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열되는 혁명파
위안스카이에게 완패한 쑨원은 소수의 측근을 데리고 빈털털이나 다름없이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를 태운 배가 고베에 입항했을 때에는 위안스카이의 요청을 받은 일본 정부가 그를 체포하려고 경찰관을 대기시키고 있었다. 그나마 선장의 기지와 이전부터 친분이 있었던 중의원 이누카이 츠요시(犬養毅) 등 여러 일본인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빠져나와서 숨을 숨길 수 있었다. 이누카이는 야마모토 곤노효에(山本権兵衛) 총리를 설득하여 그의 망명을 일단 묵인키로 하였지만, 일본 정부는 위안스카이와의 마찰을 우려하여 공식적으로는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활동은 이전과는 달리 엄중한 감시를 받아야 했고 생활 또한 매우 곤궁하였다.
참고로, 쑨원을 보호한 이누카이 츠요시라는 인물은 훗날 일본의 제29대 총리(1931. 12. 13~1932. 5. 26)에 오르는 정계의 거물이었다. 당시 일본 정계에서 대표적인 헌정파이자 反군국론자로서, 갑신정변에 실패하여 일본으로 망명했던 김옥균도 한때 그의 비호 아래에 있었다. 그는 서구식 민주정치의 확대와 시베리아 출병 반대, 국민 생활의 안정, 군비 축소를 주장했으나 1920년대 말 대공황의 시작과 군부 세력이 강화되면서 군부와 타협하는 쪽으로 점차 변화하였다.
또한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와카쓰키 레이지로(若槻禮次郞)를 대신하여 총리가 된 그는 처음에는 만주국 건설에 반대하고 중일관계의 회복을 주장했지만 군부의 강경파와 이에 동조하는 세력들의 압박에 결국 굴복하고 말았다. 갈수록 폭주하는 군부를 통제하려고 노력했으나 결국 1932년 5월 15일 "5.15 사건"이 일어나면서 해군 청년 장교들에 의해 살해되고 만다. 그의 죽음은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일본 헌정 정치의 종식과 본격적인 군국주의 사회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다시 얘기를 되돌려보자. 쑨원으로서는 이 때가 그의 혁명 인생을 통틀어 가장 절망적인 시기였을 것이다. 지난 20년의 고생이 간신히 결실을 맺었다고 생각한 순간 위안스카이의 배반으로 공염불이 되었다. 국민당은 해산당했고 혁명파 조직은 와해되었다. 사실상 원점으로 되돌아간 셈이었다. 남은 밑천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의지를 불태우며 혁명의 구심점의 역할을 하였다. 이런 강한 의지력이 오늘날 중국에서 그가 "국부"로서 남아 있는 이유라 할 수 있겠다. 천치메이, 리례쥔, 후한민, 라오중카이(廖仲愷) 등 위안스카이에게 쫓긴 동지들이 하나둘씩 그의 주변으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9월 27일 쑨원은 새로운 혁명 정당으로서 "중화혁명당(中華革命黨)"을 조직하였다. 목표는 위안스카이를 타도하여 공화정을 부활시키고 삼민주의의 남은 두가지 과제인 민권과 민생을 실행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조직의 특성이나 운영 방식상 국민당의 재건이라기보다는 신해혁명 이전의 비밀결사조직이었던 중국 동맹회의 부활에 가까웠다. 혁명을 위한 군대도 무기도 없었다. 쑨원에게는 혁명군을 조직할 수 있는 자금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는 일본과 동남아의 화교들에게 자금 지원을 요청하면서도 뒷날의 마오쩌둥처럼 거대한 대중 운동을 전개하여 민중 사이에 직접 파고들어가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민중은 혁명 사상을 이해하기에는 의식 수준이 너무 낮고 우매한 존재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지식인 계층이 혁명의 선봉에 서서 이들을 해방시켜야지, 함께 혁명을 주도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중화혁명당은 "黨"이라는 이름을 붙였음에도 대중의 지지를 받는 서구식 정당과는 거리가 멀었다. 민중이 아니라 소수의 동조세력에 의존하는 것이 쑨원식 투쟁의 근본적인 한계였고 위안스카이와 막강한 군벌 세력을 때려눕힌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동안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고방식은 이전과 아무런 변화가 없었던 것이다.
중화혁명당의 운영 방식 또한 혁명파들의 많은 반발을 샀다. 강령의 첫번째가 쑨원에 대한 절대적 복종과 당내 불순분자(쑨원의 뜻에 동조하지 않는 자)는 배제하겠다는 것이었다. 입당 서약자는 사람들 앞에서 반드시 "만약 두 마음을 먹으면 극형을 감수하겠다"라고 선서해야 했다. 여기에 거부감을 느낀 많은 혁명 지사들이 쑨원을 비판하면서 동참하지 않았다.
