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쑨원, 중화민국의 총통이 되다
"지금 온 나라가 공화제로 기울어 있다. 신민이 열망하는 바를 살펴서 우리는 천명을 알았다. 우리 황실의 영광만을 위하여 신민의 요구를 거스리는 것은 옳지 않다. 우리는 시대의 조짐을 알았고 민심의 흐름을 판단하였다. 지금 황제의 동의를 얻어 주권을 신민에게 부여하고 입헌정부의 수립을 선언한다...."
- 1912년 2월 12일자 선통제 푸이의 퇴위를 알리는 융유태후의 조서 중에서
1911년 12월 25일, 쑨원이 상하이를 통해 귀국하였다. 우창 봉기가 일어난 지 두달 보름만이었다. 그가 미국에서 모금활동을 하는 사이, 중국 전역에서 일제히 반청 봉기가 일어나면서 청조의 몰락은 초읽기에 들어갔다. 그러나 정세는 오리무중이었다.
겉보기에는 여전히 탄탄했던 청조의 통치가 우창 봉기를 신호탄으로 한순간에 와해된 이유는 청군과 혁명군이 충돌해서가 아니라 각 지역의 한족 독무(督撫, 성의 장관)들이 일제히 독립을 선언했기 때문이었다. 조정의 통치력이 점점 약화되고 재정적으로 궁핍해지면서 이에 반비례하여 독무들의 권한은 강화되고 더 이상조정의 권위에 의존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즉, 청조의 몰락은 조정이 지방의 군권과 재정권을 상실했기 때문이었다.
명확한 구심점이 없는 상태에서 시작된 신해혁명은 청조의 통치는 끝장냈지만, 막상 새로운 시대를 열기는 커녕 오히려 무정부의 혼란 상태로 빠져들었다. 이는 쑨원이 처음부터 명확한 계획 없이 "만주족 정권을 타도하자"라는 말만 외쳤을 뿐 그 다음은 어떻게든 되겠지, 라고 방치한 결과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청조는 단순한 이민족 집단이 아니라 260여년 동안 중국을 지배하였고 이미 중국 사회 그 자체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그의 단순한 논리와는 달리, 청조라는 버팀목이 하루아침에 사라지자 중국 전체가 와해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청조를 대신할 새로운 정권의 수립이었다. 그동안 각 성의 대표들은 리위안홍이나 황싱을 지도자로 추대하려 했으나 혁명파 내부의 알력 싸움으로 난항이 거듭되고 있었다. 게다가 해외에 체류 중이던 쑨원은 조기 귀국을 요청하는 전문에 대해 "나는 총통 자리에 야심이 없다"면서 청조만 끝장낼 수 있으면 누가 새로운 지도자가 되건 상관없다고 대답하였다. 하지만 막상 귀국하자 자신의 말을 뒤짚어 총통 후보로 취임하였다. 12월 29일 총통선거가 실시되었다. 후보는 쑨원, 황싱, 리위안홍이었다. 17개 성 대표 45명이 상하이의 장쑤성 자의국에 모여서 투표를 실시하였다. 쑨원이 16표, 황싱이 1표를 얻었다.

▲ 중화민국 최초의 국기였던 오색기(五色旗). 다섯가지 색깔은 각각 한족, 만주족, 몽골족, 회족, 장족 등 중국의 다섯 주요 민족을 가리킨다. 이는 중국이 부강하려면 다섯 민족이 단결해야 한다는 이른바 "오족 공화" 사상의 영향으로, 신해혁명이 명나라나 태평천국과 달리 단순히 이민족을 몰아내고 한족들의 세상을 되찾는 것으로 국한하지 않겠는다는 의미이기도 하였다. 중국 동맹회의 쑹자오런이 오색기의 사용을 처음 제안하였고, 우창 봉기 이후 전국의 혁명군은 청천백일기, 십자성기 등 제각기 다양한 깃발을 내걸다가 혁명파와 위안스카이 사이에서 남북 담판이 실현되면서 1912년 1월 10일 난징의 중화민국 참의회는 오색기를 정식 국기로 정하였다. 쑨원이 직접 도안한 청천백일기는 해군기로 사용되었으나, 이후 위안스카이와 결별하여 광저우로 내려오면서 북양정권은 오색기를, 쑨원의 광저우 정부는 청천백일기를 사용하였다. 장제스가 북벌에 승리한 후 청천백일기는 오색기를 대신하여 중국의 국기가 되었다.
