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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 전쟁과 인물, 사건으로 보는 중국 현대사 > 26화 - 국공합작/blog.naver.com/atena

* 쑨원, 소련과 손을 잡다

1922년 8월, 소련 특사 아돌프 요페(Adolph Joffe)가 중국을 방문하였다. 10월 혁명에 성공한 후 자신들의 혁명을 중국에 전파할 목적으로 합작할 상대를 찾기 위함이었다.

제정 러시아가 붕괴된 뒤 공산주의라는 이름 아래 수많은 피와 시체 위에 세워진 소련은 이중적이기 짝이 없었다. 러시아 혁명과 구미 열강들의 간섭 전쟁으로 위기에 처해 있었던 1919년만 해도 소련은 과거 제정 러시아 시절의 모든 침략전쟁을 부정하고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을 외쳤다. 1919년 3월 2일에는 모스크바에서 40여개국의 공산주의자들이 모여서 코민테른을 창설하였다. 코민테른의 목적은 전 세계에 공산주의 혁명을 "수출"하여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민족 자결의 원칙에 따라 약소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한 투쟁을 벌임에 있었다. 이는 당시 우리와 중국을 비롯한 많은 약소 민족들의 지지를 받았다.

또한 1921년 4월에는 모스크바에 "소련 동방노동자 공산대학(줄여서 동방대학)"을 설립하고 세계 각지의 젊은 혁명가들을 불러 모았다. 동방대학의 역할은 오직 공산주의 혁명의 전파에 앞장설 혁명 전사들을 양성하는데 있었다. 조봉암 선생을 비롯해 당시 항일 독립운동을 하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입학하였고 덩샤오핑, 장징궈도 이곳에서 한 교실에서 함께 공부하기도 했다. 이 때의 추억은 수십여년 뒤 각각 중국과 타이완의 지도자가 되는 두 사람이 장제스-마오 시절의 적대 관계를 하루 아침에 청산하고 양안의 화해 무드로 나아가게 되는데 많은 영향을 주게 된다.

1920년 7월 19일 모스크바 겨울 궁전 광장에서 개최된 제2차 코민테른 대회. 뒷편에는 태극기도 보인다. 소련의 공산 혁명은 反 제국주의 운동으로 미화 포장되면서 우리를 비롯하여 제국주의 열강들의 지배를 받던 많은 약소국들의 지지를 받았다.

소련의 반 제국주의 선언 중 하나가 1919년 7월 25일 이른바 외무위원장(외무장관) 레브 카라한(Lev M. Karakhan)의 이름을 딴 이른바 '카라한 선언'이다. 주요 내용은 그동안 제정 러시아가 중국에서 차지하고 있던 모든 권리와 의화단의 난 배상금, 러시아 조계, 각종 불평등 조약을 아무런 조건 없이 포기한다는 것이었다. 카라하 선언은 아편전쟁 이래 열강들에게 침탈당하고 있던 중국 민중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그동안 중국인들은 의화단의 난 이래 중국에 대한 침략에 앞장섰던 제정 러시아에 대하여 증오심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카라하 선언으로 해묵은 감정은 하루 아침에 사라졌다. 신생 소련은 제정 러시아와는 전혀 다르며 제국주의 열강들과도 다른 약소 민족의 편이라고 여긴 것이다.

1918년 11월 베이징 대학 교수였던 리다자오(李大釗)는 러시아 10월 혁명을 연구하고 대학 학회지였던 <신청년(新青年)>에서 "볼세비즘의 승리"라는 글을 발표하였다. 그는 "앞으로의 세계는 붉은 깃발의 세계가 될 것이 틀림없다"라고 단언하였다. 중국 최초의 마르크스-레닌주의자인 리다자오의 글은 중국 사회의 뿌리깊은 反 제국주의, 민족주의 분위기 속에서 많은 지지를 받았고 대학가를 중심으로 공산주의 사상이 마치 유행처럼 빠르게 확산되어 나갔다. 공산주의 사상은 지식인 계층뿐만 아니라 대중과 노동자, 군대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으로 전파되었다. 그들에게 공산주의는 곧 反 제국주의, 민족주의였다.

