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을 뻔한 사나이
사마천의 사기를 보면 이런 대목이 있다. 국가의 통치 방법을 놓고 한 고조 유방에게 신하가 말하기를 "可以馬上得天下 不可以馬上治天下(말 위에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어도, 말 위에서 나라를 다스릴 수는 없습니다.)"라고 한다. 실제로 유방부터 마오쩌둥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역대 개국 군주들은 하나같이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다.
광활한 동3성을 호령하여 "동북왕"이라고 불리었던 장쭤린은 그야말로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을 뻔"한 사나이이다. 장쭤린의 칠전팔기 인생을 본다면 수많은 군웅들 중에서도 실로 "난세의 효웅"이라 할 만 하였다. 여기에다 당대 유일하게 부자 2대 세습에 성공한 점이나, 아들 장쉐량이 중국 현대사를 발칵 뒤집어 놓은 인물이다보니 장쭤린-장쉐량 부자를 다룬 평전이나 드라마도 많다. 특히 우리에게도 친숙한 베스트셀러 《철도원》과 《칼에 지다》의 작가 아사다 지로(淺田次郞)는 장쭤린의 매력에 흠뻑 빠져서 그를 주인공으로 하는 《중원의 무지개》라는 대하 소설을 써서 히트를 치기도 하였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장쭤린은 젊은 시절에는 도적이었으며 난세의 시운을 타고 승승장구하여 동북3성의 주인이 되었다. 나중에는 베이징 정부의 실권자가 되어 중화민국 대원수라는 만인지상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다. 또한 뛰어난 리더쉽과 막강한 군사력으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중원의 대부분을 장악하였다. 그런데 때마침 남쪽에서는 장제스가 소련의 강력한 후원을 등에 업고 북벌 전쟁에 나서고 있었다. 결국 장쭤린은 천하 통일을 눈앞에 두고 자신보다 12살 어린 장제스에게 무릎을 꿇고 말았다. 만약 장제스가 없었거나 장쭤린이 장제스를 꺾었다면 그 뒤의 중국 역사가 어떻게 흘러갔을지는 누구도 짐작할 수 없을 것이다.
장쭤린은 현재의 요녕성인 펑톈성 남서쪽의 하이청(海城)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고구려 말기 양만춘이 당태종의 10만 대군을 격파했다는 안시성의 옛터인 잉청즈(英城子)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장쭤린의 조부는 근면했지만 부친은 매우 무능한데다 도박에 빠졌다. 덕분에 가세가 기울어 장쭤린은 어린 시절에 하루 세끼를 먹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였다. 어릴 때부터 온갖 허드렛일을 닥치는대로 해야했고 글을 배울 기회는 없었다. 그가 19살이 되었을 때 청일전쟁이 터졌다.
청군이 조선에서 대패를 하면서 일본군이 압록강을 건너 요동을 침공하였다. 상황이 급박하자 리훙장은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한 역전의 노장 쑹칭(宋慶)에게 요동의 방위를 맡겼다. 쑹칭은 의군(毅軍)을 조직하는 한편 각지에서 의용군을 모집하였다. 장쭤린도 졸병으로 입대하였다. 이후 초관(哨官, 중대장)으로 승진했지만 전쟁이 끝나면서 군대는 해산되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자신의 외가가 있는 자오찌아먀오(趙家廟)에서 지주의 딸과 결혼을 하였다.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 아들이 바로 뒷날 시안 사변을 일으켜 전 세계를 놀라게 하는 장쉐량(張學良)이다.
한동안 고향에서 무위도식하던 그는 마을 자경단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말이 자경단이지 실제로는 조폭집단이었다. 청 황실이 기울면서 관아의 보호를 받을 수 없게 된 향촌 마을들은 자경단을 조직하거나 주변의 힘있는 세력에게 돈을 바치고 보호를 받았다. 장쭤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주변의 불량배들을 모아 자경단 행세를 하면서 다른 마을을 습격하는 등 비적질도 서슴치 않았다. 한 일화에 따르면 그는 자신과 경쟁하던 비적떼의 습격을 받아 아내를 데리고 도망치다가 수레 위에서 장쉐량을 낳았다고도 한다. 또한 아편을 팔아 큰 돈을 벌었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주변 세력들을 흡수하여 빠르게 세력을 불려 나갔다. 그의 세력이 커지자 나중에는 관청에서 그에게 관직을 주고 도움을 청할 정도였다. 장쭤상(張作相), 탕위린(湯玉麟), 장징후이(張景惠) 등 이 시기에 장쭤린과 함께 마적질을 하면서 서로 호형호제하던 자들이 뒷날 거대한 동북 군벌을 형성하게 된다.
당시 동3성 총독은 훗날 중화민국 대총통이 되는 쉬스청이었다. 1907년 장쭤린의 명성을 들은 그는 장쭤린을 불러 펑톈성 순방영의 통령(統領)으로 임명하였다. 그의 나이 32살이었다. 장쭤린의 병력은 3천명이 넘었다. 비록 비적 떼로 이루어진 오합지졸 무리에 무기와 장비도 형편없었지만 어쨌거나 펑톈성에서는 가장 강력한 무장 집단 중의 하나였다. 비적의 우두머리에서 하루아침에 펑톈성의 치안 담당자가 된 장쭤린은 충심을 다하여 만몽 국경 지대에서 준동하는 몽골 비적들을 소탕하였다. 쉬스청은 그의 활약상을 매우 만족스럽게 생각하였다. 게다가 쉬스청과 후임자였던 자오얼쉰(趙爾巽) 모두 위안스카이의 측근들이었다. 이들의 환심을 산 덕분에 장쭤린은 북양 대신으로 중국의 최고 실권자였던 위안스카이와도 연줄이 닿게 되었다. 한낱 동네 건달이 이제는 중앙에서도 주목하는 실력자가 된 것이다.
