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쉰, 청조 최후의 충신을 자처하다
신해혁명으로 중국 역사에서 2천여년 동안 이어져 온 황제의 통치 시대는 끝났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여 황제는 여전히 중국에 존재하고 있었다. 명나라 영락제 이래 오백여년이 넘도록 중국의 황궁이었던 자금성에는 마지막 황제 푸이가 건재했기 때문이었다. 신해혁명이 일어났을 때 겨우 여섯살에 불과했던 그는 중화민국이 탄생한 이후에도 옥좌에 앉은 채 중화민국 정부로부터 대청 황제에 걸맞는 지위와 존엄을 누렸다. 그가 진짜로 옥좌에서 쫓겨난 것은 신해혁명이 일어난 지 13년이나 지난 뒤였다.
그렇다면 중화민국 역시 일본이나 영국처럼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입헌 군주제 국가로도 볼 수 있지 않느냐는 질문이 생길 것이다. 하지만 일본 천황이나 영국 여왕과 달리 푸이는 중국을 대표하는 국가 원수가 아니었다. 중화민국 정부가 청 황실과 맺은 우대조건에 따르면 푸이는 어디까지나 "외국의 국가 원수에 준하는" 대우를 받을 뿐이었다. 즉, 푸이는 중국의 황제가 아니라 자금성의 황제였다.
자금성 안에서는 푸이를 따르는 수백여명의 만주족 귀족과 환관, 시종, 자금성을 경비하는 금군이 있었고 자금성을 둘러싼 성벽을 경계로 바깥은 온갖 정변과 혼란의 연속이었지만 그 안은 신해혁명 이전에서 시간이 멈춘 채 백여 년전과 다를 바 없었다. 20세기 판 천자가 되려고 했던 위안스카이의 "제제쇼" 역시 푸이와는 상관이 없었다. 삼국지에서 제위의 선양을 받기 위해 한 헌제를 핍박했던 조비와 달리 위안스카이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푸이에게는 통치권도, 정통성도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중국인들에게 청 황실과 푸이는 이미 잊혀진 껍데기에 불과했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왕조가 교체될 때에는 항상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끝까지 "충신"을 자처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사람이 안후이 독군 겸 창장 순열사(长江巡阅使) 이자 "정무상장군(定武上将军)" 장쉰(張勳)이었다.
장시성 펑신현(奉新县)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면서 반란군에게 많은 고초를 겪어야 했고 부모를 일찍 여의고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는 등 매우 불우하게 보내야 했다. 1884년 베트남의 지배권을 놓고 청나라와 프랑스 사이에서 전쟁이 일어났다. 그는 군대에 자원하여 큰 공을 세웠고 무관이 되어 출세의 기회를 잡게 되었다. 또한 청일전쟁으로 일본군이 압록강을 건너 만주를 침공하자 장쉰은 청군의 정예부대 중 하나였던 쑹칭(宋慶)의 의군(毅軍)에 속하여 기병부대를 지휘하였다. 그는 일본군에 대한 반격을 계획했지만 그 전에 청조가 굴복함으로서 실현되지 못했다.
청일전쟁이 끝난 뒤 청조는 와해된 군사력의 재건을 위해 새로운 군대를 창설하였다. 이것이 위안스카이의 정무군, 훗날 북양군의 전신이 되는 군대였다. 장쉰은 위안스카이의 휘하에 들어가 공병대대의 대대장을 맡았다. 의화단의 난이 일어나자 위안스카이는 산둥순무에 임명되어 산둥성의 의화단을 진압하러 출동하였다. 장쉰은 그 선봉부대를 맡았고 의화단을 철저하게 진압하였다. 여러 차례 공을 세운 그는 청조의 극진한 총애를 받았고 금위군의 지휘와 쓰촨총병, 강남제독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게다가 1904년에는 만주의 토비들을 평정한 공으로 광서제로부터 "파투룽아 바투르"라는 칭호를 하사받았다. 바투르(Battur)란 만주어로 "위대한 전사"라는 뜻으로 한족인 그가 만주족 황실로부터 최고의 신임을 받은 셈이다. 서태후가 죽은 뒤 만주족들에게 완전히 배척당하여 목숨까지 위협받았던 위안스카이와 달리, 장쉰에 대한 황실의 신임은 청조가 끝나는 순간까지도 변함이 없었고 장쉰의 청조에 대한 충성심 역시 마찬가지였다.
