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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 전쟁과 인물, 사건으로 보는 중국 현대사 > 13화 - 북양정권의 분열/blog.naver.com/atena

* 군벌 시대의 개막

평화로운 시기에는 문이 무를 억누르지만 난세가 되면 무가 문을 대신하여 득세한다. 이것이 춘추전국시대 이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2천년이 넘는 시간 동안 돌고 돌았던 중국의 역사라 할 수 있겠다.

신해혁명으로 전제 군주제 대신 공화 체제의 중화민국이 건국되었지만 실질적으로 구 체제를 붕괴시킨 사건은 신해혁명이 아니라 위안스카이의 죽음이었다. 청말 이래 중앙의 혼란을 틈타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군사 실력자들을 위안스카이가 눌러왔다. 하지만 유일한 장애물이었던  사라지자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어진 그들은 토지와 군대를 기반으로 자신의 봉건 왕국을 건설하였다. 위안스카이가 죽은 1916년부터 장제스가 북벌을 하는 1927년까지 약 10년의 시간은 전국의 군벌들이 끝없이 항쟁하는 시대였다. 중앙 정부는 껍데기로 전락하였고 지방에는 군벌들이 난립하였다. 난세가 시작된 것이다.

중국사회과학원의 허우이제(侯宜杰) 교수는 위안스카이 평전인 《百年家族 袁世凱》에서 위안스카이를 영웅이라 일컬는다. 또한 그가 중국의 혼란을 막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던 유일한 지도자였다는 점, 그리고 혁명파의 비타협적인 태도가 결국 위안스카이를 죽음으로 몰아넣음으로서 결과적으로 중국의 혼란을 불러왔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그의 비판은 하나만 생각하고 둘은 모르는 것이다. 위안스카이의 몰락은 개혁을 시도하려다 보수 반동파의 저항에 부딪쳤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권좌를 지키기 위해 역사의 시계 바늘을 거꾸로 돌리려고 했다는 점에 있었다. 대내외적인 위기를 극복할 역량이 없었던 그는 갈수록 실추되는 자신의 권좌를 지키기 위해 외세를 끌어들이고 보수반동적인 행태를 더욱 강화하였다. 이에 대한 불만이 결국 차이어의 "호국전쟁"으로 폭발한 것이다.

위안스카이가 남방의 혁명파에게 화의를 제안한 것은 평화를 위해서가 아니라 전세가 불리해지자 시간을 벌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혁명파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설사 혁명파가 위안스카이와 타협했다고 한들, 또는 위안스카이가 제위에 오르는데 성공했다고 한들 이후의 역사가 달라졌을까. 문제는 서로의 모순과 갈등을 해소할 방법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위안스카이가 비타협적인 자세를 버리지 않는데 혁명파더러 타협을 해야 했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근본적인 모순을 해결하지 않는 한 중국의 내전과 분열을 무슨 수로 피할 수 있었던 말인가. 물론 가장 좋은 시나리오는 위안스카이가 권력을 국회에 넘기고 스스로 정계에서 물러나는 것이지만 그에게는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중국은 왜 서구식의 의회정치가 제대로 뿌리 박지 못했는가. 이는 단순히 위안스카이 때문이 아니라 구미처럼 신흥 시민 계급이 국가의 주도 세력이 될 만큼 충분히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중국을 지배하는 세력은 과거 "사대부"라고 불리었던 향신 집단이었다. 전체 인구에서 약 2%에 불과하지만 지난 수천년 동안 중국의 봉건 체제와 신분제 사회를 지탱해 왔던 이들은 중국의 근대화를 추구하면서도 신분제 철폐나 여성인권 신장, 토지 개혁 등 중국 사회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근본적인 사회 개혁에는 강력하게 저항하였다. 자신들이 누리는 지위와 이해관계를 침해할까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신해혁명 이후 여러 정당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고 1913년 1월에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국회가 개원했지만 가장 중요한 시민 의식이 중국 사회에 형성되지 못한 채 겉모습만 서구를 흉내내는 식으로는 제대로 된 의회정치가 될 리  없었다. 1년 뒤 위안스카이는 국회를 총칼로 해산시키면서 "800명의 의원 중에서 200명만 그런대로 괜찮고 나머지 600명은 아무짝에 쓸모없다. 도대체 그들이 뭘 했던가!"라고 노골적인 멸시감을 드러냈지만 실제로도 그들 중에서 각자의 선거구를 대표할 만한 역량과 자격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었다. 따라서 위안스카이가 죽은 뒤에도  국회는 총칼로 해산되었다가 베이징의 지배자가 바뀌면 다시 열리기를 반복하는 식이었고, 1949년 마오쩌둥의 신중국이 들어서면서 타이완으로 도피할 때까지 제대로 된 역할을 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광저우에 별도의 정권을 수립한 쑨원은 국민당을 재건하면서도 서구식 정당 정치의 실시는 거부하였다. 국민당원으로 가입하는 자는 반드시 쑨원에 대한 개인적인 충성과 복종을 맹세해야 했다. 또한 선거를 실시하여 국민을 대표하거나 다른 정당과 정당한 절차를 통해 정책 대결을 벌이는 일도 없었다. 그의 정권은 민주적인 것과 거리가 멀었고 봉건적인 군벌과 향신세력의 연합 정권이라는 성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따라서 정권의 정통성 또한 국민이 아니라 총칼에 있었다. 당대 중국에서 가장 대표적인 공화주의자였던 쑨원조차 실제로는 위안스카이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애초에 쑨원이 추구한 공화정치라는 것이 서구식 민주주의가 아니라 소수의 "깨인" 선각자들이 다수의 무지몽매한 민중을 올바른 길로 이꾼다는 것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서구처럼 각계각층의 대중이 평등하게 참여하는 민주주의는 낙후된 중국 사회의 현실에는 맞지 않다고 여겼다. 스스로 서구를 추종하면서도 정작 의식 수준은 전근대적인 지배-피지배의 선민사상에서 완전히 탈피하지 못했던 것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전제적인 황제가 없다는 정도였다.

쑨원의 정치사상은 장제스와 마오쩌둥 등 이후의 지도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게 되었고 봉건적인 지배 구조 속에서 서구식 의회 정치는 중국 사회에 뿌리를 내릴 수 없었다. 더욱이 국공내전에 승리한 마오쩌둥은 자신이 제창했던 "신민주주의론"을 파기하고 집단지도체제 대신 자신에 대한 신격화와 일인 지배를 공고히 하면서 중국의 정치 수준을 2천년 전의 진시황 시절로 퇴보시켰다.

위안스카이가 죽은 1916년부터 장제스가 북벌을 하는 1928년까지 약 12년은 군웅 할거의 시대였다. 이들은 끝임없이 싸웠다. 전쟁의 목적은 토지를 빼앗기 위함이었다. GDP의 80% 이상을 농업이 차지하던 당시 중국의 여건에서 많은 땅을 지배할수록 강한 자였다. 이 시기에 광대한 토지를 차지하고 있었던 대표적인 대군벌로는 즈리파의 우페이푸, 서북의 펑위샹, 산시성을 통치하던 옌시산, 광시왕 루롱팅, 윈난왕 탕지야오, 관동군을 등에 업고 동3성을 지배했던 장쭤린, 산둥왕 장쭝창, 장제스의 북벌에 맞서 오성연합군을 지휘했던 쑨촨팡 등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여러 개의  성을 장악하고 수만명에서 많게는 수십만명에 달하는 거대한 군대를 길렀다. 그 중에서도 짱쭤린과 우페이푸가 가장 강하였다. 이들은 무력으로 중국 전토를 통일하려 하였다. 물론 장제스 역시 군대를 당이 아닌 자신의 사병 집단으로 만들어 권력 기반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군벌과 다를 바 없었다.

