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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 전쟁과 인물, 사건으로 보는 중국 현대사 > 4화 - 쑨원, 혁명을 외치다/blog,naver.com/atena

* 황화강 사건 - 우창 봉기의 도화선


아직 우창 봉기가 일어나기 반년 전의 일이다. 1911년 4월 27일 광저우에서 혁명파의 무장 봉기가 일어났다. 주모자는 중국 동맹회 지도자의 한 사람이자 쑨원의 맹우인 황싱(黃興)이었다. 당시 쑨원은 이른바 "변경혁명(邊境革命)"이라 하여 베이징에서 멀리 떨어진 중국의 서남 변경에서 반란을 일으킨 후 중국 전역으로 확산시켜 청조의 항복을 받아내겠다는 계획을 꾸준히 밀어붙이고 있었다. 나중에 "황화강 사건(黄花崗起義)" 또는 "72열사 사건"이라고도 불리게 되는 이날의 봉기는 쑨원의 열번째 시도였다.


황싱의 계획은 저장성과 푸젠성 등 남부 여러 성에 있는 혁명파 조직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봉기를 한 후 양광총독부가 있는 광저우로 진격하고 각지의 신군과 순방영 혁명파 군인들도 동참하여 중국 남방을 일거에 평정하겠다는 것이었다. 당초의 봉기 예정일은 4월 13일이었다. 그는 그동안의 실패를 경험삼아 모든 심혈을 기울여 준비하였고 동맹회의 모든 인력과 자금을 총동원하였다. 사용한 자금만도 17만냥이 넘었고 이만한 돈이면 1개 진(사단)을 통째로 무장시킬 수 있는 어마어마한 거금이었다.

하지만 시작부터 여의치 않았다. 황싱이 거사를 준비하는 사이, 뜻밖의 사건이 벌어졌다. 4월 8일 저녁 6시경 원성차이(温生才)라는 혁명파 지사가 독단적으로 행동하여 광저우 장군(廣州將軍, 광저우에 주둔한 팔기군을 지휘하는 무관) 푸치(孚琦)를 암살한 것이다. 원래 그의 암살 목표는 1년 전에 있었던 광저우 신군 제1표의 반란을 진압했던 수사제독 리준(李准)이었다. 그런데 푸치가 가마를 탄 채 당시로는 신기한 물건이었던 비행기가 날아가는 모습을 사람들 사이에서 구경하는 것을 보고 원성차이는 그가 리준이라고 생각하고 달려나가 권총을 쏘았다. 푸치는 암살자를 발견하고 겁에 질린 채 체통도 버린 채 살려달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온 몸에 3발의 총알을 맞고 즉사하였다. 푸치로서는 엉뚱한 참변을 당한 셈이었지만, 그의 주변을 호위하고 있던 10여명의 만주족 팔기 기병들 역시 암살범을 잡기는 커녕 놀라서 모조리 달아나 버렸다. 원성차이는 도망쳤다가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고 며칠 후 참수당했다. 이로 인해 황싱의 거사도 누설되어 버렸다.


광저우의 분위기는 당연히 흉흉했고 경계가 매우 엄중하였다. 무기 확보에도 차칠이 발생하여 일본을 통해 권총 백여정과 4천여발의 총탄을 홍콩을 통해 들여오다가 겁을 먹은 책임자가 멋대로 바다에 버렸다. 다음 무기는 홍콩을 통해 광저우로 수송되었다. 봉기 계획이 누설되어 청군이 이미 대비하고 있는 이상 거사를 연기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우직한 성격의 황싱은 그대로 결행하기로 하였다. 거사의 총지휘는 차오성(赵声)이 맡았다. 그는 얼마 전까지 난징 주둔 저장 육군 제9진의 제33표 표통(연대장)을 맡았던 30살의 젊은 군인으로서 황싱과 함께 혁명파의 대표적인 무장 지도자였다. 황싱은 총독부 공격을 지휘키로 하였다.


