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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정치

북한에서의 5·18과 광주에 대한 인식-전미영/동국대

. 머리말
2010년 5월 18일자 ?로동신문?은 “광주 인민봉기 30돐 기념 평양
시보고대회” 개최를 소개하며 광주민주화운동을 “미제와 그 앞잡이
들의 식민지파쇼동치를 반대하고 사회의 자주화와 민주화, 나라의 통
일을 이룩하기 위하여 일떠선 남조선 인민들의 정의의 반미반파쇼 민
주항쟁”이라고 규정하며 “미제침략군을 몰아내고 미국의 지배와 예
속에 반대하며 북침전쟁책동을 분쇄하기 위한 반미반전투쟁의 불길
을 세차게 지펴 올려야 할 것”이라고 호소했다. 북한의 ?로동신문?은
1980년 이후 매년 5월 18일이면 사설 또는 논설을 통해 5·18의 의미
를 평가하고 남한당국을 비판해왔다.
5·18민주화운동을 북한사회는 어떻게 인식하고 있으며, 어떤 방식으
로 접근하고 있는가? 그들에게 5·18은 어떤 의미로 이해되고 있는가?
5·18민주화운동에 관한 북한의 인식을 파악하는 작업은 매우 흥미
로운 연구주제이지만 또한 다소 어렵고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북한에서의 5·18과 광주에 대한 인식 53


없다. 그것은 먼저, 우리사회의 반정부, 민주화 투쟁과정에서 항상 따
라붙던 친북·좌파의 낙인, 더 나아가서는 우리 사회의 ‘레드 콤플렉
스’를 자극하는 ‘북한개입설’ 등으로 인해 민주화 투쟁과정을 북한과
연관시켜 접근한다는 것은 이미 어떤 정치적·이념적 목적성이 상정되
어 있는 듯한 선입견을 갖게 한다는 점이다. 또한 그 결과가 이념적
대립각의 어떤 지점에 우호적이거나, 또는 부정적인 결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기도 하다.
또 다른 문제는 연구의 방법론적인 문제로서 북한의 공식담론을 통
해 무엇을 규명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선전선동성을 일차적
목적으로 하고 있는 북한의 정치언어적 특성으로 인해 북한의 공식담
론의 진의에 접근하는 일은 상당한 어려움을 동반하는 일이기도 하다.
특히 북한당국이 남한정권의 정통성 부정이라는 측면에서 보다 더 목
적의식적으로 접근하는 민주화투쟁에 관한 비판에서는 그러한 어려
움이 배가된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현 시점에서 5·18에 대한 북한의
인식을 파악하려는 노력은 또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5·18민중항쟁
은 이미 우리 현대사의 한 ‘역사’, 한국 민주화의 ‘결정적인 획이자
분수령의 위치’를 차지하는 역사적 기점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 민주화의 기점인 5·18민주화운동이 북한사회에서 어떻게 이해되
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은 북한이 한국 현대사에 어떻게 접근하고,
관계 맺기를 시도하는지를 이해하는 하나의 단초가 될 수 있기 때문이
다. 특히 5·18민주화운동 30주년을 맞는 현 시점에서 5·18을 둘러싼
북한의 평가를 객관적으로 검토하는 작업은 다소 불편할지라도 학술
적 차원에서 해명되어야 할 과제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따라 본 논문에서는 북한의 5·18 인식을 가능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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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적이고 실증적으로 접근하고자 한다. 본 논문에서는 분석과정에
서의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다양한 양식의 북한의 공식담론을 검토
하고자 한다. 본 논문에서는 북한의 대표적 언론매체인 ?로동신문?과
북한의 대표적인 전문학술지인 ?김일성종합대학 학보?, 그리고 대남
연구가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대표적 정책 저널인 ?남조선문제?
와 ?근로자?에 대한 실증적 분석을 통해 북한사회에서의 5·18의 평가
와 이해를 파악하고, 그것이 북한의 대남인식과 대남전략에 갖는 정치
적 함의를 규명하고자 한다. 북한의 5·18 담론의 분석에 앞서 다음
장에서는 북한의 정치담론이 갖는 특수성과 북한의 대남언론보도의
성격을 살펴봄으로써 북한의 공식문헌 분석에서의 한계점을 인식하
는 동시에 북한의 5·18 담론의 전개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한다.


2. 북한에서의 ‘남조선’ 담론과 언론보도의 특징
일반적으로 정치담론이란 정치지도부의 정치적 권력과 그 행사방
식을 합리화하고 대중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목적에서 구사된다.
따라서 정치담론은 강한 이데올로기성과 정치지도자의 정치적 목적
의식성이 내재되어 있다. 그러나 푸코의 견해에서 드러나듯이 담론의
장은 현실의 장과 일정한 상호관계에 놓여있지만 양자가 일치하는 것
은 아니다.1)
더욱이 전체주의적 권위주의 담론이 지배하는 북한의 경우 그 불일
치성은 더욱 심화된다고 볼 수 있다. 이 경우 담론의 장은 현실에 대한


1) 이정우, ?담론의 공간-주체철학에서 담론학으로?(서울: 민음사, 1994), 164~
1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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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질서의 반영이 아니라 현실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한다.2)
특히 ‘선전선동’과 ‘인민대중에 대한 설복’을 목적으로 발전되어 온
북한의 정치담론에는 정권지도부의 현실인식과 희망사항이 혼재되어
있으며, 진술의 객관성을 보장하기 힘든 경우가 종종 발견되기도 한다.
북한에서 생산되는 ‘남조선’ 담론은 사실적 차원과 조작적 차원이
중첩적으로 작용한다. 즉, 북한당국이 남한사회에 대해 인식하는 사실
적 차원과 북한주민들에게 남한사회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주입하
기 위한 조작적 차원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3) 북한당국이 그렇게 믿고
있는, 그리고 북한당국이 그렇게 믿고 싶어 하는 남한사회에 대한 주
관적 판단이 언론 및 대중매체를 통해 지속적으로 주민들에게 전달됨
으로써 북한당국은 그들 정책의 정당성을 표명한다.
북한 정치담론의 또 다른 특성은 북한사회에서 정치담론이 지도자
를 정점으로 한 일원적 경로를 통해 생산되고 사회에 확산, 재생산
과정을 거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담론은 그것이 형성되는 제도와
사회적 실천의 종류에 의해, 그리고 말하는 사람들과 그들이 말하는
상대의 위치에 따라 모습을 달리한다. 즉, 담론의 영역은 동질적이지
않다.
