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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 전쟁과 인물, 사건으로 보는 중국 현대사 > 11화 - 간웅 죽다/blog.naver.com/atena

* 호국군 출동하다

12월 25일 차이어와 탕지야오는 "위안스카이가 중화민국을 배반하여 스스로 국가 원수의 자격을 상실한 이상 군대를 일으켜 토벌할 수 밖에 없다"라는 격문을 전국에 보냈다. 27일에는 윈난 군정부를 수립하였고 2만명의 군대가 토원과 국체 수호를 외치며 출동했다. 위안스카이는 그제야 호랑이를 산으로 돌려 보냈음을 깨달았다. 차이어의 반란은 허명 뿐인 쑨원, 황싱과는 감히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일본 육사를 졸업한 그는 유능한 군인이자 당대 중국의 대표적인 군사 사상가로서 명망을 떨쳤다. 또한 강력한 기반과 무력, 인망도 있었다. 차이어와 량치차오, 쑨원 세 사람이 손을 잡는다면 위안스카이 정권을 뿌리부터 흔들 수 있었다.

위안스카이는 제위에 오르겠다는 허황된 욕심에 눈이 멀어서 심복들을 동원하고 막대한 돈을 뿌려가며 어떻게든 옥좌에 앉는데 성공했지만, 스스로도 어거지같은 짓인지 모르는 바도 아니었다. 순친왕이 끝까지 입헌의 목소리를 거부하고 전제 정치를 강화하려다가 전국의 저항에 부딪쳐 결국 청조가 파멸한 것이 겨우 몇년 전의 일이었다. 황제를 억지로 끌어내고 공화정을 수립한 사람이 다름 아닌 위안스카이 자신이 아니던가. 전제 군주제는 수천년 동안 중국을 지배해 왔지만 이제는 시대착오적인 유물에 불과하였다.

황제 즉위 후 신화궁의 화려한 옥좌에 앉은 위안스카이. 옥좌 하나를 만드는데 든 비용만 240만 위안(약 45만 달러)에 달했다. 그의 어리석은 야심은 국가 재정을 파탄으로 내몰았을 뿐더러, 내전의 혼란에 빠뜨리고 일본의 침략을 끌어들이는 등 오대십국 시절 연운 16주를 요나라에 넘겼던 석경당과 함께 중국 오천년 역사 제일의 간웅으로 꼽힌다.

게다가 그는 국가의 지도자로서 새로운 세상을 열어보겠다는 명확한 통치 철학도, 계획도 없었다. 단지 황제가 되어서 집안의 영광을 자손만대까지 남겨보겠다는 하찮은 욕심만이 있을 뿐이었다. 격동의 시대에 태어나 시운에 편승한 이 행운아는 결코 무능한 자는 아니었다. 나름대로 당대 보기 드문 정치적 감각과 유능한 관료로서의 역량을 갖추었다. 또한 서태후, 리훙장같은 당대의 권세가들의 비위를 눈치껏 맞추며 벼락출세의 기회를 잡을 줄도 알았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을 읽거나 국난을 헤쳐나갈 강력한 리더쉽은 없었다. 스스로 유방, 주원장과 같은 위대한 영웅이 되기를 원했지만 실상 소인배에 불과했던 것이다.

거창한 즉위식까지 거행하면서 황제가 되었으면서도 주변의 시선이 어떨지 늘 전전긍긍해 하였다. 21일에는 288명에 달하는 심복들에게 공작이니, 백작이니 하는 작위를 나누어 주었다. 또한 부통총 리위안홍에 대해서는 귀한 보물과 함께 억지로 딸을 보내어 사돈까지 맺고 "무의친왕(武義親王)"이라는 거창한 칭호를 내렸지만, 리위안홍은 책봉을 거절하고 국무 회의에도 참석하지 않은 채 자기 집에 틀어막혔다. 심지어 수십년 지기의 친우이자 국무총리였던 쉬스창(徐世昌)조차 위안스카이의 신하가 될 수는 없다며 사직서를 던지고 고향으로 내려가 버렸다.

또한 심복 중의 심복이자 위안스카이를 대신하여 실질적으로 북양군을 좌지우지하는 돤치루이에게는 비위를 맞출 요량으로 쉬스창을 대신하여 국무경(國務卿)으로 임명하였다. 국무경이란 이전의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직책으로, 위안스카이가 국회를 해산시킨 후 1914년 5월 1일 대총통의 지시를 일방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내각 대신 정무당(政事堂)이라는 조직을 만들면서 그 수장에 해당하는 것이 국무경이었다. 하지만 국무총리의 권위란 원래 국회에서 나오는데 그 국회가 없으므로 실상 대총통의 얼굴마담에 불과할 뿐 아무런 실권도 없었다.