그 아래에는 수많은 반독립적인 중소군벌들이 있었다. 이들은 자신의 세력을 보존하고 소지역의 토지를 놓고 주변의 적대세력과 항쟁을 벌였다. 또한 대군벌과 봉신적인 계약관계를 맺어 보호를 받으려고 하였다. 대군벌과 중소군벌, 그리고 군대를 결속시키는 것은 첫째는 돈, 두번째는 사적인 관계였다. 따라서 군벌의 권위는 매우 취약하여 전쟁에 패전하거나 재정난에 허덕이게 되면 쉽게 내분에 휩쌓였다. 군비와 보급품을 지급받지 못한 군대는 당장 반란을 일으킨 후 정부청사와 민가를 약탈하였고 심지어 군벌 자신의 목숨과 재산조차 지키지 못하여 반란군 병사들에게 잔혹하게 살해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우페이푸같은 대군벌도 한번의 결정적인 패전에 모든 기반을 한순간에 잃고 몰락하여 외국 조계로 달아나야 했다.

이 시대의 군벌들은 개성 넘치는 자들이 많았다. 난세에 걸맞는 강력한 카리스마와 리더쉽을 갖추었고 권모술수에 뛰어났으며 단순한 개인의 영달이 아니라 구국구민에 앞장서겠다는 나름의 통치 철학도 있었다. 이들 중에는 비록 장쭤린, 장쭝창, 루롱팅처럼 제이름 석자도 쓰지 못할만큼 거친 무뢰배 출신도 있었지만 수재 출신의 군벌 우페이푸처럼 뛰어난 학식과 유교적 교양을 갖춘 경우도 있었다.

또한 "카톨릭 장군"이라고 불리며 훗날 중국의 1/4을 지배하고 장제스와도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는 서북왕 펑위샹은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졸병에서 시작한 반면, 탕지야오와 옌시산은 일본 육사를 졸업한 엘리트였다. 국내 군사학교를 졸업한 군벌들도 많았는데 대표적인 예로 훗날 중화민국 초대 부총통이 되는 리쭝런은 구이린 군관학교 출신이었고, 윈난 군벌 롱윈은 윈난육군강무당을, 충칭 군벌 류상은 쓰촨육군소학당을 졸업하였다.

많은 군벌들이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고 아편에 찌들어 있었지만 북양 군벌의 수장이자 안후이파의 우두머리로서 국무총리만 네번을 역임했던 돤치루이는 교활한 야심가이면서도 스스로 술과 담배, 호색, 도박, 치부, 점술을 멀리하고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깨끗한 사생활을 유지하여 "육불총리(六不总理)"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나름대로 교양과 통치 철학이라도 갖춘 이는 손에 꼽을 정도였고 대부분의 군벌들은 무식한데다 야만스럽고 교활하기 짝이 없었다. 이들은 자신의 지반에서 착취한 돈으로 부를 축적하고 온갖 사치를 누리며 방탕한 삶을 즐기기에만 급급하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악명을 떨쳤던 자가 "구육장군(狗肉將軍, 도박에 중독된 장군이라는 뜻)"이라며 악명을 떨쳤던 장쭝창이었다.

그는 평소 주변 사람들에게 "나는 세가지를 모른다"라고 자랑하였는데, 재산이 얼마인지 모르고 첩이 몇명인지 모르며 군대의 숫자가 얼마인지 모른다는 의미였다. 한 나라의 지도자라기보다 강도떼의 두목에 더 가까운 자들이 중국 사회에 얼마나 많은 폐해를 남겼을지는 새삼스레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국가의 장래보다 개인적 야심에 눈이 먼 이들로서는 부하들과 중국 민중에게 자신이 벌이는 전쟁의 정당성을 설명할 길도 없고 대중을 전쟁에 참여시킬 방법도 없었다. 내전은 오직 군벌들의 리그였다.

한편으로 짚고 넘어갈 점은 그나마 구 체제가 붕괴된 후 완전히 해체되지 않은 채 새로운 질서가 등장할 때까지 중국이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은 군벌들의 군사력 덕분이라는 사실이다. 이 점이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이 제국의 해체와 외세의 침략으로 이어졌던 오스만,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와는 다르다. 군벌들은 여러 차례 "독립"을 선포했지만 중국이라는 테두리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가서 별도의 국가를 세우겠다는 뜻이 아니라 단순히 중앙정부의 간섭을 거부한다는 소극적인 의미에 불과했다.

중국내 55개에 달하는 소수민족의 분리 독립 운동 역시 제한적이었다. 소수민족의 투쟁은 민족 전체로 확산되기 전에 현지 군벌들에게 진압당하기 일쑤였다. 윈난군벌 롱윈이나 광시군벌 보충시처럼 소수민족 출신의 군벌, 관료들도 있었지만 자기 민족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대신 내전에 참여하여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확대하는데에만 급급하였다. 따라서 군벌 내전기 동안 소수민족의 분리 독립은 티벳과 신강성의 투르크메니스탄 지역, 외몽골 등 중앙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몇몇 변경지역에 국한되었고 그나마 마오쩌둥의 신중국이 건국된 후 도로 복속되었다. 소련의 괴뢰정권이 수립되어 있던 외몽골만이 주권국가로 거듭날 수 있었다.

* 군대와 토비

20세기 초반의 중국군은 외형적인 측면에서 위안스카이의 신건 육군 이래 비약적인 발전이 있었다. 군대를 주먹구구식으로 편성 운영하던 전근대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사단부터 분대에 이르기까지 서구식의 통일된 편제를 갖추었다. 또한 사단과 여단은 보병과 포병, 기병 등 전투부대와 의료, 공병, 병참 등 지원부대로 편성되어 독자적인 작전 능력을 갖추었다. 장교와 병사들은 화려하지만 걸리적거리고 불편한 전통적인 복식 대신 가볍고 실용적이면서 사격과 각개 전투에 용이한 서구식 군복을 입었다.

같은 시기 오스만 제국이나 독일, 일본과 마찬가지로, 중국 역시 군대는 혈기왕성한 청년들에게는 서구식 학문을 배우고 출세의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장소였다. 청조 시절 만주족 귀족과 부유한 한인 사대부가 독점했던 장교 집단은 봉건적인 신분제가 철폐되면서 모든 계층에 개방되었다. 용기와 능력만 있다면 누구라도 도전할 수 있었다. 

1901년 무과 시험이 폐지되고 중국 전역에 전문적인 장교를 양성하는 군사학교가 곳곳에 설립되자 재능있는 청년들은 가난하고 단조로운 삶에서 탈출하기 위해 너도나도 입교하였다. 주더나 펑더화이, 류보청, 린뱌오 등 훗날 명성을 떨치게 되는 공산군의 간부들도 군사학교에서 초급 군사 교육을 받고 군인이 되었다. 또한 많은 장교들이 국비 유학생의 신분으로 일본으로 가서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갔다. 장제스 역시 바오딩 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도쿄 진무학교(예비군사학교)에 들어가서 일본식 군사교육을 받았다.

먹고 놀기에만 급급할 뿐 노력과는 거리가 멀었던 청말의 만주족 자제들과 달리,
이들의 역량과 재능은 일본 장교들에 비해서도 결코 손색이 없었다. 베이징 정권 시절 바오딩 군관학교와 베이징 육군대학 교장을 지냈고 훗날 장제스의 전략고문을 맡았던 장바이리(蔣百里)는 일본 육사 보병과 15기 수석으로 졸업하여 졸업식장에서 일본 천황으로부터 직접 지휘검을 하사받기도 했다. 일본인으로서는 최고의 영예를 중국인에게 빼앗긴 것이다.

독일 크루프제 75mm 야전포로 사격 훈련 중인 병사들. 청일전쟁 이래 중국의 주력 야포 중의 하나였다.