그러나 북한의 경우, 수령의 유일적 지도체계 구축은 언어의 독점
을 통해 가능할 수 있었으며 이후 북한사회에서 담론의 영역에서의
의미들 간의 갈등과 투쟁의 동학은 원천적으로 배제되었다. 북한에서
2) 전미영, “북한 지배담론의 형성과 전개에 관한 연구-사회주의‧민족주의를 중
심으로,” ?학국정치학회보?, 35집 1호(2001), 234쪽.
3) 최완규·이수훈은 북한의 대남인식을 사실적 차원과 조작적 차원으로 구별하고
있는데, 전자는 북한당국이 믿는 사실을, 후자는 북한 당국이 기대하는 바를
의미한다. 최완규·이수훈, “김정일정권의 통일정책: 지속성과 변화,” ?통일문제
연구?, 상반호(2001), 170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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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령은 ‘모든 사상, 이론, 정책을 제기할 수 있는 유일한 이론가’로
자기 매김 되어 있으며 지식인이란 당과 국가의 공식담론의 ‘방조자’,
‘조력자’, ‘해석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언론의 목적 또한 “당의
방침과 정책, 당원들의 투쟁 임무를 일상적으로 해설함으로써 당원을
교양하는 것”을 목적으로 함에 따라 북한사회에서 당과 국가가 생산
해낸 공식담론 이외의 대항담론이 존재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북한사회에서 언론매체는 물론이거니와 지식사회
내부에서도 당의 방침에 배치되거나 또는 무관한 개인적인 글쓰기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북한사회에서 공식적인 매체를 통해
발언된 ‘말’들과 문자화된 ‘글’들은 바로 당과 국가, 더 엄격히는 지도
자의 의사를 대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4)
북한의 언론 매체는 대내외적 선전선동적 기능을 수행한다. 북한당
국이 로동신문의 목적을 “당의 방침과 정책, 당원들의 투쟁 임무를
일상적으로 해설함으로써 당원들을 교양하는 것”에 두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북한정권과 당의 입장을 가장 권위 있게 나타내주는 매체
라고 할 수 있다. 다원주의 사회의 언론보도와는 달리 북한 언론보도
의 목적은 사실 보도보다는 당의 관점을 직간접적으로 설득하는 데
주목적을 두고 있다.
특히 북한의 언론보도에서 다루어지는 대남기사 및 ‘남조선’담론은
남한사회의 부정적 이미지 극대화를 통해 주민들에 대한 비판적 대남
인식을 고양시키는 한편 북한체제의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에
따라 기획된다.
4) 전미영, ?김정일정권의 정세인식-선군담론분석을 중심으로?(통일연구원, 2006),
7쪽.
북한에서의 5·18과 광주에 대한 인식 57
북한당국의 대남인식은 정치적으로는 남한정권의 정통성을 원천적
으로 부정하는 것으로 일관되어 왔다. 즉, 남한정부와 남한정치지도자
를 하나의 국가체제 또는 정치지도자로 인정하지 않으며 남한정권을
미국의 예속정권으로 인식한다. 남한사회의 경제성장과 국가경쟁력
상승에 따라 빈곤에 관한 이미지작업은 사라졌지만 퇴폐적 문화, 부패
한 사회의 이미지화 작업을 통해 여전히 남한사회의 정통성을 부정하
고 있다.
북한의 대남언론보도 형태를 보면 남한사회의 소요·시위, 민주화·
반체제운동 등 사회적 갈등상황과 빈곤, 사회적 부패 등 남한사회의
부정적 측면을 부각시키는 데 집중되어 왔다. 일반적으로 북한의 언론
보도에서 남한문제는 매우 비판적으로 기술되며, 사실과 왜곡이 혼재
되어 있다. 주제별로 보더라도 남한사회의 시위, 파업, 반체제운동 등
사회의 갈등요인에 관한 기사가 50%를 상회한다.5) 형식적 측면에서
보면, 북한사회에서 남한 이슈에 대한 보도방식은 격렬한 비판과 선동
성을 그 특징으로 한다. 따라서 보도의 객관적 사실성보다는 정치적
의도에 의한 각색·윤색의 가능성이 다른 분야보다도 높다고 할 수 있다.
북한사회의 정치담론과 북한의 대남언론보도 형태의 이러한 특성
을 염두에 둘 때 북한의 언론보도나 문헌에 대한 보다 세심한 접근의
필요성을 요구한다. 즉, 북한의 ‘남조선’ 담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담론의 표면적 내용뿐만 아니라 당시의 사회적·정치적 맥락과의 관계
에서 그 내적 논리와 정치적 의도를 파악하기 위한 노력이 겸비되어야
한다.
5) 고유환 엮음, ?로동신문을 통해 본 북한 변화?(서울: 선인, 2006), 2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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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5/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6/1 2
5·18 관련 기사 18 15 12 8 15 14 13 17 14 16 10 6 10 13 5 2
1·2면 게재 기사 5 5 3 1 5 4 3 3 2 1 - 1* - 1 1 -
날짜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합
5·18 관련 기사 10 12 9 8 8 13 3 - 7 10 8 9 6 10 7 308
1·2면 게재 기사 - - 1 1 - - - - - 1 - - - 1 - 39
* 표시가 된 기사는 “사설” 기사임.
기사의 이슈별 분류 기사수(백분율)
시위·항쟁 상황 보도 146(47.40%)
해외반응 보도 125(40.58%)
북한사회 반응 보도 17(5.51%)
논평기사 14(4.54%)
기타 6(1.94%)
합계 308(100%)
<표 2> ?로동신문?의 5·18 기사 이슈별 게재 빈도
<표 1> 5·18 당시 ������로동신문?의 5·18 관련 기사 게재 빈도
3. 북한의 언론보도를 통해 본 5·18
1) ?로동신문?의 5·18 보도 양상
1980년 5·18을 전후하여 북한 ?로동신문?의 대남기사가 급증하였
다. 특히 북한의 로동신문에서 대남기사가 5면에 게재되는 것이 일반
적이었던 데에 비해 1, 2면기사에 집중 게재되는 등 북한당국이 당시
남한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 관심을 보였음을 잘 드러낸다. 5·18을 전
후한 한 달 동안의 로동신문의 게재 빈도를 보면 <표 1>과 같다.
5·18 이후 한 달 간의 로동신문에 게재된 5·18 관련 기사의 내
북한에서의 5·18과 광주에 대한 인식 59
용은 크게 다음의 유형으로 대별된다. 그 현황을 보면 <표 2>와
같다.