장쭤린은 제 이름 석자도 제대로 쓰지 못할 만큼 배운 것이 없었지만 눈치가 빠르고 총명하였다. 일단 눈 앞에 기회가 오면 절대 놓치는 법이 없었다. 위안스카이의 주목을 받은 것을 이용하여 온갖 뇌물과 아첨을 부리며 더욱 충성을 맹세했다. 덕분에 출세가도를 달렸다. 신해혁명 당시 중국 전역에서 혁명에 호응하는 반란이 일어났지만 동3성만은 예외였다. 장쭤린의 교묘한 수완과 발빠른 대응으로 혁명파 세력을 신속하게 제압했기 때문이었다. 중앙의 형세를 알 수 없었던 그는 황실을 위하여 끝까지 진충보국하겠다고 맹세했지만 위안스카이가 푸이를 끌어내리자 당장 "공화제를 지지한다"고 말을 바꾸었다. 마적 출신인 그로서는 유가에서 말하는 충정이나 지조가 있을 리 없었다. 오직 출세와 야심만이 있었다.
장쭤린의 뛰어난 수완을 눈여겨 본 위안스카이는 그의 오합지졸 군대를 중국 육군 제27사단으로 개편하고 무기와 자금을 내주었다. 오합지졸의 비적떼가 하루아침에 신생 중화민국의 정규군이 된 것이다. 하지만 사람 보는 눈이 탁월했던 위안스카이는 장쭤린이 결코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 또한 꿰뚫어 보았다. 장쭤린은 이전부터 펑톈 도독의 자리를 탐내고 있었다. 하지만 자오얼쉰이 승진하여 중앙으로 올라가자 그 자리는 예전에 동3성 변무대신(東三省邊務大臣)을 지낸 장스란(張錫鑾)에게 돌아갔다. 장쭤린은 참고 기다렸다. 1915년 8월 장스란이 후베이 장군(湖北將軍)이 되어 후베이성으로 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돤즈구이(段芝貴)가 펑톈 장군(奉天將軍) 겸 펑톈 순안사(奉天巡按使)로 임명되어 내려왔다. 두 사람 모두 위안스카이의 충견들이었다. 장쭤린을 경계한 것이다.
비록 원하는 감투는 얻지 못했지만 장쭤린은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여전히 위안스카이에게 충성을 바쳤다. 위안스카이가 공화제를 폐지하고 천자가 되려고 하자 제일 먼저 앞장서서 군주제 부활에 찬성하고 동3성과 전국의 여러 장군들과 연명하여 "하루라도 빨리 옥좌에 오르십시오"라고 부추겼다. 앞에서는 위안스카이의 환심을 사면서 뒤에서는 장스란과 돤즈구이가 펑톈 출신이 아니라 중앙에서 낙하산으로 내려왔기에 현지 사정을 잘 모른다는 점을 이용하여 교묘하게 허수아비로 만들고 자신이 실세 노릇을 하였다. 체면은 챙겨주되 실속을 차린다는 것이었다.
윈난 독군 차이어가 제제운동에 반대하여 호법전쟁을 일으키면서 위안스카이가 궁지에 몰렸을 때에도 장쭤린은 우직하리만큼 충성을 맹세하였다. 그의 술책에는 돤즈구이나 위안스카이도 넘어갔다. 결국 위안스카이는 홧병으로 죽기 직전인 1916년 4월 22일 장쭤린을 평톈 독군 겸 성경 장군(盛京将军, 성경은 펑톈의 옛 이름)으로 승진시켰고 자작(子爵)의 작위도 하사하였다.
예전같으면 감히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할 지위를 손에 넣은 셈이지만 여기서 만족할 위인이 아니었다. 그는 책략으로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지린성과 헤이룽장성까지 차례로 장악해 나갔고 2년만에 광대한 동3성의 절대 권력자가 되었다. 장쭤린은 위안스카이의 직계가 아니었음에도 전국의 군벌들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실력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누구의 도움도 아닌 오직 자신의 실력만으로 해낸 것이었다.
