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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 전쟁과 인물, 사건으로 보는 중국 현대사 > 7화 - 쑨원 토원(討袁)의 기치를 올리다/blog.naver.com/atena

국민당의 영수 쑹자오런 암살되다


1913년 3월 20일 저녁, 상하이역에서 쑹자오런을 향한 한발의 총탄은 위안스카이와 혁명파의 밀월 관계가 1년만에 완전히 끝장났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복부에 중상을 입은 쑹자오런은 급히 병원으로 옮겨져 수차례 봉합 수술을 했지만 결국 다음날 새벽 4시 40분 절명하였다. 쑹자오런의 죽음은 중국 현대사에서 가장 큰 비극으로 꼽히고 있으며, 이 사건을 시작으로 위안스카이와 쑨원의 전쟁이 본격적으로 폭발한다.


위안스카이는 처음부터 혁명과는 상관없는 사람이었고 공화정이나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도 없을 뿐더러, 혁명에 동조한 적도 없었다. 한마디로 전형적인 구시대의 봉건 관료였다. 그럼에도 쑨원과 위안스카이가 합작한 것은 서로의 생각이 일치해서가 아니라, 어느 한편이 다른 한편을 누를 만큼 강력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위안스카이가 청조를 끝까지 지지했거나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면 신해혁명은 태평천국의 난을 재현하는 꼴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쑨원이 위안스카이와 타협하지 않고 북벌을 고집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따라서 후한민을 비롯해 주변 사람들이 남북화해를 반대하고 끝까지 싸우자고 주장했지만 군쑨원은 만주족이라면 몰라도 한족끼리 싸울 필요는 없다는 이유로 결국 타협을 선택하고 스스로 대총통의 자리를 내주었다.  

남북화해가 성사되고 파괴적인 내전으로 확대되지 않은 것은 전적으로 위안스카이와 쑨원 두 사람의 공이었다. 미국의 신문들은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위안스카이가 구 체제를 지키겠다는 명목으로 남방과 결전을 벌이는 대신 타협을 선택하여 유혈 사태를 피할 수 있었다며 그를 "중국의 조지 워싱턴"이라고 불렀다. 위안스카이가 대총통에 오른 뒤, 쑨원은 앞장서서 위안스카이의 지지에 나섰고, 위안스카이 역시 쑨원과 갈등을 빚기보다는 회유하는 쪽을 선택하였다. 물론 2년 뒤 위안스카이는 스스로 공화제를 부정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지만, 그가 과연 처음부터 이런 수순을 계획했는지는 쉽게 단언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결국 위안스카이와 쑨원이 대립하게 된 것은 근본적으로 서로의 모순을 극복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중국 동맹회의 이인자였던 쑹자오런은 권력욕과는 거리가 멀었던 쑨원, 황싱과는 달리 젊고 야심만만한 사람이었다. 쑹자오런은 후난성 출신으로 쑨원과는 16살 차이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매우 총명하였고 19살에 지방 향시에 합격하여 수재(秀才, 우리의 진사에 해당)가 되었다. 하지만 이때의 청조는 청일전쟁과 의화단의 난에서 연전연패를 하는 등 열강들의 침략에 무기력하기 짝이 없었다. 이런 현실에서 반청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그는 같은 후난성 출신인 황싱과 친교를 맺고 혁명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1903년 11월 4일 쑹자오런과 황싱, 장쓰차오(章士钊) 등이 창사에서 모여서 화흥회(華興會)를 조직하였다. 화흥회는 주로 후난성 출신 혁명가들이 뭉친 일종의 비밀결사조직으로, 홍콩과 광저우을 기반으로 하는 쑨원의 흥중회와 상하이 일대를 기반으로 하는 광복회(光復會)와 함께 대표적인 반청 단체였다. 다음해 그는 서태후 생일날에 기하여 창사에서 무장봉기를 일으킬 계획을 꾸몄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지명수배자가 된 채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와세대 대학을 다니던 도중 쑨원을 만나게 되었고 의기투합하여 화흥회와 광복회, 흥중회가 합작한 중국 동맹회를 결성하게 되었다. 특히 당시 일본으로 건너온 중국 유학생들의 절반 이상이 후난성 출신이었기에 쑨원과 쑹자오런의 합작은 중국 동맹회의 세력을 비약적으로 확대시켰다.


