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한의 공방전
우창에서 후베이 신군 제8진에서 반란이 일으나 우한 삼진을 점령했다는 소식이 조정에 보고된 것은 이틀이 지난 뒤인 10월 12일이었다. 이것은 그동안 변방에서 일부 신군 병사들이 일으킨 반란이나 쓰촨성의 보로 운동과는 규모가 달랐다. 마침 북양군은 즈리성 동북쪽의 융핑(永平, 현재의 루룽현(盧龍))에서 "추계북방대연습"이라 하여 대규모 야지 합동군사훈련을 실시 중이었다. 섭정왕 짜이펑은 군사훈련을 중지시키는 한편, 육군대신 인창(荫昌)에게 봉기 진압을 명령하였다. 북양 6진 가운데 베이징의 제1진과 톈진의 제4진, 산둥성 지난의 제5진 등 3개 사단과 2개 독립혼성여단을 주축으로 하는 대군을 출동시켰다.
진압군의 편성은 다음과 같았다.
제1군 : 군통(軍統) 육군대신 인창(廕昌), 육군 제4진 및 제3협(제2진), 제11협(제6진).
제2군 : 군통(軍統) 군자사(軍咨使, 현재의 육군참모총장) 펑궈장(馮國璋), 육군 제5진, 제3진과 제20진 일부.
제3군 : 군통(軍統) 진국장군(鎮國將軍) 차이타오(載濤), 육군 제1진, 금위군 제1협 및 제2협.
약 5만명에 달하는 진압군은 징한철도(베이징~한커우)를 타고 속속 남하하여 10월 17일이면 선봉부대가 이미 후베이성에 진입하였다. 또한 육군과는 별도로 2,950톤급의 하이천, 하이룽, 하이처우 등 방호순양함을 3척을 비롯해 포함, 어뢰정 등으로 구성된 15척의 군함이 해군통제 사쩐빙(萨镇冰)의 지휘아래 상하이에서 출동하여 창장을 거슬러 한커우로 향하였다.
진압군의 전력은 막강했지만, 정작 이들을 지휘하는 사람들은 형편없었다. 그나마 제2군을 맡은 펑궈장은 톈진무비학당을 졸업하여 약간의 근대적인 군사 지식이 있었고 위안스카이 휘하에서 북양신군의 훈련을 맡기도 했지만, 인창과 차이타오는 전형적인 팔기 자제로 서구식 군사교육을 받은 적도 없고 군대를 지휘하거나 실전 경험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아편에 찌든데다, 잘하는 일이라고는 노래와 마작이 전부였다.
한편, 10월 11일 우창을 손에 넣은 혁명군은 다음날 제41표 제2영이 봉기를 일으켜 한양을 장악하고 12일에는 한커우까지 공략하여 우한 삼진을 장악하였다. 이들의 손쉬운 승리는 호광총독 루이청과 제8진의 통제 장뱌오 등 책임자들이 죄다 도망쳤기 때문이었다. 혁명군은 불타버리는 총독관저 대신 후베이성 자의국 건물을 자신들의 본부로 하고 후베이성 군정부를 수립하였다. 그리고 제21협 협통 리위안홍을 도독으로 추대하였다.
리위안홍은 혁명파와는 거리가 멀었고 스스로도 혁명에 가담하기를 거부했지만 혁명파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쑨원, 황싱 등 혁명지도자들은 우창 봉기을 뒤에서 후원했을 뿐, 봉기가 성공할 것이라고 여기지 않았기에 직접 가담하지 않았다. 게다가 당초 봉기의 지휘를 맡았던 동맹회 간부들은 모두 체포되어 참수되거나 도망쳤다. 이것이 신해혁명이 결과적으로 청조를 몰락시키기는 했지만, 일본의 메이지 유신처럼 신진 정치세력들의 주도로 새로운 정치 체제를 만들지 못한 채 오히려 위안스카이와 같은 구체제의 보수세력이 정권을 쥐어 중국이 더 큰 혼란에 빠지게 되는 이유가 된다.
그나마 리위안홍은 인망이 있는데다 군인으로서 역량도 뛰어났기 때문에 혁명파는 협박과 회유로 설득하였다. 게다가 혁명군은 자신들의 포고를 모두 리위안홍의 명의로 내걸었기 때문에 리위안홍으로는 좋건 싫건 이미 한배를 탄 신세가 된 셈이었다. 결국 후베이성 자의국 의장이자, 전국적으로 저명한 인사였던 탕화룽의 설득으로 리위안홍은 변발을 자르고 13일 오후 혁명군에 가담하겠다고 선언하였다. 다음날에는 중국 동맹회 중부총회의 회장 탄런펑(譚人鳳)이 우창으로 와서 그에게 혁명정부 깃발과 지휘권을 상징하는 칼을 리위안홍에게 수여하였다. 이로서 우창 봉기는 단순한 지방의 군사반란이 아니라 혁명전쟁이 되었고 후베이 군정부는 혁명정권으로서 정통성을 가지게 되었다.
