를 밝히지 않은 예가 다수 보이기도
하지만13), 대부분의 고전문헌은 인용한 서명(書名)을 본문에서 명확하게 밝히고
있기에 자료적으로도 높은 가치를 지닌다.
Ⅱ.2. 단군기사
이처럼 내용적인 면은 물론 사회적인 영향력에 있어서도 에도시대를 대표하
는 백과사전 『화한삼재도회』는 제64권「지리」조선국(朝鮮國)의 조(條)에서
조선의 역사와 지리를 소개하고 있다. 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1) 류사와 타케시,「일본의 ‘유서(類書)에서 백과사전에 이르기까지’-18세기 『와칸산사
이즈에(和漢三才圖會)』를 중심으로」, ?쌀・삶・문명연구?, 제2호, 2009, 130-131
쪽, 재인용.
12) 안대회,「18·19세기 조선의 百科全書派와 『和漢三才圖會』」,『大東文化硏究』,제69
집, 2010, 421쪽.
13) 中村幸彦,「和漢三才図会」,『国史大辞典』, 吉川弘文館,(http://japanknowledg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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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14)
【자료2】『화한삼재도회』제64권「지리」조선국(朝鮮國)
『동국통감(東國通鑑)』에 이르기를,
①최초에 이곳에는 군장(君長)이 없었다. 신인(神人)이 단목(檀木) 아래로 내
려온 것을 나라 사람들이 추대해 왕으로 삼았다. 이를 단군(檀君)이라 부르
고 나라 이름을 조선(朝鮮)이라 했다. 당요(唐堯) 때의 일이다. 처음 평양
(平壤)을 수도로 정했고, 뒤에 수도를 백악(白岳)으로 옮겼다. 상(商 은殷)
의 무정(武丁)8년이 되자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신(神)이 되었다.
②주(周)의 무왕(武王)은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여 기자는 평양에 도읍을
정하고, 백성들에게 예의(禮義)·밭에 나가 농사짓고 누에치며 田蠶·길쌈하
는 것織作을 가르쳤다.
③본래 마한(馬韓)·진한(辰韓)·변한(弁韓)이라 칭하며 이것을 삼한(三韓)이라
한다. 이는 즉 후세의 백제·고구려·신라이다.
④그 이후 고려의 왕건(王建)이 삼한을 통일하고, 이후 이성계가 다시 조선
국으로 이름을 고쳤다.
『양조평양록(両朝平壤録)』에 이르기를,
⑤조선은 북쪽은 여진에 인접하고, 서북은 압록강에 달하며, 동서 2천리, 남
북 4천리, 경사(京師)까지 3천5백리. 요동(k東)의 동남에 있고 3면은 바
다이다. 일본과 멀찍이 마주보고 있으며, 바다를 사이에 두고 부산이 조선
의 바닷길 입구이다. (이하 생략)
조선의 지도(【그림1】)가 먼저 제시되고, 그 뒤를 이어 단군부터 이성계의
14) 寺島良案,『和漢三才図会 9』, 島田勇雄ほか訳注, 東洋文庫, p. 238. (이하『화한삼재도
회』 同書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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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개국까지 한반도의 역사가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다. 생략한 뒷부분에는 조
선의 지리, 백제, 고구려, 신라, 임나국(任那國), 탐라국(耽羅國)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백제, 고구려, 신라는 간단한 지리적 정보만 제시하고 있는 반면, 임나
국에 대해서는 『일본서기』기사를 인용하며 고대일본과의 관련성을 설명하고
있으며, 탐라국의 경우는 『동국통감』을 인용해 삼성혈(三姓穴)신화를 소개하
고 있다. 『화한삼재도회』는 제13권「이국인물(異国人物)」에도 「조선(朝
鮮)」의 條를 싣고 있다. 그러나 역시 이 부분에서도 백제, 고구려, 신라, 후백제
의 시조는 이름만 간단히 언급될 뿐 건국신화는 보이지 않는다. 단군을 조선건국
의 시조로 소개하고 있는 점을 포함해 간략하지만 신화자체를 싣고 있는 점 또
한 『화한삼재도회』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화한삼재도회』의 단군기사를 검토해보도록 하자. 『화한삼재도
회』가 『삼재도회』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는 점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다.
책의 여러 곳에서 『삼재도회』의 본문 및 삽화를 인용하고 있으며, 「지리」조
선국條의 본문 앞에 삽입된 지도(【그림1】) 역시 『삼재도회』에 실린 지도를
간략하게 전사(傳寫)한 것이다.