야심만만한 돤치루이는 그런 허울뿐인 자리에 만족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위안스카이가 일본의 21개 요구를 수락한 것과 군주제의 부활을 반대한다는 명목으로 스스로 자리를 던진 채 낙향하였다. 괘씸하게 여긴 위안스카이는 장강 순열사(長江巡閲使) 장쉰(張勳), 펑톈 장군 단즈구이(段芝貴), 광둥 장군 룽즈광(龍濟光)에게도 공작의 작위을 하사했지만 돤치루이에게는 아무런 작위도 내리지 않았다. 또 한 사람의 심복인 장쑤 장군 펑궈장은 돤치루이와 쌍벽을 이루는 북양군 필두의 장군이자 난징에 주둔하면서 남방을 감시하는 중책을 맡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도 사이가 완전히 틀어지면서 위안스카이는 이름 뿐인 공작의 작위만 내렸을 뿐, 그를 중앙으로 불러들이거나 승진시키지도 않았다.

사실 펑궈장과 돤치루이 두 사람 모두 위안스카이가 죽은 뒤 자기가 대총통이 되겠다는 욕심이 있었다. 따라서 이들로서는 위안스카이가 군주제를 부활시킨 다음, 무능하고 인망도 없는 위안커딩에게 옥좌를 물려주겠다는 계획에 찬성할 리가 없었다. 위안스카이로서는 불쾌한 일이었지만, 북양군을 배경으로 권력을 차지한 그가 자기 새끼인 북양군과 대립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정권이 얼마나 취약했는지 보여준다, 위안스카이의 주변에 남은 자들은 그에게 빌붙어 뭔가 떡고물이나 부귀영화를 꿈꾸는 옛 청조 시절의 만주귀족, 몽골귀족들 뿐이었다. 물론 이들에게는 아무런 능력도 충성심도 기대할 수 없었다.

또한 위안스카이는 군주제 부활이 열강들과의 마찰로 이어질까 우려하였다. 미국과 일본, 영국은 중국의 내정문제일 뿐이라며 선을 그었지만 프랑스와 러시아, 이탈리아는 이로 인해 중국의 정치적 혼란이 가중될까 우려하였다. 소심하기 짝이 없는 위안스카이는 외세의 눈치를 보는데 급급하여 외교 문서를 보낼 때에는 국호를 중화제국이 아닌, 중화민국이라고 썼고 자신 또한 황제가 아닌 대총통으로 행세하였다. 그는 어디까지나 중국 안에서만, 그것도 베이징에서만 황제였다. 그렇다보니 중국은 중화민국도 아니고 중화제국도 아니면서 동시에 두 가지 모두이기도 하였다. 중국 내 외국계 신문들은 위안스카이를 "황제 총통"이라 불렀다. 그리고 "도대체 총통이냐, 황제냐"라면서 그의 소심한 행태를 비꼬았다.

따라서 위안스카이가 제위에 오른 지 고작 2주 만에 차이어의 거병은 그야말로 통렬한 일격이었다. 처음에는 보고를 받은 위안스카이도 어리둥절하였다. 자신은 왕망이나 조조처럼 누구를 내쫓겨 그 자리를 빼앗은 것도 아니다. 원래부터 권좌는 그의 것이었다. 다들 간절하게 제위에 오를 것을 간청하기에 공화제를 군주제로 바꾸었을 뿐이었다. 그 외에 뭐가 달라졌다는 말인가. 적어도 위안스카이는 그렇게 믿었다. 그의 착각은 장남 위안커딩이 민심이니 천심이 옆에서 부추기고 심지어 가짜 순천시보까지 조작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스스로 마음 한켠에 용포를 입고 옥좌에 앉겠다는 허황된 야심이 없었다면 가능했겠는가.

위안스카이는 차이어가 "은혜도 모르고 하늘과 백성의 뜻도 모른다"라며 격분하여 당장 토벌을 명령하였다. 차이어의 윈난군이 아무리 남방의 정예부대라고 해도 북양군과의 실력 차이는 컸다. 열강들은 대체적으로 위안스카이의 칭제를 묵인하는 분위기였다. 위안스카이로서도 기왕 여기까지 왔는데 고작 서남 변방의 일개 소란 때문에 꼬리를 내린다는 것은 체면 문제였다. 12월 29일 그는 반란군에 가담한 자들의 모든 직위를 박탈한 후 자신의 집무실인 신화궁(新华宫, 지금의 중난하이)에 윈난정벌군무처를 설치하였다. 토벌군 총사령부인 셈이다.

토벌군은 3개의 부대로 편성되었다. 제1로군은 제6사단을 주축으로 제20사단, 제7혼성여단으로 편성되었고 후난성에 주둔한 부대와 함께 장시성과 후난성, 구이저우성을 거쳐서 윈난성 동북쪽으로 진군할 계획이었다. 병력은 2만 6천명. 그리고 사령관은 장시성 난창에 주둔하고 있는 제6사단장 겸 감북 진수사(赣北镇守使, 여기서 감赣은 장시성을 가리킴) 마지정(马继增) 중장이었다. 그는 의화단의 난 당시 광서제와 서태후를 시안까지 안전하게 호송하는 등 군인으로서의 역량은 뛰어나지 않았으나 우직하면서 충성심이 높았다. 위안스카이는 그에게 직접 군도까지 하사하면서 반란군을 토벌하고 차이어를 베이징으로 압송하라고 격려하였다.

