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군의 탄생
아편전쟁 이래 반복되었던 외세와의 전쟁에서 청나라는 연전연패의 연속이었다. 조정으로서는 자국의 군사력이 얼마나 허약한지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청나라의 전통적인 주력부대는 만주족을 중심으로 하는 팔기군이다. 팔기란 중국 북부에서 사냥과 유목으로 생활하던 여진족의 수렵 조직에서 시작된 것으로, 누르하치는 여러 부족들을 팔기(八旗)로 통합시켰다. 비록 군사 기술이나 무기, 장비에서는 매우 빈약했지만 명령에 철저하게 복종하면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팔기군은 명나라 군대에게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인구 100만명에 불과했던 만주족이 중원을 침공하여 100배가 넘는 한족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팔기군 때문이었다. 청태종이 팔기를 거느리고 입관하여 베이징을 침공했을 때 20만명의 팔기군 중에서 만주족 출신은 겨우 5~6만명에 불과하였다. 대부분은 투항한 한인이나 몽골족이었다. 팔기는 한족에 비하여 숫적으로 압도적으로 열세한데다 문화에서도 뒤떨어진 만주족을 군과 민의 구분 없이 하나의 군사 조직으로 뭉치게 하였고 청 왕조가 광대한 중원을 지배하는 무력 수단이 되었다.
그러나 청왕조가 수립된지 200여년이 지나면서 팔기군은 완전히 쇠락하였다. 청조는 한족을 지배하기 위한 무력 수단으로서 만주족에 대하여 군인 이외의 다른 직업을 가지지 못하도록 했지만 오랜 평화는 이들을 나태하게 만들었다. 과거 수렵 시절의 역동적이고 진취적인 모습이 사라지면서 팔기군은 나라에서 주는 녹봉이나 받아먹으면서 무위도식하는 집단에 지나지 않았다. 한족들은 이들을 이른바 "팔기 자제"라고 부르며 멸시하였다. 청조 또한 나름대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군사훈련과 관료로서의 교육을 실시하였다. 또한 만주에 대하여 봉금령을 선포하고 한족이나 다른 민족들의 이주를 막은 것도 갈수록 나태해지는 팔기 자제들을 만주에서 둔전케 하여 만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세습적인 특권을 폐지하지 않는 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될 수 없었다. 오히려 봉금령으로 만주의 발전이 정체되면서 조선인들이 월경하는 일이 점차 빈번하면서 국경 문제가 발생하였고 19세기 중엽에 오면 러시아가 침입하자 결국 청조는 봉금령을 해제해야 했다.
청말에 오면 팔기군은 외세의 침략은 커녕 국내의 반란조차 제대로 진압할 능력을 상실하였다. 태평천국의 난에서 활약한 군대는 쩡궈판(曾國藩)의 상군(湘軍)과 리훙장의 회군(淮軍) 등 한족 출신이 주도하는 의용군, 그리고 찰스 고든(Charles George Gordon) 소령이 지휘하는 외국인 용병부대인 "상승군(常勝軍)"이었다. 이들은 서양식 소총과 장비를 갖추고 서양식 훈련을 실시하였다. 물론 서구의 군대에 비하면 구식 군대에 신식 무기를 쥐어준 것에 불과했지만 적어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팔기군보다는 나았다.
반면, 세습을 통해 군직을 물려받은 팔기군 자제들은 온실 속의 화초나 다름없는 존재들이었다. 200여년의 평화에 익숙해진 이들은 유흥과 놀이에나 관심이 있었을 뿐, 대부분 무예를 닦지도 않았고 말을 타거나 무기를 다루는 방법조차 몰랐다. 게다가 태반이 아편에 찌들어 있는 등 기강도 엉망이었다. 이들에게 군인같은 모습은 도무지 찾아볼 수 없었다. 무기력한 팔기군의 모습은 실상 260여년간 중국을 통치하였던 만주족들의 운명이 끝나가고 있음을 의미하였다. 팔기군의 지위 또한 점점 하락하여 청조는 이들의 특권을 축소하면서 만주족과 한족에 대한 구분을 철폐해 나갔다.
원래 양무운동의 핵심은 외세의 침략에 맞서기 위한 군대의 근대화에 있었다. 이를 위하여 해외에서 대량의 신식 무기를 도입하고 전국 여기저기에 군수 공장이 건설되었다. 또한 태평천국의 난에서 활약했던 상군과 회군을 중심으로 용영(勇營)이라는 신식군대가 편성되었다. 숫자는 약 30만명에 달했다. 이와 별도로 1862년에는 공친왕 혁흔(奕訢)의 주도로 톈진에서 신기영(新機營)이라는 부대가 편성되어 수도 베이징과 톈진의 방위를 맡았고 숫자는 약 3만명 정도였다. 이들은 팔기군과 녹영을 대신하는 청나라의 주력부대였다. 1885년에는 톈진에서 근대 군사 지식을 갖춘 간부를 양성하기 위한 최초의 서구식 육군 사관학교로서 북양 무비 학당이 설립되었고 독일 군사고문단을 영입하여 독일식 군사교육을 실시하였다. 돤치루이, 펑궈장, 차오쿤, 왕스진, 리쑨 등 북양 무비 학당을 졸업한 군인들은 훗날 거대한 북양 군벌을 형성하였고 신해혁명 이후 중국 정계를 장악하게 된다. 또한 1887년에는 광저우에서 해군 사관학교에 해당하는 광저우 수사학당이 설립되었다.

▲ 양무운동의 상징인 후베이 창포창(湖北枪炮厂). 호광총독 장즈퉁의 주도로 1890년 한양 다베산(汉阳 大别山) 북쪽에 건설되었으며 상하이 강남제조국, 톈진 기기국과 함께 양무운동 시기 3대 병공창의 하나로 손꼽혔다. 독일제 M1888 마우저 소총을 라이선스한 "한양88식 보총", "30절식 중기관총", "민국 10년식 75mm 산포" 등 각종 소총과 야포, 산포, 박격포, 탄약, 기관총, 지뢰 등을 생산하였다. 1908년 한양 병공창(汉阳兵工厂)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군벌 내전기는 물론, 중일전쟁과 국공내전기까지 중국 최대의 군수공장의 하나였다. 1890년부터 1909년까지 20년 동안 소총 13만정과 대포 1천문, 탄약 6천만발, 포탄 100만발을 생산했으며 1910년대 말을 기준으로 월 생산량은 소총 150정, 산포 10문, 박격포 3문, 탄약 20만발, 포탄 2천발 정도였다.