하지만 거사는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봉기에 참여한 인원은 400여명도 채 되지 않았고, 황싱과 함께 총독부를 공격한 사람은 120여명에 불과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군사교육을 받은 적이 전혀 없는 20대 초반의 젊은 청년들이었기에 오합지졸에 불과하였다. 이 한줌의 무리로 수천여명의 청군을 제입하고 광저우 전체를 장악하겠다는 것은 누가 봐도 자살행위였다. 그럼에도 황싱은 일단 반청 기치만 올린다면 광저우의 신군과 민중들 역시 동참할 것이며 오합지졸에 불과한 청군 따위는 금새 흩어져서 양광총독 장밍치(張鳴岐)를 사로잡을 수 있으리라 한껏 기대하였다.

4월 27일 오후 5시 30분경 황싱이 권총을 들고 직접 선두에 서서 총독부 정문을 향해 돌격하였다. 하지만 공관은 이미 비어 있는데다 수사제독 리준이 순방영의 병사들을 동원하여 황싱의 혁명군을 포위한 후 소탕해 버렸다. 황싱은 겨우 목숨만 건져서 사지를 벗어날 수 있었지만 다른 대원은 대부분 사살되었다. 뒤늦게 차오성과 후한민(胡漢民)이 200여명을 끌고 광저우 성 외곽까지 왔다가 이미 거사가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대로 물러나야 했다.


​▲ 신해혁명 100주년 기념으로 2011년에 개봉한 영화 《신해혁명(辛亥革命)》의 한 장면. 성룡이 감독과 극중 황씽 역을 맡았다. 오락성보다는 중국 정부의 프로파간다 적인 성격이 강한 영화이지만 광저우 봉기부터 신해혁명까지의 상황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광저우 봉기의 실패는 혁명파로서는 그야말로 치명타였다. 거사에 참여한 지사들은 대부분 20대의 젊은 학생들이었기에 혈기만 왕성할 뿐, 변변한 훈련도 받지 못하였다. 청군의 조직적인 반격에 격퇴당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허술한 준비, 성급한 거사, 막연한 낙관 등 혁명파는 총체적인 역량 부족이었다. 황싱은 우리에게는 그다지 인지도가 없지만, 당시에는 쑨원에 비견되는 명망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주변의 많은 존경을 받았고 추진력과 결단력, 문무의 재능을 겸비한 영웅이라고 불리었다. 하지만 학자이자 사상가이지, 군사 전문가는 아니었다. 그는 평소에 서구의 군사사상에 관심을 가지고 무기 쓰는 법도 배웠으나 개인적인 수양에 불과하였고 용감하게 선두에서 나서서 목숨 걸고 싸울 수는 있어도 부대를 일사분란하게 통솔 지휘할 수 있는 역량은 없었다. 따라서 그는 여러차례 반청 거병을 지도했지만 그때마다 모조리 실패로 끝났다.

  

광저우 봉기 실패로 쑨원의 위상은 땅에 떨어졌고 사방에서 비난이 쏟아졌다. 인명 손실도 큰데다, 총지휘를 맡았던 차오성은 거사가 실패한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병이 들어서 얼마 뒤 죽었다. 이 또한 동맹회에게는 큰 타격이었다. 입헌파의 언론지인 "신민총보(報)"에서 량치차오(梁啓超)는 쑨원이 무모한 거사로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면서 자신은 뒤에 물러나 안락한 삶을 누리고 있다고 신랄한 공격을 퍼부었다. 게다가 쑨원은 이전에 일본 정부로부터 1만5천엔의 자금을 지원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 돈의 일부만 공금으로 내놓은데다 그 중에서 5천엔을 자신의 비자금으로 사용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이 때문에 동맹회의 언론지 "민보(民報)" 편집장이었던 장빙린(章炳麟)조차 쑨원을 격렬하게 비난하는 등 동맹회는 분열직전에 내몰렸다.

물론 나중에야 쑨원이 개인적으로는 한푼도 유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쑨원의 도덕성은 큰 타격을 입었고, 일부 혁명 지사들 중에는 쑨원의 리더섭 부재와 독선적인 태도에 반발하여 황싱이 동맹회의 지도자를 맡아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였다. 또한 쑨원의 오랜 맹우였던 쑹자오런(宋敎仁)도 쑨원의 노선에 반발하여 독자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하는 등 좌중지란이었다. 이것이 신해혁명 직전 혁명파의 모습이었다.