우한의 금고와 무기를 손에 넣은 혁명군은 청군의 공격으로부터 우한을 방비하기 위해 주변의 신군을 회유하고 신병을 모집하였다. 내륙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인 우한은 풍요롭고 온갖 산물이 모이는데다 상하이, 톈진, 광저우와 함께 가장 먼저 근대화된 곳이기도 하였다. 호광총독 루이청이 남기고 간 금고에는 돈이 풍족하였고 막대한 무기 또한 비축되어 있었기에 병사를 모으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다. 대다수 군인들은 반청 혁명이건 청조에 대한 충성이건 관심 밖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생계가 더 우선이었기에 무조건 돈 많이 주는 쪽에 붙었다. 따라서 당초 3천명이 채 되지 못했던 혁명군은 금새 4개 여단 2만명 이상으로 불어났다.
혁명군의 위세가 나날이 올라가자 허난성과 후난성, 장시성의 지방 장관들과 청군 장군들은 우한을 탈환하기는 커녕, 자기 지역을 지키기도 벅차다고 생각하고 중앙에서 군대가 내려오기만 기다렸다. 그나마 허난성에서 신군 제52표(연대) 2개 대대와 순방영 부대를 파견했지만 이들은 혁명군을 보더니 겁을 먹고 그대로 투항하여 혁명군에 가세해 버렸다.
하지만 혁명군은 역량 있는 지휘관이 별로 없는데다 모집된 신병을 훈련시킬 여유도 없었다. 전투 경험은 고사하고 총알을 총에 넣을 줄조차 모르는 자들이 태반이었다. 게다가 사병이 장교가 되고 부사관이 대대장, 연대장을, 소대장이 여단장을 맡는 형국이었다. 지휘계통도 혼란스러웠고 군기도 엉망이었다. 하물며 잘 훈련되고 우수한 무기와 장비를 갖춘 막강한 북양6진을 상대로 오합지졸에 불과한 혁명군이 무슨 수로 이길 것인가.
우창봉기 당시 혁명군을 피하여 숨어 있었던 제8진의 통제 장뱌오는 중앙군이 출동했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나와서 주변의 청군을 끌어모았다. 보병, 기병, 포병 등 도합 2천여명에 달했다. 이들이 한커우 외곽의 루찌아먀오(刘家庙) 역에 집결하여 한커우를 위협하자 10월 18일 혁명군이 선제 공격에 나섰다. 장뱌오의 청군과 혁명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청군측 군함들은 한커우를 향해 포격을 퍼부었다. 청군은 한때 혁명군을 격퇴하여 한커우 시가지 쪽으로 밀어내었지만 혁명군은 한커우 시민들과 협력하여 재차 반격에 나섰다. 결국 만 이틀의 전투 끝에 청군은 패주하여 사방으로 흩어졌다. 한커우의 강상에 있던 군함들 역시 청조를 위해 싸울 마음은 별로 없는데다 이들을 지휘하는 사쩐빙은 리위안홍의 회유에 넘어가 함대에 뱃머리를 돌리라고 명령하였다.

▲ 10월 12일 한커우를 도강하는 혁명군
그런데 19일 밤, 북양군 3개 군이 이미 한커우 북쪽 교외까지 진출했다는 정보가 혁명군 정부에 들어왔다. 혁명군 도독 리위안훙은 장징량(张景良)에게 한커우 방면의 총지휘를 맡기고 북양군을 격퇴하라고 명령하였다. 하지만 장징량은 한커우의 최일선 진지를 시찰하는 중 청군의 습격을 받아 살해되었다. 장징량이 실종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리위안홍은 직접 혁명군 주력부대를 지휘하여 21일 새벽 한커우 북쪽에 있는 시커우(滠口)의 공략에 나섰다. 하지만 북양군의 선두부대가 도착하면서 시커우의 청군 방어선은 강화되었고 혁명군은 엄청난 손실만 입은 채 격퇴당하였다.