쑨원이 이렇게 요구한 이유는 혁명의 실패가 전적으로 다른 동지들이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동맹회나 국민당은 다양한 정치 세력이 이합집산으로 뭉쳤기에 조직력이나 리더쉽에서 한계가 있었고 쑨원의 삼민주의나 혁명 노선에 누구나 동의했던 것도 아니었다. 이것이 혁명파의 분열로 이어진 것도 분명 사실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실책은 하나도 인정하지 않고 남의 탓으로 돌리는 행태는 그동안 생사를 함께 했던 동지들을 노고를 무시하는 처사였다.
혁명파의 원로 중의 한 사람인 장쉬차오(章士釗)는 과거 황싱, 쑹자오런 등과 함께 화흥회를 조직하였고 2차 혁명에서도 쑨원 편에 섰다가 일본으로 망명한 사람이지만 중화혁명당에는 가담하기를 거부하였다. 쑨원의 독선적인 태도에 반발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중화혁명당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당원들이 지장을 찍어서 복종을 보여주어야 했고 조금이라도 다른 생각을 가지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말끝마다 황싱 때문에 혁명이 실패했다는 식이니 실로 이기적이었다."
쑨원은 자신의 오랜 맹우였던 황싱에게도 편지를 보내어 구구절절 불만을 토로하였다. 그는 자신이 쑹자오런이 죽었을 때 즉시 군사를 일으키자고 했음에도 황싱의 반대로 실패했으며 이 때문에 거병의 시기를 놓쳐 위안스카이에게 상하이와 해군이 넘어간 점, 난징의 제8사단이 상하이를 공격하라는 자신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은 점, 이 때문에 변변히 싸우지도 못한 채 패배한 점을 들어서 모든 것이 황싱이 자신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은 탓이라며 "저는 이것이 대형(大兄, 황싱을 가리킴)에 대한 불만입니다."라고 주장하였다.
황싱은 쑨원과 출신도, 계파도 다르지만 그의 혁명 사상에 가장 적극적으로 동조한 사람이자 2인자이기도 하였다. 중국 동맹회가 창설될 당시, 화흥회의 멤버들은 대체적으로 쑨원과 손을 잡아 지도자로 추대하는데 거부감을 드러냈다. 왜냐하면 화흥회가 쑨원의 흥중회보다 조직이 훨씬 컸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황싱은 서로의 이견을 배제해야 한다면서 앞장서서 쑨원을 지지하였다. 중국 동맹회가 여러차례 분열과 갈등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 신해혁명으로 난징임시정부가 수립되었을 때 스스로 지도자의 자리를 거부하고 쑨원에게 양보한 것도 황싱이었다. 황싱이 "사심이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에는 누구도 이견이 없었다. 서로 의견이 부딪쳤을 때 항상 양보하는 쪽은 황싱이었다. 그런 점에서 쑨원의 비난은 부당하였다.
황싱 역시 쑨원에게 답신을 보내어 당시의 사정을 설명하였다. "제가 선생을 막았던 이유는 상황이 좋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선생이 아무리 몸을 가벼이 여기고 전장에 나선다고 해도 상하이는 지형적으로 얻기는 어려운데다 앞뒤로 공격받기 쉬운 곳입니다."라면서 자신의 판단이 부득이했음을 설명하였다. 비록 전문적인 군사 교육을 받지는 않았지만, 평소 군사지식이 어느 정도 있었던 그는 쑨원이 생각만 앞세울 뿐 전투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를 숙이면서 난징에서 실패한 것은 자신의 책임이며 쑨원의 지적이 옳다고 하였다. 속내가 어떻든, 우직한 성격이었던 그는 쑨원을 혁명파의 영수로서 권위를 인정해야 한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이는 이미 감정의 골이 너무 깊어서 더 이상 회복할 수 없었다. 그동안의 불만이 혁명 실패 이후 한꺼번에 터져나온 셈이었다. 따라서 황싱을 비롯한 화흥회 출신들은 쑨원의 중화혁명당에 가담하는 대신, 독자적인 노선을 걸었고 쑨원 역시 굳이 옛 동지들을 끌어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쑨원은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는 필요없다는 식이었다. 이런 행태가 과연 위안스카이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그는 황싱에게 다시 편지를 보내어 "내가 3차 혁명을 준비하고 있는데 2년만 기다려달라"고 하자 황싱은 "선생은 2년 안에 뜻을 이루지 못하면 나중에 제가 그 자리를 가로챌까 걱정하시는 것같습니다. 이것은 개인이 무슨 권리처럼 서로 주고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다시는 이런 것을 요구하지 마십시오. 저는 선생을 결코 방해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답신하였다.