* 쑨원, 반청 혁명의 지도자가 되기까지


오늘날 대다수 중국 민중들에게 "위대한 국부"로 추앙받는 쑨원은 광둥성 향산현(香山縣, 광둥성 동북쪽에 있는 현으로 현재의 중산현)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쑹칭링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그가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가난한 소작인의 아들로 태어나 초라한 집에 살면서 쌀밥을 먹을 수 없어서 고구마만 먹고 자랐다. 나는 아이들의 발에 신발을 신겨주고 배에 밥을 채워주겠다고 생각하고 혁명가가 되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태평천국의 지도자였던 홍수전을 존경하였고 친구들에게도 어른이 되어 제2의 홍수전이 되겠다고 말하곤 하였다.


쑨원의 어린 시절에는 많은 중국인들이 오직 먹고 살기 위해 미국과 남미, 유럽 등지로 이민을 떠났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중국의 인구가 급격하게 폭발하면서 도저히 이들을 부양할 농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일어나 흑인 노예가 해방되자 남부의 해방 노예들이 노동자가 되어 북부의 공장으로 갔다. 이들의 빈자리는 중국인들이 대신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들의 삶은 결코 녹록하지 않았다. 중국인 이민자들은 미국 사회의 최하층민으로서 노예나 다름없는 차별과 멸시를 당해야 했다. 쑨원의 큰형과 숙부도 그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이들은 하와이에서 장사를 하면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 되자 쑨원을 불렀다.

당시 14살이었던 그에게 미국 유학은 고향의 좁은 시골 마을에서 벗어나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절감할 수 있는 인생의 큰 기회가 되었다. 쑨원은 호놀룰루에 있는 형의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하면서 학교를 다니며 영어와 수학, 화학, 물리, 성경 등 서구 학문을 배웠다. 하지만 그의 형 쑨메이(孫眉)은 쑨원이 기독교에 심취하여 중국의 전통문화를 배척하자 화가 난 나머지 4년만에 고향으로 쫓아내듯 돌려보냈다. 그의 행동은 고향에 와서도 마찬가지였기에 결국 몇달 만에 홍콩으로 도망쳐야 했다. 21살이 되자 홍콩의 서의서원(西醫書院, 현재의 홍콩대 의학부)에 들어갔고 5년 후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의사가 되었다.

쑨원은 마카오에 병원을 개업하여 한동안 명성을 떨쳤지만 마음 속에는 여전히 세상을 바꾸어 보겠다는 마음이 있었다. 훗날 그는 젊은 시절에 의술을 배운 것이 사람이 아니라 중국을 구제하기 위함이었다고 말하였다. 원래 광둥성은 전통적으로 상업이 발달하고 중앙의 간섭을 싫어하는데다 반만 정서가 강한 곳이었다. 쑨원은 한인 민족주의자들과 교류를 통해 현실에 대한 불만을 품게 되었고, 소수의 만주족이 한족을 지배하고 차별하는 정치 체제, 아편전쟁 이래 만주 황실의 무능함, 봉건 관료들의 나태함 등 현실의 부조리함과 모순을 비판하고 정치 체제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쑨원이​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된 사건은 청일전쟁이었다. 일본군의 공격 앞에서 그야말로 무기력했던 청군의 모습은 중국인들에게는 그야말로 굴욕이었다. 그는 톈진으로 올라가 당대 실권자였던 리훙장에게 편지를 써서 국가 개혁과 부국강병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건의하였다. 심지어 리훙장에게 쿠테타를 일으켜 공화국의 지도자가 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물론 리훙장으로서는 아무런 관위도 없는 무명의 한인이 쓴 편지에 관심을 가졌을 리 없었고, 설령 동조를 한다손 치더라도 청조의 권위가 멀쩡히 살아 있는 현실에서 리훙장의 힘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이는 쑨원의 몽상가적인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아무리 기다려도 회답이 없자 결국 자신이 직접 청조를 뒤엎기로 결심하였다. 그가 생각한 방법은 무장 혁명이었다.

