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안스카이 일본에 굴복하다
1915년 5월 7일, 일본의 최후 통첩이 떨어졌다. 베이징 주재 일본 공사 히오키마스(日置益)는 "50시간 안에 만족스러운 대답이 없다면 필요한 수단을 강구하겠다"라며 중국 외교부를 위협하였다. 21개조 요구를 수락하던가, 그렇지 않으면 전쟁이었다. 약 4개월 동안의 교섭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더 이상 시간을 끌 경우 열강들이 간섭에 나설지도 모른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중국을 위압할 목적으로 해군을 출동시켜 무력시위를 하였다. 창장 입구에는 1만 6천톤의 준 드레드노트급 전함 가고시마(鹿島), 수상기 모함 와카미야마루(若宮丸)를 비롯한 제3함대가, 베이징 북쪽의 요충지 친황다오에는 러일전쟁에서 노획한 구 러시아 전함 수오우(周防), 사카미(相模), 방호순양함 치요다(千代田) 등이 포진한 채 막강한 위용을 자랑하면서 명령만 떨어지면 언제라도 포문을 열겠다는 태세였다.
육군 역시 랴오둥 반도에 주둔한 관동군 제13사단과 제17사단, 조선의 제9사단이 출동 준비를 마쳤다. 여기에 산둥반도에 제18사단이 있었고 톈진의 일본 조계에는 의화단의 난 이래 이른바 지나주둔군(支那駐屯軍) 사령부가 있어서 베이징과 톈진, 친황다오, 산하이관 등 베이징 주변의 요충지에 주둔하면서 공사관과 조계 경비를 맡고 있었다. 병력은 약 1500명 정도. 덧붙여, 이 지나주둔군이 22년 뒤 "7.7사변(루거우차오 사변)"을 일으켜 중일전쟁의 막을 열게 된다. 그 외에도 상하이와 난징, 즈장, 충칭, 우한 등 중국 연해와 내륙 주요 도시에도 일본 조계와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모두 합하면 6만명이 넘었다. 일본은 만약 위안스카이가 21개조 요구를 거부할 경우 즉각 중국 침략을 시작할 생각이었다.
일본의 부당한 요구는 전례없이 중국 민중의 감정에 불을 붙였다. 전국에서 반일 시위가 연일 열렸고 위안스카이 타도를 부르짖던 혁명파의 이인자 황싱조차 "그 동안의 이견은 일단 재쳐두고 위안스카이를 중심으로 단결해야 한다"라면서 거국일치를 주장할 정도였다. 만약 위안스카이가 국운을 걸고 일본에 맞서기로 결심했다면 결과를 떠나서 역사에 길이 남을 민족의 영웅이 되었을 것이지만, 이 벼락출세한 풍운아는 권모술수에나 능할 뿐 정작 지도자에 걸맞는 베짱과 결단력이 없었다. 그로서는 감히 일본과 겨룬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이 사내의 유일한 관심사는 하루라도 빨리 천자에 올라서 원씨 황조를 열고 자손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리겠다는 욕심 뿐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누구 한 사람 일전을 각오해서라도 일본의 횡포에 맞서려는 의지가 없었다. 중국 지도부에게 청일전쟁의 트라우마는 그만큼 컸던 것이다.
히오키마스는 위안스카이의 속내를 간파하고 만약 일본과의 교섭에 성의를 보여준다면 그가 한층 높이 올라갈 수 있도록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부추겼다. 영국 공사 존 조던(John Jordan) 또한 영국은 유럽 전쟁으로 당장 개입할 입장이 되지 못하니 일본의 요구를 참고 받아들이는 수 밖에 없다고 권유하였다.
결국 5월 9일 위안스카이는 일본의 5개 항목 21개조 요구 중 마지막 제5호의 정치, 군사 고문에 일본인을 임명하는 것 등 7개 조항만 빼고 나머지 14개 조항을 모두 수락키로 하였다. 5월 25일 중일조약이 정식으로 체결되고 6월 8일 비준서를 교환하였다. 그야말로 배신이나 다름없는 비열한 행태이자 나라를 팔아먹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전국 각지는 물론, 동남아와 일본, 구미 등지의 화교와 유학생들도 "국치"라면서 연일 격렬한 반대 시위를 열었다. 한커우의 일본 조계에서는 격분한 중국인 학생들이 일본인 상점을 파괴하고 일본인들을 공격하자 일본 육전대가 폭동 진압을 빌미로 출동하는 일도 벌어졌다. 또한 일본 상품 불매 운동을 전개하고 무기를 구입하여 일본에 대항하자며 구국 저축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는 이전처럼 서구 열강들의 제국주의 행태를 싸잡아서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이라는 단일 국가를 비난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성격이 달랐다. 중국 사회의 반일 감정과 민족주의가 유례없이 고조된 것이다. 하지만 위안스카이는 일본 정부의 강력한 항의에 정중하게 사죄하면서 배일 운동과 혁명당에 동조하는 행동은 국가에 대한 반역이니 엄중히 단속하라고 지시하였다.
