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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 전쟁과 인물, 사건으로 보는 중국 현대사 > 8화 - 위안스카이 황제를 꿈꾸다/blog.naver.com/atena

황제로의 길


9월 1일 ​장쉰의 무위군이 난징을 점령하면서 토원군은 와해되었다. 쑨원과 황싱 등 지도부는 일본으로 도망쳤다. 각지의 토원군 역시 모두 제압되었다. 9월 12일 차이어(蔡鍔)가 이끄는 윈난군이 쓰촨도독 슝커우(熊克武)를 격파하고 충칭을 점령하였다. 차이어는 중국 동맹회 회원이었고 신해혁명에서는 쿤밍에서 반청 봉기를 주도했음에도 2차 혁명에서는 위안스카이의 편에 선 것이다. 그만큼 쑨원의 지도력과 혁명파의 결속력은 취약하기 짝이 없었다. 이로서 2차 혁명은 한달 반만에 끝나고 말았다.


청조는 사라진데다, 쑹자오런은 죽었고 쑨원과 황싱 또한 패주하여 도망쳤다. 더 이상 아무런 걸림돌도 없어진 위안스카이는 다음으로 지도자를 잃어버린 국민당 국회의원들을 와해시키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의 방법은 매수와 체포, 암살이었다. 중의원의 의원으로 쑹자오런과 함께 대표적인 위안스카이 비판자였던 우한치(伍汉持)가 톈진에서 암살당했다. 또한 쑤씨우준(徐秀鈞)도 장시성 주장(九江)에서 암살당했으며, 참의원 8명이 체포되었다. 나머지도 일부는 도주했지만 대부분은 위안스카이와 맞서기보다는 그의 돈을 받고 전향하는 쪽을 택하였다.

거칠 것이 없어진 위안스카이는 국회를 소집하여 대총통 선거를 강행하였다. 그는 사실상 국회를 장악한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그럼에도 안심이 되지 않는다면서 경찰과 무뢰배들을 끌어모아 국회 선거장을 포위하였다. 이들은 평복 차림을 한 채 "공민이 원하는 대총통을 선출하지 않는다면 의원들은 한발짝도 나올 수 없을 것이다"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대총통 선거법에는 국회의원 2/3 출석에 3/4의 득표를 받아야만 당선될 수 있었다. 하지만 위안스카이의 강압적인 행동이 되려 의원들의 반감을 사는 바람에 많은 의원들이 일부러 출석하지 않거나 반대표를 던졌다. 이 때문에 정족수에 미달하자 어용세력들을 동원해 이들을 억지로 끌어내어 투표에 참여시켰다. 10월 6일 오전 8시부터 시작된 선거는 결국 3차 투표까지 가서 전체 의원 870명 중에서 745명이 출석하였고 위안스카이는 497표를 얻어 대총통에 선출되었다. 또한 부총통에는 리위안홍이 선출되었다. 어거지나 다름없는 선거였다.


1913년 10월 10일, 위안스카이는 중화민국의 정식 초대 대총통에 취임하였다. 원래라면 국회에서 취임해야 하지만 위안스카이는 법을 바꾸어서 청나라 황궁인 자금성의 태화전에서 성대한 취임식을 거행하였다. 그 화려함은 황제의 즉위식을 연상케 할 정도였다. 공교롭게도 이 날은 청조를 무너뜨렸던 우창 봉기 2주년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중국은 새로운 시대는 고사하고 거꾸로 돌아가고 있었다.


절차야 어떻든간에, 이날 위안스카이 정권은 일본,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 12개 국가의 승인을 받았다. 열강들 중에서 가장 먼저 승인한 나라는 미국으로, 윌슨 대통령은 이미 제2혁명이 일어나기 전인 1913년 5월 2일에 중국의 정식 정부로 인정한다는 편지를 써서 위안스카이 앞으로 보냈다. 열강들이 별다른 잡음없이 위안스카이를 지지한 이유는 청조 시절 이래 중국이 외국과 맺은 모든 불평등 조약과 권익을 일체 보장하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었다.

국제 사회에서의 정통성을 확보한 위안스카이는 다음으로 쑨원, 황싱, 천치메이 등 일본으로 망명한 국민당 지도자들에 대한 수배와 체포령을 내렸다. 11월 4일에는 국민당이 반란에 가담했다는 명목으로 국민당 해산령과 의원증의 반납을 요구하였다. 의원증을 반납한 사람은 438명에 달했다. 전체 국회의원의 절반에 해당하는 숫자였기에 국회는 사실상 껍데기나 다름없게 되었다. 헌법 제정도 마비상태가 되었다. 진보당의 영수인 량치차오가 위안스카이에게 국회의 존속을 호소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1914년 1월 10일에는 참의원과 중의원마저 해산시키고 의원별로 귀향비 명목으로 400위안씩 지급하고는 죄다 쫓아버렸다. 2월 28일에는 지방의 성 의회도 해산시켰다. 공화정은 고작 2년만에 끝장난 것이다.