하지만 근 30여년에 걸친 양무운동의 결과는 청불전쟁과 청일전쟁의 참담한 패전이었다. 구미 열강이 아니라 변방의 소국에게도 속수무책이었다는 사실은 청나라의 보수적인 관료들에게도 충격이었다. 그동안 막연한 중화사상에 빠져 있었던 중국의 위정자들은 "중체서용(中體西用)"이라 하여 중국은 서구보다 정신적으로 우월하며 다만 근대적인 무기가 없기 때문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청군의 가장 큰 취약성은 무기와 장비의 열세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일본이 비록 봉건적인 잔재를 완전히 탈피하지는 않았다고 해도 그들의 군대는 프로이센 식으로 철저하게 훈련되었다. 근대적인 징병제도에 의해 소집 훈련된 병사들은 매우 정예하였으며 지휘관들은 일사분란하게 지휘하였다. 1888년 5월에는 서구식의 사단 편제를 채용하였고 1개 사단은 4개 보병연대(12개 보병대대)와 1개 포병연대, 기병, 포병, 공병, 수송 각 1개 대대로 편성되어 인원 1만8천여명과 마필 5500마리 등 고정된 정수를 갖추어 체계적이고 독립된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전쟁을 직접 관전하였던 구미 열강의 장교들은 일본군의 작전 역량이 자신들에게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평가를 내렸다. 이는 십여년 뒤 러일전쟁에서도 확실하게 증명하였다.

▲ 19세기 말 푸젠성에 주둔하던 팔기군 병사들. 창과 칼로 무장한 모습은 청나라 초기와 다를 바 없었으며 소수의 신식 군대를 제외하고 대다수 청나라 군대의 실상이기도 하였다. ※ 사진출처 : http://bbs.voc.com.cn/topic-232237-1-1.html
반면, 청군은 한세대 이전의 군대였다. 서구식 무기를 수입한 것 외에 실질적인 군사 개혁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팔기군과 녹영은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의 난 등 그동안의 전쟁에서 외세의 군대이건 국내의 반란이건 이미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음에도 청조는 이들을 해산시키지 않은 채 그대로 유지시켰다. 구식 군대에 오합지졸인 팔기군은 말할 것도 없고 용영 역시 완전히 노쇠한데다 시대에 뒤떨어졌다. 전국의 군대는 100만명에 달했지만 서양식 소총을 가진 자는 소수였고 대부분은 여전히 구식의 화승총과 창칼같은 냉병기로 무장하였다. 그 중에서 실질적인 전투력을 갖춘 부대는 리훙장 직속의 용영 부대 중에서도 약 3만명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평소에는 생계에 종사하다가 전시에만 소집되었기에 훈련 수준이나 사기가 형편없었다. 군대의 편성은 일정한 통일 없이 주먹구구식이었다. 군사 전문가를 육성하기 위해 북양 무비 학당이 설립되었지만 정작 졸업생들은 한직에만 임명되었다. 근대적인 군사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지휘관들은 수백년 전과 다를 바 없는 방식으로 지휘하였다. 체계적인 전략을 수립하고 병력을 조직적으로 동원하며 각 부대의 통합된 작전을 지휘할 참모본부도 없었다. 군사제도, 지휘관의 역량, 병사들의 소질 등 어느 것에서도 일본군과 비교할 수 없었다. 간부들의 기강도 엉망이라 지휘관들은 싸우지도 않고 적전도주를 하거나 허위 보고를 일삼기도 하였다. 설령 서구식 군사 교육을 받은 유능한 장교가 있다고 해도 혈연과 지연을 중시하는 청조의 구태의연하고 보수적인 분위기 속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비록 많은 병사들이 전투에서 용맹하게 싸우다 전사했지만 이런 현실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이기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였다.
또한 청조가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중국을 방어하기 위해 막대한 돈을 쏟아부어 건설한 북양함대는 일본 해군과의 전투에서 단 한척의 적함도 격침시키지 못한 채 전멸하고 말았다. 청군의 가장 강력한 군대로 손꼽히던 북양군조차 일본군 앞에서는 한낱 오합지졸에 불과하였고, 하물며 구식 냉병기와 화승총으로 무장한 팔기군과 녹영은 숫자에서는 무려 백만명에 달했지만 막상 근대전에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철저하게 서구식으로 거듭난 일본군의 막강한 공격력 앞에서 반구반신(半舊半新)의 청국군은 상대가 될 리 없었던 것이다.
청일전쟁의 패전은 그동안 맹목적인 낙관에 빠져 있었던 위정자들에게 비로소 국가 존망이라는 공전의 위기감을 주었다. 그들은 패전의 원인이 "병력이 적어서가 아니라 정예화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병력이 약해서가 아니라 전략전술이 없는데 있었다. 군제는 복잡하고 업무와 권한이 일치하지 않았으며 기율은 해이하였다."라고 솔직하게 인정하였다. 즉, 아무리 최신 무기와 장비를 가지고 있어도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이 바뀌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이며 중국이 살아남으려면 일본처럼 총체적인 사회개혁과 군사개혁을 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이를 위해서 낡은 군사제도를 혁파하고 완전한 서구식으로 군대를 훈련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청나라의 정규군인 팔기군을 신식 군대로 바꾸어 보려는 시도는 완전히 실패로 끝났다. 이들은 자신의 나태함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었고 지급받은 신식 소총을 집안 깊숙한 곳에 넣어 두었다. 훈련은 형식적이었으며 그조차도 돈을 주고 다른 사람을 대신 참석시키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다. 주변에서 전투가 벌어지면 허둥대다가 제일 먼저 도망치기 일쑤였다. 팔기군은 단순한 무력 집단이 아니라 만주족 사회 자체이기도 하였기에 아예 없앨 수는 없었지만, 조정은 이들을 굳이 개혁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현명하게도 새로운 군대를 모집하는 쪽을 선택하였다.
이후에도 팔기군은 신해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존속되었고 일부는 신식군대로 개편되어 지방의 치안을 맡았다. 또한 금위군으로서 황제를 호위하는 임무도 그들의 몫이었다. 하지만 팔기군은 끝까지 나약하고 게으런 모습을 버리지 못했다. 신해혁명으로 전국에서 신군이 봉기했을 때 이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신들의 무기를 스스로 반란군에게 넘겼다. 청조가 소멸하자 이들의 안락했던 삶도 하루아침에 끝장났다. 물론 푸이의 금위군만은 그후로도 그럭저럭 특권을 누렸지만 그것도 1925년에 푸이가 자금성에서 쫓겨나고 금위군이 해산되면서 막을 내렸다.
* 위안스카이와 신건육군
청일전쟁 이후의 군사 개혁은 양무운동처럼 몇몇 관료의 몫이 아니라, 조정이 직접 나섰다. 그 모습은 이전의 서양식 무기만 일부 도입하는 "중체서용"식 개혁과는 전혀 달랐으며, 본격적으로 서구식 군사제도를 모방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여기에 앞장선 사람이 바로 위안스카이와 장즈퉁이었다.