1912년 1월 1일 밤 11시, 쑨원은 난징의 양강총독 관저에서 신생 공화국의 초대 임시 대총통에 취임하고 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였다. 새로운 나라의 국명은 "중화민국"이었다. 이전만 해도 이민족을 배척하고 한족만의 국가를 수립하자고 주장하던 쑨원은 신해혁명이 성공한 뒤에는 중국의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다섯 민족(한족, 만주족, 몽골족, 회족, 장족)이 힘을 합해야 한다며 이른바 "오족공화"와 "중화민족"을 제창하였다. 즉, 중화민국이란 중국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는 56개 민족을 아우르는 하나의 통일국가를 의미하며, 1949년에 중화민국을 대신하여 수립된 중화인민공화국 역시 그대로 계승하였다. 하지만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한족 이외의 다른 소수민족들의 정체성과 현실적인 차별을 일방적으로 무시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갈등을 내포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선서하였다. "만주 전제 정부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공고히 하며 민생의 행복을 도모하고 국민의 뜻을 따른다. 그리하여 나라에 충성하고 대중을 위해 복무한다." 또한 리위안홍은 부총통에, 황싱은 육군총장에 각각 선출되었다. 하지만 쑨원 정권의 지위는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청조는 껍데기로 전락했지만, 베이징에는 여전히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북방 최강의 실력자 위안스카이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2011년 신해혁명 100주년 기념으로 제작된 성룡 감독의 영화 《신해혁명(辛亥革命)》에서 임시 대총통에 취임하는 쑨원.
열강들의 태도 또한 여전히 모호하였다. 이들은 위안스카이를 지지하고 있었다. 위안스카이는 외국 공사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외국인들의 이권을 보장해 온데다, 중국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 군사 실력자이었다. 열강들의 바램은 누가 정권을 쥐건 중국의 정세가 하루 빨리 안정되어 자신들의 돈벌이에 차질이 빚지 않는 것이었다. 쑨원은 4개국 은행단(미, 영, 프, 독)과 교섭하여 차관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혁명정부는 심각한 재정난에 허덕일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자주권 회복을 가장 중요한 혁명 과제로 삼으면서도, 열강들의 승인을 얻기 위해서 그동안 청나라가 체결했던 온갖 불평등조약들을 고스란히 계승할 수 밖에 없었다.
한편, 일본 정부는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청나라를 "지나(支那)"로 부르기로 하였다. 이는 주중 공사 이주인 히코기치(伊集院彦吉)의 건의에 따른 것으로, 청나라가 무너진 이상 별도의 국명을 붙여야 한다는 이유였다. 청나라를 경멸하고 있었던 일본의 입장에서는 세계의 중심이라는 뜻의 "중국"은 걸맞지 않다고 여겼던 것이다. 이때부터 일본은 중국을 공식적으로 "지나"라고 통칭하였다. 뒷날 중일전쟁이 일어났을 때에도 "지나사변"이라고 일컬었다. 물론 중국인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멸시하는 의미로 받아들였고 양국의 갈등 요인이 되었다.