제2로군 사령관은 베이징에 주둔한 제7사단장 장징야오(张敬尧) 중장이었다. 그는 35살의 젊은 장군으로, 바오딩 군관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청말 신건육군 시절부터 위안스카이와 함께 했던 심복 중의 심복이었다. 또한 전 해에는 허난성과 산시성, 후베이성 일대를 뒤흔들었던 백랑의 난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쑨원의 2차 혁명에서도 장시성으로 진군하여 리례쥔의 혁명군을 단숨에 제압하는 등 전쟁 경험이 풍부한 자였다. 그의 제2로군은 제7사단을 주축으로 북양군 최강부대인 제3사단, 제8사단 등으로 편성되었으며 쓰촨 장군 진환(陳宦)이 지휘하는 쓰촨군 3개 혼성여단과 함께 남하하여 윈난성 북쪽으로 진군할 계획이었다. 병력은 4만 5천명.

제1로군과 제2로군의 총사령관에는 제3사단장 겸 호위장군(虎威将军) 차오쿤(曹锟) 상장(대장)을 임명하였다. 10여년 뒤 즈리파의 우두머리로서 중국의 대총통이 되는 그는 리훙장의 톈진무비학당을 졸업하였고 청일전쟁 당시에는 쑹칭(宋庆)의 의군(毅军) 휘하에서 哨官(초관, 중대장)으로서 압록강과 만주에서 일본군과 싸우며 용맹을 떨치기도 하였다. 이후 위안스카이의 신건육군의 대대장을 맡아 그의 눈에 들었고 위안스카이의 가장 충실한 부하 중의 하나가 되었다. 신해혁명 직후 위안스카이가 조정에 황제의 퇴위를 강요하자 만주 귀족들이 강력하게 반발하면서 팔기군을 동원할 태세를 보였다. 위안스카이는 차오쿤의 제3사단을 이용해 베이징과 자금성을 신속하게 장악하였고 만주 귀족들의 손발을 묶은 다음 푸이를 끌어내릴 수 있었다. 따라서 위안스카이에게 차이쿤의 공은 매우 컸고 그의 지위와 위세는 북양 삼걸이라 불리는 육군총장 왕스진(王士珍), 국무경 돤치루이(段祺瑞), 장쑤장군(江蘇将軍) 펑궈장(馮国璋)과도 맞먹을 정도였다.

또한 별동대로서 광둥군 제1사단을 제3로군으로 편성하였다, 이들은 서진하여 리례쥔이 지휘하는 호국군 2군을 격파한 후 윈난성 동쪽을 침공하여 제1, 제2로군과 함께 삼면에서 쿤밍을 포위 공격할 계획이었다. 사령관은 "임무장군(临武将军)" 용진광(龍覲光) 중장이었다. 그는 윈난성의 소수민족 중 하나인 하니족(哈尼族) 출신으로, 청조 시절 현령(县令)을 맡는 등 전형적인 구식 관료였다. 토비들을 진압한 경험은 있어도 정규 군사교육을 받았거나 전쟁의 경험은 없었다.

어쨌거나 토벌군의 숫자는 무려 8만명이 넘었고 호국군을 완전히 압도하였다. 하지만 이리저리 끌어모은 혼성부대인데다 현지 지형에 어둡고 태반이 오합지졸이라는 점 등 결코 유리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반면, 차이어가 직접 양성한 윈난군은 무기와 장비를 충실히 갖추었으며 훈련과 규율도 우수하였다. 백랑의 난 당시 북양군의 작전을 직접 관전했던 차이어는 "윈난군 1개 사단이면 북양군 10개 사단을 능히 이길 자신이 있다"라고 호기롭게 말한 적도 있었다.

12월 27일 새벽, 호국군이 토원의 깃발을 앞세우고 출진하였다. 차이어가 직접 지휘하는 주력 부대인 제1군은 3개 지대 3천여명에 불과했지만 윈난군 최강의 정예부대였다. 게다가 그 중에는 중국 현대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 있었다. 본명은 주다신(朱代珍), 그가 바로 훗날 마오쩌둥과 함께 공산혁명을 일으켜 중국 인민해방군 총사령관이 되는 주더(朱德) 원수이다. 원래 쓰촨성의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군인이 되고자 윈난성 쿤밍에 있는 윈난강무당(云南讲武堂, 동북강무당과 바오딩 군관학교와 함께 민국 초기 중국 3대 사관학교 중의 하나)을 졸업한 후 윈난강무당 교관과 대대장 등을 역임하였다. 호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윈난군 제10연대장이었던 그는 윈난성-프랑스령 베트남 접경에서 국경 수비를 맡고 있었다. 차이어는 뛰어난 역량을 갖춘 그를 급히 쿤밍으로 불러서 제3지대장을 맡겼다. 그의 나이 30살, 차이어와는 4살 아래였다.

