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하는 제국
우창 봉기가 어떤 배경에서 일어났고 어떻게 성공했는가. 여기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우선 시간을 조금 앞으로 돌려볼 필요가 있다. 한때 세계에서 가장 강성했던 청나라는 19세기 중엽에 들어오면서 국운이 급격하게 기울어 가고 있었다. 약 십여년에 걸친 태평 천국의 난은 중국의 거의 절반을 초토화하였고 그 와중에 학살과 기근 등으로 죽은 사람은 어림잡아도 대략 2천만명이 넘었다. 대다수 중국인들의 삶은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잇달아 일어나는 반란은 전 국토를 전쟁터로 만들었을 뿐더러, 무기력해진 만주족 황실은 이미 스스로의 힘으로는 상황을 헤쳐나갈 능력이 없었다. 반면, 그동안 만주 귀족들의 손발 노릇을 했던 한족들은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는데 앞장서면서 중앙 정치의 핵심 세력으로 떠올랐다. 서구 열강의 침탈이 더욱 가속화되면서 많은 영토가 외세의 손에 들어갔고, 대규모 자본과 기계로 대량 생산된 값싼 외국산 물품 앞에서 여전히 가내 수공업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민족 산업은 완전히 몰락하는 등 청나라가 놓인 상황은 총체적인 위기였다.
이른바 "중체서용(中體西用)"이라 하여 전통적인 체제는 고수하면서 서구의 발달한 문명을 배우려고 했던 양무운동은 청일전쟁의 패배로 완전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물론 양무운동의 성과가 전혀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리훙장을 비롯해 태평천국의 난에서 활약했던 한족 관료들이 주도한 양무운동은 그나마 몰락해 가는 제국의 수명을 적어도 50년은 연장하였다. 양무 운동으로 다양한 형태의 개혁과 근대적인 제도가 추진되었으며 조세 제도의 개혁과 관세 덕분에 세수 또한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1840년대에 청조의 연간 평균 세수는 4천만냥에 불과했지만 1890년대에는 8천만냥을 넘었고, 신해혁명 직전에 오면 2억냥에 달했다. 아편전쟁의 패배로 인한 1500만냥에 달하는 배상금이나 양무 시절 외국으로부터 도입한 외채(약 8백만냥)은 청조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액수였다. 적어도 청일전쟁 이전의 청조는 결코 "몰락한 제국"이 아니었다. 이것은 그동안 모든 권력을 독점했던 만주족들이 더 이상 자신들의 역량으로는 출구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한족과 권력을 나누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청조는 과거 원나라가 그러했던 것처럼 한족들이 일으킨 태평천국의 난에서 멸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양무운동은 나름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중국판 "메이지 유신"에는 결국 실패했다. 서구의 겉모습만 흉내내는 반쪽짜리 개혁이 한계에 부딪쳤기 때문이다. 만주족이 중앙의 관직을 한족들에게 일부 개방했다고 해도 여전히 대부분은 만주족의 차지였고 한족 관료들은 주로 지방의 관직을 전전할 뿐, 중요한 직책을 거의 맡을 수 없었다. 반면, 만주족들은 과거를 보지 않고도 황실과의 연줄이나 가문의 후광으로 얼마든지 고관대작이 되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기에 굳이 관료로서의 소양을 쌓거나 새로운 학문을 배우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물론 한족 관료들은 이들보다는 훨씬 유능했다. 하지만 리훙장을 비롯하여 조정 내에서 가장 식견을 갖추었다는 양무 대신들조차도 서구화의 필요성에는 공감하면서도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못했다. 서구에 대한 이해가 없었던 그들은 최신 소총이나 대포, 군함과 같은 당장 자신들의 눈에 보이는 것에만 주목하였다. 하지만 서구의 저력은 단순히 근대 무기의 우수성이나 기술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그들의 문화와 사고방식, 가치관에 있었다. 유럽 변방의 후진국이었던 러시아가 18세기 표트르 대제의 대대적인 서구화 정책으로 비로소 열강의 반열에 설 수 있었던 것이나 일본 에도 말기 조슈번의 양이 지사들이 서구를 직접 체험한 후 충격을 받고 도리어 서구화에 앞장 섰던 것처럼 서구와 경쟁을 하려면 결국 서구 그 자체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단 한번도 중국 밖을 나가본 적이 없었던 중국의 위정자들은 서구의 본질이 무엇이며 중국이 서구에 비하여 어떤 면이 뒤쳐져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가령 무기와 군함을 생산하기 위한 군수 공장을 하나 짓더라도 부지 선정부터 자금 확보, 원료와 연료의 수송, 제품의 판매, 생산 비용과 이윤의 계산 등 치밀한 사전 준비와 계획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들은 자본주의나 경제, 경영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상식조차 없었기에 관료적인 판단만 앞세워 일단 짓고 보자는 식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중국 최초의 근대적인 제철공장인 한야평공사(漢冶萍公司)이다. 양무 대신 중의 한 사람인 장즈퉁은 1894년 후베이성 우한의 한양 다바산에 한야평공사를 설립하였다. 한야평공사는 1901년에 문을 연 일본 야와타 제철소(八幡製鐵所)보다도 7년이나 빨리 건설되었으며 중국 최대의 제철공장이자 양무 운동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문제는 입지 조건이 형편없다는 점이었다. 위치가 홍수에 취약한 저지대였기에 홍수 방지를 위해 주변의 땅을 메워야 했고 30만냥에 달하는 돈을 써야 했다. 또한 가까운 곳에서 원료와 연료를 확보할 수 없어 수백km 떨어진 곳에서 값비싼 운임을 주고 석탄과 코크스를 수송하거나 해외에서 수입해야 했다. 운영하면 할수록 부채만 끝없이 늘어나자 결국 장즈퉁도 2년만에 두손을 들고 민간에 넘겨야 했다. 이런 공장이 과연 무슨 경쟁력이 있겠는가. 1912년에 오면 누적 부채가 2400만냥에 달하게 되면서 결국 일본에 경영권이 넘어갔고 철 생산품의 절반 이상이 일본으로 수출되어 일본제 무기와 군함을 생산하는데 사용되었다. 그가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자신의 정치적 근거지였기 때문이었다. 그 외에 다른 점은 철저하게 무시되었다.