하지만 "청조 타도"라는 공통된 목적 이외에는 출신과 배경, 투쟁노선도 모두 제각각이었기에 쑹자오런은 쑨원과 점차 갈등을 빚기 시작하였다. 쑨원은 자신의 고향인 광저우에서 반청 투쟁을 벌이기를 원한데다 소위 "정예주의"를 고집하면서 10명, 20명의 소수 집단으로 거사를 일으키면 혁명에 동조하는 세력이 자연스레 봉기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쑹자오런은 쑨원의 생각이 지나치게 낙관적이며 비현실적으로 비판하였다. 그는 쑨원이 남의 말을 듣지 않고 독선적이라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쑨 선생은 자신의 속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고 일처리를 독선적으로 하며 즉흥적이어서 사람을 곤란하게 한다"라고 말한 적도 있었다. 또한 쑨원이 혁명의 기본사상으로 내세운 삼민주의에 대해서도 "민족" 이외에는 동조하지 않는 등 사상면에서도 차이가 있었다. 

쑨원이 주도한 봉기가 준비 부족으로 매번 실패로 돌아간데다 금전 문제를 놓고 잡음이 발생하면서 중국 동맹회 내부에서 쑨원에 대한 신뢰는 갈수록 땅에 떨어졌다.  명확한 구심점 없이 여러 계파가 이합집산으로 뭉치다보니 중국 동맹회는 처음부터 대립과 분열의 가능성을 내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쑨원은 중국 서남부를 혁명의 발원지로 삼기를 고집했지만, 이에 회의적이었던 쑹자오런은 대신 만주로 눈을 돌렸다. 만주는 만주족의 오랜 고향이었다. 청조는 봉금령을 선포하는 등 일종의 성지로 취급하였다. 하지만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만주에서 청조의 영향력은 급격하게 줄어들었고, 도처에서 토비가 준동하는 등 사실상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었으며 반청 혁명에 동조하는 사람들도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특히 그가 주목한 곳은 간도였다. 당시 간도에는 조선인들이 대거 건너가면서 청조와 대한제국 사이에 국경 분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는 간도를 혁명의 발상지로 삼아 군대를 양성하여 청조를 정벌하겠다는 거창한 계획을 수립하였다. 황싱은 그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으나 쑹자오런은 직접 간도로 건너가기로 결심하고 쑨원에게 사직서를 낸 후 1907년 3월 23일 간도로 출발하였다. 그는 오사카에서 배를 타고 인천과 남포를 거쳐 압록강 북단의 안둥(安東)에 도착하였다. 이후 펑톈에서 중국동맹회 랴오둥 지부를 결성하고 하얼빈과 지린성 일대를 돌면서 현지 마적들과 손을 잡으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고 현지 사정에도 어두웠기에 결국 별다른 성과없이 일본으로 되돌아와야 했다.