『삼재도회』는 「인물12권」과 「지리13권」에 각각 조선條를 마련하고 설
명을 싣고 있으며, 『화한삼재도회』가 전사한 지도는 「지리13권」에 실려 있
다. 그러나 이 두 기사에는 단군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삼한이전의 역사에 대
해서는 기자를 시작(【자료2】의 ②에 해당)으로 한무제의 낙랑(樂浪) 및 한사
군(漢四郡) 설치에 관한 내용 만 싣고 있다. 『화한삼재도회』의 64권은『삼재
도회』의 내용 중에서 지도만 선별하여 수록하고 있는 것이다15).
『화한삼재도회』 64권 조선국條는 조선의 지리를 설명하는데 『양조평양
록』을 인용하고 있다(【자료2】의 ⑤에 해당). 『양조평양록』은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명나라의 제갈원성(諸葛元聲)이 귀국하여 1606년에 저술한 책이다. 이
책은 17세기 전기(前期)에 일본으로 전래되었으며, 이후 일본에서 출간된 임진
왜란 관련 문헌에서 그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16). 【표1】은 『양조평양록』과
『화한삼재도회』의 본문을 비교한 것으로, 『화한삼재도회』가 밑줄 친 할서
(割書) 부분을 제외한 『양조평양록』의 본문을 충실하게 인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5)『화한삼재도회』13권 이국인물 조선條에서는 『삼재도회』의 본문을 인용하며, 주의
무왕이 기자를 조선왕에 봉한 내용을 싣고 있다.
16) 김시덕,「한반도 고대사와 한일 관계사」,『근세 일본 고문헌의 삽화로 보는 7년 전쟁
그림이 된 임진왜란』, 학고재, 2014, 89-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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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1】
『양조평양록』17) 『화한삼재도회』18)
其国北隣女眞、西北至鴨綠江、
東西二千里、南北四千里、至京師三千
五百里。在k東之東南、
三面濱海、東独清下視十丈。
正與日本遥対、止隔一海、而釜山者朝
鮮之海口也
両朝平壤録云
朝鮮北隣女直19)、西北至鴨綠江、
東西二千里、南北四千里、至京師三千
五百里。在k東之東南、
三面濱海。
正與日本遥対、止隔一海、而釜山者朝
鮮之海口也。
【표1】의 내용은 『양조평양록』의 서두에 실려 있는데, 지리에 대한 설명
과 함께 한반도 역사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조선은 옛날 기자를 봉한 나라이다. 무왕이 처음으로 기자를 봉하였다. 8조
의 법 八條之約을 실시하여 나라에 음란함과 도둑질이 없었다20).
문장표현에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기자를 시작으로 한사군→신라・고구려・
백제의 삼국→고려→조선의 순으로 역사를 서술하고 있는 점은 『삼재도회』와
동일하다. 내용의 공통점으로부터 기자를 조선의 시조로 생각하는 당시 중국의
한반도역사 인식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화한삼재도회』는 『삼재도회』와
『양조평양록』의 일부를 충실하게 인용하면서도, 이들 문헌과는 상반되는 내
용, 즉 단군신화를 추가하여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화한삼재도회』의 단군기사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본문에서 출
처를 밝히고 있듯이 『동국통감』21)이다.
17) 諸葛元聲, 『兩朝平壤錄』(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http://ctext.org/, 이하 『양조평양
록』 同書 인용)
18) 寺島良安,『和漢三才図会 64』, 内藤書屋, 1890, 七ウ. (일본 국회도서관 디지털자료,
필자역, 이하 『화한삼재도회』원문은 同書 인용)
19) 여진(女眞). 『화한삼재도회』의 본문표기를 그대로 인용하였다.
20) 武王始封箕子。施八条之約。邑無淫盗。
21) 『동국통감』은 외기(外紀), 삼국기(三國紀), 신라기(新羅紀), 고려기(高麗紀)이 4부로
구성되며, 단군조선부터 삼한까지는 『동국통감 외기』에 수록되어 있다. 본 논문의 본
문에서는 『동국통감』으로 통일하여 표기하기로 한다.