위안스카이가 죽고 쉬스청이 돤치루이에 의해 옹립되어 대총통의 자리에 올랐다. 쉬스청과 장쭤린은 오랜 인연이 있다. 쉬스청은 옛정을 잊지 않고 1918년 9월 7일 장쭤린을 동3성 순열사에 임명하였다. 이로서 동3성의 군정대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그의 야심은 한층 더 커져서 중앙을 넘보게 되었다. 또한 북양 정부에 주청하여 자신의 심복인 쑨리에천(孫烈臣)과 장인 바오구이칭(鮑貴卿)을 각각 헤이룽장성 독군과 지린성 독군으로 임명하였다. 안-즈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는 즈리파와 함께 베이징 정부를 양분하는 대세력이 되었고 기회를 보아 중원에 자신의 깃발을 꼽겠다는 야심까지 품게 되었다. 그의 세력은 그야말로 하늘에 떠오르는 태양처럼 욱일승천하는 기세였다. 동북에서 그의 지위는 누구도 감히 넘보지 못하였다. 장쭤린과 마찬가지로 마적에서 벼락 출세한 양광왕 루롱팅이 쑨원에게 한번 패배하자 부하들의 반란에 직면하여 상하이로 야반도주했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그렇다면 모래성처럼 쉽게 부서져 내렸던 다른 군벌 정권들과 달리, 장쭤린 정권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또한 당대 최고의 실력자였던 위안스카이조차 하지 못했던 2대 세습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가장 큰 이유는 다른 군벌들이 단순히 자기 지반을 확장하는데에만 급급하여 약탈과 전쟁을 일삼으며 민중의 삶을 파괴했던 것과 달리, 장쭤린은 지역 향신, 지식인 계층과 손을 잡고 동북의 발전과 안정에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장쭤린의 첫번째 공헌은 낙후된 동북을 근대화했다는 것이다. 펑톈성(지금의 랴오닝성)과 지린성, 헤이룽장성을 묶어서 동북3성이라고 부른다. 고대에는 한민족의 영역이었지만 발해가 멸망한 후 유목민들의 땅이 되었다. 이후 중원의 지배자가 된 청조는 선조들의 고향이라는 이유로 약 200여년 동안 거주와 출입을 엄중히 금지하였다. 물론 봉금령에도 불구하고 가뭄과 재해 등으로 유랑민들이 동북으로 꾸준히 유입되기는 했으나 19세기 말까지도 중국의 변방으로 가장 낙후된 지역 중의 하나였다. 땅은 넓고 비옥하며 자원은 풍부하지만 위도가 높아 기온이 낮고 인구가 매우 희박하여 대부분이 황무지였다. 그만큼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지역이기도 하였다. 1958년 톈진 조약이 체결되면서 랴오허강(遼河) 하구의 작은 어촌 마을 잉커우(营口)가 동북에서는 처음으로 외국에 개항되었다. 1870년에는 러시아의 남하에 대응하기 위하여 "봉금령(封禁令)"을 해제하고 이민을 장려하였다.
1900년 당시 동북의 총인구는 500~600만명 정도에 불과하였다. 가장 큰 도시인 펑톈(현재의 선양)은 1904년을 기준으로 인구가 20만명 정도였고 장춘은 10만명, 지린은 15만명, 치치하얼이 3만 5천명 정도로 본토에 비하면 중소 도시에 지나지 않았다. 같은 시기 베이징과 상하이, 톈진, 광저우, 우한, 홍콩 등 외국 개항지가 있는 도시들은 이미 인구가 100만명에 육박하고 있었다. 아편 전쟁 이래 중국의 근대화는 주로 동남 연해의 도시들에 집중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청조가 패하면서 동북은 19세기 말에 오면서 동북은 본격적으로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었다. 일본은 청조로부터 랴오둥 반도를 할양받으려고 했지만 러시아가 주도한 삼국 간섭으로 실패하였다. 러시아 짜르 니콜라이 2세 역시 동북에 대한 야욕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건설 중이던 그는 동북을 장악할 수 있다면 북만주를 통하여 블라디보스톡까지 철도 노선을 단축할 수 있다고 기대하였다.
1903년 7월 만주를 관통하여 시베리아 횡단 철도와 연결되는 동청 철도(東淸鐵道, 신해혁명 이후 중둥철도中東鐵道로 개칭된다)가 개통되었다. 동철 철도는 북만주 최북단의 만주어리(满洲里)부터 하얼빈과 무단장(牡丹江)을 거쳐서 동쪽의 쑤이펀허(绥芬河)를 통하여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연결되며 남쪽으로는 남만주를 관통하여 랴오둥 반도의 뤼순과 다롄항까지 연결되었다. 총연장 길이는 지선을 포함하여 2,489km에 달했으며 철도 보호를 명목으로 동북의 주요 도시에는 러시아군이 주둔하였다.
이것이 일본을 자극하여 결국 러일전쟁으로 폭발하였다. 승자는 일본이었다. 포츠머스 조약(Treaty of Portsmouth)을 체결한 일본은 러시아와 세력권을 분할하여 남만주는 일본이, 북만주는 러시아가 차지하였다. 또한 러시아가 차지하고 있었던 뤼순, 다롄항의 조차권을 빼앗아 관동주를 만들었고 동청 철도 노선 중에서 장춘부터 뤼순까지의 762km의 철도를 양도받아 남만주 철도(만철)라고 불렀다.
러일전쟁에서 전장터가 되었던 동북은 큰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전쟁이 끝난 뒤 러시아와 일본에 의해 동북은 중국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발전하게 되었다. 황무지에 불과했던 동북에 철도가 놓이고 사람과 물자가 모여드는 모습은 중국판 "서구 개척"이라 할 만 하였다.
신해혁명으로 청조가 몰락하고 중원이 군벌들의 난립으로 혼란에 빠졌지만 장쭤린의 통치 아래 동북은 다른 지역에서 보기 드문 안정을 누리며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 그는 철도가 국가의 동맥이라는 사실에 주목한 그는 동삼성 교통위원회를 설립하여 동북의 철도 건설에 앞장섰다. 산하이관 이남의 철도 건설이 극심한 재정난과 내전으로 지지부진한 반면, 동북은 장쭤린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철도가 대대적으로 건설되었다. 1917년부터 1927년까지 산하이관 이남에 건설된 철도는 523km에 불과한 반면, 동북은 957km로 거의 두배에 달하였으며 전국 철도의 약 40%를 차지할 정도였다. 펑톈, 하얼빈, 창춘 등 철도가 통과하는 주요 도시를 중심으로 빠르게 근대화되었으며 경제는 번영하였다.