필자의 또래라면 2001년 KBS 드라마 《명성황후》에서 박진영 씨가 위안스카이 역을 맡아 뻔뻔하고 교활한 미소를 머금은 채 조선 조정을 들었다 놓았다 했던 장면을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위안스카이는 그야말로 시대가 낳은 풍운아였다. 그는 허난성 샹청(項城) 출신으로, 집안은 매우 부유하였고 대대로 명문세도가이기도 하였다. 그의 아버지 위안바오중(袁保中)은 벼슬을 하지 않았지만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자 의병을 조직하여 싸웠다. 또한 일가 친척 중에도 고관대작을 지낸 이들이 많았고 당대 실력자였던 쩡궈판, 리훙장과도 친밀하였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금수저"인 셈이다. 위안스카이는 학문보다 놀기 좋아하였고 향시에도 도전했지만 거듭 낙방하였다. 결국 관료가 아니라 군인이 되기로 결심하고 베이징으로 가서 연줄로 리훙장의 막료이자 경군통령(慶軍統領)을 맡고 있었던 우창칭(吳長慶)의 휘하에 들어갔다.
그가 명성을 떨치게 된 것은 조선에서 일어난 임오군란이었다. 이는 조선 내부의 문제였지만, 당시 청나라는 양무운동을 통해 정치적 안정을 누리면서 전통적인 동아시아의 종주국이라는 자신감을 어느 정도 회복하였다. 리훙장은 오랫동안 중국의 번국으로 취급하였던 조선에서 일본의 세력을 몰아내고 영향력을 확대하겠다는 욕심으로 조선에서 병란이 일어나자 좋은 기회로 삼아 우창칭을 조선 군무대신으로 임명하고 4천여명의 청군을 조선으로 출동시켰다. 그 중에는 당시 23살이었던 위안스카이도 있었다.
그는 근대 군사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고 군인으로서의 역량은 뛰어나지 않았지만 총명한 두뇌와 사교적인 성격, 뛰어난 정치적인 수완을 가지고 있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신속하게 진압하고 조선을 다시 청나라에 예속시킨 것은 위안스카이의 공이었다. 그는 조선의 내정에 온갖 간섭을 일삼으며 실질적인 군주 행세를 하였다. 고종과 조선의 대신들은 청나라의 굴레에서 벗어나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기민하고 능수능란한 위안스카이 앞에서는 꼼짝할 수 없었다.
청나라는 위안스카이를 앞세워 일본을 밀어내고 조선의 정치와 경제를 빠르게 잠식하였다. 임오군란부터 청일전쟁 직전까지 수출입은 무려 96배나 증가하였고 막대한 무역 흑자를 내었다. 임오군란 이전만 해도 조선의 경제는 일본이 독점적으로 쥐고 있었고 수입의 85% 이상을 일본 제품이 차지한 반면, 청나라는 15%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청나라의 영향력이 급격하게 확대되면서 청일전쟁 직전인 1893년에 오면 거의 대등한 수준까지 성장하였다. 이는 청나라가 베트남이나 타이완 등 다른 지역에서 온갖 굴욕을 당해야 했던 것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모습이었다. 리훙장은 젊고 야심 넘치는 위안스카이에 주목하여 자신의 측근으로 삼았다. 위안스카이가 출세 가도를 달리며 중앙 무대로 진출하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조선에서 완전히 밀려나기를 원치 않았던 일본이 결국 무력으로 승부를 내기로 하면서 청일전쟁으로 폭발하였다. 막강한 일본군 앞에서 청군은 연전연패하면서 조선에서 쫓겨났다. 1884년 갑신정변 때만 해도 우세한 청국군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던 일본군은 10년만에 입장이 완전히 반대가 된 것이다. 게다가 2억 3천만냥에 달하는 막대한 배상금(당시 일본 연간 세출의 4.2배)을 지불하고 타이완과 펑후열도도 할양하였다. 그 전까지 청나라의 외채가 4천만냥 남짓에 불과했다는 점에서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청일전쟁 중의 막대한 군비 지출까지 합하면 거의 6억냥에 달했고 이는 청조의 연간 세수의 약 6배였다. 실권자였던 리훙장 역시 패전의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하지만 위안스카이는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았다. 오히려 조정에서는 그가 조선에서 신식 군대를 조직했던 경험에 주목하고 그에게 신군(新軍)의 편성을 맡겼다.
신군의 모체는 청일전쟁 당시 순천부 부윤(顺天府府尹, 현재의 베이징 시장)이었던 후위펀(胡燏棻)이 조직한 "정무군(定武军)"이었다. 그는 청군이 조선에서 쫓겨나고 일본군이 만주를 거쳐 베이징으로 진격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1894년 10월 톈진에서 급히 의용군을 모집하였다. 정무군은 10개 영(대대)로 편성되었고 병력은 보병 3천명, 포병 1천명, 기병 250명, 공병 500명 등 총 4,750명 정도였다. 이 부대는 훈련과 편제, 무기 모두 서양식 군제를 모방하였다. 일본군이 산하이관 이북에서 진격을 멈추고 정전에 합의하면서 이들이 실전에 참여할 일은 없었지만, 전쟁이 끝난 뒤인 1895년 10월 후위펀이 징한철도(베이징과 한커우를 연결하는 당시 중국 최대의 간선 철도) 건설의 감독으로 부임하자 군기 대신 룽루와 장즈퉁, 리훙장 등 조정의 실권자들은 위안스카이에게 정무군을 맡길 것을 추천하였다.
위안스카이는 정무군을 대대적으로 개편하였다. 노약자들은 퇴출시키고 건강한 장정들을 대거 편입시켰다. 이것이 "신건육군新建陸軍"이었다. 여기에는 위안스카이 이외에도, 양무운동 시절인 1885년 북양대신 리훙장이 설립한 중국 최초의 서구식 군사학교인 톈진무비학당 출신들이 그의 막료로 대거 참여하였기에 "북양신군北洋新軍"이라고도 불렀다.

▲ 신건육군 병사들. 이들의 군복은 구식군대에서 신식군대로 넘어가는 과도기답게 전통적인 만주족 복장과 서구식을 혼용한 중양 절충(中洋折衷)이었다.
신건육군은 청나라의 전통적인 오오제 편제 대신, 서구식 편제에 따라 보병 3개 영과 공병 2개 영, 포병, 기병 각 1개 영, 치중 1개 영 등 도합 8개 영(대대)으로 구성되었고 인원수도 당초 4,250명에서 보병 2천명과 기병 250명을 증원하면서 7천명으로 늘어났다. 위안스카이는 독일인 군사고문을 영입하여 독일과 일본의 군사제도를 모방하여 신건육군을 철저하게 훈련시켰다. 특히 청군에 만연하였던 아편을 엄격하게 금지하여 만약 흡입하다가 발각되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여 참수형에 처하였다.