​그러나 쑹자오런의 간도 방문은 그가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중국에 큰 공헌하게 되었다. 당시 조선과 청은 간도 영유권을 놓고 여전히 분쟁 중이었다. 을사보호조약으로 조선의 주권은 일본에게 넘어갔지만 일본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의 외교권을 대신한다는 명목으로 간도 영유권을 계속 주장하였다. 양국의 협상은 1908년 12월 28일부터 시작되었는데, 쑹자오런은 일본으로 돌아온 뒤 간도와 관련된 자료를 찾아서 《간도문제(間島問題)》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이 책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비롯해 각종 고문과 신문, 국제법 등을 참고한 것이었다. 이 책은 당대 조정의 실권자였던 위안스카이의 손에도 들어갔고 일본과의 담판에 적극 활용되었다. 결국 1909년 9월 일본은 남만주 철도 부설권과 푸순(撫順)의 탄광개발권 등을 받아내는 대가로 간도를 청의 영토로 인정하였다. 위안스카이는 쑹자오런을 높이 평가하여 수배령을 취소케 하고 4품의 관직을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민보(民報)>의 편집자이자 같은 혁명 지도자였던 장빙린(章太炎)은 쑹자오런을 "원수의 지재"고 평하였고 뒷날 후한민은 "둔초(钝初, 쑹자오런의 자)는 대총통과 총리가 되겠다는 야심이 있었다"라고 말하였다. 쑹자오런은 언변에 능하고 타고난 카리스마와 정치 수완으로 실질적인 혁명파의 중심이 되었다. 신해혁명이 끝난 뒤, 위안스카이 정권에서 철도 감독을 맡게 된 쑨원이 "10년 안에 20만KM의 철도를 건설하겠다"라는 거창한 계획을 발표하자, 쑹자오런은 "그는 아직 국내에 대한 경험이 부족하니 좀 더 경험을 쌓아야 요령이 생길 것이다"라고 에둘러 비판하였다. 두 사람의 모습은 어느 쪽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같은 혁명파끼리도 이견과 감정적인 모순이 상당했으며 결속이 결코 강력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쑹자오런이 기초한 <임시약법>은 중국 최초의 근대적인 헌법으로 영국식 의원내각제를 지향하여 의회에 강력한 권한을 부여하고 대총통의 권한을 견제하였다. 또한 혁명파의 정치적 기반은 남방 각성의 혁명정부에 있었기에 위안스카이가 주도하는 중앙 집권체제를 반대하고 지방 분권을 주장하였다. 1912년 4월 4일에는 참의원에서 <국무원관제>를 통과시켰다. 이는 국무총리가 국무회의를 주재한다는 내용으로, 사실상 대총통은 아무런 실권이 없는 상징적인 존재로 전락하는 것이었다. 위안스카이로서는 쑹자오런이 자신을 허수아비로 만들겠다는 뜻이므로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그는 "그따위 대총통 자리에는 앉지 않겠다"라면서 불만을 터뜨렸다.

비록 ​쑹자오런의 의도가 위안스카이의 전횡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고 해도 힘의 뒷받침 없이 위안스카이를 궁지로 몬 것은 분명 성급한 행동이었다. ​위안스카이에는 북양군이라는 막강한 정치적 배경이 있었지만 쑨원이나 쑹자오런에게는 위안스카이에 맞설 수 있는 군사력이 없었다. ​신해혁명에 가담했던 신군은 어디까지나 쑨원의 사상에 동조하는 것일뿐, 쑨원이 직접 조직한 군대가 아니기에 직접적인 유대감이나 충성심은 없었다. 이는 쑨원이 혁명의 무장 역량으로서 혁명군을 양성하는 대신, 암살과 테러와 같은 수단에만 의존한 탓이었다. 반면, 일본의 메이지 유신이나 마오쩌둥의 중공 역시 처음에는 암살이나 정치적 투쟁 등을 전개하였지만, 곧 한계를 깨달아 농민과 상인 등 다양한 계층에서 모집한 새로운 군대를 창설한 후 무력으로 구 체제를 무너뜨리고 공고한 정권을 구축하였다. 어떤 혁명도 강력한 무장 역량의 뒷받침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는 점에서 쑨원식 혁명의 한계인 셈이다.


게다가 당시의 중국은 대외적으로는 일본과 구미 열강의 침략에 노출되어 있었고 대내적으로는 청조의 몰락 이후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었다. 남방의 혁명군 중에는 순수하게 혁명에 동조하는 사람들보다 기회주의적인 사람들이 훨씬 많았고 심지어 범죄집단과 토비도 가담하면서 기강이 엉망진창이었다. 이들은 혁명군을 내세워 도처에서 약탈을 일삼아 극심한 민폐를 끼쳤다. 이 때문에 광저우에서는 천중밍이 신군을 동원하여 주민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민군을 토벌하기도 하였다. 또한 전국의 3/4이 극심한 가뭄으로 기근에 시달리면서 수많은 농민들이 토비가 되거나 유랑민으로 전락하는 실정이었다.


쑨원을 비롯한 공화주의자들이 간과한 점은 대다수 중국 민중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혁명과 동란이 아니라 평화와 안정, 즉 태평성대였다는 사실이었다. 누가 통치하건, 어떤 체제이건 상관없었다. 이는 오랜 세월 외침과 내란을 당하면서 자연스레 생겨난 생존 본능이었다. 훗날 중국을 통일한 마오쩌둥의 중공정권이 많은 실정을 저질렀음에도 민중이 스스로의 손으로 때려부수는 대신 철저하게 순응했던 가장 큰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쑨원 정권이 민중과 괴리된 채 지지를 받지 못했던 것 또한 민중이 가장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망각하고 겉모습만 서구의 정치 체제를 흉내내는데 급급했기 때문이었다. 당대 대표적인 사상가 중의 한 사람이었던 량치차오는 1903년에 미국을 방문했을 때 "만약 우리가 지금 민주주의를 선택하는 것은 국가 차원의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라고 말하였는데, 그의 말대로 중국은 민주주의를 받아들일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수천년 동안 황제를 중심으로 지배와 피지배의 구도에 익숙했던 중국이 적어도 수백년에 걸쳐 만들어낸 서구의 의회 정치를 하루 아침에 어떻게 흉내낸단 말인가. 공화제에 대한 이해는 고사하고, 그것이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아는 사람조차 없었다.