이 시기에 조정의 주도로 추진된 서구화 사업은 대부분 이런 식이었다. 효율성이 너무 낮아서 막대한 예산만 낭비했을 뿐, 얼마 지나지 않아 대부분 민간이나 외국 자본의 손에 넘어갔다. 그나마 외국 제품의 침탈이 어려웠던 면제품과 같은 경공업은 그럭저럭 유지될 수 있었지만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고 부국 강병에 필요한 중공업은 거의 성과가 없었다. 중국군의 근대화에 필요한 무기와 군함은 대부분 미국, 독일, 영국, 일본 등지에서 수입해야 했고 극히 적은 양만 국내에서 조달할 수 있었다. 그조차 일본처럼 무기의 국산화에 성공한 사례는 없었다. 소총조차 외국 제품의 라이선스에 의존하였다.
그나마 청조에서 가장 유능하고 깨어 있다는 양무 대신들조차 이런 수준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양무 대신들끼리도 각자 파벌을 형성하여 서로에 대하여 정치적 경쟁 상대로만 여겼을 뿐 국가를 위하여 협력하기를 거부했다. 이들이 본질적으로 봉건 관료들였던 탓도 있지만 한족의 힘이 지나치게 커지기를 우려하는 청 황실과 만주족 귀족들의 견제 때문이기도 했다. 한족 관료들은 항상 만주족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처지였다. 나태하고 무능하기 짝이 없는 황실을 비롯한 대다수 만주족들은 자신의 부귀영화만 지킬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다는 식이었다. 이들은 한족의 힘으로 중국을 부강하게 만들어 자신들이 권력에서 밀려나는 쪽보다는 차라리 외세에 기대는 쪽이 더 낫다는 식이었다. 쑨원은 이런 행태에 대하여 "천하가 한인들의 손아귀가 넘어갈까 두려워서 차라리 친구에게 줄 망정 머슴에게는 주지 않는다는 속담처럼 중국의 영토와 주권을 외세에게 넘겨주었다."라고 비판하였다. 양무운동은 국지적, 지엽적이었고 정책의 연속성도 없었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중국을 부강하게 만드는데에는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하였다. 그 결과가 청일전쟁에서의 호된 참패였다.
청과 일본은 비슷한 시기에 열강들에 의해 강제로 문호를 개방한 후 근대화에 착수했으며 10여년의 내전을 겪었다는 점에서 유사점이 많았다. 게다가 청은 일본보다 훨씬 영토가 크고 인구가 많으며 동원할 수 있는 자원과 재정 역량에서도 월등히 우월하였다. 1884년 조선에서 청군은 일본군을 압도하였다. 일본군은 조선에서 일시적으로 물러나야 했다. 하지만 일본은 와신상담하였고 국론을 집결시키는데 성공하였다. 반면, 청나라는 조정에서 만주족과 한족 사이에 권력 다툼이 갈수록 심화되었고 양무운동의 수장이었던 리훙장은 정적들에 의해 사실상 권좌에서 밀려났다.
청일전쟁이 터지자 일본군은 일방적으로 청군을 격파하였다. 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함대였던 북양함대는 규모면에서 우세했음에도 압록강 해전(황해 해전)에서 완전히 괴멸했으며 모항인 웨이하이웨이마저 일본에게 함락당하였다. 일본군이 랴오둥을 점령한 후 베이징마저 위협하자 속수무책이었던 청조는 굴복할 수 밖에 없었다.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청은 2억량(3억 2천만엔)의 배상금을 일본에게 지불키로 약속하였다. 이는 당시 청나라 연간 세입의 약 3배, 일본의 4배에 달하는 금액이었고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지출한 전쟁 비용(1억9600만엔)을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는 돈이었다.
중국이 일본과의 경쟁에서 패배한 것은 결코 군사력의 열세도, 재정의 빈약함도, 국력의 열악함 때문도 아니었다. 오히려 일본은 철강, 석탄, 근대 공업 등 전반적인 국력에서 중국보다 열세에 놓여 있었다. 그럼에도 중국이 패배했다는 사실은 진짜 원인은 다른 곳에 있다는 얘기였다. 캉유웨이(康有爲), 량치차오(梁啓超), 탄쓰퉁(谭嗣同) 등 당대의 명망있는 한족 지식인들은 중국이 살아남으려면 일본의 메이지 유신처럼 정치와 사회 구조 전반에 걸친 대대적이고 급진적인 개혁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광서제는 이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1898년 6월 11월 "무술 변법(戊戌變法)"을 선언하고 정치, 사회, 교육 등 전반에 걸친 개혁에 나섰다. 특히 서구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단순히 "동도서기"식으로 서구식 무기만 도입해서는 한계가 있으며 서구를 이해하고 실질적인 근대화를 추진할 수 있는 새로운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는데 인식을 같이 하였다. 이에 따라 국자감을 대신하여 중국 최초의 서구식 대학인 경사대학당(京師大學堂, 오늘날의 베이징대학)을 설립하였다.
하지만 그의 개혁정책은 얼마되지 않아 서태후를 비롯한 조정을 장악하고 있었던 보수 반동적인 정치 세력들의 강력한 반발에 직면하였다. 이들이 누리던 기득권을 심각하게 위협하였기 때문이었다. 서태후가 군권을 쥔 위안스카이와 손을 잡고 쿠테타를 일으키면서 광서제는 연금되었고 캉유웨이 등 변법파 지도자들은 해외로 망명하거나 체포되어 참혹하게 처형되었다. 변법파의 몰락은 조정내 권력 싸움에서 패배했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전통적인 질서를 지키려고 하였던 중국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조정의 대다수 관료들은 물론이고, 지방을 장악하고 있었던 향신 세력들 역시 대체적으로 보수적이었고 서구 열강의 침략과 기독교의 유입에 강력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광서제의 서구화 정책은 결과적으로 국론을 더욱 분열시켰고 외세에 대한 배척은 "의화단의 난"으로 폭발하였다.