5월 1일 중화민국 신약법(新約法)이 공포되었다. 약법(約法)이란 임시 헌법이라는 뜻이다. 한나라 유방 시절 장량이 "약법3장(約法三章)"이라 하여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임시방편으로 법의 세가지 원칙만 세운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신해혁명 직후 난징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쑹자오런은 프랑스의 헌법을 참고하여 주권재민의 원칙에서 인민의 권리와 의무, 내각 책임제, 정부 구성, 대총통의 권한 등을 규정하는 7장 56조로 구성된 임시 약법을 제정하였다. 그는 선거를 통해 국회가 조직되면 약법을 기초로 정식 헌법을 제정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위안스카이가 국회를 해산시키면서 헌법을 제정할 수 없게 되었고 대신 어용 세력을 끌어모아서 임시 약법의 내용을 일부 수정한 신약법을 통과시킨 것이다.

 

소위 신약법은 위안스카이에게 선전포고와 강화조약의 체결 등 외교 대권과 입법권, 모든 문무 관료와 외교관 임명권, 긴급명령권, 재정운용과 긴급처분권 등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하였다. 이는 그야말로 황제에 버금가는 권력이었다. 또한 대총통 선거법을 개정하여 5년 중임제였던 대총통의 임기를 10년으로 늘리고 연임의 제한마저 없애버렸다. 게다가 위안스카이와 그가 추천한 사람들만 대총통 후보로 입후보할 수 있었기에 대총통 선거란 허울에 불과하여 사실상 종신 대총통이나 다름없었다. 또한 국회를 대신하여 참정원(參政院)이라는 기구를 신설했지만 자문 역할 이외에는 별다른 권한이 없었다. 참정원은 리위안홍을 원장으로 70명의 의원으로 구성되었는데 고색 창연한 구 청조 시절의 고위 관료들, 량치차오와 왕타이씨에(汪太燮)와 같은 입헌파 정치가 등 하나같이 위안스카이에게 고분고분한 자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한마디로 위안스카이를 위한 얼굴 마담들의 모임인 셈이다.

위안스카이는 남방에 대해서도 영향력을 강화하여 국민당의 정치적 기반을 무너뜨리고 쑨원과의 연결고리를 끊었다. 2차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장쑤성에는 자신의 심복인 풍궈장을 도독으로 임명하였다. 또한 장시 도독에는 리준(李純)을, 안후이 도독에는 니스충(倪嗣沖)을, 후베이 도독에는 부총통이 된 리위안홍을 대신하여 돤치루이를, 후난 도독에는 탕샹밍(湯薌銘)을, 푸젠 도독에는 류꽌씨옹(劉冠雄)을 각각 임명하여 무력에 의한 중국 전토의 지배 체제를 구축하였다.

동3성 역시 위안스카이와 가까운 장스란(張錫鑾)이 펑톈도독을 맡고 있었고 산시 도독인 옌시산은 북양파는 아니었지만 눈치 빠르게 위안스카이에게 복종을 맹세하였다. 옌시산만큼이나 교활한 광시 도독인 루롱팅도 재빨리 아들을 인질삼아 베이징으로 보내고 지위를 인정받았다. 광둥성은 후한민, 천중밍을 쫓아낸 광둥진무사(廣東鎮撫使) 롱지광(龙济光)이 도독 자리에 올랐다. 윈난성은 도독 차이어가 위안스카이의 총애을 받게 되어 베이징으로 올라가자 그의 측근인 탕지야요(唐繼堯)가 그 자리에 앉았다. 탕지야요는 2차 혁명에서 쑨원파에 가담했던 쓰촨도독 슝커우를 격파하는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이로서 위안스카이는 중국 거의 대부분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실질적인 지배력은 여전히 미미하였다. 각 지방의 군사 실력자들은 중앙의 혼란을 이용하여 명목상으로만 중앙에 복종할 뿐, 자체적인 무력을 갖추고 지역 향신과 상인, 지주들과 결탁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해 나갔다. 지방의 힘이 커지자 직접적인 타격은 세수의 격감이었다. 당시 중앙 정부는 세수의 80%를 지방의 토지세에 의존하였다. 그런데 신해혁명과 2차혁명 등 거듭된 혼란으로 지방의 세금이 송금되지 않자 베이징 정부의 1914년 세수는 고작 3천만원에 불과하였다. 이는 신해혁명 직전에 비한다면 1/6로 격감한 것이었다. 위안스카이 정권은 당장 파산 직전으로 내몰렸다. 중앙의 지배력이 실질적으로 미치는 지역은 즈리성과 허난성, 산둥성 정도에 불과하였다. 이는 위안스카이 정권의 권위가 청조에 비하여 훨씬 취약했다는 의미였다. 지방의 실력자들은 청조의 몰락을 기회삼아 자신의 지배지를 반독립된 왕국으로 만들었고 위안스카이 정권은 이런 봉건 군주들의 연합체에 불과하였다.

재정적 열악함은 당장 대외관계에 악영향을 주었다. 그는 재정난을 명목으로 무분별하게 거액의 외채를 끌어다 썼다. 이로 인해  외세에 대한 예속 관계를 더욱 심화시켰다. 게다가 도입된 차관은 국가 건설과 민생에 쓰는 대신, 군대의 확충과 부정부패, 위안스카이 개인의 정치 자금으로 대부분 낭비하였다. 국가의 장래나 국민의 이익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고 오직 자신의 전제 정치를 강화하는 것에만 관심을 쏟았다. 이런 행태가 그를 지지하던 사람들도 점차 염증을 느끼면서 등을 돌리게 되는 이유가 되었다

대표적인 예가 외몽골과 티벳에 대한 주권 포기였다. 외몽골은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난 것을 이용하여 라마교 수장인 제8대 복드 젭준담바 호탁트(Bogd Jibzundamba Khutugtu)가 1911년 11월 30일 독립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와 마찬가지로 외몽골의 정신적 지주였다. 그는 외몽골의 후견국으로 러시아를 끌어들였다.