혁명정부 입장에서 위안스카이는 엄연한 타도의 대상이었다. 조정의 실권자이자, 그동안 혁명에 동조하기는 커녕 앞장서서 탄압해 왔다. 말하자면 혁명의 가장 큰 방해물이었다. 그럼에도 타협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혁명파 내부의 극심한 분열상과 재정난 때문이었다. 또한 혁명군의 숫자는 30만명에 달하여 10만명에 불과한 북양군을 압도했지만 대부분 오합지졸이었고 군기도 엉망이었기에 전투가 벌어지면 승패는 장담할 수 없었다. 자칫 중국은 남북으로 분열될 것이며, 내전이 장기화될 경우 태평천국의 난처럼 열강들이 무력 개입할 수도 있었다. 즉,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또한 쑨원은 위안스카이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고 같은 한족이라는 환상도 가지고 있었다. 설마 그가 청조를 무너뜨린 뒤 자신이 그 자리에 앉으려고 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였다. 쑨원의 목적은 청조의 타도이지, 태평천국의 지도자 홍쑤전이나 뒷날의 장제스, 마오쩌둥처럼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를 건설하겠다는 야심은 없었다.
반면, 어설픈 쑨원과 달리 위안스카이는 훨씬 고단수였다. 야심가에다 기회주의자이면서 뛰어난 정치적 수완을 갖춘 그는 청조와 혁명파 사이에 양다리를 걸친 채 양쪽의 약점을 교묘하게 파고들면서 온갖 술책을 능수능란하게 부렸다. 난징에서 쑨원이 대총통에 추대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위안스카이는 격분하여 즉각 혁명군을 공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또한 자신의 측근들을 동원하여 공화제 반대와 입헌군주제 찬성을 선언토록 하였다. 혁명정부를 압박하기 위함이었다. 위안스카이는 청 황제가 퇴위한 뒤 48시간 내에 난징 정부를 해산할 것과 자신을 대총통으로 임명할 것을 요구하였다. 최후 통첩이나 다름없었다. 쑨원으로서는 위안스카이의 요구를 받아들든지, 일전을 벌이던지 양자 택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그는 백기를 들었다.
* 청조의 소멸
1898년에 광서제를 배신했던 위안스카이는 이번에는 선통제를 배신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상하이의 외국인 상인들을 부추겨 자신과 순친왕 짜이펑에게 "열강들은 공화제에 찬성한다"라는 건의를 올리도록 하였다. 또한 위안스카이의 사주를 받은 베이징의 신문들은 프랑스 혁명 당시 루이 16세가 처형된 것을 상기하면서 혁명파에 의해 강제로 끌어내려지기 전에 황제가 스스로 물러날 것을 촉구하였다. 위안스카이와 결탁하고 있던 황족과 조정 대신들도 앞장섰다. 대표적인 사람이 경친왕 혁광과 푸륜이었다. 1912년 1월 17일 어전회의에서 두 사람은 "황실을 보전하려면 공화의 길을 가는 것 이외에는 다른 좋은 방법이 없는 것같다."라고 주장하면서 황제의 퇴위를 종용하였다.
분위기가 어느 정도 무르익었다고 판단한 위안스카이는 직접 나섰다. 푸이의 어머니인 융유태후(隆裕太后)에게 당장 황제가 물러나지 않는다면 루이 16세처럼 될지 모른다며 협박하였다. 청조는 사면초가나 다름없었다. 물론 아직 기개가 남아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량비와 공친왕(恭親王) 푸웨이(溥偉), 숙친왕(肅親王) 샨치(善耆)였다. 두달 전 짜이펑이 위안스카이에게 군정 대권을 맡기려고 했을 때, 이들은 위안스카이가 한 헌제를 핍박했던 조비나 위를 찬탈했던 사마염과 같은 자라며 "호랑이를 불러 집을 지키려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된다"라고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하지만 짜이펑은 위안스카이에게 매수된 황족과 외국인들의 말만 듣고 묵살하였고 그 대가를 치루게 된 것 이다.