의화단(義和團)이란 18세기부터 산둥성과 허난성, 장쑤성 등지에서 활동하는 종교적인 비밀결사조직이었다. 이들의 교리는 유교와 불교, 도교 등이 뒤섞여 있었고 서유기에 나오는 손오공, 저팔계 따위를 신으로 숭상하면서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무술을 익혔다. 또한 기독교가 전파되자 반기독교 운동에 앞장서서 교회를 공격하고 선교사를 살해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들이 어떤 교리를 가지고 어떤 활동을 하건간에 조정으로서는 묵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백련교도나 태평천국의 난처럼 조직화될 경우 언제라도 조정을 투쟁 대상으로 삼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처음에는 엄중하게 단속하였지만 청일전쟁의 패배로 조정의 힘으로는 더 이상 외세를 몰아낼 수 없게 되자 조정 내에서도 이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관료들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 의화단 병사들.
게다가 서태후는 서구 열강이 자신을 끌어내리고 광서제를 복귀시키려고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격분하였다. 1900년 6월 20일 베이징에서 독일 전권 대사인 폰 케틀러(Von Ketteler) 남작이 의화단원에 의해 살해되면서 열강과의 관계는 극단으로 치닫았다. 다음날 서태후는 선전 포고를 선언하고 베이징의 각국 공사들에게 24시간 내에 중국을 떠나라고 통보하였다. 또한 의화단을 베이징으로 끌어들였다. "부청멸양"을 외치며 베이징으로 들어온 의화단은 무려 20만명이 넘었고 거대한 정치 세력으로 부상하였다. 의화단은 이것을 배경으로 그동안 의화단을 탄압하거나 외세와 가까웠던 관료들을 처벌하고 배외적인 인물로 교체하라고 주장하는 등 당장 정치 개입에 나섰다. 그러나 8개국 연합군이 결성되어 중국을 침공하였다. 50여척의 군함 2만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막강한 연합군은 톈진을 점령한 후 퉁저우를 거쳐 단숨에 베이징을 몰아쳤다. 청국군과 의화단은 이들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서태후와 광서제는 평민으로 변장한 후 간신히 도망쳤고 8월 17일 베이징은 연합군의 손에 들어갔다. 열강들은 서태후를 비롯한 전범들을 처형할 것과 10억량에 달하는 배상금 지불, 외국군의 주둔을 요구하였다. 그야말로 굴욕적이었다. 리훙장이 나서서 길고 지루한 교섭 끝에 1901년 9월 7일 신축 조약이 체결되었다. 천문학적인 배상금은 어느 정도 탕감은 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4억 5천만냥에 달했다. 12년 치 세수와 맞먹는 금액이었다. 당시 중국 인구가 4억 5천만명 정도였으니 1인당 1냥씩 열강에게 대든 "벌금"을 부과한 셈이었다. 청일전쟁과 의화단의 난으로 만신창이가 된 청조로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액수였다.
청조는 39년 동안 나누어 갚아야 했고 연 이율 4%를 합한다면 무려 원금의 두배에 달하는 9억 8천만냥에 달했다. 이전에 청조가 지불했던 배상금과는 감히 비교가 되지 않는 액수였다. 주요 세수인 관세와 염세가 차압당했고 민중들에게 가혹한 세금이 부과되었다. 이것은 청조의 재정난을 더욱 가중시켜 근대화 노력을 가로막았으며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경기 침체로 이어졌다. 결국 민중의 불만이 폭발하면서 신해혁명이 터지게 된다. 청조가 무너진 뒤 위안스카이의 북양 정권은 열강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겠다는 것에만 급급한 나머지 청조 시절의 불평등 조약을 그대로 계승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뒤 독일, 오스트리아에 대한 배상금 지불은 중지되었고 제정 러시아가 붕괴된 후 러시아에 대한 배상금 지불도 중지되었다. 하지만 미국과 영국, 일본, 프랑스 등 다른 열강들에 대한 배상금은 여전히 남아 있었고 장제스가 북벌에 성공한 뒤 외교적 교섭으로 일부 탕감되기는 했지만 매년 세출의 20% 이상을 차지하였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뒤 배상금 지불은 정지되었다. 1902년부터 1938년까지 중국 정부가 지불한 액수는 6억 7천만냥이었고 전체 배상금의 68%에 달했다. 그 중에서 일부는 학교를 건립하거나 중국인 유학생을 위하여 쓰이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가 미국이 1911년에 설립한 칭화대학이다. 하지만 그렇게 쓰인 돈은 전체에 비하면 미미하기 짝이 없었으며 열강들로부터 신축 배상금을 완전히 탕감받은 것은 태평양전쟁 중인 1943년이었다. 장제스 정권은 루즈벨트 행정부와 교섭하여 열강들의 중국 내 모든 이권과 불평등 조약를 폐기시키는데 성공하여 비로소 굴욕적인 역사를 완전히 청산할 수 있었다. 물론 이것은 아직은 먼 훗날의 일이다.
청조는 거액의 배상금 이외에도 베이징과 톈진을 비롯한 중국의 주요 대도시와 전략적 요충지마다 외국 조계와 군대의 주둔을 받아들여야 했다. 조계는 중국의 주권이 미치지 못하는 치외법권이기에 영토를 열강들에게 할양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특히 청조가 선조의 발흥지라면서 오랫동안 성지처럼 여기던 만주는 러시아의 반식민지로 전락하였다. 나날이 기울어져 가던 청나라로서는 의화단의 난은 그야말로 결정타나 다름없었다. 광대한 중국 대륙은 여러 열강들의 각축장으로 전락하였다.