또한 쑨원은 황싱쪽 사람들이 "쑨원을 따르는 자는 무지한 어린 학생들과 밥도 못 먹는 무지렁이들"이라고 여기저기 떠들고 다닌다는 얘기가 있다면서 불만을 드러내자 황싱은 쑨원의 측근인 천치메이 역시 "나를 비방하고 다니지만 개의치 않는다"면서 우회적으로 쑨원을 비판하였다. 또한 자신은 그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다, 쑨원이 거론하는 화흥회 사람들 또한 바로 얼마 전까지 다 같은 동지가 아니었느냐, 라고 하였다. 감정적인 편지가 오가는 와중에 두 사람은 다시는 서로를 만나지 않았고 10년 지기의 관계는 끝나고 말았다.
쑨원의 독선과 속 좁은 태도는 결과적으로 그나마 남아 있던 혁명파마저 완전히 분열시켰다. 1914년 7월 8일 쑨원은 도쿄 우에노의 세이요칸(精養軒)이라는 서양식 식당에서 "중화혁명당 성립대회"를 개최하였다. 쑨원이 총리, 천치메이가 총무부장, 후한민이 정치부장에 추대되었다. 쑨원은 연설문에서 "제2혁명의 실패는 혁명 정신이 해이해졌기 때문"이라며 자신을 중심으로 하나로 단결해 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였다.
총당원은 약 300여명. 그 중에는 장제스도 있었다. 그의 나이 약관 27살이었다. 신해혁명 당시 고작 백여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항저우를 하루만에 점령하여 뛰어난 리더쉽과 결단력, 군사적 역량을 증명하였던 그는 2차 혁명에서 천치메이와 함께 상하이의 강남제조국 공격에 나섰다가 실패한 후 상하이의 공동조계에 숨어 있었다. 그의 목에도 거액의 현상금이 걸렸다.
하지만 일본에서 쑨원이 중화혁명당이라는 새로운 혁명조직을 창설했다는 소식을 듣자말자 즉시 도쿄로 와서 쑨원을 만났다. 이전에도 장제스는 일본에서 유학하면서 중국 동맹회의 회원으로 가입한 적이 있었지만 자신과 친분이 있었던 천치메이를 따랐을 뿐이었다. 두 사람이 직접 만난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쑨원은 장제스와의 짧은 만남에서 오만하면서 고집 센 그에게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받았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저 청년이 앞으로 혁명의 선봉에 설 것이다"라고 말했지만 훗날 중국의 지도자가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장제스는 입당 순서는 102번째, 중국 본토에 있는 사람으로서는 첫번째였다.
쑨원은 장제스에게 첫번째 임무를 맡겼다. 상하이로 돌아가서 상하이에 주둔한 군대 안에 있는 혁명파 세력과 연계하여 봉기를 일으킨 후 상하이 진수사 정루청을 내쫓으라는 것이었다. 위안스카이에 대한 첫번째 반격이었다. 그러나 변변한 준비도 없이 무작정 봉기만 하면 성공하리라는 식의 작전은 몇 년전에 참담한 실패로 끝났던 광저우 봉기를 재현한 꼴이 되었다. 게다가 직접적인 무력 수단도 없이 현지 부대의 일부 세력에 의존하는 방식은 사전에 쉽게 노출될 수 밖에 없다는 사실도 무시하였다. 장제스는 신중하게 계획을 수립했으나 거사 직전에 발각되었다. 정루청은 즉각 이들의 체포를 지시하였다. 당원 명부와 공격 계획이 압수되자 혁명파에 가담했던 병사들은 단숨에 일망타진당했고 장제스는 겨우 목숨을 건져서 일본으로 다시 도망쳐야 했다.
모처럼 야심차게 준비했던 계획이 제대로 해보기도 전에 실패로 끝나자 쑨원은 이번에는 동북3성으로 눈을 돌렸다. 동북3성은 베이징과 가까운데다 여지껏 혁명운동이 제대로 전개된 적이 한번도 없는 곳이기에 위안스카이의 감시가 소홀하리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 역할 또한 장제스가 맡았다. 그는 천치메이, 슝커우 등과 함께 다롄으로 잠행하였지만 동3성의 사정은 쑨원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나빴다. 동3성의 실질적인 실권자인 장쭤린이 혁명파 세력을 가혹하게 탄압하여 혁명파가 들어갈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또한 남만주를 장악하고 있던 일본의 방해 또한 심하였다. 일본 정부는 다롄의 관동군에게 이들이 활동하지 못하도록 엄중히 감시하고 당장 쫓아내라고 지시하였다. 결국 장제스는 아무런 성과 없이 일본으로 되돌아 와야 했다.
중화혁명당은 사분오열이나 다름없었다. 혁명에 대한 목표가 분명하고 이를 위해 목숨을 걸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대부분은 아무런 자질도 역량도 없으면서 쑨원에 빌붙어 출세의 기회를 잡아보겠다는 건달, 무뢰배들이었다. 하루 종일 하는 일이라고는 모여서 잡담만 일삼는게 전부였다. 게다가 서로 파벌을 만들어 중상모략을 일삼았고 심지어 쑨원이 무능하다면서 노골적으로 비난하는 이들도 있었다. 어떤 이들은 쑨원으로부터 혁명자금이라며 돈을 뜯어내어 사치를 즐기기도 하였다.