쿤밍에서 출전을 앞두고 위안스카이 타도를 결의하는 호국군 지휘관들의 모습

차이어의 제1군은 북상하였다. 목표는 쓰촨성 남부의 요충지 이빈(宜賓). 쓰촨성의 성도 청두 정남쪽으로 약 300km 떨어진 곳이다. 그는 이빈을 점령한 후 루저우(瀘州)와 충칭을 거쳐 후베이성의 우창으로 진격할 생각이었다. 반면, 리례쥔의 제2군은 준비 부족으로 출진이 늦어지면서 2월 20일에야 쿤밍을 출발하여 광시성을 향해 동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군비와 탄약, 식량은  고작 2개월 분에 불과하였고 병력 면에서도 북양군과의 차이가 워낙 크다보니 차이어로서는 과연 거사가 성공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일개 성이 중국 전체를 상대로 싸우는 것이다. 윈난군이 아무리 정예해도 승리는 장담할 수 없었다.

쓰촨성을 향해 진군하는 차이어의 호국군

1916년 1월 1일은 위안스카이가 제제를 선언한 이래 "홍헌"의 연호를 공식적으로 사용한 첫 날이었다. 그는 신화궁에서 청조 시절의 전통적인 관례에 따라 문무백관들의 신년 하례를 받았다. 그러나 베이징과 톈진의 분위기는 매우 냉담했고 새해를 축하한다거나 중화제국의 깃발을 건 사람도 없었다. 열강 역시 그를 황제라고 부르거나 공문서에 "홍헌 원년"이라는 새로운 연호 대신, 이전과 마찬가지로 "민국 5년"이라고 쓰고 있었다. 결국 중화제국은 국제 사회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위안스카이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일본이었다. 21개조 요구를 수락하는 대가로 위안스카이가 옥좌에 앉을 수 있도록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던가. 지금이야말로 일본의 도움을 받아야 할 때라고 생각한 위안스카이는 농상부 총장(農商總長) 저우즈치(周自齊)를 특사로 도쿄에 파견하겠다고 통보하였다. 명분은 메이지 천황의 뒤를 이은 다이쇼 천황의 즉위를 축하한다는 것이었지만 누가 봐도 눈가리고 아웅하는 격이었다. 다이쇼 천황이 즉위한 날은 1912년 7월 30일이었으므로 벌써 3년 반이나 지났기 때문이었다. 즉, 진짜 속내는 일본의 지원을 얻어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열강들 또한 위안스카이와 일본의 밀착을 묵과할 생각이 없었다. 자칫 그동안 유지되어 왔던 중국에서의 세력 균형이 무너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베이징의 각국 공사관은 위안스카이의 속셈을 캐내려고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 정보를 수집하였다. 결국 저우즈치가 일본으로 가기 직전 프랑스 공사관에서 위안스카이의 측근을 매수하여 밀약의 내용을 알아내는데 성공하였다. 그 내용은 상상을 뛰어넘었다.

1. 지린성과 펑톈성의 사법권을 일본에게 양도한다.
2. 진포철도(톈진~난징을 연결하는 1,017km의 철도. 경한철도와 함께 중국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대동맥에 해당한다.)의 경영권을 일본에게 양도한다.
3. 톈진과 산둥성의 해안선을 일본에게 양도한다.
4. 중국 재정과 군사 고문으로 일본인을 초빙한다
5. 중국의 병기창과 무기 공급을 중일 양국이 합작한다.

이것은 일본이 21개조 요구에서도 감히 하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안스카이는 그 대가로 중국의 내란을 진압하도록 일본이 군대를 출동시켜달라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나라를 일본에게 넘기겠다는 말과 다를 바 없었다. 그의 머릿속은 이미 어떻게든 옥좌를 지켜서 자손만대까지 물려주겠다는 일념밖에 없었다. 하지만 밀약의 내용이 언론에 폭로되면서 위안스카이는 물론이고, 일본 정부마저 난처한 입장에 놓였다. 처음에는 특사 파견을 적극 환영했던 일본은 1월 15일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저우즈치의 방문을 거절한다고 통보하였다. 또한 비밀이 누설된 것은 전적으로 위안스카이의 잘못이라며 비난을 퍼부었다. 위안스카이는 체면이 땅에 떨어진데다 일본의 힘을 빌려 옥좌를 지키려고 했던 최후의 희망마저 사라진 셈이었다. 그의 음모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후유증은 컸다. 일본은 중국의 정치적 사정이 얼마나 복잡하며, 또한 권력자들이 얼마나 이기적인지 확실하게 알게 되었고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중국 침략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된다.

* 남방의 혈전

1월 5일 차오쿤이 지휘하는 중앙의 대군은 드디어 베이징을 출발하였다. 이들은 경한철도를 타고 남하하여 우한에 당도한 후 쓰촨성으로 들어가 충칭을 거쳐 윈난성으로 향했다. 또한 마지정의 제1로군은 난창에서 서진하여 후난성의 웨저우(岳州)를 거쳐 구이저우성으로 항했다.