더 이상 장교들에게 개인의 용력은 의미가 없었고 전문 군인으로서의 지적 능력이 가장 요구되었다. 신분이 미천한 졸병들 중에서도 용감하고 능력을 인정받은 자는 장교로 승진하였다. 연줄과 출신 배경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청조 시절이라면 상상도 못했을 일이었다. 티벳과 외몽골이 신해혁명과 중국의 혼란을 이용하여 분리 독립을 선언했을 때 중국은 서구식 군대를 앞세워 이들의 오합지졸 군대를 손쉽게 제압한 다음 중국의 영역으로 다시 복속시켰다. 또한 이들은 중국 사회의 모순과 사회 변혁의 필요성에도 가장 먼저 눈을 떴다. 신군을 중심으로 반청혁명 사상이 확산된 것이나, 중국에서 공산당이 조직되자 많은 젊은 장교들이 지위를 던지고 사회주의 혁명에 앞장 선 것 또한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이런 변화상에도 불구하고, 현대전에서 중국군의 역량은 1차 세계대전 당시 서부전선의 참혹상을 직접 목격했던 사람들의 시각에서는 "촌극"에 불과했다. 한번에 10만명 이상이 참여하는 큰 전투라고 해도 실제로 전장에서 총을 들고 싸우는 병사는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대부분은 전투 내내 적군과 대치만 하다가 전세가 불리하면 스스로 흩어지거나 투항하여 깃발을 바꿔다는 식이었다. 1924년 장쭤린과 우페이푸 사이에서 벌어진 제2차 펑-즈전쟁은 군벌 내전기를 통틀어 가장 큰 전쟁 중 하나로 쌍방이 동원한 군대는 50만명에 달했지만 사상자는 1%도 채 되지 않았다.

군벌이 전쟁을 하기 위해 새로운 군대를 편성하는 방법은 이러했다. 군벌에게 의뢰를 받은 징모관들이 농촌과 마을을 돌면서 병사를 모집하고 군복과 무기를 지급한 후 형식적인 훈련을 한 차례 실시하면 그대로 한개의 부대가 탄생하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용병제에 의존하던 18세기 유럽이라면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었지만 이런 군대가 현대전에서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숫자만 많을 뿐 제대로 된 전투력을 갖춘 부대는 극소수였다. 전투에 의한 사상자는 매우 적었고 열악한 의료 체계와 병참 때문에 전염병과 기근, 부상 등 비전투 손실이 훨씬 컸다.

중국군의 훈련 상태나 작전 역량은 청일 전쟁 시기와 크게 다를 게 없었다. 병사들은 대부분 직업군인이었지만 구미처럼 전문적인 역량을 갖춘 직업군인은 아니었다. 개인의 주도성과 기습, 속도와 같은 구미 열강의 군대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은 중국군에서는 찾아보기 어려다.

전쟁에 대한 열의도, 기강도 없다보니 군수품이 부족하거나 전세가 불리해지면 군대는 무장한 강도떼로 전락하기 일쑤였다. 군대와 토비는 거의 구분되지 않았고 실제로도 많은 토비 무리들이 군벌에 회유되어 정규군에 편입되었다. 이들은 머릿수를 채울 뿐 실전에서는 아무런 쓸모도 없을 뿐더러 군대의 질을 떨어뜨렸다. 도적떼의 힘이 강하여 토벌하기 어려울 경우 적당한 관직을 주고 관군에 편입하는 것은 중국 역사에 흔히 반복되는 모습이기도 했다. 
 

군대가 사용하는 무기는 주로 구미와 일본에서 수입된 한 세대 이전의 잡다한 중고 소총이나, 상하이 강남 제조국과 한양 병공창 등 국내 병공창에서 독일제 Gewehr 88 소총을 라이선스 생산한 국산 소총이었다. 이 소총들은 낡고 조악한데다 서로 규격이 달랐기에 총알이 맞지 않았다. 또한 구미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던 강철로 된 신형 곡사포와 기관총은 아프리카 식민전쟁과 1차대전에서 무시무시한 위력을 발휘했지만 중국에서는 숫자도 매우 적은데다 탄약의 보급이 제대로 되지 않아 단지 위협용으로만 활용될 수 있었다.

나폴레옹 전쟁기에 쓰였음직한 서구식 청동제 대포. 청말에 수입되어 군벌 시대까지 여전히 사용되고 있었다.

두꺼운 성벽에 둘러싸인 도시나 요새를 공격할 때에는 성벽을 파괴할 중포가 없다보니 병사들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또한 무기의 대부분을 해외에서의 수입에 의존한데다, 수량이 부족했기에 심지어 구식 화승총이나 활과 화살, 창을 쓰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 중국 내전의 모습은 라이플을 사용했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2천년 전 조조와 유비, 손권이 싸우던 시절과도 별 차이가 없었다.

1917년 7월 장쉰의 복벽 사건 당시 자금성의 성벽에 오르는 중인 돤치루이 측 병사들.

1911년 리비아를 놓고 이탈리아와 오스만 제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서 이탈리아 가보티(Giulio Gavotti) 소위가 오스트리아제 타우버 항공기를 몰고 적의 마을을 폭격한 사건을 시작으로, 구미 각국에서 본격적으로 항공기를 전쟁에 활용하기 시작하였다. 중국 역시 항공기의 잠재성을 일찍부터 간파하였다. 1911년 3월 재미교포인 펑루(馮如)라는 사람이 광저우에서 "광둥비행기공사(廣東飛行器公司)"를 설립하였다. 중국 국내에 설립된 최초의 항공기 회사였다. 중국의 첫 비행사이자 비행기 설계사이기도 했던 펑루는 중국 최초의 항공기를 제조하여 시험 비행에도 성공했으나 1912년 8월 25일 시험비행 중 사고로 사망하였다.

위안스카이 정권은 1912년 11월에 육군부 산하에 항공사무처를 만들어 전국의 항공행정을 총괄하였다. 또한 1913년 9월에는 베이징 난위안(南苑)에 난위안 항공학교(南苑航校)가 설립되어 본격적으로 파일럿을 양성하기 시작하였다. 1914년 2월 허난성에서 일어난 백랑의 난에서는 4대의 항공기가 투입되어 적진을 정찰하였는데 항공기를 군사적으로 활용한 중국 최초의 사례였다.

1910년대 말 난웨이 항공학교의 모습. 중국 최대의 항공학교였지만 정치적인 혼란과 예산난으로 대부분의 교관과 정비원들은 흩어졌고 항공기는 폐물이 된 채 버려졌다. 장제스가 북벌에 성공한 뒤 폐교 조치되었다.

유럽 전선을 통해 항공기의 중요성을 익히 알고 있었던 군벌들은 각자 경쟁적으로 사설 공군을 만들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구미 각국의 창고에 쌓여 있던 중고 비행기를 구입하고 외국인 고문을 영입하여 파일럿을 양성하였다. 1917년 7월 장쉰의 복벽사건에서는 돤치루이 측 비행기가 자금성을 점령한 변자군에게 항공기로 폭탄을 떨어뜨렸는데, 중국 역사상 첫번째 항공폭격이었다. 또한 두차례의 펑-즈전쟁에서도 우페이푸와 장쭤린은 다수의 항공기를 투입하여 공중전과 지상 지원을 하였고 전쟁의 승패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군벌들이 설립한 항공학교에는 당시 중국에서 활동 중이던 많은 우리 독립운동가들도 입교하여 조종 기술을 습득하였다. 대표적으로 대한민국 제2차 공군참모총장인 최용덕 중장은 바오딩 군관학교 산하 바오딩 항공학교를 졸업하여 제2차 펑즈전쟁 당시 우페이푸 측의 파일럿으로 참전하기도 하였다. 또한 조선인 최초의 비행사로 명성을 떨쳤던 안창남은 산시 군벌 옌시산의 타이위안 항공학교에서 비행 교관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중앙 정부가 사실상 힘을 잃고 군벌이 난립하는 내전기에 돌입하면서 극심한 예산 부족과 베이징의 주인이 여러차례 바뀌는 등 정치적 불안정으로 중국은 일관성있게 공군에 투자할 수 없었다. 난웨이 항공학교는 1928년에 폐교될 때까지 15년 동안 고작 150여명의 파일럿을 배출하였다. 조종 기술은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렀고 체계적인 항공 작전을 수립할 전문가도 없었다. 게다가 여기저기서 구입한 잡다한 항공기는 정비 체계를 복잡하게 만든데다 가동률도 형편없었기에 구미처럼 항공력을 전장의 주역으로 삼는다는 것은 어림도 없었다.