러시아는 위안스카이와 협상하여 1915년 5월 25일 캬흐타라는 외몽골의 작은 국경 마을에서 "카흐타 조약(Treaty of Kyakhta)"을 체결하였다. 중국은 외몽골에 대한 명목상 종주권은 인정받되 내정에 개입할 수 없고 관료를 보내거나 군대를 주둔시킬 권리도 없었다. 사실상 외몽골의 독립을 인정한 셈이었다. 이후 외몽골은 소련의 영향권에 완전히 편입되었고 30년 뒤인 1946년 1월 5일 장제스 정권은 외몽골을 주권국으로 승인하였다.


18세기 초 강희제에 의해 청나라에 정복당한 티벳은 19세기 말에 오면서 영국이 인도를 점령하고 중국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점차 영국의 세력권에 편입되었다. 청조는 영국의 티벳 침입을 막기 위해 영국과 협상을 하여 1906년에 중영 티벳-인도 조약을 체결하였다. 영국은 티벳을 점령하지 않으며 중국 또한 다른 나라가 티벳을 간섭하지 않도록 보장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영국이 티벳을 중국의 영토로 인정한다는 의미였다. 또한 1907년에는 쓰촨 총독 차오얼펑(趙爾豐)이 티벳의 수도 라싸로 군대를 보내어 점령하였다. 제13대 달라이 라마는 인도로 도망쳤다.


하지만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달라이 라마는 인도에서 티벳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1913년 2월 13일 라싸의 포탈라 궁(布達拉宮)에서 독립을 선언하였다. 위안스카이는 차이어를 보내어 진압하려 했으나 달라이 라마를 후원하고 있던 영국의 강력한 항의에 부딪쳐 군대를 돌려야 했다. 1913년 10월 인도 심라(Simla)에서 열린 심라회의에서 영국은 티벳의 독립을 승인하였다. 위안스카이 정권은 티벳의 독립을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영국에 굴복하였다. 외몽골과 마찬가지로 티벳에 대해서도 현상 유지를 인정한 것이다.

영국은 그 대가로 티벳으로부터 동부 국경지대에 있는 아루나찰 프라데시(Arunachal Pradesh) 지방의 약 8만3천㎢에 달하는 영토를 가져가 인도 식민지에 편입시켰다. 새로이 설정된 티벳과 인도 국경은 885km에 달하였고 인도 식민정부의 외무장관 헨리 맥마흔(Arthur Henry McMahon)의 이름을 따서 이른바 "맥마흔 라인(McMahon Line)"이라고 불렀다. 이 라인은 마오쩌둥에 의해 티벳이 도로 중국에 복속된 후 중국-인도가 국경분쟁을 벌이는 빌미가 되어 1962년에 중인전쟁이 터지게 된다.

근본적으로 위안스카이 정권은 전제적이고 봉건적이라는 점에서 사실상 청조의 연장선에 불과하였다. 위안스카이에 의해 국회가 무력화되면서 정당 정치나 공화정의 성격은 완전히 사라졌다. 건전한 민주주의가 채 싹을 피기도 전에 권위적인 구 체제로 되돌아간 것이다. 중국 사회는 여전히 후진적이고 불평등하였으며, 만주족을 대신하여 소수의 한족 엘리트들이 정치, 사회, 경제적 특권을 독점하였다. 결과적으로 신해혁명은 통치자가 바뀌었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는 셈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심지어 리훙장이나 순친왕 정권보다 더 퇴보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젊은 시절의 위안스카이는 리훙장에 비견될 만큼 뛰어난 식견과 결단력을 갖춘 정치가이자 유능한 관료였지만, 노년의 그는 절대 권력에 한번 맛을 들이자 독선과 아집에만 눈이 멀었다.

신해혁명은 비슷한 시기에 전개된 멕시코 혁명과도 판박이만큼 유사하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부패하고 낙후되었던 멕시코는 1910년 11월 20일 프란시스코 마데로(Madero, Francisco I.)가 혁명을 일으켜 디아스(Porfirio Diaz)의 독재정권을 무너뜨렸다. 그는 서구식 민주주의를 실현시키겠다는 이상에 불탔지만 정치적 기반이 취약했기에 구 세력과 타협해야 했다. 결국 디아스를 추종하는 구 세력의 쿠테타로 3년만에 몰락하고 자신도 살해되고 말았다. 이후 멕시코는 반복되는 내전과 혁명, 쿠테타, 그리고 외세가 개입하는 등 극심한 혼란과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는 사회가 충분히 성숙되지 않은 상태에서 민주주의 혁명이 총칼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가를 보여준다.


종신 대총통이 된 위안스카이는 이미 죽을 때까지 지위를 보장받은 셈이었지만 그의 야심은 이 정도로 만족하지 않고 더욱 허황된 꿈을 꾸었다. 황제가 되어서 옥좌에 오르겠다는 것이었다.