한편, 호국군 제1군은 1월 16일 쓰촨성 접경을 돌파하였다. 쓰촨 장군 진환은 중앙군이 도착하기 전까지 최일선에서 호국군의 북상을 막을 의무가 있었지만 도무지 싸울 의욕이 나지 않았다. 그는 베이징에 있을 때 차이어와 교류한 적이 있었고 차이어의 기개나 역량도 잘 알고 있었다. 오합지졸에 불과한 쓰촨군으로 차이어를 상대로 싸워 이길 자신도 없을 뿐더러, 설령 서로 피를 흘리면서 싸운들 결국 그 공은 위안스카이의 심복인 차오쿤이 차지할게 뻔했다. 또한 차이어에게 "쓰촨 독립"을 선언하라는 밀전도 들어온 참이었다. 지휘관이 소극적이니 쓰촨군의 사기 또한 높을 리 없었다.

17일 이빈 서남쪽에서 호국군과 우씨앙전(伍祥禎)이 지휘하는 쓰촨군 1개 혼성여단 사이에 첫번째 전투가 벌어졌다. 차이어는 제1지대를 정면으로 공격케 한 다음, 야간을 틈타 제2, 3지대를 우회시켜 측면을 기습하였다. 불의의 공격을 받은 쓰촨군은 혼란에 빠진 채 퇴각하였다. 21일 이빈은 호국-군에게 점령되었다. 우씨앙전은 이빈 탈환을 시도했지만 반격을 받아 재차 격퇴당했다.

27일에는 구이저우 호군사(贵州护军使, 구이저우성의 군정을 맡은 장관) 리우씨엔쉬(劉顯世)가 차이어에 호응하여 독립 선포와 호국군 참여를 선언하였다. 그리고 구이저우군 제1연대장 왕원화(王文華)에게 3개 연대를 주고 후난성으로 진군시켰다. 또한 이와는 별도로 구이저우 순안사(貴州巡按使, 위안스카이 시절의 관직으로 성의 민정을 맡은 장관) 다이칸(戴戡)에게 2개 연대를 주어 치정(綦江)을 건너 쓰촨성 동남부를 침공케 하였다. 31일에는 이빈 북동쪽 루저우(瀘州) 교외에 주둔하고 있던 쓰촨군 제2사단장 류쩐호우(劉存厚)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3천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차이어에 투항하였다. 덕분에 차이어의 병력은 5천명 이상으로 늘어났고 사기 또한 충천했다.

차이어는 여세를 몰아서 루저우를 포위하였다. 루저우는 충칭과 구이저우성, 윈난성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였기에 반드시 함락시키지 않으면 안되는 곳이었다. 그는 단숨에 점령할 생각으로 연일 루저우에 대한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함락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 북양군 제3사단 선봉부대가 도착하였다. 병력은 겨우 2개 대대에 불과했지만 이들을 지휘하는 사람이 북양군 제일의 명장이자, 훗날 대군벌이 되어 동북왕 장쭤린과 천하를 다투게 되는 우페이푸(吳佩孚)였다.

우페이푸는 도착하자말자 몸소 위험을 무릅쓰고 최일선으로 나가 적진을 정찰하였다. 그는 류쩐호우의 쓰촨군이 주로 토비들로 구성되어 규율도 없는 오합지졸이자 아킬레스건이라는 사실을 금새 간파하였다. 그는 결사대를 뽑은 다음 직접 이들을 이끌고 쓰촨군의 진지를 향해 착검 돌격했다. 총탄이 빗발치듯 쏟아졌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류쩐호우의 진영에 돌입한 후 백병전을 벌였다. 우페이푸의 병사들은 소수였지만 미친듯이 총검과 대도를 휘두르자 오합지졸에 불과한 쓰촨군 병사들은 패닉에 빠진 채 붕괴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우페이푸는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렇다고 호국군 전체가 붕괴된 것은 아니었다.

차이어가 신속하게 전열을 정비한 후 반격에 나서자 우페이푸는 간신히 혈로를 뚫고 루저우로 퇴각하였다. 어쨌거나 그의 용전 덕분에 루저우 점령을 눈앞에 두고 있었던 호국군은 많은 손실을 입은데다 작전에도 심각한 차질이 빚어졌다. 차오쿤이 지휘하는 북양군 주력이 코 앞까지 온 이상 루저우에 매달릴 형편이 아니었다. 차이어는 즉각 포위를 풀고 10km나 남쪽으로 후퇴하여 유리한 고지를 장악하고 방어태세를 갖추었다. 전세는 역전되었지만 호국군 병사들은 쓰촨성 특유의 험한 지형지물과 연일 쏟아지는 비를 이용하여 5, 6명이 한조가 되어서 대로 주변에 잠복해 있다가 행군 중인 적의 대열을 향해 총을 쏘거나 야습을 하였다. 일본육사에서 공부했던 차이어로서는 일본군의 기습 전술에 익숙하였다. 현지의 지형과 풍토에 익숙치 못한 북방의 병사들에게는 그야말로 고통의 연속이었다. 