* 위안스카이, 청조의 군권을 장악하다
전세는 유리했지만 인창의 지휘는 무능하기 짝이 없었다. 한커우에서 장뱌오의 군대와 혁명군이 싸우고 있는데도 협공하지 않은 채 우물대다가 기회를 놓쳐버렸고 자신은 최일선에서 한참 떨어진 허난성 신양(信陽)에서 무장열차에 탄 채 머무르고 있었다. 여차하면 도망칠 생각이었던 것이다. 심지어 기차 근처로 한무리의 사람들이 지나가자 지레 겁을 먹은 인창은 당장 기차를 출발시키라고 명령하였다. 하지만 알고보니 밭으로 면화를 따러가는 농민들이었다. 결국 짜이펑은 주변의 건의를 받아들여 인창을 해임하고 위안스카이를 재기용키로 하였다.
고향에서 은거 중이던 위안스카이는 짜이펑이 자신을 호광총독에 임명한다는 얘기에도 느긋한 태도였다. 그동안 짜이펑에게 찬밥 대우를 당한데다 목숨까지 빼앗길 뻔 한 그로서는 새삼스레 청조를 위해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예의 "발의 병이 낫지 않았다"라는 말만 반복하면서 집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조정의 동태를 지켜볼 뿐이었다. 그 와중에 전국 각지에서 신군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 점점 혁명이 확산되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짜이펑은 몸이 달았다. 앞뒤를 생각지 않고 어떻게든 위안스카이를 달래볼 생각으로 흠차대신에다 육군대신, 창장 수사의 직책까지 더하여 육해군의 모든 군권을 맡겼다. 청나라의 운명을 위안스카이에게 맡기겠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인창이 아무리 무능해도 북양군과 혁명군의 실력 차이가 워낙 컸기 때문에 그대로 두어도 결국 북양군은 오합지졸인 혁명군을 격파하고 우한을 탈환했을 것이다. 나약한 짜이펑은 스스로 호랑이를 불러들인 격이었다. 더욱이 이제껏 조정의 권위가 건재할 때에는 그럭저럭 위안스카이를 억누를 수 있었지만 그 권위가 사라진다면 이 야심가를 무슨 수로 통제할 수 있을 것인가. 실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전형적인 만주 친귀의 모습이었다. 베이징의 신보(新報)는 사설에서 "위안스카이의 기용은 그동안 부처의 얼굴에 소변을 보다가 급박하다고 부처의 발을 끌어안는 것과 같다"고 하면서 위안스카이가 과연 혁명을 진압할 수 있을지도 의문스럽다고 하였다.
위안스카이는 비로소 조정의 소환에 응했지만 여전히 느긋하였다. 그는 10월 27일에야 허난성 신양에 도착하였고 북양군과 허난성, 후베이성의 모든 청국 군대의 지휘권을 장악하였다. 또한 진압군을 재편성하여 제1군의 지휘권을 펑궈장에게, 제2군의 지휘권을 돤루이치에게 맡겼다. 그 와중에 후난성 창사에서도 제25 혼성협(여단)이 반란을 일으켰고 장시성 주장에서도 반란이 일어나고 해군 함대도 호응하였다. 이들은 우한으로 달려와 혁명군에 가세하였다. 또한 28일에는 '혁명장군' 황싱이 상하이에서 우창으로 달려왔다. 그는 리위안홍에게 전선 총지휘를 넘겨받고 자신의 "黃"자를 크게 써넣은 군기를 앞세워 진두지휘에 나섰다.
한커우에 대한 청군의 공격은 27일부터 재개되었다. 쌍방은 맹렬한 포격과 함께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공방을 벌였지만 결국 북양군의 압도적인 전력 앞에 혁명군은 격파되었고 11월 1일 한커우는 위안스카이의 손에 들어갔다. 위안스카이로서는 청조와 혁명군을 상대로 자신의 막강한 실력을 한껏 증명해 보인 셈이었다. 혁명군은 한양과 우창으로 퇴각하였다. 혁명군은 병력과 무기, 훈련도 열세했지만 여러 계파의 군대가 이합집산으로 뭉쳤기에 지휘권도 혼란스러웠고 내부적인 갈등도 심각하였다. 심지어 우한을 포기하고 동진하여 난징을 공략하자는 주장도 나올만큼 상황은 급박하였다.

▲ 영화 "신해혁명"에서 맹렬한 포화를 뚫고 청군 진지로 돌격 중인 혁명군 병사들.