이에 비례하여 사람과 물자가 집중되면서 1915년에는 2천만명에서, 만주사변 직전에 오면 3천만명에 달하였다. 장쭤린이 중국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건설하고 천하 평정에 도전한 것이나, 비록 장제스에게 패배하기는 했지만 동북 역치 이후에도 장쉐량이 장제스와 힘겨루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동북의 경제적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군벌 내전기에 안정적인 번영을 누린 지역으로는 옌시산의 산시성이 있지만 발전 속도나 규모 면에서는 동북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는 일본의 자본 때문이기도 하지만 장쭤린 스스로도 동북을 발전시키겠다는 강한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두번째 공헌은 교육이다. 이것은 장쭤린이 남긴 여러 업적 중에서도 특히 중국인들에게 가장 높이 평가받는다. 단순히 해외에서 돈을 빌리고 기계를 들여와서 근대적인 공장을 짓는다고 해서 당장 근대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리훙장이 야심차게 추진했던 양무 운동이 실패로 끝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진정한 근대화란 근대적인 지식과 소양을 갖춘 새로운 인재들이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하지만 신해혁명 직전까지도 동북의 교육 수준은 다른 지역에 비하여 매우 열악하였으며 교육비의 지출도 보잘 것 없었다. 심지어 펑톈 도독이었던 자오얼쉰은 청조의 관료치고는 비교적 개혁파에 속했음에도 재정난과 군비 지출을 이유로 1912년 펑톈성 자의국에 "학교 교육을 중지하고 군사비로 전용할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따라서 교사들의 급료조차 제대로 주지 못할 정도였다. 장쭤린은 순방영 통령이었던 1908년 은 3천냥에 달하는 사재를 털어서 학교를 짓도록 하였고 자오얼쉰에게 건의하여 인재 확보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학교를 세울 것을 강력하게 건의하였다.
그는 동3성의 군정대권을 장악하기 이전부터 주변 사람들에게 한 고조의 고사에 빗대어 "나는 말 위에서 지금의 지위를 얻었지만 말 위에서 동북을 통치할 수는 없다"며 인재의 양성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장쭤린 정권 아래 동북의 교육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1916년 펑톈성에는 5,500여개의 학교와 22만명의 학생이 있었으나 5년 뒤인 1921년에는 7,700여개의 학교와 34만명의 학생으로 늘어났다. 또한 1928년에는 1만여개의 학교와 64만명의 학생에 달하는 등 중국에서 인구 대비 학생수가 가장 많은 지역으로 발전하였다.
1922년 10월 24일 동북 최초의 대학인 둥베이 대학(東北大學)이 설립되었다. 당시 본토에는 대학이 35곳에 인원수는 1만3천명에 달했지만 동북은 대학이 단 한 곳도 없었고 고등교육기관이라고는 펑톈에 전문학교 4곳과 지린성과 헤이룽장성에 각각 1곳씩 있을 뿐이었다.
장쭤린은 펑톈 외곽 남쪽에 500무(약 10만평)의 땅을 사들여 학교 부지로 삼았다. 참고로 주변에는 정묘,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략했던 청태종 홍타이지의 능묘도 있다. 둥베이 대학에는 문과, 이과, 법과, 공과 등 총 8개 학과가 있었고 1기 입학생은 480명이었다. 이후 관내로 출병한 장쭤린이 중원의 혼전에 개입하면서 심한 재정적 압박을 받았음에도 둥베이 대학은 꾸준히 확충되어 1928년에는 23개 학과와 학생수는 1,868명에 달하였다.
루롱팅, 천중밍, 옌시산 등 다른 군벌들 중에서도 나름대로 교육과 인재 양성에 노력한 경우가 없지 않았지만 장쭤린만큼 열정적이었던 사람은 없었다. 그는 여타 군벌들처럼 막대한 개인 재산을 축적했지만 개인적인 사치 향락에 낭비하기보다는 대부분 교육 사업에 아낌없이 투자하였다. 오직 군비 확보와 전쟁에만 혈안이 되었던 당시의 군벌들로서는 그야말로 보기 드문 사례였다. 또한 장쭤린 스스로는 무식한 마적 출신이었고 마적 시절의 부하들 또한 그의 정권 일부를 차지했지만 핵심 세력들은 해외 유학파나 고등 교육을 받은 자들이었으며 그 중에는 문인 출신의 인재도 적지 않았다. 유능한 인재를 중용하고 그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 또한 다른 지역의 군벌들과는 비교되는 모습이었다. 이것이 장쭤린이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정권을 유지하면서 군벌 내전기에 유일하게 부자 세습에 성공했던 이유이다. 교육에 대한 열의는 장쭤린이 죽은 뒤 그 뒤를 계승한 장쉐량 역시 변함이 없었고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털어서 곳곳에 학교를 짓고 민중 계몽에 나서는 등 동북의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한편으로, 장쭤린은 본질적으로 봉건 군벌이었다는 점이다. 뛰어난 카리스마와 탁월한 결단력은 한 고조나 명나라 주원장이 20세기에 나타난 것에 비견되리라. 하지만 새로운 시대를 열만한 식견은 없었다. 그의 사고 방식은 오직 중국이라는 테두리 안에만 머물러 있었다. 단 한번도 중국 밖에 나가본 적도 없었고 서구를 접할 일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가 추구하는 근대화는 어디까지나 단편적이고 외형적인 것에 머물렀고 중국 사회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모순과 부조리함을 바꿀 수는 없었다. 이 점이 일본 메이지 유신을 일으켰던 조슈 지사들이나 중국의 개혁개방을 추진한 덩샤오핑과 다른 점이다.