쑨원 역시 알면서도 기강을 바로잡기 보다는 적당히 묵인하는 식이었다. 파벌과 기강 문란은 일정부분 쑨원이 자초한 결과이기도 하였다. 개개인의 역량이나 혁명에 대한 이해는 따지지 않고 자신에 대한 충성심만 요구하였다. 또한 신해혁명 이전부터 동참했던 자와 신해혁명 이후에 동참한 자를 구분하여 엄격하게 차별 대우하였다. 이것은 봉건시대의 신분제나 다름없었기에 많은 사람들의 반발을 샀다. 명확한 이데올로기도, 정체성의 공유도, 구체적인 계획도 없었다. 이런 모습은 혁명당이 국민당으로 바뀐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뒷날 국민당이 결국 마오쩌둥의 공산당에게 패배하는 것도 근본적으로 이런 태생적인 한계 때문이었다.
1차 세계대전의 발발 이후 중국에는 거센 바람이 불어 오고 있었지만, 쑨원은 스스로 혁명의 구심점을 자처하면서도 정작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하릴없이 시간만 보낼 뿐이었다. 그가 유일하게 한 일이라고는 1914년 10월 25일, 자신의 비서이자 당시 22살이었던 쑹칭링과 결혼식을 올린 것이었다. 두 사람의 나이는 무려 26살이나 차이났다. 게다가 쑨원은 이미 두명의 배우자가 있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미 바람끼로 유명했던 그는 당시 보편적인 중국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일부일처제에 만족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말로는 중국의 낡은 구습을 부수겠다면서 정작 자신은 여기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 그의 모순된 행태였다.
한편, 쑨원과 결별한 황싱은 1914년 6월 30일 일본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갔다. 만약 일본에 그대로 남아 있으면 쑨원과의 갈등이 더욱 증폭될 수 있고 혁명파의 내분이 외부로 드러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그걸 가장 기뻐할 사람은 물론 위안스카이였다. 따라서 이런 실상을 어떻게든 숨길 필요가 있었다. 그러면서도 미국으로 향하는 배에서 "이 넓은 천지에 내 몸을 둘 곳은 어디인가?"라면서 자신의 비참한 신세를 한탄하였다. 위안스카이는 미국 정부에 황싱 일행이 "미국 사회에서 불필요한 소요를 야기할 것"이라면서 그들을 체포하여 중국으로 송환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미 국무부는 중국 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황싱 일행을 체포했지만 사법부가 이들의 정치적 망명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덕분에 풀려날 수 있었다.
황싱은 중화혁명당이 창설된 직후인 1914년 8월 13일 이른바 "구사연구회(歐事硏究會)"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겉으로는 유럽에서 벌어진 전쟁을 연구한다는 명목의 사적인 모임에 불과했지만 쑨원의 중화혁명당과 결별하여 황싱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혁명조직이었다. 강령에는 "쑨원에 대한 존경을 유지한다" "당파와 노선과 상관없이 인재를 모은다" "무장혁명을 주된 혁명 수단으로 추구하되, 기타 다양한 방법 또한 인정하여 회원들의 뜻을 하나로 모은다"라고 하였다. 중화혁명당이 쑨원에 대한 절대 복종을 요구하고 배타적인 입장을 고수한 것에 비하면 훨씬 개방적, 포용적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또한 황싱은 쑨원과 달리 스스로 지도자의 자리에 오르기를 거부하고 회원들에게 맹목적인 복종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는 끝까지 혁명의 지도자는 쑨원 밖에 없다고 여기며 스스로를 삼가하였다. 서로 주도권을 쥐려고 암투를 벌이던 당시의 상황에서는 보기 드문 훈훈한 모습이었다.
구사연구회에 가담한 사람들은 최초 50명 정도로 주로 엘리트 출신 지식인들과 일본과 해외에서 유학한 군인 출신들이었다. 비록 숫적으로는 중화혁명당보다 적었지만, 혁명에 대한 이해도가 훨씬 높고 영향력도 컸다. 위안스카이의 매국적인 21개조 조약 수락과 황제 등극에 반발하여 제3혁명이 일어났을 때 쑨원의 중화혁명당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 반면, 황싱은 상하이를 통해 귀국한 후 미국, 홍콩 등지에서 모은 막대한 군자금을 윈난성과 광시성에 지원하였다. 그는 反 위안스카이 세력의 봉기와 위안스카이를 몰락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위안스카이가 죽은 지 얼마 뒤인 1916년 10월 31일 황싱도 그동안의 누적된 과로로 급사하였다. 그의 나이 고작 42살이었다. 이후 쑨원이 국민당을 세우자 구사연구회 역시 여기에 흡수되었다.