조정에서는 연일 어전회의가 열려서 격렬한 찬반양론이 대립하였다. 혁광은 "이미 전국의 반을 잃었다. 우리 군대는 싸울 의지가 없다. 설령 일부 지역을 유지한다고 해도 오래 버틸 수 없다. 황실을 보존하려면 공화를 선택해야 한다. 다른 좋은 방법은 없다"라고 주장하였다. 혁광 앞에서 짜이펑은 대성통곡을 하였다. 푸웨이와 샨치, 탁지부 대신(盐政大臣) 짜이쩌(載澤)는 결사반대하고 궁중의 금은 그릇을 긁어 모아서라도 전비를 마련하여 최후의 일전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만주 친귀 중에서 가장 뛰어난 역량을 가진 량비를 중심으로 푸웨이, 샨치, 짜이쩌 등 일부 황족들이 뭉쳐서 종사당을 조직하고 위안스카이에게 끝까지 맞서려고 하였다. 하지만 누가 싸울 것인가. 우창 반란 당시 제3군의 군통을 맡았던 진국장군(鎮國將軍) 차이타오(載濤)는 도광제와 순친왕의 동생이자, 황제 푸이의 숙부이기도 하였다. 푸웨이가 "그대는 육군을 맡았으니 우리 군대의 상황을 잘 알겠지?"라고 묻자 차이타오는 "난 전쟁을 해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라고 대꾸하였다. 나태한 생활에만 젖어있었던 만주 친귀들의 현실이었다.
1월 26일 위안스카이의 심복인 돤루이치를 비롯한 북양군의 고급 지휘관 47명이 공동으로 황제의 퇴위를 종용하였다. 이들의 협박은 연일 계속되었고 자금성 주변은 위안스카이의 군대가 포위하여 당장이라도 공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게다가 이날 종사당의 지도자인 량비가 혁명파의 총에 맞아 피살당했다. 청조의 마지막 기둥이었던 량비마저 사라지자 황실과 조정에 더 이상 위안스카이에 맞설 사람은 없었다. 1월 30일 어전회의에서 황제의 퇴위가 결정났다. 융유태후는 위안스카이에게 황제의 구체적인 퇴위 조건을 놓고 난징측과 협상할 것을 지시하였다. 2월 9일 이른바 <대청황제 퇴위후 우대조건에 관한 사항>이 확정되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대청황제는 퇴위 후에도 존칭을 그대로 보존하며 민국 정부는 그를 외국 군주의 예로 대한다.
2. 황실의 경비는 연 400만량으로 하며 민국 정부가 이의 지급을 보장한다.
3. 대청황제는 퇴위 후 잠시 궁성에 거처하다가 훗날 이화원으로 옮긴다. 궁인들은 그대로 부릴 수 있다.
4. 대청황제의 종사와 능묘는 영원히 보존할 것이며 민국정부가 위병을 배치하여 보호한다
5. 아직 완성되지 못한 도광제의 묘는 민국 정부가 끝까지 책임진다
6. 대청황제의 사유재산은 민국 정부가 보호한다.
7. 금위군은 중화민국 육군부의 편제에 편입하여 종전대로 정원과 보수를 지급한다.
삼일 후인 2월 12일 융유태후는 황제 푸이를 대신하여 황제 퇴위를 수락하는 조서를 내렸다. 황제를 뒤로 한 채 비통해 하는 융유태후와 순친왕 짜이펑 앞에서 위안스카이는 "협정으로 황제가 잃는 것은 통치권 뿐이며, 황제는 여전히 황제로 남을 것"이라고 장담하였다. 또한 난징의 혁명정부에 대해서도 서신을 보내어 "너희들은 공화국을 얻게 될 것이며 황제에게는 이름만 남을 것"이라면서 황실을 그대로 둔다고 해서 결코 손해가 아님을 강조하였다.
이로서 1616년 태조 누르하치가 후금을 세운 지 300여년 만에 선통제 푸이를 마지막으로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또한 진시황이 처음으로 황제를 칭한 아래, 중국 5천년 역사에서 처음으로 황제의 지배가 끝나는 순간이기도 하였다. 훗날, 푸이는 어린 시절에 자신과 어머니 앞에서 뚱뚱한 노인이 슬프게 울고 있었다고 회상하였다. 그는 그 노인이 무엇이 그리 슬폈는지 알지 못했지만 그가 바로 황제의 퇴위를 요구하는 위안스카이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 앞에서는 눈물 연기를 벌였던 위안스카이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자말자 그 자리에서 변발을 자르고 가가대소했다고 한다.
