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놈이 나를 망쳤지"
차이어가 처음 윈난성에서 거병했을 때만 해도 누가 보더라도 계란으로 바위치기에 불과했다. 쓰촨성으로 진군하는 호국군은 겨우 3천명에 불과한 반면, 위안스카이의 군대는 쓰촨성에 주둔한 병력만도 2개 사단, 3개 여단 등 약 3만명에 달했다. 숫적으로 10배가 넘었다. 또한 중앙의 군대가 쓰촨성과 후난성으로 신속하게 증원되었다. 호국군은 고립무원이었고 병력에서 압도적으로 열세한데다 식량과 탄약도 부족했다. 위안스카이는 주변 사람들에게 반란은 당장 평정될 것이라며 큰소리쳤다.
하지만 뜻밖에도 구이저우성과 광시성, 광둥성이 차례로 반란에 가세하면서 전세는 다시 예측 불허가 되었다. 사실 한줌 밖에 되지 않는 호국군에다 서남 여러 성의 지방군대가 가세한다고 해서 군사력에서 압도적인 위안스카이가 밀릴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일선 부대들은 공격만 하면 이길 수 있는데도 진군을 멈춘 채 더 이상 싸우려 들지 않았다. 병사들에게 지급할 군비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돈을 받지 못하면 싸울 이유도 없다. 이것이 청말의 대대적인 군제 개혁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의미에서 현대적인 국민 군대로 거듭나지 못한 채, 여전히 봉건 시대의 용병 군대에 머물러 있었던 중국군의 가장 큰 취약점이었다.
바꾸어 말하여 당장 군비를 지급하면 해결될 문제였지만 이미 극심한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었던 위안스카이로서는 해결 방법이 없었다. 광시성이 독립을 선언한 지 닷새만인, 3월 20일 장쑤장군 펑궈장, 장강 순열사 장쉰, 산둥 군무 진윈펑(靳雲鵬), 장시 군무 리쑨(李純), 저장 군무 주루이(朱瑞) 등 다섯 상장이 연명으로 "조속히 제제 선언을 취소해야만 서남의 노여움을 진정시킬 수 있다"며 비밀 전보를 보내왔다. 북양군은 위안스카이가 직접 조직한 군대이며 다섯 상장은 이들을 지휘하는 최고 사령관으로 위안스카이 정권을 무력으로 떠받히는 존재들이다. 반란군에게 가장 강경해야 할 이들조차 싸우는데 반대하고 당장 퇴위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종용할 정도로 위안스카이 정권은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위안스카이도 더는 버틸 수 없었다.
3월 23일, 위안스카이는 "제제 취소령(撤销帝制令)"을 알리는 조서를 발표하였다. 그는 "모든 죄는 자신에게 있다"면서 민심에 따라 제제를 취소하되, 더 이상의 소란은 용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자금성에서 성대한 즉위식을 거행하며 옥좌에 앉은지 83일만이었다. 천하가 시끄러울 때마다 스스로를 꾸짖는 칙서 한장으로 민심을 무마하려는 행태는 역대 황제들이 흔히 써먹어 왔던 방법이기도 했다.
3월 25일, 위안스카이는 차이어와 량치차오, 광시성의 루롱팅 등 서남의 반란 지도자들에게 전보를 보내어 원하는대로 군주제를 철회했으니 더 이상 싸울 이유가 없다며 화해를 제안하였다. 또한 4월 2일에는 참정원에서 최종적으로 국가 체제를 공화제로 원위치시킨다는 내용을 결의 선포하였다. 중화제국은 다시 중화민국으로 바뀌었다. 위안스카이의 "제제 야심"은 끝났다.