황싱이 사람들 사이에서 쑨원이나 쑹자오런만큼의 명성을 얻지 못한 것이나, "사상은 쑨원, 행동은 황싱"이라는 식으로 쑨원의 충실한 행동 대장쯤으로 알려진 것은 그의 비중과 역할이 결코 이들보다 못해서가 아니라 평소 자신의 사상과 노선을 남들에게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황싱 또한 쑨원과 마찬가지로 많은 한계가 있었고 결단력과 추진력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1세대 혁명 지도자로서 그의 공헌은 결코 적지 않다. 만약 쑨원이 일찍 죽고 황싱이 오래 살았다면 오늘날 중국의 "국부"는 그가 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어쩌면 중국의 역사 또한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 일본의 21개조 요구
산둥성에 상륙한 일본군이 3개월에 걸쳐 군사 작전을 전개하고 있는 동안 위안스카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일본군이 자오지 철도를 멋대로 점령하고 현지에서 약탈과 철도, 도로를 파괴하는 등 중국의 주권을 침해당하고 있음에도 주중 일본 공사에게 항의 한마디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중국의 반일 여론은 갈수록 높아졌지만 탄압하기에만 급급하였다. 그가 저자세를 유지한 것은 일본에 쑨원이 망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칫 일본을 무리하게 자극했다가 일본 정부가 쑨원을 앞세워 위안스카이 타도에 나설지도 모른다고 우려하였다.
실제로 쑨원 역시 위안스카이 타도에 일본의 협력을 바라고 있었다. 그는 소위 "대아시아주의"라 하여 아시아의 주도국가인 중국과 일본이 함께 손을 잡고 구미 열강의 침략에 대항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자국의 정치적 문제에 외세를 끌어들인다는 것은 무모한 생각이지만, 당시만 해도 쑨원을 비롯한 중국의 대다수 지식인들은 일본을 근대화에 성공한 유일한 아시아 국가로서 중국이 본받아야 할 롤모델로 여겼다. 많은 지식인들이 유학을 떠나면서 구미보다 일본을 선택했던 것도 이런 환상 때문이었다. 따라서 정권의 안위가 가장 중요한 위안스카이로서는 쑨원과 일본이 결탁하는 일을 막기 위해서 일본의 횡포를 어느 정도는 참고 묵인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막연한 기대와 달리, 일본의 현실은 구미 열강과 다를 바 없는 제국주의 국가였다. 메이지 유신 이래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하고 극동에서의 지위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영국, 미국의 후원 덕분이었다. 영-미는 극동과 태평양에서 러시아, 독일의 팽창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을 지원하였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길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일본은 이들의 "번견(藩犬)"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야심은 이 정도에 머물지 않았고 구미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열강이 되기를 바랬다. 1910년에 조선을 강제 병합한 일본은 본격적으로 러시아와 미국을 육해군의 가상 敵으로 삼아서 군사력을 더욱 확충하였다.
청일전쟁 당시 7개 사단을 보유했던 육군은 러일전쟁에는 13개 사단, 1914년에는 19개 사단으로 늘어났고 전시에는 50개 사단으로 확대시킬 계획이었다. 해군 역시 1910년 3월에 요코스마 해군공창(横須賀海軍工廠)에서 일본 최초의 세미 드레드노트급 전함 사츠마(薩摩, 배수량 1만9천톤, 30.5cm 주포 2문)을 건조한 뒤, 1914년에는 드레드노트급 전함 카와치(河内, 배수량 2만800톤, 30.5cm 주포 12문)와 동형함 셋스(摂津)를 내놓는 등 꾸준히 신형 전함을 건조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개전 당시 일본의 해군력은 이미 전통적인 해군 강국인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성장하여 세계적인 해양 강국의 반열에 섰다.
하지만 이런 군비 증강은 군부의 무리한 욕심만 앞세웠을 뿐, 일본의 여건을 무시한 것이었기에 재정적인 압박은 물론, 대다수 국민들은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또한 러일전쟁 당시의 막대한 전비 소요, 22억엔에 달하는 거액의 채권은 일본을 파산직전으로 내몰았다. 일본 정부는 국민들을 끝없는 증세로 쥐어짰지만 그럼에도 재정 균형을 맞추기에는 어림도 없었다. 일본이 자랑하는 근대화란 군부와 정치가, 소수의 자본가들을 위한 것일 뿐, 국민들의 삶은 오히려 에도 막부 시절보다도 더 어려울 정도였다는 점에서 과연 무엇을 위한 근대화였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군부는 군비를 더욱 늘리는 한편, 중국을 새로운 식민지로 삼겠다는 야심을 품었다.