게다가 차오쿤은 전형적인 청말 관료 출신의 정치 군인이었다. 윗 사람의 비위는 잘 맞추어도 막상 대군을 지휘하거나 작전을 세우는 능력은 없었다. 그는 지형지물을 따지지도 않고 적의 공격을 받기 쉬운 곳에 병력을 아무렇게나 밀집시켰다. 차이어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맹렬한 포격과 기관총 사격을 집중시켜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우페이푸가 소수의 기병을 이끌고 적진을 돌파하여 구원에 나서지 않았다면 차오쿤은 그대로 죽은 목숨이었을 것이다. 죽다 살아난 차오쿤은 그 자리에서 "전투는 이제부터 우페이푸에게 일임한다"라고 하였다.

북양군이 속속 도착하면서 쓰촨군까지 합하면 토벌군은 무려 7만명에 달하는 대군이었다. 2월 14일부터 쓰촨군 제1사단과 북양군 제3사단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공세에 나섰다. 물론 차이어의 방어도 만만치 않았고 일진일퇴 끝에 20일이 되자 전선은 일시적으로 교착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호국군의 전력은 압도적으로 열세한데다 탄약과 식량도 떨어진 상태였다. 2월 22일 그는 쿤밍으로 전보를 보내어 "남은 포탄은 겨우 2백발에 탄약도 1/3밖에 남지 않았다"라면서 급히 지원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제16혼성여단의 기습으로 호국군의 병참선이 끊어졌다. 차이어의 퇴로를 차단한 사람은 훗날 "서북왕"이라 불리며 장제스와 천하를 다투게 되는 펑위샹이었다. 위안스카이는 그 공으로 펑위샹에게 남작의 작위를 내렸다. 결국 차이어는 3월 8일 퇴각을 명령하였다. 북양군은 추격에 나섰지만 호국군의 지연전술과 험준한 지형에 가로막혀 전진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쓰촨성 남부에서 루저우를 놓고 일진일퇴의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왕원화가 이끄는 구이저우군이 1월 27일 후난성을 침공하였다.제1연대가 2월 2일 구이저우성과 후난성 접경에 있는 작은 마을 라오황(老晃)과 황저우(晃州)를 점령하였다. 또한 우꽁꽌(蜈蚣關)에서 북양군 제5혼성여단과 우꽁꽌 수비대를 격파하고 관을 점령하였다. 13일에는 제1연대와 제3연대가 연합하여 북양군을 격파하고 위안저우(沅州)까지 함락시켰다. 연전연패에다 일부 부대가 반란을 일으켜 구이저우군에 투항하는 일까지 벌어지자 제1로군 사령 마지정은 울화가 폭발하여 2월 26일 스스로 패전의 책임을 지고 자결하였다. 왕원화는 여세를 몰아서 훙장(洪江), 징쉬옌(靖縣), 쑤이닝(綏寧) 등 후난성 서남부의 태반을 점령하는 등 파죽지세로 진격하였다. 그나마 3월 15일 북양군 제6사단이 반격하여 구이저우군을 격퇴하는데 성공했지만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한 채 후난 서부 또한 교착 상태가 되었다.

호국군의 진로(1916.1월 ~ 3월)

리례쥔의 호국군 제2군은 3월 초 광시성의 접경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용진광이 지휘하는 광둥-광시 혼성부대 8천여명도 윈난성을 향해 진군 중이었다. 양군은 푸닝(富寧), 광난(廣南) 일대에서 충돌하였다. 쌍방의 전력은 백중지세였기에 며칠에 걸쳐 일진일퇴의 치열한 혈전이 벌어졌다. 그런데 뜻밖의 사건이 일어났다. 3월 12일 광시군이 반란을 일으켜 용진광이 체포되고 광둥군은 무장해제당했다. 그리고 15일 영무장군(寧武將軍) 루롱팅(陸榮廷)이 광시성의 독립과 호국군 가담을 선언하였다. 이로 인해 토벌군 제3로군은 변변히 싸우지도 못한 채 와해되었다. 삼면에서 윈난성을 포위 공격하겠다는 위안스카이의 전략 한축이 무너진 것이었다. 이는 그야말로 치명타였다. 압도적인 북양군의 공세에 차이어의 호국군이 한창 수세에 내몰리고 있었기에 위안스카이는 금새 반란이 진압되리라 안심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루롱팅을 시작으로 전국의 성들이 차례로 반기를 들면서 전세는 한순간에 뒤집어졌다.  

* 83일의 천하로 끝난 황제의 꿈

광시성의 제왕 루롱팅을 설득한 사람은 량치차오였다. 차이어가 쿤밍으로 들어가 위안스카이 타도의 기치를 올렸을 때 그는 여전히 상하이에 남아 있었다. 처음에 거사를 계획할 때 량치차오는 "윈난성이 일어서면 1개월 안에 구이저우성이 따를 것이고 2개월 뒤에는 광시성이 호응할 것이다. 윈난과 구이저우의 군대로 쓰촨을 무찌르고 광시성의 병력으로 광둥성을 공략한다. 양로의 군대가 후베이성의 우한에서 집결하여 북상한다면 중원을 평정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그는 펑궈장과 만나서 공화제 부활에 앞장서 달라고 설득하였다. 펑궈장은 위안스카이에 대한 불만이 컸기에 즉석에서 동의하였다. 루롱팅에게도 위안스카이와 손을 끊으라는 편지를 보내었다.