그 중에는 당시 베이징 대학교 도서관 사서로 일하고 있었던 마오쩌둥도 있었다. 고향에서 기초적인 수준의 신식 교육을 받았을 뿐인 그는 리자다오가 번역한 "공산당 선언"을 읽고 처음으로 공산주의에 눈을 뜨게 되었고 한동안 그의 보조 노릇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고향인 후난성으로 내려가 1920년 11월 창사에서 공산당 小조직을 결성하였다. 1921년 7월 20일 중국 공산당 창당대회가 열리자 후난성 대표로 참석하는 등 공산주의자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베이징 정부 역시 카라한 선언에 고무되어 열강들을 상대로 외교 협상에 나서 조계 반환과 관세 자주권의 회복을 요구하는 등 소련의 카라한 선언은 중국 사회에 큰 파장을 남겼다. 하지만 내전과 간섭전쟁에서 승리하자 소련의 태도는 180도 달라졌다. 1년 뒤인 1920년 9월 27일 제2차 카라한 선언에서 소련 정부는 어디까지나 중-소간의 국교 정상화가 목적이지 자신들은 결코 중국에 대한 권익을 포기한다고 한 적이 없다면서 말을 완전히 뒤집은 것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이율배반적인 것으로, 소련 정부는 제정 러시아 시절의 모든 해외 채무 관계를 부정하고 열강들의 이권을 전부 몰수했으면서 막상 중국에 대하여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첨예한 논쟁은 외몽골의 독립과 북만주의 중둥 철도 소유권 문제였다. 적백내전 말기 "백군의 미친 남작(Mad Baron)"이라고 불리며 외몽골을 점령한 채 온갖 악명을 떨치던 로만 폰 운게른 슈테른베르크(Roman von Ungern-Sternberg)는 소련의 지원을 받는 인민의용군의 반격에 직면하였다. 소련군 1,600명을 포함해 공격군은 약 1만명에 달했고 대포 12문과 기관총 156정으로 무장했다. 또한 약간의 장갑차와 항공기도 지원받았다. 운게른의 오합지졸 군대는 약 4천여명에 불과했고 대포 10문을 가졌지만 결국 1921년 6월부터 7월 초까지 니스렐 후레 북쪽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연전연패하였다. 7월 6일 니스렐 후레는 해방되었다. 그리고 승리를 기념하여 울란바토르(몽골어로 "붉은 영웅")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운게른은 도망쳤지만 결국 포로가 되었고 9월 15일 시베리아로 끌려가 군사재판을 받은 후 총살당했다.

1921년 7월 9일 복드 황제는 다시 군주로 추대되었다. 또한 사회주의 입헌 군주제라는 독특한 형태의 몽골 인민정부가 수립되었다. 복드 황제는 약 1년에 걸쳐 외몽골 여기저기에서 할거하고 있던 백군 잔당들을 토벌하여 이들을 모두 소탕하는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자력이 아닌 소련의 원조에 의존해야 했기에 외몽골은 자주국이 되지 못한 채 단지 상전이 중국에서 소련으로 바뀐 것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소련의 간섭이 점점 심화되면서 민족주의 계열의 혁명가들은 처형되거나 쫓겨났고 코민테른 출신의 친소파들이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1924년 5월 20일 몽골의 정신적 지주였던 복드 황제가 승하하자 몽골 인민정부는 새로운 황제를 세우는 대신 군주제를 폐지하고 완전한 사회주의 국가를 만들기로 하였다. 소련의 괴뢰 국가로 완전히 전락한 것이다.

중둥 철도(中東鐵道)는 제정 러시아 시절 청-러 밀약에 의해 건설된 철도로 만주어리와 하얼빈을 지나 쑤이펀허(綏芬河)를 거쳐 시베리아 횡단 철도와 연결된다. 그 중에서 장춘과 펑텐, 다롄을 연결하는 남만주 철도는 러일전쟁에 패배한 뒤 일본에게 배상금 명목으로 넘겨졌고 "남만주철도"라고 불리게 된다. 러시아 혁명과 적백내전으로 북만주에서 소련의 영향력이 축소되자 동북의 실력자 장쭤린은 카라하 선언을 명목으로 중둥 철도의 이권을 점진적으로 회수해 나갔다.