5·18 이후 북한의 로동신문의 보도 양식을 검토해 본 결과, 시위·항
쟁에 관한 상황보도가 가장 높은 비중을 보인다. 다음으로는 5·18에
관한 해외 언론 및 단체의 비판여론 관련 보도 기사가 매우 높은 비중
을 차지하는데, 5·18에 대한 북한당국의 논평기사는 4.54%에 그치고
있다는 사실과 큰 대조를 이룬다. 이는 당시 5·18에 대한 해외의 비판
적 여론 보도를 통해 남한당국에 대한 비판을 범세계적 차원으로 확대
하여 비난여론을 고조시키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5·18에 관해 ?로동신문?이 사설을 통해 첫 논평을 한 것은 민중항
쟁이 진압된 지 이틀 뒤인 1980년 5월 29일자 신문에서였다. ?로동신
문?은 “남조선인민들의 반파쇼민주화투쟁사에 빛나는 장을 기록한
력사적 사변”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광주인민봉기는 자유와 민
주주의를 위한 피압박인민들의 투쟁에서 특출한 의의를 가지는 역사
적 사변”이라고 정의하며 “봉기는 전제정치를 반대하고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동방인민들의 근대 역사에서 처음 있는 가장 역사적
사변이다”라고 평가하였다.
이어 6월 1일자 신문은 “모든 애국적인 민중은 반파쇼구국의 기치
아래 민주화의 아침을 앞당겨 오기 위해 총분기하라”는 제목의 격문
을 통일혁명당중앙위원회 명의로 발표하였다. 여기서 신문은 ‘노동대
중’, ‘지성인’, ‘언론인’, ‘장병과 경찰들’이 모두 함께 ‘반파쇼 구국투
쟁’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다. 6월 14일자 신문은 신문 지면의 3면
전면을 할애하여 “만천하에 고발함-광주살륙만행백서”를 통일혁명
당중앙위원회 명의로 발표하였다.
60 현대북한연구 2010 · 13권 3호
2) 학술지 및 정책잡지의 5·18 연구 현황
본 연구에서는 북한의 대표적인 학술지인 ?김일성종합대학학보?와
남한사회에 대한 연구가 가장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잡지인 ?남조
선문제?와 ?근로자?에 수록된 5·18 관련 논문을 검토해 보았다.
?김일성종합대학학보?는 김일성대학에서 발간하는 전문학술지로
써 1956년부터 현재까지 발간되고 있다.6) ?남조선문제?는 1964년 3
월 창간된 잡지로 “남조선과 조국통일문제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월
간 종합이론잡지”를 표방한다. 또한 ?남조선문제?는 “남조선 관계부
문 연구사, 전문가들과 일군들, 근로자들을 독자대상”으로 하는 잡지
로 북한사회에서 가장 전문적인 남한연구 저널이라고 할 수 있다.
1946년 창간된 ?근로자?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이론기관 잡
지”로 “당의 노선과 정책을 이론적으로 폭넓고 깊이 있게 해석 선전
함으로써 당원들과 대중들을 우리 당의 사상과 혁명 이론으로 무장시
키고 당의 두리에 그들을 튼튼히 묶어세우는 것”을 기본임무로 하고
있으며, 중앙과 지방의 당 및 행정, 근로단체 간부들과 사회과학부문,
교육부문, 양성기관일군들을 기본 독자대상으로 하는 잡지이다.7)
이 논문에서는 ?김일성종합대학 학보?의 경우 1980년부터 2009년
까지의 논문을 대상으로 했으며, ?남조선문제?의 경우 1980년부터
1988년까지 본 저널에 게재된 5·18 관련 글을 검토하였다.8) ?근로자?
의 경우는 1980년부터 2006년까지 본 저널에 게재된 5·18 관련 글을
6) ?김일성종합대학학보?는 1956년 창간되었으며 현재까지 간행되고 있다. 동국대
북한학연구소 편, ?북한의 학문세계(자료편)?(서울: 선인, 2009), 21~29쪽 참조.
7) ?조선대백과사전?, 1권(평양: 백과사전출판사, 1995)., 430~431쪽.
8) ?남조선문제?는 1963년 3월 창간되어 1990년대 초반까지 출간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자료수집의 한계로 수집 가능한 1988년까지 검토되었다.
북한에서의 5·18과 광주에 대한 인식 61
저널별∖연도 80 81 82 83 84 85 86 87 88 89 90
91~
99 00
01~
08 합계
김일성종합대학학보 - - - - - - - - - 2 - - - 2
남조선문제 9 3 3 2 2 6 1 1 1 - - - - - 28
근로자 2 1 - - - 1 - 2 - - 1 - 1 - 8
합계 11 4 3 2 2 7 1 3 1 0 3 0 1 0 38
<표 3> 저널별 게재 논문
검토하였다. 이상의 세 저널에 게재된 5·18 관련 논문의 현황은 <표
3>과 같다.
먼저, 시기별로 볼 때 5·18 관련 글들은 주로 1980년대 초중반에
집중되어 있으며 198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는 매우
드물게 발견된다.
북한에서의 남한 5·18에 관한 연구 빈도는 그리 높다고 할 수 없다.
북한의 저널 중 남한문제에 관해 가장 높은 게재 빈도를 보이고 있는
?남조선문제?의 경우, 1980년부터 1988년까지 남한 관련 논문이 총
1,364건이었던 데에 비해 5·18 관련 글이 28건에 불과하다. ?근로자?
의 경우도 1980년부터 2006년까지의 남한 관련 글이 총 258건9)이었
던 데에 비해 5·18 관련 글은 총 8건에 불과하다. 북한의 전문 학술지
인 ?김일성종합대학학보?의 경우에도 “반미자주화 투쟁”에 관한 논의
에서 부분적으로만 다루어지고 있다. 각각의 논문들의 내용을 이슈별
로 살펴보면 <표 4>와 같다.
5·18에 관한 글 중 이슈별로 가장 많이 다루어지는 내용은 5·18의
성격과 일반적 평가에 관한 것으로 10건(26.31%)에 달한다. 다음으로
9) 전미영, “북한의 남한 통일정책 연구,” ?북한의 남한연구와 인과메커니즘?(학술
진흥재단 기초연구과제 발표논문집, 2010) 참조.
62 현대북한연구 2010 · 13권 3호
게재 논문의 이슈별 분류 게재 빈도
5·18 성격/평가 10(26.31%)
민중의 행위 8(21.05%)
탄압 사례/참상 7(18.42%)
5·18의 영향 8(21.05%)
기타 5(13.15%)
합계 38(100%)
<표 4> ?남조선문제?·?근로자?의 5·18 기사 이슈별 게재 빈도
5·18이 남한사회의 민주화 운동에 미친 영향(21.05%)과 항쟁과정에서
의 민중의 영웅성 및 민중의 행위(21.05%)를 다루는 글이 많이 게재되
었다. 이어 남한당국의 탄압사례 및 당시의 참상을 다룬 것이 12.12%
에 이르며, 그 외에도 기타 항목으로 시, 소설 등을 통해 5·18의 참상
을 다루는 ‘전재물’들이 게재되고 있다.10)
4. 북한의 5·18 인식
1) 5·18의 성격 규정
북한에서 5·18을 지칭하는 용어는 ‘광주인민봉기’이다. 북한의 ?조
선대백과사전?에는 ‘광주인민봉기’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10) 5·18의 탄압사례와 피해에 대한 북한의 보도는 상당부분 과장되어 있다. 탄압참
상을 전하는 세부사항에서뿐만 아니라 사상자 수에 있어서도 “2천 명 사망,”
“5천 명 사망,” “1만 수천 명이 죽거나 사망” 등 일관성 없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5·18기념재단>에서 밝히고 있는 실제 광주 민주화운동 관련
피해자는 사망 154명, 행불 70명, 상이 3,028명으로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www.518.org 참조.