비록 보위는 부득이 포기할 수 밖에 없더라도 대총통의 권좌에는 그대로 버티고 앉아 있을 심보였다. 일단 예전 상태로 되돌려 어떻게든 수습한 다음, 훗날 때를 보아 다시 기회를 노리겠다는 것이 위안스카이의 속셈이었다. 하지만 큰 오산이었다. 천하가 한번 진동하자, 그가 뭘 어떻게 하더라도 좀처럼 수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차이어는 위안스카이가 원하는대로 놀아날만큼 결코 어리석지 않았다. 상황이 유리해진 그는 더욱 강경하게 화해의 조건으로 위안스카이를 해외로 추방할 것과 모든 재산의 몰수, 그와 그의 가족들에 대한 공민권 박탈 등을 요구했다. 위안스카이에게 끝까지 싸우거나 완전히 백기를 들던가 양자 택일을 강요한 것이다. 하지만 반란은 점점 중국 전역으로 확대되어 5월 말이 되면 전국 10개 성이 독립을 선언하였다. 5월 9일에는 산시성(陝西省)에서 병변이 일어났다. 산시장군(陝西将軍)으로 위안스카이의 심복 중의 한 사람인 루지안장(陆建章)이 수하인 섬북진수사(陝北鎮守使)인 천수판(陳樹藩)의 쿠테타로 쫓겨난 것이다. 이제는 위안스카이 정권을 떠바치는 북양군조차 분열되는 판이었다. 민심도 등을 돌리면서 각지에서 조세 납부를 거부하고 위안스카이의 사직을 요구하는 투쟁과 시위가 연일 열렸다.
그동안 일본에 체류한 채 차이어의 호국군을 물밑에서 지원하고 있던 쑨원의 중화혁명당도 드디어 기회가 왔다고 여기고 본격적인 행동에 들어갔다. 주청(居正)과 천치메이, 장제스 등이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칭다오를 통해 산둥성으로 잠입하여 혁명군의 조직에 나섰다. 또한 쑨원은 전국의 각 성에 위안스카이 토벌에 동참을 호소하는 격문을 발송하였다.
5월 4일 밤, 주청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이른바 "중화혁명군 동북군"이 거병하였다. 첫번째 목표는 산둥성의 성도 지난과 칭다오 중간에 있는 웨이 현(濰縣)이었다. 이곳은 자오지 철도가 통과하는 요충지로, 장수위안(張樹元)이 지휘하는 북양군 제5사단이 주둔하고 있었다. 혁명군의 숫자는 겨우 1천여명에 불과했고 무기라고는 약간의 권총이 전부인 오합지졸이었지만 북양군의 병영을 향해 과감하게 돌격하자 기습을 당한 북양군 병사들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고 은행과 정부 청사를 마구 약탈한 후 병영과 시가지에 불을 지른 다음 도망쳤다. 북양군의 기강이 얼마나 땅에 떨어졌는지 보여준다.
이와 함께 쑨원과 황싱도 상하이로 돌아왔다. 2차 혁명에서 실패하여 해외로 도망친 지 2년 9개월 만이었다. 5월 25일에는 혁명군이 산둥성의 성도인 지난을 포위하였다. 비록 지난 공략에는 실패했지만 지난을 제외한 산둥성 전역이 혁명군의 손에 들어왔다. 위안스카이는 남쪽에서는 차이어의 호국군, 동쪽에서는 쑨원의 중화혁명군에 의해 완전히 협공을 당하는 판이 되었다. 그동안 위안스카이의 최대 후원자였던 일본조차 그의 정권이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여기고 태도를 바꾸는 판이었다.
5월 17일 위안스카이의 오른팔인 펑궈장이 반란에 아직 가담하지 않은 전국 17성 대표를 난징에 모아서 "새로운 대총통을 선출하되 그동안 현재의 대총통을 '잠시' 인정하자"라고 제안하였다. 펑궈장의 속셈은 일단 급한대로 대총통 선거를 빌미로 시간을 벌어보겠다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각성의 대표들이 입을 모아 위안스카이가 즉각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되려 펑궈장이 궁지에 몰리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이들이 위안스카이의 사임 요구를 결의하기 전에 회의 중단을 선언해야 했다.
5월 22일에는 쓰촨 장군 진환(陳宦)이 독립을 선언하고 호국군에 가담하였다. 보고를 받은 위안스카이는 그 자리에서 졸도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렸지만 위안스카이는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위안스카이 정권에서 육군총장을 지냈던 심복 중의 심복인 진환마저 반란군에 가세했다는 것은 제제 야심은 고사하고 정권 자체가 붕괴되는 것도 시간 문제나 다름없다는 얘기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무리한 욕심을 부린 대가로 평생 이룩한 모든 것을 잃은 셈이었다.
수많은 처첩과 자식을 거느렸고 온갖 부귀영화와 산해진미를 즐기며 강철같은 체력을 자랑하던 위안스카이도 하루 아침에 실의와 분노를 이기지 못한 채 병석에 누워 꼼짝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의 병명은 신장기능 이상에 따른 요독증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서양인 의사를 불러서 수술을 받으라고 권유하였다. 하지만 평소 서구 의술을 불신한데다 이미 자포자기하고 있었던 위안스카이는 아무리 설득해도 듣지 않았고 병세는 급격하게 악화되었다.