하지만 적백내전이 끝나자 소련은 당장 태도를 바꾸었고 중동 철도의 소유권은 제정 러시아를 계승한 자신들에게 있다고 주장하였다. 양측은 한동안 첨예한 대립을 하다가 적당히 타협하여 1924년 5월 31일 베이징에서 "중소 협정"이 체결되었다. 하지만 소련은 블라디보스톡 방위에 반드시 필요한 중둥 철도를 끝까지 포기하려 들지 않았다. 장쉐량 역시 주권 회복 차원에서 중둥 철도를 되찾으려고 했기에 1929년 8월부터 10월까지 "펑-소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결국 
소련이 말하는 反 제국주의 운동이나 민족자결의 원칙이란 국제 사회에서 고립된 상황에서 구미 열강을 비난하고 볼세비키 혁명을 전 세계에 전파하여 고립을 탈피하기 위한 일종의 방편이자 수단일 뿐이었다. 소련 역시 본질적으로는 제국주의 국가였으며 대외정책 또한 철저하게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약소국의 이익을 짓밟는 식이었다. 요페가 중국에 온 이유도 중국 혁명을 후원하는 척 하면서 친소 볼세비키 정권을 세울 기회를 엿보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그가 가장 먼저 찾은 사람은 쑨원이 아니라 베이징 정부의 실권자 우페이푸였다는 점이다.

우페이푸는 여러 군벌들 중에서도 중국 최강의 실력자였다. 또한 대표적인 민족주의자로서 친일 매국 군벌인 돤치루이, 장쭤린을 격파하여 "애국장군"이라고 불리며 국민적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일본은 소련의 최대의 적이다. 바꾸어 일본의 적은 소련의 친구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 논리에 따라 소련 외교부와 코민테른 극동지부를 중심으로 지도부는 "중국에서 反 제국주의 운동을 위해 연합해야 할 상대는 쑨원이 아니라 우페이푸다"라고 여기고 있었다. 요페도 우페이푸라면 말이 잘 통하리라 여겼다.

뤄양에서 우페이푸를 만난 그는 "당신은 심모원려한 철학자이자 지혜로운 정치가이며 뛰어난 군사전략가입니다."라면서 펑즈전쟁의 승리를 축하하고 그런 완벽한 승리는 여지껏 보지 못했다면서 추켜 세웠다. 그리고 소련은 중국의 혁명을 지원할 의사가 있으며 양국이 적극적으로 협력할 것을 제안하였다. 하지만 우페이푸는 소련과 손을 잡을 생각도 없고 중국을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 생각도 없었다. 그는 강경하게 양국이 국교를 정상화하려면 소련이 먼저 중둥 철도를 중국에 반환할 것과 외몽골에서 군대를 철수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요페는 우페이푸의 설득을 포기하였다.

소련이 합작 대상으로 고려한 또 한 사람은 광둥성의 천중밍이었다. 당시 천중밍의 세력은 쑨원보다 훨씬 강력하고 탄탄하였다. 그는 스스로 자신을 "급진적 사회주의자"라고 일컬으며 러시아 혁명 직후에는 모스크바에 "10월 혁명"을 축하하는 축전을 보내기도 하였다. 또한 공산당 지도자인 천두슈를 초빙하여 교육 부장으로 임명하고 많은 공산당원들을 기용하는 등 군벌 중에서는 보기 드물게 공산당에 우호적이었다. 따라서 레닌도 천중밍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1920년 4월 특사를 파견하여 합작을 의논하기도 했다. 소련의 천중밍에 대한 평가는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혁명 장군이며 역량이 뛰어나고 군중의 큰 지지를 받고 있다"라며 매우 긍정적이었다. 그러나 천중밍이 쑨원의 북벌 전쟁을 강력하게 반대하고 북양 군벌과 손을 잡아 "6.16사변"을 일으키자 중공과의 관계 역시 하루 아침에 악화되고 말았다. 소련은 천중밍 역시 본질적으로 다른 군벌들과 다를 바 없다고 합작을 포기하였다.