에도시대 출판물 속 단군신화:『화한삼재도회』와 『에혼조선정벌기』를 중심으로 ․ 김 영 주, 이 시 준
17
【표2】
東國通鑑 外紀22) 和漢三才図会 地理 朝鮮国

(檀君朝鮮の條)
東方初無君長有神人降于檀木下國
人立為君
是為檀君國號朝鮮
是唐堯戊辰歲也初都平壤
後徙都白岳至商武丁八年乙未入阿
斯達山為神
当初無君長有神人降于檀木
下國人立為君
是為檀君國號朝鮮
是唐堯時也初都平壤
後徙都白岳至商武丁八年
入阿斯達山為神

(箕子朝鮮の條)
武王封于朝鮮都平壤
教其民以礼義田蠶織作
周武王封箕子於朝鮮都平壤教
其民以礼義田蠶織作也

(三韓の條)
權近曰・・・(中略)・・・馬韓之為百済無
疑矣・・・(中略)・・・辰韓之為新羅卞韓
之為高句麗亦無可疑23)
本名馬韓辰韓卞韓謂之三韓是即百
済高句麗新羅也
④ 既而高麗王建為三韓統一後至李成
桂復改名朝鮮国
【표2】는 『동국통감』과 『화한삼재도회』의 본문을 비교하여 정리한 것이
다. 일부 긴 문장을 요약하여 싣고 있지만, 『양조평양록』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동국통감』 또한 원문을 충실하게 인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데라시마 료안은 당대의 자료와 사상을 폭넓게 참고하며, 선택적 인용을 통해
서 『화한삼재도회』를 완성했다. 이러한 선택적 인용은 본문은 물론 삽화에서
도 보인다.
22) 서거정 외,『동국통감』, 세종대왕기념사업회 국역, 1996. (네이버 백과사전, 이하
『동국통감』 同書 인용)
23) 권근이 말하기를 삼한(三韓)에 대한 설(說)은 서로 다른 점이 있다. 그러나 조선왕 기준
(箕準)이 위만(衛滿)의 난을 피하여 바다를 건너 남쪽으로 가서 개국(開國)하여 마한(馬
韓)이라 불렀었는데, 백제(百濟) 온조(溫祚)가 즉위함에 이르러 드디어 그를 병합하였다.
지금 익주(益州)에는 고성(古城)이 있는데, 지금까지 사람들이 기준성(箕準城)이라고부르
고 있으므로 마한이 백제가 된 것은 의심할 것이 없다. 진한(辰韓)은 신라(新羅) 시조(始
祖) 혁거세(赫居世)가 일어난 곳으로 《신당서(新唐書)》에 이르기를, ‘변한(弁韓)은 낙랑
(樂浪) 땅에 있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평양(平壤)은 옛 한(漢)나라의 낙랑군(樂浪郡)
이다.’라고 하였으므로 진한이 신라가 되고, 변한이 고구려(高句麗)가 된 것도 의심할 것
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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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삼재도회』 【그림3】『화한삼재도회』
「인물12권」24) 13권「이국인물」
【그림2】는 『삼재도회』는 「인물12권」에 실린 ‘고려인의 그림’이며,
【그림3】은 『화한삼재도회』13권「이국인물」에 실린 ‘조선인의 그림’이다.
머리에 쓰고 있는 관(冠)의 형태가 다르지만, 인물의 옷차림과 자세의 유사성으
로부터 어렵지 않게 『삼재도회』의 그림을 조선시대의 복식(갓 모양)을 반영해
수정한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에도시대 다수 제작되어 유통된 조선통신사내조
도(朝鮮通信使來朝圖)등을 참고하여 데라시마 료안이 자체적으로 수정했을 수도
있으나, 선행하는 삽화(【그림4】)를 인용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24) 王圻・王思義,『三才圖會』(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http://ctext.org/)
에도시대 출판물 속 단군신화:『화한삼재도회』와 『에혼조선정벌기』를 중심으로 ․ 김 영 주, 이 시 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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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4】『훈몽도휘』25)
에도시대에는 다양한 종류의 사전류가 발간되었으며, 『화한삼재도회』 이전
에도 이미 사전과 지리서는 존재했다. 유학자 나카무라 데키사이 中村惕斎가
1666년(寛文6년)에 간행한 『훈몽도휘(訓蒙図彙)』는 『화한삼재도회』보다 한
발 앞서 『삼재도회』의 영향을 받아 성립된 삽화가 들어간 일본 최초의 사전이
다. 『훈몽도휘』의 권4「인물」에서는 다양한 신분과 국적의 사람들을 그림과
간단한 설명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그림4】는 권4「인물」에 수록된 조선의
기사이다.