또한 쑨원을 포함하여 당대 많은 사람들이 장쭤린의 걸출한 재주와 인간됨을 높이 평가했지만 정작 그의 측근들은 장쭤린의 한계를 똑똑히 지적하였다. 일본 육사 출신으로 장쭤린의 꾀주머니였던 양위팅(杨宇霆)은 그에 대하여 "우유부단하고 정작 중요할 때 담이 작았다"라고 하였고, 펑톈 성장이자 장쭤린이 동북 대학의 초대 교장으로 임명했던 왕융장(王永江)은 "신의가 없고 작은 일은 하되 큰 일을 이루지 못한다"라고 비판하였다. 또한 부하들을 서로 이간질시켜 파벌을 만들게 하고 재주 있는 사람을 좋아하면서도 확실하게 믿고 쓰지 못하는 것이 장쭤린이었다. 물론 이런 모습은 당대 다른 군벌, 정치가들 심지어 장제스나 마오쩌둥 또한 다를 바 없었다는 점에서 굳이 장쭤린만의 문제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교활하고 목적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며 필요하다면 일본의 힘을 빌리는 등 친일적인 행동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즉, 그는 여러 가지 면이 있었고 어느 한가지로 말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훗날 장쉐량은 아버지에 대하여 "有雄才,无大略(영웅의 재주는 있지만 국가 대계는 없었다.)"라고 회고하였는데 이만큼 장쭤린이라는 인간을 명료하게 나타낸 말도 없을 것이다. 말년에 베이징을 점령하고 천하를 호령하게 되자 스스로 교만해졌고 장쭤린 정권 또한 활력을 잃고 쇠락하였다. 부하들은 그의 신임을 얻고 공을 다투기에만 급급하였다. 모든 군정 대권이 오직 장쭤린 한사람에게 집중되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깊이 신뢰했던 부하 궈쑹링(郭松齡)이 갑자기 반란을 일으킨 것이나, 경솔하게 일본의 힘을 빌렸다가 발목이 잡히면서 관동군에 의해 황구툰(皇姑屯)에서 비참하게 비명횡사한 것도 따지고 보면 그가 자초한 일이다. 결국 장쭤린은 "도적의 우두머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어쨌거나 그는 천하를 얻지 못하였고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하겠지만 만약 중국을 통일한 사람이 장제스가 아니라 장쭤린이었다면, 라고 상상해 보는 것도 나름대로 재미있지 않을까 싶다.
* 한달에 무너진 량스이 내각
후베이성에서 자오헝티를 몰아내고 승리한 우페이푸는 양호 순열사가 되어 더욱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우페이푸의 안중에는 자오헝티도, 남쪽에서 북벌을 준비하고 있는 쑨원도 없었다. 진짜 적은 장쭤린이었다. 장쭤린은 허명에만 사로잡혀 있던 돤치루이나 어설픈 책략이나 휘두르는 쉬수청 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상대였다. 동3성을 차지한데다 일본의 후원을 받아 자금이 풍부하였고 휘하에는 막강한 군대를 보유하였다. 또한 비밀리에 돤치루이, 쑨원과 反즈리 삼각 동맹을 맺었으며 허난 성장 자오티를 회유하였고 저장 독군 루융샹과도 손을 잡았다. 장쭤린의 권모술수는 끝이 없었다. 특유의 수완으로 주변을 회유하는데 누구도 따르지 못하였다. 대총통 쉬스청조차 거만한 우페이푸보다는 과거의 인연이 깊은 장쭤린에게 더 마음이 있었다. 심지어 즈리파에 대해서도 손을 뻗쳐 차이쿤과 우페이푸의 사이를 이간질시키려 하였다. 우페이푸로서는 방심하다가 사방에서 공격을 받아 패망할 판이었다.
물론 방심할 수 없는 것은 장쭤린도 마찬가지였다. 욕심만 많을 뿐 우유부단한 차오쿤을 구워 삶는건 문제도 아니다. 하지만 문무를 겸비한 우페이푸는 만만치 않은 적이었다. 1년 전만 해도 "한낱 사단장 따위"라고 무시했던 우페이푸가 이제는 양호 순열사가 되어 차오쿤, 장쭤린과도 대등한 위치에 올랐다. 어영부영하다가는 자신도 언제 우페이푸에게 먹힐지 모를 판이었다. 하늘에 두 개의 해는 없는 법이니 어느 한쪽이 스스로 굴복하지 않는 한, 일전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적을 만들지 않는 장쭤린으로서도 우페이푸만큼은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물과 기름이었다. 두 사람은 모든 면에서 대조적이었다. 나이도 비슷했다. 우페이푸가 장쭤린보다 두살 위였다. 또한 부유한 상인 집안 출신으로 향신 계층이었다. 일자 무식인 장쭤린과 달리, 22살에 향시에 합격하여 수재(秀材, 우리의 생원)가 되을 정도로 총명하였다. 1902년 위안스카이가 바오딩에서 육군속성학당(保定陆军速成学堂学, 신해혁명 이후 바오딩 군관학교로 개칭)을 세우자 1기생으로 입교하여 근대 군사교육을 익혔다. 또한 도쿄 주재 청국 공사관의 무관으로 근무하였고 러일전쟁 중에는 일본군과 협력하여 러시아군에 대한 정찰 작전을 수행하다가 포로가 되었으나 탈출하기도 했다. 그는 군인으로서 엘리트 코스를 차근차근 밟아 나갔으며 시와 풍류를 즐길 줄 알아 당대 군벌로서는 보기 드물게 문무를 겸비한 유장(儒將)이었다.