북한에서의 5·18과 광주에 대한 인식 63
파쑈독재를 반대하고 민주주의적 자유와 권리를 쟁취하기 위하여
1980년 5월에 벌린 전라남도 광주시민들의 대중적 인민봉기… 광주인
민봉기는 남조선 인민들의 반파쑈 민주화투쟁에 빛나는 장을 기록한
력사적인 사변이었다.”11)
그러면 북한에서 ‘인민봉기’란 어떤 의미인가? 북한의 사전에 따르
면 다음과 같이 정의되어 있다.
착취와 억압, 침략과 약탈을 반대하여 벌리는 인민들의 대중적 투쟁.
인민봉기는 여러 가지 세부적인 사건들을 동기로 하여 일어날 수 있으
나 그것은 본질에 있어서 국내의 착취계급과 외래침략자들의 착취와
억압, 침략과 략탈을 반대하고 인민들이 자기의 자주성을 옹호 실현하
기 위하여 벌리는 투쟁이다. (중략) 인민봉기의 가장 높은 형태가 무장
봉기이다. 인류역사에는 착취사회의 전 기간 수많은 인민봉기들이 있었
다. 그 대표적 실례로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3·1인민봉기, 광주인민항쟁
등을 들 수 있다.12)
한편 김일성이 5·18에 대해 공식적으로 언급한 것은 1980년 10월
개최된 조선로동당 제6차 대회에서 한 총화보고에서였다. 당시 김일
성은 5·18을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지난 5월 수많은 인민들이 일제히 떨쳐 일어나 손에 무장을 들고 용
감히 싸운 광주인민들의 영웅적 봉기는 남조선의 파쑈통치 지반을 크게
11) ?조선대백과사전?, 4권(평양: 백과사전출판사, 1996), 636~637쪽.
12) ?조선대백과사전?, 28권(평양: 백과사전출판사, 1996), 658쪽.
64 현대북한연구 2010 · 13권 3호
뒤흔들어 놓았으며 미제와 그 앞잡이 군사파쇼분자들을 불안과 공포에
떨게 하였습니다.13)
북한에서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기본 입장은 크게 ① “낡은 유신파
쇼통치를 청산하고 새로운 민주정치를 실시하기 위한 가장 높은 형태
의 반파쇼 민주화투쟁”이자, ② “전제정치를 반대하고 민주주의를 실
현하기 위한 동방인민들의 근대 투쟁력사에서 처음으로 되는 가장 크
고 격렬한 대중적 봉기”로 규정하고 있다.
먼저, 북한에서는 광주민중항쟁을 “민주화를 위한 투쟁 중 가장 높
은 형태의 투쟁”으로 평가한다. 그것은 “전례 없는 지속성과 완강성,
격렬성을 띠고 진행된 인민들의 대중적 봉기”이기 때문이다. 즉, “광
주인민봉기는 그 참가 범위와 투쟁 규모에 있어서 전례 없이 큰 인민
봉기”라고 평가한다.14)
두 번째로, 북한이 평가하는 5·18광주민중항쟁의 중요한 특징은
‘무장투쟁’이었다는 점이다. 봉기가 처음에는 평화적 시위로부터 시
작되었으나 군경의 탄압에 대처하여 폭동으로 넘어갔으며 5월 21일
부터는 무장장비를 빼앗아 조직적인 무장투쟁으로 전개시켰다는 것
이다.
적의 무장을 빼앗아 자체를 무장한 봉기자들은 ‘시민군’, ‘특별경계
부대’, ‘돌격대’ 등 군사지위체계를 갖춘 자위적 무장대오로 편성되었으
며 투쟁핵심들로 조직된 ‘민주투쟁위원회’의 통일적 지휘 밑에 무장투
13) 김일성, “조선로동당 제6차대회에서 한 중앙위원회 사업총화보고,” ?김일성저
작집?, 35권, 340쪽.
14) 서치렬, “억누를수록 반항은 커지는 법이다,” ?근로자?, 7호(1980), 56쪽.
북한에서의 5·18과 광주에 대한 인식 65
쟁을 벌려나갔다.15)
세 번째, 북한에서 5·18에 대한 평가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미국
책임론이다. 조선로동당 6차 당대회 중앙위원회 사업총화보고에서 김
일성이 강조한 것도 바로 5·18에 관한 미국 책임론이었다.
남조선군사파쇼분자들의 만행은 다 미국의 조종과 비호 밑에 감행되
고 있습니다. 광주의 애국적 봉기자들에 대한 야수적 살육만행을 지휘
한 것도 미국이며 남조선의 민주인사들을 가혹하게 탄압하도록 부추긴
것도 미국이며 남조선에서 군사파쇼독재 정권을 조작한 것도 미국이며,
조종자도 미국입니다.16)
북한당국은 5·18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남한당국의 탄압은 미국의
“적극적인 배후조종과 힘의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고
평가하며 당시 남한사회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 행사방식을 “신식민주
의 통치방식”으로 인식하고 있다.17)
마지막으로 5·18은 “자유와 민주주의, 조국통일에 대한 남조선 인
민들의 염원과 지향을 반영한 대중적인 애국적 항쟁”이었다고 평가한
다. 또한 이 과정에서 북한당국은 “민주와 통일에 대한 광주 인민봉기
자들의 열망”은 수령 김일성을 “통일조국에 모시고 그 따사로운 품속
에 안기려는 숭고한 열망으로 굽이쳤다”18)고 주장하는 등, 5·18의 정
15) 김윤봉, “남조선인민들의 민주화투쟁력사를 영웅적 위훈으로 빛내인 광주인민
봉기,” ?남조선문제?, 4·5호(1981), 17~18쪽.
16) 김일성, “조선로동당 제6차대회에서 한 중앙위원회 사업총화보고,” 341쪽.
17) 황동섭, “미제는 남조선파쇼독재의 조종자이며 인민탄압의 원흉,” ?근로자?,
8호(1980년), 55쪽.