*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식민지인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여러 발의 총성이 울렸다. 사라예보를 방문 중이던 오스트리아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부부가 살해된 것이다. 범인은 오스트리아 제국과 대립하고 있던 발칸의 소국 세르비아 민족주의 결사단체 소속의 청년들이었다. 처음에는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양국의 분쟁으로 끝날 수도 있었지만, 복잡하게 얽혀 있던 유럽 외교와 열강들의 이해관계, 오랫동안 누적된 긴장상태가 한꺼번에 터져나오면서 전쟁은 순식간에 유럽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7월 28일 오스트리아의 선전포고를 시작으로 8월 1일 독일이 러시아에게 선전포고를 하였다. 8월 3일에는 독일이 벨기에와 프랑스를 침공하고 4일에는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의 시작이었다.


비록 유럽대륙에서 일어난 전쟁이지만, 중국과 전혀 무관하다고만 할 수는 없었다. 의화단의 난 이래 중국 여기저기에 영국, 프랑스, 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 등 열강들의 조계와 군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산둥성만 해도 칭다오는 독일이, 웨이하이웨이는 영국이 차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이 유럽에서 서로 총부리를 들이대고 피터지게 싸우는 이상, 중국 국내에 있는 군대끼리도 싸울 가능성이 있었다.

량치차오는 위안스카이에게 1차대전의 참전이 열강들에게 빼앗긴 영토와 이권을 회복하고 중국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건의했지만 위안스카이는 거부하였다. 그의 관심사는 오직 정권의 안정과 국내 문제 해결에 있었기에 성급하게 열강들의 싸움에 휘말리는 것은 도리어 정권에 해가 될 우려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8월 6일 중국의 중립을 선언하는 한편, 중립국인 주중 미국 공사 맥머리(John V.A. MacMurray)에게 "중국 영토와 주변 영해, 조차지 안에서 서로 교전하는 일이 없도록" 미국이 보장해 줄 것과 교전국들과 교섭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는 러일전쟁 당시 청조가 만주에서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을 방관함으로서 큰 피해를 입었던 경험 때문이었다.

미국정부 역시 중국의 입장을 지지하여 영국, 독일 정부에 중국을 포함하여 태평양 전체에 대한 중립화를 제안하였다. 영국은 찬성하였다. 처음에는 칭다오의 독일 동양함대가 영국의 해상 교통로를 위협할 것을 우려했던 영국은 일본 정부에 "영일 동맹"을 내세워 중국 근해에서 독일 군함을 파괴하는데 협조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극동에서 독일의 해군력은 영국에 비해 훨씬 약소했다. 또한 굳이 동아시아까지 전쟁을 확대할 필요가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면서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일본 외무성에도 "중국의 중립을 존중한다"라는 차원에서 대독 선전포고를 보류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독일 역시 극동과 태평양에서 전략적으로 불리한 처지에 있었기에 반색하면서 "상호 군함과 식민지, 상선을 공격하지 않을 것"을 서로 보장하자고 제안하였다.

 

한편, 일본 지도부는 참전을 놓고 논란을 벌이고 있었다. 일본은 영국과 동맹을 맺고 있지만 독일과의 관계도 나쁘지 않았다. 특히 메이지 유신 이래 독일군을 육군의 모델로 삼았던 군부의 원로 야마가타 야리토모는 "독일은 우리의 친교국임을 잊어서는 안된다"라며 신중론을 펼쳤다. 육군은 독일군의 실력이 만만치 않음을 지적하였고, 대장성 대신 다카하시 고레키요(高橋是清) 또한 유럽 전쟁에서 독일이 승리할 것이며 개전은 경솔한 짓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내각의 수장인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와 정계 제일의 원로인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는 "유럽의 대전란은 일본이 국운이 발전할 수 있는 천우신조의 기회이다"라면서 내부 정쟁을 즉각 그만두고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손을 잡아 대륙 진출과 동양에서의 이권을 확보하는데 노력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대다수 각료들 역시 개전에 찬성하면서 일본 정부의 입장 또한 결정되었다. 참전 명분으로는 "영일동맹에 충실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독일 근거지를 동양에서 제거하여 일본의 국제 지위를 높이고 극동 평화를 이룩해야 한다"라고 했지만 속내는 중국과 태평양에 산재한 독일 식민지를 접수하고 대륙으로 진출하겠다는 전형적인 기회주의적인 야심이었다.