1894년 11월 24일 쑨원은 하와이 호놀루루에서 형 쑨메이와 현지 한인들의 협조를 얻어서 흥중회(兴中会)를 창설하였다. 흥중회는 중국 최초의 혁명 조직으로, 최초의 가담자는 120여명 정도였다. 여기서 "흥중" 즉, 중국을 흥한다라는 말은 만주족 정권을 타도하고 중원을 회복하여 한족이 통치하는 중국을 부활시키겠다는 뜻이다. 흥중회에 입회하는 자는 반드시 "회복중화(恢復中華, 한족의 나라를 되찾자)"를 외쳐야 했다. 또한 쑨원은 훗날 청조를 타도하고 혁명에 성공한다면 액면가의 10배로 갚아주겠다면서 화교들을 상대로 "혁명채권"을 팔아서 700 달러를 모금하였다. 캉유웨이, 량치차오 등 당대 대부분의 한인 지식인들이 청조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입헌 군주제를 지향했다는 점에서, 아예 구 체제를 때려부수고 서구식의 공화제를 실시하겠다는 쑨원의 생각은 그야말로 파격적이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본다면 대수롭지 않은 것같아도, 중국은 수천년 동안 황제라는 절대 권력자를 중심으로 지배와 피지배라는 구조가 지배하는 봉건 사회였다. 이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새로운 왕조의 창건이 아닌 만인 평등의 세상을 만들겠다는 것은 그야말로 시대를 앞서간 것이었다. 그의 주장은 중국 사회에서 급속도로 확산되어 이 때부터 개혁이 아니라 혁명을 외치는 수많은 조직들이 본격적으로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쑨원은 혁명에 동조하는 세력들을 조직하고 현지의 부대를 부추겨 반란을 일으킨다면 중국 서남부를 점령하는 것은 손쉬운 일이며 반란의 물결은 금새 중국 전역으로 확산되어 청조를 타도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청일전쟁이 끝난 지 얼마되지 않은 1895년 10월, 쑨원은 광저우에서 비밀결사 조직을 결성하고 몰래 무기를 들여오는 등 첫번째 반란을 준비하였다. 하지만 사전에 발각되면서 많은 간부들이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쑨원은 간신히 마카오로 도망쳤지만 그의 목에 1천냥의 현상금이 걸렸다.

홍콩을 거쳐 일본으로 도망친 그는 미야자키 도텐(宮崎滔天)이라는 사회 운동가를 만나게 되었다. 미야자키 도텐은 메이지 시대의 대표적인 자유민권운동가 중의 한 사람으로 "일본은 강력한 군사력을 갖춘 야만적인 문명국일 뿐, 중국이야말로 동양의 참모습을 회복할 수 있는 실력을 가진 나라"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쑨원의 사상에 적극 동조하였고 아낌없는 지원을 하였다. 뒷날 여러 혁명조직들이 쑨원을 중심으로 뭉쳐서 중국 동맹회를 수립하는데 도텐의 역할이 매우 컸으며 일본으로 유학온 중국 유학생들을 후원하고 중국에 대한 제국주의적인 침략을 강력하게 반대했기에 중국인들의 많은 추앙을 받았다. 덧붙여, 현재 난징 시내에 있는 중국근대사 박물관에는 쑨원의 동상 옆에 도텐의 동상이 나란히 서 있다.

 

하지만 쑨원의 혁명은 참담한 실패의 연속이었다. 그가 주도한 무장 봉기는 대부분 사전에 발각되거나 현지 군대에 의해 손쉽게 진압당하였다. 그의 기대와 달리, 반청 봉기는 쉽게 확산되지 않았다. 이는 중국 동맹회의 역량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중국 동맹회의 본질은 기본적으로 비밀 결사 조직이었다. 중국에는 역사적으로 많은 비밀 결사 조직이 있었고 홍건적이나 태평천국, 의화단 역시 비밀 결사 조직에서 시작하였다. 따라서 쑨원이 전통적인 방법에 의존하려고 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비밀 결사 조직들은 청조 타도와 외세 배척에서만 일치할 뿐, 아무런 동질성이 없었고 결속력에도 많은 문제가 있었다. 러시아 볼세비키처럼 다양한 계층을 아우르는 거대한 조직을 만들어 내지 못한 것이 쑨원의 한계였다.

한편, 일본에는 무술 변법을 일으켰다가 서태후의 반격으로 쫓겨난 캉유웨이와 량치차오 등 변법파 관료들도 망명 신세였다. 쑨원은 미야자키 도텐의 주선으로 캉유웨이를 만나 서로 손을 잡는 방안을 논의하였지만 양측의 정치적 견해 차이가 너무 컸기에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쑨원은 무장 봉기를 일으켜 만주족의 지배를 끝장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캉유웨이는 끝까지 청 황실이 통치하는 입헌군주제를 고집하였다.