위안스카이에게 한줄기 희망을 기대했던 황싱은 그에게 놀아난 격이었다. 격분한 그는 위안스카이가 황제가 되려는 욕심에 눈이 먼 나머지, 일본과 매국 외교를 했다면서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는 한편, 중국 안팎의 反 위안스카이 세력들이 연합하여 투쟁을 하자고 호소하였다. 또한 한동안 관계가 껄끄러웠던 쑨원에게도 편지를 보내어 합작을 제안하였다. 쑨원 역시 열렬히 찬성하면서 황싱에게 어서 일본으로 돌아와서 같이 힘을 모으자고 하였다. 2차 혁명의 실패 이후 사분오열되었던 혁명파는 다시 두 사람을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하였다. 또한 그동안 중립적이거나 위안스카이를 지지하던 온건파 지도자들도 차례로 동참하면서 反 위안스카이 세력은 갈수록 힘을 더해갔다.
한편, 중일 관계에 있어서도 이 순간이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양국은 비교적 양호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전해에 있었던 일본군의 산둥 출병도 자오저우만의 독일 식민지에 국한된 것일 뿐, 중국에 대한 직접적인 침략은 아니었다. 청일전쟁 이래 일본은 그동안 영국, 미국, 프랑스 등 다른 열강들의 간섭을 우려하면서 중국에 대한 단독 행동을 자제해 왔다. 하지만 21개 조약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중국을 압박하면서 이권과 영토를 야금야금 잠식해 나가게 된다. 또한 열강들과도 차례로 협약을 체결하여 중국 내 일본의 권익을 인정받는 등 중국의 식민지화에 착수하였다. 위안스카이 한 사람의 어리석은 탐욕이 중국 전체에 큰 폐해를 남긴 것이다.
그로부터 반년 뒤인 12월 13일 위안스카이는 자금성에서 성대한 대관식과 함께 그동안 꿈에도 그리던 옥좌에 앉았다. 국명도 "중화민국"에서 "중화제국"으로 바뀌었다. 대총통부가 있는 베이징 중난하이(中南海)는 신화궁(新华宫)으로 바뀌었다. 연호 또한 신해혁명 이래 사용하던 민국 대신, 1916년 1월 1일을 홍헌 원년(洪憲 元年)으로 하였다. 홍은 명나라를 건국한 태조 주원장의 시호인 홍무제(洪武帝)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또한 헌은 "입헌"이라는 뜻이다. 주변의 눈치를 보느라 확실하게 전제황제를 칭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서구식의 입헌군주도 아닌 애매모호함이 위안스카이의 방식였다. 이를 중국 역사에서는 "홍헌 제제"라고 부른다. 진보당의 영수 량치차오는 그동안 위안스카이의 최대 정치적 동맹자였지만 망령이 든 그에게는 더 이상 희망이 없음을 깨닫고 고개를 흔들며 상하이로 탈출하였다. 그리고 反 위안스카이 세력을 규합하여 위안스카이 토벌에 나서게 된다.
* 위안스카이와 쑨원, 그리고 량치차오
중화민국 초기 위안스카이, 쑨원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는 또 한명의 지도자가 량치차오(梁啓超)이다. 보수파의 우두머리가 위안스카이, 혁명파의 우두머리가 쑨원이라면 량치차오는 그 중간에 해당되는 온건파의 우두머리였다. 이들은 말하자면 삼국지에서 제갈량이 말하는 솥의 세발과 같은 형국이었다.
쑨원과 마찬가지로 광둥성 출신인 량치차오는 쑨원보다 7살 아래, 황싱보다 1살 위였다. 그의 집안은 당대 중국의 지방 향촌 사회를 지배하던 전형적인 향신 계층으로, 그는 어릴 때부터 매우 총명하였고 학문을 좋아하였다. 12살에는 향시(지방 과거시험)에서 당당히 합격하여 수재(秀才, 우리의 생원에 해당)가 되었다. 이는 중국 역사를 통틀어도 매우 드문 사례였다. 명문 집안 출신이면서도 학문을 멀리하고 방탕한 생활이나 하면서 20살이 넘어서까지 과거에 합격하지 못했던 위안스카이와는 대조적이라 할 수 있겠다.