청일전쟁 이후 청나라의 대표적인 정예군대는 신장성에서 위구르 반란을 진압한 동푸샹(董福祥)의 감군(甘軍) 1만명과 청불전쟁, 청일전쟁에서 명장으로 이름을 떨쳤던 니어스청(聶士成)의 무의군(武毅軍) 1만 3천명, 그리고 위안스카이의 신건육군이었다. 1898년 12월 군기 대신 룽루가 이 세 부대를 무위군(武衛軍)으로 개편하면서 무의군은 무위전군으로, 감군은 무위후군으로, 신건육군은 무위우군으로 각각 바뀌었다. 여기에 진저우(锦州)에서 주둔하고 있던 노장 쑹칭(宋庆)의 의군(毅军) 1만명이 무위좌군으로 개편되었고, 룽루가 직접 팔기군에서 정예를 차출하여 편성한 무위중군 1만명이 난완(南苑)에 주둔하였다. 또한 신건육군은 1만명으로 증원되었다.

▲ 위안스카이의 신건 육군이 사용했던 오스트리아제 Mannlicher M1895 소총.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육군의 제식 소총이기도 하였다.
총 5개의 부대로 구성된 무위군은 5만 3천명에 달했고 청나라 군사력의 중핵이라 할 수 있었지만, 무의군과 의군은 리훙장의 회군에서 나온 구식군대였다. 또한 감군의 대부분은 신강성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투항한 반란군들이었고, 룽루의 무위중군 역시 팔기 자제들답게 도박과 음주에 열을 올리는 등 군기가 매우 문란하였다. 엄밀하게 본다면 실질적으로 근대전에 걸맞는 서구식 군대는 위안스카이의 신건육군 밖에 없었다.
한편, 위안스카이와는 별도로 양무 대신 중의 한 사람인 양강총독(장쑤성, 장시성을 관할하는 지방장관) 장즈퉁의 주도로 1895년 12월에 난징에서 자강군(自強軍)을 창설하였다. 자강군 역시 독일군사고문단의 협력을 얻어서 독일식으로 편성 훈련하였다. 또한 독일인 장교들은 훈련만 맡는 것이 아니라 대대와 중대 단위까지 직접 지휘하였다. 병력은 보병 8개 영, 기병 2개 영, 포병 2개 영, 공병 1개 영 등 2,860명 정도였다. 장즈퉁은 1만명까지 확대하려 했으나 자금이 부족하여 실현하지 못했다. 이들은 위안스카이의 신건육군과 비견되는 신식군대로, 난징에 주둔하면서 창장 하류의 방어를 맡았다. 1901년 조정은 자강군을 산둥성으로 이동시켜 위안스카이 휘하에 편입시켰고 1905년 3월에는 북양신군 제4진이 되었다. 이는 위안스카이의 위세를 한창 더 높여주었다.
장즈퉁은 호광총독에 임명되자 자강군 500명을 대동하여 우창으로 부임하였고 자강군을 모방한 후베이 신군을 창설하였다. 이 군대가 나중에 후베이 육군 제8진이 되어서 우창 봉기를 일으키게 된다.

▲ 자강군 병사들. 신건육군과 함께 이들 역시 과도기적인 군대였지만 의화단의 난을 경계로 중국군은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된다.
과거의 신식 군대는 서양식 무기를 사용했다는 것 외에는 구식 군대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지휘 방식이나 편제, 무기, 군수 병참 등도 통일되지 못한 채 주먹구구식이었다. 예를 들어 대대에 해당하는 1개 영의 병력이 어느 부대는 1천명이 넘고 어느 부대는 1백명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서양식 소총을 사용하면서도 창, 칼, 활 등 냉병기를 완전히 탈피하지 못했으며 병종도 단순하였다. 지휘관들 역시 세습으로 그 자리에 오른 만주족 출신의 문벌 귀족이거나 무과 합격자들이었다. 근대적인 군사 교육을 받은 이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신건육군의 지휘관들은 해외에서 유학을 하거나 서구식 군사교육을 받은 이들이었다. 나이에서도 대부분 한창 때인 30대에서 40대 중반으로, 이전과 비교했을 때 적어도 10~15세는 젊어졌다. 따라서 이들은 구태의연한 구식 장군들에 비해 새로운 지식을 빨리 터득할 수 있었다. 또한 편제도 주먹구구식에서 벗어나 서구식으로 편성되었으며 다양한 병종을 혼합하여 독립된 작전 능력을 갖추었다. 군사작전에서도 구식 진형 대신 보병과 포병, 기병이 연합하는 근대적인 제병협동작전을 추구하였고, 일본군의 전술을 수용하여 기습 작전과 보병의 산개 대형을 적용하였다. 즉, 신건육군은 이전의 상군, 회군의 신식 군대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점에서 청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서양식 군대라 할 수 있었다.
* 의화단의 난과 북양군벌의 탄생
청일전쟁의 패배로 청나라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면서 열강들은 경쟁적으로 중국 분할에 나섰다. 중국의 앞바다를 지키던 북양함대는 해체되어 전투에서 목숨을 건진 장교는 파면되고 병사들도 해산당했다. 일본이 타이완과 펑후열도를 차지하자 다른 열강들 경쟁적으로 중국 분할에 뛰어들었다. 아편전쟁에서 홍콩을 차지한 영국은 홍콩 북단의 신계와 주룽반도, 산둥 반도 끝짜락의 항구도시 웨이하이웨이(威海衛)까지 차지하였다. 칭따오와 자오저우만(膠州灣) 등 산둥성의 태반은 독일이, 광둥성 남쪽의 광저우만은 프랑스의 손에 넘어갔다. 만주는 러시아의 반식민지로 전락하여 일본과 쟁탈전을 벌이고 있었다. 중국의 주요 도시와 전략적 요충지, 항구는 모조리 열강들이 차지하면서 청나라 해군은 재건은 커녕, 군함을 정박할 항구조차 확보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나마 유일한 성과는 1899년 이탈리아의 싼먼만(三門灣) 조차를 저지한 것이었다. 독일이 산둥성 자오저우만을, 프랑스는 광저우를, 영국은 홍콩과 주륭반도를, 러시아는 뤼순을 각기 조차하자 이탈리아도 여기에 끼어들어 한조각 차지할 생각으로 6척의 군함으로 편성된 함대를 파견하여 저장성의 요충지인 싼먼만의 조차를 요구하면서 무력시위를 하였다.
이는 청나라 입장에서도 그야말로 뜻밖이었는데, 이탈리아는 열강축에 끼기도 어려운데다 중국에 대한 이렇다 할 이해관계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청일전쟁 이래 열강들이 호시탐탐 우리의 영토를 차지하려고 기회를 노리며 우리를 핍박하고 있다. 이제는 소국까지 무분별하게 덤벼드니 힘으로 대적하지 않으면 어떻게 국가를 지킬 수 있겠는가?" 청조는 이전과 달리 초강경으로 대응하여 만약 이탈리아가 무력을 사용할 경우 결전을 불사키로 결정하였다. 결국 충분한 준비 없이 단지 시류에 편승하여 재미를 보려고 했던 이탈리아는 약 10개월이나 대치한 끝에 결국 망신만 당하고 물러났다.
