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이관의 혈전
중원을 놓고 벌어진 두 효웅 장쭤린과 우페이푸의 승부는 겨우 십여일만에 끝났다. 하지만 파괴력은 2년 전의 안-즈 전쟁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양측은 도합 20만명이 넘는 병력을 동원하여 베이징과 톈진 주변의 허베이 평야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펑톈군은 전사자만도 1만 명 이상, 즈리군의 사상자 역시 수천여 명에 달했다.
5월 7일 장쭤린은 즈리군의 포격을 뚫고 징펑철도를 따라 란저우(濼州)에 간신히 도착할 수 있었다. 구사일생이나 다름없었다. 란저우는 톈진과 산하이관 사이에 있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그는 이곳에 임시 사령부를 설치하고 패잔병들을 모아 추격해 오는 즈리군을 막는 한편 진용을 재정비할 생각이었다. 전세가 기울어졌다는 이유로 부하들을 버리고 일본 조계로 달아났던 돤치루이와는 대조적이었다. 덕분에 패주하고 있던 부대가 여기저기서 장쭤린 주변으로 모여들였다.
하지만 타격은 컸다. 장쭤샹의 서로군은 괴멸 상태였다. 장징후이의 동로군도 마찬가지였다. 사상자도 많았지만 대부분 마적 출신의 오합지졸이었기에 기강이 무너지자 모두 제 살길을 찾아서 뿔뿔이 흩어진 것이다. 장쭤샹과 장징후 등 몇몇 수장들만 소수의 측근을 데리고 형편없는 몰골로 돌아왔다. 헤아려보니 당초 출병한 12만명 중 남은 병력은 2만 명도 채 되지 않았다. 장쭤린으로서는 오십 평생을 통틀어 가장 쓰라린 패배였다. 그나마 장쉐량의 제3혼성여단과 리징린의 제7 혼성여단, 궈쑹링의 제8혼성여단은 많은 손실에도 불구하고 그럭저럭 부대를 유지한 채 산하이관으로 철수하였다. 그때까지 안절부절하던 장쭤린은 보고를 듣고 그제야 희색이 만연하였다. 다른 부대는 아무래도 좋지만 펑톈군 최강의 3개 여단만 건재하다면 얼마든지 재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늘은 장쭤린을 버리지 않은 것이다.
한편, 개선장군이 된 우페이푸는 의기양양하게 며칠 전까지 장쭤린의 총사령부였던 진량청에 입성한 후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대총통 쉬스청에게 압력을 가하여 장쭤린에게 엄벌을 내리라고 강요하였다. 쉬스청은 마친 상전처럼 행세하는 우페이푸가 아니꼬왔지만 5월 10일 장쭤린이 쥐고 있던 몽골 경략사와 동삼성 순열사, 펑톈 독군 등 모든 직위에서 파면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평톈 독군에는 우쥔성(吳俊陞)을, 헤이룽장성 독군에는 펑더린(馮德麟)을 임명하였다. 여기에는 펑톈파를 이간질시켜서 스스로 무너지게 만들려는 우페이푸의 책략이 있었다.
우쥔성은 장쭤린의 오랜 심복이지만 장쭤샹, 장징후이같은 마적 패거리와는 달리 처음부터 군인이었으며 순방영 시절만 해도 장쭤린과는 동등한 지위였다. 나이도 훨씬 많았다. 따라서 서로에게 미묘한 감정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펑더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장쭤린처럼 마적 출신으로 장쭤린이 순방령 통령이 되자 펑더린 또한 같은 지위에 올랐으며 장쭤린이 제27사단장이었을 때 제28사단장을 지내는 등 한동안 라이벌 구도를 유지하였다. 또한 장쭤린보다 나이도 7살 위인데다 "녹림의 선배"라는 우월 의식도 있었다. 장쉰의 복벽 당시 펑더린은 장쉰을 등에 업고 동3성의 실권을 쥘 요량으로 장쭤린에게 도전했다가 패배하여 톈진으로 압송되었다. 돤치루이는 그를 사면한 후 펑톈으로 되돌려보냈다. 장쭤린을 견제할 속셈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세력은 이미 발빠른 장쭤린의 손에 넘어가 있었다. 이미 아무런 실력이 남아 있지 않았던 그에게 장쭤린은 적당한 고문 자리를 하나 주었을 뿐이었다. 만약 장쭤린의 위기를 기회삼아 만약 이들이 야심을 품는다면 장쭤린과 동북의 앞날은 예측불허였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우페이푸의 계략은 통하지 않았다. 펑톈파의 구심점은 오직 장쭤린이었기 때문이었다. 펑톈파의 주요 수장들은 장쭤린과 마적 시절부터 함께 했기에 의리로 똘똘 뭉쳐 있었으며 수십년간 호형호제하면서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장쭤린을 배신할 생각이 없었다. 장쭤린 없이는 펑톈파도 없다는 것이 그들의 믿음이었다. 또한 장쭤린은 동북 인민들의 강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 점이 느슨한 군벌 연합에 불과한 안후이파나 즈리파와 다른 점이었다. 일석일조로 간단히 무너질 수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장쭤린의 배후에는 일본이 있으니 우쥔승, 펑더린이 어떻게 분수 모르는 야심을 품을 것인가.
우쥔승과 펑더린은 직접 산하이관까지 내려 가서 장쭤린을 만났다. 자신들에게 두 마음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속내를 알 수 없었던 장쭤린은 우쥔승을 떠볼 생각으로 자세를 낮추어 이렇게 말했다. "형님, 우리는 오랫동안 친구였습니다. 대총통이 형님을 독군으로 임명했으니 형님이 나를 어디로 보내건 무조건 따를 뿐이오."