위안스카이는 황족과 만주 귀족들에 대해서도 한족과 동등한 지위를 누리되, 사유재산의 인정과 병역을 면제하는 권리를 약속하였다. 또한 팔기군은 지금까지와 동일한 조건으로 연금을 지급받을 수 있었다. 특권도 차별도 사라졌다. 역대 중국 왕조들이 정권을 차지한 후 기존 정권에 대해 혹독한 보복을 했던 것에 비하면 그야말로 관대한 조건이었다. 노련한 위안스카이의 수완 앞에 황실과 만주족들은 스스로 저항 의지를 포기하였고, 혁명정부 역시 청조와 결판을 내는 대신 더 시급한 사안으로 눈을 돌렸다. 덕분에 1911년 10월 10일 우창 봉기가 시작된지 삼개월만에 혁명은 끝났다. 몇달 전만 해도 청나라가 이렇게 어이없이 끝나리라 예상했던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이는 분명 위안스카이의 노련한 수완 덕분이었다. 그의 사탕발린 말이 아니었다면 청조가 적어도 저항 한번 해보지 않고 손을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본다면 혁명파이건 청조이건 그의 손에 놀아낸 셈이었고, 자신들이 기만당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때는 이미 늦었다.
만주족에게는 또 다른 선택지도 있었다. 황제를 데리고 베이징을 벗어나 과거 자신들의 선조가 살았던 만주로 가서 중국 본토와 분리된 별도의 정권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이는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황제에게는 금위군을 비롯해 충성스러운 군대가 상당수 남아 있었고 혁명파의 손에 넘어간 다른 성들과 달리, 만주와 내몽골은 혁명의 혼란에 빠지지 않은 채 여전히 청조에 대한 복종심을 유지하였다. 만주는 광대하며, 러시아와 일본에 의해 대규모 철도가 깔리는 등 더 이상 과거의 거친 황무지가 아니라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가진 땅이기도 하였다. 만약 황제가 펑톈에서 신정권을 수립했다면, 만주족 관리들은 공화국에 남는 대신 틀림없이 황제 곁으로 달려와서 만주족 국가의 건설을 위해 노력하였을 것이다.
청조가 이런 계획을 결코 간과했거나 무시했던 것은 아니다. 실제로 보황파 관료들은 황제가 만주로 퇴각하는 방안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황제는 어렸고 섭정과 태후는 무능하였다. 혁광을 비롯한 대다수 황실의 원로들은 위안스카이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결국 짜이펑과 황족들은 통치권을 끝까지 지키려는 대신,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베이징에 그대로 남는 쪽을 선택하였다. 위안스카이가 약속한 안락한 생활은 충분히 만족스럽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순진하게도 약속이 반드시 지켜지리라 한치의 의심도 없었다. 끝까지 저항한 사람은 공친왕 푸웨이와 숙친왕 샨치 두사람 뿐이었다. 하지만 대세를 바꿀 수는 없었다. 황족들의 비겁함에 분개한 두 사람은 훗날을 기약하면서 뤼순의 일본 조계로 갔다. 하지만 죽는 날까지도 그들의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또한 만주족들은 하루 아침에 자신들의 세상을 잃어버렸지만, 그들의 유일한 저항은 변발을 자르는 것이었다. 변발 문화가 자신들의 것이 아니라 한족의 것이라고 착각했기 때문이었다.
* 위안스카이 정권을 쥐다
청조로부터 권력을 찬탈하는데 성공한 위안스카이는 그것을 새삼스레 혁명정부에게 넘겨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좀 더 뒷날의 일이지만 그는 결코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자신의 원대한 계획을 실현시켜 나가면서 쑨원과 혁명파들의 뒷통수를 치게 된다. 또한 통치권을 포기한 대가로 거액의 연금을 약속받았던 푸이는 단 한번도 제대로 지급받지 못했다. 황실의 보물은 베이징을 차지한 군벌들에 의해 수시로 약탈당했고 십수년 후 푸이는 자금성에서도 쫓겨나 톈진의 일본 조계로 도망쳤다.