청나라로서는 모처럼 체면을 세운 것이었지만 다음해에 일어난 의화단의 난은 또 한번의 결정타였다. 관군은 처음에는 의화단을 강경하게 진압하였지만 서태후가 하루 아침에 이들과 손을 잡고 열강에 선전포고를 선언하면서 상황이 돌변하였다. 이는 충분한 논의 없이 즉흥적인 결정이었기에 혼란을 더욱 가중시켰다. 의화단은 농민과 무뢰배들이 "부청멸양"을 내세우면서 종교를 구심점으로 뭉쳤을 뿐, 제대로 된 지도자가 없었고 제멋대로 행동하기 일쑤였다.
특히 니어스청의 무위전군은 의화단을 진압하는데 가장 앞장섰기 때문에 양측의 감정은 극도로 나빴다. 연합군이 톈진을 침공하자 니어스청은 의화단 진압을 중지하고 숭칭의 무위우군과 함께 톈진의 방어에 나섰지만 의화단은 조정과의 화해에도 불구하고 무위전군을 공격하였다. 니어스청은 앞에는 연합군을, 뒤로는 의화단을 놓고 싸우다가 결국 의화단의 습격을 받아 전사하였다.
니어스청과 달리, 동푸샹은 의화단과 손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한 관료 중의 한 명이었다. 그는 베이징으로 들어와 의화단과 함께 동교민항(东交民巷)의 각국 대사관들에 대한 포위공격을 지휘하였다. 그는 약 3개월에 걸쳐 동교민항을 거의 점령 직전까지 갔지만 8개국 연합군이 톈진과 퉁저우를 점령하고 베이징으로 진격하자 포위를 풀고 이들과 싸웠다. 8월 14일 둥푸샹의 군대와 룽루의 무위중군은 베이징 외성 동쪽에서 연합군과 싸우다 전멸하였다. 동푸샹은 서태후와 광서제, 조정 대신들을 호위하여 시안으로 도주하였다. 이 때의 상황은 할리우드에서 만든 고전 영화 "베이징의 55일(55 Days At Peking)"과 중국에서 제작된 공리 주연의 "서태후(西太后)"가 각자의 입장에서 묘사했다는 점에서, 서로 비교하면서 본다면 상당히 재미있을 것이다.
의화단의 난으로 청나라의 중앙군은 대부분 소멸하였고 장즈퉁의 자강군은 규모도 작을 뿐더러 베이징에서 너무 멀리 있었다. 그나마 전력을 보존한 부대는 산둥성에서 의화단의 난을 진압하고 있었던 위안스카이의 무위우군 밖에 없었다. 그는 의화단과 화해하라는 서태후의 명령을 무시하였다. 심지어 의화단원들이 "무술과 주문으로 총알도 피할 수 있다"고 주장하자 헛소리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직접 사람들 앞에서 권총을 뽑아서 포로로 잡힌 의화단원들을 사살해 버렸다. 또한 의화단의 난을 자신의 세력을 확대하는 좋은 기회라고 여기고 산둥성의 구식군대 34개 영을 20개 영의 신식군대로 재편하여 "무위우군 선봉대"라고 이름붙였다. 이 부대는 나중에 북양신군 제5진이 된다. 무위우군은 약 2만명으로 늘어나면서 위안스카이의 세력은 날로 확대되었다. 8개국 연합군이 침공했을 때에도 그는 소수의 병력만 베이징으로 파견했을 뿐 대부분의 전력을 온존히 보존하였다.
의화단의 난으로 다른 군대가 몰락한 덕분에, 위안스카이는 자연스레 권력의 전면으로 나오게 되었다. 청나라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를 가지고 있었던 그는 이미 군벌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신축조약이 체결된지 두달 후인 1901년 11월 "동양의 비스마르크" 리훙장이 죽었다. 위안스카이는 리훙장이 맡고 있었던 즈리총독 겸 북양대신에 임명되었다. 리훙장의 후계자로서 조정의 실권자가 된 것이다.
청일전쟁과 의화단의 난을 통해 청나라가 가지고 있던 군대는 하나같이 쓸모가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위안스카이의 신건육군처럼 실험적인 부대만 있을 뿐, 그간의 군사 개혁은 통일된 계획이 없는데다 정치적 혼란과 재정의 열악함으로 지지부진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의화단의 난이 끝난 뒤, 서태후가 자희신정을 선언하면서 비로소 본격적인 군사 개혁과 전국 단위의 신군 편성을 시작하였다. 위안스카이는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는 것은 장비와 무기가 아니라 군인의 자질에 있으며, 독일과 일본식 군제를 적극적으로 모방하자고 주장하였다.
1901년 8월 29일 중국의 전통적인 장교 선발 시험인 무과 제도가 폐지되고 군대 내 노약자들을 대거 퇴출하여 30%를 도태시키고 신체 건강한 자만 남겨서 재편하였다. 또한 전국에 많은 군사학교를 설치하여 서구식 군사교육을 받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신해혁명까지 전국에 설치된 군사학교는 40여개에 달했다. 그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대표적인 학교가 1906년에 위안스카이가 설치한 바오딩 육군군관학교와 윈난 육군강무당, 동북 3성 강무당이었다. 또한 매년 1천 명이 넘는 학생들이 일본과 구미 등지로 유학을 떠나서 선진적인 군사 지식을 습득하였다. 당시 능력있는 젊은이들은 서구식 군사교육을 받아 장교가 되는 것이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이자 신분상승의 통로였다. 중화민국 시대의 주요 군벌과 정치가, 관료들은 물론, 마오쩌둥의 중공 정권까지도 간부들의 상당수는 이런 군사학교 출신들이었다.
1903년 12월 4일 경친왕 혁광을 수장으로 하는 연병처(練兵處)가 설치되었다. 연병처는 전국의 신군 훈련을 총감독하는 기관으로 군정과 군령, 교육을 전담하였다. 연병처는 1906년 11월 육군부가 설치되면서 3년만에 해체되었다. 1904년 9월에는 "육군영제향장(陸軍營制餉章)"이 반포되었다. 이는 중국 육군의 군사제도와 병역, 편제 등 전반적으로 규정한 것으로, 일본육군군제를 모방하였다. 모병은 20살 전후의 건장한 장정을 대상으로 하고 학력이 높을수록 급여와 대우가 좋았다. 병사의 급여는 갓 입대한 신병이라도 일반 농민의 수입보다 훨씬 좋았기에 너도 나도 지원하였다. 물론 대부분은 생계를 목적으로 하는 가난한 사회 최하층민들이었지만, 그 중에는 상당한 교육 수준을 갖춘 지식인 계층도 많이 있었다.