우한의 전황은 불리하였지만, 우창 봉기에 동조하는 혁명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10월 말까지 7개 성이, 11월 초가 되면 전국 18개 성이 혁명에 가담하였다. 11월 말에는 청조는 즈리성과 동3성만 통제할 수 있는 지경이었다. 혁명조직이 미비한데다 지도력이나 통일성이 없음에도 여러 성이 자발적으로 호응했다는 사실은 청조의 운이 완전히 끝났다는 의미였다. 11월 15일에는 상하이에서 전국의 성대표들이 모여서 "각성 도독부 대표연합회"를 결성하여 새로운 정부의 구성을 추진하였다. 또한 황싱에게 상하이로 돌아와서 대원수가 되어줄 것을 요청하였다. 황싱이 이 요청을 받아들였다면 중화민국의 첫번째 수장은 쑨원이 아니라 황싱이 되었겠지만, 야심과는 거리가 멀었던 황싱은 "동지들을 분열시킬 수 있다"라면서 거절하고 미국에 체류 중인 쑨원이 귀국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하였다.

▲ 청군을 향하여 사격 중인 혁명군.
11월 1일 짜이펑은 신해혁명의 발단이었던 황족 내각을 총사직시켰다. 위안스카이가 경친왕을 대신하여 내각 총리대신에 임명되었다. 그는 자신의 심복들을 중심으로 내각을 새로 구성하면서 량치차오, 장찌엔(張謇) 등 입헌파를 끌어들여 연합정권을 구축하려 했으나 이들은 입각을 거부하였다. 우한의 혁명군에 대해서는 펑궈장을 앞세워 공격을 한층 강화하면서도 뒤로는 돤루이치를 통해 몰래 혁명파와 협상을 시도하였다. 이는 "한손으로는 싸우고 한손으로는 대화한다"라는 중국 특유의 정치 방식이었다.
위안스카이의 태도는 분명하지 않았다. 그도 속으로 갈등하고 있었던 것이다. 황싱도 만주족이라면 몰라도 같은 한족인 위안스카이와 싸울 이유는 없다고 여겼다. 그는 위안스카이에게 편지를 보내어 혁명군과 함께 청조를 몰락시키는데 일조한다면 향후 신생 공화국의 대총통으로 밀어주겠다고 제안하였다. 위안스카이는 자신이 공화제가 아닌 입헌군주제를 지지한다고 대답하였다. 융우태후와 순친왕 짜이펑은 위안스카이에게 "자신들의 기대를 버리지 마라"고 신신당부하였지만 위안스카이의 마음은 점차 혁명군에게 가담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물론 그에게 공화제이니, 혁명이니 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하면 자신의 주가를 더욱 높이고 권력의 중심에 서는가였다.
11월 17일 황싱은 한커우에 나섰다. 하지만 북양군의 강력한 화력 앞에 격퇴된 채 수백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한양으로 퇴각하였다. 펑궈장은 여세를 몰아서 한양을 공격하였다. 북양군은 혁명군의 거점을 하나씩 빼앗고 11월 27일에는 북양군 제6진이 한양을 완전히 점령하였다. 북양군의 전사자는 800여명에 불과한 반면, 혁명군의 전사자는 4200여명에 달했다. 우창 함락도 시간 문제가 되었다. 리위안홍은 "성이 있어야 우리도 있고 성이 망하면 우리도 죽는다"라면서 우창을 끝까지 지키겠다고 선언했지만 후베이성 도독부에 청군의 포탄을 떨어지자 그도 황급히 피신하는 신세가 되었다.

▲ 우창의 혁명군 진지를 향해 포격 중인 청군
위안스카이가 마음만 먹었다면 이대로 우창을 점령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하지만 공격은 멈추었고 양군은 남북으로 대치한 채 교착 상태가 되었다. 펑궈장은 위안스카의의 속내도 모르고 베이징에 공격을 허락해 달라는 전보를 거듭 보냈지만 위안스카이는 되려 그를 베이징으로 소환하고 자신의 또다른 심복인 돤치루이에게 제1군을 맡겼다. 우직한 성격의 펑궈장과 달리, 정치적으로 기민한 돤치루이는 위안스카이의 명령을 받들어 전군의 모든 군사 행동을 멈추게 하였다.
11월 30일 한커우의 영국 조계에서 11개 성의 대표 23명이 모여서 제1차 성 대표회의가 열렸고 21개조로 구성된 중화민국 정부 조직 대강이 발표되었다. 또한 쑹자오런이 초안을 잡은 후베이성 약법(約法)이 발표되었다. 여기에는 봉건적 신분제도의 철폐와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 보장, 의회의 수립, 직접 선거제의 실시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당장은 실현되지 못했지만 20여년 뒤 북벌에 성공한 장제스의 난징정권이 선포한 "임시약법"의 기초가 되었다.