이런 와중에 제1차 세계대전으로 유럽의 관심이 극동에서 멀어지자 일본은 본격적인 중국 침략에 나섰다. 산둥성의 독일 조차지를 점령하여 첫번째 발판을 마련한 일본은 위안스카이에게 이른바 "대중국 21개조 요구사항(対華二十一ヶ条要求)"을 전달하였다. 21개조 요구란, 총 5개의 항목과 21개의 세부 요구조건으로 이루어진 중국 내 일본의 권익 확대에 대한 것이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첫번째는 독일의 자오저우만 식민지에 대한 권익을 일본이 승계하는 것과 산둥성의 배타적 권리를 인정할 것
두번째는 뤼순, 다롄 등 랴오둥 반도의 조차권을 99년 연장하고 만주와 내몽골에 대한 배타적 권리를 인정할 것
세번째는 중국 최대의 철강기업인 한야평공사(漢冶萍公司)의 배타적 권리를 인정할 것
네번째는 일본의 동의 없이 중국의 영토를 제3국에 할양하지 말 것
다섯번째는 정치, 재정, 군사 고문으로 일본인을 초빙할 것과 중국 내지에서의 일본인 토지 소유를 인정할 것, 치안 유지에 일본인을 활용할 것 등이었다.
1915년 1월 18일 일본 외상 가토 다카아키는 중국 주재 일본 공사 히오키 마쓰(日置益)를 통해 위안스카이에게 전달토록 하였다. 외교문서를 중국 외교부가 아닌 대총통에게 직접 전달한 일본의 행동은 외교 관례에서 벗어난 것이자 중국을 대등한 국가로 보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했지만, 21개 조약은 10여년 전 고종을 핍박하여 조선을 보호국으로 전락시킨 "을사늑약"의 재현이었다. 위안스카이도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즉시 각료들을 모아서 회의를 열었다. 하지만 뾰족한 대책이 있을 리 없었다. 육군 총장인 돤치루이는 "설령 전쟁을 하는 일이 있더라도 일본의 요구를 수락해서는 안된다"라고 기세등등하게 말했지만 막상 위안스카이가 "일본과 싸운다면 승산은 있는가?"라고 묻자 "삼일이면 전멸할 것"이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국력의 차이가 아무리 크더라도 분명 지나친 과장이었다. 그 정도로 청일전쟁 이래 일본에 대한 패배주의는 이들의 뼛속까지 박혀 있었던 것이다.
위안스카이는 일단 회답을 늦추었다. 무작정 수락하기에는 사안이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대신 국내외의 언론에 슬쩍 흘리는 한편, 각성의 독군들에게 전보를 보내어 일본과의 전쟁을 각오해야 한다고 지시하였다. 물론 정말로 싸울 생각은 없지만, 협상을 조금이라도 유리하게 끌어보려는 일종의 지연전술이었다.
중국 각계에서는 당장 비난의 여론이 들끓었다. 19개 성의 독군들도 일제히 반대하고 나섰다. 또한 전국에서 반일 시위가 열리고 일본에 유학 중이던 학생들 역시 동맹휴학과 대일 절교를 외쳤다. 위안스카이는 미국과 영국 정부에도 이 사실을 전달하여 일본이 21개조 요구를 철회하도록 압박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들 국가도 일본을 비난하고 나섰다. 심지어 위안스카이 타도를 외치던 황싱도 이 사실을 듣고 "국가가 있어야 정치가 있다. 외침에 맞서기 위해서는 국내문제를 뒤로 미루고 우선 서로 단결해야 하지 않겠는가!"라면서 모든 혁명 활동을 일단 중단하고 위안스카이에게 협력할 것을 호소하였다.
반면, 쑨원은 당원들에게 애초에 일본이 21개조를 요구하게 된 배경은 위안스카이의 야심이 초래한 결과이며 결국에는 일본의 요구에 굴복할 것이니 결코 위안스카이에게 동조해서는 안된다고 못을 박았다. "그의 매국적인 간계가 중도에 누설되었지만 만약 누설되지 않았다면 국민들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국가를 일본에게 팔아먹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런 매국노를 반드시 제거하지 않으면 외적의 모욕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쑨원의 짐작은 위안스카이에 대한 극도의 불신감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 정부에 정식으로 항의를 한다거나 배일 운동을 전개하는 등의 별다른 대응책을 마련한 것은 아니었다. 이런 이중적인 모습은 뒷날 5.4운동에서도 재현된다.
위안스카이는 대내외적으로 들끊는 여론을 등에 업고 일본과 교섭을 시작하였다. 일본도 곤란한 입장에 처한 처지였다. 중국측 대표에게 중국이 의도적으로 기밀을 누설했다면서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하지만 위안스카이의 진짜 속셈은 따로 있었다. 일본의 요구조건을 수락하되, 자신이 황제가 되는데 적극적으로 후원해 달라는 것이었다.