장쉰의 군대는 신식군대임에도 만주족 특유의 변발을 여전히 남겨두고 있었다. 머리를 기다랗게 땋은 변발은 서구식 군모를 쓸 때 거추장스러웠기에 다른 신군 부대의 병사들은 "돼지꼬리"라고 부르면서 스스로 잘라버렸다. 하지만 장쉰은 변발이 청조에 대한 충성심을 상징한다고 여기고 부하들이 변발을 자르지 못하도록 엄중하게 지시하였다. 사람들은 그의 군대를 변발한 아이들의 군대, "변자군(辮子軍)"이라고 불렀다. 보황파의 수장이었던 캉유웨이조차 무술변법이 실패한 후 해외로 망명했을 때 변발을 자랐다는 점에서 장쉰의 우직함과 충성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보여준다.
우창봉기 직전인 1911년 7월 장쉰은 창장 순열사 겸 강남 제독에 임명되어 3천여명의 군대와 함께 난징에 주둔하였다. 우창봉기를 시작으로 신해혁명이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난징에서도 쑤사오전(徐绍桢)이 지휘하는 신군 제9사단이 반란을 일으켜 난징성을 공격하였다. 대부분의 청조 관료들은 지레 겁을 먹고 모두 도망쳤지만 장쉰은 즉각 반격에 나서서 난징 교외 위화타이(雨花臺)에서 숫적으로 우세한 반란군을 단숨에 격파하였다. 하지만 천지메이가 장쑤성과 저장성의 혁명군을 규합하여 난징을 공격하자 중과부적에 몰린 장쉰은 난징을 버리고 쉬저우로 후퇴해야 했다.
아직 반란이 일어나지 않은 산둥성의 군대를 모은 그는 6천명의 보병과 300여명의 기병을 이끌고 12월 26일 다시 양쯔강을 건너서 난징을 향해 진격하였다. 장쉰은 혁명군의 손에 들어간 난징 이북의 여러 도시들을 탈환하고 리지썬(李濟深)이 지휘하는 혁명군과 대치하였다. 장쉰과 리지썬의 군대가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동안 위안스카이와 쑨원 사이에서 남북 화의가 성사되고 청조가 통치권을 포기하는데 동의하면서 모든 전선에 전투 중지 명령이 내렸다. 장쉰은 쉬저우에 주둔하면서 산둥성의 군사권을 장악하였고 휘하의 군대는 무위전군(武衛前軍)이라고 명명되었다. 무위전군이란 황제의 근위부대로서 외적에 맞서 국방의 최일선을 맡은 부대라는 뜻이다.
장쉰은 위안스카이의 오랜 측근이자 돤치루이, 펑궈장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북양군의 원로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이들과 달리, 위안스카이에게 개인적인 충성을 맹세하기를 거부하고 끝까지 황제의 신하로 남는 쪽을 선택하였다. 대총통이 된 위안스카이에게 "천자에 대한 신하로서의 의무를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고 경고하였고 위안스카이 역시 3만명에 달하는 만만찮은 군사력을 가지고 있던 장쉰을 함부로 대할 수 없었기에 육군 상장(대장)과 장쑤 도독에 임명하는 등 어떻게든 자신의 휘하에 끌어들이려고 온갖 정성을 다했지만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중화민국이 수립된 뒤 푸이는 자금성의 천자로 전락했지만 장쉰은 베이징에 올라올 때마다 청조 시절의 관복과 관모를 챙겼고 자금성에 들어가 푸이를 알현하고 충성을 맹세하였다.