그가 성장하던 시절은 격동의 시대였다. 열강들의 침탈과 태평천국의 혼란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중국 사회가 안정을 찾으면서 서구의 학문과 기술을 배우는 양무운동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이른바 "동광(동치제와 광서제) 중흥"의 시대였다. 량치차오는 18살에 당시 변법(變法: 제도를 개혁한다는 뜻)를 광서제에게 건의하여 명성을 떨치고 있던 캉유웨이를 직접 찾아가 제자가 되었고 서구식 학문을 배웠다. 여지껏 전통적인 교육만 받아왔던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세상에 학문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라고 탄식할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완패하자 그는 캉유웨이와 함께 뜻을 같이 하는 여러 젊은 지식인들을 모아서 변법파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중국의 낡은 봉건제가 개혁의 가장 큰 걸림돌이며 서구식의 입헌군주제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광서제는 변법파의 주장을 받아들여 "무술변법"에 착수하지만 서태후와 수구파의 반격으로 103일만에 무너졌다. 권력의 주도권을 놓고 벌인 싸움에서 광서제가 패한 것이다. 권력 투쟁에서 승리한 서태후는 철저한 응징에 나섰다. 광서제는 중난하이에 연금된 채 죽는 날까지 나올 수 없었고 변법파 관료들 역시 모두 참혹하게 처형되었다. 그 중에는 캉유웨이의 동생이었던 캉광런(康廣仁)도 있었다. 캉유웨이와 량치차오만 간신히 목숨을 건져서 일본으로 도주하였다. 무술변법이 실패한 직접적인 이유는 신군을 장악하고 있던 위안스카이가 변법파에 가담하기로 약속하고서도 배신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에게 위안스카이는 철천지 원수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변법파의 세력은 너무 미약하면서 하려는 일은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캉유웨이를 비롯해 젊은 지식인들로 구성된 변법파는 이상만 앞세워 현실을 도외시한 나머지 정책 추진 과정에서 구세력과 많은 마찰을 빚었다, 특히 결정적인 사건은 과거제도의 개혁이었다. 캉유웨이는 중국이 구미 열강보다 뒤쳐진 가장 큰 이유가 인재가 없기 때문이며, 인재가 없는 것은 낡은 과거제도가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중국의 전통적인 과거제도는 팔고문(八股文)이라 하여 사서오경을 비롯해 몇몇 경전의 문구를 달달 외운 후 테스트하는 식이었다. 시험에 출제되는 내용과 답안까지 모두 정해져 있었으며 다른 의견이나 해석의 여지도 없었다. 조선의 과거제도가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임금이 직접 국가 대사와 민생을 묻기도 했다는 점에서 중국의 그것은 국가 경영을 위한 엘리트를 뽑는다기 보다는 황제가 내리는 교지를 받아서 쓸 수 있는 심부름꾼을 뽑는 것에 불과했다.
게다가 입신양명을 최고의 성공으로 여기는 중국의 가치관에서 교육 제도는 오직 시험을 위한 교육이었고 지식인들은 굳이 과거와 상관없는 다른 실용적인 학문을 배우려고 할 리 없었다. 따라서 캉유웨이는 중국이 발전하려면 우선 과거제도부터 폐지해야 한다고 여겼다. 광서제는 그의 건의를 받아들여서 팔고문을 즉각 폐지하고 과거제의 개혁을 지시하였다. 이것은 변법파의 큰 승리였다.