요페가 다음으로 눈을 돌린 상대는 천중밍에게 쫓겨나 상하이에 체류 중이던 쑨원이었다. 쑨원은 명망만 있을 뿐 무력도 실력도 없고 발을 붙일 수 있는 한뼘의 땅조차 없는 실정이었다. 소수의 추종자들은 대부분 그의 주변에서 무위도식하면서 쓸모없는 논쟁만 벌이며 시간을 낭비하는 무능한 자들이었다. 쑨원의 장래가 밝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게다가 쑨원은 공산주의에 대해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1921년 6월에 네덜란드의 공산주의자이자 코민테른 극동지부장인 마링(Hendricus Maring)이 쑨원을 방문하여 소련과의 합작을 제안했을 때에도 소련의 원조는 원하되 "나는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지 않는다"라고 솔직하게 대답하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우페이푸와 천중밍을 제쳐놓고 쑨원에게 차례가 온 것은 어쩌면 기적일지 모른다. 만약 이들이 좀 더 소련에 타협적이었다면 이후의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어쨌든 소련이 최종적으로 선택한 사람은 쑨원이었고 이것이 역사를 결정하였다.

쑨원은 소련과 합작하면서 공산주의에 대하여 점차 긍정적으로 태도를 바꾸게 된다. 하지만 정말로 공산주의자로 전향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금과 무기의 지원이 절실했기 때문이었다. 이전에 쑨원은 미국과 영국에 대해서도 혁명 전쟁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시큰둥한 반응만 돌아왔다. 중국의 정통 정권은 베이징 정부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또한 反 제국주의, 중국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쑨원을 지지할 이유가 없었다. 따라서 근거지인 광저우에서도 쫓겨난 채 사면초가였던 그로서는 초조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와중에 1923년 1월 22일 요폐가 방문하자 천군만마를 만난 것과 같은 기분이었다.

쑨원은 요페를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공산주의는 중국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중국에서 소비에트 혁명은 현실적이지 못합니다. 다만 우리에게 가장 긴급한 문제는 중국의 통일과 완전한 독립을 획득하는 것이며 소련 인민들이 열성적으로 지지해 주기를 바랍니다." 물론 요페도 쑨원더러 당장 공산주의자가 되라고 억지로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자칫 서두르다가 일을 모두 망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내일의 이보 전진을 위해 오늘은 일보 후퇴할 수 있는 유연성이 바로 소련식 혁명 방식이었다. 그는 쑨원의 요구를 수락하였다. 그리고 어중이 떠중이 정객들의 작은 모임에 불과한 국민당을 소련식으로 체계적으로 개조할 것과 혁명전쟁을 위한 무장 세력의 양성, 그리고 국민당과 공산당의 연합을 제안하였다.

가장 첨예하고 민감한 외몽골과 중둥 철도 문제에 대해서도 쑨원은 우페이푸와 달리 타협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또한 외몽골에 대한 중국의 주권을 존중한다는 전제 아래 외몽골과 북만주에서 소련군의 주둔에 동의하였다. 자신은 소련의 성의를 믿는다고 말하면서 오히려 지금 상황에서는 대안 없이 외몽골과 중둥 철도에서 소련군이 갑자기 철수할 경우 그 공백을 일본이 차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현상 유지가 중국의 이익에도 부합한다고 하였다.

물론 쑨원으로서는 중국의 주권을 소련에게 양보한다기보다는 소련의 지원이 절실한 입장에서 칼자루를 쥐고 있는 요폐와 부딪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유가 어떻든 외몽골에 대한 소련의 지위와 군대의 주둔을 인정한 셈이다. 이것은 바로 소련이 바라는 대답이었고 요폐는 모스크바에 급전을 보내어 "쑨원이 걸려들었다"라고 보고하였다. 반면, 우페이푸는 1922년 11월 20일에도 요폐에게 서신을 보내어 더욱 강경하게 소련은 외몽골과 중둥 철도에서 물러나라고 거듭 경고하였다. 결국 소련 지도부는 우페이푸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쑨원의 북벌 전쟁을 후원하기로 결정하였다.