이와 같은 본문과 삽화에 나타난 인용양상을 통해 추정할 수 있는 『화한삼재
도회』의 자료 선택 기준은 정확성이다. 즉 당대의 보편적인 지식과 부합하는 자
료를 선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자료선택의 기준을 고려하면, 데라시
마 료안이 단군신화를 수록한 배경으로 단군신화의 확산을 상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단군신화의 인지도가 높아진 원인의 하나로 『화한삼재도회』가 인용한
『동국통감』이 1667년 교토에서 출판된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25) 中村惕斎,『訓蒙図彙』, 券4, 山形屋, 1666, 20ウ (일본 국회도서관 디지털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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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에도시대의 『동국통감』
『동국통감』은 서거정(徐居正)등이 왕명을 받아 편찬한 역사서로, 단군조선
부터 고려 말까지 편년체로 기술된 역사서이다. 임진왜란 기간 중에 일본으로 전
해진 것으로 추정되며, 간분 寛文 7년(1667) 11월 교토의 쇼하쿠도 松柏堂에서
출판된 이후에 증간을 거듭하며 조선의 역사서로 이용되었다.
이마니시 류가 논문에서 지적하고 있듯이(【자료1】참조) 『동국통감』은 초
기의 대표적인 단군관련 기록이다. 하야시 가호 林鵞峰가 출판에 이르게 된 경위
와 의의 등을 적은 서문을 덧붙이고 있지만, 『동국통감』의 본문은 내용의 가감
없이 원본 그대로 출판되었다. 조선의 역사관에 입각해 편찬된 조선의 공식적인
역사서가 일본에서 대량으로 출판되어 일본인들에게 읽힌 셈이다. 에도시대 목
판을 사용한 인쇄는 약 2-3천부를 찍어낼 수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26).
『동국통감』도 대량으로 출판되어 판매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전국의 도
서관에서 1667년도 초판본 松柏堂本 『동국통감』 총 15부를 확인했다는 니시
나카 겐지 西中硏二의 보고27)도 이를 뒷받침한다.
하야시 가호의 서문은 당시의 『동국통감』에 대해 알 수 있는 좋은 자료이
다. 하야시 가호의 서문을 단서로 『동국통감』과 수록 내용에 대한 당대의 인식
을 알아보도록 하겠다.
국가(조선:역주) 또한 대대로 그 국사를 기록했다. 그 자세한 내용을 보려한
다면 동국통감만한 것이 없다. 위로는 단군부터 아래는 왕씨에 이르기까지 총
합이 56권. 그 치란흥폐(治亂興廃)를 한눈에 알 수 있다. 내(하야시 가호:역주)
가 어렸을 때, 이 책이 우리나라(일본:역주)에 전해져 존재한다는 것을 들었지
만 아직 직접 보지 못했다. 이에 계미년(癸未 1643) 이것을 조선의 박진사(朴
進士)에게 물었다. 답하여 말하기를 「지금은 없다. 아마 임진왜란 때 없어진
것이 아닐까」라고 했다. 나는 이것을 심히 유감스럽게 여겼다.28)
일본으로 전해진 『동국통감』이 조선의 역사서 중에서도 높게 평가되었으며,
좀처럼 손에 넣기 어려운 귀한 서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야시 가호의 서문에
의하면 『동국통감』의 출판을 주도한 사람은 미토번 水戸藩의 2대 번주(藩主)
였던 도쿠가와 미쓰쿠니 徳川光圀였다. 도쿠가와 미쓰쿠니는 고산케 御三家, 다
26) 長友千代治,『江戸時代の図書流通』, 思文閣出版, 2002, pp. 4-14.
27) 西中研二,「林羅山と『東國通艦』について : 林羅山の『年譜』にある『東國史記』は
『三國史記』か『東國通鑑』か」,『国際日本研究』, 第5号, 2013, p. 43.
28)『東国通鑑』, 出雲寺松柏堂, 1883 (일본 국회도서관 디지털자료, 필자역, 이하 同書 인용)
에도시대 출판물 속 단군신화:『화한삼재도회』와 『에혼조선정벌기』를 중심으로 ․ 김 영 주, 이 시 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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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말해 도쿠가와 쇼군가 將軍家의 가까운 친인척으로 막부와도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인물이다. 미쓰쿠니는 『동국통감』을 얻기 위해 노력했으며, 책을 손에
넣자 「희귀한 책을 손에 넣을 것을 기뻐하고」, 「이 책을 널리 세상에 알리면,
양국(조선과 일본:역주)에 좋은 선물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출판을 명했다. 미
쓰쿠니는 또한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가점(加點), 즉 한문에 훈점(訓點)
을 더하여 읽는 순서를 표시해 출판할 것을 지시했다. 그 결과 가점이 더해진
『동국통감』이 1667년 교토 쇼하쿠도에서 출판되었고, 이는 이후 『동국통
감』이 널리 읽히는데 크게 기여했을 것이다.