그러나 그동안 팔고문만을 공부해 왔던 전국의 수험생들이 들고 일어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캉유웨이가 의욕만 앞세워 아무런 사전 준비도 없이 하루아침에 팔고문부터 폐지하자 중국 전역이 들끓었다. 또한 베이징부터 지방 말단에 이르기까지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실시하여 쓸모없는 관료들을 대폭 줄였다. 그의 행동은 거대한 관료 조직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것이었다. 조정 내 모든 당파가 하나로 단결하여 서태후를 부추겼고 결국 광서제와 변법파는 몰락하였다. 캉유웨이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꿈꾸었지만 그에게는 삿쵸 연합이 가졌던 막강한 군사력도 없었고 주변의 지지 세력도 없었다. 쑨원의 혁명당보다도 훨씬 무력하였다. 믿는 것이라고는 오직 광서제 뿐이었으나 광서제 또한 무력하기는 마찬가지였으므로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일본으로 망명한 뒤에도 중국의 적은 만주족이 아니라 오직 서태후와 간신배들이며, 언젠가 이들을 타도하고 광서제를 다시 복위시키겠다는 꿈을 버리지 않았다. 이들은 다시 캐나다로 떠났고 1899년 6월 13일 캐나다에서 보황회를 조직하였다. 당시 일자리를 찾아 머나먼 남북 아메리카와 호주 등지로 건너갔던 수많은 중국인들이 캉유웨이의 보황회에 가입하였고 한때 회원수가 100만명에 달하기도 했다. 그러나 끈끈한 사제지간이었던 두 사람의 관계도 점차 악화되기 시작했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황제에 대한 충성을 버릴 수 없다며 완고한 태도를 고집했던 캉유웨이와 달리 량치차오는 서구식 민주주의에 눈을 뜨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량치차오에 비해 캉유웨이는 훨씬 보수적이었다. 청조 타도를 주장하는 쑨원에 대해서도 량치차오는 비교적 유연한 입장인 반면, 캉유웨이는 철저하게 배척하였다. 사실 캉유웨이의 완고함은 광서제가 생명의 은인이라는 점에 있었다. 서태후가 무술정변(戊戌政變)을 일으켜 변법파가 몰살당할 때 광서제가 아니었다면 자신도 죽었을 것이었다. 따라서 그의 광서제에 대한 충성은 맹목적인 숭배에 가까웠다. 또한 캉유웨이는 량치차오에 대해서도 대등한 위치의 동지가 아니라 봉건적인 관념의 사제지간으로만 보았다. 스승은 부모와 동등한 존재이며 스승이 제자를 가르칠 수는 있어도 제자가 스승을 가르칠 수 없는 것이 전통적인 중국의 가치관이다. 캉유웨이는 량치차오가 뭐라고 하건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스승의 권위를 앞세워 굴종하기만을 요구했다. 량치차오의 주변 사람들은 캉유웨이가 편협하며 이미 시대에 뒤떨어져 있으니 더 이상 따르지 말라고 권유할 정도였다.
캉유웨이는 량치차오가 공화주의와 반청 혁명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자 황제의 은덕도 모르고 배은망덕하다며 호되게 야단을 쳤고, 량치차오는 스승에게 "나는 만주족을 타도하려는 것일 뿐 광서제를 끌어낼 생각은 없으며 오히려 그에게 새로운 중국의 초대 대총통을 맡길 생각입니다."라고 변명하였다. 이는 같은 공화주의를 지향하면서도 구체제에 비교적 온건한 입장이었던 량치차오와 한족 중심의 혁명을 꿈꾸었던 쑨원의 차이를 보여준다.
량치차오는 캉유웨이에 비하면 진보적이었지만 쑨원에 비하면 덜 급진적이고 더 보수적이었다. 그는 한때 스승의 호된 질책을 받으면서까지 쑨원의 혁명 사상에 관심을 가지기도 했지만 금새 반혁명파로 돌아섰다. 그가 추구한 것은 평화롭고 점진적인 개혁이었다. 특히 중국의 낮은 정치 여건상 준비없이 성급하게 미국이나 프랑스를 흉내낸다면 결국 멕시코나 아르헨티나처럼 내전의 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입헌군주제를 실시하고 황제를 구심점으로 하되 상징적인 존재로만 남기고 실권은 국회에 두는 것이 중국을 위하는 길이며, 그런 점에서 영국과 일본의 정치체제가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로서는 나름대로 중국의 현실을 고민한 것이지만 문제는 청조가 입헌군주제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는 점이었다. 즉, 이상만 있고 방법은 없다는 점에서 그가 뭐라고 생각하건 한낱 탁상공론일 뿐이었다. 이 점은 량치차오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었다. 또한 "중국 민중의 수준은 너무 낮아서 애초에 민주주의를 실현할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는 등 서구식 민주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 또한 충분하지 못했으며 자신의 생각을 수시로 번복하기도 하였다. 그의 사상이 제대로 정립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량치차오가 쑨원만큼의 명성을 얻지 못했던 한계이기도 하였다. 중국의 저명한 문학평론가 셰시장(解璽璋)은 《량치차오 평전》에서 사상가로서의 그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현실 정치가가 되기에는 "천진난만하고 세상물정에 어두웠다"라고 말한다.