6월 6일 오전 10시, 희대의 간웅은 숨을 거두었다. 죽는 순간까지도 분을 이기지 못한 채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그 놈이 날 망쳤지(他害了我)"였다. 다음날 부총통 리위안홍이 위안스카이의 뒤를 이어서 대총통의 자리에 올랐고 중국 전역에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조기가 내걸렸다.
장례식 역시 화려하였다. 비록 살아서는 보위에 오르는데 실패했던 위안스카이였지만 죽어서는 머리에 황제의 관을 쓰고 황제의 옷과 붉은 신을 신은 채 관 속에 들어갔다. 또한 리위안홍을 비롯한 수백여명의 관료들과 장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의 운구를 실은 영구차가 출발할 때에는 100발의 예포가 발사되었다. 궁핍한 재정 여건 속에서 위안스카이의 장례 비용으로 쓴 돈은 50만 위안에 달했다. 이 돈은 여러 정부 부처의 금고에서 각출되었다.
그의 시신은 허난 성의 안양시 위안허(洹河) 기슭에 안장되었다. 장남 위안커딩이 아버지를 여기에 묻으면서 처음에는 황제의 무덤을 뜻하는 "위안링(袁陵)"이라고 이름을 붙이려고 했으나 여론을 자극할 수 있다는 돤치루이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쳐 결국 "위안링(袁林)"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150무(약 3만평)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와 화려함은 황제 못지 않을 정도였다. 게다가 하도 견고하게 만든 덕분에 문혁 시절 홍위병들이 폭약으로 날려버리려고 했음에도 결국 실패했다.
위안스카이는 생전에 이곳이 앞으로 자손들이 번창할 명당자리라고 여기고 비싼 돈을 주고 사들였다고 한다. 하지만 위안커딩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막대한 재산을 흥청망청 모두 날려버렸고 궁핍하게 살다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베이징의 중앙문사관(中央文史馆, 문학연구관)의 사서를 맡아 간신히 생계를 꾸리는 신세가 되었다. 다른 자손들 역시 다를 바 없어 대부분 범용한 인생을 보냈고 민국 시절 이래 오늘날까지도 고관대작이 되거나 중국의 정재계에서 크게 성공하여 명성을 떨친 사람이 없다는 점에서 풍수지리학을 철썩같이 믿었던 위안스카이의 기대는 완전히 빗나간 셈이다.
* 군웅들이 할거하다
위안스카이의 죽음으로 잠시나마 평화가 왔다. 윈난성을 비롯해 그동안 독립을 선언했던 여러 성이 독립을 취소하고 내전 중지에 합의한 것이다. 이들 또한 군비 부족과 병참난으로 더 이상 싸울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총통 리위안홍은 북양군의 양대 수장인 펑궈장을 부총통으로, 돤치루이를 국무총리로 임명하였다. 非북양계의 리위안홍과 북양계 장군들이 손을 잡은 군벌연합정권의 탄생이었다. 쑨원 역시 리위안홍 정권의 수립을 지지하면서, 구 약법의 회복과 국회의 재건을 촉구하였다. 8월 1일 베이징에서 국회가 열렸다. 위안스카이의 총칼에 의해 해산당한 지 2년 만이었다.
리위안홍이 대총통이 된 것은 정치적 타협의 결과였다. 만약 돤치루이나 펑궈장, 쉬스창 등 북양파 인물이 위안스카이의 뒤를 이었다면 남방이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다고 쑨원이나 차이어가 그 자리에 앉았다면 북방이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남는 사람은 어느 쪽에도 해당되지 않는 리위안홍 밖에 없었다.