개전파인 가토 다카아키(加藤 高明) 외무 대신은 참전을 보류해 달라는 영국 정부의 요청에 대해 "이미 천황에게 상주하여 철회할 수 없다"라면서, 또한 1895년 독일이 삼국간섭에 가담하여 일본의 랴오둥 점령을 방해했던 과거를 들어서 "독일에 대한 강한 적개심으로 불타는" 국내 여론 상 일본 정부로서는 참전이 불가피하다며 양해를 요구하였다. 영국 정부는 마지못하여 동의하면서도 대신 전쟁 구역을 중국과 태평양의 독일령으로 한정시켜달라고 요청하였다. 이는 일본의 무분별한 행동을 그대로 방치한다면 아시아, 태평양 전체가 일본의 세력권이 될 수가 있고 특히 태평양에서 이권을 가지고 있는 미국의 여론을 자극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륙 진출의 호기로 여기고 있던 일본은 이 또한 거절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지 20여일 만인 8월 16일 일본은 독일 정부에 최후 통첩을 전달하고 9월 15일까지 칭다오를 양도하라고 요구하였다. 독일로부터 아무런 응답이 없자 23일 정식으로 대독 선전포고를 선언하였다. 사실 일본의 참전은 독일로서는 그야말로 뜻밖이었다. 비록 일본이 영일동맹을 맺고 있다고 해도 이는 어디까지나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함이지 독일을 적대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일본이 선전포고하기 직전까지도 도쿄 주재 독일 대사는 "일본이 독일을 적대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독일의 오판은 일본의 제국주의적인 야심과 국내 사정에 대해 지나치게 무지한 탓이었다.

일본의 목표는 중국 내 독일의 최대 거점인 자오저우만(膠州灣)이었다. 자오저우만은 산둥성 남단에 있는 해안지대로 총면적은 552㎢ 정도였다. 중심지는 항구 도시 칭다오였다. 독일은 1859년에 청나라와 통상조약을 체결한 후 오일렌부르크 백작(Graf von Eulenburg)을 파견하여 동아시아에서 자신들의 거점으로 쓸만한 장소를 꾸준하게 물색하였다. 한때는 타이완을 점령하는 방안을 고려하기도 했으나 이 때만 해도 실권을 쥐고 있던 비스마르크가 해외 개척에 소극적이었기에 실현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제국의 위신과 영광을 중시하는 빌헬름 2세가 집권하면서 독일은 아시아, 아프리카에 대한 진출에 나섰다.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하여 무력해진 것을 기회삼아 1897년 11월 14일 3척의 군함과 1200여명의 해병대를 보내어 청군을 쫓아내고 점령하였다. 그리고 청조를 압박하여 1898년 3월 6일 99년을 기한으로 하는 "중독자오저우만조차조약(中獨胶澳租借条约)"을 체결하였다.  

독일은 17년 동안 통치를 하면서 칭다오를 독일의 대표적인 식민도시로 만들었다. 작은 어촌 마을에 불과했던 칭다오는 유럽의 여느 도시 못지 않은 현대화된 도시로 탈바꿈하여 잘 정비된 도로와 현대적인 항만시설, 유럽풍의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다. 총인구는 1913년을 기준으로 유럽인이 2,300여명, 중국인이 5만3천여명에 달하였다. 또한 주변에는 10여개의 견고한 포대와 200여문의 대포로 요새화되었으며 독일 동양함대가 모항으로 정박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동아시아의 새로운 패권 국가로 등장하면서 독일의 지위가 점차 위협받게 되었다. 영국, 러시아를 비롯한 열강들은 극동에서 일본의 지위를 인정하였다. 하지만 빌헬름 2세의 오만하고 경직된 외교 정책으로 인해 국제사회에서 점차 고립되고 있던 독일은 극동에서 영국-일본-프랑스 동맹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 중국과의 3자 동맹을 구상하고 1907년부터 약 2년에 걸쳐 외교적 노력을 시도했지만 결국 성과없이 끝났다. 미국은 일본과 가츠라-테프트 조약을 체결하여 일본의 지위를 인정한데다, 독일을 불신하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1차대전의 발발과 일본의 선전 포고로 독일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동안 칭다오에 대한 독일의 방어전략은 주로 영국-프랑스-러시아 연합군이나 중국군이 공격해 오는 상황에 대한 것이었다. 영국-프랑스-러시아는 유럽전쟁에 집중하고 있기에 극동에서 독일 식민지 공격하는데 많은 병력을 할애할 리는 없으며 해상 봉쇄나 함포 사격으로 국한할 가능성이 높았다. 전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데다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는 중국도 큰 위협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의 참전은 상황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아무리 칭다오의 방어가 견고하다고 해도 일본이 영국, 러시아 등과 연합하여 침공한다면 함락은 시간문제였다. 베이징 주재 독일 공사인 말트잔(Baron von Maltzan)은 위안스카이에게 비공식적으로 자오저우만의 자발적인 반환을 제안하였다. 만약 성사된다면 일본으로서는 참전의 명분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영국과 일본은 위안스카이 정부에게 독일의 요구를 거절하도록 압박을 가하였다. 또한 일본군의 산둥성 상륙을 수락할 것과, 자오지 철도(膠濟鐵道, 1904년에 독일이 건설한 철도로 칭다오와 지난을 연결하며 총길이는 393km에 달한다) 주변의 중국군을 철수시키라고 요구하였다. 심지어 "만약 이로 인하여 중국에서 내란이 일어난다면 영국과 일본이 적극적으로 진압에 나서겠다"라는 제안까지 하였다.

입장이 곤란하게 된 위안스카이 정권은 맥머리에게 "독일이 자오저우만 식민지를 영국에 반환한 후 중국에 반환될 수 있도록" 미국이 중재해 달라고 요청하였지만 맥머리는 미국으로서는 이 문제에 개입할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결국 일본의 태도가 강경한 이상 중국이 거부한들 소용이 없다는 현실적인 문제, 그리고 차관 획득을 위해서 이들과 어떻게든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했던 위안스카이는 일본의 요구를 무조건 수락키로 결정하였고 8월 30일 일본군의 산둥 작전을 묵인한다는 협약이 체결되었다.