량치차오는 캉유웨이에게 마지막까지 제자로서의 예의를 버리지 않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더 이상 회복되기 어려웠다. 게다가 사리사욕에 눈이 먼 보황파의 간부들은 권력투쟁을 벌였고 거액의 공금을 착복하는 등 갈등이 격화되면서 결국 1909년에 오면 완전히 공중분해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캉유웨이와 량치차오는 생계마저 극도로 어려워 질만큼 위기에 처했다. 보황파가 붕괴되면서 중국 혁명의 주도권은 쑨원의 중국동맹회로 넘어갔다. 그 와중에 광서제도 죽고 서태후도 죽었다. 세상은 급변하였다.
1911년 10월 10일 우창 봉기가 일어났을 때 마침 두 사람이 일본에서 오랫만에 만났다. 캉유웨이는 중국의 상황을 논하면서 만약 쑨원의 혁명당이 주도권을 잡고 남북의 내전을 확대한다면 중국은 구미 열강의 손에 갈가리 찢길 것이라고 한탄하였다. 따라서 그 전에 쿠테타를 일으자는 것이었다. 그는 육군대신 짜이타오(載濤)를 설득하고 금위군을 앞세워 만주 귀족의 우두머리 경친왕 혁광과 도지대신(度支大臣, 재정장관) 짜이쩌(載澤)를 쫓아낸 다음, 짜이타오를 총리로, 푸이를 실권 없는 군주로 세워서 입헌군주제를 실현할 생각이었다. 또한 자신의 친분이 있는 북양군 제6진의 사단장인 우루전(吳祿貞)이 베이징으로 출동하여 수도를 방어한다면 위안스카이도 어떻게 할 방법은 없다. 그리고 황제의 이름으로 죄기조(罪己詔, 황제가 스스로를 꾸짖어 죄를 반성한다는 조칙)를 선포하고 국회를 소집하여 남방의 혁명군과 교섭한다면 서로 싸울 필요도 없을 것이고 자연스레 타협을 이루어 천하를 안정시킬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량치차오도 스승의 계획에 적극적으로 찬성하였다.
량치차오는 캉유웨이의 격려를 받으며 자신만만하게 베이징으로 향했지만 두 사람은 중국의 정세를 너무 단순하게 보고 있었다. 그들은 북양군 제6진의 사단장인 우루전의 도움을 받을 생각이었지만 11월 6일 우루전은 스좌장에서 베이징으로 가던 중 사고로 죽었다. 우루전의 죽음에는 그를 평소 껄끄럽게 여기던 위안스카이가 배후에 있다는 설도 있다. 량치차오는 거사를 시도해 보기도 전에 실패한 셈이었다. 그런 와중에 난징에서는 혁명정부가 들어섰고 위안스카이에 의해 푸이가 강제 퇴위되면서 청조는 몰락하였다. 또한 남북의 힘이 비등한 상황에서 쑨원과 위안스카이가 화의에 동의하면서 중국은 봉건시대를 끝내고 공화시대라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량치차오는 위안스카이에 대한 해묵은 감정이 있지만, 그가 보기에 위안스카이와 쑨원 둘 다 국가를 통치할 만한 위인들이 아니며 이들의 모순과 갈등을 잘만 이용한다면 "도요새와 민물조개가 싸우는 틈에 어부 노인이 이득을 취하는 것"처럼 자신이 어부지리를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였다. 캉유웨이 또한 이미 옛날 사람이 된 자신보다는 량치차오가 정부 내각에 들어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랬다. 위안스카이와 쑨원, 리위안홍, 또는 그 외의 사람들 역시 나름의 계산으로 이 명망 있는 정치가의 귀국을 크게 환영하면서 서로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이려고 하였다. 그리고 1912년 10월 8일 량치차오도 오랜 망명 생활을 끝내고 성대한 환영식과 함께 마치 개선장군처럼 톈진을 통해 귀국하였다. 그의 나이 39살이었다.
평생 큰 뜻을 품고도 타국에 머문 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로서는 예상 밖의 환대에 "쑨원과 황싱보다 환영 인파가 열배는 많다. 사람들이 나를 우러러 본다"라며 천진난만할 만큼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량치차오 인생의 가장 절정기였을 것이다. 신생 중화민국의 초대 임시 대총통이 된 위안스카이는 량치차오를 지극하게 대접하고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는 척하였다. 또한 국무회의에도 초빙하여 그의 의견을 묻기도 하였다. 온갖 암투와 권력투쟁이 벌어지는 조정에서 고위 관료로서 수십년을 보내며 자연스레 몸에 베인 위안스카이 특유의 사교법이었지만, 쑨원이나 황싱, 량치차오처럼 중앙 정치의 경험이 전혀 없는 지식인 출신 정객들로서는 이런 사실을 알 리 없었다. 따라서 순진하게도 그가 생각보다 겸손하고 솔직한 사람이라고 착각하였다.