성급하게 열강들에게 선전포고하고 의화단을 끌어들인 것은 서태후 최대의 실책이었다. 조정 내에서도 군기대신 룽루(榮祿)와 위안스카이 등 많은 관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고집은 결과적으로 중국 역사상 최악의 재앙으로 돌아왔다. 지금까지도 서태후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나뉘어진다. 어떤 학자는 청나라는 이미 '천명'이 다했으며, 그나마 그녀가 있었기에 조금이라도 더 오랫동안 존속될 수 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푸이의 스승이었던 레지널드 존스턴을 비롯해 청조의 몰락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직접 지켜보았던 사람들, 대부분의 후대 연구자들은 서태후가 제국의 마지막 숨통을 끊어놓았다고 믿는다.
물론 역사란 칼로 물을 베듯 흑과 백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성급하게 이분법적으로 평가하거나 어느 한 사람, 우연한 사건 하나에 모든 책임을 떠넘겨서는 안된다. 모든 역사는 양면성을 가지며, 서태후 역시 마찬가지였다. 청 황실의 남성들은 하나같이 나약하고 무기력하였다. 그들에 비한다면 서태후는 분명 여걸이었고 강력한 리더쉽과 결단력을 갖추었다. 주도면밀했던 그녀가 실권을 쥐게 된 것은 필연적인 결과였다. 그녀의 존재 덕분에 청조가 지탱되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으며, 서태후가 사라지자 청조 또한 사라졌다. 만약 그녀가 없었다면 청 황실은 일찌감치 껍데기로 전락하거나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왕조가 아닌, 중국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서태후의 수렴청정은 청나라를 소생시키지 못하였고 다 죽어가는 환자의 생명을 조금 더 연장한 것에 불과하였다. 이른바 "대륙의 딸"로 불리는 중국계 베스트셀러 작가 장융의 말대로 설령 그녀가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들 결코 개화된 신여성은 아니었다. 오히려 자금성 깊숙한 곳에 갖힌 채 시류에 어두운 무지몽매한 여성이었다. 또한 국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기보다는 자신의 권좌에 연연하는 보수 반동적인 정치가였다. 광서제의 서구식 정치 개혁이 자신의 권위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쿠테타를 일으키고 변법파 관료들을 참수했던 것은 다름아닌 서태후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청조가 몰락한 모든 책임이 그녀 한 사람에게 있는가. 그녀는 수구파의 상징이었을 뿐, 대부분의 조정 관료들 또한 서태후와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청조의 실질적인 통치로서 뛰어난 통찰력과 추진력을 갖추었고 직접 전 세계를 돌아보면서 개화된 지식인이기도 했던 리훙장조차 스러져가는 청조를 되살리기에는 역부족이었는데 하물며 그녀가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개혁이 실패한 이유는 어느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중국 사회가 오랫동안 내포하고 있었던 부조리함과 낙후성 때문이었다. 캉유웨이를 비롯한 당대 많은 지식인들이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것이 서태후 때문이라고 모든 비난을 그녀에게 집중시켰다. 이는 직접적으로 제2차 아편전쟁 당시 파괴되었던 이허위안(頤和園)의 재건과 서태후의 60세 생일을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해군의 예산을 전용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리훙장은 신형 군함의 구매 계획을 취소할 수 밖에 없었고 청일전쟁의 패배에 일조하였다.
하지만 간과해서는 안되는 사실은 서태후와 상관없이 북양 함대에 대한 예산은 이미 청일전쟁이 일어나기 수년 전부터 대폭 축소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리훙장의 세력이 지나치게 커질까 우려한 만주족들의 견제 때문이었다. 청나라가 1870년부터 1890년까지 약 20년 동안 해군력 건설에 투자한 돈은 이미 은화로 약 1억 냥에 달했다. 반면, 같은 시기 일본 정부가 문무관료들의 봉급을 10%씩 일괄 절감하고 대대적인 대국민 모금운동까지 벌였음에도 겨우 약 6천만냥(9천4백만엔)만을 투자할 수 있었다. 북양해군은 규모면에서 일본해군보다 우세하였고 7천톤급 장갑 순양함 거함 딩위안(定遠)과 전위안(鎭遠)은 두려움의 존재였다. 이런 점에서 단순히 이화원 건립에 얼마간의 돈을 유용했다고 해서 그 때문에 패배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전쟁이 일어났을 때, 딩위안(定遠)과 전위안(鎭遠)의 305mm 주포에는 포탄이 각기 1발과 2발 총 3발 뿐이었고, 그나마 납품업자가 화약 대신 흙을 채워넣어 아무런 쓸모도 없었다. 뒤늦게 보고를 받은 리훙장이 부랴부랴 포탄 재고를 확보하라고 지시했지만 실행되지 않았다. 조정 내 만주족들의 견제, 한족 관료끼리의 파벌 싸움, 아편에 완전히 찌들어 있던 병사들과 근대 해군 전술에 어두운 무능한 지휘관들, 북양파와 광둥파 사이의 파벌 싸움, 리훙장의 전략적 지도 능력 결여, 능력보다 출신 배경과 친분을 중시하는 중국 특유의 측근 인사, 관료들의 뿌리깊은 태만과 부정부패 등.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설령 서태후를 위하여 해군 예산을 전용하지 않았다고 한들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청의 패배는 근본적으로 봉건적이고 낙후된 정치 시스템에 있었던 것이다. 또한 리훙장은 조정 내에서 가장 유능한 관료였지만 그 역시 서태후와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는 전통적인 유교식 봉건 사회에서 탈피하지 못한 구식 정치가였다. 그의 모습은 당대 개혁파 관료들이 가지고 있었던 한계를 보여준다.