서문에서 알 수 있듯이 하야시 가호는 『동국통감』를 대단히 높게 평가하고
있다. 이는 곧 『동국통감』의 내용에 대한 평가임과 동시에 『동국통감』의 역
사인식에 대한 인정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실제로 길지 않은 서문에는 한반도의
고대사가 수차례 언급되고 있는데, 하야시 가호는 이 모두에서 단군을 시조로
들고 있다. 『동국통감』이 조선사를 이해하는 주요 자료로 자리를 잡으며 단군
신화도 자연스럽게 확산되었을 것이다.
『동국통감』의 영향은 이후 여러 문헌에서 확인된다. 히젠 히라도 肥前平戸
의 번주였던 마쓰라 기요시 松浦清는 1806년 은퇴 후, 에도에서 학문과 풍류의
생활을 보내면서 총 278편에 달하는 수필집 『고시야화 甲子夜話』을 남겼다.
마쓰라 기요시는 『고시야화』의 권100에서 단군과 스사노오의 일체설에 대해
논하면서 『동국통감』의 단군조선條를 자료로 제시하고 있다. 이때 『화한삼재
도회』에 수록되지 않은 부분(【자료3】)이 포함된 『동국통감』 단군조선 條의
전문(全文)을 인용하고 있어, 『동국통감』을 직접 이용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
다.
【자료3】『동국통감 외기』단군조선條
[신등은 살펴보건대,]
고기(古紀)에 이르기를, ‘단군이 요(堯)와 더불어 무진년(戊辰年)에 함께 즉
위하여, 우(虞)나라와 하(夏)나라를 지나 상(商)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乙未)
에 이르러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신(神)이 되었는데, 1천 48년의 수명
을 누렸다.’고 하였으니, 이 말은 의심스럽습니다. 지금 살펴보건대, 요 임금이
즉위한 것은 상원 갑자(上元甲子)인 갑진년(甲辰年 서기 전 2357)에 있었는데,
단군의 즉위가 그 후 25년 무진년에 있었다면 ‘요와 더불어 함께 즉위하였다’
라고 한 것은 잘못입니다. 당(唐)나라와 우나라로부터 하나라와 상나라에 이르
러서는 세상 인정이 점점 야박해져서 인군(人君)이 나라를 오래도록 향유한 자
가 5,60년에 지나지 않았는데, 어찌 단군만이 홀로 1천 48년의 수명으로 한 나
라를 향유할 수 있었단 말입니까? 그 말이 꾸며낸 것임을 알겠습니다. 전배(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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輩)가 이르기를, ‘그 1천 48년이라고 한 것은 곧 단씨(檀氏)가 대(代)로 전하여
지나온 햇수이고, 단군의 수명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이 말이 이치가 있는
것입니다. 근세(近世)에 권근(權近)이 천정(天庭, 명나라)에 들어가 뵈니,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가 권근에게 단군을 시제(詩題)로 하여 시(詩)를 지으라고
명하였는데, 권근의 시에 이르기를, ‘세대(世代)를 전한 것은 얼마인지 모르나
역년(歷年)은 일찍이 천년(千年)을 지났다.[傳世不知幾 歷年曾過千]’라고 하니,
황제가 보고 옳다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 의논에서도 권근의 말한 것이 옳다고
하였으므로, 우선 보존하여 뒷날의 참고에 대비하도록 합니다.”
【자료3】은 『동국통감』에 수록된 단군에 대한 조선학자들의 평이다. 이
부분은 『화한삼재도회』에는 수록되지 않았지만, 단군의 수명(밑줄)에 대한 해
석은 이어서 살펴볼 『에혼조선정벌기』 등에서 유사한 내용이 확인된다.
Ⅳ. 『에혼조선정벌기』
『에혼조선정벌기』는 에도시대에 대중적 인기를 끌었던 전쟁소설(軍記物語)
중에서도 임진왜란을 소재로 하고 있는 이른바 조선군기(朝鮮軍記) 중 하나이다.
김시덕이 「기존의 임진왜란 문헌에서 다루지 않던 한반도의 고대사를 19세기
중기의 완숙한 화법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29)」고 평가하고
있듯이, 신화를 포함한 고대사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 점이 큰 특징이다.