이날 회의에서 위안스카이의 공작은 이미 주효하여 "청조는 이미 망한 것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앞으로는 혁명군과 청조의 문제가 아니라 혁명군과 위안스카이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 더 이상 한족끼리 싸우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는 위안스카이를 대총통으로 추대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세였다. 처음부터 명확한 혁명의 구심점 없이 봉기가 개별적, 산발적으로 일어나다보니 어떤 사람은 리위안홍을, 어떤 사람은 황싱을, 어떤 사람은 쑨원을 지도자로 추천하는 등, 혁명파 내부에서는 주도권을 놓고 극심한 대립과 분열의 양상을 보였다.
위안스카이는 혁명파 내부의 복잡한 동태를 상세하게 알고 있었다. 그는 청 황실과 조정을 위해 싸울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순친왕의 눈밖에 난 그는 비록 상황의 위급함 덕분에 복직하는데 성공했지만 어차피 자신의 지위가 시한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수십년 동안 조정에 몸담은 그로서는 권력자로부터 한번 신임을 잃는 것이 얼마나 위태로운지 모를 리 없었다. 따라서 혁명군의 북상은 앞으로 신정부에서 자신의 몸값을 최대한 높일 수 있는 호기이기도 했다. 그는 조정의 소환을 받은 10월 중순부터 이미 한커우 주재 영국 총영사 허버트 코페(Herbert Goffe)의 중재를 통해 혁명군과 몰래 접촉하고 있었고 11월 11일에는 탄옌카이(譚延闓)를 보내어 후베이성 군정부와 협상을 하였다. 위안스카이는 처음에는 입헌군주제를 제시했지만 혁명군 측은 그가 혁명군에 가담한다면 대총통으로 추대하겠다고 제안하였다. 위안스카이로서는 나쁠 것이 없는 얘기였다.
* 신해혁명 전국으로 확대되다
우창 봉기가 성공하자 전국 각지에서 이에 호응하고 동맹회원들과 신군들이 지방 유력자들과 손을 잡고 도처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부사관과 사병들이 중심이 되었던 우창 봉기와 달리, 다른 성에서는 사단장, 여단장 등 고급 지휘관들도 혁명에 적극 동참하였고 만주족 관리들과 팔기군의 장군들은 진압은 커녕 제 목숨 구하기 급급하여 도망치거나 투항하였렸다. 팔기군은 대포와 신군 못지 않은 우수한 무기를 가지고 있었지만 도무지 전투에 나서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의 무기를 스스로 혁명군에 넘겨버렸다. 덕분에 혁명군은 대부분 총 한번 쏘아보지 않고 손쉽게 반란에 성공하였고 청조의 통제력은 한순간에 와해되었다.
광시성에서는 토비의 우두머리인 루롱팅(陸榮廷)이 자신의 토비 군대를 이끌고 혁명에 가담하여 광시성을 장악하였고 광둥성에서는 상인과 향신들이 민군을 조직하고 독립을 선언한 후 동맹회의 간부인 후한민을 도독으로 추대하였다. 하지만 후한민이 쑨원을 따라서 난징으로 떠나고 민군의 세력이 커지면서 약탈을 일삼는 등 혼란에 빠지자 동맹회 간부인 천중밍(陳炯明)이 신군을 동원하여 이들을 무장해제한 후 해산시켜 버렸다. 광둥성은 현지 군인들과 향신 세력이 장악한 다른 성과 달리, 중국 동맹회의 손에 완전히 들어갔다. 산시성(山西省) 타이위안에서는 신군 제43혼성협 제86표통(연대장)이었던 옌시산(閻錫山)이 팔기군을 제압하고 산시성의 도독이 되었다. 또한 푸젠성에서는 푸저우 주둔 제10진 제20협의 통령(여단장) 쉬샤오숭(許崇智)이 푸저우 장군 푸수(樸壽)가 지휘하는 만주 팔기와 치열한 전투 끝에 이들을 격파하고 푸젠성을 장악하였다.