1913년 1월 8일 국회 의원 선거에서 국민당이 392석을 획득하여 제1당이 되었다. 국민당은 쑨원의 중국동맹회를 중심으로 여러 군소 정치 세력을 끌어모아서 쑹자오런이 조직한 연합 정당이었다. 또한 리위안홍이 이사를 맡은 공화당이 175석, 위안스카이의 어용 정당인 통일당과 입헌파들이 뭉친 민주당이 각각 24석을 차지하였다. 젊고 야심만만한 쑹자오런이 국회를 장악하자 위안스카이는 그를 견제하기 위한 대항마로서 량치차오와 손을 잡고 공화당과 통일당, 민주당의 합당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공화 정치는 시작과 동시에 혼란에 빠져들었다. 위안스카이와 국민당의 싸움은 갈수록 격화되었고 3당 합당을 놓고도 각 계파가 서로 주도권을 놓고 싸웠다. 량치차오는 현실에 실망하고 주변에 자신의 울분을 토로하였다. "당장이라고 모두 던지고 일본으로 건너가 혼자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진실로 이 사회를 혐오하며 일본에 있을 때의 즐거움을 생각하곤 한다." 그는 사상가이자 이론가일 뿐, 온갖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정치세계에서 한 정당을 이끌고 갈 만한 리더쉽과 결단력을 갖춘 사람이 아니었다. 이것이 수많은 좌절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혁명의 구심점으로 남았던 쑨원과 달리, 현실 정치의 벽을 극복하지 못한 채 결국 훗날 스스로 정계를 떠나게 되는 이유였다.
3월 22일에는 상하이에서 쑹자오런이 암살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1913년 5월 29일 진보당이 결성되었고 리위안홍이 이사장, 량치차오가 이사로 추대되었지만 실질적인 지도자는 량치차오였다. 이로서 국회는 국민당과 진보당으로 양분되었다. 또한 위안스카이가 국민당파 도독 3명을 파면하고 황싱의 직위 또한 박탈하면서 결국 제2차 혁명이 폭발하였다. 승자는 위안스카이였고 쑨원은 완전히 몰락하여 일본으로 망명했다. 순진하게도 량치차오의 진보당은 라이벌의 불행을 자신들의 행운이라고 기뻐하였다. 그는 위안스카이와의 협력을 더욱 강화하는 한편, 정국의 주도권을 쥐려고 하였다. 대총통 선거를 앞두고 9월 11일 슝시링(熊希齡) 내각이 결성되었다. 슝시링은 무술변법 당시 캉유웨이를 지지했기에 량치차오와도 친분이 있었다. 따라서 위안스카이보다는 량치차오에 가까웠다, 그는 량치차오를 사법총장에 임명하였다. 또한 9명의 각료 중 5명이 진보당원이었다. 10월 10일 위안스카이가 대총통에 취임하였다.
위안스카이의 전제가 갈수록 강화되고 있었지만 량치차오는 중국의 혼란스러운 현실상 어차피 위안스카이 이외에 대안은 없다고 여겼다. 전국의 군벌들을 억누를 힘을 가진 사람은 오직 위안스카이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국회를 재건한 후 헌법을 제정하여 중국에 진정한 의회 정치를 실현시킬 생각이었으나 대총통에 오른 위안스카이는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심복들을 동원하여 국회를 비난하게 하고 국회에서 헌법 초안을 내놓는 것을 방해하였다.
11월 4일에는 국민당을 해산시켜 국회를 껍데기로 만들었고 1914년 1월 10일에는 아예 국회를 해산시켰다. 량치차오는 "무력만 믿고 의회 정치를 파괴한다면 앞으로 천하를 그르치게 될 것"이라며 위안스카이에게 호소했지만 씨알도 먹힐 리 없었다. 위안스카이로서는 그동안 쑹자오런을 견제하고 쑨원의 몰락과 국회의 장악, 대총통에 오르기까지 량치차오의 협력은 정치적으로 큰 도움이 되었지만 더 이상은 눈의 가시에 불과하였다.