당시 대부분의 조선군기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豊臣秀吉 전기의 일부로, 임진왜
란관련 내용을 중심으로 서술되었기 때문이다. 17세기 전기, 임진왜란에 관한
기록인 명나라의 『양조평양록』와 『무비지(武備志)』가 일본에 전래되었다.
책의 서두에 한반도의 역사와 지리를 소개하고 있는 이들 서적의 영향을 받아서
이후 일본에서도 유사한 구성의 서적들이 나타났는데, 『에혼조선정벌기』도 그
중 하나이다.
총 8권 중 1-2권에서 조선의 지리와 고대사를 기술하고 있는데, 【자료4】의
목차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과 관련된 내용 뿐 아니라 한반도 고대국가의 건국
과 멸망에 대한 내용을 충실하게 싣고 있다. 이 부분은 소설 전체의 10분의 1이
넘는 분량을 차지하고 있으며, 유화가 압록강 강가에서 금와왕을 만나는 장면 및
고구려의 주몽이 비류수를 건너는 장면 등은 삽화와 함께 실려 있다.
29) 김시덕, 같은 책, 352쪽.
에도시대 출판물 속 단군신화:『화한삼재도회』와 『에혼조선정벌기』를 중심으로 ․ 김 영 주, 이 시 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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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4】『에혼조선정벌기』목차
제1권 巻之一
一 조선국의 도회 및 지리의 각목 朝鮮国の図会并地理の各目
一 조선국의 시작 朝鮮国初の事
一 위만 조선의 왕이 된 일 衛滿朝鮮の王となる事
一 삼한 고금 분별이 있던 일 三韓古今→別有事
제2권 巻之二
一 대략적인 조선의 지방 朝鮮地方大略の事
一 일본이 삼한을 처음 공격한 일 日本より三韓を初て攻る事
一 일본 대대로 조선을 공격한 일 日本代々朝鮮を攻る事
一 신라국흥망 및 조선을 계림이라 부른 일 新羅国興廃并朝鮮鶏林と号す事
一 고구려의 시흥 高句麗始興の事
一 백제국 시조 나라를 일으킨 일 百済国始祖興の事
一 당과 신라 두 나라의 군사 백제를 멸망시킨 일 唐新羅二兵百済を兦事
一 일본세력 백제를 구한 일 日本勢百済を救ふ事
一 고구려의 멸망 高句麗滅兦の事
一 신라 멸망 및 고려시조 왕건 新羅滅兦并高麗始祖王建の事
一 고려 성쇠 및 이성계 왕위를 훔친 일 高麗盛衰并李成桂位を竊む事30)
단군신화를 소개하고 있는 부분은 제1권「조선국의 시작」으로, 본문은 다음
과 같다.
【자료4】조선국의 시작
일본의 건너편 서쪽바다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국토가 있다. 이것을 이름
하여 조선국이라 부른다. 즉 중국의 동쪽해변에 해당하며, 예로부터 이르는 삼
한(三韓)의 땅이 이 곳이다. 그 옛날은 어떤 사람이, 어느 시대에 개벽한 나라
인지 물으니, 동이(東夷)의 하나로 풀을 엮어서 비와 이슬을 피하고, 구멍을 파
서 추위와 더위를 피했다. 군장(君長)의 차별도 없고, 들짐승을 죽여 식량으로
삼으며 풀과 잎사귀를 엮어 옷으로 입고 꿈틀거리는 무지한 민중이라 들었다.
이때 신이 모습을 바꾼(神化) 남자 한 사람이 출생했다. 이 나라의 사람들을
가르쳐 집을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고, 띠 茅를 베어 지붕을 얹고 철을 제련해
성문을 세워 성읍을 만들기 시작하니, 산에서 채집하고 물속에서 찾고 들의 풀
을 뽑아 처음으로 집에 돌아갔다. 이때부터 이 나라의 사람들은 인간의 지혜
30) 히로시마대학 広島大学 도서관 소장본『에혼조선정벌기 絵本朝鮮征伐記』 (일본 일문
학연구자료관 마이크로필름, 필자역, 이하 同書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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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智 를 깨닫고 토착안신(土着安身)을 기뻐하며 이곳으로 한 나라의 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이 신인(神人)을 존경하고 이 나라의 군주 君 로 세워 우러렀다.
이 사람은 신령한 존재가 모습을 바꾼 (變化) 사람이었기에 성씨도 없었다.