그나마 항공은 어느 정도의 발전이 있었고 내전에서도 일정한 역할을 하였지만, 청조에 의해 어느 정도 재건되었던 해군은 완전히 찬밥신세로 전락하였다. 군함들은 항구에 버려진 채 수리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여 벌겋게 녹이 슬었고 봉급이 밀린 병사들은 반란을 일으키거나 탈영하였다. 조선소와 수리 시설 또한 폐쇄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조함의 확보나 해군의 발전이 있을 리 없었다.  해군은 육군보다 훨씬 전문적이며 잘 훈련된 함장과 수병을 육성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군벌 내전이 끝났을 때 중국 해군은 건조된지 30년이 넘은 구닥다리 방호 순양함 몇척과 연안용 포함 외에 장교 78명, 수병 800여명이 전부였다. 중국 연안에 대한 순시조차 불가능한 실정이었다. 1930년대에 와서야 일본과 독일에서 몇척의 군함을 수입하고 국내에서 신형함을 건조하는 등 해군의 재건에 나서지만 중일전쟁이 발발했을 때 막강한 일본 해군 앞에서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었다.

* 중국은 왜 "군사혁명"이 없었나

중국 내전에서 "군사 혁명"이라고 부를 만한 것을 찾아볼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미국의 남북전쟁은 4년의 짧은 기간 동안 무려 100만명에 달하는 사상자와 많은 경제적 손실을 입혔지만 이전의 소규모 민병대에서 단숨에 유럽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군사 대국으로 거듭나게 하였다. 또한 거대한 전쟁 특수는 미국에 산업 혁명을 촉발시켰다. 반면, 중국 내전은 결코 파괴적이지 않았고 사회 변혁을 유도하거나 산업 혁명을 촉발시키지도 못했다.

중국에서 군사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첫번째 이유는 산업혁명을 상징하는 철도와 전신의 보급이 미미했기 때문이었다. 남북전쟁과 보불전쟁에서는 이전에 비해 비약적인 군사기술의 발전이 있었는데 철도가 등장하면서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대규모 병력과 군수품을 최전선까지 신속하게 수송하고 병참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를 통해 광범위한 공간에서 대군의 기동작전과 종심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비록 차량의 부족으로 여전히 철도 종점역에서 최전선까지 말과 수레에 의존해야 했지만 장거리 수송에서 철도는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전신이 없었다면 철도의 역할 또한 제한적이었을 것이다. 전신을 이용하여 철도와 군대의 기동을 체계적이고 계획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다. 남북전쟁 당시 대륙횡단철도를 건설하는 등 이미 5만km에 달하는 철도를 보유하였던 미국은 1896년에는 29만km, 영국은 3만3600km, 프랑스는 4만km, 일본은 3700km의 철도를 보유하였다.

각국에서 경쟁적으로 철도를 부설하고 있을 때 중국의 위정자들은 철도에 대한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중국 최초의 철도는 1876년 2월 상하이에서 영미 상인들에 의해 부설된 길이 14.5km의 우쑹철도이다. 하지만 철도에 대한 미신과 외세의 침략을 부를 수 있다는 거부감으로 결국 다음해 철거하고 말았다. 그나마 철도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었던 유일한 인물이었던 리훙장은 톈진과 탕산을 연결하는 단선 철도를 건설했지만 수구파의 격렬한 반대로 양무 운동 내내 철도 건설은 지지부진하였고
청일전쟁 직전까지 전국에 건설된 철도는 모두 합해도 고작 300km에 지나지 않았다.

중국에 본격적으로 철도가 건설되기 시작한 것은 의화단의 난 이후였으나 대부분 열강들의 자본에 의한 것이었다. 열강들은 경쟁적으로 청 조정을 압박하여 철도 부설권을 따냈다. 철도 이권을 외국에 나눠주면서 중국은 사실상 열강들의 반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이 때문에 중국 사회에서 민족주의 열풍이 불면서 각지에서 철도 이권을 회수하여 국권을 되찾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하지만 청조가 재정을 확보할 욕심에 철도를 강제로 국유화하자 격렬한 반발에 직면하였고 이것이  결국 신해혁명으로 폭발하게 된다.

해혁명 직후 위안스카이 정권에서 전국철도독판에 임명된 쑨원은 상하이에서 중국철로총공사를 설립하고 10년 동안 60억 위안의 자본을 투자하여 10만 km의 철도를 부설하겠다는 거창한 계획을 세웠다. 그의 철도 부설 계획은 크게 세개의 노선으로 나뉘었는데 첫번째는 광둥에서 구이저우성과 쓰촨성을 지나 티베트까지 연결하며, 두번째는 상하이에서 출발하여 중국을 동서로 관통한 후 신장성까지 연결한다는 것이었다. 세번째는 친황다오에서 출발하여 동북을 거쳐 외몽골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쑨원은 이를 위해 외자를 도입하는 조건으로 철도부설권을 제공하되 40년 후에 중국으로 귀속시키며 중국의 주권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달았다. 그의 거창한 계획에 가장 먼저 영국이 호응했지만 영국이 중국을 독점할 것을 우려한 러시아와 일본 등 다른 나라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친데다 위안스카이와 쑨원의 정치적 갈등이 심화되면서 결국 실현되지 못한 채 흐지부지되었다.

그럼에도 청말과 위안스카이 정권에서는 정치적 안정 아래 전국의 주요 대도시를 연결하는 철도가 건설되면서 1900년부터 1905년까지 5년 동안 5,200km의 철도가 완성되었으며 1916년 말에는 전국 철도망의 총길이가 7,800km에 달했다. 하지만 위안스카이 말기 호법전쟁을 시작으로 중국의 정치적 혼란에다 철도 건설 자금을 군벌들이 엉뚱한데 유용하면서 군벌 내전기 내내 철도 건설은 지지부진하였다. 게다가 치안의 불안정으로 철로와 기차는 걸핏하면 토비의 습격에 시달리기 일쑤였다.

1917년부터 장제스가 전국을 통일하는 1927년까지 11년 동안 중국에 건설된 철도는 겨우 1,500km에 불과했으며 그 중에서 만주가 1천km, 산하이관 이남의 중국 본토는 5백km에 불과했다. 본토에 비해 만주의 발전이 괄목할 만 했는데, 이것은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던 본토와 달리
당시 장쭤린의 통치 아래에서 만주가 비교적 안정을 누린데다 무엇보다도 일본 자본을 끌여들인 덕분이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만주는 사실상 일본의 반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철도 운영권을 놓고 관동군과 갈등을 빚었던 장쭤린은 결국 살해되었고 일본의 본격적인 중국 침략의 신호탄인 만주 사변으로 이어지게 된다.

베이징과 한커우를 연결하는 징한철도와 톈진과 난징을 연결하는 진푸철도, 광저우와 한커우를 연결하는 웨한철도, 중국을 동서로 관통하는 룽하이 철도 등 청말에 건설된 철도망은 중국의 주요 도시를 연결하여 물자 유통을 촉진하였다. 하지만 중국 대륙의 광대함에 비교한다면 한줌에 불과했고
철도의 열악함은 중국에서 군사 혁명과 산업 혁명을 촉진하는데 큰 역할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중국 철도의 태반은 중국이 아니라 외국 자본이 장악하고 있었다. 1920년대 초반 전국 철도의 90%가 외국의 소유였고 중국이 소유한 것은 고작 10%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외국의 허가 없이 철도를 마음대로 이용할 수 없었던 군벌들은 철도를 이용해 전략적 기동을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철도를 무기로 외세가 군벌들의 목줄을 꽉 쥔 셈이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1925년 궈쑹링(郭松齡)과 장쭤린의 전쟁에서 일본은 궈쑹링을 견제하기 위해 그의 군대가 남만주 철도를 이용하지 못하도록 막았고 이 때문에 전세가 역전되어 궈쑹링은 패망하고 말았다. 제2차 펑-즈 전쟁에서도 군비 부족으로 철도를 이용할 수 없었던 우페이푸는 장쭤린에게 패배하여 베이징을 내주어야 했다.

두번째는 빈약한 금융 체계 때문이었다. 유럽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만 해도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금융제국이었다. 당나라 시절에는 동서양을 연결하는 실크로드가 형성되었고 송나라 시절에 이미 초기 자본주의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명나라 영락제 시절에는 정화가 이끄는 거대한 함대가 서쪽으로 원정을 떠났다. 명, 청 시기에 전세계 은의 대부분은 중국에서 소비되었다. 거액의 무역적자를 참을 수 없었던 영국은 아편을 중국에 팔기 시작했고 중국이 여기에 반발하면서 결국 아편전쟁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경제 이론에 대한 기초 개념조차 없었던 관료조직의 무능함, 상업을 천시하는 뿌리깊은 사회 풍조 때문에 중국의 금융은 더 이상 발전할 수 없었다.