동맹회 중부총회 간부인 천치메이(陳其美)는 상하이와 항저우 봉기를 준비하였다. 항저우 봉기를 맡은 사람은 장제스였다. 훗날 쑨원이 죽은 뒤 중국의 지도자가 되는 그는 일본에서 유학중이었으나 우창 봉기의 소식을 듣자 귀국을 서둘러 10월 30일 상하이에 들어왔다. 그는 항저우로 내려가 항저우 성 주변에 있는 제81표와 제82표의 혁명세력과 연계하는 한편, 백여명의 결사대를 모집하였다. 11월 3일 밤 결사대와 함께 앞장서서 저장성 순무(巡撫, 성의 통치를 맡은 지방장관)의 관저를 공격하자 수비대는 총 한발 쏘지 않고 흩어져 버렸고 다음날 항저우에도 군정부가 수립되었다. 항저우 성 외곽에 있던 팔기군이 끝까지 저항했지만 장제스가 대포를 끌어와서 포격을 하자 결국 백기를 들었다. 항저우 봉기에서 그는 뛰어난 추진력과 행동력을 증명하였다.
한편, 중국 최대의 국제 도시인 상하이는 조계를 경비하는 열강의 군대는 있지만 청군은 없었다. 천치메이는 소수의 동맹회원들과 함께 강남 제조국을 무혈 접수할 생각이었다. 강남 제조국은 상하이에서 가장 중요한 정부 기관이자 한양 공병창과 함께 중국 최대의 무기공장이었기에 이곳을 점령한다면 무기가 빈약한 혁명군에게는 천군만마를 얻는 셈이었다. 하지만 치밀한 계획과 준비를 했던 장제스와 달리, 천치메이는 별다른 준비도 없이 자신의 세치 혀로 설득하겠다는 생각으로 무기도 없이 무작정 들어갔다가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제조국 총판 장스옌(張士衍)은 그 자리에서 처형하는 대신 가두어 두었다. 하지만 제조국 내에도 동맹회원들이 있었다. 이들이 봉기하여 천치메이를 구해냈다. 또한 상하이 함대가 반란을 일으켜 마오중팡(毛仲芳)을 총사령관으로 향신, 상인, 경찰이 힘을 모아서 강남 제조국을 공격하였다. 혁명군이 몰려오자 장스옌과 경비병들은 겁을 먹고 싸우지도 않고 모조리 도망쳤다. 11월 4일 상하이는 혁명파의 손에 들어왔고 천치메이는 상하이 도독이 되었다. 장제스 역시 항저우 봉기의 공을 인정받아 황푸(黄郛)의 제2사단 산하의 제5연대를 맡았다. 제5연대는 청조가 만든 신군과 달리, 상하이 군정부가 신해혁명 직후 자원자를 모아서 조직한 최초의 혁명군이었다.
혁명이 유일하게 실패한 곳은 즈리성과 동3성이었다. 동북은 만주족의 발흥지이기도 했지만 반청 운동이 거세기는 마찬가지였다. 펑톈에 주둔한 북양 제3진과 제2혼성협의 수장들은 모두 중국 동맹회에 가입한 혁명파였다. 그 중에서도 란톈웨이(藍天尉)가 지휘하는 제2혼성협은 동3성 총독부가 있는 펑톈성 내의 베이다잉(北大營)에 주둔하고 있었다. 동3성 총독인 자오얼쉰(趙爾巽)은 관리로서는 그런대로 유능했지만 위기를 해쳐나갈 위인은 아니었다. 오히려 전국 각지에서 폭동이 일어난다는 소식을 듣자 혁명파에게 정권을 넘기고 자신은 베이징으로 도망칠 생각이었다. 만약 신군이 들고 일어나기만 한다면 성공은 따놓은 당상이었다. 하지만 평톈성 자의국 부의장이었던 위안진카이(袁金鎧)는 평톈성 순방영의 통령인 장쭤린의 힘을 빌리자고 제안하였다.
장쭤린은 광시성의 군벌 루롱팅과 마찬가지로 토비에서 시작하여 입신양명에 성공한 인물이었다. 게다가 십수년 뒤 동북 전체를 차지하여 "동북왕"이 되었고, 쟁쟁한 북양파의 여러 실력자들을 격파하고 중국의 절반을 장악한다. "양광왕"이 되는 루롱팅도 여간한 인물은 아니었지만, 장쭤린은 그와는 비교가 안될 만큼 정치적 수완과 결단력이 매우 뛰어났다.
자오얼쉰은 위안진카이의 충고를 받아들여 장쭤린에게 순방영 15개 영 5천여명의 지휘를 맡겼다. 장쭤린은 일개 통령에서 당장 평톈성의 최고 군사 실력자가 되었다. 동북의 혁명파들은 무장 봉기 대신 평화적인 방법으로 자오얼쉰을 몰아낸다는 생각으로 태평스럽게 있다가 결국 장쭤린의 기습을 받아 모두 쫓겨나거나 죽임을 당했다. 장쭤린은 그 후로도 혁명파의 소탕에 앞장서지만 신해혁명이 일어나 청조가 몰락하자 이를 기회삼아 경쟁자들을 제거하고 동3성을 완전히 장악하여 자신의 거대한 왕국으로 만들었다. 동3성에는 혁명파의 세력이 미칠 수 없었다.