우쥔승은 장쭤린보다 12살 위이다. 하지만 펑톈파의 총수인 장쭤린이 자신을 형님이라고 부르자 우쥔승은 자신을 떠보려는 것임을 깨닫고 일부러 화를 내는 척하였다. "무슨 소리를 하십니까! 동3성에서 당신의 위엄은 저보다 훨씬 큽니다. 마음만 먹으면 뭘 하더라도 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같은 사람은 그런 자리 하루를 하라고 해도 무리입니다." 이어서 말했다. "대총통이건, 차오쿤이건, 우수재(우페이푸)이건 그들의 헛소리는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고 싶은대로 하시면 됩니다. 명령만 내리십시오." 우쥔승이 딴 마음이 없다며 충성을 맹세하자 그제야 장쭤린은 기분좋게 웃었다.
만약 이들의 마음 속에 조금이라도 허황된 욕심이 있어서 눈치없이 우물쭈물했다면 장쭤린에 의해 결단코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덕분에 우쥔승은 이후에도 장쭤린의 수하로서 승승장구하였고 훗날 장쭤린이 황구툰에서 열차 폭발로 죽었을 때 그 또한 그 자리에서 함께 죽었다. 평생 같이 한 셈이다. 또한 펑더린은 병환을 명목으로 스스로 하야한 후 펑톈 남쪽에 있는 베이줜(北镇)에서 조용히 은거하다가 4년 후에 죽었다. 장쭤린은 그의 장례를 성대하게 치루어 주었다. 펑더린의 장남 펑융(馮庸)은 크게 중용되어 뒷날 동북 공군 소장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5월 12일, 장쭤린은 란저우에서 동3성의 독립을 선언하고 자신을 "펑톈군 총사령관"이라고 칭하였다. 베이징 정부의 명령에 복종할 필요가 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즈리군이 북상하면서 5월 26일 란저우가 함락되었다. 장쭤린은 전 병력을 산하이관에 집결시켜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그런데 헤이룽장성 동남쪽의 소련 국경과 가까운 쑤이펀허(綏芬河)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의 주모자는 가오스빈(高士賓), 루융구이(盧永貴)였다. 가오스빈은 前 지린군 참모장 겸 제1사단장으로 예전에 장쭤린과의 권력투쟁에 패배하여 쫓겨났던 지린 독군 멍언위안(孟恩遠)의 사위였다. 그동안 복수의 칼을 갈고 있던 그는 장쭤린이 패배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당장 반란의 깃발을 올렸다. 또한 옛 부하인 루융구이 역시 가담하여 제19혼성여단을 무장해제시키고 수분하 주변의 중동철도를 장악하였다. 약 3천여명 정도였던 반란군은 주변의 철도 경비대와 치안부대, 마적들까지 끌어모아 1주일도 안되어 1만 5천명 이상으로 불어났다. 우페이푸는 고사빈을 지린성 토역총사령관에 임명하여 장쭤린 토벌을 명령하였다.
보고를 받은 장쭤린은 부랴부랴 펑톈으로 돌아왔지만, 즈리군을 막기에도 급급한 그로서는 당장 이들을 진압할 병력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놔둔다면 지리성 전체가 반란군에게 장악되어 동북이 두동강 날 판이었다. 장쭤린으로서는 그야말로 위기의 연속이었다. 이 순간 그의 앞에 나선 자가 있었다. "이 장쭝챵에게 어디든 죽을 자리를 주십시오. 저는 이 지역에 대해 잘 압니다. 군대를 이끌고 토벌에 나서 그동안 어르신에게 입은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그가 바로 나중에 산둥왕이라 불리며 중국 전역에 온갖 악명을 떨치게 되는 장쭝창(張宗昌)이었다. "구육장군(狗肉將軍)", "삼부지장군(三不知將軍)", "혼세마왕(混世魔王)", "녹림상장군(綠林上將軍)", "오독대장군(五毒大將軍)" 등 별명도 실로 다채로왔다. 그는 남들에게 자신이 마적 출신이라는 사실을 자랑하였고 처첩이 몇명인지, 재산이 얼마인지, 병사가 몇명인지 알 수 없다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민국 시절 우수죽순처럼 생겨났던 군벌들 중에서도 "동릉대도(東陵大盜, 서태후의 묘를 도굴하여 얻은 별명)" 쑨디엔잉(孫殿英)과 함께 가장 악랄하였고 잔혹하면서 도박과 여색을 즐겼던 것으로 유명했던 그는 소말리아의 악명 높은 군벌 아이디드(Mohamed Farrah Aidid)나 "블러드 다이아몬드"의 주인공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의 중국 버전이라고 할 만하였다.
장쭝창의 이력은 장쭤린만큼이나 파란만장하였다. 산둥성 래주부(莱州府)의 가난한 취고수(관아에 속한 군악대 중에서 나팔을 부는 군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장쭤린, 우페이푸보다 8살 아래였다. 그는 소시적부터 중국 여기저기를 떠돌며 마적으로 활동했지만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혁명군에 가담하는 것이 대세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상하이에서 쑨원의 측근인 천치메이의 휘하에 들어간 후 특유의 수완으로 천치메이의 눈에 들어 장시 육군 제3사단장이 되어 출세의 기회를 잡았다.