국회 총선거를 앞두고 쑹자오런은 1912년 8월 25일 국민당을 창당하였다. 국민당은 중국 동맹회를 중심으로 여러 정치 세력을 규합하여 중국 최초의 정당이지만 위안스카이와 쑨원이 대립하면서 1년 만에 해산되었기에 오늘날 타이완의 국민당과는 엄밀히 말하여 이름만 같을 뿐 별개의 정당이지만, 뿌리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지금의 국민당은 1919년 10월 10일 쑨원이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중화혁명당을 개편한 것에서 시작되며 정당의 색채나 성격에서도 많은 차이가 있다.

쑹자오런은 처음에는 정당의 이름으로 "민주당"을 고려했으나 국민에 의한 국가라는 의미에서 "국민당"으로 결정하였다. 쑨원은 국민당 창당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으나 쑹자오런은 그의 위상을 고려하여 명예 이사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대리 이사장이 되어 실질적인 국민당의 당수가 되었다. 하지만 정당 정치의 경험이 부족한 중국의 여건상, 색채가 불분명하고 여러 개의 정치 세력이 이해타산으로 뭉친 연합 정당이다보니 결속력과 지도력이 결여되어 있었고 계파 간의 갈등과 대립 또한 심하여 쑹자오런이 죽은 뒤 금새 분열되고 말았다.


어쨌든 1912년 12월부터 다음해 1월까지 전국에서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선거에 참여할 수 있는 자는 21세 이상의 남성이면서 연간 납세액이 2위안 이상이거나 또는 500 위안의 부동산을 가진 자, 소학당(초등학교) 이상의 학력을 가진 자였다. 국회 조직은 미국식 양원제를 모방하여 임기 3년의 중의원 600명, 임기 6년의 참의원 265명을 선출하였다.

쑹자오런의 국민당 이외에도 리위안홍과 후베이성 출신들이 중심이 된 공화당, 입헌파 정치가 량치차오를 중심으로 하는 민주당, 통일당 등이 있었다. 선거 열기는 대단했지만 당시 중국의 낙후된 정치 여건 상 뇌물과 부정도 많았고 투표율도 매우 천차만별이라 심지어 선거인수는 10만명이 넘는데 투표자는 고작 35명에 불과한 곳도 있었다.


선거의 결과는 국민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전체 865석 중에서 국민당이 약 45%에 해당하는 392석을 얻은 반면, 리위안홍의 공화당은 175석, 량치차오의 민주당은 24석에 불과하였다. 쑹자오런이 국회를 장악한 것이다. 더욱이 국회 수립 후 10개월 이내에 대총통 선거를 실시해야 했다. 쑨원과 황싱은 여전히 위안스카이를 지지하였지만, 위안스카이와 갈등을 빚고 있던 쑹자오런은 자신이 좀 더 조종하기 편리한 리위안홍을 대총통으로 세우기를 원하였다. 쑹자오런의 명망과 실력은 쑨원조차 능가하여 실질적인 국민당의 일인자인데다, 위안스카이 입장에서는 쑨원이나 황싱, 리위안홍, 량치차오 등 다른 혁명파, 입헌파 지도자들과는 달리 타협이 불가능하였다. 이대로라면 쑹자오런에게 실권을 넘기고 하야해야 할 판이었다.

▲ 1913년 4월 8일에 열린 국회 개원식. 중국에서 처음으로 의회 정치가 시작된 날이지만 태생적인 취약성과 위안스카이의 보수반동적인 행태로 개원 내내 각종 정변과 파행을 겪어야 했고 결국 2년도 채 되지 않아 끝장나고 말았다.  