* 청나라의 마지막 몸부림
황궁으로 돌아온 서태후는 즉시 자희신정(慈禧新政)에 착수하였다. 그녀는 만주족과 한족 사이의 차별을 없애고 헌법 초안을 마련하는 등 그동안의 반동적인 정책을 버리고 정치와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에 나섰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는 둥칭 철도(만주어리에서 만주를 관통하여 동쪽으로는 다롄, 서쪽으로는 수분허를 통해 시베리아 철도와 연결되는 총연장 1,480km의 철도로 현재는 하얼빈 철도라고 불린다)중 창춘 이남의 남만주 철도 소유권과 다롄, 뤼순의 조차권 등 그동안 만주에서 누리던 이권을 일본에게 넘겨야 했다. 청조는 일본과 교섭하여 남만주 철도와 다롄, 뤼순의 조차권 이외의 대부분의 주권을 회복하였다. 이는 분명 고무할 만한 일이었으나 너무나 때늦은 것이기도 하였다. 많은 중국인들이 여전히 청조를 지지했지만, 한족 지식인들은 냉소적이었고 그동안 외세를 상대로 보여주었던 무력한 청조의 모습에 더 이상 중국의 장래가 없다는 생각이 점점 확산되었다. 그녀의 개혁은 기본적으로는 만주족이 통치하는 체제를 지탱하는데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주족과 한족의 차별은 여전하였으며 입헌 군주제는 명목상일 뿐이었다.
광서제는 자식이 없었기에 후계자는 서태후에 의해 선택되었다. 이전에 그녀는 순친왕과 룽루의 딸을 결혼시키면서 두 사람 사이에 자녀가 태어난다면 황위를 계승시키겠다고 약속한 적이 있었다. 이는 단순히 서태후 개인의 야욕이라기보다는, 순친왕이 광서제의 동생이었고 황실의 오랜 법통상 광서제의 다음 항렬인 순친왕의 자식이 황위 계승권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였기 때문이었다. 1908년 11월 14일 광서제가 죽자말자 마찬가지로 사경을 헤메고 있었던 서태후는 순친왕 짜이펑을 불러서 그의 아들인 푸이(溥儀)에게 황위를 넘긴다는 조서를 내렸다. 푸이는 고작 2살 짜리의 어린 아이였으므로 자연스레 짜이펑이 섭정을 맡게 되었다.
하지만 짜이펑 역시 25살에 불과한 풋내기였다. 그는 싹싹하고 사교적인 성격이었고 의화단의 난이 실패한 뒤 중국 정부를 대표하여 사죄사로 유럽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또한 학문에도 상당한 재능을 보였으나 우유부단하고 의지가 박약한 전형적인 온실 속의 도련님이었다. 그의 관심사는 정치가 아니라 경극이나 유희였다. 이런 그가 전례없는 국난의 위기 속에서 무슨 수로 거대한 제국을 떠맡을 수 있단 말인가. 서태후는 노회한 노인일 뿐, 자금성 밖의 위기가 얼마나 심각한지 끝까지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리훙장이 죽은 뒤 북양군을 앞세워 조정의 실권자가 된 위안스카이는 푸이를 후계자로 삼는데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그는 짜이펑과 사이가 나빴기 때문에 푸이가 황제가 된다면 자신이 몰락할 것은 분명하였기 때문이었다. 위안스카이가 내세운 인물은 도광제의 증손자이자 장손으로 자정원 총재를 맡고 있었던 푸륜(溥倫)이었다. 그는 34살이었기에 3살짜리 어린아이보다는 좀 더 옥좌에 어울렸을 것이다.
만약 푸이 대신에 푸륜이 황제가 되었더라면 위안스카이는 그에게 충성을 바쳤을 것이며 청조의 수명 또한 조금은 더 연장되었을지 모른다. 그렇다고 얼마나 달라졌을 것인가. 옥좌에 오르지 못한 푸륜은 죽는 날까지 위안스카이와 관계를 돈독하게 유지하면서 훗날 위안스카이가 청조를 멸망시킨 후 자신이 황제가 되려고 하자 푸륜은 황실의 대표를 자처하면서 뻔뻔스럽게도 제일 먼저 위안스카이 앞에서 고두의 예(三跪九叩: 황제 앞에서 세 번 무릎을 꿇고 각각 세 번씩 머리를 땅에 닿도록 조아리는 신하의 예)를 하였다. 어차피 최소한의 지조도, 체면도 없는 아첨꾼만 남은 것이 바로 망국의 황족들이었던 것이다.
1908년 12월 2일, 자금성 태화전에서 황제 즉위식이 거행되었다. 아이신기오로 푸이가 청조의 12번째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로 등극한 것이다. 즉위식은 성대했지만 치세가 3년도 채 가지 못할 줄을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짜이펑은 섭정이 되었다. 조정은 만주족 친귀(親貴, 황실과 귀족의 자제)들이 득세하였다. 그들에게 눈의 가시는 한족이면서 군권을 쥐고 있었던 위안스카이였다. 사방에서 위안스카이가 사사로이 패거리를 만들어 황제와 조정을 농단한다며 목을 베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짜이펑 역시 위안스카이를 없애버리고 싶었지만 마땅한 명분이 없었다. 위안스카이는 북양군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함부로 그를 죽였다가는 어떤 사태가 벌어질 지 몰랐다. 짜이펑은 측근들을 불러 모아서 위안스카이를 어떻게 처리할 지에 대해 물었다.

▲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감독의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 대청 제국의 황제로 즉위한 푸이. 황제로 시작하여 서민으로 마감했던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그런데 황실의 원로인 경친왕 혁광(奕劻)이 앞장서서 반대하였다. "청나라 제일의 탐관오리"라고 불리었던 혁광은 평소 매관매직과 뇌물을 받기로 소문이 난 사람이었다. 물론 위안스카이에게도 많은 뇌물을 받고 있었다. 그는 짜이펑에게 "북양군이 반란을 일으키면 어떻게 할 것이냐?"라고 질타하였다. 조정의 원로로서 리훙장과 함께 명성을 떨쳤던 장즈퉁(張之洞) 역시 위안스카이를 죽여서는 안된다면서 다만 관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낙향시키자고 말하였다. 짜이펑은 우유부단하고 결단력이 없는 용렬한 인물이었다. 아무리 위안스카이가 밉다고 해도 두 원로가 반대하는 이상 더 이상 자신의 뜻을 밀어붙일 수 없었다.