66 현대북한연구 2010 · 13권 3호
신을 김일성과 연결 짓는다. 그러나 실제로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전개된 광주항쟁의 이데올로기는 반공주의를 전제한 자유민주주의였
다.19) 당시 항쟁의 참여주체가 자신들의 민주화 항쟁의 의미가 훼손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자유민주주의와 반공주의를 철저히 견지했다는
사실20)은 북한의 이러한 주장이 허위였음을 입증하는 데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2) 민주화운동사에서 5·18의 영향력 평가
북한사회에서 5·18의 평가에 있어서 가장 주목하고 있는 점은 남한
의 민주화 운동사에서 5·18이 갖는 계기성의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5·18을 기점으로 반독재민주화투쟁이 반미투쟁과 결합되기
시작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21) 즉, 광주민주항쟁 탄압에 대한 미
국의 “직접적인 조정과 적극적인 비호가 청년학생들과 인민들의 반
미자주화투쟁을 폭발시킨 기본 동기”가 되었으며 이후 남한사회의
“반미자주화투쟁은 새로운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고 평가한다.22)
광주인민봉기를 계기로 남조선인민들의 반파쇼민주화투쟁은 보다
18) 조국통일사 편, ?주체의 기치 따라 나아가는 남조선인민들의 투쟁?(평양: 조국
통일사, 1982), 598쪽.
19) 김정한, “5·18 광주항쟁의 이데올로기 연구,” ?기억과 전망?, 18호(2008), 89쪽.
20) 당시 학생수습위에서는 조사과를 만들어 시민들이 수상하다고 신고한 사람들
의 간첩 여부를 조사하는 등 불온분자의 개입을 엄격히 관리했다고 한다. 관련
된 세부 사례는 한국현대사자료연구소 엮음, ?광주오월민중항쟁사료전집?(서
울: 풀빛, 1990), 322쪽 참조.
21) 정성호, “남조선민주화운동발전에서 광주인민봉기가 차지하는 력사적 지위,” ?남조선문제?, 5호(1982), 31쪽.
22) 박정섭, “최근 남조선청년학생들의 반미자주화 투쟁의 중요 특징,” ?남조선문
제?, 4호(1988), 24쪽.
북한에서의 5·18과 광주에 대한 인식 67
높은 단계의 투쟁인 반미민족해방투쟁으로 확고히 전환되게 되었다. 남
조선인민들의 투쟁은 본질에 있어서 남조선에 대한 미제의 식민지지배
를 끝장내고 민족의 자주권을 완전히 회복하기 위한 반미민족해방운동
이다.23)
북한의 주장은 지난 시기에도 남한 청년학생들이 정치투쟁에서 부
분적으로나마 반미적 구호를 제기했지만 식민지통치자체를 반대하는
주목할 만한 구호는 제기되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즉, 1970년대까지
의 반미구호는 “미제의 불평등한 대남조선정책 및 내정 간섭을 반대
하는 내용들이었으며, 그것도 대중정치투쟁의 주된 요구로 전면에 나
선 것이 아니라 반파쇼민주화요구의 일환으로 제기된 것에 불과했다
는 것”이다.
북한 학계의 한 남한 민주화운동 연구는 구호분석을 통해 남한 민
주화운동이 갖는 반미적 성격을 밝히며 1980년대 남한사회의 반미투
쟁이 본격화하게 된 계기로 5·18의 영향을 평가한다.
“4·19 인민봉기 이후부터 1987년까지 남조선에서 제기된 반미적 구
호의 내용을 분석한 데 의하면 매 시기 제기된 구호 총 건수에서 미군철
거를 요구한 내용이 1960년대에는 4%, 1970년대에는 1.6%를 각각 차
지했다면, 1980~1987년에는 그것이 40% 이상을 차지하였다는 것이
다.”24)
23) 한영읍, “남조선인민들의 반파쇼민주화투쟁을 보다 높은 단계에로 발전시킨
영웅적 광주인민봉기,” ?근로자?, 5호(1990), 87쪽.
24) 박정섭, “최근 남조선청년학생들의 반미자주화 투쟁의 중요 특징,” 25쪽.
68 현대북한연구 2010 · 13권 3호
한편, 1990년대 후반에 오면서 북한은 남한사회의 대중투쟁을 반미
자주화, 반파쇼민주화, 조국통일이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때 가장
우선되어야 하는 투쟁의 방향이 반미자주화투쟁이라고 강조한다. 따
라서 남조선인민들이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한 투쟁을 벌려나가는 데
서 견지하여야 할 원칙은 반미자주화투쟁을 주축으로 하고 반파쇼민
주화와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을 유기적으로 결합시켜야 한다는 것이
다.25)
두 번째로는 광주민주항쟁 이후로 남한의 대중운동이 분산적으로
가 아니라 조직적인 연합공동투쟁으로 심화 발전될 수 있었다고 평가
한다. 즉, 남조선인민들의 투쟁이 새로운 발전단계에 들어섰다는 것은
그것이 전례 없는 규모로, 조직적으로 벌어지고 있으며 여기에 각계각
층의 광범한 군중이 참가하고 있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26)
자유와 민주주의, 새정치, 새생활을 갈망하는 남조선 인민들의 일치
한 지향과 요구를 반영하여 로동자, 농민, 청년학생, 지식인, 수공업자,
소상인, 종교인, 지어는 일부 기업가, 공무원 등 모든 계급계층들과 남
녀로소가 손에 무장을 잡고 유신잔당들과 군사파쇼통치를 반대하는 성
스러운 투쟁에 한결같이 떨쳐나 견결히 싸운 대중적이며 적극성을 띤
가장 높은 형태의 반독재민주화투쟁이라는 데 있다.27)
25) 리성혁,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 밝혀주신 남조선 인민들의 대중투쟁에
관한 사상리론,” ?감일성종합대학학보?(력사·법학편), 44권 4호(1998), 63쪽.
26) 김태화, “새로운 발전단계에 들어선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한 남조선인민들의
정의의 애국투쟁,” ?근로자?, 9호(1987), 90쪽.
27) 정성호, “남조선민주화운동발전에서 광주인민봉기가 차지하는 력사적 지위,”
30쪽.
북한에서의 5·18과 광주에 대한 인식 69
즉, ‘광주인민봉기’에는 “청년학생들을 비롯하여 노동자, 농민, 사
무원, 소상인, 종교인 등 각계각층이 다 참가하였으며 어린이, 부녀자,
늙은이들까지 투쟁에 합세”하였으며, “이처럼 광범한 각계각층 인민
들이 대중적으로 참가한 것으로 하여 광주인민봉기는 종전의 인민봉
기와는 구별되는 높은 형태의 민주화투쟁으로 된다”고 평가한다.28)
또한 5·18을 계기로 하여 “대중투쟁이 국부적인 투쟁에서 포괄적
인 투쟁으로, 소극적인 투쟁에서 적극적인 투쟁으로, 자연발생적 투쟁
에서 조직적인 투쟁으로 심화발전”29)되어 왔으며 1987년 6월 항쟁을
가능하게 했다는 데서 그 의의를 찾고 있다.