제2차 혁명이 일어나면서 쑨원이 위안스카이에게 패배했다. 천치메이도 일본으로 도망쳤다. 장쭝창은 재빨리 위안스카이의 심복인 펑궈장의 부하가 되었다. 그런데 호국전쟁이 일어나자 천치메이가 상하이로 돌아와 프랑스 조계에서 숨은 채 혁명파를 규합하였다. 위안스카이로서는 천치메이가 쑨원 다음으로 눈의 가시였으므로 펑궈장에게 당장 죽이라고 하였다. 펑궈장은 장쭝창에게 5만원의 거금을 주고 그 역할을 맡겼다. 장쭝창에게 천치메이는 옛 은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의리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던 그는 당장 천치메이의 은신처를 찾아낸 다음 부하를 보내어 살해하였다. 1916년 5월 18일의 일이었다. 풍궈장은 이 공을 높이 사서 장쭝창을 장시성 제6혼성여단장에 임명하였다.
1917년 9월 쑨원이 남방군벌들을 규합하여 북양군벌 타도를 외치며 호법전쟁을 일으켰다. 혁명군이 후난성성을 침공하자 장쭝창도 병력을 이끌고 후난성으로 출동하였다. 하지만 군사 역량이 없었던 그는 자오헝티에게 참담하게 패배하였다. 장시 독군 친광위안(陳光遠)은 장쭝창의 부대를 해산시켜 버렸다. 완전히 몰락한 그는 홀홀 단신으로 톈진으로 갔다. 그리고 즈리파의 우두머리인 차오쿤을 찾아가서 많은 뇌물을 바치고 관직을 얻으려고 했다. 뇌물에 눈이 먼 차오쿤은 장쭝창에게 여단장 자리 하나 줄 생각이었지만 이번에는 우페이푸가 걸림돌이었다. 우페이푸는 조석으로 상전을 바꾸면서 바꾸고 탐욕스럽기 짝이 없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따라서 차오쿤에게 장쭝챵이 무능하고 난폭하며 주변의 인망이 없고 재물을 긁어 모으는데만 이골이 난 자라며 절대로 그를 써서는 안된다고 충고하였다. 문전박대당하여 쫓겨난 장쭝창은 1921년 11월 동북으로 가서 장쭤린을 만났다. 장쭤린은 그를 크게 환대하였다. "우리는 같은 녹림대학 마적과 출신이 아니오?"
한동안 펑톈군의 객장 신세였던 장쭝창이 이 날 장쭤린 앞에서 큰 소리를 칠 수 있었던 것은 젊은 시절 블라디보스톡에서 중둥철도 건설의 인부들을 지휘하는 우두머리를 맡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동만주의 지리에 밝았고 러시아어도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천군만마를 만난 셈인 장쭤린은 즉석에서 그를 토벌군의 사령으로 임명하였다. 또한 우쥔승에게 시켜서 지시하여 약 500여정의 구식 소총과 산포 1문, 중기관총 3정, 많은 탄약을 주었다. 장중창은 오백여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열차를 타고 하얼빈을 거쳐 무단장으로 향했다.
가오스빈의 반란군은 무단장 서쪽의 하이린(海林)까지 진출하여 현지 수비대를 격파하고 주변 마을을 마구 약탈하였다. 반란군의 숫자가 훨씬 많았기에 정면 공격은 승산이 없었다. 장쭝창은 철도 인근의 숲속에 부하들을 매복시키고 산포와 기관총을 배치하였다. 6월 3일 반란군을 잔뜩 실은 채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달려오는 열차가 그들의 눈 앞에 나타났다. 장쭝창은 침착하게 산포로 맨 앞의 기관차를 겨냥한 후 발사했다. 포탄은 기관차에 정통으로 명중했다. 화염에 휩쌓인 기관차가 제어를 잃으면서 열차가 통째로 뒤집어졌다. "쏴라!" 그의 명령이 떨어짐과 함께 일제 사격이 시작되었다. 오합지졸에 불과한 반란군은 기습을 당하자 변변히 싸우지도 않고 뿔뿔이 흩어졌다. 숫적으로는 1/10도 되지 않는 장쭝창에게 단 한번의 전투로 무너져 내린 것이다. 가오스빈과 루융구이는 도망치다가 결국 부하들의 손에 총살당하였다.
지린성은 이후에도 우두머리를 잃고 토비로 전락한 반란군이 준동하면서 한동안 혼란스러웠지만 어쨌든 장쭤린은 이것으로 한시름 덜었다. 그는 큰 공을 세운 장쭝창을 지린군 제3혼성여단장 겸 중둥 철도 방위 부사령에 임명하였다. 드디어 재기의 기회를 잡은 장쭝창은 이 기회를 이용해 병력을 모으고 노획한 무기로 무장시켰다. 대부분은 투항한 반란군과 마적들, 적백내전에 패배하여 만소 국경으로 쫓겨온 러시아 백군 출신 용병들까지 끌어모아서 마구잡이로 뒤섞인 잡탕 부대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장쭝창은 하루아침에 펑톈군의 유력한 실력자로 떠올랐다.
지린성의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그것으로 장쭤린의 위기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왕청빈의 제23사단과 펑소우선(彭壽莘)의 제26사단 등 즈리군은 란저우를 점령한 후 여세를 몰아 산하이관으로 밀려왔다. 일단 산하이관이 돌파된다면 동북의 방어도 장담할 수 없었다. 장쭤린은 사활을 걸고 최정예부대인 장쉐량, 궈쑹링, 리징린 3개 여단을 중심으로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궈쑹린을 사령관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장쉐량과 친분이 있는 미국인 목사를 친황다오의 즈리군 사령부로 보내어 펑소우선에게 휴전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그 사이 산하이관에서는 이미 전투가 시작되었다.