광서제의 충신을 자처했던 캉유웨이는 쑨원에게 반청 혁명 운동을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그는 내부 분열로 결국 외세의 식민지로 전락한 폴란드와 인도의 예를 들면서 "혁명은 열강들에게 중국을 분할시킬 빌미만 줄 뿐"이라고 비난하였다. 또한 혁명이 아니라 단계적인 개혁으로 부국강병을 추구하는 것만이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일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하였다. 캉유웨이는 개혁의 장애물은 개혁을 방해하는 존재는 서태후와 수구 세력들이지 청조에게 있는 것이 아니며, 굳이 혁명을 일으키지 않아도 서태후를 몰아내고 광서제를 복귀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중국의 근대화를 이룩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쑨원의 입장에서는 캉유웨이의 생각은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는 것이었기에 결코 동의할 수 없었다. 그는 서태후만이 아니라 청조 자체가 부패했으며, 설령 자신들이 조정에 등용되어도 뜻을 펼칠 방법이 없다고 반박하였다. 또한 폴란드나 인도와 중국은 상황이 다르다고 주장하였다. 두 사람의 생각은 어느 쪽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제각기 일리가 있었지만 끝까지 절충점을 찾지 못한 채 평행선만 달릴 뿐이었다. 이는 두 사람 모두 실천가가 아닌 이론가에 머물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두 사람은 힘을 모으기는 커녕 오히려 서로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신해혁명의 성공으로 쑨원의 혁명파가 승리하자 캉유웨이는 부득이 공화제를 인정하면서도 청 황실을 일본의 천황과 같은 "종교적인 우상"으로 남기는 방안을 주장하였다.


실천가로서의 쑨원은 결코 유능하다고 말할 수 없었지만, 사상가로서 쑨원은 실패를 거듭하는 와중에도 나날이 인기를 더해갔다. 그의 명망은 보황파의 거두인 캉유웨이조차 능가하여 반청 혁명의 가장 유력한 지도자로 떠올랐고 캉유웨이의 제자였던 량치차오조차 쑨원의 혁명론에 공감할 정도였다. 그만큼 청나라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졌다는 의미였다. 특히 의화단의 난을 통해 많은 지식인들이 청조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면서 등을 돌렸다. 미국과 동남아의 화교들 사이에서 쑨원을 후원하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났고 일본으로 온 많은 유학생이 쑨원의 흥중회에 가입하였다.

그 중에는 뒷날 국민당의 지도자가 되는 라오중카이(廖仲愷), 후한민, 왕징웨이, 그리고 젊은 시절의 장제스도 있었다. 또한 중국 내 많은 지식인들도 쑨원의 사상에 동조하여 혁명 단체를 조직하고 반청 혁명에 뛰어들었다. 대표적인 예가 1903년 11월 후난성 창사에서 황싱, 쑹자오런, 천톈화(華), 장지(張繼) 등 일본 유학파 지식인들이 모여서 조직한 화흥회(華興會)였다.

 

▲ 화흥회의 주요 간부들. 화흥회는 후난성에서 설립된 최초의 혁명 조직으로서 쑨원의 사상에 적극 동조하여 무장 봉기를 주도하였다. 청조를 무너뜨리게 되는 우창 봉기에서도 이들의 역할은 매우 주효하였으며, 신해혁명 이후 권력을 쥔 위안스카이가 전제 독재화되자 혁명전쟁을 일으키는 등 혁명의 핵심세력으로서 많은 역할을 하였다.


1905년 8월 20일 도쿄 아카사카구(赤坂區)의 사카모토 긴야에서 쑨원의 흥중회와 황싱의 화흥회, 차이위안페이(蔡元培)의 광복회(光復會), 청방(青幫), 과학보습소 등 국내외에서 활동 중이던 주요 혁명 단체와 비밀결사 조직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서로 손을 잡기로 하면서 "중국 동맹회"가 결성되었다. 쑨원이 대표, 황싱이 부대표를 맡았다. 중국 동맹회는 그동안 혁명 단체들이 제각기 특정 지역과 세력으로 구성되어 개별적으로 활동하던 것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된 것이었다. 또한 단순히 혁명지사들의 모임이 아니라 행정부와 입법부, 사법부 등 삼권 분립의 형태를 갖추었으며 청나라 타도와 공화정의 실시, 토지 균등 분배 등 혁명적인 사상을 강령으로 정하였다. 이는 쑨원이 오랫동안 염원해 왔던 자신의 사상을 담은 것으로 뒷날 장제스의 국민정부는 물론, 마오쩌둥의 중공 정권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 쑨원, 위대한 국부인가. 실패한 혁명가인가.