하지만 애초에 위안스카이가 혁명파와 내전을 벌이는 대신 함께 청조를 무너뜨리기로 타협했던 이유는 신생 공화국의 지도자를 약속받았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만약 쑹자오런이 위안스카이가 순순히 물러나리라고 여겼다면 그야말로 순진한 생각이었을 것이다. 또한 설령 순순히 물러난다 손치더라도 쑹자오런이나 리위안홍의 역량으로는 야심 넘치는 북양군의 군벌들을 통제할 수 있는가. 북양군은 오직 위안스카이에게만 복종하였다. 위안스카이가 죽자 말자 이들이 경쟁적으로 야심을 드러내면서 내전에 돌입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본다면, 쑹자오런은 이상만 앞세워 현실은 간과한 셈이었다. "권력은 오직 총구에서 나온다"라는 마오쩌둥의 말대로 무력의 뒷받침 없이 위안스카이를 누른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였다.

하지만 정말로 위안스카이가 쑹자오런를 살해했는가. 쑹자오런을 암살한 사람은 우스잉(武士英)이라는 22살난 신군 출신의 젊은 퇴역군인이었다. 하지만 그 배후에 확실하게 위안스카이가 있는지는 정황적인 증거만 있을 뿐, 분명하지는 않다. 게다가 사건 한달 후인 4월 24일 감옥에 갖혀 있었던 우스잉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면서 사건의 전말은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쑹자오런 역시 죽는 순간까지도 위안스카이가 범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숨을 거두기 전 주변 사람들에게 "나는 남방과 북방을 타협시키려고 하면서 사람들의 많은 오해를 샀다"라고 하였고, 위안스카이에게도 "아직 국가의 장애가 견고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두고 여한이 많지만, 대총통께 엎드려 청하오니 공도를 펼치고 민권을 보장하며 국가를 위해 든든한 헌법을 만들어 주기 바랍니다."라는 유서를 남겼다. 이는 두 사람의 갈등이 생각만큼 심하지 않았다는 얘기도 된다. 따라서 쑹자오런을 누가 암살했는가를 놓고 위안스카이 배후설이 가장 유력하면서도 여전히 학자들 사이에는 논란이 있으며, 쑨원이나 천치메이 등 혁명파 내부의 음모설, 심지어 비밀결사에 의한 암살설을 제기하는 학자도 있다.

 

쑹자오런의 죽음은 혁명파에게는 치명타였다. 일본을 방문 중이던 쑨원은 쑹자오런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귀국하였다. 그가 상하이에 들어온 날은 쑹자오런이 죽은 지 5일 후인 3월 25일이었다. 그날 밤 국민당 긴급 간부 회의가 열렸다. 일부 간부들은 당장 무력으로 위안스카이를 응징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쑨원은 현실적으로 무력이 열세라는 이유로 반대하였다. 게다가 그동안 혁명파 회원들에게 위안스카이에 대한 신뢰를 절대적으로 강조해 왔던 쑨원으로서는 당장 위안스카이를 향해 칼을 뽑으라고 선동할 수는 없는 처지였다.

쑨원은 성급하게 위안스카이를 향해 칼을 뽑는 대신 "이 사건으로 남북이 대립하는 상황은 원치 않는다"라면서 국회가 개원되는대로 위안스카이를 탄핵하거나 대총통 후보에 다른 사람을 추대하는 방안을 거론하였다. 황싱 역시 무력 대응을 반대하고 법정에서 조사하여 법률로 해결하자고 주장하였다. 물론 대총통이며 막강한 군권을 쥔 위안스카이를 국회의 힘으로 탄핵하거나 사법으로 시시비비를 가리겠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였다. 하지만 쑨원과 황싱은 어차피 싸우면 승산도 없을 뿐더러, 모처럼 남북 화해로 청조를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수립했는데 1년만에 다시 중국이 둘로 갈리어 싸우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 제2차 혁명


하지만 상황은 이들이 원하는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결정적인 사건은 위안스카이와 장시도독 리례쥔의 갈등이었다. 신해혁명 이후 독립을 선언한 남방 각성의 혁명파 도독들은 마치 "봉건시대의 영주"인양 군사와 행정, 재정, 사법을 한손에 쥐고 있었다. 위안스카이로서는 이들을 견제하고 중앙으로 권력을 복속시킬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이른바 "군민분치론"이라 하여 도독은 군정만 맡고 민정은 중앙정부가 임명하는 방안을 추진하였다.