황제의 퇴위가 선언된 다음날인 2월 13일, 쑨원도 대총통에서 물러나고 후임자로 위안스카이를 추천하였다. 참의원에서는 위안스카이를 임시대총통으로 선출하는데 만장일치로 동의하였다. 쑨원은 고별사에서 "삼민주의 중에서 이미 민족(만주족 지배의 청산)과 민권(공화제의 수립)을 달성하였고 민생(경제발전과 부국강병)만 남았다"라면서 감개무량해하였다. 한편으로, 그는 임시대총통에서 물러나되 중요한 조건을 달았다. 신생 중화민국의 수도는 반드시 난징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위안스카이를 베이징에서 떼어놓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위안스카이에게도 난징으로 와서 대총통에 취임할 것을 요구하였다.
위안스카이는 수도를 난징으로 할 경우 청 황실의 복귀를 꾀하는 세력들의 준동이 우려되고, 열강들 또한 베이징을 수도로 하는데 동의한다는 핑계로 거절하였다. 만약 쑨원이 끝까지 난징 천도를 고집하겠다면 자신은 하야할 테니 혁명정부가 직접 힘으로 해결해 보라는 식으로 협박하였다. 난징 정부 내에서도 리위안홍 등 쑨원 반대파들은 난징 천도를 강력하게 반대하는 등 의견이 통일되지 못했다. 하지만 위안스카이의 세력권인 베이징을 공화국의 수도로 정한다면 위안스카이를 견제할 방법이 없어진다. 아무리 순진한 쑨원이라도 그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쑨원은 왕징웨이, 쑹자오런, 차이위안페이(蔡元培) 등 측근들을 "남하 권유사"로 위안스카이에게 보내어 난징으로 내려올 것을 재촉하였다. 위안스카이는 이들을 환대했지만 난징 천도 문제만큼은 나중에 공의(公意)를 모아서 정할 일이라면서 대답을 회피하였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인 2월 29일 밤 베이징에서 제3진의 병사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폭동은 순식간에 바오딩과 톈진까지 확산되었다. 폭도들은 왕징웨이 등이 머물고 있는 숙소까지 난입하는 등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이들의 진압을 위해 열강 군대가 출동하고 돤루이치, 펑궈장 등 북양군의 장군들은 베이징을 수도로 해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차이위안페이는 쑨원에게 전문을 보내어 난징 천도는 포기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또한 여러 언론사와 혁명파 도독들까지도 쑨원을 비난하면서 "남북의 통일이 지지부진한 것은 쑨원이 난징 천도를 고집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결국 위안스카이의 교묘한 모략 앞에 쑨원은 또한번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 임시대총통으로 취임한 위안스카이
3월 10일 위안스카이는 베이징에서 중화민국 제2대 임시대총통에 취임하였다. 또한 위안스카이의 측근인 탕샤오이(唐紹儀)가 총리대신에 취임하였다. 내각의 구성을 놓고도 위안스카이는 참의원을 협박하여 자신의 측근들을 내각의 주요 자리에 임명하는데 동의하라고 윽박질렀다. 쑨원은 육군부장(장관)에 황싱을 밀었지만 위안스카이는 돤루이치를 임명하였다. 황싱은 난징 유수가 되어 남방의 혁명파 군대의 개편과 축소를 맡게 되었다. 위안스카이는 쑨원과 황싱을 베이징으로 초대하였다. 혁명파는 쑨원에게 어떤 계략이 있을지 모른다면서 베이징 방문을 반대했다. 황싱은 출발을 잠시 미루었지만 쑨원은 8월 24일 베이징에 도착하여 위안스카이의 성대한 환대를 받았다. 두 거물이 처음으로 만나는 순간이었다.