한동안 소강상태였던 즈리군과 펑톈군의 전투는 6월 9일 다시 시작되었다. 어느 쪽도 물러설 수 없었기에 그야말로 처절한 혈전이었다. 펑톈군 제일의 명장 궈쑹링의 지휘 아래 펑톈군 3개 여단은 결사적으로 즈리군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만리장성을 따라 배치된 기관총이 돌격해 오는 즈리군 병사들을 향해 쉴 새 없이 불을 뿜고 포탄이 도처에서 작열했다. 하늘에서는 즈리군의 전투기들이 파리 떼처럼 날라와서 폭탄과 기총 소사를 퍼부었지만 전투기가 없는 펑톈군으로서는 공중에서의 공격에 속수무책이었다. 펑톈군은 3명의 연대장이 전사하고 3천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었다. 하지만 즈리군 역시 손실이 4천명이 넘는 등 산하이관 주변에는 무수한 시체가 쌓였다.
손실은 갈수록 늘어났지만 예상 외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친 우페이푸로서는 도저히 힘으로는 펑톈군의 방어선을 돌파할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일본 정부가 그동안의 불간섭 방침을 깨고 "즈리군의 산하이관 돌파를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라고 선언하였다. 동북에는 이른바 "관동군"이라 불리는 일본군이 뤼순과 펑톈, 창춘 등 주요 요충지에 배치되어 있었다. 숫자는 약 1만명에 불과했지만 그 정예함은 장쭤린의 펑톈군 따위와 감히 비할 바가 아니었다. 또한 이보다는 규모가 작지만 베이징과 톈진에는 의화단의 난 이후 일본 공사관과 조계의 경비를 위해 주둔하고 있는 "지나 파견군"도 있었다. 만약 이들이 출동하여 장쭤린과 합세한다면 제아무리 우페이푸라도 승산은 없다. 게다가 남쪽에서는 쑨원의 북벌군이 움직이고 있었다. 결국 우페이푸는 부득이 장쭤린과의 강화를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우페이푸가 돤치루이나 장쭤린과 다른 점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외세를 끌어들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만약 이때 그가 일본에 접근하여 장쭤린 이상의 이권을 보장했다면 일본은 굳이 장쭤린의 편을 들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는 영, 미의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반드시 그 이상의 댓가를 뒤따른다. 우페이푸는 과거 청조나 위안스카이, 돤치루이가 저질렀던 폐해를 잘 알고 있었다. 차오쿤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무능한데다 탐욕스롭고 뇌물 군벌로 악명을 떨치던 그였지만 외세를 미워하기는 같았다. 훗날 완전히 몰락한 뒤에도 재산을 챙겨 외국의 조계로 도망치는 대신 빈털털이가 된 채 은거하였다.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은 두 사람을 회유했지만 이들은 "가난할지언정 왜놈의 도움을 받지 않겠다"며 끝까지 거절하였다. 군벌들이 사리사욕에만 눈이 멀어 나라도, 민족도 없던 시대에 두 사람의 절개는 지금도 중국인들 사이에서 높이 평가받는다.
6월 17일 자정, 친황다오의 영국 군함에서 펑톈군 대표 장쉐량과 즈리군 대표 왕청빈은 정전협정에 서명하였다. 쉬스청은 중립파인 前 창장 순열사 왕좐위안과 前 헤이룽장성 도독 쑹샤오리엔(宋小濂)을 보내어 양측의 철병을 감시하였다. 6월 24일 양군은 산하이관에서 철수하였다. 이로서 중원은 즈리파의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장쭤린은 비록 관내의 기반을 모두 잃었지만 동3성의 자치를 선언하여 자신의 왕국으로 만들었다. 그는 평소 자신이 들고다니는 부채에다 "무망오치(毋忘吳恥)"라고 썼다. 우페이푸에게 받은 치욕을 기억하고 반드시 복수하겠다는 결의였다. 그는 한번의 실패로 간단하게 주저앉을 위인이 아니었다. 또한 이번 싸움을 통하여 즈리군의 강함을 똑똑히 인식하고 자신이 자랑하던 펑톈군이 얼마나 무기력한지도 절감하였다. 그는 펑톈군을 대대적으로 개혁하고 일본의 원조를 얻어 동3성에 대한 근대화와 공업화에 착수하였다. 새로운 전쟁의 준비였다.
* 분열되는 즈리파
중원의 패자가 된 우페이푸의 위세는 그야말로 하늘을 찔렀다. 뤄양에 있는 그의 관저는 매일같이 그의 개선을 축하하는 사람들로 끊이지 않았다. 너도나도 우페이푸의 위용을 칭송하며 아첨을 떨었다. 서구의 신문들은 우페이푸를 "중국에서 가장 강한 남자(Biggist Man in China)"라고 대서특필하였다. 우페이푸는 미국 타임지의 표지를 장식한 첫번째 중국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순간이 우페이푸에게는 절정의 순간이었다. 영광의 뒤로는 즈리파가 분열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첫번째는 차오쿤이었다. 오랫동안 차오쿤과 우페이푸의 관계는 평생지기로서 그야말로 유비와 제갈량에 비견될 만하였다. 차오쿤이 있기에 우페이푸가 있고 우페이푸가 있기에 차오쿤이 있었다. 차오쿤은 문무겸비의 명장 우페이푸를 절대적으로 신뢰하였고 무슨 말을 하건 무조건 따랐다. 그러나 그 신뢰는 어디까지나 주인과 수하의 관계로서였다. 기세등등해진 우페이푸는 점차 차오쿤을 제쳐놓고 자신이 즈리파의 수장인양 중앙 정치와 인사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차오쿤은 불쾌하였다. 그는 우페이푸의 권세가 자신을 능가하는 것을 지켜볼 생각이 없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점차 금이 가기 시작하였다.