리위안홍과 쑨원 역시 여기에 찬성하였으나 위안스카이에게 복종할 마음이 없었던 장시도독 리례쥔(李烈鈞)과 광시도독 후한민은 "상황이 여전히 혼란스러운 현실과 맞지 않다"라면서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위안스카이는 일단 양보하였지만 그렇다고 군민분치를 포기할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쑨원은 리례쥔에게 "중앙집권이냐, 지방분권이냐를 양자택일로 주장할 부분이 아니다"라고 못을 박았다. 하지만 리례쥔은 위안스카이가 장시성장으로 임명한 왕류이카이(王瑞闓)를 쫓아낸데다, 중앙정부의 허락없이 소총 7천자루와 탄약 300만발을 일본에서 수입했다가 1913년 1월 15일 무기를 실은 선박이 주장에서 압류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는 쑨원의 권위가 혁명파에게도 제대로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4월 26일에는 위안스카이가 염세를 담보로 일본, 영국, 프랑스, 러시아, 독일 5개국으로부터 250만 파운드의 차관을 얻었다. 하지만 절차상 국회의 승인을 받지 않았기에 국회를 장악하고 있었던 국민당은 독재라면서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위안스카이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쑨원과의 결별을 결심하고 국민당을 탄압하는 한편, 리준(李純)이 지휘하는 북양군 제6사단을 바오딩에서 우한으로 남하시켰다, 또한 쉬저우 방면에는 풍궈장의 제2군을 배치하는 등 남방을 공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6월 9일에는 리례쥔을 장시소독에서 파면하고 리위안홍을 임명하였다. 사실상 쑨원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리례쥔 역시 반발하여 장시성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6월 13일에는 광둥도독 후한민을 시짱선무사(西藏宣撫使, 시짱은 티벳을 가리킨다)라는 한직에 임명하고 천중밍을 광둥도독 대리에 임명하였다. 이는 혁명파를 분열시키려는 책동이었다. 또한 6월 30일에는 안후이 도독 바이원웨이(柏文蔚)를 파면하였다. 그리고 제6사단에게 장시성을 공략하라고 명령하였다.


이렇게 되자 쑨원과 황싱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었다. 쑨원은 황싱에게 즉각 난징으로 내려가 "토원군(討袁軍)"을 조직하고 "2차 혁명"을 시작하라고 지시하였다. 7월 15일 황싱은 난징에서 토원의 기치를 올리고 장쑤성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또한 장쑤도독 정더촨(程德全)에게 남군의 총사령관에 취임할 것을 요구했지만 상하이로 도망쳐 버렸다. 또한 안후이성, 장쑤성, 상하이, 푸젠성, 광둥성, 후난성, 쓰촨성 등 국민당 계열이 장악하고 있던 남방 여러 성이 6월부터 8월초까지 차례로 독립과 위안스카이 토벌을 선언하였다.

하지만 "2차 혁명"은 한달 보름여만에 실패로 끝났다. 군사력에서 월등히 열세한데다, 신해혁명을 주도했던 향신층이 혁명파를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전국 상인 연합회를 이끄는 상하이의 총상회는 중국의 질서 유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하면서 내전을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는 등, 쑨원의 2차 혁명을 위안스카이의 독재 타도가 아니라 두 사람의 권력 다툼으로만 여겼던 것이다. 혁명파 내부에서도 완전히 분열되었다. 신해혁명 당시 혁명군의 총수였던 리위안홍은 위안스카이와 쑨원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지만 위안스카이의 편을 들었고 저장도독 주루이(朱瑞)와 윈난 도독 차이어(蔡锷) 역시 상황을 관망하다가 전세가 위안스카이에게 기우는 것을 보고 배신하여 혁명군을 공격하였다.