일본이 메이지 유신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서구식 금융 체계를 신속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근대화와 군대의 양성에 필요한 자금을 국내에서 조달하였고 해외에서 차관을 빌리더라도 일본 정부의 신용을 담보로 할 수 있었다. 반면, 청조는 배상금의 지불이나 양무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국내에서 조달할 수 없었기에 관세, 염세 등 국가의 이권을 담보로 해외에서 돈을 빌려야 했다. 따라서 채무가 늘어날수록 외세에게 속박당하는 신세로 전락하였다. 또한 변변한 국내 은행이 없다보니 수출입과 자본의 확보에서도 외국은행에 전적으로 의존하였다. 이 때문에 대외 무역에서 중국 상인들은 외국 상인에게 매우 불리한 처지에 놓였다.

청조로부터 텅빈 국고를 물려받았던 위안스카이 정권은 통치 자금과 군비를 확보하기 위해서 외국에서 끝없이 차관을 들여야 했고 각종 세수와 이권을 담보로 넘겼다.  그의 뒤를 이은 돤치루이, 차오쿤 등 북양군벌들은 내전에 승리하기 위해 차관 도입에 더욱 열을 올렸다. 1912년부터 1927년까지 베이징 정부가 외국에서 차관을 빌린 횟수는 468회에 달했으며 총액수는 13억 5천만 위안에 달했다. 이는 청조의 208회, 장제스 정권의 108회를 훨씬 상회하는 것이었다. 외채가 없었다면 베이징 정권은 하루도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빌린 돈은 간신히 재정적자를 메꾸는 수준이었고 대부분 군대의 조직, 무기, 군수품의 구입, 전쟁 비용 등 군비 지급과 외채를 갚는데 사용되었다.

국채도 대량으로 발행되었고 종류 또한 수십가지에 달했다. 위안스카이와 베이징 정권이 발행한 국채 금액은 총 6억 1400만 위안에 달했다. 하지만 신용이 뒷받침되지 않았기에 심지어 액면가의 20% 금액에 유통되기도 했다. 또한 군벌들은 군비를 확보하기 위해 아무런 담보 없이 거액의 지폐를 함부로 찍어내어 백성들에게 사용하라고 강요하였다. 쓰촨성 한군데만 해도 수백가지 종류의 화폐가 있었다. 화폐의 남발은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유발하여 지역 경제를 붕괴시켰을 뿐더러, 중국 내 상품 교역에도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였다. 니미츠 제독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자신이 1920년대에 중국을 친선 방문했을 때 부하들에게 광저우의 화폐를 왜 상하이에서 쓸 수 없는지에 대해 설명해야 했다고 회고하였다.

군비는 청조 시절에는 대략 총 예산의 30%를 넘지 않았지만 내전이 중국 전역으로 확대되는 1925년에 오면 거의 절반을 차지했다. 군대의 규모가 커지고 전쟁이 확대되었기 때문이었다. 청말에 약 50만명 정도였던 전국의 군대는 신해혁명 이후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1910년대 말에는 약 100만명, 장제스의 북벌기인 1920년대 후반에 오면 200만명에 달하였다. 중국 경제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규모였다. 1918년에 돤치루이가 서남 군벌의 토벌에 나섰을 때 매달 소요되는 군비만도 800만 위안에 달했다.
따라서 군벌들은 작전보다 군비를 확보하는 게 최우선이었기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몇달씩 봉급과 보급품이 체불되기 일쑤였다. 돈을 받지 못한 병사들은 파업을 하거나 반란을 일으켰다. 이런 상황에서 전략적이고 체계적으로 작전을 수립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군벌들은 수백가지에 달하는 각종 명목의 세금을 징수하였는데 심지어 쓰촨성 서부를 통치하던 군벌 류원후이(劉文輝)는 1934년에 자기 통치 구역에서 토지세르 거두면서 2008년도 세금까지 미리 징수하기도 했다.  이는 도적떼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농민들은 극심한 기아에 허덕였으며 토지와 가축, 농기구를 빼앗아 가면서 농촌의 생산능력을 전반적으로 위축시켰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큰 이유는 중국 사회의 낙후성에 있었다. 군대에 대한 청년들의 선망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분위기는 여전히 문을 중시하고 무를 천시하였다. 좋은 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은 군대에 들어가기를 꺼렸다. 군대에 지원하는 자는 대부분 토지를 잃고 일자리를 찾아나온 유랑민, 토비와 같은 사회 최하층민 출신들이었다. 제 이름 석자도 쓰지 못하는 이들에게 근대적인 전문 군사 교육이나 포와 기관총과 같은 복잡한 무기의 사용법을 가르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병사들의 질적 수준이 매우 낮다보니 기강도, 규율도 형편없었다. 싸워야 할 목적이나 동기 부여가 없었던 이들은 위험한 임무를 맡으면 쉽게 도망치기 일쑤였다. 당시 중국군의 전투 장면을 목격했던 한 영국인은 "실전이라기보다 훈련같은 느낌이었다"라고 비평하였다.

장교 집단도 다를 것이 없었다.  그나마 일부 장교만이 일본과 영국, 독일 등지에서 초급 장교 수준의 군사 교육을 받았거나 중국 국내의 군사학교를 졸업하였다. 청말 자희 신정 이후 중국에는 다수의 군사 학교가 설립되었지만 예산과 교관의 부족으로 질적 수준은 매우 형편없었다. 게다가 대부분의 장교는 사회 최하층 출신들로 토비거나 졸병에서 운 좋게 출세의 기회를 잡은 자들이었다. 이들은 교양이라고는 없는데다 매우 난폭하고 거칠었으며 사치와 도박에 열을 올렸다. 이런 자들에게 중국의 발전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1920년대 군벌사의 권위자인 진즈양(陳志讓) 교수의 《군신정권(軍紳政權)》에 따르면, 군벌 내전기의 여단장 이상을 역임한 고위 장교 1,300여명 중에서 70% 이상이 이런 자들이었다고 한다.

구미 각국에서는 사거리가 30km에 달하는 중포가 등장하면서 대포를 더 이상 육안으로 직접 조준하는게 불가능하게 되자 기구와 항공기를 활용하여 표적을 관측하였고 탄도의 낙하와 탄착점을 계산하기 위해서 포병장교들에게 고도의 수학적 전문성과 지적 역량을 요구하였다. 또한 작전의 수립과 군대의 기동, 병참의 구축을 위해서는 전문적이고 우수한 참모 장교를 필요로 하였다. 병역 자원을 파악하고 이들을 입대시켜 군대를 조직하고 전선으로 수송하며 노동력과 자원의 효과적이고 체계적인 배분, 군사적 요구가 산업, 농업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현대화되고 체계화된 관료 시스템이 있어야 했다. 전쟁의 양상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복잡해졌지만 중국에는 어떤 것도 없었다.

20세기의 중국 사회는 이전과 다를 바 없이 봉건적이고 전통적인 인습과 미신이 지배하는 세계였다. 아편전쟁을 불러왔던 인도산 아편은 중국산으로 바뀌었을 뿐 여전히 중국인들을 좀 먹었고 있었다. 아편 판매는 수입이 짭짤했기에 군벌들과 농민들의 주된 수입원이었고 거의 쓸모가 없는 화폐나 군표보다 훨씬 가치 있는 교환 수단이기도 했다. 심지어 중국 개혁을 외치는 공산당도 군비 마련을 위해 아편 재배에 열을 올리면서도 자신들은 적어도 해방구 내에서는 팔지 않는다고 합리화시켰다. 또한 청말 이래 서구식 교육이 빠르게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후난성의 벽촌에 살던 마오쩌둥조차 서구 학문을 접할 수 있었지만 여전히 많은 중국인들은 전통적인 고전과 경전을 배웠고 다양한 학문을 배울 기회가 없었다. 따라서 이들의 세상 보는 눈이나 지식 수준, 가치관은 수백년 전과 다르지 않았다.