8월 13일, 폰 스페(Maximilian von Spee) 중장이 지휘하는 독일 동양 함대의 주력(장갑 순양함 2척과 방호 순양함 4척)은 영, 일이 해상 봉쇄를 하기 전에 신속하게 칭다오를 출항하였다. 일본 해군에 비해 전력에서 월등히 열세한 이들로서는 어물거리다가는 러일전쟁 당시 뤼순에서 괴멸했던 러시아 극동함대 꼴이 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 중에서 방호 순양함 에뎀(SMS Emden)은 인도양으로 가서 통상 파괴전을 실시하여 연합국 선박 29척을 격침시켰지만 1914년 11월 9일 호주 함대의 공격을 받아 격침되고 말았다. 또한 태평양을 가로질러 본국으로 회항의 길을 떠난 동양 함대 주력 역시 영국 해군과 싸우며 장갑 순양함 2척과 프랑스 포함 1척을 격침시켰으나 12월 8일 남대서양 포클랜드 해역에서 결국 전멸당했고 스페 제독도 전사하였다.

▲ 칭다오를 출발한 독일 동양함대의 항로. 해양 강국을 꿈꾸던 빌헬름 2세의 무리한 욕심으로 함대를 세계 여기저기에 주먹구구식으로 분산시켜 놓은 탓에 이들은 개전과 함께 우세한 연합국 해군의 공격을 받아 모조리 격침당하거나 나포되었다.


칭다오 총독 알프레드 메이어 발덱(Alfred Meyer Waldeck) 대령은 일본의 공격에 대비하여 급히 병력을 소집하고 방어 준비를 하였다. 하지만 해병대 1개 대대와 외곽 수비대, 해군 수병, 현지의 재향군인 등 모두 합해도 고작 3,600여명에 불과한데다 본국으로부터 증원을 받을 방법도 없었다. 또한 독일 동양함대 주력이 빠져나가면서 남은 군함은 제3전대 소속의 경순양함 코르모란(Cormoran), 구식 소형 포함 4척, 어뢰정 1척이 전부였다. 여기에 석탄 보급을 위해 중국을 방문했다가 1차대전이 발발하면서 칭다오로 기항한 오스트리아 제국 해군의 3,800톤급 방호순양함 카세린 엘리자베스(Kaiserin Elisabeth)가 가세하였다. 항공 전력으로는 전쟁 직전에 도착한 에트릭 타우베(Etrich Taube) 항공기가 두대 있었으나 1대는 시험 비행 중 추락하고 나머지 1대만 남은 상태였다.

어차피 칭다오 함락은 시간 문제였지만, 평소 황인종을 극도로 경멸해 왔던 빌헬름 2세는 칭다오 총독부에 전문을 보내어 "일본인들에게 항복하는 것은 베를린이 러시아인들에게 짓밟히는 것보다 더 수치스러운 일이다"라면서 끝까지 싸우라고 지시하였다. 현실을 도외시한 명령이었지만 발덱 총독은 "독일 군인답게" 명예롭게 전사하기로 결심하였다. 또한 서부전선에서 독일군이 영국,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벨기에를 돌파하여 북부 프랑스로 진격하면서 유럽 전쟁이 금새 독일의 승리로 끝날지 모른다는 기대감도 있었다.

* 칭다오 포위전

양측의 전투는 8월 22일부터 시작되었다. 영국 극동 함대 소속의 구축함 케네트(HMS Kennet)가 칭다오 항에 접근했다가 독일 수뢰정 S90의 공격을 받아 대파되어 물러났다. 또한 가토 사타기치(加藤定吉) 제독이 지휘하는 일본 해군 2함대가 칭다오를 봉쇄하였다. 해군 2함대는 3만 7천톤급 신형 전함 공고(金剛)와 동급인 히에이(比叡), 2만톤급 드레드노트 전함 카와치(河内), 셋쓰(摂津), 7800톤급 수상기 모함 와카미야(若宮丸) 등 그야말로 막강한 위용이었다. 또한 영국 극동 함대에서도 1만2천톤급 前 드레드노트급 전함 트럼프(HMS Triumph)와 590톤급 구축함 어스크(HMS Usk)가 출동하여 가세하였다.


▲ 일본 해군 최초의 수상기 모함인 와카미야. 원래는 러시아 국적의 영국제 화물선으로 러일전쟁 중에 쓰시마 해역에서 일본 해군에 의해 나포된 후 운송함으로 쓰이다가 1914년 8월에 수상기 모함으로 개조되었다. 프랑스제 모리스 파르망(Maurice Farman) 복엽 수상기 4기(최대 속도 95km/h)를 탑재하였다. 칭다오 전투 중 와카미야에서 출격한 비행기는 독일 진지를 정찰하고 손으로 폭탄을 떨어뜨리기도 하였다. 총 출격 횟수는 49소티였으며 190발의 폭탄을 독일군 진지에 떨어뜨렸다. 뒷날 태평양전쟁에서 태평양을 누비게 되는 일본 항모 부대의 역사는 여기서 시작된 셈이다.