원래 리위안홍은 청조의 일개 무관에 불과했던 평범한 자였다. 우연히 그가 근무하고 있던 우창에서 신군의 반청 봉기가 일어났고 총책임자인 호광총독 루이청이 가장 먼저 도망친 덕분에 봉기는 하루 밤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진압군의 지휘관이었던 그 역시 진압에도 실패한데다 몸을 피하여 숨어 있다가 반란군 병사들이 "지휘관이 없다"는 이유로 그를 억지로 끌어낸 다음 강제로 혁명군의 수장으로 추대하였다. 실로 어이없는 일이지만 그만큼 봉기가 엉성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고 그런 엉성한 반란이 손쉽게 성공할 수 있었던 것에는 리위안홍의 우유부단함과 무능함도 한 몫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사건만 아니었다면 그저 그런 관료로 일생을 마쳤을 그가 신해혁명 덕분에 혜성처럼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는 점에서 어떤 의미에서는 신해혁명 최대의 수혜자인 셈이다. 이유가 어떻든 위안스카이나 쑨원도 그를 무시할 수 없었기에 위안스카이가 대총통이 되자 리위안홍은 부총통이 되었고 나중에는 중화민국의 대총통을 두번이나 역임하게 된다. 하지만 실권은 전혀 없어 주변 사람들은 "보살"이라고 비꼬았다. 법당에 모셔진 불상처럼 허수아비나 다름없다는 뜻이다.
리위안홍에게는 휘하에 무력도 없고 정치적 역량도, 리더쉽도 없었다. 스스로의 실력이 아닌 주변의 추대로 대총통의 자리에 오른 그가 무슨 수로 북양군의 야심만만한 장군들과 전국의 군벌들을 억누를 것이며, 위안스카이도 해내지 못한 중국의 혼란을 종식시킬 수 있을 것인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위안스카이의 죽음은 중국에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그것은 안정이 아니라 더 큰 혼란이었다. 중앙에서는 위안스카이가 남긴 북양군이 펑궈장의 즈리파와 돤치루이의 안후이파로 분열되었다. 이들은 제각기 세력을 규합하면서 주도권 싸움을 벌였다. 또한 위안스카이가 죽은 지 얼마되지 않은 10월 31일, 상하이에서 혁명파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인 황싱이 죽었다. 남방의 혁명 세력을 결속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그는 피로를 이기지 못한 채 위출혈로 급사하였다. 11월 8일에는 호국군의 지도자였던 차이어가 결핵으로 죽었다. 그는 치료를 위해 급히 일본까지 갔지만 어차피 당시로서는 고칠 수 없는 병이었다.
황싱은 43살, 차이어는 35살. 한창의 나이였던 두 사람의 죽음으로 호국전쟁도 흐지부지되었고 북양 군벌 정권의 타도를 외치던 남방 또한 분열되어 광시성의 루롱팅, 윈난성의 탕지야요, 쓰촨성의 류원후이, 광둥성의 천충밍 등 여러 군벌들이 난립하여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었다. 황싱과 차이어의 죽음은 쑨원에게도 큰 타격이었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측근들과 함께 상하이를 떠나서 베이징에서 1,900km나 떨어져 있는 중국 최남단의 광저우로 내려가기로 결심하였다.
베이징 정부의 해군총장 청비꽝(程璧光)도 북양 정권과의 결별을 선언하고 해군 제1함대(순양함 3척, 포함 6척, 보조함 4척)를 이끌고 쑨원과 함께 하기로 하였다. 당시 중국 해군은 제1함대와 제2함대, 그리고 연습함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해군 제1함대는 중국의 외양을 맡은 함대로 대형함으로 구성된 반면, 제2함대는 창장의 경비함대로 1천톤급 미만의 소형 포함과 경비정이 전부였다. 따라서 제1함대의 반란은 중국 해군 전체가 쑨원에게 넘어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쑨원은 자신의 오랜 정치적 근거지인 이곳에서 독자적인 정부를 수립하고 서남군벌을 규합하여 혁명군을 조직한 다음, 자신이 대원수가 되어 중앙을 토벌하겠다는 생각이었다. 반면, 량치차오는 쑨원과 결별하고 베이징으로 올라가 돤치루이 내각에서 재정총장을 맡았다. 그는 돤치루이와 오랜 친분이 있었다. 또한 스스로 중립을 지키며 남북 화의를 중재하여 더 이상의 내전을 막아보겠다는 바램이었다.