즈리파 독군들 또한 우페이푸에 대한 불만이 컸다. 우페이푸는 2년 전만 해도 독군은 커녕 일개 사단장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벼락출세하자 마치 천하의 지배자인양 거들먹거리는 모습이 아니꼽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불만이 많은 사람이 펑위샹이었다. 그는 허난 성장 자오티를 토벌한 공으로 펑즈전쟁에 승리한 직후인 1922년 5월 14일 허난 독군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우페이푸는 만만찮은 인물인 펑위샹이 허난성을 기반으로 자신의 라이벌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물론 펑위샹도 우페이푸의 부하가 될 생각은 없었다. 그는 허난독군으로 취임하여 정저우 역에 도착하자 말자 자신을 마중나온 허난군무방변(河南軍務幇辨) 바오더촨(寶德全)을 그 자리에서 체포한 후 반역죄를 씌워 즉결처번하였다. 바오더촨은 원래 자오티의 부하였다. 하지만 자이토가 패망하자 잽싸게 우페이푸에게 붙었다. 우페이푸는 그를 펑위샹의 감시역으로 써먹을 생각이었지만 펑위샹이 선수를 친 것이다.
허난성에 부임한 펑위샹은 병력을 대대적으로 확충하면서 세력을 키웠다. 또한 우페이푸의 간섭을 거부하였다. 허난성의 주요 요직에 우페이푸가 추천한 인사 대신 자신의 측근으로 임명하였고 매월 20만원의 군비를 중앙으로 상납하라는 요구도 무시하였다. 또한 충실한 기독교도인 그는 낙후된 허난성의 내정을 대대적으로 개혁하고 농민들을 수탈하는 사찰을 엄중히 단속하여 민중의 큰 지지를 받았다.
우페이푸는 자신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은 펑위샹을 불쾌하게 여겼지만 펑위샹 역시 사사건건 간섭하는 우페이푸에게 불만을 품었다. "예전에 나와 우페이푸는 같은 여단장이었다. 더욱이 나는 12개 대대를 지휘했지만 그 놈은 고작 8개 대대를 지휘했다. 어느 모로 보나 내가 위였다. 이제와서 왜 내가 그 놈의 명령을 들어야 한단 말인가!" 결국 펑위샹은 겨우 5개월만인 1922년 10월 허난 독군의 자리에서 쫓겨나 베이징의 육군 검열사에 임명되었다. 육군 검열사는 병사의 훈련을 맡은 이름뿐인 명예직이었다. 신임 허난 독군과 성장에는 우페이푸의 심복인 장푸라이와 리지천(李濟臣)이 각각 차지하였다.
펑위샹은 앙심을 품으면서도 일단 명령에 복종하였다. 그는 허난성에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을 남겨두어 장푸라이를 견제하는 한편, 약 2만명에 달하는 예하 부대를 이끌고 베이징 교외에 주둔하였다. 모든 것은 훗날을 위한 포석이었다.
* '6.16사변'의 발발
1922년 6월 15일 밤. 쑨원은 잠이 오지 않았다. 그는 집무실의 책상에 앉아 이따금 벽에 걸린 지도에 시선을 돌렸다. 지도에는 장시성과 푸젠성을 침공한 북벌군의 진군 상황이 그려져 있었다. 오랫동안 벼르고 왔던 북벌이지만, 처음부터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는 장쭤린이 反즈리의 깃발을 올린 것에 호응하여 후난성으로 군대를 출동시켜 우페이푸의 뒤를 칠 생각이었지만 천중밍과 자오헝티의 반대에 부딪치면서 지연되었다. 쑨원은 양광의 절반을 차지한 채 광시성 난닝에 주둔하고 있는 광둥성 총사령관 천중밍의 도움이 절실하였다. 그는 약 2만 5천명의 병력을 보유하였다. 하지만 천중밍은 끝까지 병력은 물론이고 물자와 자금도 내놓으려고 하지 않았다.
천중밍은 광둥성 남쪽 후이저우(恵州) 출신으로 쑨원과는 12살 아래이다. 스무살에 향시에 합격하여 수재(秀才, 생원)가 되었을만큼 두뇌가 비상하였다. 자희신정으로 1909년 각 성에 자의국(諮議局)이라는 지방의회가 설립되자 광둥성의 초대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31살 때였다. 하지만 당대 수많은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멸만흥한에 동조하고 있던 그는 상하이에서 쑨원의 중국동맹회에 가입하였고 이후 쑨원의 오른팔로서 활동하였다.
1911년 4월 27일 광저우에서 황싱과 함께 황화강 사건(黃花崗起義)을 일으켜 160여명의 동맹회원을 이끌고 양광총독부를 공격했으나 참담하게 실패한 후 홍콩으로 도주하였다. 신해혁명이 일어나 청조가 몰락하자 천중밍은 광둥성 도독이 되었으나 쑨원이 위안스카이에 패배하여 일본으로 망명하자 그 또한 홍콩으로 탈출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홍콩에서 은밀히 활동하면서 광둥성에서 혁명무장역량을 조직하는 등 기반을 구축하였다. 호국전쟁이 끝난 뒤 쑨원이 측근들과 함께 상하이를 떠나서 광저우를 북벌의 근거지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은 천중밍의 역할이 컸다. 만약 천중밍이 북양 정부의 압력에 굴복하여 쑨원에게 등을 돌렸다면 쑨원으로서는 아마 갈 곳조차 없었을 것이다.
1917년 12월 광둥 성장이 된 천중밍은 교육과 산업을 발전시키고 군벌들이 전쟁을 명목으로 민중을 가혹하게 착취하지 못하도록 군비를 재정의 30% 이내로 억제하여 광둥성민의 지지를 받았다. 또한 천중밍은 탄압의 대상이었던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비교적 관대하였다. 그의 교육부장은 중국 공산당의 지도자이자 《신청년》의 편집장이었던 천두슈(陳獨秀)였다. 덕분에 많은 마르크스 신봉자들이 광저우를 거쳐 유럽으로 유학을 떠날 수 있었다. 쑨원의 호법전쟁이 루롱팅의 배반으로 실패한 뒤 천중밍은 리례쥔, 쉬숭츠 등 여러 쑨원파 군벌과 손을 잡고 루롱팅을 몰락시켰다. 덕분에 쑨원은 광저우로 다시 복귀할 수 있었고 광둥성과 광시성 두개의 성을 장악하여 북양 군벌에게 맞설 수 있는 실력을 가지게 되었다.