또한 병역 자원을 상비군과 예비군을 나누어, 모든 사병은 입대 후 3년간 현역으로 복무하고 다음 3년 동안 속비군(續備軍)에 편입되어 분기마다 훈련을 받되 급료는 줄어들었다. 다시 3년 후에는 후비군(後備軍)으로 편입되어 분기마다 소집되었다. 4년 후에는 일반인으로 돌아갔다. 병사들은 제식 훈련과 총기 사용법 이외에도 야전에서 전술 연습을 익혔으며 대포의 사용, 지뢰의 매설, 교량의 가설, 전보의 사용, 독도법(讀圖法, 야전에서 지도를 해석하는 방법) 등 다양한 전문적인 기능도 배워야 했다. 이런 모습은 냉병기와 화기를 병용하고 낡은 진법을 익혔던 구식 군대의 훈련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1905년에는 북양 육군 6진이 편성되어 수도 베이징과 톈진, 즈리성의 성도 바오딩, 지린성 창춘, 산둥성 지난 등 요충지에 배치하여 국방을 맡았다. 또한 1905년부터 매년 가을마다 3만명 이상이 참여하는 대규모 야전 기동 훈련이 실시되었다.

▲ 야전에서 사격 훈련 중인 신군의 포병 부대. 신군은 1905년 본격적인 근대 육군의 건설 계획에 따라 군복 또한 독일과 일본의 복식을 모방하여 완전히 서구식으로 바뀌었다. 병사들은 청회색의 군복과 정모(正帽)를 썼으며 다리에는 각반을 하였다. 10여년 전의 청일전쟁 시절과 비교한다면 비약적인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청조 몰락 이후 민국와 군벌 내전기에는 정모에 중화민국을 상징하는 오성 모표를 다는 것 이외에도 여러 차례 개량이 있었다. 각지의 군벌 군대는 북양군 시절의 군복을 기초로 하면서도 나름대로 타 세력과 구분되는 독자성을 가졌다. 흔히 항일전쟁 영화 등에서 자주 나오는 중국군의 복식은 1935년 12월 13일 육군복제조례(陸軍服制条例)가 반포된 이후로, 비약적인 변화가 일어나 황토색 군복을 입고 독일제 M35 헬멧이나 야전모를 쓰게 된다.
상비군은 서양의 사단에 해당하는 진(鎭)을 전술의 단위로 하고 예하에 협(協, 여단), 표(標, 연대), 영(營, 대대), 대(隊, 중대), 배(排, 소대), 붕(棚, 분대)를 두었다. 또한 1개 진은 2개 협으로, 1개 협은 2개 표로, 1개 표는 3개 영으로, 1개 영은 4개 대, 1개 대는 3개 배, 1개 배는 2개 붕으로 구성되었다. 분대에 해당하는 최소 단위인 붕은 부사관과 사병 등 14명으로 편성되었다. 1개 진은 장교 748명, 사병 10,436명, 인부 1,328명 등 총 1만2천5백여명에 달했다.

▲ 독일제 마우저 M1888 볼트 액션 소총.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육군의 제식 소총으로 독일식 군제를 모방한 중국은 독일, 일본 등지에서 대량의 무기를 수입하였으며 특히 마우저 M1888 소총을 라이선스하여 청일전쟁이 끝난 뒤인 1896년부터 우한, 톈진, 상하이, 타이위안 등 전국 각지의 병공창에서 생산하였다. 그 중에서도 장즈퉁이 1895년에 건설한 우한의 한양 병공창(漢陽兵工廠)은 중국 최대의 군수 공장으로 여기서 생산된 소총을 "한양 88식 소총"이라고 불렀다. 청말, 군벌 시대의 중국군은 한양식 소총 이외에도 일본제 아리사카 30년식 소총, 38식 소총, 영국제 엔필드 소총, 오스트리아-헝가리제 Mannlicher M1888 등 구미 열강으로부터 잡다한 소총과 무기를 수입하여 사용하였다.
하지만 지휘관의 직제명은 협통(여단장)이니 관대(대대장)이니, 녹영의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였고 장군, 총독, 제독과 같은 무관 관직도 여전히 남아 있는 등 군대가 일원화되지 못한 채 뒤죽박죽이었다. 신해혁명이 일어난 뒤인 1912년 9월 15일 대총통이 된 위안스카이는 <육군평시편제조례>를 발표하여 진을 사단으로 바꾸는 등 청조 시절의 관직과 낡은 군제가 모조리 혁파되고 서구식으로 정리된다. 1개 사단은 2개 보병여단(4개 보병연대)과 1개 포병연대(3개 포병대대), 1개 기병연대(대대 편제가 없고 3~4개 중대로 편성), 공병대대(3개 중대), 치중대대(3개 중대) 등으로 편성되었다. 또한 보병연대마다 1개 기관총 중대가 있었고 포병대대는 3개 포병중대(야포 6문)으로 구성되었다.
한편, 전국의 신군 편성이 완료되면 2개 진씩 묶어서 군(軍, 우리의 군단에 해당)을 편성하고, 전시에는 그보다 규모가 더 큰 집단군(우리의 야전군에 해당)으로 편성할 계획도 있었으나 신해혁명으로 당장 실현되지는 못했다. 또한 진과는 별도로 혼성협(혼성여단)이 있었는데, 재정이 궁핍한 성에서 임시방편으로 보병, 포병, 기병 등 여러 개의 병종을 혼성하여 편성한 것으로 1개 진보다는 규모가 훨씬 작았다. 나중에 재정이 허락한다면 병력을 꾸준히 충원하고 편제를 확대하여 완전한 1개 진으로 만들 계획이었다.
신군의 편성은 즈리성과 후베이성을 시작으로 점차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1905년 2월 28일에는 전국의 신군에 대해 국가 상비군으로서 서구식의 단대호(單隊號, 부대 번호)가 부여되었다. 여기에는 성의 이름이 앞에 붙었는데, 가령 우창 봉기를 일으킨 "후베이 육군 제8진"은 후베이 성의 지방군이 아니라 후베이 성에 주둔한 중앙군이라는 의미이다. 또한 1906년 4월 육군부는 "36개 진 편련 계획"을 수립하였고 10년 내에 완료할 계획이었다.

▲ 제식 훈련 중인 북양 신군.
하지만 신해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실제로 편성이 완료된 부대는 계획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14개 진, 18개 혼성 협, 4개 독립 표, 금위군 2개 협 등 도합 30만1800여명 정도였다. 또한 많은 부대들이 장비와 병력의 정수를 채우지 못했다. 그나마 그 중에서 위안스카이가 직접 주도한 북양 6진이 가장 강력하였고 장교와 병사들의 자질 또한 규정대로 하였으며 무기와 장비도 충실하게 갖추었다. 하지만 장즈퉁이 건설한 후베이 신군을 비롯한 나머지 지방 부대는 성정부가 주도했기에 재정에서도 열악하였고 자질과 장비 또한 훨씬 뒤떨어졌다.