중앙은 분열되고 각지의 실력자들은 할거하면서 군벌화되었다. 지위만 높을 뿐 실력이 없는 자는 쫓겨났고 동북3성의 장쭤린, 광시성의 루롱팅, 윈난성의 탕지야요, 산시성의 옌시산과 같은 젊고 야심 만만한 자들이 자신의 역량을 기반으로 권력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청말의 실력자들 역시 건재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창장순열사 장쉰이었다. 보수적이고 완고한 성격이었던 그는 신해혁명 당시에는 비록 대세에 굴복할 수 밖에 없었지만 여전히 신해혁명과 청조의 멸망을 부정하였다. 장쉰은 3만명의 "변자군(辫子軍, 변발군대)"을 이끌고 쉬저우에 주둔한 채 중앙의 혼란상을 지켜보며 청조의 부활을 꿈꾸고 있었다. 바야흐로 군웅 할거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 위안스카이는 왜 실패했는가
『인생의 전성기에 위안스카이가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동시에 그의 야망이 아주 이기적이었고 간교하며 믿음을 배반하는 자였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 - 레지널드 존스턴(Reginald Johnston)의
《Twilight in the Forbidden City》중에서
당대는 물론 오늘날까지도 중국인들에게 위안스카이는 나라를 훔치려고 했다는 "大盜"라 불리며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지만, 말년의 "제제 사건"만 제외한다면 결코 과소평가될 인물은 아니다. 그는 삼국지의 동탁같은 잔혹한 폭군이 아니라 오히려 여러 면에서 조조에 비견될 만한 영걸이었다. 조조와 마찬가지로 부잣집 귀공자로 태어나 방종한 청년이었던던 그는 과거 시험에 낙방한 뒤 집안의 뒷배경과 뇌물로 관직을 얻었다. 하지만 조정의 관료가 되자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여 당대의 실권자였던 리훙장과 서태후의 눈에 들게 되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기회로 조선을 장악하여 그동안 땅에 떨어졌던 청나라의 국위를 어느 정도 회복케 했다. 광서제와 서태후가 권력 투쟁을 벌였던 무술 정변의 승패를 결정적으로 좌우했던 사람은 다름아닌 위안스카이였다. 또한 의화단의 난 이후 조정으로부터 새로운 신식 군대의 조직을 맡자 누구보다도 훌륭하게 해내었다.
독일과 일본 육군을 모델로 한 위안스카이의 신건육군은 모든 면에서 청일전쟁 이전에 리훙장이 만들었던 회군이나 다른 군대와는 감히 비할 바가 아니었다. 청조는 그의 군대를 본받아 전국에 신군(新軍)을 창설하였지만 여전히 가장 강력한 군대는 위안스카이 직속의 "북양 6진"이었다. 신해혁명 당시 벌어진 우한 삼진의 공방전에서 혁명군은 북양군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패주하여 한커우와 한양 두 곳을 단숨에 빼앗겼고 우창 함락도 시간문제였다.
하지만 신해혁명은 우한만이 아니라 전국의 모든 성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만약 위안스카이가 "청조의 마지막 충신"을 자처하거나, 또는 푸이를 대신하여 스스로 옥좌에 올라서 중국 최강인 북양군을 이끌고 끝까지 싸우겠다고 고집을 부렸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전란은 중국 전역으로 확대되었을 것이며 그 파괴력은 태평천국의 난을 능가했을지도 모른다. 비록 개인적 야욕이 있었다고는 하나, 쑨원의 타협안을 수락하고 껍데기만 남은 구 체제를 무너뜨리는데 합의함으로서 신해혁명은 큰 희생 없이 끝났다. 또한 진시황이 처음으로 "황제"를 쓴 이래 2천년만에 중국은 황제 시대를 끝내고 "서구식 공화제"라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덕분에 위안스카이는 중국의 조지 워싱턴이라고 불리었다.
위안스카이는 겉으로는 온화하고 본심을 남에게 드러내지 않았으며 처세술과 권모술수가 매우 뛰어났다. 약 30년에 걸쳐 조정에서 다양한 직책을 경험했던 그는 "동양의 비스마르크"라 불리었던 위대한 정치가 리훙장이 죽은 뒤 금새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것만 보더라도 그의 정치적 수완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청조의 황실 귀족과 수많은 한족 관료들에서 위안스카이에 비견될 만한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망명파 지도자들 역시 다를 바 없었다. 쑨원이나 황싱, 쑹자오런, 량치차오조차도 정치 경력이나 리더쉽, 카리스마, 명성, 실력 등 어떤 면에서도 위안스카이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중화민국의 초대 대총통이 된 위안스카이는 구 체제의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은데다 수중에는 막강한 무력도 있었다. 또한 중국의 안정을 원하는 열강들과 국내 여론은 그의 정권을 지지하였다. 왜냐하면 오직 무력만이 중앙 정부의 권위를 지탱하는 유일한 수단이라는 당시 중국의 현실에서 어차피 위안스카이를 제외하고는 그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쑨원이 스스로 대총통의 자리를 위안스카이에게 양보했던 것도 여기에 있었다.