십여년 이상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두 사람이 갈라서게 된 것은 통일에 대한 방법론 때문이었다. 분열된 중국을 하나로 통일해야 한다는데는 이견이 없다. 하지만 쑨원은 '무력 통일론'을 주장하였고 천중밍은 '연성자치론(聯省自治論)'을 내세웠다는 점이었다. 천중밍이 볼 때 쑨원의 무력 통일론은 현실 착오적인 것이었다. 북양군의 실력은 남방보다 훨씬 우세하였다. 무슨 수로 쓰러뜨린단 말인가. 또한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고 얼마나 많은 중국인이 죽을 것이며 외세의 개입과 침탈은 어떻게 막을 것인가. 이는 청말 태평천국의 혼란을 다시 재현하자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천중밍의 "연성자치론"은 일종의 타협론이었다. 북양 군벌이 통치하는 중앙정부의 권위는 인정하되, 대신 자치권을 누리자는 것이 연성자치론이다. 원래 중국은 역사적으로 지방의 힘이 강하다. 신해혁명 역시 우창봉기를 시작으로 각 성이 독립을 선언함으로서 청조를 무너뜨리지 않았던가. '민주'와 '공화'의 원칙에서 무력이나 혁명이 아닌 현실의 정치 질서 속에서 타협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쑨원이 보기에는 천중밍의 주장은 광둥성의 통치에나 만족하면서 도탄에 빠진 중국의 현실을 외면하겠다는 군벌식 사고에 지나지 않았다. 이미 오호십육국 시대로 돌아가 군벌들이 여기저기 할거하는 상황에서 그런 겉모습 뿐인 통일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것이 서로 양립할 수 있는 근본적인 차이점이었다. 천중밍은 아무런 실력도 없는 쑨원이 군벌을 모아 군벌을 정벌하겠다며 허세를 부리는 모습이 가소로았다. 게다가 쑨원이 손을 잡으려는 돤치루이는 과거 이미 공화정을 한번 짓밟았고 무력통일을 주장하지 않았던가. 오히려 무력 통일을 반대하고 남북 화평을 지지했던 즈리파와 손을 잡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은가. 그것이 100% 진심은 아니라도 타협의 여지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하였다. 천중밍이 보기에는 오히려 쑨원의 북벌전쟁이란 통일은 커녕, 남북화평을 가로막는 일이었다. 두 사람의 골은 점점 깊어졌다.
천중밍은 쑨원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자 3월 21일 홍콩을 방문하고 돌아오던 쑨원의 심복이자 광둥군 참모장 덩컹(鄧鏗)을 암살하였다. 쑨원에 대한 경고였다. 덩컹은 군사 역량을 갖춘 간부가 부족했던 쑨원의 혁명군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다. 광저우 육군 학당 출신인 그는 광둥군을 철저하게 훈련시켰으며 쉐웨, 차이팅카이, 장파쿠이, 리지선 등 그가 길러낸 제자들은 뒷날 장제스가 북벌전쟁을 일으켰을 때 핵심 멤버들이 되었다. 그 중에는 공산주의자로서 나중에 신4군 군장이 되는 예팅(葉挺)도 있었다.
덩컹은 쑨원의 측근이지만 천중밍과도 오랜 친분이 있었다. 하지만 이미 쑨원에 대한 증오심으로 눈이 먼 천중밍에게는 이미 그런 사실도 중요하지 않았다. 덩컹이 죽었다는 말에 격분한 쑨원은 계획을 취소하기는 커녕 4월 21일 천중밍을 광둥 성장에서 해임하고 그 자리에 외교부장 우팅팡(伍廷芳)을 임명하였다. 그리고 북벌 전쟁을 강행키로 하고 광둥성과 광시성, 윈난성의 여러 군벌들을 규합하여 5월 3일 광둥성 북부의 사오관(韶關)에서 북벌의 시작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대본영을 광둥성과 장시성의 경계에 있는 난슝(南雄)으로 전진하였다. 이미 북쪽에서는 장쭤린이 우페이푸에게 참패하여 산하이관으로 패주한 뒤였지만 결의에 찬 쑨원을 가로막지는 못했다.
병력 3만명에 북벌군 총사령관은 리례쥔(李烈鈞). 장시성 난창 출신으로 일본육사 포병과를 졸업하였다. 산시 독군 옌시산과는 육사 동기이기도 하였다. 5월 21일, 북벌군은 3로로 나뉘어 장시성과 푸젠성을 침공하였다. 리례쥔이 중로군을, 쉬숭츠가 우익군을, 황따웨이(黃大偉)가 좌익군을 맡았다. 북벌은 순조로웠다. 원래 장시 독군은 즈리파의 원로인 친광위안(陳光遠)이었다. 하지만 가혹한 통치로 민란이 일어나자 하야를 선언한 후 톈진으로 달아났고 차이청쑨(蔡成勲)이 그 뒤를 이었다.