당시 1만명으로 구성된 1개 진의 유지비용으로 매월 은화 10만냥 이상이 소요되었다. 만약 36개 진을 모두 편성한다면 그 비용만도 5천만냥이 넘었다. 이는 신해혁명 직전을 기준으로 연수입이 2억6천만량 정도인데다 막대한 배상금 지불로 연간 3천만냥 이상의 적자에 허덕이던 청조로서는 능력 밖이었다. 따라서 북양6진을 제외한 나머지 신군의 편성과 유지비는 각 지방의 성정부에게 떠넘겼다. 하지만 돈은 지방 정부에 부담케 하면서 신군의 지휘권은 중앙이 차지하려 하는 것은 모순이었다. 따라서 중앙과 지방의 첨예한 갈등으로 야기되었다. 지방 성정부들로서는 신군의 편성을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었고 편성된 부대도 중앙으로 넘기려고 하지 않았다. 이는 신해혁명 이후 지방의 신군들이 중앙에 대해 스스로 독립을 선언하고 군벌화되는 가장 큰 이유가 되었다.
한편, 신군 외에도 팔기군과 녹영 등 구식 군대를 해체되고 이들 중 일부와 민간에서 새로이 징모하여 순방영(巡防營)을 편성하였다. 신군이 중앙의 국방군이라면 순방영은 지방의 향토부대였다. 편제는 지방마다 통일되지 않았고 몇개의 보병대대와 기병대대로 구성된 "로(路)"로 편성되었다. 신해혁명까지 전국의 순방영은 총 27만 6천여명에 달했다.
또한 청일전쟁에서 완전히 전멸당했던 해군도 점차 재건되어 나갔다. 육군이 독일과 일본을 모델로 했다면, 해군은 영국을 모델로 하였다. 1895년부터 신해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약 15년간 해외에서 구입한 군함은 도합 39척에 배수량 3만4천톤에 달했다. 상하이 강남조선소, 푸저우의 마미 조선소 등 국내 조선소에서도 국산 군함을 건조하여 총 24척, 배수량 1만톤에 달했다. 또한 전투에 쓸모가 없는 구식 목선은 모두 폐기하여 비용을 절감하는 한편, 신조함으로 채워넣어졌다. 외해의 방어를 맡은 북양함대에는 외국에서 새로 구매한 3~4천톤급 방호순양함 등으로 편성하였고, 내해의 방어를 맡은 남양함대에는 중국에서 건조한 군함과 일본에서 구매한 1천톤급 이하의 포함과 어뢰정으로 구성되었다.
이 시기에 도입된 대표적인 군함은 영국 암스트롱사에서 건조되어 1899년 인도된 2척의 방호순양함과, 독일 불칸사에서 구매한 2950톤급 방호순양함 3척이었다. 이들 방호순양함은 비록 청일전쟁 당시 주력함이었던 딩위안(定遠)과 전위안(鎭遠)에 비해 덩치가 훨씬 작고 화력과 방어력도 뒤지지만, 대신 기동성과 공격력에서는 훨씬 뛰어났다. 황해해전의 경험을 통해 해전의 승리가 단순히 대구경 함포와 두꺼운 장갑만 두른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 4천3백톤급 방호순양함 하이티엔(海天). 1만7천마력급 엔진을 탑재하고 최대 속도 24노트, 승무원 480명, 203mm 45구경 함포 2문, 120mm 40구경 속사포 10문, 어뢰 등으로 무장하였다. 하이티엔은 1904년 사고로 침몰했으나 동형의 하이치(海圻)는 군벌내전기에 우페이푸와 장쭤린 두 진영을 서로 오가며 운용되었고,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탈출하여 국민정부 해군에 귀순하였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장인 항 방어에 투입되어 일본 해군의 창장 진입을 막기 위해 1937년 9월 15일 스스로 자침하였다.
1906년에는 분산 운영되던 함대를 통합하여 북양함대는 주력함대에 해당하는 순양함대(방호순양함 4척, 구축함 1척, 어뢰정 8척 등 15척)로, 남양함대는 장강함대(방호순양함 1척, 포함 12척 등 17척)로 개편되었다. 또한 신정 개혁으로 재정 사정이 점차 나아지면서 일본과 독일 등지에서 어뢰정과 포정 등을 꾸준히 구매하여 연안의 방비를 강화하였다. 1910년에는 육군부 산하의 해군처를 해군부로 독립시켜 해군을 통괄하였다. 세계적인 해군까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청일전쟁 이전 수준은 어느 정도 회복한 셈이었다. 또한 제도적으로나 해군에 대한 인식에서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전처럼 육군의 보조 개념이나 중국 근해를 방어한다는 소극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원해로 나가지 못하면 근해도 방어할 수 없다는 명확한 인식 아래 근대적인 해군으로 발돋움하였다. 열악한 재정과 짧은 기간의 성과치고는 놀라운 것이었다.
하지만 같은 시기 다른 열강들이 거함거포 경쟁을 벌이며 신형 드레드노트급 전함의 확보에 혈안이 되어 있었으나, 청나라는 재정난으로 단 한척의 드레드노트급 전함도 확보할 수 없었다. 또한 보유한 군함은 모두 시대에 뒤떨어져 있었고 적함대와의 결전보다는 연안 경비에만 걸맞았다. 그나마 청일전쟁 이전의 중국은 7천톤급 철갑선 정위안과 딩위안을 위시하여 세계 7위의 해군력을 갖추었고 조선과 일본, 베트남 등 주변 아시아 국가들을 위압하는 등 중국판 "함포외교"를 행사하였다. 그러나 북양 함대가 괴멸한 후 극심한 재정난과 전쟁 배상금의 지불로 더 이상 세계적인 수준의 해군력을 갖출 수 없었다. 중국은 해군 경쟁에서 완전히 탈락한 셈이었다. 위안스카이의 참모였던 야오시광(姚錫光)은 12년 동안 1.2억냥을 투입해 드레드노트급 전함 2척을 포함하는 대규모 함대를 건설하는 계획을 제출했으나, 조정에서는 재정 문제로 현실성이 없다며 거부하였다. 1909년에야 청나라는 해군건설 7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구식 군함을 폐선처리할 것과 1천8백만냥을 투입해 신형 순양함과 구축함으로 편성된 새로운 원양함대 건설을 결정했지만 신해혁명이 일어나면서 실현되지 못하였다.
* 성과와 한계
신식군대인 북양36진의 창설로 청나라는 50만명에 달하는 국방군을 보유하였다. 그 중에서도 위안스카이 직계부대인 제1진과 제6진은 베이징에, 제2진은 즈리성의 성도인 바오딩에, 제3진은 지린성 창춘에, 제4진은 톈진에, 제5진은 산둥성의 성도 지난에 각각 주둔하여 중앙의 핵심 지역을 장악하였다. 병력은 약 7만4천500여명에 달했다. 북양6진은 인원과 장비, 무기를 충실하게 갖추어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일본군에게도 결코 뒤지지 않았다.