군대 또한 그 사회의 한 부분이라는 점에서 사회의 낙후는 군대의 낙후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일본이나 구미 열강은 물론이고, 2류 군사국가였던 오스만 제국과 발칸 국가들과 비교하더라도 중국의 군사적 발전 수준은 현저히 낮았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만군의 러시아령 코카서스 침공이나 갈리폴리에 상륙한 연합군의 대부대를 상대로 오스만군이 9개월에 걸친 치열한 전투와 25만명의 연합군을 포함해 쌍방 50만명이 넘는 사상자를 낸 끝에 결국 침공을 격퇴했던 승리를 같은 시기의 중국군이 과연 재현할 수 있었을까.

1932년 1월 상하이를 침공했던 일본군을 상대로 제19로군이 보여준 용맹함은 당시 중국군으로서는 보기 드문 선전으로 손꼽히지만, 화력에서 열세했던 그들은 약 두달의 전투 끝에 결국 일본군에게 밀려나 상하이 외곽으로 물러나야 했고 중국의 지도자였던 장제스는 수도 난징이 공격을 받지 않기 위해 일본에 굴복할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중국군 중에서 가장 강력한 부대 중의 하나였고 뛰어난 용맹함으로 "철군(鐵軍)"이라고 불리었던 제19로군조차 일본군을 맞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중국의 군사 혁명은 장제스가 시작하여 홍군에 의해 완성되었다. 1924년 국공합작 이후 소련의 원조를 받아 황푸군관학교를 설립한 장제스는 소련식으로 군대를 훈련시켰다. 오로지 음식과 돈, 아편이 목적이었던 군벌 용병군대와 달리, 그의 군대는 국가와 당을 위해 싸운다는 명확한 이데올로기와 동기 부여가 있었다. 또한 그는 상하이 은행단의 강력한 자금 지원을 받았기에 다른 군벌들보다 월등히 우위에 설 수 있었다. 따라서 숫적으로는 월등히 우세하지만 오합지졸이었던 군벌군대를 쉽게 압도하여 2년 반만에 중국 전토를 차지하였다. 황푸군관학교 출신의 장교들은 장제스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하였고 국공내전 말기 장제스가 패망하는 순간까지도 변함이 없었다.

또한 그는 '난징정권 10년' 동안 독일 군사고문단의 협조를 얻어 자신의 직계 부대를 독일식으로 철저하게 개편하였다. 덕분에 중일전쟁이 발발했을 때 이전과 달리 완강한 저항을 펼쳐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가했고 영토의 태반을 상실했음에도 무너지지 않은 채 8년에 걸쳐 끈질긴 항전을 하여 결국 승리하였다. 하지만 중국군 전체로 본다면 이런 변화는 지엽적인 것에 불과했다. 정치적 권위가 취약했던 장제스는 군벌군대를 해산시키거나 국군으로 통합할 수 없었다. 군벌연합정권이라는 장제스 정권의 태생적인 모순과 중국 사회의 낙후성을 극복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군대의 개혁을 추진했지만 사회가 바뀌지 않는 한 군사 개혁 또한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을 뿐이었다. 따라서 그의 전쟁은 이전의 군벌들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대중과는 괴리되어 있었고 총력전을 수행할 수 없었다. 

반면, 공산당은 전쟁의 목표를 분명하게 제시하였고 강력한 정치 선전을 통해 대중을 전쟁에 동원하는데 성공하였다. 총사령관 주더를 비롯해 홍군의 간부들은 국내의 군사학교에서 초급 수준의 군사 교육을 받았거나 이조차 받지 못한 자들이 대부분이었고 군대의 무장과 훈련상태 또한 매우 빈약했다. 하지만 이들은 대중적 지원 아래 놀라운 열의와 결속력, 유연한 전술을 이용해 지방의 군벌군대를 간단하게 압도하였다. 1930년대의 토벌전에서 우세한 장제스의 군대를 여러차례 격퇴하고 승리를 거두었다. 장쉐량의 동북군은 홍군을 상대로 연전연패하면서 장제스와 갈등을 빚자 결국 시안사변을 일으켰을 정도였다.

1946년 7월 국공내전이 전면적으로 폭발했을 때 미국의 지원을 받은 장제스측이 겉으로는 우세했지만 공산군을 제압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국민정부군의 군대는 탈영과 반란 등으로 감소하고 사기가 땅에 떨어진 반면, 공산군은 점점 강해졌다. 결국 4년 만에 장제스 군대를 제압하고 내전에 승리하였다. 마오쩌둥이 위안스카이, 우페이푸, 장쭤린, 장제스 등 지난 30여년 동안 누구도 해낼 수 없었던 강력한 통일 국가를 구축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여기에 있다. 중국은 미국, 소련 다음의 군사 강국으로 거듭났다. 한국전쟁에서  펑더화이는 맥아더를 상대로 20세기판 칸나이 전투의 승리를 거의 재현할 뻔하였다. 유엔군을 상대로 보여준 중공군의 전투력은 청말이나 군벌 내전기의 중국군이라면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 북양 삼걸

위안스카이가 죽은 뒤에도 여전히 베이징 정부의 실권을 쥔 세력은 북양 군벌들이었다. 또한 전국의 군권을 쥔 23명의 도독 중에서 12명이 위안스카이가 직접 키워낸 북양군벌 출신들이었다. 나머지 중에서 7명 역시 위안스카이의 옛 부하이거나 그의 추천으로 출세하는 등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다. 위안스카이와 상관없는 사람은 겨우 4명에 불과했다. 윈난성, 광시성, 광둥성, 구이저우 등 중원과 거리가 먼 서남의 변경이었다. 

부총통 리위안홍이 위안스카이의 뒤를 이어서 대총통에 추대되었다. 이는 중화민국 약법의 규정에 따른 것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정치적 타협의 결과였다. 첫번째는 남방의 혁명파가 남북 화의의 조건으로 중립파인 리위안홍을 대총통으로 추대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 앉는다면 내전이 재개될 판이었다. 두번째는 북양군이 두 개의 파벌로 분열되었기 때문이었다. 부총통 펑궈장의 즈리파와 국무총리 돤치루이의 안후이파였다.

위안스카이 휘하에는 여러 상장들 중에서도 이른바 "북양 삼걸"이라고 불리는 세명의 뛰어난 수장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육군총장 왕스진(王士珍)은 "북양의 용(龍)"이라고 불리었다. 그만큼 셋 중에서 가장 능력이 탁월해서가 아니라 "용은 머리만 보이고 꼬리는 보이지 않는다(神龍見首不見尾)"라는 중국의 옛 속담을 비꼰 것이었다. 그는 청말에 흔히 볼 수 있었던 보수 관료의 전형이었다. 사무를 처리하는 역량은 상당했지만 우유부단하고 줏대가 없으며 이렇다할 정치적 야심도 없었다. 신해혁명 이후에도 여전히 청조의 유신을 자처하였고 황제의 황은을 잊지 않겠다며 변발을 보존한 채 청나라 복식을 고집하였다. 중화민국의 고관이면서도 나중에 장쉰이 "복벽"을 일으키자 동참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몸은 20세기에 살면서 머릿속은 19세기 사고 방식이 19세기에 멈추어 있는 는 위인이었다.

반면, "북양의 호랑이"이라 불리는 돤치루이(段祺瑞)는 왕스진과는 정반대로 야심이 넘쳤다. 그는 리훙장과 마찬가지로 안후이성 허페이(合肥) 출신으로 부친은 태평천국의 난에서 리훙장의 회군에 무관으로 참전했지만 돤치루이가 어릴 때 일찍 죽었기에 집안의 가세가 기울었다. 돤치루이는 먹고 살기 위해 군인이 되기로 결심하였고 마침 조정의 실권자였던 리훙장이 양무운동의 일환으로 1885년 중국 최초의 서구식 사관학교인 북양무비학당을 톈진에 설립하자 포병과 1기생으로 입학하였다.