위안스카이는 쑨원을 융숭이 대우하면서 자신에게 많은 가르침을 달라고 겸손하게 청하였다. 환대에 감격한 쑨원은 위안스카이를 붙잡고 밤새도록 떠들었다. 위안스카이는 쑨원이 뭐라고 말하건간에 무조건 고개를 끄덕이면서 연신 "하오(好)"라고 말하였다. 설령 의견이 다른 점이 있어도 "일리가 있다"라면서 쑨원의 비위를 맞추었다. 위안스카이에게 흠뻑 빠진 쑨원은 자신은 앞으로 정치에는 결코 관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또한 혁명파 당원들에게도 전문을 보내어 위안스카이를 극구 칭찬하면서 전력을 다하여 도와줄 것을 호소하였다. "그는 능력도 있고 두뇌도 명석하다. 통찰력도 있고 사상도 새롭다. 방법이 조금 구식이기는 하나 지금의 상황에서는 나라를 다스리는데 이런 사람이 적격이다."
쑨원은 상하이로 돌아온 뒤에도 환영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남쪽 인사들 중에는 위안스카이가 공화제를 찬성한 것이 결코 진정한 마음이 아니라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다. 따라서 현재의 중화민국을 가짜 공화국이라고 비난한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마음이 참되고 성실함에서 나온 것이라고 믿는다. 혁명군의 세력기반인 남방과 위안스카이의 기반인 북방을 분리하자는 주장도 있지만 나는 결코 찬성할 수 없다. 남과 북을 조화시키는데 힘써야 한다. 앞으로는 혁명 동지들은 마땅히 전력을 다하여 위안스카이 총통을 도와야 한다." 9월 11일에 베이징에 도착한 황싱도 위안스카이의 융숭한 대접에 홀딱 넘어갔다.
반면, 위안스카이는 측근들에게 쑨원과 황싱에 대해 "쑨원은 뜻이 있고 견해가 탁월하지만 추진력이 없다. 황싱도 성품이 곧고 단호하지만 배포가 작고 식견이 짧다. 남의 속임수에 잘 넘어간다."라고 비웃으면서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였다. 조금 추켜세워주는 것으로도 기뻐하면서 우쭐대는 이들의 모습은 위안스카이의 눈에는 순진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어 보였던 것이다. 이것만 보더라도 혁명파의 지도자인 쑨원과 황싱조차 중앙 정치에서 온갖 산전수전을 겪었던 위안스카이의 상대가 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8월 육군부는 <육군부관제(陸軍部官制)>를 공포하여 군제를 개편하였다. 북양군 시절의 "진", "협"과 같은 편제명은 "사(師, 사단)", "단(團, 연대)" 등으로 바뀌었다. 평시의 기본 전략 단위는 사단이었으며 1개 사단은 2개 보병여단(각 여단은 2개 연대 체제), 1개 기병연대, 1개 포병연대, 1개 공병대대, 1개 치중대대로 구성되었다. 또한 사단에 속하지 않는 독립 혼성여단이 있어서 1~2개 연대 또는3~4개의 보병, 포병, 기병 대대 등으로 구성되었다. 중앙군은 20개 사단 및 20개 여단으로 편성되었다.
이와 함께 <육군관좌사병등급표(陸軍官佐士兵等級表)>를 공포하여 청조 시절의 낡은 무관 관제를 폐지하고 서구식 계급제도의 실시를 선언하였다. 모든 장교를 3등급(장성, 영관, 위관)과 9개의 계급(상, 중, 하)으로 분류하였다. 그리고 각 성의 군권을 쥔 도독과 사단장들은 중장을, 여단장은 소장 계급을 부여하였다. 최고위 계급인 상장(上将)은 군사령관에 해당하며 위안스카이의 심복인 돤치루이과 펑궈장, 그리고 혁명파에서는 리위안홍과 황싱이 각각 임명되었다. 해군은 2개 함대 및 연습함대로 편성되었으며 보유한 대소 함정은 40여척에 총배수량은 4만톤 정도였다. 또한 해군 육전대 4개 중대 500여명 정도가 있었다.