우페이푸는 청렴하고 축재를 하지 않았으며 부하들에게 엄격하고 인색하였다. 반면, 장쭤린은 호탕하고 이재에 밝았으며 부하들에게 아낌없이 베풀었다. 또한 우페이푸는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여 거만하고 의심이 많으며 독선적인 면이 있었지만, 장작림은 소탈하면서 인재를 중용하였다. 좋게 말하면 협객의 기질이 있었다. 김명호 교수가 쓴 《중국인 이야기 4권》 을 보면 장쭤린이 최신 기계를 사라고 상하이로 보냈던 부하가 도박장에서 죄다 탕진했다면서 자살하겠다고 하자 되려 판돈을 더 얹어 주면서 마음껏 쓰고 오라고 했다는 일화가 나온다. 장쭤린의 후한 성격을 보여준다. 뒷날 장제스를 상대로 두 사람이 부득이 손을 잡고 합종연횡을 하게 되지만 가히 평생의 호적수라 할 만 하였다.
두 사람 모두 만만찮은 인물이지만, 우페이푸는 평생을 전장에서 보냈기에 대군을 지휘하고 군사작전을 짜는데는 장쭤린보다 몇수 위였다. 장쭤린의 군사 역량은 보잘 것 없었다. 하지만 정치적 수완과 권모술수를 부리는 것에서는 장쭤린이 우페이푸보다 몇수 위였다. 우페이푸는 외세를 배격하였지만, 장쭤린은 이기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며 일본과 결탁하여 매국노가 되는 것조차 서슴치 않았다.
갈수록 첨예하게 대립하던 두 사람의 불화가 결정적으로 된 사건은 새로운 내각의 조직 문제였다. 안-즈 전쟁 이후 베이징 정부의 내각은 진윈펑이 맡고 있었다. 그는 원래 돤치루이의 심복이었지만 안-즈전쟁 이후 즈리파가 되었고 우페이푸와 가까웠다. 동생인 제8혼성여단장 진윈어 역시 우페이푸의 수하였다. 즈리파와 가까우면서 대총통 쉬스청과는 사이가 나쁜데다, 무엇보다도 고질적인 재정난을 도무지 해결할 능력이 없었다. 베이징 정부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면서 세금은 제대로 걷히지 않았고 국내 자본가들을 설득하지도 못한데다 해외로부터의 차관 획득에도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정부 부처는 물론이고 군대도 몇달씩 월급이 체불되어 아우성이었다. 베이징 정부는 마비 상태였다. 게다가 군비 문제로 즈리파와 펑톈파 양쪽 모두에게 신뢰를 잃었다는 점이었다. 즈리파는 그가 장쭤린과 결탁하여 특혜를 준다고 생각했고 장쭤린은 장쭤린대로 즈리파의 끄나풀이라고 여겼다.
1921년 12월 14일, 장쭤린은 베이징으로 와서 쉬스청에게 내각의 개편을 건의하였다. 쉬스청 역시 진윈펑을 싫어했으므로 이의가 있을 리 없었다. 진윈펑은 어떻게든 자리를 보존해 볼 생각으로 사돈지간이라는 관계를 앞세워 장쭤린에게 매달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4일 뒤인 18일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진윈펑은 결국 내각 총사퇴를 선언하였다. 장쭤린은 후임으로 교통은행 이사장 량스이(梁士詒)를 추천하였다. 이미 베이징 정부는 아무런 권위도 없고 군벌들의 입김에 좌지우지 되는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다.
량스이는 청나라 진사 출신으로 위안스카이의 심복이기도 하였다. 그는 철도와 재정에서 잔뼈가 굵었으며 교통 은행(1907년에 설립된 중국 최초의 은행으로 민국 초기 중국 4대 은행 중 하나)을 중앙 은행으로 승격시켰다. 위안스카이가 칭제를 선언하자 선봉에 서서 구미 열강들을 상대로 분주히 돌아다니며 지지를 요청하였다. 그런데 위안스카이가 제제에 실패하여 죽고 대총통이 된 리위안홍은 그를 '복벽의 괴수'로 지목하였다. 량스이는 홍콩으로 도주해야 했다.
장쉰의 복벽 사건으로 리위안홍이 하야하고 돤치루이가 정권을 잡으면서 1918년 2월 량스이도 사면되었다. 그는 정계에 복귀하여 국내 공채국 총재와 참의원 의장 등을 역임하였다. 또한 돤치루이와는 오랜 친분이 있었고 친일파이기도 했다. 장쭤린 입장에서는 도무지 나쁠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장쭤린은 차오쿤을 베이징으로 초청한 다음 량스이라면 재정난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며 넌지시 협조를 요구했다. 매사 혼자 결정할 능력이 없는 차오쿤은 우선 뤼양의 우페이푸에게 서신을 보내어 의견을 구했다. 우페이푸의 대답은 이러했다. "그럼 잠시 맡겨 보도록 하죠." 일단 장쭤린이 하자는대로 놔두자는 얘기였다.