쑨원이 위안스카이와 결별하고 제2차 혁명을 일으키자 장쉰은 펑궈장과 함께 쉬저우에서 남하하여 황싱이 지휘하는 혁명군을 격파하고 난징을 점령하여 쑨원과 황싱을 중국 밖으로 쫓아냈다. 위안스카이가 황제가 되자 장쉰에게도 공작의 작위가 내려졌다. 하지만 장쉰은 작위의 수여를 거부하고 오히려 청조의 복위를 주장하여 위안스카이와 대립하기도 했다. 황제에 대한 그의 헌신과 경외감은 그야말로 신앙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냉철하게 평가한다면 구식 스타일에 시대착오적인 수구 관료였고 청조가 왜 민심을 잃고 몰락했는지에 대해서는 조금의 고민도 없이 어린 황제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받쳤을 뿐이다. 하지만 나태하고 무능하면서 황실의 재산을 어떻게 하면 빼돌릴까만 궁리하던 만주족 황족 귀족들의 썩어빠진 행태에 비하면 그의 지조와 기개만큼은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겠다.
* 장쉰의 쿠테타
위안스카이 생전에 리위안홍은 명색이 부총통이면서도 위안스카이와 북양군의 위세에 눌려서 사실상 연금당한 신세나 다름없었다. 위안스카이가 죽고 드디어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른 그는 그동안의 인내를 버리고 의욕적으로 자신의 권한을 행사하려 했다. 하지만 국무총리이자 북양군의 실세였던 돤치루이는 리위안홍에게 복종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갈수록 심화되던 두 사람의 알력 싸움은 결국 제1차 세계대전의 참전과 대독 단교를 놓고 폭발하였고 리위안홍은 명령불복종으로 돤치루이를 해임시켰다. 돤치루이도 사직서를 던지고 톈진으로 가버렸다.
돤치루이는 허수아비 주제에 고분고분하지 않은 리위안홍을 혼내 줄 생각으로 북양파 독군들을 움직여 대총통에 대한 불복종 운동은 물론이고, 심지어 군대를 동원하여 베이징으로 진격할 태세까지 갖추었다. 이에 놀란 리위안홍이 급히 찾은 사람은 다름아닌 청조의 유신을 자처하는 장쉰이었다. 북양파의 원로이기도 한 그에게 베이징으로 올라와서 자신과 돤치루이의 갈등을 중재해 달라는 것이었다. 리위안홍의 속셈은 장쉰을 불러서 돤치루이의 횡포를 견제하겠다는 "구호탄랑(驅虎呑狼, 호랑이와 이리가 서로 싸우게 한다는 계책)"의 책략이었다.
6월 7일 쉬저우에서 변자군과 군수품이 가득 실린 특별열차가 출발하여 북쪽으로 향했다. 출동병력은 10개 대대 5천여명. 보병과 포병, 기병으로 구성된 막강한 혼성 부대였다. 단순히 중재 역할을 한다기에는 일전을 각오한듯한 진용이었다. 다음날 열차가 톈진에 도착하자말자 장쉰은 돤치루이와 북양파 독군들이 보낸 대표들과 만나서 비밀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들은 리위안홍의 중재 요청을 받아들이는 척하면서 베이징에 도착하면 쿠테타를 일으켜 그를 대총통에서 쫓아내고 펑궈장을 신임 대총통으로, 돤치루이를 국무총리로 하는 새로운 정권을 세우기로 합의하였다.