또한 舊 청조의 관료들과 지휘관들도 위안스카이를 지지하면서 혁명파 도독들은 휘하의 군대조차 제대로 장악할 수 없었다. 이는 그들이 자신의 역량이 아니라 신해혁명 과정에서 현지 세력과의 정치적 타협을 통해 그 자리에 추대되었기에 권위가 매우 취약했기 때문이었다. 非국민당 계열의 량치차오 등 입헌파 지도자들도 위안스카이를 지지하였다. 즉, 혁명파로서는 여론에서도 불리하였고 결속력도 취약했으며 준비도 불충분하였다. 고립무원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결코 우물거리는 성격이 아니었던 위안스카이는 발빠르게 남방 군대를 매수하는 한편, 북양군을 남하시켜 진압에 나섰다. 또한 전국의 해군 함대에도 출동 명령을 내렸다. 위안스카이의 군사력은 직계부대인 북양군 6개 사단을 중심으로 병력을 꾸준히 확대하면서 12개 사단 및 16개 독립혼성여단 22만명으로 늘어났다. 또한 구 순방영과 만주의 장쭤린 군대까지 합하면 30만명이 넘었다. 반면, 수중에 군대가 전혀 없었던 쑨원은 남방의 非 북양계 군대를 상대로 일일이 설득해야 했다. 하지만 이미 위안스카이의 손길이 미치고 있었기에 대부분 가담을 거부하였고 봉기에 가담한 군대는 겨우 3, 4천여명에 불과하였다.

7월 3일 상하이 진수사(上海镇守使) 정루청(鄭汝成)이 이끄는 제19여단 1300여명이 상하이 강남 제조국과 해군 제1함대를 장악하였다. 7월 22일 황싱이 지휘하는 장쑤-장시 연합군은 쉬저우에서 풍궈장과 장쉰의 군대와 결전을 벌였으나 대패하여 난징으로 후퇴하였다. 또한 천치메이가 지휘하는 토원군 또한 강남 제조국 탈환에 나섰으나 해군이 함포 사격을 가하고 정루청(鄭汝成)의 반격에 부딪쳐 결국 패주하였다. 일부는 자베이(閘北)에서 재집결했지만 상인단의 요청을 받아 출동한 영국 경비대에 의해 무장해제당했다. 천치메이는 우쑹으로 후퇴했으나 리호우지(李厚基)가 지휘하는 북양군 제7여단과 해군 육전대가 후방에 상륙하고 정루청의 제19여단과 해군 경비대대가 양면에서 포위공격하자 괴멸하고 말았다. 그는 배를 타고 일본으로 도망쳤다. 함께 봉기에 가담했던 장제스는 외국 조계로 도망쳐 한동안 몸을 숨겨야 했다. 7월 28일 풍궈장은 상하이를 점령하였다.

8월 13일에는 광둥진무사(廣東鎮撫使) 롱지광(龙济光)이 후한민, 천중밍을 쫓아내고 광저우를 접수하였다. 8월 18일 장시성의 성도인 난창이 함락되면서 리례쥔이 일본으로 도망쳤고, 8월 28일에는 안후이호군사(安徽護軍使) 니스충(倪嗣冲)이 안칭을 점령하였다. 8월 19일 난징의 길목인 장인 포대가 점령되었고 8월 25일에는 장쉰의 무위전군(武卫前军)과 해군총장 류관씨옹(劉冠雄)이 지휘하는 해군 제1함대가 난징을 포위하였다. ​장쉰이 난징 교외의 쯔진산(紫金山), 천보성(天堡城) 등을 점령하였고, 펑궈장이 지휘하는 북양군 제2군도 난징 북쪽 강기슭(江岸)을 점령하였다. 하이치, 하이룽 등 5척의 순양함이 난징 성내를 향해 일제히 포격을 개시하고 북양군 제2군이 도강을 하였다. 혁명군 소속의 어뢰정 2정이 저지에 나섰지만 역부족이었다. 27일 북양군 선봉부대가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난징성 서남쪽을 점령하였다. 혁명군은 난징 성내에 완전히 고립되면서 함락은 시간 문제가 되었다. 30일 펑궈장의 총공격 명령이 내렸다. 지상과 해상에서 쉴새없이 포성이 불을 뿜고 북양군 병사들이 돌격하여 혁명군을 성내로 밀어내었다. 결국 9월 2일 난징은 함락되었다. 황싱과 쑨원은 간신히 탈출하여 일본으로 도망쳤다. 두번째 망명이었다. 장제스는 상하이의 강남제조국을 공격하려다 중과부적으로 패퇴하한 채 외국 조계로 도망쳤다. 9월 12일 윈난도독 차이아가 쓰촨도독 슝커우(熊克武)를 격파한 후 충칭을 점령하였다. 나머지 성들은 독립을 취소하면서 "2차 혁명"은 혁명파의 완패로 끝나고 말았다.