위안스카이의 초기 치세 2년은 중화민국이 건국된 1912년부터 마오쩌둥이 중국을 통일하는 1949년까지 약 40년을 통틀어 중국이 그나마 안정을 누렸던 유일한 기간이기도 했다. 그는 청말에 추진되거나 추진 예정이었던 개혁 정책을 그대로 존속시켰다. 그는 서구와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들의 이익을 보호하여 더 많은 투자를 하도록 유도하였다. 1914년 말을 기준으로 외국의 대중국 투자액은 약 16억 달러에 달했다. 또한 모든 남성에 대한 무상 의무 교육 실시, 현대적인 사법제도의 도입, 여성의 전족 금지와 재가의 허용 등 중국의 봉건 사회 전반에 대한 변화가 추진되었다. 특히 지난 100여년 동안 중국 사회의 가장 큰 병폐였던 아편 재배는 엄중히 금지되어(지방정부와 농민들의 주수입원이기도 했다) 많은 아편밭이 불태워졌고 아편상들은 체포되거나 외국 조계로 도망쳤다.
쑨원이 뒤늦게 위안스카이의 독재에 반발하여 "2차 혁명"을 일으켰지만 어차피 위안스카이와 쑨원의 권력 투쟁에 불과했기에 실력에서도 열세하고 명분에서도 빈약했던 쑨원의 편을 드는 세력은 거의 없었다. 따라서 그는 위안스카이에게 완패한 채 비참한 꼴이 되어 일본으로 도망쳐야 했다. 쑨원을 몰락시키고 국회를 해산시켰으며 종신 대총통이 되었을 때만 해도 위안스카이의 지위는 확고했다. 그의 위세는 이미 황제와 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위안스카이는 왜 실패했는가. 그를 몰락시킨 직접적인 단초는 분명 무리한 군주제의 부활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민심은 이반하였다. 차이어가 윈난성에서 거병했을 때에도 명분은 "호국" 즉, 군주제를 반대하고 공화제라는 국가 체제를 지키자는 것이었다. 차이어의 반란에 중국 전역이 동조하자 위안스카이는 꿈에도 그리던 보위에 고작 삼개월도 채 앉아보지 못한 채 결국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단순히 군주제의 부활이 위안스카이 타도로 이어졌는가. 만약 오늘날 중국 지도자인 시진핑이나 누군가가 황제가 되려한다면 그야말로 시대착오적이며 그 자체로 격렬한 저항에 부딪칠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20세기 초반만 해도 오히려 보편적인 정치체제는 군주제였다. 영국과 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 오스만 제국을 비롯해 세르비아, 그리스, 스페인, 네덜란드, 벨기에 등 많은 나라에서 군주제가 유지되고 있었다. 또한 많은 나라에서 입헌군주제를 표방했지만, 실제로 제대로 된 의회 정치를 하는 나라는 영국 정도였다. 나머지는 여전히 봉건적인 전제 군주가 권력을 전횡하고 있었다.
왕이 없는 나라는 미국과 프랑스 정도였다. 하지만 프랑스조차 1789년의 대혁명 이래 1871년 보불전쟁으로 나폴레옹 3세가 무너지고 제3공화국이 들어설 때까지 80년 동안 여러 차례의 왕정 복고와 온갖 정치적 부침을 겪어야 했다. 량치차오는 프랑스 혁명사를 보고 "프랑스도 이럴진대 하물며 어떻게 중국에서 공화제를 할 수 있다는 말인가!"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따라서 이 때에는 시대착오적이기는 커녕, 오히려 군주제가 정상이고 공화제가 비정상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심지어 대표적인 공화주의자였던 쑨원조차 공화주의에 대한 아무런 이해도 없는 중국의 낙후된 현실에서 어떻게 공화제를 실시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저 "중국 민중을 가르쳐 공화제를 할 여건을 만들어 나간다"라는 추상적인 원칙만 내세웠을 뿐이었다. 이것이 이른바 그가 말하는 군정-훈정-헌정으로 이어지는 "정치 발전 3단계론"이다.