하지만 장쉰의 진짜 목적은 이번 기회를 이용하여 청조를 부활시키는데 있었다. 그는 자신이 리위안홍을 끌어내리는 조건으로 돤치루이와 다른 북양군 수장들에게 "복벽(復辟)", 즉 푸이의 복위에 찬성할 것을 요구하였다. 실질적인 통치권은 대총통과 국무총리가 가지고 있되, 푸이를 일본의 천황처럼 중국의 상징적인 국가원수로 하여 입헌군주제를 하자는 것이었다. 위안스카이의 제제 부활이 중국 전체의 격렬한 반발에 부딪쳐 결국 무산되었던 것을 장쉰 스스로도 뻔히 지켜보았다는 점에서 그의 사고는 그야말로 현실 감각이 결여되었다고 밖에 할 수 없었다. 돤치루이는 장쉰의 요구를 불쾌하게 여기면서도 자신의 심복인 쉬수정(徐樹錚)이 일단 장쉰이 하자는대로 놔두자고 건의하자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물론 그들 역시 나름의 꿍꿍이가 있었던 것이다.
리위안홍은 장쉰이 톈진에 체류한 채 베이징으로 들어오지 않자 사람을 보내어 독촉하였다. 하지만 장쉰의 대답은 "중재의 조건으로 우선 삼일 안에 국회를 해산시켜라"는 협박이었다. 그의 말은 중화민국을 문닫으라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또한 베이징 교외로 진출한 변자군 선봉부대가 베이징의 주요 성문과 요충지를 신속하게 장악하고 대총통부를 공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그제야 리위안홍은 호랑이와 늑대를 싸움 붙여서 어부지리를 얻겠다는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달았다. 장쉰의 협박에 못이긴 리위안홍은 결국 굴복하여 6월 13일 국회 해산령을 선포하였다.
다음날 장쉰은 5천여명의 군대와 함께 베이징에 위풍당당하게 입성하였다. 장쉰은 보석이 박힌 청나라 전통의 가죽모자를 쓰고 머리 뒤로는 변발을 한 채 장삼을 입고 있었다. 그의 군대 역시 변발을 하고 손에는 총과 대도를 든 고색 창연한 모습이었다. 그는 무장한 병사들과 함께 대총통부로 들어가서 리위안홍을 윽박질렀다. 첫째는 청조의 부활과 우대조건을 헌법에 명시할 것, 두번째는 유교를 국교로 정할 것, 세번째는 자신의 정무군(변자군)을 증강하는데 동의할 것이었다. 또한 해산령에도 불구하고 버티고 있던 참의원을 강제로 해산시켰다.
다음 단계로 장쉰은 자금성으로 들어가서 푸이를 알현하였다. 그는 12살난 폐제에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대청제국을 회복하여 혼란스러운 정국을 수습하여 주십시오"라고 청하였다. 푸이의 외국인 스승이었던 레지널드 존스턴의 회고록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를 담고 있다.
『장쉰이 무릎을 꿇고 자신의 계획을 황제에게 알리자 선통제는 오히려 고개를 저으며 거절하였다. "폐하께서 반대하시는 이유를 이 늙은 신하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황제는 온종일 지겨운 공부에 진력이 났다면서 이 지루한 공부를 벗어날 길이 없냐고 물었다. 장쉰은 "폐하께서 다시 보좌에 오르신다면 더 이상 공부 따위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 말에 선통제는 매우 기뻐하면서 외쳤다. "그렇다면 그대 생각대로 하겠소. 나는 무엇이든 그대가 하자는대로 할테니."』
이 일화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장쉰의 복벽이 얼마나 한편의 코메디였는지 보여준다고 하겠다. 존스턴은 푸이가 주변의 아첨을 분간할 줄 아는 영민함과 날카로운 유머감각 또한 겸비한 소년이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뛰어난 재능과 천성을 가졌다고 과대평가할 수는 없으며 푸이 스스로도 자신의 역량을 잘 알고 있었다고 회고하였다. 물론 장쉰을 비롯한 유신들이라고 해서 푸이의 역량에 대단한 기대를 걸었을 리는 없다. 어차피 중요한 것은 푸이가 황제라는 사실이지, 황제에 걸맞는 그릇을 가졌는가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들의 푸이에 대한 경외심 또한 여기에 있었을 뿐이었다.