하지만 독일이 사전에 칭다오 해역 주변에 기뢰를 살포했기에 영국-일본 연합 해군으로서는 더 이상 접근하거나 병력을 상륙시킬 수 없었다. 따라서 일본 육군의 상륙지점은 산둥반도 북쪽의 룽커우(竜口)로 선택되었다. 이곳에서 자오지 철도를 통해 칭다오로 남하할 계획이었다. 9월 1일 가미오 미츠오미(神尾光臣)중장이 지휘하는 일본군 제18사단 2만 3천여명이 룽커우(竜口)에 상륙하였다. 9월 8일 칭다오 북쪽의 핑두(平度)에서 일본군 기병대가 독일 정찰부대와 접촉했지만 독일군이 즉각 퇴각하면서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또한 톈진의 영국 수비대도 출동하여 사우스 웨일즈 대대 1천명과 시크교도 2개 중대 등 총 1,500여명으로 구성된 영국군은 바르날디스톤(Nathaniel Walter Barnardiston) 소장의 지휘 아래 일본군과 합류하였다.

▲ 칭다오에서 일본군과 합류한 영국군.

 

9월 18일에는 일본군 야전 중포병 연대, 공성 포병 3개 대대, 공병 대대 등으로 구성된 공성중포병 부대가 칭다오 시가지에서 동쪽으로 40km 떨어진 랴오샨만(崂山滿)에 상륙하였다. 또한 제18사단은 자오지 철도를 통해서 남하한 후 칭다오 외곽을 포위한 후 9월 19일 총독부를 비롯한 칭다오 시가지를 점령하였다. 독일군은 지연전을 펼치면서 질서정연하게 요새로 퇴각하여 최후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영국-일본 연합군은 9월 28일 독일군을 포위하였다.


그러나 독일군의 저항이 예상 외로 강하다고 판단한 가미오 중장은 칭다오 요새를 포위한 채 무려 한달 동안 독일군의 방어태세를 정찰하고 군수품과 포탄을 비축하는 등 매우 신중하게 준비하였다. 이는 러일전쟁 당시 뤼순 공방전에서 충분한 준비 없이 졸속으로 공격했다가 전군의 절반을 상실했던 경험 때문이었다. 또한 칭다오가 고립되어 있고 외부에서 증원할 방법이 없다는 점에서 굳이 공격을 서둘러 불필요한 희생을 초래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 때문이기도 하였다.


9월 30일 수상기 모함 와카미야가 기뢰에 접촉하여 반파되면서 회항하였다. 탑재된 4대의 항공기는 해안가로 끌고 와서 모래사장에서 출격시켜야 햇다. ​또한 하늘에서도 전투가 벌어졌다. 10월 13일 정찰 중이던 독일군 항공기를 발견한 일본군도 항공기를 출격시켰다. 이들은 공중에서 한동안 추격전을 펼쳤지만 독일제 타우베 비행기가 일본군이 사용하던 모리스 파르망보다 속도와 기동성에서 우세한데다 서로 가진 무기라고는 파일럿이 들고 있던 권총이 전부이다보니 맞출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후에도 양측의 비행기는 여러 차례 공중전을 벌었지만 별다른 전과는 없었다.

18일 밤에는 독일 어뢰정 S-90이 해상 봉쇄중이던 일본 함대를 기습하여 3700톤급 방호순양함 타카치호(高千穂)를 격침시켰다. 이는 메이지 유신 이래 전투에서 상실한 첫 대형 군함이었다. S-90도 연료 부족으로 귀환할 수 없어 자침하였지만, 러일전쟁 당시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 발틱 함대를 상대로 건곤일치의 결전을 벌였을 때에도 어뢰정 3척을 상실했던 것에 비하면 일본 해군으로서는 뜻밖의 손실인 셈이었다.

영일 연합군의 본격적인 공격은 10월 31일부터 시작되었다. 일본 육군이 보유한 가장 강력한 대포였던 45식 240mm 대구경 공성포 4문을 비롯해 38식 150mm 유탄포, 38식 105mm 캐논포 등 142문에 달하는 대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 칭다오 시가지를 향해 포격 중인 45식 240mm 공성포. 러일전쟁 당시 화력을 무시하고 보병의 총검에만 의존하여 무리한 공격을 하다가 엄청난 사상자를 내었던 것을 경험삼아 개발하였다. 대포의 중량만도 33톤에 포탄 무게는 200kg에 달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홍콩, 말레이 전역, 필리핀 바탄 전투 등 요새 공략전에 투입되어 큰 활약을 하였다. 하지만 기동성이 너무 느리고 일본의 빈약한 병참 능력으로는 포탄을 충분히 보급할 수 없다는 단점도 있었다. 

 

일본군은 독일 포병 진지와 포대 대부분을 침묵시키고 밤에 야습하여 최일선 진지를 점령하였다. 11월 1일에는 독일군 방어선의 핵심인 몰트케 포대와 비스마르크 포대를 향해 포화를 집중시켜 완전히 무력화시켰으며 카세린 엘리자베스도 포탄을 맞아 격침당했다. 11월 6일 발덱 총독은 칭다오 함락이 시간문제인 이상 더 이상의 저항이 의미없다고 여기고 타우베(Taube) 비행기에 비밀문서를 실고 탈출시켰다. 조종사인 플리쇼우(Gunther Plüschow)는 일본군의 방어선을 돌파한 후 우여곡절 끝에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다음날 새벽 6시 20분 전투 중지 명령과 함께 독일군 진지에는 백기가 올라갔다. 오후 7시 50분, 항복 문서에 서명함으로서 칭다오는 일본군의 손에 들어갔다.