호국전쟁을 주도했던 차이어와 량치차오는 쑨원과는 달리, 오히려 공화제를 반대하고 군주제를 지지했던 인물들이었다. 위안스카이와 쑨원이 대립했을 때에도 이들은 위안스카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나섰다. 그럼에도 그들이 어째서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쑨원과 손을 잡았으며 중국 전역이 동란에 빠졌던가. 또한 위안스카이는 군주제 부활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지 과연 몰랐던 것인가.
위안스카이가 몰락한 근본적인 이유는 군주제의 부활이냐, 공화제의 수호냐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바로 중국이 처해 있던 대내외적인 위기를 극복할 역량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청조로부터 완전히 파산한 중국을 물려받았다. 청말의 재정적인 위기는 총체적이었다. 의화단의 난과 신축 조약으로 인한 전쟁 배상금 4억 5천만냥을 비롯해 신군의 조직에 따른 군사비 지출의 증대, 근대화에 필요한 자금 등. 신해혁명이 일어난 1911년만 해도 세수는 2억 6천만냥인데 세출은 2억 9천만냥으로 3천만냥 이상의 적자를 내고 있었다. 청조는 해외에서 차관을 끝없이 도입하고 국채를 남발했으며 증세를 통해 새로운 세수를 마련해야 했다. 또한 이로 인해 외세에 대한 예속 관계는 더욱 심화되어 사실상 반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청조가 멸망했을 때 위안스카이가 승계한 채무는 총 9억냥에 달했다. 그렇다고 뒷날 마오쩌둥 정권이 그러했던 것처럼 모든 부채를 인정하지 않고 아예 구미 열강과의 관계를 끊는 쪽을 택했다면 강력한 보복에 직면했을 것이 틀림없다. 의화단의 난 당시 8개국 연합군의 침공을 직접 경험했던 그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또한 신해혁명 이후 불안정한 중국의 정세 때문에 군비의 지출은 더욱 늘어났다. 1913년부터 1915년까지 위안스카이 정권의 재정 지출 중 3/4는 군비와 외채 상환이었다.
청조로부터 텅빈 국고를 물려받은 그는 심각한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재정 세수를 개혁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자신들의 기득권을 침해받지 않으려는 지방 정부들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면서 완전히 실패로 끝났다. 청조가 건재하던 19세기 초만 해도 모든 재정 세수권과 군사력은 중앙이 쥐고 있었다. 그런데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할 역량이 없었던 청조는 지방에 재정 세수권을 나눠주고 스스로 세금을 거두어 군대를 조직케 하였다. 덕분에 태평천국의 난은 진압할 수 있었지만 청조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지방의 실력자들은 사병을 길러 중앙을 얕보게 되었다. 중앙이 지방에 대해 권위를 세울 수 있는 힘은 오직 재정과 군사 두가지에 있음에도 청조는 그 힘을 스스로 포기한 것이다. 청조가 몰락하게 가장 큰 이유 또한 다름아닌 여기에 있다.
위안스카이는 나름대로 개혁을 추구했지만 그의 개혁이란 부분적이고 지엽적일 뿐, 중국 사회가 안고 있던 근본적인 모순과 부조리함을 해소하지도 못했고 외세의 침략이라는 대외적 위기를 극복하지도 못했다. 그는 부도 직전의 재정 위기를 해외에서 더 많은 차관을 빌리고 국채를 발행하는 것으로 해결하려 했다. 하지만 그가 쑨원과 갈등을 벌이게 된 직접적인 이유였던 "선후차관 사건"만 해도 4개국으로부터 2500만 파운드에 달하는 거액을 빌렸지만 대부분 청조가 남긴 외채를 상환하는데 쓰였고 재정의 건실화나 근대화에 쓸 수 있는 돈은 거의 없었다. 따라서 해외에서 돈을 빌리면 빌릴수록 재정 문제를 해소하기는 커녕 갚아야 할 외채만 더욱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식이었다.
재정의 상당부분을 차관에 의존하던 위안스카이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더 이상 구미열강들로부터 돈을 빌릴 수 없었다. 구미 열강들은 자신들의 군비를 마련하는데도 급급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가 손을 빌릴 수 있는 상대는 중립을 지키던 미국과 일본 밖에 없었는데 미국이 차관 제공을 거절하자 결국 남은 나라는 일본 밖에 없었다.