1921년 12월 24일, 량스이는 국무총리의 자리에 올랐다. 량스이 내각의 멤버들은 펑톈계와 즈리계가 추천한 사람들이 골고루 포진하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양대 군벌의 연합정권이었다. 하지만 갈등은 금새 터져나왔다. 량스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돤즈구이, 취둥펑을 비롯한 6명의 안휘파 우두머리들에 대한 특별 사면령이었다. 그들은 안-즈 전쟁 당시 즈리군과의 싸움에 앞장섰던 자들이므로 그동안 전범으로 전국에 수배되어 있었다. 양스이의 특별 사면은 장쭤린의 입김이었다. 우페이푸를 비롯한 즈리파들은 완전히 무시당한 셈이므로 격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량스이는 즈리파에게 지급키로 약속했던 300만원의 군비도 차일피일 미루며 주지 않았다.
1922년 1월 5일에는 교통계(양스이의 교통 은행계 출신 관료 집단으로 당대 대표적인 친일 세력들이었다)의 중진 인사인 차오루린(趙汝霖)과 루쭝위(陸宗輿)가 베이징 시정부의 요직에 임명되었다. 대표적인 친일파인 두 사람은 위안스카이와 돤치루이 정권 시절 21개조 조약 체결에 앞장섰고 이로 인해 5.4운동이 일어나 온 국민으로부터 매국노로서 지탄을 받았던 자들이었다. 량스이는 이들을 앞세워 베이징의 시 공유재산을 담보로 일본으로부터 1천만원을 빌렸다.
그 사실을 안 우페이푸는 량스이에게 전문을 보냈다. 량스이는 자신의 취임을 축하하는 전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읽어보니 량스이를 호되게 힐책하고 장쭤린을 비난하는 것이었다.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 외세에 아첨하고 국권을 파는 량스이는 중국의 이완용과 다를 바 없는 매국노이다! 중국 민중은 이 간적을 물리쳐야 한다!" 이완용은 조선을 일본에게 팔아 부귀영화를 누린 자이다. 량스이로서는 이보다 신랄한 비난은 없었을 것이다. 우페이푸는 중국 여러 언론사와 즈리파 독군들에게도 전문을 보내어 량스이를 비난하고 자신을 지지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한편, 1921년 11월 12일부터 워싱턴에서 미국, 일본, 영국 등 주요 국가들이 모여서 "워싱턴 회의"가 개최되고 있었다. 영, 미로부터 산둥 반도의 중국 반환을 압박받고 있었던 일본은 비밀리에 량스이와 접촉하여 산둥 반도의 반환과 차관 제공을 대가로 터무니없는 특혜를 요구하였다. 극심한 재정 압박을 받고 있었던 량스이로서는 일본의 차관이 절실하였다. 그는 중국 대표단에게 일본의 요구를 수락하라고 지시하였다. 물론 이런 사실은 국민들이 알아서는 안되는 극비 사항이므로 엄중하게 비밀을 유지하였다.
물론 베이징 정부 곳곳에 눈과 귀를 가지고 있었던 우페이푸가 이런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그는 량스이가 일본과 결탁하여 이권을 넘기려고 한다면서 언론에 공포해 버렸다. 당장 중국 전체가 들끓는 것은 물론이고, 국제 사회의 여론 역시 악화되어 일본과 량스이에게 비난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다카하시 고레키요(高橋是清) 내각은 결국 산둥에서의 철수를 결정했다. 이는 중국에서 일본의 세력이 위축된다는 의미였다. 물론 일본의 후원을 받고 있던 장쭤린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먼 훗날의 일이지만 다카하시는 이 일을 빌미로 1936년 2.26사건이 일어나자 소장파 장교들에게 무참히 살해된다.
완전히 체면을 구기게 된 장쭤린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우페이푸가 근거도 없는 말을 만들어 비방한다며 반발하면서 일본과 량스이 사이의 밀담에 대해서는 자신도 전혀 모른다고 발뺌을 하였다. 장쭤린과 우페이푸는 서로에게 포화를 날리는 전문전(電問戰)을 벌였다. 하지만 여론은 급격히 악화되어 곳곳에서 양스이를 성토하는 목소리가 빗발쳤다. 신변마저 위협받은 량스이는 사직서를 던지고 1922년 1월 25일 톈진으로 도망쳤다. 이로서 한달 만에 량스이 내각은 붕괴되었다. 쉬스청은 어쩔 수 없이 후임자로 즈리파와 가까운 외교총장 옌후이칭(顏惠慶)을 국무총리 대리로 임명하였다.
장쭤린의 완패였다. 자신이 추천한 량스이 내각이 한달만에 붕괴되자 그야말로 체면은 말이 아니었다. 결국 장쭤린은 전장에서 자웅을 정하기로 결심하였다.