리례쥔의 중로군은 차이청쑨과 푸젠 독군 리후지의 장시-푸젠 연합군을 격파하고 북상하여 난캉(南康)을 점령한 후 이어서 충이(崇義)를 공략하였다. 또한 우익군과 좌익군이 협공하여 간저우(贛州)를 점령하였다. 북벌군의 기세는 파죽지세였다. 하지만 문제는 천중밍이었다. 그는 뜻밖에도 쑨원이 초강수로 맞서자 타협을 제시했지만 묵살되자 6월 13일 명령도 없이 천중밍이 멋대로 4천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광저우로 와서 교외에 병력을 주둔시키고 있었다. 이미 광저우 시내에는 천중밍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는 소문이 이미 파다하였다. 쑨원으로서는 그의 속셈을 알 수 없었기에 급히 광저우로 돌아와야 했다. 그리고 "군대를 즉각 광저우 30리 밖으로 철수하라"라고 명령하였지만 천중밍은 웃어넘겼다. 쑨원은 분개하였다. 하지만 천중밍은 일본 망명 시절부터 함께 했던 오랜 지기이다.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았다.
결국 선수를 친 쪽은 천중밍이었다. 6월 15일 심복인 예쥐(葉擧)와 훙자오린(洪兆麟)에게 쑨원의 총통부를 공격하라고 명령하였다. "쑨원의 목에 20만원의 현상금을 건다!" 16일 새벽 3시, 정적을 깨고 나팔소리와 요란한 총성이 광저우 시가지 전역으로 울려 퍼졌다. 쑨원은 막 잠이 든 참이었다. 호위병이 쑨원의 침실에 허둥지둥 들어왔다. "각하, 적의 습격입니다!" "무슨 소리인가?" "천중밍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쑨원은 그제야 아뿔사 탄성을 질렀다. 결국 이렇게 뒷통수를 칠 줄이야. 그동안 천중밍은 쑨원의 북벌 구상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도리어 강대한 북양군벌의 반격을 받아 그동안 쌓은 지반마저 잃을까 두려워 했다. 북벌을 통한 중국 통일보다 광둥성의 통치가 더 중요했던 그는 몰래 우페이푸와 손을 잡으면서 쑨원에게는 북벌에 매달리기보다 북양 군벌과 타협하여 자치권을 얻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쑨원은 천중밍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결국 북벌을 강행하였다. 천중밍은 쑨원에게 북벌에 참여하는 대가로 자신을 북벌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할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쑨원은 자신의 측근인 리쥐젠을 그 자리에 앉혔다. 격분한 천중밍은 결국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심하였다. 쑨원은 천중밍더러 군대를 광저우에서 철수시키라고 여러 차례 경고하였지만 설마 정말로 자신에게 칼을 들이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천중밍의 반란군은 광저우의 주요 도로와 관청을 신속하게 점령하였다. 그리고 광저우 외곽에 있는 쑨원의 총통부인 '월수루(越秀樓)'로 향했다. 이것이 중국 역사에 기록된 '6.16 사변'이다.
총통부를 향해 총알이 날라오고 당장이라도 반란군이 총통부를 포위할 상황이었다. 부하들이 쑨원에게 피할 것을 권유했다. "이런 판국에 이곳을 버리면 어떻게 되겠소? 나는 이곳에 남을 것이오." 쑨원은 완강히 거부하였다. 하지만 상황이 점점 위급해지자 부하들이 쑨원을 억지로 평복으로 갈아입힌 다음 중요 서류만 챙겨서 탈출하였다. 쑨원은 부인인 쑹칭링(宋慶齡)에게도 같이 가자고 말했다. 그녀는 만삭의 몸이었지만 자신이 함께 간다면 반드시 반란군에게 붙잡힐 것이라며 50여명의 경비병들과 함께 총통부에 남아 끝까지 싸우겠다고 하였다. "중국은 제가 없어도 되지만 당신은 꼭 있어야 합니다." 총통부를 나선 쑨원의 주변에는 오랜 측근이자 비서인 린즈미엔(林直勉)과 호위병 1명만이 따를 뿐이었다.
쑨원이 탈출한지 30분도 되지 않아 총통부의 사방에서 총알과 포탄이 빗발치듯 날라왔다. "쑨원을 죽여라!" 4천여명의 반란군을 향해 총통부의 경비병들도 필사적으로 응사했다. 하지만 총통부 건물은 불바다가 되었고 경비병의 대부분은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쑨원의 오른팔이자 광저우 정부의 재정부장인 랴오중카이도 붙잡혔다. 쑹칭링은 총통부가 함락되기 직전에 2명의 호위병과 함께 간신히 빠져나와 야산으로 탈출하였다. 그리고 광둥대학(현재의 쭝샨대학) 총장 쭝룽광(鍾榮光)의 집에 숨었다. 비록 목숨은 건졌지만 극도의 긴장감과 스트레스로 인해 그녀는 유산하였고 더 이상 아이를 낳지 못했다. 이 때 목숨을 걸고 그녀를 호위한 사람은 쉐웨(薛岳)이라는 젊은 장교로 십수년 뒤 일본과의 항쟁에서 "창사의 호랑이"라고 불리며 항일명장으로 명성을 떨치게 된다.
쑨원은 일단 총통부를 벗어나기는 했지만 여전히 호랑이 아가리에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시가지 전역이 반란군의 손에 있었고 숨을 곳이 없었다. 그 때 황푸 강변에 한척의 군함이 모습을 드러냈다. 포함 융펑함(永豊艦)이었다. 융펑함은 쑨원을 태운 다음 반란군이 장악한 광저우 시가지를 향해 함포를 돌려 맹렬하게 포격을 가했다. 뒤늦게 구출된 쑹칭링 역시 융펑함에 탑승하여 쑨원과 재회하였다. 훗날 쑹칭링은 이 날을 회고하면서 "마치 남편을 잃었다 다시 만난 기분이었다"라고 말하였다. 반란군에게 붙들렸던 랴오중카이도 몇번이나 살해의 위협을 받았으나 운좋게 탈출하여 합류하였다.