한편, 위안스카이는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제아무리 북양군의 영수이며 입궐할 때 수백여명의 무장 친위대를 대동하고 다닌다고 해도 자신은 황제의 신하일 뿐이었다. 짜이펑의 말 한마디이면 하루 아침에 목이 달아날 수 있었다. 무조건 엎드려 있으면서 황실과 만주족 귀족들에게 거액의 뇌물을 뿌리며 자신의 구명을 하러 다녔다. 그러다 장즈퉁의 건의가 받아들여졌다는 말에 비로소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야말로 사지를 벗어난 것이었다. 그는 재빨리 병을 칭하고 베이징을 벗어나 톈진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은거하면서 중앙의 상황을 지켜볼 생각이었다. 그의 나이 45세. 야심가로서는 충분히 숙련되고 자신감이 넘칠 시기였다.
비록 황실의 운명이 산소 호흡기를 단 채 간신히 연명하고 있다고 해도, 위안스카이가 순순히 물러난 것은 어쨌거나 청조의 권위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였다. 만약 신해혁명 이후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공화국 정부가 그를 내쫓으려고 했다면 어떠했을까? 위안스카이는 코웃음을 치고 당장 군대를 동원하여 정부를 전복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짜이펑이 위안스카이를 복종시킬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뿐이었다. 그는 청조를 살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내버린 셈이었고 두번 다시 기회는 오지 않았다.
섭정이 된 짜이펑은 쇠락해 가는 국운을 어떻게든 회복해 보려고 안간힘을 다하였다. 그는 입헌군주제를 비롯해 서태후가 추진하던 각종 개혁을 결코 중단하지 않았다. 광서제가 죽기 직전인 1908년 8월 27일 조정은 예비 헌법으로서 "흠정헌법대강(钦定宪法大纲)"을 발표하면서, 9년 후인 1917년에는 정식으로 헌법을 제정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이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본딴 것이었으나 "대청황제는 무한한 권리를 누린다"고 되어 있다는 점에서 실상 헌법을 통해 전제 군주권을 확립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이는 서구의 입헌군주제도가 황제의 권력을 제한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과는 정반대였다. 또한 중앙에는 자정원(資政院), 지방에는 자의국(諮議局)을 각각 설치키로 약속했지만 이 기관들은 어디까지나 자문 역할만 맡을 수 있었다. 실질적인 서구식의 의회 제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나마 언제까지 설치한다는 정해진 기한조차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국회를 수립하라는 입헌파들의 상소가 빗발치자 짜이펑은 1910년 11월 4일에 칙령을 발표하여 국회를 1913년까지 반드시 개설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짜이펑으로서는 상당한 양보였을지 몰라도, 그 정도로는 입헌파들에게 결코 만족스럽지 못하였다. 만약 그가 욕심을 버리고 입헌군주제의 실시와 황제의 통치권을 제한하는데 동의했다면 청조는 몰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1911년 5월 10일 그가 조직한 새로운 내각은 정반대였다. 13명의 각료 중에서 만주족이 9명이었고 한족은 4명이었다. 절반이 넘는 7명이 황족이었기에 사람들은 "황족 내각"이라고 불렀다. 이는 짜이펑의 목표가 새로운 중국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아들을 중심으로 만주족의 지배 체제를 더욱 강화하는데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한마디로 시계 바늘을 거꾸로 돌리겠다는 셈이었다.

▲ 황실 내각을 구성한 만주족 친귀들. 가운데 앞줄이 경친왕 혁광.
하지만 당시의 청나라가 이미 말기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여전히 청조의 지위는 탄탄하였다. 청일전쟁과 의화단의 난이 불러왔던 정치적 혼란은 어느 정도 잠잠해졌고 경제적으로도 꾸준히 성장하고 있었으며 지방의 치안 또한 비교적 안정을 찾았다. 대다수 민중에게 조정은 여전히 절대적인 존재였다. 체제 타도를 꿈꾸는 혁명 조직들은 엉성하기 짝이 없었고 어설픈 계획으로 무모한 거사를 일으켰지만 그때마다 여지없이 진압당했다. 우창 봉기가 일어나기 전 모든 혁명 운동은 모조리 실패하였다. 군권을 한손에 쥐고 있었던 위안스카이조차 짜이펑의 말 한마디이면 생사를 좌지우지할 수 있었다. 신해혁명 이후부터 마오쩌둥이 철권통치를 하기 전까지 약 40년간 스쳐갔던 중화민국 시절의 역대 정권들이 적어도 이 시기의 짜이펑 정권보다 더 강력한 치세를 누렸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짜이펑은 모든 면에서 서태후에도 미치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나름대로의 개혁을 추진했지만 역량도 부족했고 추진력도 없었다. 서구식 입헌제도가 무엇인지, 중국의 무엇을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지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따라서 그의 개혁은 실상 흉내만 내는 것일 뿐, 어정쩡한데다 어떤 면에서는 보수 반동적이었다. 개혁의 속도는 너무 느렸다.
그가 무엇보다도 간과한 사실은 중국 사회가 이미 변화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짜이펑과 만주 친귀들은 청조의 오랜 권위에만 의존했을 뿐, 지방에서 거대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한족 엘리트들과의 소통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한족 엘리트들은 언론을 통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높이고 서로 연계하였다. 결국 청조를 무너뜨린 것은 쑨원의 혁명당도, 위안스카이의 군대도 아니라 이들 향신 세력이었다. 청조가 단순히 짜이펑 한 사람의 무능함 때문에 몰락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그동안 청조의 생명을 지탱하던 산소호흡기마저 떼어버렸다.