이에 신인이 처음으로 내려온 곳을 보자 단목(檀木) 아래였기에, 그 나무에서
이름을 따서 단군(檀君)이라 높여 칭하고, 나라를 처음으로 조선(朝鮮)이라 이
름 붙였다. 이 때 중국 당 요(唐堯) 재위 무진(戊辰)년이었다.
처음에는 평양 지방에 도읍을 정하고 이후 도읍을 백악으로 옮겼다. 신군(神
君)은 그 뒤에 이 나라의 백성들을 모두 가르쳐 인도하는 것이 끝나자, 아사달
산 속으로 들어가 신(神)이 되었다. a 그 뒤로 단씨(檀氏)의 자손 나라를 이어
받아 다스리기를 1148년, 상(商)의 무정(武丁) 년에 이르렀다.
이 뒤로 다시 은의 기자가 주의 무왕에게 봉해서 처음으로 이 나라에 올 때
까지 많은 시간이 지났는데, b 누가 그 나라를 물려받아 전하고, 얼마나 시간
이 지났는지 정확한 사설(史說)이 없다. 그 나라 사람의 논(論)이라 해도 의심
스러울 뿐이다.
전체적으로 『동국통감』의 내용(밑줄)에 의거하면서도 이야기의 살을 붙여
소설로서의 재미를 더하고 있다. 점선 a 는 단군의 자손이 나라를 다스렸다는
【자료3】의 밑줄 친 부분과 공통되는 내용이며, b 는 『에혼조선정벌기』 저
자의 의견에 해당한다. 『에혼조선정벌기』는 신공황후(神功皇后)의 삼한원정
(【자료4】일본이 삼한을 처음 공격한 일 日本より三韓を初て攻る事)처럼 일본
측 기록에 의거한 일본의 조선침략과 정복(승리)의 내용을 극적이고 과장된 문
체로 서술하고 있다. 조선과의 전쟁을 다루고 있는 장르적 특징도 반영되어 있겠
지만 전체적으로 강렬한 내셔널리즘과 한반도 멸시관이 노골적으로 담겨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31). b 에는 저자의 이러한 자세가 반영되어 있다.
『에혼조선정벌기』는 1853년 오사카에서 처음 출간된 이후, 오사카는 물론
나고야와 에도(현재의 도쿄)에서도 출간되며 널리 읽혔다. 1887년에는 에도의
출판사 류코도 ·港堂에서 야마모토 쓰네지로 山本常次郎에 의해 상하 2권의
『에혼조선정벌기(1887)』32)가 간행되었다. 이 책은 총 48초 丁(각권 24초) 중
삽화가 48면(面)을 차지한다. 즉 모든 페이지가 삽화로 구성되어, 그림을 중심으
로 여백에 적힌 글을 읽으며 감상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본문내용은 물론 삽
화표현의 유사성으로부터 『에혼조선정벌기』의 일부를 삽화를 중심으로 전사
(傳寫)하여 엮은 책임을 알 수 있다. 【그림5】는 『에혼조선정벌기(1887)』 본
31) 김시덕, 같은 책, 352쪽.
32) 본 논문에서는 『에혼조선정벌기』와의 구분을 위해서 편의상 『에혼조선정벌기
(1887)』로 통칭하기로 한다.
에도시대 출판물 속 단군신화:『화한삼재도회』와 『에혼조선정벌기』를 중심으로 ․ 김 영 주, 이 시 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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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 첫 번째 페이지로, 『에혼조선정벌기』(【그림7】)가 원본임을 알 수 있다.
【그림5】33) 【그림6】
【그림7】34)
【그림7】은 백제멸망 후, 부흥운동을 위해서 귀국하는 백제왕자의 출항 장
면으로, 『일본서기』 덴치덴노 天智天皇 條에 수록된 백제왕자 풍장(豊璋)의 기
사에서 소재를 가져온 것이다. 【그림7】의 왼쪽상단에 「백제국의 왕자가 자신
의 나라로 돌아가는 장면. 덴치덴노로부터 활 10만, 비단 500근, 베 천단, 가죽
천장, 쌀 삼천석을 받았다」고 적혀있다.