융펑함에서 한숨을 돌린 쑨원은 천중밍 토벌을 선언하고 해군총장 원수더(温樹德)에게 호법함대 휘하의 모든 군함을 황푸강으로 집결시키라고 명령하였다. 또한 북벌군에게 전문을 보내어 즉시 군대를 돌려서 천중밍을 진압하라고 명령했다. 고향에서 은거하고 있던 장제스도 급전을 받고 부랴부랴 광저우로 내려왔다. 그는 사건 이틀 후인 6월 18일 융펑함에서 쑨원과 재회하였다.
쑨원은 장제스의 충고를 듣지 않은 것을 크게 후회하면서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 "자네를 보니 2만명의 원군을 얻은 것보다 기쁘다." 장제스도 감격하여 목숨을 다하여 쑨원을 지키겠다고 맹세하였다. 융펑함과 융샹(永翔), 추이(楚豫), 이장(豫章), 광캉(廣康) 등 7척의 포함이 황푸강변에서 일제히 불을 뿜어 천중밍의 사령부와 반란군 진지를 박살내었다. 반란군의 수중에 들어간 해안포들도 포문을 열었다. 한동안 치열한 포격전이 벌어졌다. 하지만 정작 광저우의 경비를 맡은 위수 사령관 웨이방핑(魏邦平)이 애매한 태도를 보인 채 군대 동원을 주저하자 호법함대는 일단 중립지대인 영국 조계 쪽으로 물러나야 했다.
상황은 매우 불리하였다. 웨이방핑은 물론이고 해군을 총지휘하는 원수더까지 천중밍에게 매수되어 쑨원에게 등을 돌렸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이전부터 쑨원이 무능하다며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들은 천중밍을 진입하라는 쑨원의 명령을 무시하고 도리어 6월 21일 쑨원에게 전문을 보내어 하야를 강요하였다. 7월 8일에는 원수더가 직접 지휘하는 순양함 하이치(海圻)와 하이천(海琛), 차오화(肇和) 등 3척의 순양함이 쑨원의 함대를 공격하였다. 4,500톤급의 영국제 방호 순양함인 하이치는 203mm 주포 2문과 120mm 속사포 10문, 47mm 기관포 16문 등으로 중무장한 중국 최강의 군함이었다. 고작 수백톤에 불과한 쑨원측의 소형 포함들 따위는 상대가 될 리 없었다. 융펑함 등은 간신히 포위망을 뚫고 황푸강 하류의 바이어탄(白鹅潭)으로 물러났지만 내분에 빠진 광저우 군정부는 공중분해 상태나 다름없었다. 또한 광저우가 반란군의 손에 들어갔기에 식량과 물도 보충할 수 없어 수병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육지에서는 리례쥔과 쉬충즈가 이끄는 북벌군이 천중밍의 손에 넘어간 샤오콴을 탈환하려고 7월말부터 8월초까지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탄약 부족으로 결국 난슝으로 물러나야 했다. 북벌은 커녕 도리어 천중밍과 차이청쑨, 리후지의 연합군에게 협공을 당하여 전멸당할 판이었다. 그동안 융풍함의 갑판 위에서 온갖 어려움을 참고 견디며 광저우 탈환의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쑨원도 결국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장제스와 여러 함장들을 불러모아서 자신은 상하이로 가서 후일을 기약하겠다고 하였다. 8월 9일 쑨원 부부는 영국 포함을 타고 상하이로 향했다. 그를 따르는 사람은 장제스, 왕징웨이, 광둥성 강방함대 사령관 천처(陳策) 등 소수의 측근들 뿐이었다.
쑨원이 상하이로 떠난 뒤 융펑함을 비롯하여 남은 함대는 천중밍에게 투항하였다. 쑨원을 축출한 공으로 우페이푸는 천중밍에게 광둥성의 지배를 인정하였다. 또한 원수더는 하이치와 하이천, 차오화 등 자신을 따르는 해군을 이끌고 북상하여 산둥성 칭다오에 입항한 후 우페이푸에게 투항하였다. 우페이푸는 이들을 재편하여 발해 함대(渤海舰队)를 창설하고 원수더를 함대 사령관에 임명하였다. 발해 함대는 순양함 3척과 포함 6척, 구축함 4척, 수송함 1척 등 막강한 위용을 자랑하였다. 우페이푸에게는 중앙 해군 이외에도 발해 함대까지 손에 넣으면서 중국 해군의 거의 전부를 손아귀에 넣었다. 융풍함 등 몇척의 포함 만이 광저우에 남았다. 1917년 7월 쑨원과 함께 혁명을 일으켜 새로운 시대를 열겠다는 꿈을 꾸면서 광저우로 내려왔던 호법함대는 이로서 완전히 해체되었다. 혁명의 길은 멀고도 험하였다.
쑨원은 또 한번의 참담한 실패를 경험하였다.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은 군벌을 타도하겠다면서도 군벌에게 기대어 남의 힘을 빌리려고 했던 바로 쑨원 자신에게 있었다. 그는 비로소 자신이 직접 지휘할 수 있는 군대가 필요하다고 절실히 깨달았다. 그 군대는 이익에만 눈이 먼 군벌 군대가 아닌, 진정으로 중국을 위하는 혁명사상으로 무장한 혈기 넘치는 젊은이들로 구성되어야 했다. 한편, 장장 55일에 걸쳐 융펑함에서 쑨원과 생사고락을 같이 하였던 장제스는 이 사건을 통하여 쑨원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는데 성공하였다. 혁명 진영의 유력한 간부이자 쑨원의 후계자 중의 한 사람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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