하지만 군제의 개혁에도 불구하고 순열사(巡閱使), 경략사(經略使), 검열사(檢閱使), 호군사(護軍使)와 같은 청조 시절의 군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들은 도독의 상위 장관으로서 두세개의 성을 묶어서 군사 사무와 군대의 검열을 총괄하였지만 실권이 모호하고 휘하에 직접 지휘하는 병력은 없어 사실상 유명무실한 직책이었고 도독이 겸임하는 경우도 많았다. 또한 주요 대도시에는 진수사(鎮守使)가 있어서 방어를 맡았는데 통상 현지에 주둔한 사단장이나 혼성여단장이 겸임하였다. 군대의 편성도 통일되지 않아 각 성과 현에는 경비대, 유격대, 수비대, 순방영, 자치군 등 정규 편제에 속하지 않는 부대들도 많이 있었다. 당시 중국의 혼란스러움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9월 9일 위안스카이는 쑨원을 전국철로총판에 임명하였다. 쑨원은 매우 기뻐하면서 "앞으로 10년 내에 전국에 20만km의 철도를 놓아 중국을 세계 제일의 강국으로 만들겠다"라며 호기롭게 자신의 뜻을 밝혔다. 그는 즉시 철도 건설 계획을 수립하는데 착수했지만, 청조가 1860년부터 1911년까지 중국 전역에 건설한 철도가 1만km 남짓에 불과했다는 점에서 쑨원의 계획은 애초에 실현가능성이 있을 리 없었다.
신해혁명으로 청조의 통치를 끝장내는데는 성공했지만, 진짜 혁명은 실상 이제부터 시작일 뿐이었다. 1912년 12월부터 1913년 2월까지 제헌국회의 수립을 놓고 전국에서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쑹자오런이 중국 동맹회를 기반으로 1912년 8월 25일 수립한 국민당과 상하이에서 수립된 공화당, 리위안홍을 수장으로 하는 공화당, 량치차오 등 입헌파들이 중심이 된 민주당 등 여러 정당이 경쟁을 벌였다.
결과는 국민당의 압승이었다. 중의원 596석 중 269석을, 참의원 274석 중 123석을 국민당이 승리하면서 제1당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쑹자오런은 쑨원이나 황싱과 달리, 위안스카이에게 결코 호락호락한 위인이 아니었다. 사사건건 위안스카이의 권한 남용과 약법의 위반을 걸고 넘어졌다. 위안스카이로서는 그야말로 눈의 가시였다. 결국 위안스카이는 그를 제거하기로 결심하였다.

▲ 참의원에서 연설 중인 쑹자오런. 쑨원, 황싱과 함께 혁명파의 지도자로서, 나이는 쑨원이나 위안스카이에 비해 한참 어린 약관의 30살에 불과했지만 뛰어난 조직력을 갖춘 수완가였다. 그는 대총통의 권한을 제한하려 하면서 위안스카이와 극심한 갈등을 빚었고 결국 위안스카이의 사주로 살해되고 말았다.
쑹자오런은 우한과 난징 등 전국 각지를 돌면서 위안스카이 정권의 독선적인 태도를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3월 20일 밤 베이징행 열차을 타기 위해 상하이역에서 기다리고 있던 와중에 누군가의 저격을 받아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 사건을 조사한 장쑤성 정부는 암살의 배후에 위안스카이가 있다는 사실을 밝혀내었다. 마침 철도 건설을 위한 차관을 획득하려고 일본을 방문중이던 쑨원은 큰 충격을 받고 비로소 위안스카이에게 농락당했음을 깨달았다.
위안스카이와 쑨원의 싸움, 이른바 "제2혁명"이 시작되었다. 앞으로 40년 동안 이어질 기나긴 내전의 서막이 열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