훗날 쑨원을 대신하여 장제스가 북벌에 성공한 뒤에도 외몽골과 중둥 철도의 반환 문제는 여전히 중-소 양국의 첨예한 갈등이 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장쉐량이 중둥 철도를 강제로 회수하려다 소련군의 침입으로 "펑-소전쟁"이 발발하였고 동북군은 파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또한 이 과정에서 보여준 동북군의 취약성은 관동군이 만주사변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장제스 정권은 외몽골과 중둥 철도에 대한 회수를 포기하지 않았다. 1931년 5월 12일 중화민국 임시약법 제1조에는 "중화민국의 영토에는 몽골과 티베트를 포함한다"라고 명시하였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외몽골 문제를 해결하려면 외몽골의 실질적인 지배자인 소련과 교섭해야 하는데 그럴 겨를이 없었다. 1931년 9월 16일 만주사변이 폭발하면서 동북 3성의 주권이 일본에게 넘어간 것이다. 또한 괴뢰 만주국이 건국되자 소련은 이전의 강경한 태도를 버리고 일본과 타협하여 1935년 3월 중둥 철도를 만주국에 1억 4천만엔에 판매하고 북만주에서 완전히 손을 떼었다. 극동의 안정과 일본과의 마찰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중일전쟁의 발발로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되자 국제 사회에서 고립된 신세였던 중국은 소련의 원조에 의존해야 했고 자연스레 외몽골에 대한 거론은 뒤로 밀려났다.

중일전쟁에서 일본이 패망한 뒤 중둥 철도는 중국에 회수되었으나 외몽골은 소련군에게 점령된 채 소비에트 위성국으로 전락하였다. 1945년 8월 14일 중-소 우호 조약의 체결로 장제스 정권은 외몽골에 대한 주권을 포기한다고 선언하였다. 1945년 10월 20일 외몽골 전역에서 독립에 대한 국민 투표가 실시되었고 전국 4251개 투표소에서 18세 이상 남녀 유권자 49만5200명 중 98.4%가 참여하여 100% 찬성하였다. 중국 정부는 1946년 1월 5일 독립을 승인하고 2월 5일에는 국교를 정식으로 수립하였다.

​​* 쑨원-요페 공동선언

1922년 12월에 오면서 광둥성의 정세는 점차 쑨원에게 유리해졌다. 한때 샤오콴에서 천중밍에게 패배하여 궁지에 내몰렸던 리례쥔과 쉬충즈는 상대의 허를 찔렀다. 10월 2일 북벌군의 진로를 북쪽으로 바꾸어 푸젠성을 침공한 것이다. 이들은 푸젠 진수사 왕용첸(王永泉) 등 푸젠성의 反 즈리파 군벌들과 손을 잡고 푸젠 독군 리후지를 공격하였다. 또한 주바이더(朱培德)가 지휘하는 또 다른 부대는 후난성을 거쳐 광시성 북쪽에 물러난 뒤 광시파 세력과 연합하여 천중밍을 협공할 태세를 갖추었다.