"2차 혁명"이 허망하게 실패한 이유는 쑨원의 준비 부족으로 혁명파 사이의 보조가 맞지 않은 탓이었다. 쑨원을 비롯한 혁명파 지도자들은 대부분 중국 역사에서 흔히 말하는 "협객(俠客)"에 불과한 사람들이었다. 개개인을 본다면 나름대로의 식견과 역량을 갖춘 이들도 없지는 않았지만, 대체적으로 정치적 경험도 없었고 군대를 조직하거나 지휘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청조 이래 실권자였던 위안스카이나 막강한 북양군을 상대로 이긴다는 것은 어림도 없었다. 그러나 근본적인 이유는 중국이 공화정을 실시할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중국 사회는 여전히 봉건사상과 전제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대다수 민중은 물론이고, 지식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쑨원의 삼민주의에 대한 이해도 없었고 위안스카이의 전횡에 대한 거부감도 없었다. 따라서 이들에게 청조의 타도와 공화정은 별개였던 것이다. 신해혁명에서 혁명당에 가담했던 사람들조차 위안스카이에게 붙었다. 향신과 상인들은 공화보다 안정을 원하였고 열강들 역시 위안스카이를 지지하고 쑨원에게 자금을 제공하기를 거부하였다.


10월 6일 위안스카이는 정식 대총통에 선출되었다. 중립을 지켰던 리위안홍은 부총통에 선출되었다. 미국을 비롯한 열강들은 차례로 위안스카이 정권을 승인하였다. 반면, 2차 혁명을 주도했던 쑨원, 황싱, 리례쥔, 후한민, 천중밍, 바이웬웨이 등 반 위안스카이 지도자들은 일본으로 도망쳤고, 후난 도독 탄옌카이(谭延闿)는 체포되어 군사법정에서 4년형을 선고받았다. 국민당이 장악하고 있었던 남방의 여러 성을 위안스카이가 장악하면서 국민당은 완전히 몰락하였다. 신해혁명이 쑨원과 위안스카이가 손을 잡고 청조를 몰락시킨 것이라면 2차 혁명은 그 연장선에서 두 사람의 주도권 싸움이었다. 마지막 승자는 위안스카이였다.

▲ 베이징에서 중화민국 초대 대총통에 취임한 위안스카이와 각국 대사들. 이로서 위안스카이 정권은 국제사회에서 청조를 대신하는 중국 정통 정부로 인정받았다. 이 순간이 그에게는 영광의 절정이었다.

만약 그가 이 순간 허황되게도 황제가 되겠다는 시대착오적인 야심을 품는 대신, 종신 대총통에 만족하면서 중국의 안정과 부국강병에 노력하였다면 틀림없이 "중국의 국부"가 되어 터키의 위대한 지도자인 케말 파샤처럼 국민적인 존경을 받았을 것이며 이후 중국의 역사 또한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쑨원이라는 가장 큰 걸림돌이 사라진데다, 주변의 선동과 개인적 야심이 결합하면서 위안스카이는 시계 바늘을 거꾸로 돌리는 최악의 선택을 하고 만다.


한편, 일본으로 망명한 쑨원은 위안스카이를 "혁명의 배신자"로 규정하고 와신상담하면서 반격의 기회를 노렸다. 2차 혁명의 실패 후 혁명파 지도부는 일본으로 망명하여 쑨원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쑨원은 이들을 다시 모아서 이른바 "중화혁명당"을 조직하였다. 하지만 이 때부터 쑨원의 성격은 더욱 독선적으로 변하였고 당원들에게 절대적인 복종을 강요하였다. 그는 위안스카이에게 패배한 이유가 자신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면서 혁명파가 분열된 탓이라고 여겼다. 또한 2차 혁명의 실패가 황싱의 우유부단함 때문이라며 모든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겼다. 이런 태도는 사람들을 실망시켰을 뿐더러, 오랜 맹우였던 황싱마저 쑨원의 곁을 떠나게 하였다.

황제를 꿈꾸는 위안스카이, 혁명파의 분열 등 중국의 정세는 갈수록 혼돈으로 빠져들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