우연히 북양무비학당에서 돤치루이를 본 리훙장은 비록 일개 생도에 불과했지만 자신과 동향인데다 한눈에 매우 비상한 인물이라고 간파하였다. 그리고 독일의 선진 군사기술을 배우기 위해 베를린 육군사관학교에 파견할 5명의 유학생 그룹에 그도 포함시켰다. 2년 뒤 귀국한 그는 청일전쟁과 의화단의 난에 참전하였고 이후 위안스카이가 신건육군을 조직하자 그의 막료가 되어 포병대대의 대대장을 맡아 군대를 독일식으로 철저하게 훈련시켰다. 덕분에 신건육군은 최강의 군대가 되었다.

위안스카이가 북양군을 배경으로 출세가도를 달리고 이후 권력의 정점에 설 수 있었던 것에는 돤치루이의 역할이 컸다. 위안스카이 역시 여러 막료들 중에서도 특히 정치적으로 기민하고 눈치가 빠른 돤치루이를 가장 총애하였다. 그는 북양군 제3사단과, 제6사단, 바오딩 군관학교 교장 등 위안스카이의 오른팔로 주요 요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자신의 세력을 키워갔다.

펑궈장은 당대 사람들에게 "북양의 개"라며 조소를 당했지만 실제로는 문무를 겸비하여 셋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장군이었다. 그는 여러모로 돤치루이와는 대조적이었다. 몰락한 집안의 출신으로 끼니도 잇기 어려워 먹고 살기 위해 군인인 된 돤치루이와 달리 펑궈장은 즈리성 남쪽의 허젠(河间)의 대지주 집안 출신이었다. 돤치루이와 같은 해에 북양무비학당에 입학했지만 지방 향시에도 합격하여 수재(秀才, 진사)가 되었을 정도로 문에서도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무과에도 여러번 낙방하여 결국 포기한 돤치루이와는 대조적이었다.

북양무비학당 졸업 후 위안스카이의 막료가 된 그는 무술정변이 일어나자 위안스카이를 도와 변법파 세력을 진압하였다. 위안스카이가 신건육군을 조직했을 때 돤치루이가 포병대대를 맡자 펑궈장은 보병대대를 맡는 등 평생 경쟁 관계를 유지하였다. 또한 돤치루이는 교활하고 권력욕이 넘치는 반면, 비교적 청렴하고 부정 축재와 사치를 금하였다. 이런 모습은 당시 중국 권력자치고는 보기 드문 것이었다. 펑궈장은 우직하되 재물욕이 지나치게 많았다. 주변 사람들의 신망은 펑궈장보다는 돤치루이에게 쏠렸다. 

우창 봉기가 일어났을 때 펑궈장은 조정의 명령을 받들어 제1군의 지휘를 맡았다. 그는 뛰어난 지휘력으로 리위안홍과 황싱이 지휘하는 혁명군을 단숨에 짓밟아버린 다음 혁명군이 장악하고 있었던 우한 3진 중에서 한양과 한커우를 순식간에 장악하였다. 혁명군에게는 우창만 남은 실정이었다. 펑궈장의 말 한마디이면 우창 봉기를 끝장내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하지만 위안스카이의 진짜 속내는 청조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남방과 타협하여 푸이를 옥좌에서 끌어내리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는 것이었다. 따라서 지나치게 잘 싸우는 펑궈장의 활약은 오히려 위안스카이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위안스카이는 펑궈장을 도로 베이징으로 소환한 후 그 자리에 돤치루이를 앉혔다. 위안스카이의 속내를 잽싸게 읽고 있었던 돤치루이는 위안스카이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모든 공격을 중지시켰다. 펑궈장은 황제 푸이를 지키는 금군의 지휘를 맡았다. 청조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당시로서는 그야말로 인기없는 자리였다.

위안스카이와 쑨원 사이에 남북화의가 성립되면서 위안스카이는 대총통이 되었다. 덕분에 돤치루이는 위안스카이 정권에서 육군총장과 국무총리를 역임할 수 있었고 사방의 존경 또한 받을 수 있었다. 반면,자신의 직분에 충실했던 펑궈장은 위안스카이의 신임을 잃었을 뿐더러 혁명파에게도 경원시당하는 처지가 되어 점차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졌고 신해혁명 이후 장시 도독이 되어 난징에 주둔하였다.

위안스카이가 제제 운동을 벌였을 때 돤치루이와 펑궈장은 군주제의 부활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두 사람 모두 위안스카이가 죽은 뒤 자신이 대총통에 오르겠다는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돤치루이는 이제와서 위안스카이를 설득할 방법도 없을 뿐더러, 그의 제제가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계산하였다. 따라서 노골적으로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어 위안스카이의 심기를 건드리는 대신, 병을 핑계로 베이징 교외의 자택에서 은거한 채 정세를 살피었다. 하지만 펑궈장은 직접 베이징으로 올라왔다. 군주제의 부활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 위안스카이의 의향을 묻고자 함이었다. 위안스카이는 그에게 솔직하게 말하지 않고 "이제와서 내가 어떻게 옥좌에 앉겠는가"라면서 거짓말을 하였다.

펑궈장의 의도는 결코 공화제를 지키기 위함이 아니라 이제와서 군주제가 부활한다면 국가는 물론이고 위안스카이에게도 반드시 해가 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예상대로 위안스카이의 허황된 야심은 얼마 지나지 않아 실패로 끝났다. 그는 위안스카이가 자신을 속였음에도 끝까지 충성심을 버리지 않았고 전국에서 위안스카이 타도의 혁명이 일어나자 혁명에 가담하지 않은 성의 독군들을 불러모아서 위안스카이에게 충성을 맹세하라고 윽박지르기도 하였다. 하지만 주군을 위해 스스로 악역을 도맡는 식의 행동은 매번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나기 일쑤였기에 자신의 명성과 평가까지 실추되었다.

어쨌거나 위안스카이가 죽은 뒤 펑궈장은 부총통에, 돤치루이는 국무총리에 올랐다. 왕스진은 육군총장 겸 참모총장으로서 북양군의 총수가 되었지만 정치적 야욕도 없고 자신의 파벌이 없었기에 권력의 중심에서는 멀리 있었다. 이 세 사람이 위안스카이 사후 베이징 정부를 좌지우지하는 실세였다. 만약 이들이 사리사욕을 버리고 국가를 위하여 서로 힘을 모았다면 중국의 혼란은 금새 안정되었으리라. 그러나 각자 다른 꿍꿍이를 하면서 이해득실을 계산하기에만 급급하였다.

펑궈장과 돤치루이는 어쩌다가 벼락출세한 리위안홍을 대총통 감이라고 여기지 않았기에 속으로 깔보았다. 그렇다고 서로 자신이 대총통이 되겠다고 나설 수도 없는 처지였다. 두 사람 모두 위안스카이에 비해 실력이나 위세에서 훨씬 형편없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어느 한쪽이 대총통이 되려고 한다면 남방의 반발은 물론이고 북양군부터 분열되어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눌 판이었다. 따라서 기회를 보아서 다른 한쪽을 몰아내고 북양군을 장악한 다음, 대총통 자리를 넘겨받을 생각이었다. 그때까지 대총통은 리위안홍에게 잠시 맡겨둔다는 속셈이었다. 

부총통이 된 펑궈장은 베이징으로 올라가지 않고 자신의 근거지인 난징에 남은 채 리위안홍과 돤치루이의 베이징 정부를 견제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또한 남쪽에서는 쑨원이 베이징 정부에 반란을 일으킨 해군 제1함대를 이끌고 광저우로 내려가 "광저우 군정부"를 수립한 다음, 서남의 여러 군벌들을 규합하고 있었다. 위안스카이 사후 중국의 정세는 리위안홍-돤치루이의 베이징 정부와 난징의 펑궈장, 그리고 쑨원의 광저우 군정부가 서로를 견제하는 천하 삼분의 형세가 되었다.

펑궈장은 일본을 등에 업고 권력을 전횡하려는 돤치루이를 어떻게든 견제하려 하였다. 하지만 매번 돤치루이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식이었다. 관료로서나 군인으로서의 역량은 펑권장이 뛰어났지만 권모술수에서 돤치루이가 몇 수 위였기 때문이었다. 당대 사람들에게 돤치루이가 "호랑이", 펑궈장이 "개"라고 불린 것도 "개는 아무리 짖어도 성난 호랑이를 이길 수 없다"라는 비꼼이었다. 결국 펑궈장은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나 정계를 은퇴하였고 1919년 12월 28일 울분에 못이겨 풍한이 악화되면서 죽었다. 