결정적으로 청조의 운명에 종지부를 찍게 한 사건은 바로 철도였다. 메이지 유신 초기부터 철도의 중요성을 인식하였던 일본과 달리, 청조의 관료들은 철도가 외세의 침략에 이용될 수 있다는 이유로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청일전쟁에 패배한 뒤 청조는 외세의 강요에 못 이겨 철도 부설권을 나누어 주었다. 영국, 독일, 러시아, 미국, 일본 등 열강들은 경쟁적으로 철도 건설에 뛰어들었다. 1902년까지 열강들이 공여한 철도 차관은 4,800만 달러에 달했고 신해혁명 직전에 오면 거의 2억 달러에 달하였다. 철도는 곧 열강의 지배를 의미하였다. 군대를 실어나르고 자원을 채굴하여 운송하는데 철도의 역할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열강들은 서로의 이해 관계가 충돌하지 않도록 배타적인 세력권을 정하고 그 지역의 철도 부설권을 독점하였다. 이로 인해 중국이나 다른 국가들은 경쟁 철도를 건설할 수 없었다. 자력으로 외세를 몰아낼 수 없는 청조는 전통적인 외교 전략인 "이이제이"로 외세를 서로 경쟁시켜서 어부지리를 얻기를 원했으나 냉엄한 국제 외교에 대한 인식 부족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중국은 명목상의 주권만 있을 뿐, 실질적으로 외국에게 영토를 빼앗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뒤늦게야 청조도 문제점을 인식하고 1903년 11월 <철로간명장정(鐵路簡明章程)>을 발표하였다. 철도 경영을 원하는 사람은 철도공사를 설립하고 주식을 발행하여 자금을 모으되, 50만량 이상의 자금을 모아야 하며 허가일로부터 6개월 이내에 착공해야 하였다. 또한 철도를 차관의 담보로 제공하거나 외국인 자본을 끌어모으는 것을 엄중히 금지하였다. 즉, 국내 자본에 의한 철도 건설을 장려하여 더 이상의 철도 이권의 유출을 막고 열강들에게 넘어간 철도 부설권을 회수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철로간명장정이 발표된 후 중국 각지에서는 "중국의 철도는 중국인의 손으로"라는 슬로건 아래 지방 성정부와 민간이 협력하여 철도 공사를 설립하고 철도 부설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쓰촨성에서는 민간에서 자본을 끌어모아서 촨한철도(川漢鐵道, 청두와 한커우를 연결하는 철도)의 건설을 계획하였고, 광둥성에서도 미국인이 소유하고 있던 웨한철도(粤漢鐵道, 한커우와 광저우를 연결하는 철도)의 부설권을 사들이기도 하였다. 이런 국권회수운동을 위한 자본은 중국 내에서 모은 자본 이외에도 미국과 유럽, 동남아 등지에서 화교들이 피땀 흘러 번 돈을 송금한 것이었기에 중국인들로서는 의미가 컸다.
하지만 목표대로 건설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 낙후되고 가난한 중국의 현실상 민간 자본이 매우 빈약한데다 민족 감정만 앞세운다고 해서 아무런 노하우도 없이 철도를 건설하고 경영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조정 관료들 역시 생각이 서로 달랐다. 외세를 경계하고 민족 감정을 지지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중국의 부국강병을 위해서 하루라도 빨리 철도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도 있었다. 잠시 외세에 양보하여 돈을 빌리더라도 빨리 갚으면 그만이 아니냐는 식이었다. 조정의 의견이 일치되지 못하다보니 원칙도 방향도 없고 정책은 주먹구구식이었다. 서구에 대한 이해도, 중국 사회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에 대한 체감도 제각각이었다. 관료들은 서로의 갈등을 조정하여 거국적으로 협력하기보다는 각자의 입장과 이해 관계만 고집하면서 파벌을 형성하고 대립하였다. 이를 조율할 능력이 없기는 황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뭔가를 하려고 해도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고 국가의 역량을 하나로 모을 수도 없었다.
1904년 4월에는 광둥성에서 200만원의 자금으로 차오센 철도(潮仙鐵道, 광둥성 산터우와 차오저우를 연결하는 철도, 총연장 42.1km)가 건설되어 1906년 11월 개통되었다. 차오센 철도는 주로 광둥성과 동남 아시아의 화교들로부터 모은 자금으로 철로간명장정이 선언된 후 중국 자본으로 건설된 첫번째 철도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자금 부족으로 200만원 중 100만원은 타이완의 일본 총독부에서 몰래 빌린 것이었다.
또한 촨한철도의 건설을 추진하던 쓰촨성 정부는 철도 건설에 필요한 자금이 모이지 않자 각계각층의 주민들에게 강제로 징수한 후 철도 주식을 나누어 주었다. 은화 50량 당 철도 주식 한장씩이었다. 철도 건설에 투자한 사람들은 지방 총독부터 향신과 상인, 일반 농민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였다. 특히 가난한 농민들에게는 심각한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필요한 자금에는 턱없이 미치지 못했기에 철도 건설은 계속 지연되었다. 이것은 쓰촨성만이 아니라 중국 전역의 모습이었다.
1911년 1월 우선부상서(郵船部尚書, 교통부장관)에 성쉬안화이(盛宣懷)가 임명되었다. 성쉬안화이는 대대로 상인이 많기로 유명한 저장성 출신이다. 그는 리훙장의 막료로서 양무운동을 주도했으며 대표적인 관료 자본가로서 국가 자본을 이용하여 조선소와 제철소, 방직 공장, 전신 사업 등 근대 산업을 대대적으로 육성하고 그 과정에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등, 19세기 말 청나라 제일의 거상이었던 후쉐엔(胡雪岩)과 함께 "중국실업(中國實業)의 아버지"라고도 불리운다. 또한 톈진에 중국 최초의 공업대학인 북양대학당(현재의 톈진대학)을 설립하는 등 근대 교육의 보급에도 앞장서는 등 청말 근대화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하지만 성쉬안화이는 매우 완고한 보수 관료이기도 했다. 철도는 국가 동맥이다. 이렇게 중요한 사업은 마땅히 국가가 주도해야 한다고 여겼다. 국가가 돈이 없다면 외채를 빌려서라도 신속하게 추진해야지, 민족 감정만 앞세워서 자금도 빈약하고 경험도 없는 민간에 맡겨서는 언제까지고 죽도 밥도 안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는 짜이펑에게 강력하게 철도 국유화를 건의하였다. 짜이펑은 그의 건의를 받아들여 영국과 프랑스, 미국, 독일 4개국 은행단과 논의한 후 연 이율 5%의 조건으로 550만 파운드의 철도 차관을 빌리기로 하였다.