그는 사법총장에서 물러난 뒤 화폐 제조국 총장을 맡았지만 허수아비에 불과하였고 현실에 점점 좌절하였다. 스스로도 "나는 일개 서생에 불과할 뿐, 실질적인 정치 능력은 없다. 알아서 물러나려 했으나 대총통이 두터운 은혜를 베풀어 주신 덕분에 지금의 자리라도 채워서 나의 쓸모 없는 능력이라도 써보려 했다. 그러나 능력이 부족하니 정계에서 은퇴하여 스승과 몇몇 친우들과 학문이나 논할까 한다"라고 한탄하기도 했다.
게다가 위안스카이가 일본의 21개 조 요구를 수락한데다, 이제는 허황된 욕심에 눈이 먼 나머지 공화제마저 폐지하고 황제가 되어서 제위를 그의 방탕하고 무능한 아들에게 물려줄 참이었다. 이것은 그동안 이룩한 모든 것을 무시하고 시계 바늘을 과거로 되돌리겠다는 것이었다. 옆에서 바라보는 량치차오의 울분과 좌절감은 더욱 강해졌다. 그는 위안스카이에게 몇번이나 편지를 써서 대총통을 버리고 황제가 된다면 파국이 될 것이라며 "피눈물을 흘리며 충언한다"고 했지만 도리어 그의 눈밖에 났을 뿐이었다. 량치차오는 주변의 많은 비판을 감수하면서까지 위안스카이를 지지했음에도 결과적으로 지난 2년의 노력은 모두 허사가 되었고 위안스카이와의 관계 또한 완전히 끝장이 났다.
* 량치차오, 위안스카이 토벌의 기치를 올리다
사실 량치차오는 쑨원처럼 완전히 공화제를 주장하면서 군주제를 반대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추구하는 것은 마음대로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봉건 시대의 군주가 아니라, 군주는 있되 통치는 하지 않으며 국민이 뽑은 국회가 국가를 다스리는 민주적인 정치체제였다. 그런데 위안스카이는 약속을 어기고 헌법을 파괴하고 국회를 해산하였다. 이것은 신해혁명 이전의 전제 정치로 되돌리겠다는 의미였다. 량치차오가 꿈꾸던 입헌군주제와는 거리가 멀었다.
자신의 간언에도 불구하고 결국 위안스카이가 황제에 즉위하자 12월 16일 상하이로 갔다. 그와 함께 한 사람이 전 윈난 도독 차이어(蔡鍔)였다. 그의 고향은 후난성으로, 사대부 출신인 캉유웨이나 량치차오와 달리 가난한 농가에서 자랐다. 차이어는 어릴 때부터 학문을 배웠고 마침 창사에 신식학교인 창사 시무학당(長沙時務學堂)이 새로이 설립되자 입학하여 량치차오의 제자가 되었다. 이 때 차이어는 16살, 량치차오는 25살이었다. 무술변법이 서태후의 쿠테타로 실패하고 캉유웨이와 량치차오가 일본으로 망명하자 차이어 또한 뒤따랐다. 그는 일본 육군사관학교 기병과로 입교하여 군인이 되었고 귀국한 후 윈난 육군 제19진 37협의 협통(연대장)이 되었다. 또한 중국동맹회에도 가입하였다.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윈난성의 성도 쿤밍에서 반란을 일으켜 윈난 총독 리칭스(李经羲)를 체포하고 정권을 장악한 후 윈난성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중화민국이 수립된 뒤 윈난 도독에 임명되었다.
부패하고 무능한 청조 시절의 무관들이 여전히 주류였던 당대 중국에서 차이어는 일본에서 신식 교육을 받은데다 보기 드문 역량을 갖춘 뛰어난 군인이자 행정가였다. 그는 휘하의 군대를 철저하게 훈련시켰고 편제와 무기, 장비도 충실하게 갖추어 윈난군은 남방의 여러 군대 중에서도 최강의 전투력을 갖추었다. 또한 중국에서 가장 낙후된 윈난성을 개발하고 성의 재정을 개혁하여 자급자족을 이룩하였다. 다른 성들이 신해혁명 이래 극심한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군벌 출신 도독들이 방만한 운용으로 재정을 낭비하고 있던 것에 비하면 놀라운 성과였다. 덕분에 위안스카이 사후 군벌 내전이 열렸을 때 윈난군은 쓰촨성과 구이저우성의 태반을 장악하고 광시성, 광둥성까지 침공하는 등 중국 서남부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위용을 떨치게 된다.