쑨원의 활동은 많은 한계가 있었다. 여러 혁명 단체가 청조 타도와 한족 부흥의 기치를 내걸고 중국 동맹회에 참여하였지만 사상과 구체적인 투쟁 노선을 놓고 이견이 많았다. 게다가 동맹회의 수장은 쑨원이지만 정작 중국 동맹회 내부에서 가장 큰 조직은 쑨원의 흥중회가 아니라 황싱의 화흥회였다. 또한 광복회와 화흥회 회원들 중에는 쑨원의 리더쉽을 탐탁치 않게 여기는 사람들도 많았다. 황싱의 적극적인 노력과 설득이 아니었다면 동맹회는 성립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쑨원의 리더쉽은 설득과 포용이 아니라 자신의 명령에 대한 상명하복식 복종을 요구하는 식이었기에 많은 갈등을 빚었고 동맹회는 여러번 분열의 위기에 직면하였다.

한예로, 국기 도안 문제를 놓고 쑨원과 황싱은 서로 자신이 도안한 청천백일기(青天白日旗)와 정자기(井字旗)를 고집하면서 고성을 지를 만큼 말다툼을 벌였다. 황싱은 동맹회에서 탈퇴하는 것까지 고민하다가 주변의 만류로 마지못하여 쑨원의 뜻에 따르기로 하였다. 그러면서도 쑨원의 비서 후한민에게 "당과 대세를 위해 쑨원 선생의 뜻을 따르는 것일 뿐"이라고 불만을 토로하였다. 앞서 언급했던 금전 문제로 한동안 극심한 갈등을 빚었으며 중국 동맹회를 거의 해체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혁명의 중심지를 놓고서도 쑨원은 광둥성에서, 쑹자오런은 후베이성과 후난성에서, 장지는 베이징에서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결국 쑨원의 광저우 봉기는 실패한 반면, 쑹자오런과 황싱이 관여했던 우창 봉기가 성공하면서 쑨원의 위상은 추락하고 쑹자오런의 발언권이 강화되었다. 

투쟁 수단에서도 한계가 많았다. 비밀결사조직이었던 동맹회는 주로 암살과 테러와 같은 수단에 호소하였지만, 총이 구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주로 폭탄에 의존하였는데 워낙 조잡하여 대부분 실패로 끝났다. 대표적으로 1910년 4월 2일 왕징웨이의 순친왕 암살 미수 사건이었다. 뒷날 쑨원이 죽은 뒤 국민정부의 주석이 되고 중일전쟁 중에는 일본과 결탁하여 난징괴뢰정권을 수립하게 되는 왕징웨이는 이 때만 해도 순수하고 혈기 왕성한 젊은 혁명 지사였다. 그는 순친왕 짜이펑의 저택 주변에 폭탄을 설치한 후 순친왕이 지나가면 뇌관을 눌러서 함께 폭사한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그가 설치한 엉성한 폭탄은 주민의 신고로 금새 발견되었고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사형을 선고받았던 그는 운좋게도 짜이펑이 민심이 흉흉하다는 이유로 혁명파의 처형을 망설인 덕분에 목숨을 건진데다 전국에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우창봉기가 일어난 뒤 감옥에 있었던 그는 특사로 풀려나 쑨원의 측근으로 복귀하였다.


소수의 혁명지사에게 의존하는 방식은 엉성하고 체계적이지 못했으며 대부분 준비 단계에서 발각되거나 단발성으로 끝나기 일쑤였다. 이는 훗날 장제스나 마오쩌둥이 막강한 군대를 거느리고 민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면서 중국 대륙을 차지했던 것과는 대조된다. 근본적으로 쑨원은 이민족으로부터 권력을 빼았으려고 했을 뿐, 그 권력을 민중과 골고루 나누어 가질 생각은 없었다. 쑨원식 민주주의란 서구처럼 국민의 손이 아니라 뛰어난 지성을 갖춘 소수의 선각자들이 해야 할 몫이었다. 따라서 민중은 어디까지나 우매하고 가르쳐서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할 존재에 불과하였다.