또한 1911년 5월 9일에는 전국의 철도에 대한 국유화가 전격적으로 선언되었다. 황족내각이 수립된 다음날이었다. 물론 짜이펑 입장에서는 국내 자본과 전문 인력의 부족 등으로 철도 건설이 몇년 째 지연되는 현실에서 일정 부분 불가피한 결정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유가 어떻든 철도 이권을 다시 외세에게 넘겨주기로 한 것은 결국 청조의 무능함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었다. 이것은 중국 사회에서 고조되고 있는 민족주의 분위기를 완전히 무시한 것이었다. 특히 민중의 불만에 불을 지핀 것은 철도 주식을 이미 구매한 사람들에 대한 보상이 형편없었다는 사실이다. 액면가의 60%만 현금으로 되돌려준데다 그동안의 이자도 없었다. 결국 40%의 손해를 백성들에게 떠넘긴 셈이다. 짜이펑이나 성쉬안화이 등 오랫동안 조정의 권위를 누리는데 익숙했던 중국의 권력자들은 열강들에게는 한없이 저자세이면서도 민중의 불만이나 여론에는 둔감하였다. 그들에게 백성은 다스려야 할 존재이지 타협할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불만이 어떻게 폭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당장 창사, 우한, 광저우 등 전국 곳곳에서 대규모 반대 집회가 열렸다. 이것을 "보로운동(保路運動, 철도수호운동)"이라고 한다.
그 중에서도 보로운동이 가장 격렬했던 곳은 쓰촨성이었다. 쓰촨총독 자이얼펑(趙爾豊)은 처음에는 보로운동에 우호적이었고 조정에도 철도 국유화를 반대한다고 건의하였다. 하지만 조정의 강력한 질책을 받자 그도 태도를 바꿀 수 밖에 없었다. 쓰촨성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보로 운동을 주도하는 자의국 의장 푸뎬쥔을 비롯한 보로 동지회의 주요 간부를 체포하는 등 대대적인 탄압에 나섰다. 9월 7일 탄압에 반발한 군중들이 총독 관저로 몰려와서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하자 경비병들이 발포하였고 그 자리에서 수십여명의 시위자가 죽거나 다쳤다. 하지만 이 사건은 진압은 커녕 민중의 불만을 더욱 자극했을 뿐이었다.

▲ 보로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 중인 쓰촨 신군.
보로 동지회 회원들은 무장 봉기를 일으켜 청군을 격파하고 여러 현성을 점령하는 등 그야말로 쓰촨성은 내란에 직면하였다. 9월 말이 되면 봉기군은 이미 10만명이 넘을 정도였다. 짜이펑은 부랴부랴 자이얼펑을 파면하고 즈리 총독이자 철도 국유화의 책임을 맡고 있던 돤팡(端方)에게 군대를 이끌고 쓰촨성으로 들어가서 반란을 진압하라고 명령하였다. 돤팡은 우한에 배치된 후베이 신군 제8진 2개 연대를 이끌고 청두로 진군하였다. 하지만 그로 인하여 우한의 방비가 취약해졌고 결국 우창 봉기가 일어났다. 돤팡 역시 반란군에 의해 참혹하게 살해되었다. 성쉬안화이도 철도 국유화를 건의했다는 죄목으로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고 삭탈관직되어 일본으로 도망쳐야 했다.
청조가 몰락한 것이 당시의 위정자들이 무능하고 완고하여 시대에 뒤떨어졌거나 제 이익만 생각하는 매국노들이 조정을 장악해서라고 여긴다면 지극히 단순한 생각이다. 중국 사회에 반청 혁명 의식이 점점 확산되고 서구 열강들이 경쟁적으로 침투하는 대내외적인 위기 속에서 청 황실과 조정은 단결하여 국난을 헤쳐나가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오히려 보수파와 개혁파로 분열되었다. 게다가 리훙장과 서태후의 죽음으로 그나마 청조를 지탱하던 유일한 구심점마저 사라졌다. 그들의 뒤를 이은 짜이펑과 위안스카이는 오히려 권력의 주도권을 놓고 서로 대립하고 경쟁하기에 급급하였다. 자희 신정 이후 중국은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고 있었지만 정치적 혼란과 갈등 속에서 위기를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서구식 가치관도 함께 유입되면서 향신 계층을 중심으로 반청 민족주의와 자유 민권주의가 확산되었다. 청조의 입장에서는 태평천국의 난 당시보다도 더욱 체제의 위기에 직면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황족 내각의 구성과 철도 국유화의 강행은 근근히 유지되던 청조의 마지막 숨통마저 끊어놓는 최후의 한발이었다. 그나마 청조에 충성하던 사람들마저 청조가 더 이상 희망이 없다면서 등을 돌리고 반청 혁명에 앞장서게 되었다. 하지만 청조는 오히려 어떻게든 체제를 유지해 보겠다는 요량으로 더욱 보수 반동적으로 행동하였다. 쌓일대로 쌓인 중국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함 속에서 민중의 불만은 이미 폭발 직전이었다. 그리고 그 방아쇠를 당긴 것이 바로 우창 봉기이다. 보로 운동과 우창 봉기로 시작된 중국 혁명은 순식간에 중국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청조는 도미노처럼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당시 반청 혁명 운동을 주도하고 있었던 쑨원은 "만약 보로운동이 아니었다면 신해혁명은 적어도 1년 반은 늦어졌을 것"이라고 회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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