펑궈장의 생전에는 즈리파가 안후이파에게 눌렸지만, 그가 죽은 뒤 새로운 수령이 대신하였다. 즈리 성장 차오쿤(曹錕), 그리고 그의 막료였던 우페이푸였다. 두 사람은 돤치루이 못지 않은 야심가이자 권모술수의 대가였다. 특히 펑궈장과 마찬가지로 청말 수재 출신이었던 우페이푸(吳佩孚)는 문무를 겸비한 북양군 제일의 명장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등장은 좀 더 훗날의 일이다.

* '부원지쟁'과 대독 선전 포고

아무리 펑궈장과 돤치루이가 허수아비로 여긴다고 해도 리위안홍 또한 호락호락한 인물은 결코 아니었다. 비록 휘하에 직계 군대도 없고 승냥이같은 북양군벌들 사이에 끼인 채 엄중한 감시를 받는 한나라 헌제와 같은 신세였지만 그에게는 우창봉기 당시 혁명군을 지휘하여 청조를 몰락시켰다는 명성과 자부심이 있었다. 리위안홍의 독자적인 행보는 그를 대권 장악을 위한 과도적인 인물로 취급하던 돤치루이와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

6월 29일 대총통의 명의로 위안스카이가 폐지했던 구약법이 부활하면서 8월 1일에는 국회가 2년만에 다시 열렸다. 또한 남북 화의가 체결되면서 차이어는 7월 14일 호국군정부의 해체를 선언하였다. 그는 윈난성과 쓰촨성의 독군을 겸임하면서 서남 제일의 실력자가 되었다. 또한 그동안 위안스카이 타도를 외치며 독립을 선언했던 각 성들도 독립을 취소하면서 반년 동안 중국 대륙을 뒤흔들었던 호국전쟁은 막을 내렸고 다시 평화가 오는 것처럼 보였다.

한편 돤치루이는 북양군벌의 재편에 나섰다. 그는 여러 성의 독군(督軍)들을 불러 모아서 소위 "독군단(督軍團)"을 조직하였다. 독군이란 성의 군정을 맡은 최고 책임자로 중화민국 건국 이후 "군민분치론"에 따라 민정을 맡은 성장과 군정을 맡은 독군을 분리시켜서 지방정부를 약화시키고 중앙정부의 권위를 강화하려 했지만 중앙의 혼란을 이용해 군사권을 가진 독군이 성장을 겸임하거나 성장의 임명권을 행사하는 실정이었다. 돤치루이는 독군단을 이용해 북양군을 결집시킨 후 리위안홍을 핍박하여 쫓아낸 후 대권을 차지하겠다는 속셈이었다.

두 사람의 본격적인 갈등은 제1차 세계대전의 참전과 대독선전포고를 놓고 시작하였다. 원래 유럽국가의 전쟁이었던 제1차 세계대전은 1917년 1월 31일 독일 정부가 연합국의 해상선을 파괴하기 위해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선언하고 2월 3일 미국이 단교와 참전을 선언하면서 전쟁은 세계대전으로 확대되었다. 중국은 그동안 직접적인 관계가 없고 국내 정치를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다는 이유로 중립을 고수해 왔다. 일본 역시 중국의 참전이 국제 사회에서 중국의 지위를 높일 것을 우려하여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미국 윌슨 행정부는 참전 선언과 함께 중국에 대해서도 동참을 요구하면서 그 대가로 원조를 제공하겠다고 제안하였다. 2월 9일 리위안홍과 돤치루이는 국무원 회의에서 미국의 제안을 안건으로 삼아 참전을 수락키로 결정하였다. 이것은 중국 주권의 문제였지만 예상치 못하게 일본의 강력한 반발에 직면하였다.

당시 일본 총리는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원수였다.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조선 병합에 앞장섰고 초대 조선 총독이 되어 악랄한 무단 통치를 실시하였다. 일본에서 가장 대표적인 제국주의자 중 한 사람이자 중국 침략의 기회를 노리던 그는 중국이 미국과 결속한다면 자신의 계획이 틀어질 우려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도쿄 주재 중국 공사 장쭝샹(章宗祥)을 불러서 "일본은 중국의 참전을 반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미국을 중시하고 일본을 경시하는 태도는 묵과할 수 없다"라면서 엄포를 놓았다. 

장쭝샹은 도쿄제국대학 출신의 대표적인 친일 외교관이다. 데라우치의 호통에 그는 허둥대면서 돤치루이에게 급히 보고하였다. 돤치루이로서도 일본의 원조를 절실히 원하던 판이었기에 일본을 적으로 돌릴 생각이 없었다. 그는 즉시 사죄문을 보냈다. "앞으로 두번 다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보증하겠다. 또한 대독 선전포고는 반드시 사전에 일본과 성실하게 상의하여 결정할 것이다." 데라우치는 비로소 흡족해 하였다. 또한 니시하라 가메조(西原龜三)라는 낭인 출신의 정치 브로커를 이용하여 돤치루이에게 거액의 차관을 제공키로 몰래 약속하였다.

돤치루이는 그 대가로 중국 전역의 전신 사업 이권을 일본에게 넘기고 만주의 삼림, 광산 개발권 제공, 산둥성의 할양, 만주와 조선을 연결되는 철도 건설에 동의하였다. 한마디로 만주와 내몽골, 산둥성의 주권을 통째로 일본에게 넘기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청조나 일본과 21개조 조약을 맺었던 위안스카이조차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던 매국적인 행동이었다. 이것이 나중에 데라우치 내각이 뒤집어지는 최대의 금융 스캔들이자 중국에서 5.4운동이 폭발하게 되는 "니시하라 차관"이다.

돤치루이와 일본의 결탁은 리위안홍에게는 불쾌한 일이었다. 그는 돤치루이를 견제할 생각으로 미국을 끌어들이려고 했지만 미국은 중국 내부의 문제에 별 관심이 없었다. 리위안홍은 참전을 지지하던 태도를 바꾸어 대독선전포고와 참전문제는 국회에서 결정할 부분이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미 일본의 뇌물을 받고 있었던 돤치루이는 리위안홍의 말 바꾸기에 격분하여 국무회의를 소집하여 일방적으로 대독 참전을 통과시킨 다음 각료들과 함께 대총통부로 몰려가서 날인을 강요하였다. 리위안홍이 끝까지 거부하자 돤치루이는 분을 참지 못한 채 사직서를 던지고 톈진으로 가버렸다. 리위안홍의 대총통부와 돤치루이의 국무원 사이의 싸움이라 하여 사람들은 "부원지쟁(府院之争)"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북양군의 추대를 받아 대총통이 된 리위안홍이 북양군의 수장인 돤치루이를 적으로 돌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의 권위는 북양군의 지지 없이는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결국 백기를 든 쪽은 리위안홍이었다. 3월 10일 중의원에서 독일과의 단교 문서가 통과되었고 14일 공식적으로 선포되었다. 돤치루이의 뜻대로 된 것이다. 또한 그는 대독 선전 포고를 놓고도 깡패들을 동원하고 국회를 포위하는 등 온갖 행패를 부렸다. 참다 못한 리위안홍은 돤치루이를 국무총리에서 해임시키고 외교총장인 우팅팡(伍廷芳)을 대리 국무총리에 임명하였다. 하지만 아무런 힘이 없는 리위안홍이 돤치루이와 어떻게 맞설 수 있을 것인가. 오히려 북양군의 독군들은 돤치루이의 편을 들어 리위안홍을 공격하고 중앙과 관계를 끊겠다고 선언하였다. 또한 각지의 군대가 베이징으로 진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돤치루이에게 토벌당할 판이 된 리위안홍은 쉬저우에 주둔한 창장순열사(长江巡阅使) 장쉰에게 군대를 이끌고 베이징으로 와 달라고 간청하였다. 장쉰은 북양파 원로로서 돤치루이, 펑궈장을 견제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유일한 인물이었다. 리위안홍은 장쉰을 등에 업고 사태를 수습해 볼 생각이었지만 막상 베이징에 들어온 장쉰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사건을 일으켰다. 다름 아닌 청조의 부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