8월 22일부터 11월 7일까지 약 두달 반에 걸친 짧은 전쟁이었지만 일본이 치룬 댓가는 결코 적다고 할 수 없었다. 방호 순양함과 구축함 각 1척을 상실하고 수상기 모함 1척이 반파되었으며 전사 394여명을 포함해 약 2천여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하지만 전사자의 대부분은 방호 순양함 타카치 호가 침몰하면서 전사한 수병들이었고 지상전에서의 전사자는 100여명에 불과했다. 이는 일본 육군의 교리가 이전에 비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는 의미였다.

만약 러일전쟁 당시처럼 화력과 사전 정찰을 경시하고 보병의 총검 돌격과 정신력으로 무리한 공격을 감행했다면 이기기는 했겠지만 손실은 몇배로 늘어났을 것이다. 칭다오 공략전에서 일본군은 항공기를 활용한 정찰과 적 요새를 제압하는 화력의 집중, 병과 간의 제병 협동, 치밀한 작전 등 구미 열강의 군대에 못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작전은 일본의 빈약한 국력으로는 막대한 물자 소요를 뒷받침할 수 없어 국지적이고 제한적인 공격에나 가능했기에 근본적으로 육군의 공격 교리는 여전히 청일, 러일전쟁 시절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었다. 게다가 1930년대 이후 합리적인 연구와 토론을 금지하고 전근대적인 정신력과 용기를 강조하는 분위기가 더욱 확산되면서 도리어 과거로 역행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한편, 영국군은 전함 트럼프가 해안포의 포격을 받아 반파당하고 전사 12명, 부상 53명의 손실을 입었다. 독일군의 손실은 일본군의 절반 정도인 전사 210명, 부상 550명이었으며 3,400명이 포로가 되었다. 이후 군인, 민간인을 합해 4700여명의 독일인 포로들은 칭다오의 수용소에 잠시 수감된 뒤 일본으로 이송되어 시코쿠 동북쪽 끝에 있는 도쿠시마현(徳島県)의 반도우 포로수용소(板東俘虜収容所)를 비롯해 20개소의 포로수용소에 분산 수감되었다.

이들은 2차 대전 당시의 그 악명 높은 일본군 수용소와는 달리, 비교적 양호한 조건에서 포로 생활을 누렸고 어느 정도 제약은 있었지만 비교적 자유롭게 일본인들과 접촉하면서 다양한 경제, 사회 활동도 할 수 있었다. 이 때만 해도 어느 정도 민주주의와 문명국으로서의 모습이 남아 있었던 일본 사회는 서구를 맹목적으로 배척하거나 국제적 고립을 자초하는 등의 행태는 벌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차대전이 끝난 뒤 베르사유 강화조약이 체결되면서 포로 송환이 결정되었고 일본 잔류를 희망한 170여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본국으로 귀환하였다. 덧붙여, 일본에 잔류한 170여명의 독일인들은 일본 사회에 정착한 후 요식 업계에 뛰어들었다. 오늘날에도 일본에 남아 있는 독일식 베이커리인 "Freundlieb"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독일이 중국에 "칭다오 맥주"를 남겼다면 일본에도 나름의 흔적을 남긴 셈이다.

칭다오를 손에 넣은 일본의 다음 수순은 본격적인 중국 침략이었다. 1915년 1월 18일 일본 외상 가토 다카아키는 위안스카이에게 21개 항으로 된 요구조건을 내밀었다. 주요 내용은 일본의 산둥 점령과 독일의 권익을 일체 계승하는 것을 인정할 것, 산둥성의 토지를 일본의 동의 없이 제3국에게 대여하지 말 것, 랴오둥 반도의 뤼순, 다롄항, 남만주 철도의 조차기간을 99년으로 연장할 것, 일본의 동의 없이 중국 연안의 항만을 제3국에게 대여하지 말 것 등 산둥성과 남만주, 내몽골에 대한 일본의 독점적 지위를 인정하라는 내용이었다. 또한 일본인을 정치, 재정, 군사 고문으로 영입할 것과 중국 내지에서 일본의 치안권을 인정할 것, 일본으로부터 무기를 수입할 것, 우창과 난창 사이의 철도 부설권을 넘길 것 등 그야말로 중국을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로 만들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것이 이른바 "21개조 요구(二十一個條項)"이다.

위안스카이는 갈등에 놓였다. 청일전쟁 당시 일본과 싸웠던 그로서는 일본에 대한 호감은 없었다. 게다가 일본의 요구는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만약 이를 수락한다면 국내의 엄청난 반발에 직면할 것이었다. 하지만 거부한다면 일본은 중국을 무력으로 침략할 수도 있었다. 싸운다면 당연히 승산은 없다. "일본과 싸울 것인가. 일본의 요구를 수락하여 중국을 그들의 식민지로 전락시킬 것인가." 그는 고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