장쉰이 권력을 쥐고 청조의 부활에 나서자 그동안 숨어 있었던 청조의 유신들 또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이 코메디에 동참한 대표적인 사람이 캉유웨이였다. 무술 변법이 실패한 뒤 제자인 량치차오와 함께 일본으로 도망쳤던 캉유웨이는 전 세계를 여행하고 화려한 여성 편력과 사치를 만끽하면서도 청조에 대한 충성심과 "보황(保皇)"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신해혁명이 일어난 뒤 캉유웨이는 귀국했지만 신정부에서 자신이 할 일은 없다면서 상하이에 눌러앉은 채 <부런(不忍)>이라는 잡지를 창간하고 공화제 반대와 푸이의 복위를 주장하였다. 그는 장쉰이 복벽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자 드디어 20여년 동안 참고 기다려 왔던 입헌 군주제를 실현할 기회가 왔다면서 열차를 타고 부랴부랴 베이징으로 들어왔다.
1917년 7월 1일 아침 일찍 장쉰은 캉유웨이와 육군총장 왕스진, 前 국무경(국무총리) 쉬스창(徐世昌), 베이징 경찰국장 우빙샹(吴炳湘), 제12사단장 진꽝위안(陳光遠) 등 청조의 유신 수십여명과 함께 청나라 관복을 입고 푸이를 알현하기 위해 자금성에 입조하였다. 모두 청조 시절 고관대작을 지냈던 이들로서 공화제가 들어선 뒤에도 여전히 청 황실의 은혜와 과거의 영광을 잊지 못하는 자들이었다.
또한 자금성 앞에는 5천여명의 변자군이 광장을 가득히 메웠다. 용포를 입은 푸이가 황제의 수레를 타고 태화전(太和殿, 자금성 안에서 가장 큰 건물로 황제가 행사를 주관하고 문무백관과 외국 사신을 접견하던 장소)으로 나오자 모든 신하들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삼배고두(三拜叩頭)의 예를 하였다. 그리고 캉유웨이가 푸이의 복위를 선언하는 조서를 낭독하였다. "공화제라는 이름으로 반역자들이 국정을 어지럽히니 이에 만민을 구하고자 황상께 복위를 주청드리니..." 그의 낭독이 끝나자 변자군 병사들이 일제히 "만세"를 외쳤다. 위안스카이에 의해 강제로 폐위당한 채 그동안 자금성에 갖힌 신세였던 푸이가 오년 반만에 옥좌에 다시 앉은 것이다.
장쉰은 복위의 공로로 푸이로부터 즈리성 총독과 북양대신, 그리고 충용친왕(忠勇親王)이라는 거창한 칭호까지 받았다. 또한 청말의 황제 고문기관이었던 필덕원(弼德院)을 부활시키고 캉유웨이를 수장으로 임명하였다. 다른 청조의 유신들에게도 상서니, 태부니, 대학사니 하는 청조 시절의 관직을 부활시켜 한 자리씩 나눠주었다. 선통의 연호가 부활하면서 민국 6년은 선통9년이 되었고 베이징의 거리에는 공화정을 상징하는 오색기 대신 황제를 상징하는 황용(黃龍)이 그려진 청조 시절의 깃발이 사방에 내걸려 나부꼈다. 베이징의 시간이 6년 만에 신해혁명 이전으로 되돌아간 셈이다.
그날 오후 장쉰은 왕스진을 대총통부로 보내어 리위안홍에게 "대정봉환(大政奉還, 권력을 원래 있던 것으로 돌려준다는 뜻)"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리위안홍은 톈진으로 몰래 사람을 보내어 돤치루이에게 국무총리로의 복귀와 장쉰의 진압을 요청하고는 자신은 일본 대사관으로 도망쳐 버렸다.
이 순간이 장쉰에게는 영광의 절정이었지만 기쁨은 오래 가지 못했다. 돤치루이가 장쉰의 복벽을 공화제에 대한 반역으로 규정하고 토역군(讨逆军)을 조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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