즈리성에서는 베이징 동북쪽 220km 떨어진 롼저우(灤州)에 주둔하던 제20진 제79표와 제80표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 중에는 제3영의 관대(대대장)으로 뒷날 "서북왕"이 되는 펑위샹도 있었다. 이들은 징봉철도(베이징~평톈)를 타고 베이징으로 돌입하려고 했으나 위안스카이의 심복인 차오쿤(曹錕)이 지휘하는 제3진과 순방영 부대의 협공을 받아 괴멸하고 말았다. 펑위샹은 운좋게 처형되지는 않았지만 자리에서 쫓겨났다. 그 외에도 퉁저우와 톈진에서도 봉기 시도가 있었지만 행동으로 옮기기도 전에 모조리 실패하는 등 베이징을 장악하려는 혁명파의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다. 베이징은 위안스카이가 확실하게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양쯔강 이남이 차례로 혁명군의 손에 넘어가는 와중에 강남의 정치적 중심지인 난징은 여전히 청조의 손아귀에 있었다. 강녕장군(江寧將軍) 티에량(鐵良)과 강남제독 장쉰(張勳)이 난징을 굳건히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티에량은 만주족 귀족 출신으로 룽루의 막료였고 위안스카이와는 군 통수권을 놓고 경쟁하는 등 정치적 라이벌이기도 하였다. 또한 장쉰이 거느리는 순방영 제23영은 비록 녹영을 개편한 구식 군대였지만 훈련이 잘 되어 있고 실전 경험이 풍부하여 실질적인 전투력에서 신군보다 훨씬 강력하였다. 또한 두 사람은 인칭, 루이청처럼 나약한 팔기 자제나 한족 관료들과는 달리 보기 드물게 상당한 역량을 갖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푸이의 퇴위를 만류하고 청조가 망한 뒤에도 청 황실을 부흥시키기 위해 복벽사건을 일으키는 등 마지막까지 청조에 충성을 다하였다.
11월 7일 난징성 외곽에 주둔하고 있던 신군 제9진과 순방영의 일부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제9진의 통제 쑤사오전(徐绍桢)이 혁명군을 지휘하여 난징성 공격에 나섰다. 여느 팔기군이었다면 총 몇발 쏘는 것만으로도 겁을 먹고 흩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장쉰은 과감하게 반격하여 신군을 격파하였고 끝까지 쫓아가 완전히 박살내었다. 쑤사오전은 상하이로 가서 천지메이에게 난징 공격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장쑤성, 저장성의 혁명군이 연합하여 "장저연합군(江浙聯合軍)"이 결성되었다. 11월 23일 혁명군은 재차 난징 공격에 나서 격전 끝에 12월 1일 난징을 점령하였다. 장쉰은 지연전을 펼치면서 군대를 쉬저우로 철수시켰다.
▲ 신해혁명 당시 각 성의 독립 선언과 주요 사건 일지. 우창 봉기가 시작된 지 두달도 채 되지 않아 혁명이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12월 말이 되면 청조는 베이징 주변만 겨우 통제할 수 있는 지경에 내몰린다.
난징이 함락되자 혁명파 대표들은 난징을 임시정부의 수도로 삼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황싱을 임시 대원수로, 리위안홍을 부원수로 선출하였다. 하지만 이는 두 사람의 의중을 물어보지도 않은데다, 혁명의 중심지가 우한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후베이 군정부의 입장과는 상충되었다. 혁명세력이 난징파와 우한파로 갈라져서 주도권 싸움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쑤사오전을 비롯해 난징을 점령하여 기세를 떨친 장저연합군 측은 황싱이 한양을 상실한 패전지장에 불과하므로 대원수로 추대할 수 없다고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결국 두 사람의 지위를 맞바꾸어 리위안홍을 대원수로, 황싱을 부원수로 추대하였다.
우한에서는 위안스카이의 북양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했지만 전국으로 반청 혁명이 확산되면서 전세는 과연 어느 쪽이 유리한지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난징의 함락으로 어느 정도 힘의 균형이 이루어지면서 위안스카이로서도 우한에만 매달릴 형편이 아니었다. 설령 우한을 탈환한다고 해도 이미 우창 봉기 이전의 상황으로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태평천국의 난과는 사정이 달랐던 것이다. 만주족이 힘을 잃은데다, 그나마 그동안 청조를 떠바치던 한족 향신세력마저 등을 돌렸다. 청조의 운명이 풍전등화가 되자 그동안 양측을 저울질 하면서 어느 편에 붙을까 신중하게 고민하던 위안스카이도 대세는 이미 끝났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혁명파에 가담하여 청조에게 총부리를 돌리기로 결심하였다.