이전부터 아시아의 패권과 중국 침략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일본은 차관을 무기 삼아 가혹한 조건을 내걸었다. 대표적인 예가 산둥성 출병과 21개조 요구이다. 위안스카이는 이를 막을 능력이 없었다. 일본에게 돈을 빌리지 못하면 당장 파산할 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집권 4년 동안 빌린 외채만도 5억5천 만냥에 달했으며 그 중의 70%가 일본 자금이었다. 비록 그가 외세와 결탁하여 주권을 팔아넘긴 매국노로서 온갖 비난을 받았지만, 냉철하게 본다면 일정 부분은 불가피한 면도 있었다.
하지만 이유가 어떻든, 청조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청조가 파멸하는 모습을 지켜보았음에도 그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지 간과한 채 위안스카이는 청조의 행태를 답습하여 스스로 무능함을 증명한 꼴이 되었다. 결국 그의 정권은 새로운 시대를 열지 못한 채 청조의 연장선에 불과했다. 게다가 자신의 역량으로는 도무지 위기를 극복할 수 없었던 그는 개혁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대신 오히려 보수 반동화되고 권모술수에만 매달려 쑹자오런을 비롯한 반대파를 암살하거나 탄압하었다. 이는 악순환의 결과를 초래했다. 군주제의 부활은 점점 땅에 떨어져가는 자신의 권위를 만회하기 위한 마지막 발버둥이었지만, 옥좌에 앉기 위해 일본에 각종 이권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빌린 돈으로 흥청망청 낭비하는 모습은 정치적 자살행위일 뿐이었다. 국난을 극복하기는 커녕, 되려 시계 바늘을 거꾸로 되돌리는 그의 행태에 민심이 어떻게 등을 돌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말년의 위안스카이는 터키의 위대한 "국부" 무스타파 케말(Mustafa Kemal)과 비교된다. 당시 터키는 1차대전의 패배로 오스만 제국이 멸망하면서 제국이 완전히 해체된데다 그리스의 침략으로 전례없는 국난의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갈리폴리 전투의 영웅 무스타파 케말은 강력한 리더쉽을 발휘하여 흩어진 군대를 모았고 침략군을 격파하였다. 이후 권력을 장악하고 터키의 종신 대통령이 된 그는 터키 국회로부터 "아타튀르크(Ataturk, 터키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 케말이 성공적인 정치가로서 지금까지도 터키인들의 절대적인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이유는 그의 개혁 정책과 절제된 삶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국가를 위기에서 구해냈기 때문이었다. 눈앞의 국난을 헤쳐나갈 역량이 없는 리더는 배척당할 수 밖에 없다.
케말과 달리 위안스카이는 군사적 명성이 아니라 정치적 타협을 통해 그 자리에 앉았다. 따라서 자신의 실력을 스스로 증명해 보여야 했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그에게는 그럴 권위도 역량도 없었다. 북양군조차 충성심은 제한적이었으며 봉급을 지불받지 못하자 당장 반란을 일으키기 일쑤였다. 따라서 제제 사건과 차이어의 봉기는 그를 몰락시킨 결정타일 뿐, 설령 황제가 되려고 하지 않았다고 해도 국가 지도자로서 대내외적인 위기를 극복할 역량이 없는 이상 결국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나마 가장 나은 축에 속했던 위안스카이조차 이럴진대, 누가 그보다 더 잘할 수 있었을까. 답은 "없다"는 것이다. 당시 중국의 가장 큰 불행은 바로 여기에 있다.
'전쟁군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 전쟁과 인물, 사건으로 보는 중국 현대사 > 14화 - 변발 장군 자금성을 점령하다/blog.naver.com/atena (0) | 2017.12.02 |
|---|---|
| < 전쟁과 인물, 사건으로 보는 중국 현대사 > 13화 - 북양정권의 분열/blog.naver.com/atena (0) | 2017.12.02 |
| < 전쟁과 인물, 사건으로 보는 중국 현대사 > 11화 - 간웅 죽다/blog.naver.com/atena (0) | 2017.12.02 |
| < 전쟁과 인물, 사건으로 보는 중국 현대사 > 10화 - 토원전쟁의 시작/blog.naver.com/atena (0) | 2017.12.02 |
| 전쟁과 인물, 사건으로 보는 중국 현대사 > 9화 - 중화 제국의 등장/blog.naver.com/atena (0) | 2017.12.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