* 즈리군 vs 펑톈군 출병하다
양측의 객관적인 군사력은 위안스카이가 조직하였고 수많은 전투로 단련된 즈리군이 월등히 우세했다. 펑톈군은 토비 출신이 태반인데다 변변한 실전 경험도 없었다. 더욱이 안-즈전쟁과 호베이성에서 보여준 우페이푸의 눈부신 활약상은 산전수전을 다 겪은 장쭤린으로서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장쭤린은 단순히 천운에 걸고 일을 벌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동안 즈리파를 고립시키기 위하여 돤치루이를 부추겨 안후이-펑톈 연합전선을 결성하였고 남쪽으로는 쑨원과 손을 잡았다. 즈리파에 대해서도 내부 공작을 하였다. 자신의 적은 즈리파 전체가 아니라 오로지 우페이푸 한 사람에게만 있다고 강조하였다. 특히 허난 성장 자오티, 안후이 독군 장원성은 원래 즈리파이지만 우페이푸와의 개인적인 불화가 있었다. 장쭤린은 이를 교묘하게 파고 들어서 反즈리동맹에 가담하도록 하였다. 사방에서 들고 일어난다면 제아무리 우페이푸라도 어떻게 당할 재간이 있을 것인가.
게다가 장쭤린은 차오쿤과 우페이푸에 대해서도 이간질을 하였다. 차오쿤의 동생인 즈리성장 차오루이는 이전부터 우페이푸와 사이가 나빴다. 3월 8일 장쭤린의 47세의 생일날 차오루이가 차오쿤을 대신해 축하하러 펑톈에 왔다. 장쭤린은 차오루이를 극진하게 대접하면서도 정치 문제는 입에도 담지 않았다. 장쭤린의 속내를 알 수 없어 답답했던 차오루이는 그의 심복인 쑨리에천에게 넌지시 장쭤린의 의중을 물어보았다. 쑨리에천은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 장군께서는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가까운 쪽이 부하인지, 친척인지 말입니다." 물론 부하는 우페이푸, 친척은 차오쿤과 사돈 지간인 장쭤린을 가리킨다. 우페이푸와 장쭤린 두 사람 중에서 어느 편에 서겠는가는 의미였다. 차오루이는 하늘에 맹세코 장쭤린에게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제서야 장쭤린은 차오루이에게 즈리파와 펑톈파의 화해를 위한 세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첫째로 우페이푸는 중앙에서 손을 떼고 양호에만 신경 쓸 것, 둘째로 징한철도 남단에 배치된 즈리군을 북쪽으로 철수시킬 것, 셋째로 량스이를 복직시킬 것이었다.
물론 장쭤린도 우페이푸가 이런 조건을 수락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목적은 오로지 전쟁의 책임을 우페이푸에게 돌리고 즈리파를 내부에서 분열시키는 것이었다. 장쭤린의 사주를 받은 차오루이는 차오쿤에게 장쭤린과 손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차오쿤은 우페이푸를 버릴 생각도, 장쭤린과 일전을 벌일 의사도 전혀 없었다. 그는 애매하게 대답하면서 장쭤린을 어떻게든 달래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과 상관없이 이미 일은 흘러가고 있었다.
3월 31일 펑톈군 최정예부대인 제27사단이 산하이관을 돌파하고 베이징으로 진군하였다. 뒤이어 장징후이의 제1사단과 제16사단 등이 주력부대가 열차를 타고 차례로 남하하였다. 펑톈군의 병력은 4개 사단(제1사단, 제16사단, 제27사단, 제28사단), 8개 혼성여단, 기병 집단(2개 기병여단) 등 총 12만 8천명에 달했다. 그 중에는 일본 유학을 포기하고 급히 귀국한 장쉐량도 있었다. 그로서는 첫 실전이었지만 장쭤린은 펑톈군 최강부대인 제3혼성 여단의 지휘를 맡겼다. 장쭤린은 이 싸움을 펑톈군과 즈리군의 싸움이 아닌, 장쭤린, 우페이푸 두 사람의 개인적인 싸움으로 만들겠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우페이푸 또한 그런 뻔한 술책에 놀아날 만큼 호락호락한 사나이는 아니었다.
4월 3일은 우페이푸의 49세 생일이었다. 즈리파 군벌 500여명을 자신의 근거지인 뤼양으로 초청하여 사령부에서 성대한 생일 축하연을 열었다. 그 자리에서 우페이푸는 장쭤린의 죄상을 늘어놓으며 토벌을 선언했다. 참석자들은 "우페이푸를 지도자로 추대하자!" "장쭤린을 무찌르자!"라고 입을 모아 외쳤다. 그 자리에는 차오루이도 있었다. 원래 차오쿤은 차오루이를 통해 우페이푸를 바오딩으로 부른 다음 장쭤린과 화해하라고 타이를 생각이었다. 하지만 돌아가는 상황으로 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축하연이 끝나자 말자 우페이푸는 출병을 명령했다. 후베이성에 주둔 중인 제3사단과 제25사단에게 북상을 지시하고 왕승빈의 제23사단은 바오딩으로, 장복래의 제24사단은 정저우로 이동하라고 명령하였다. 또한 산시성(陝西省)에 주둔한 펑위샹의 제11사단에게도 뤄양으로 신속히 남하하라고 명령하였다. 즈리군의 병력은 )을 제외하고 6개 사단(제3사단, 제11사단, 제20사단, 제23사단, 제24사단, 제26사단)과 제8개 혼성여단 등 약 10만명 정도였다.
한편, 남쪽에서는 쑨원의 광저우 군정부가 즈리파 타도를 외치며 북벌 전쟁의 재개를 선언하였다. 그는 광시성 구이린에 대원수부를 두고 장쭤린에 호응하여 북상할 준비를 갖추었다. 병력은 약 3만명. 안-즈전쟁 이래 천하의 패권을 놓고 또 한번의 격전이 벌어질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