쑨원을 비롯한 당대의 혁명가들이 외치는 새로운 세상이란 실상 민중의 바램과는 동떨어져 있었다. 대다수의 민중은 현실에 불만은 있을지언정, 그렇다고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체제 타도에 나서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혁명에 동조하는 사람은 적었고 오히려 신해혁명 이후 혁명정부가 변발을 자르게 하는 등 강압적으로 전통 문화를 금지시키려고 하자 민중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쳤다. 민중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새로운 세상이 아니라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혁명은 이들의 평화를 깨뜨린 셈이기도 하였다. 당시로서는 가장 급진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그조차 중국의 뿌리깊은 전통적인 유교식 사고방식을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아무리 서구식 교육을 받았다고 해도 그의 정체성은 여전히 전통적인 관습에 머물러 있었다. 이는 쑨원만이 아니라 당대는 물론이고, 후대의 지도자들 역시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쑨원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1세대 혁명 지도자로서 그가 남긴 업적은 결코 작지 않다. 그 전까지 캉유웨이, 량치차오 등 당대의 명망있는 지식인들이 정치 개혁을 외치면서도 황제가 다스리는 전통적 질서를 고수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에 비해, 쑨원은 청나라의 타도와 신분질서의 해체, 공화정의 실시를 처음으로 주장하였고 많은 중국인들의 공감을 얻었다. 당시로서는 분명 파격적인 발상이었다. 또한 이합집산으로 흩어져 있었던 수많은 혁명조직을 하나로 뭉치게 하였으며 자신이 혁명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우창 봉기는 쑨원이 직접 주도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난징에서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사람들은 쑨원을 임시대총통으로 추대하였다. 거듭된 실패와 지도자로서 역량이 부족하다는 것이 분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쑨원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아이콘으로 남았으며 그가 죽는 날까지도 변함이 없었다. 이는 쑨원 특유의 인간적인 매력과 카리스마에서 나온 것이었다.


쑨원이 없었다면 중국 동맹회도 없었을 것이며 신해혁명 또한 없었을 것이다. 당연히 국민당과 공산당도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훨씬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쑨원의 존재는 사실상 현대 중국의 출발점이자 그의 뒤에 등장한 지도자들 역시 쑨원의 계승자임을 자처했다는 점에서 비록 그의 명성에 거품이 어느 정도 끼어 있다고 해도 결코 "실패한 혁명가"라고 평가절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창 봉기가 일어났을 때 쑨원은 미국에서 체류하면서 자금을 모금하고 있었다. 그는 캔자스로 가던 기차 안에서 신문 기사를 통해 우창 봉기를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귀국을 서두르지는 않았다. 광저우 봉기의 실패 이후 동맹회는 거의 해체 상태였고 우창 봉기는 쑨원이 직접 관여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당장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쑨원에게는 실질적인 정치적 기반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동안 자체적인 무장 역량 없이 암살이나 신군의 봉기에만 의존하려고만 했던 한계를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쑨원은 대신 런던으로 가서 영국 정부와 교섭하여 열강들이 청조를 더 이상 지원하지 못하도록 설득하였다. 이 작업은 성공하였고 한동안 땅에 떨어졌던 위상을 회복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가 상하이를 통해 귀국한 것은 두달도 더 지난 12월 25일이었다.

▲ 1911년 12월 21일 홍콩에서의 쑨원. 우창 봉기와 신해혁명에도 불구하고 그는 서둘러 귀국하는 대신 애매한 태도로 중국의 정세를 지켜보았고 이것이 결과적으로 혁명파의 분열과 혼란을 더욱 가중시켰다.

그 사이 우창 봉기는 전국으로 확대되어 두달 만에 17개 성이 청조로부터의 독립과 자치를 선언하였다. 짜이펑 역시 위안스카이를 재기용하여 총리대신과 청군의 모든 군권을 맡기고 본격적인 반격에 나서는 한편, 입헌군주제의 실시를 선언하는 등 정치적 타협도 병행하였다. 그야말로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