▲ 우창봉기 직전 전국의 신군 배치 현황
자희신정에서 군사 개혁은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이 시기의 신군은 중국의 전통적인 군사제도를 서구식으로 탈바꿈시킴으로서 구미열강과의 격차를 상당 부분 좁혔다. 이 성과는 결코 과소평가할 부분이 아니다. 만약 조금만 일찍 시도되었다면 청일전쟁에서 일본군과 대등하게 싸웠을 것이며, 동아시아의 역사 또한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무기가 아니라 제도와 사람에 있었다. 첫번째로, 명목상 육해군의 모든 통수권은 황제에게 있었지만 실제로는 조정의 복잡한 정치적 역학 구도에 좌지우지되었다. 그 정점에 있는 사람은 바로 위안스카이였다. 황실과 만주 귀족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위안스카이는 청나라를 지탱하는 기둥이면서 동시에 청나라를 가장 위협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런 딜레마 속에서 조정은 황제를 지지하는 세력과 위안스카이를 지지하는 세력으로 분열된 채 개혁은 한계에 봉착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군권을 쥔 위안스카이에 의하여 청조는 무력하게 멸망하게 된다.
두번째로, 군제 개혁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구군을 완전히 혁파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신해혁명 직전 청군의 군사력은 신군과 순방영 외에 팔기군, 녹영, 상군, 회군 등 잡다한 구식 군대가 남아 있었고 모두 합하여 120만명에 달하였다. 이것은 심각한 재정적 부담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다. 1911년을 기준으로 청조의 군사비는 약 9100만냥으로 전체 재정의 약 35% 정도를 차지했는데, 그 중에서 신군이 60%로 가장 많았으나 구식 군대인 용영(勇營)이 20%나 차지하였고 팔기군이 10%, 녹영이 3%를 차지하는 등 여전히 많은 예산이 구식 군대의 운영비로 소요되었다. 가뜩이나 재정난으로 신군의 편성이 지연되는 상황에서 아무짝에 쓸모없는 구식 군대의 존재는 청조의 부담을 더욱 가중시켰다.
조정은 신군을 만들면서 구군의 자질이 천양지차인데다 기강이 문란하여 쓸모가 없다면서 구군과는 별도로 자원자를 모집했음에도 그렇다고 구군을 해체한 것도 아니었다. 이들의 반발을 우려해 기득권을 인정해 준 것이다. 또한 신군 병사들 사이에서 반청 혁명 사상이 확산되자 조정은 신군을 견제한다는 명목으로 구군에게도 최신 무기와 장비를 제공하였다. 이로 인해 가뜩이나 빈약한 재정난을 더욱 과중시켜 신군의 편성을 계획대로 추진할 수 없었고 구군과 신군 사이의 갈등, 견제도 심각하였다. 메이지 유신 초기부터 신분제를 철폐하고 전국적인 징병제를 실시하여 우수한 국민군을 만들어낸 일본과는 대조적이었다.
세번째는 봉건적인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한 점이다. 청조는 제도적으로는 징병제를 준비했으나 신해혁명 직전까지도 단 한번도 실시하지 않았으며 여전히 전통적인 용병제에 의존하였다. 따라서 신군에 입대하는 자들의 상당수는 빈농, 부랑자, 무뢰배와 같은 사회 최하층 출신들이었고 질적 수준이 매우 낮은데다 전의도 빈약하였다. 비록 신군이 종래의 팔기군이나 녹영, 회군 등에 비하면 어느 정도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군대를 편성했지만 그렇다고 신군 병사들이 구미 열강의 군대처럼 근대적인 시민 의식을 갖추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또한 지휘관들 중에는 해외에서 공부를 하고 신 지식을 갖춘 이도 없지 않았으나 대부분은 여전히 낡은 과거 제도를 통해 임명된 자들이었기에 일본이나 구미 열강에 비한다면 수준이 매우 낮았다.
네번째는 군대의 파벌화였다. 신군의 양성이 중앙과 지방으로 이원화되면서 지휘권이나 무기, 장비의 통일성이 결여되었고 군대는 황제나 국가가 아니라 신군을 직접 맡고 있던 실권자들에게 충성하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청나라 최강 부대인 북양6진을 장악하고 있던 위안스카이였다. 특히 북양6진의 지휘관들은 대부분 위안스카이와 개인적인 친분을 가진 자들이었다. 대표적으로 위안스카이의 뒤를 이어서 대총통이 되는 쉬스창(徐世昌)은 위안스카이의 추천을 받아 출세한 자였다. 또한 차오쿤(曹锟), 장쉰(张勋), 왕시젠(王士珍), 돤루이치(段祺瑞), 펑궈장(馮國璋) 등 위안스카이 휘하의 장교들은 그의 비호 아래 출세 가도를 달렸고 점차 군사 관료화되면서 "북양군벌"을 형성하였다. 북양 군벌 외에도 지방 세력들 역시 중앙의 혼란을 이용하여 군벌화되었다. 이들은 청조가 몰락한 뒤 막강한 무력을 배경으로 패권 싸움을 벌이며 중국을 내전의 혼란에 빠뜨리게 된다.
네번째는 서구식 선진 교육의 유입은 젊은 엘리트들 사이에서 전통적인 체제를 부정하는 급진적인 반청 혁명 사상 또한 확산시켰다는 사실이었다. 청조가 그동안 중체서용을 고집한 것도 서구의 사상과 문화가 자칫 통치 체제를 위협하지 않을까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청조는 많은 돈을 들여서 신군을 육성하면서도 잠재적인 반란군으로 취급하고 구군으로 견제하는 모순을 저질렀다. 이는 신군의 충성심을 더욱 떨어뜨렸다. 결국 그들의 우려대로 양날의 칼이 되었고 신군은 총부리를 돌려 청조를 무너뜨렸다.
결국 이 시기의 군사개혁은 과도기적인 성격에서 끝까지 벗어나지 못하였다. 청조는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신군을 만든 것이지만, 오히려 자신들의 무덤을 판 꼴이 된 셈이었다. 또한 신군의 전투력도 국내의 반란을 진압할 정도이지, 외세의 침략에서 국가를 방어할 수준은 되지 못하였다. 이는 근본적으로 중국 사회가 낡은 봉건 시대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사회의 발전이 뒤쳐진 상태에서 겉모습만 서양을 흉내내어 본들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자희 신정의 개혁에도 불구하고 청조가 몰락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메이지 유신 초기의 일본 또한 유사한 문제에 직면하였다는 점에서 이 시기의 청조는 일본과 비교했을 때 대략 30년은 뒤쳐져 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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