마지막으로 5·18을 계기로 남조선에서 주체사상을 보급하는 데 전
환적 계기를 열어놓았다고 평가한다. 즉, 남한에서 주체사상은 1980
년대에 들어서면서 인민대중의 자주적 요구를 실현하기 위한 지도사
상으로 확고히 뿌리내리기 시작하였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력사적인 광주인민봉기는 남조선에서 불멸의 주체사상을 보급하는
데서 전환적인 계기를 열어놓았다. (중략) 남조선에서 주체사상은 1980
년대에 들어서면서 인민대중의 자주적 요구를 실현하기 위한 지도사상
으로 확고히 뿌리내리기 시작했다.30)
특히 북한은 당시 남한의 안전기획부와 치안본부가 발표한 친북·좌
경세력들의 주체사상 보급 활동사례를 그대로 소개하면서, “이러한
28) 조국통일사 편, ?주체의 기치 따라 나아가는 남조선인민들의 투쟁?, 599쪽.
29) 김태화, “새로운 발전단계에 들어선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한 남조선인민들의
정의의 애국투쟁,” 90쪽.
30) 한영읍, “남조선인민들의 반파쇼민주화투쟁을 보다 높은 단계에로 발전시킨
영웅적 광주인민봉기,” 89쪽.
70 현대북한연구 2010 · 13권 3호
사실은 광주인민봉기를 전환점으로 하여 남조선에서 주체사상 보급
이 얼마나 활발히 벌어지고 있는가를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31)고 주
장하였다.32)
3) 북한에서의 5·18 담론의 변화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북한에서의 광주, 5·18 담론은 시대
변화를 반영하며 내용상의 변화를 보여 왔다. 물론 광주민주화운동을
“남조선 인민들의 반파쑈 민주화투쟁”이라고 보는 기본 인식에는 변
함이 없지만, 사회적인 담론화 과정에서 그 의미평가와 강조점에서
뚜렷한 변화를 나타낸다.
북한에서의 5·18 담론의 변화양상은 로동신문의 사설, 논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33) 1980년부터 최근까지 ?로동신문? 사설 및 논설에
게재된 5·18 관련 기사는 다음과 같다.
위의 <표 5>에서 알 수 있듯이 로동신문은 1980년부터 1995년까
지는 한해도 빠짐없이 사설에서 광주민주화운동에 관한 기사를 다루
어 왔다. 북한의 신문에서 사설은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기사
의 종류이다. “당의 지시서나 지령서”로 일컬어지는 사설은 “매시기
당의 방침과 의도를 민감하게 받아 물고 당원들과 근로자들 속에 신
31) 위의 글, 90쪽.
32) 이 외에도 33건의 분석대상 논문 중 5건의 논문이 주체사상 및 김일성‧김정일
의 사상이 남한 민주화운동의 지침이 되었다는 주장을 싣고 있다.
33) 본 논문의 분석 결과 학술잡지나 정책잡지 등 북한의 전문잡지에서의 5·18
연구가 1980년대에 국한되어 있고, 1990년대부터는 연구를 찾아보기 힘든 것
과는 달리, ?로동신문? 등 북한의 언론을 통해서는 매년 5월 18일에 5·18에
관한 기사가 게재되고 있다.
북한에서의 5·18과 광주에 대한 인식 71
1980.5.29 <사설> 남조선인민들의 반파쇼민주화투쟁사에 빛나는 장을 기록한
력사적 사변
1981.5.18 <사설> 영웅적광주인민봉기는 반파쑈민주화투쟁사에 길이 빛날것
이다
1982.5.18 <사설> 광주봉기자들의 의로운 지향은 반드시 실현되야 할 것이다
1983.5.18 <사설> 반미자주화와 반파쑈민주화의 기치를 높이 들자
1984.5.18 <사설> 반미자주화와 반파쑈민주화 투쟁으로 광주봉기자들의 념원
을 실현하자
1985.5.18 <사설> 영웅적 광주인민봉기 5돐
1986.5.18 <사설> 남조선인민들의 반미, 반파쑈 투쟁은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1987.5.18 <사설> 자주와 민주, 통일에 대한 광주의 념원은 반드시 실현될 것
이다
1988.5.18 <사설> 광주봉기자들의 념원은 실현되여야 한다
1989.5.18 <사설> 남조선의 엄혹한 사태는 새로운 항쟁을 부른다
1990.5.18 <사설> 광주항쟁용사들의 념원은 실현되여야 한다.
1991.5.18 <사설> 대중적항쟁으로 광주봉기자들의 념원을 실현하여야 한다.
1992.5.18 <사설> 영웅적 광주봉기자들의 념원은 실현되여야 한다.
1993.5.18 <사설> 광주봉기자들의 념원은 반드시 실현되여야 한다.
1995.5.18 <사설> 거족적투쟁으로 광주의 념원을 실현하고 조국을 통일하자
19960518 <논설> 광주항쟁용사들의 자주, 민주, 통일념원은 실현되여야 한다.
1998.5.18 <논설> 민족자주, 민주주의, 통일만이 남조선인민들이 살길이다
2000.5.18 <사설> 대중적인 반미항전으로 자주, 민주, 통일의 새날을 안아오자
2001.5.18 <논설> 인민대중의 단합된 힘을 과시한 영웅적 광주인민봉기
2002.5.18 <논설> 광주항쟁용사들의 념원은 실현되어야 한다.
2003.5.18 <논설> 반미투쟁의 전환적 계기를 마련한 무장봉기
2004.5.18 <논설> 광주참극의 주범, 미국
2005.5.18 <논설> 피의 광주는 반미를 부른다.
2006.5.18 <논설> 광주인민봉기 26돐을 기념
2007.5.18 <논설> 광주의 넋은 반미, 반보수투쟁을 부른다.
2008.5.18 <논설> 자주, 민주, 통일운동사에 빛나는 영웅적 항쟁
<표 5> ?로동신문? 사설 및 논설의 5·18 보도 현황(1980~2008)
속히 해설침투하며 그들을 당의 방침관철에로 조직, 동원하는 신문의
가장 위력한” 기사형태이다.34) 로동신문의 사설에서 대남·통일 관련
내용을 사설에서 다루는 경우가 1년에 10여 편에 불과하다는 것을
72 현대북한연구 2010 · 13권 3호
감안할 때 북한이 1990년대 중반까지 5월 18일에 로동신문 사설을
통해 5·18을 언급해왔다는 사실은 북한당국이 갖는 5·18에 대한 관심
을 잘 드러낸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96년 이후부터 현재까
지 사설 기사는 2000년 한 번뿐이었으며, 기명 논설이나 일반기사를
통해서만 언급되어 왔다.