* 푸이 퇴위를 선언하다
이미 청조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이나 다름없었다. 신해혁명이 중국 전역으로 확대되자 열강들은 청조가 더 이상 희망이 없으며 설령 반란이 진압된다고 해도 끝장나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여겼다. 베이징의 주중 영국 공사 존 조던(John Jordan)은 1911년 10월 16일 영국 외교부에 "청 황실은 이미 국민들의 신임을 얻지 못하고 있어 앞날이 캄캄하다"라고 비관적인 보고를 하였고, 일본 무관 아오키 노부즈미(青木宣純) 소장도 "이번 혁명으로 청 황실은 끝장이 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12월 7일 조정은 위안스카이를 남방과의 평화회담 전권 대표로 임명하였다. 하지만 일부 만주족 귀족들은 평화회담을 강력하게 반대하면서 위안스카이에게 따졌다. "예전에 홍씨우촨(洪秀全) 등이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켰을 때 13개 성이 모두 함락당했지만 증궈판(曾國藩), 리훙장이 이를 모두 평정하였다. 지금 남방의 혁명당은 그리 큰 힘이 없고 리위안홍, 정더촨(程德全)은 모두 조정의 관리이면서 반역을 하였는데 토벌을 하지 않는다면 조정의 체면이 뭐가 되겠는가?" 물론 이들의 호통 따위는 천하대권을 손에 쥔 위안스카이에게 씨알도 먹힐 리 없었다. "그들은 모두 백성의 대표이다. 그들을 어떻게 토벌하겠는가?"
12월 18일 상하이에서 위안스카이 측 대표 탄옌카이와 혁명파 대표 우팅팡(伍廷芳)이 만나서 남북 회의를 개최하였다. 양측은 청조를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실시하는데 의견을 모았다. 위안스카이는 조정을 핍박하여 여섯살짜리 황제를 퇴위시키고 그 대가로 대총통 자리를 약속받았다. 조정에서는 이미 위안스카이를 제지할만한 역량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 서태후도 없고 광서제도 없으며 그동안 조정의 막강한 실세였던 룽루, 장즈퉁 모두 고인이 되었다. 남은 자들은 하나같이 겁 많고 무능하며 뇌물받기와 노는 것 이외에는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만주 친귀들이었다.
그나마 역량을 갖춘 사람은 량비(良弼)였다. 그는 황실의 종친으로 당시 만주 친귀로서는 매우 드물게 일본 육사를 졸업하였다. 또한 신군의 조직과 훈련을 총괄하였으며 금위군을 비롯한 여러 군직을 두루 맡는 등 당대 가장 유능한 군재로 꼽혔다. 청대의 역사서인 《청사고》에는 량비에 대해 "과감하고 기개가 있었다"라고 평하였다. 만약 그가 인창이나 위안스카이 대신 북양군을 지휘했다면 이후의 역사는 또 어떻게 흘러갔을지 모른다. 하지만 짜이펑은 그가 몰락한 가문이라는 이유로 푸대접하고 훨씬 위험한 위안스카이에게 군권을 넘겨줌으로서 스스로 자기발등을 찍었다. 량비는 위안스카이의 복직을 강력하게 반대했지만 위안스카이의 뇌물을 받은 만주 친귀들과 외국인들의 감언에 짜이펑이 넘어간 것이다.
량비는 위안스카이가 조정의 명령을 무시하고 멋대로 혁명파와 협상을 벌이자 황실과 귀족들과 손을 잡고 종사당(宗社黨)을 조직하여 위안스카이에게 맞섰다. 청조로서는 최후의 발악인 셈이었다. 하지만 위안스카이가 조정에 대해 황제의 퇴위를 종용하고 있던 1912년 1월 29일, 량비는 혁명파 자객의 폭탄 테러로 암살당하고 말았다. 청조를 지켜주던 마지막 버팀목마저 사라진 셈이었다. 그가 죽은 다음날인 1월 30일 청조는 백기를 들었다. 1644년 청 태종 홍타이지가 산하이관을 돌파하고 베이징을 점령한 이래 260여년 동안 중국을 통치했던 청조의 마지막 순간이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