* 옥좌에 오르다
당시 위안스카이는 더 이상 부러울 것이 없는 처지였다. 국회는 문을 닫았고 그가 멋대로 통과시킨 헌법은 자신을 종신대총통으로서의 지위과 무제한적인 권력을 보장하였다. 중국 전체가 그에게 무릎 꿇고 있었다. 또한 그의 처첩은 10명에, 자녀는 32명에 달했다. 사실상 황제나 다름없었지만 위안스카이는 그 정도로 안심할 수 없었다. 그의 수족인 돤치루이와 펑궈장 등 북양군벌들의 세력이 커지면서 위안스카이 자신을 위협을 느낄 정도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위안스카이가 죽은 뒤에 자신들이 그 자리를 차지할 욕심이었다. 장남인 위안커딩(袁克定)은 놀기 좋아하고 방탕하기 짝이 없는 한량에 불과했지만, 분수도 모르고 아버지를 제위로 올린 후 자신 또한 황태자가 되어 훗날 천하를 통치하겠다는 야심이 있었다.
한때 쑨원의 측근인 왕징웨이와는 의기 투합하여 위안스카이 앞에서 함께 의형제의 결의를 맺은 적도 있는 위안커딩은 말을 타다가 떨어져 큰 부상을 입고 평생 절음발이가 되었다. 위안스카이는 치료를 겸하여 그를 중국 사절로 독일로 보냈다. 독일 카이저 빌헬름 2세는 유럽에서 가장 대표적인 군국주의자이자 철권 통치를 하는 황제였다. 위안스카이는 이전부터 자신도 빌헬름 2세와 같은 지도자가 되기를 원하고 있었다. 카이저는 위안커딩를 만난 자리에서 "중국은 황제가 통치해야 강해질 수 있다"라고 강조하자 위안커딩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위안스카이는 위안커딩을 통해 독일 황제의 친서를 전달받자 매우 기뻐하였다. 그동안 얼마나 듣고 싶었던 말인가. 그동안 주변의 눈치를 보느라 차마 결심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그로서는 드디어 본색을 드러낼 기회를 잡은 셈이었다. 주변의 측근들을 앞세워 군주제 부활을 위한 분위기 조성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1914년 12월 13일, 그는 측근들을 데리고 베이징 교외에서 공자를 모시는 제사를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그 자리에서 측근들은 위안스카이에게 국가를 위해 하루라도 빨리 황제에 즉위해야 한다고 떠들었다. 사전에 정해진 각본대로였다. 위안커딩도 앞장섰다. 평소 위안스카이가 유별나게 미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잘 아는 그는 위안스카이에게 "점쟁이가 말하기를 올해는 운수가 대통한 해라고 합니다"라거나 "고향의 선대묘 주변에 등나무가 새로이 자랐는데 길이이 1장(3m)가 넘고 그 모습이 용이 웅크린 모습과 같습니다" 따위의 허황된 소리를 지어내어 말했다. 위안스카이는 그 말에 크게 기뻐하였다. 한 천문학자는 글을 올려서 자신이 몇날 천문을 본 결과 황제의 별이 허난성의 하늘에 나타나 한달 후에는 베이징으로 올 것이라며 하루라도 빨리 하늘의 뜻에 따라서 옥좌에 올라야 한다고 건의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위안커딩은 위안스카이의 눈과 귀를 속이는 일조차 서슴치 않았다. 베이징에는 "순천시보(順天時報)"라는 신문이 있었다. 이 신문사의 소유주는 일본인이었기에 위안커딩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따라서 다른 어용신문과 달리, 객관적인 논조를 유지했기에 위안스카이는 매일 아침마다 이 신문을 즐겨 읽었다. 위안커딩은 몰래 신문를 위조하여 불리한 기사를 쏙 빼버리고 "온 나라가 군주제를 옹호한다"따위의 내용을 매일같이 집어넣었다. 위안스카이는 가짜 신천시보를 읽으면서 거짓말인지도 모르고 점점 마음이 기울었다.
난징에서 이 소식을 들은 펑궈장이 부랴부랴 베이징으로 올라왔다. 그는 따지듯 위안스카이에게 황제가 될 생각이 있느냐고 묻었지만 위안스카이는 딱 잡아뗐다. "내 나이가 올해로 벌써 58살이다. 우리 집안에는 여지껏 60세를 넘긴 사람이 없는데 내가 황제가 된들 얼마나 살겠는가. 게다가 내 아들들은 하나같이 어리석은데 누구한테 보위를 물려준단 말인가." 겉으로는 군권을 쥔 부하들의 눈치를 보면서도 뒤로는 심복들을 앞세워서 자신의 즉위를 위한 분위기를 만들어 나갔다. 그는 자신의 미국인 정치고문 굿나우(Frank Johnson Goodnow)를 시켜서 《공화와 군주론》이라는 책을 발간케 하였다. 굿나우는 "중국은 공화제를 펼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여 군주제가 어울린다"고 주장했다.