로동신문 기사에서의 비중 변화는 북한사회에서 5·18과 광주가 갖
는 정치적 의미 변화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980년대
북한의 매체들은 5·18을 “반파쇼민주화투쟁” “반미, 반파쇼투쟁”이
라는 관점에서 언급하며 당시 남한정권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비민주
성을 비판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부터
진행된 남한사회의 민주화 정착으로 남한사회가 사회적 안정을 찾아
감에 따라 북한사회에서 5·18은 ‘반파쇼민주화투쟁’의 상징에서 ‘반
미투쟁’의 상징으로 그 의미가 변화되어 갔다. 특히 199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북한의 언론은 ‘반외세’, ‘반미’, ‘자주통일’이라는 관점을
부각시키면서 5·18의 의미를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2005년 5월 18일 ?로동신문?은 “피의 광주는 반미를 부른다”는 제
목의 논설을 통해 “그것은 정녕 미제의 식민지지배와 군사파쇼통치에
대한 분노와 원한의 폭발이었으며 외세가 없는 세상에서 참다운 자주
적인 삶을 누리며 사람답게 살아보려는 결사의 몸부림이었다”고 평가
하며 “광주인민봉기는 우리 민족의 반외세 성전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일대 사변이었다”고 언급하였다. 한편 이 논설에 대한 내용분
석(Contents Analysis) 결과, ‘반미’에 관한 언급이 13회, ‘미국/미제’에
관한 언급이 39회, ‘반파쇼’ 언급이 1회, ‘파쇼독재/파쇼도당’에 관한
34) 전미영, “북한 대남정책의 변화: 사설과 구호를 중심으로,” ?로동신문을 통해
본 북한 변화?(선인, 2006), 608쪽.
북한에서의 5·18과 광주에 대한 인식 73
구분 반미 미국/미제 반파쇼 파쇼독재/파쇼도당
언급횟수 13 39 1 6
<표 6> ?로동신문? 5·18 논설의 내용 분석
언급이 6회로 주로 미국의 책임론과 반미항쟁에 관한 독려를 중심으
로 서술되어 있다.
2009년 5월 18일자 ?로동신문?은 “반미, 반파쑈 투쟁사에 아로새
겨진 영웅적 항쟁”이라는 제목의 개인필명 논설에서 5‧18 민주화운동
은 “민족의 자주권과 사회의 민주화, 나라의 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정의의 반미, 반파쑈 항쟁”인데 “지금도 외세와 매국노들에 의해” 남
한 주민들이 “민주주의, 인권을 무참히 유린당하고 있다”며 “반미 자
주화 투쟁을 벌이고 반역 무리들의 외세의존 책동”을 분쇄해야 한다
고 언급했다. 또한 2010년 5월 18일자 신문은 “광주인민봉기 30돌
기념 평양시 보고회” 기사를 통해 “남조선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강
점과 식민지지배는 남조선인민들이 겪는 모든 불행과 고통의 화근이
며 조국통일의 근본 장애”라고 언급하며 “반미반전투쟁의 불길을 지
펴 올릴 것”을 호소하였다.
4) 북한에서의 ‘5·18’, ‘광주’ 담론과 1980년대 북한의 대남인식
북한당국이 5·18 담론의 확산을 통해 대내외적으로 의도한 바는
무엇이었을까. 북한의 ‘남조선’ 담론이 그러하듯이 5·18 담론 역시 북
한의 대남인식 그리고 대남전략과 무관할 수 없다.
북한은 남한체제를 미국의 식민지로 인식해왔다. 이러한 인식은 북
한의 남조선혁명론을 정당화해왔다. 김일성은 남조선의 성격을 “민족
74 현대북한연구 2010 · 13권 3호
해방민주주의 혁명”으로 규정하고 “남조선혁명의 기본임무는 미제의
식민지통치를 청산하고 남조선사회의 민주주의적 발전을 보장하며
북반부의 사회주의 역량과 단합하여 나라의 통일을 달성하는 데” 있
으며 “현 단계에서 남조선 혁명의 기본방침은 적들의 탄압으로부터
혁명역량을 보존하는 동시에 그것을 부단히 축적하고 장성시킴으로
써 결정적 시기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데 있다”35)고 그 성격을
밝힌 바 있다.
북한당국이 남조선혁명론을 추진하게 된 현실적 배경에는 먼저 미
군주둔하에서 북한주도의 무력통일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에서 출발해,
4·19혁명으로 분출된 남한 민중의 힘으로부터 남한 내부에서의 혁명
의 가능성을 상정하였다. 북한당국은 당시 남한의 상황을 “반파쇼민
주화를 위한 투쟁을 각계각층 인민들의 대중적인 공동투쟁으로 발전
시킬 수 있는 객관적 조건”이 구비된 것36)으로 판단했다.
1970년 제5차 조선로동당 대회에서 김일성은 남조선혁명의 기본
성격을 “미제국주의 침략자들을 반대하는 민족해방혁명인 동시에 미
제의 앞잡이들인 지주, 매판자본가, 반동관료배들과 그들의 파쇼통치
를 반대하는 인민민주주의 혁명”이라고 정의하고, 이 혁명의 기본 인
무를 “남조선에서 미제국주의 침략세력을 내쫓고 그 식민지 통치를
없애며 군사파쇼독재를 뒤집어엎고 선진적인 사회주의제도를 세움으
로써 민주주의적 발전을 이룩하는 데 있다”고 설명한 바 있다.
1980년 10월 6차 당 대회를 계기로 대남강경노선에서의 공식적 수
정을 암시했다. 북한당국은 당대회보고와 당규약에서 ‘3대혁명역량
강화론’, ‘민주기지론’, ‘남조선혁명론’에 대한 언급 없이 ‘고려민주연
35) ?로동신문?, 1966년 10월 11일.
36) ?로동신문?, 1966년 12월 26일.
북한에서의 5·18과 광주에 대한 인식 75
방공화국창립방안’을 제시하였는데, 이는 북한이 1980년대 들어오면
서 혁명전략을 연방전략으로 점진적으로 대체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37)
북한당국은 ‘고려민주연방공화국창립’에 대한 3가지 선결조건을
제시하였는데 그것은 첫째, “남조선에서의 군사파쇼통치를 청산하고
사회의 민주화를 실현”하는 것이며 둘째, “긴장상태를 완화하고 전쟁
위험을 제거하는 것”으로써 이것은 오직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꿈으로써만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며 셋째, “미국의 두개조선책동
을 저지시키면서 조선의 내정에 대한 미국의 간섭을 끝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1980년 당시 고려민주연방공화국창립 제안은 그 표명된 선
언에도 불구하고 남조선혁명의 가능성에 대한 완전한 포기를 의미하
는 것은 아니었다. 1980년 5·18을 계기로 남한사회의 민주화운동이
확산되자 북한당국은 민주화운동이 체제전복으로 진행되기를 기대했
던 것으로 보인다. 1980년대 남한사회에서 반정부·반미투쟁이 가열되
자 북한당국은 1985년 ‘통혁당’을 ‘한국민족민주전선’으로 개칭하고
반정부·반체제세력과의 통일전선을 구축함으로써 남조선혁명역량의
강화를 모색하고자 했다.