하지만 쓰촨성과 후난성으로 진격한 호국군은 전세가 결코 유리하지 않았고 구이저우성을 빼고는 전국에서 호응하는 움직임도 없었다. 차이어는 그야말로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다. 이대로라면 진압당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량치차오는 직접 윈난성으로 가기로 결심하였다. 3월 4일 일본국적의 배를 타고 홍콩으로 가서 광시성을 거쳐 윈난성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위안스카이의 감시가 너무 심하여 도무지 광시성으로 들어갈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량치차오의 편지를 읽은 루롱팅은 윈난 호국군이 자신의 영토를 향해 진격하고 있는 상황에서 위안스카이의 허황된 야심 때문에 손해를 볼 이유가 전혀 없다고 판단하고 결국 위안스카이와의 결별을 결심하였다. 그는 광시성의 독립을 선언하고 스스로 광시호국군 총사령에 올랐다. 량치차오가 광시성의 성도 난닝에 도착한 것은 4월 4일이었다.

일본도 완전히 등을 돌렸다.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 내각은 중국의 정세가 심상치 않으며 위안스카이 정권이 위태롭다는 것을 깨닫고 3월 7일 열린 각료 회의에서 위안스카이의 제제 포기를 요구키로 결정하였다. "국가의 권위가 실추되고 민심이 이반되는 상황에서 더이상 제제를 고집하는 것은 국내의 불안을 야기할 뿐 양국의 친선에도 도움이 되지 않으며 유리할 것이 없다"라는 국서와 함께 심지어 제제를 포기하지 않으면 당장 출병하여 위안스카이를 공격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진퇴양난에 놓인 위안스카이는 호국군을 하루라도 빨리 진압하기 위해서 돤치루이와 펑궈장에게 전보를 보내어 군대를 맡아주기를 청하였다. 하지만 베이징 교외의 자기집에 틀어박혀 있던 돤치루이는 "중병에 걸려서 불가합니다"라고 대답하였고 난징의 펑궈장 역시 똑같은 답신을 보내왔다. 위안스카이는 속이 터질 판이었다. 그렇다고 홧김에 이들을 자리에서 쫓아낸다면 당장 휘하의 군대를 동원하여 총부리를 들이댈 것이 불보듯 뻔했다.
 
집안도 시끄러웠다. 그의 처첩들과 아들들은 황후와 황태자의 자리를 놓고 온갖 암투를 벌이며 위안스카이만 보면 서로를 비방하였다. 게다가 위안스카이가 장남인 위안커딩이 다리가 불편하여 황제의 풍체에 걸맞지 않다는 이유로 둘째 아들 위안커원(袁克文)을 후계자로 삼으려고 하자 위안커딩과 위안커원 사이에 큰 싸움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17명에 달하는 아들들은 하나같이 무능하고 놀기 좋아하는 한량일 뿐, 북양군을 한손에 장악하거나 국가를 경영할 역량 따위는 없었다. 게다가 위안스카이는 우연히 자신이 평소 읽고 있던 <순천시보>가 위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제야 "천심"이니 "민심"이니 하는 것들이 죄다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위안커딩을 불러서 추궁하였다. 겁에 질린 위안커딩은 머리를 조아리며 아버지를 제위에 올리고 자신은 황태자가 되려고 내용을 조작했다며 용서를 빌었다. 분노를 참을 수 없었던 위안스카이는 그를 채찍으로 후려치면서 "네 놈이 나를 망치고 나라를 망쳤구나"라고 호통을 쳤다. 하지만 아들을 혼낸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3월 20일에는 장쑤장군 펑궈장, 장강순열사 겸 정무상장군(定武上将军) 장쉰, 창무장군(昌武将軍) 이순(李純), 흥무장군(兴武将军) 주루이(朱瑞), 진무장군(泰武将軍) 진윈펑(靳雲鵬) 등 5명의 상장이 위안스카이에게 "어서 제제를 취소하고 공화제를 회복시켜 윈난, 구이저우의 반란을 진정시켜야 한다"고 연명으로 건의하였다. 이들은 위안스카이의 심복 중의 심복이자 북양군의 수장들이었다. 큰 충격을 이기지 못한 위안스카이는 이제는 다 끝났다며 대성통곡을 하였다.

다음날인 21일, 위안스카이는 정부 각료들을 모두 모아서 긴급 회의를 열었다. 쉬스창, 돤치루이, 리위안홍 등 그동안 제제를 반대했던 사람들도 참석하였다. 위안스카이는 회의 시작과 함께 말했다. "즉시 제제를 없었던 일로 하고 공화제를 부활시키겠다" 몇몇 각료들이 위안스카이의 비위를 맞출 요량으로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위안스카이가 다섯 상장군이 보낸 전문을 보여주자 모두 입을 다물었다.