1915년 8월 14일에는 옌푸(嚴複), 양두(楊度), 돤지구이(段芝貴) 등 여섯명의 명망있는 자들을 모아서 소위 "주안회(籌安會)"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말하자면 위안스카이 황제 만들기 대책 본부인 셈이다. 사람들은 이들을 "주안 육공자"라고 불렀다. 이들은 "신해혁명 당시 공화제를 실시한 것은 성급한 것이었다. 굿나우 박사도 군주제가 공화제보다 우수하며 중국은 군주제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면서 군주제 부활 캠페인을 전국적으로 펼쳤다. 특히 양두는 위안커딩에게 온갖 아첨을 떨면서 그를 "당태종 이세민"에게 비유하였다. 이세민이 이연을 도와 보위에 오르게 한 것을 상기시킨 것이다. 또한 위안스카이는 부하들을 서로 충성 경쟁을 시켰다. 이 때문에 군주제에 관심이 없던 자들조차 위안스카이의 눈밖에 나지 않으려고 너도나도 앞장섰다.
물론 반대하는 목소리도 많았다. 대표적인 사람이 량치차오였다. 그동안 위안스카이에게 협력를 아끼지 않았던 그도 지금은 적절한 시기가 아니라고 간청하였다. 사실 그는 캉유웨이와 함께 입헌군주파의 거두라는 점에서 위안스카이의 칭제를 굳이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문제는 하필 일본이 21개조 요구를 내세워 중국을 압박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이런 마당에 위안스카이가 황제가 되어 일본과 타협한다면 여론은 그가 황제가 되기 위해 나라를 일본에게 팔아넘겼다고 여길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량치차오가 뭐라고 하건 위안스카이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에게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여기는 량치차오는 결국 완전히 등을 돌리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윈난성으로 내려가 위안스카이 타도에 앞장서게 된다. 그 와중에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다. 군주제가 부활해야 한다는 주장이 퍼지자 청조의 일부 유신들이 청조의 복원 운동에 나선 것이다. 물론 위안스카이로서는 분위기도 파악하지 못하고 눈치 없이 남의 밥그릇에 달려들려는 그들을 호되게 단속하여 두번 다시 엉뚱한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영국, 일본, 프랑스 등 열강들은 중국에 내란만 일어나지 않고 자신들의 이익이 침해받지 않는다면 정치체제가 군주제이건 공화제이건 아무래도 좋다는 쪽이었다. 열강들의 양해를 얻자 위안스카이는 드디어 마지막 작업에 착수하였다. 10월 10일 참정원에서 전국의 대표들이 모여서 국가 체제를 결정하는 투표가 실시하였다. 모두 위안스카이의 심복들이 사전에 선정해둔 사람들이었다. 개표결과 1,993명이 참석하여 1표의 반대로 없이 찬성하였다. 12월 11일 양두는 이 결과를 가지고 국민의 뜻이라며 위안스카이에게 황제에 즉위할 것을 주청하는 추대서를 올렸다. 그 옆에서는 위안커딩이 12월 12일과 13일이 가장 길일이니 놓쳐서는 안된다며 한층 바람을 넣었다.
위안스카이는 소위 겸양의 예를 발휘하여 "나는 공화제를 지지하겠다고 맹세한 사람이다. 내가 제위에 오른다면 어찌 마음이 편하겠는가. 차라리 다른 사람을 추대하라"라면서 사양하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이날 오후 재차 추대서가 올라갔다. 위안스카이는 그제야 마지못해 수락한다는 뜻을 밝혔다. 12월 13일 자금성에서 그가 그토록 원하던 성대한 황제 즉위식이 거행되었다. 젊은 시절 과거에도 합격하지 못하여 방탕하게 살던 한량이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9
위안스카이가 이런 "쇼"를 하는데 쓴 돈은 무려 6천만 위안에 달했다. 현재 가치로 환산한다면 3억 달러가 넘는다. 그 비용은 대부분 열강들에게 빌린 차관이었다. 그가 최초로 한 일은 청나라 황제의 집무실인 대화전을 그의 위신에 맞게 개축한 일이었다. 8개의 기둥에 금박을 입히고 사방의 벽은 유리로 덮었다. 개축비용만 470만 위안(2천5백만 달러)였다. 또한 45만 달러를 들여서 그가 앉을 옥좌를 화려하게 장식하였으며 즉위식에 입을 황제의 용포 두벌을 제작하는데 70만 위안을 들였다.
하지만 그의 꿈은 오래갈 수 없었다. 당장 그의 시대착오적인 행태를 반대하는 운동이 중국 전역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앞장 선 사람이 량치차오와 전 윈난도독 차이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