1980년대 광주인민봉기의 발발로 인한 한국 민중의 분단구조에 대
한 각성과 ‘반미자주화 투쟁’의 확산은 북한지도부로 하여금 반미·반
체제 통일전선의 구축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했다. 또한 1980년대 민간
부문에서 통일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하자 당시 북한당국이 격렬히 비난
해왔던 한국정부와 미국이 추진하고 있던 남북한 유엔동시가입, 소위
37) 고유환, “북한의 대남통일정책의 전개과정,” 이상민 외, ?21세기의 남북한 정치?
(한울, 2000), 3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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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조선정책’을 저지시키기 위한 명분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19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진 남한사회의 민주화운동은 군
사정권의 퇴진과 남한사회의 실질적인 민주화로 이행해나가기 시작
했으며, 1980년대를 지나면서 남북 간의 국력 격차가 크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1980년대 말부터 시작된 동구공산권 국가의 체제전환, 남
한의 국제적 지위향상, 남한정치의 안정화, 그리고 전향적인 북방정책
추진 등 북한을 둘러싼 대외정세의 악화와 북한의 경제 위기 심화 등
3대혁명역량이 극도로 약화된 상황에서 북한당국은 체제유지를 위한
수세적 대남전략에 임하게 된다. 북한은 이 시기에 이르러 대남·통일
전략을 ‘선 남조선혁명, 후 합작통일’로부터 ‘선 남북공존, 후 연방통
일’로 그 방향을 전환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대남전략의 방향 전환은 북한의 5·18 담론에서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는데, 그것은 ‘반파쇼민주화 운동’으로서 5·18의 강조점
이 ‘반미자주화운동’으로 전환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북한당국은
5·18 민중항쟁이 반미자주화운동을 남한사회에 확산시킨 계기적 사
건이었다고 강조하며 반미투쟁을 촉구하는 데 5·18담론을 적극 활용
했다.
김영삼 정부,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를 거치는 과정에서도 북한
의 5·18 인식과 남한사회의 민주화 평가는 본질적으로 큰 변화를 보
이지 않고 있다. 남한정권에 대한 북한의 기본인식은 여전히 남한정권
을 ‘파쇼’로 보고 있으며38) 남한사회의 민주화를 인정하지 않은 채
“반미자주화투쟁을 주축으로 반파쇼민주화와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
을 유기적으로 결합시켜 나갈 것”을 주장한다.
38) 전현준, ?북한의 대남정책의 특징?(통일연구원, 2002), 17쪽.
북한에서의 5·18과 광주에 대한 인식 77
5. 맺음말
이상에서 북한의 5·18을 어떻게 이해하고 규정했는지를 북한이 생
산해 낸 ‘광주인민봉기’ 담론을 통해 살펴보았다. 북한의 대남기사 보
도 및 남한연구의 특징 중 하나가, 정부 당국에 대해서는 비난과 비판
으로 일관하는 한편, 민주화운동세력에 대해서는 지지의 입장을 적극
적으로 표명해왔다는 점이다. 이러한 입장에 따라 5·18에 대한 북한
의 평가 역시 민주화 운동세력의 입장에 대한 지지와 남한 정부당국
에 대한 강한 비판을 기초로 전개되었다.
분단국의 운명을 안고 국가수립을 진행해야 했던 남북한 지도부에
게 있어서 상대 정권은 자신을 정통성을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경쟁
자이자 위협요인이었으며, 또한 자신의 국가와 정권의 정통성을 구축
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타자’이기도 했다. 상대방이 정당성을 상실한
체제이며, 특히 자신들의 체제를 위협하고 있다는 주장은 자신의 정권
과 체제를 정당화하고, 독점적 권력행사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적
도구의 역할을 수행해왔다.
1980년대 당시 5·18을 둘러싼 남북한 당국의 입장 또한 다르지 않
았다. 당시 남한당국은 민중의 폭발적 저항에 북한개입설을 유포함으
로써 민주화운동을 억압하고 정권을 향한 국민의 분노를 차단하고자
했으며, 북한당국은 5·18 담론의 확산을 통해 남한정권의 정통성을
부정함으로써 북한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국가정체성을 강화하는
계기로 활용하였다.
북한사회에서 남한 관련 기사의 보도는 남한비판을 통해 북한체제
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주민의 통합력을 제고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북한에서의 ‘남조선’ 담론이 일반적으로 그러한 기능으로 활용
78 현대북한연구 2010 · 13권 3호
되어 왔듯이, 5·18은 당시 남한정부의 정통성을 부정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무기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과정에서 북한당국은 5·18
의 평가 과정에서 주체사상 선전과 김일성 우상화를 결합함으로써 북
한체제를 정당화하고자 했는데, 이러한 행태는 궁극적으로 5·18의 의
미를 왜곡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 접수: 10월 25일 / ■ 채택: 11월 26일
북한에서의 5·18과 광주에 대한 인식 79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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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의 5·18과 광주에 대한 인식 81
Abstract
North Korean Perceptions of The ‘5‧18’
Democratization Movement
Jeon, Mi-Yeong(Adjunct lecturer, Dongguk University)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analyze North Korean newspaper articles
and journals on ‘5‧18’ to understand how North Koreans perceive
‘5‧18’ Democratization Movement. one of the general features of the
North Korean study on South is to heavily criticize South Korean authorities
on the other hand, to support democratization movements.
According to this view, North used 5‧18 discours as justification for
condemnation of South Korean government. In the 1980s, North
Korean mass media emphasized ‘5‧18’ as ‘Banpasyo(anti-Fascist) struggle’
criticizing South Korean government’s violent crackdown. However,
since the mid-1990s North Korea reeval‎uated the significance of ‘5‧
18’ focusing on anti-US. struggle. Every ‘5‧18’ anniversary, North Korean
mess media and journals emphasize that the movement was a
struggle to oppose the United State by Guangju province people and
appeal to North Korean people to achieve reunification defeating US.’s
82 현대북한연구 2010 · 13권 3호
occupation in North.
Keywords: ‘5‧18’ Democratization Movement. Guangju. ‘5‧18’ discours.
North Korean Perception of South Korea. North
Korean journ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