그런데 동일한 장면을 옮겨 그린 『에혼조선정벌기(1887)』의 삽화(【그림
5】)에는 같은 삽화에 전혀 무관한 단군신화가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일본의 건너편 서쪽바다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국토가 있다. 이것을 이름
하여 조선이라 부른다. 즉 중국의 동쪽해변으로 예로부터 이르는 삼한(三韓)의
땅이 이 곳이다. 과거 개벽창업(開闢創業)의 사람은 단군이라하고, 나라를 조선
33) 山本常次郎,『絵本朝鮮征伐記』, ·港堂, 1887, 4ウ-6オ (일본국회도서관 소장본, 이
하 同書 인용)
34) 김시덕, 같은 책,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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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 칭했다. 이 때 중국은 唐堯의 재위, 戊辰년이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평양
을 수도로 정했고, 뒤에 수도를 백악으로 옮겼다. 이후 단군은 아사달산에 들어
가 신변(神變)을 나타내 보라색구름 속으로 들어갔다. 그 이후, 단씨의 자손이
나라를 이어받아 전하기를 1484년. 商의 武丁 대에 이르렀다고 한다.
『에혼조선정벌기』에 수록된 단군신화와 거의 동일한 내용으로, 본문은 다
음 페이지의 【그림6】으로 이어진다. 【그림6】은 본래 조선의 사절을 맞이하
는 장면이지만, 삽화에 기록된 본문은 기자조선에 관한 내용이다. 그 뒤에 이어
지는 본문은 신공황후에 관한 내용으로 이 또한 삽화와는 무관하다.
『에혼조선정벌기(1887)』는 제한된 매수로 편찬된 요약본으로, 선택된 삽화
와 본문으로 제작되었을 것이다. 이런 『에혼조선정벌기(1887)』가 단군신화를
선택하여 수록한 이유로 당시 단군신화가 독자의 관심을 끄는 소재였거나 또는
조선에 대한 기본지식으로 인식되었음을 추정해볼 수 있다.
Ⅴ. 결론
지금까지 『화한삼재도회』와 『에혼조선정벌기』 그리고 일본에서 출판된
『동국통감』을 중심으로 에도시대 출판물에 수록된 단군신화에 대해 살펴보았
다. 그 결과 에도시대 일본에서는 단군신화가 한반도 최초의 건국신화라는 인식
이 확산되었으며 사회적으로 자리를 잡아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단군신화가 확산된 원인 중 하나로 일본에서 이루어진 『동국통감』의 출판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단군의 신성성에 대한 논란은 차치( 置)하더라도, 에도시대 일본에서 단군을
한반도의 시조로 이해하고 출판물로 대표되는 기록매체에도 반영하고 있는 것은
단군신화의 전개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특히 『삼재도회』를 비롯해
『양조평양록』과 『무비지』처럼 일본에 전해져 영향을 미친 중국의 서적들이,
기자를 한반도 역사의 시작으로 설명하던 것과 비교하면, 그 특징은 더욱 두드러
진다. 이러한 차이를 낳은 주요 원인으로는 에도시대에 융성했던 출판문화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본 논문은 에도시대 출판물 속 단군신화의 소개와 출처분석을
통해 에도시대 단군신화의 확산양상을 밝히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신화내용
에 대한 구체적인 고찰은 보충된 자료를 바탕으로 향후의 과제로 이어가고자 한
다.
에도시대 출판물 속 단군신화:『화한삼재도회』와 『에혼조선정벌기』를 중심으로 ․ 김 영 주, 이 시 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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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김시덕,「한반도 고대사와 한일 관계사」,『근세 일본 고문헌의 삽화로 보는 7
년 전쟁 그림이 된 임진왜란』, 학고재, 2014, 25・89-97・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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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산사이즈에(和漢三才図会)』를 중심으로」, ?쌀・삶・문명연구?, 제2
호, 2009, 93-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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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gun Myth in the Edo-period Publications
: Focusing on WakanSansaizue and EhonChosenSeibatsuki
Foreign Literature Studies, 63, 9-30.
외국문학연구 제63호
28
Abstract
Dangun myth was introduced to Japan in the Edo period at the first time.
During the Edo Period, publications culture did prosperity by development of
a printing technique. Dangun myth was included in publications such as
WakanSansaizue and EhonChosenSeibatsuki. This fact has the important
significance. Because we can confirm the state of the Dangun myth before
the influence of the colonialistic through these data. At the same time,
Dangun myth contained in publications would have been an important
source of information about Korea, because these publications were
distributed in mass to target a number of public as well as scholars.
Especially WakanSansaizue is a perfect material for understanding the
universal recognition of the era.
This paper will examine the myth about Dangun in the Edo Period
publications in this respect. This paper is considered about the meaning of
Dangun myth in the Edo Period, focusing on the analyzing the story and
investigating the intent of the writter.
[Edo period, Dangun Mythology, Dongguktonggam, WakanSansaiz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