마지막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한 사람은 위안커딩이었다. 그는 군주제를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상소문을 올렸다. "서남의 몇개 성이 군사를 일으켰다고 폐하께서 물러난다면 그들의 목소리만 더욱 커질 것입니다. 서남이 반발한다지만 북방의 군민들은 잠잠하지 않습니까? 지금은 폐하께서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 상책입니다. 서남의 군사들이 북방을 침범한다고 해도 거리가 멀어 베이징까지 쳐들어 올 수는 없습니다. 승부는 아직 알 수 없으며 설령 온 나라를 얻지는 못하더라도 중국의 절반은 남아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위안커딩의 주장은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의 헛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북양군마저 믿을 수 없게 된 상황에서 더 이상 고집을 부려본들 소용이 없다는 것은 위안스카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3월 22일, 그가 천자의 자리에 오른지 103일 째 되는 날이었다. 그는 전국에 공식적으로 군주제의 철회와 홍헌의 폐지를 선언하고 중화민국 5년으로 되돌린다고 선언하였다. 대신 대총통의 자리는 그대로 누릴 참이었다. 4월 1일 차이어의 호국군에게 평화회담의 개최와 서로 군대를 돌려서 이전 상태로 되돌리자고 제안했지만 차이어의 대답은 냉랭했다.

1. 위안스카이는 즉각 자리에서 물러나되 관용을 베풀어 사형은 면하고 국외로 추방한다.
2. 제제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13명은 사형에 처하여 천하의 본보기로 삼는다.
3. 제제 과정에서 쓰인 각종 경비 6천만 위안은 위안스카이와 그 일당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배상한다.
4. 위안스카이의 자손은 3대에 걸쳐 공민권을 박탈한다.
5. 위안스카이가 물러난 뒤 리위안홍이 임시 총통을 맡는다.

그 와중에 남방의 반란은 점점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다. 4월 6일에는 광둥 장군 룽즈광이 광둥성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룽즈광은 2차 혁명 당시 위안스카이에게 충성한 덕분에 그 자리에 앉아 부귀영화를 누렸다. 하지만 광시성이 호국군에 가담하자 언제 윈난군과 광시군이 연합하여 광둥성을 침공할지 모를 상황이 되었다. 또한 광둥성은 이전부터 쑨원의 영향력이 컸다. 쑨원은 천중밍 등을 보내어 반란을 선동하고 있었다. 룽즈광은 위안스카이에게 급히 전문을 보내어 중앙군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제 코가 석자인 위안스카이로서는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 더 이상 위안스카이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고 여긴 그는 자립을 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또한 4월 12일에는 저장성에서도 반란이 일어나 주루이를 쫓아내고 독립을 선포하였다. 반란은 점점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5월 9일에는 산시성, 22일에는 쓰촨성, 29일에는 후난성이 독립을 선언하였다. 독립을 선언한 장군들은 대부분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국가를 위해 하루라도 빨리 제위에 오르셔야 한다"며 아첨을 떨던 자들이었다. 이제는 안면을 바꾼 채 위안스카이더러 당장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강요하고 있었다. 위안스카이로서는 그야말로 사면초가였지만 자초한 것이니 누구를 원망할 것인가.

호국전쟁의 전황과 독립을 선포한 성(1916.1~6)

주제 모르는 욕심을 부리다 스스로를 망친 그는 결국 울화병에 걸렸다. 병세는 급격하게 악화되어 6월 초가 되자 신장 기능 이상으로 인한 요독증까지 발병하여 먹지도, 앉지도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죽음을 앞두고 측근들을 불렀다. "나는 어차피 살 가망도 없지만 설령 병이 낫는다고 해도 고향으로 돌아가 은거할 것이다. 총통은 리위안홍이, 국무총리는 쉬스창이 맡아야 한다."

6월 6일 오전 10시. 위안스카이는 회한을 품은 채 눈을 감았다. 간웅의 최후였다. 그의 나이 58살. 주변 사람들에게 항상 입버릇마냥 "우리 집안은 여지껏 59살을 넘긴 사람이 없었다"라고 말하였는데 그 말대로 된 셈이었다. 그가 죽는 순간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그 놈이 나를 망쳤다"였다. 위안스카이가 말하는 "그 놈"이 과연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동안 자신이 국가와 국민들에게 엄청난 해악을 끼친 것에 대해서는 조금의 반성이나 후회라고는 없었다.

위안스카이의 장례는 국장으로 성대하게 치루어졌고 그의 묘는 허난성 안양현(安陽)에 안장되었다. 주변에는 온갖 나무와 꽃으로 장식하였고 분묘는 강철 콘크리트를 부어서 만들었다. 훗날 문혁 때 그를 "나라를 훔친 대도(大盜)"라면서 홍위병들이 다이너마이트로 그의 묘를 날려버리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는 얘기도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