장시 도독으로 쑨원과 가까웠던 리례쥔이 지방 분권과 무기 구입을 놓고 위안스카이와 갈등을 빚으면서 결국 제2차 혁명이 폭발하였다. 차이어는 리례쥔과도 친분이 있었기에 곤란한 입장에 놓았다. 하지만 그는 중립을 지키다가 결국 위안스카이의 편에 서서 쓰촨성을 공격해 충칭을 점령하였다. 이로서 쑨원의 제2차 혁명은 실패로 끝났다. 차이어는 공화보다 중국의 안정이 더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최대의 걸림돌인 쑨원을 몰락시키고 중앙을 완전히 장악한 위안스카이는 1914년 6월 30일 베이징에 장군부(将军府)라는 조직을 설치하였다. 명목상 대총통 직속의 최고 군사 고문 기관으로, 군사 지식과 경험이 풍부한 전문가들을 모아서 대총통에게 각종 조언과 의견을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에게는 매달 2만 위안에 달하는 거액의 봉급과 장군의 호칭, 작위까지 내렸다. 하지만 진짜 목적은 전국의 군권을 지닌 도독들을 베이징에 가둬놓고 실권 없는 지위와 안락한 생활을 주되 딴 생각을 하지 못하게 감시하겠다는 것이었다. 차이어 역시 윈난도독을 부하인 탕지야요(唐继尧)에게 넘긴 뒤 10월 9일 베이징으로 올라가 "소위장군(昭威将军)"이라는 거창한 칭호를 얻었다.
량치차오는 위안스카이에게 차이어를 총리 대신으로 추천하였다. 하지만 산전수전을 겪은 위안스카이의 눈에도 이 젊은 장군이 쉽사리 길들어질 인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게다가 명망만 있을 뿐 실질적인 실력이라고는 없는 쑨원의 혁명당보다 자신의 무력과 기반을 갖춘 차이어가 훨씬 위험하였다. 차이어는 한직을 맡은 채 위안스카이의 철저한 감시를 받으며 시간만 보내야 했다. 사실상 연금이나 다름없었다.
위안스카이가 제위에 오를 준비를 하자, 량치차오는 차이어에게 위안스카이를 고대 한나라 시절 외척이었다가 찬탈했던 왕망(王莽)에 비교하면서 이를 막기 위해서는 차이어가 윈난성으로 돌아가 군대를 동원하는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 전까지만 해도 군인은 중앙 정치에 결코 관여해서는 안된다고 여겼던 차이어도 량치차오의 설득에 결국 결심하였다. 두 사람은 비밀리에 군사 봉기를 준비하였다. 위안스카이도 수상한 낌새를 깨닫고 차이어의 집을 강제수색하기도 했지만 기민했던 차이어는 사전에 대비를 했기에 아무런 증거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차이어는 하루라도 빨리 베이징을 탈출해야겠다고 결심하고 병을 핑계로 휴가를 청하여 12월 2일 일본으로 떠났다. 그리고 홍콩과 베트남을 거쳐서 12월 19일 자신의 근거지인 윈난성에 들어가는데 성공하였다. 그의 옆에는 前 장시도독 리례쥔도 함께 하였다. 차이어는 리례쥔을 통해 쑨원, 황싱 등 혁명파의 지원을 받을 생각이었다. 량치차오 역시 그 뒤를 따라서 12월 18일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안 위안스카이는 부랴부랴 위난 도독 탕지야오에게 전보를 보내어 그를 체포하라고 지시하고 심지어 암살단까지 보냈지만 오히려 탕지야오는 차이어를 보호하였고 차이어는 무사히 쿤밍에 도착하였다.
12월 21일 밤 차이어와 탕지야오, 리례쥔의 주재로 윈난군의 주요 지휘관 39명이 한 자리에 모여서 군사회의를 개최하였다. 중화민국 4억 민중을 대표하여 군사를 일으켜 위안스카이를 토벌해야 한다는 차이어의 연설에 지휘관들 또한 찬성의 목소리를 높이고 그를 위안스카이 토벌의 총사령관에 추대하였다. 제제를 반대하고 국가 체제를 수호한다는 의미에서 "호국군(護國軍)"이라는 기치를 올린 차이어는 12월 25일 출진하였다. 그가 직접 지휘하는 제1군은 쓰촨성으로 북상하였고, 리례쥔의 제2군은 동진하여 광시성으로 진군하였다. 탕지야오는 윈난성을 지켰다. 총병력은 약 2만명. 이것이 제3차 혁명, 위안스카이를 결정적으로 몰락시키게 된 이른바 "호국전쟁(護國戰爭)"의 시작이었다. 위안스카이가 옥좌에 앉은 지 2주만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