리후지는 탐욕스럽기만 할 뿐 무능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연전연패한데다 그 동안의 악정(惡政)으로 푸젠성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10월 17일 쉬충즈의 부대가 푸젠성의 성도 푸저우를 점령하였다. 리후지는 샤먼으로 후퇴한 후 천중밍과 장시 독군 차이청쑨에게 급히 지원을 요청했지만 굳이 전심전력으로 도울 이유가 없는 두 사람은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물론 즈리파의 실질적인 영수인 우페이푸는 리후지의 위기를 방관할 수 없는 처지였다. 하이용, 잉루이(應瑞), 퉁지(通劑) 등 방호 순양함 3척과 포함 추관(楚觀), 해군 육전대 제1개 혼성여단 2천여명을 급파하였다. 하지만 그 사이 리후지는 푸젠군 제2사단의 반란으로 샤먼에서도 쫓겨나서 난징으로 도망쳤다. 북벌군은 푸젠성의 대부분을 장악하였고 남쪽으로는 천중밍을 격파하고 샤오콴과 우저우(梧州)를 탈환하는 등 전세를 역전시켰다. 쑨원은 린썬을 푸젠성장으로 임명하였다. 또한 광시성에서는 예전에 루롱팅의 부하였다가 우페이푸에게 귀순한 바 있었던 선홍잉(沈鴻英)이 쑨원과 화해하고 구 광시파 군벌들을 규합하여 천중밍을 협공하였다.

약 6만 5천명으로 늘어난 북벌군은 광시성과 푸젠성, 장시성 등 삼방향에서 광저우로 진격하였다. 1923년 1월 12일, 전황이 불리하다고 판단한 천중밍은 광저우를 버리고 자신의 근거지인 후이저우(惠州)로 퇴각하였다. 4일 뒤, 광저우는 다시 쑨원의 손에 들어왔다. 또한 융펑과 페이잉(飛鷹), 퉁안(同安), 푸안(福安) 등 4척의 포함을 포함하여 광둥 해군 산하의 군함들 또한 귀순하였다. 과거 쑨원이 조직했던 호법 함대의 대부분은 광저우 군정부 해군 총장 원수더와 함께 이탈하여 우페이푸 쪽으로 넘어갔지만 여기에 가담하지 않은 일부 군함은 그대로 남아서 쑨원의 편에 서기로 한 것이다. 쑨원은 함대를 재조직하고 호법 함대 참모장이었던 차오티군(趙梯昆)을 함대 임시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배수량 850톤급의 3등 구축함 페이잉(飛鷹). 해군력 강화를 위하여 청일전쟁 직전 독일에 주문했으나 청일전쟁 이후인 1895년에야 중국에 인도되었다. 최고 속력 22노트에 승무원 145명, 4인치 주포 2문과 47mm 부포 6문, 어뢰 발사관 3문 등으로 무장하였다. 호법전쟁과 북벌전쟁 등에 참여했다. 1932년 장제스와 광둥 군벌들이 대립하면서 양광사변이 일어나자 7월 6일 광둥 해군의 사령관 천처(陳策)는 장제스의 편에 서기로 하고 휘하 함대에게 하이난다오로 물러나라고 지시하였다. 다음날 해상에서 항해 중 천지탕 휘하의 광둥 공군의 폭격을 받았고 페이잉은 150kg 짜리 폭탄 1발을 직격받아 격침당하였다. 중국 공군 역사상 항공 공격으로 침몰시킨 첫번째 군함이 같은 중국 군함이었다는 것이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겠다.

1월 26일에는 상하이에서 "쑨원-요페 공동선언"이 발표되었다. 쑨원은 더 이상 예전처럼 비밀 결사나 군벌의 힘을 빌리는 식의 혁명이 아닌, 중국 민중이 주도하는 혁명으로 노선을 바꾸기로 하였다. 여기에는 소련과의 연합과 공산당과의 합작이 전제되었다. 국민당 내부에는 여전히 소련과의 합작을 반대한 이들도 많이 있었다. 특히 보수파는 소련과 손을 잡으면 영, 미와의 관계가 악화될 것이며 국내의 자본가들 역시 등을 돌릴지 모른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쑨원은 단호하게 말하였다. "어차피 그들은 우리의 혁명을 지지하지 않는다. 우리를 지지하는 세력은 오직 소련 뿐이다"

2월 21일 쑨원은 상하이를 떠나 광저우로 복귀하였다. 6.16 사변으로 야반도주하듯 탈출한 지 8개월 만이었다. 그는 다시 대원수가 되어서 그동안 와해되었던 광저우 군정부의 재건에 나섰다. 그런데 4월 16일에는 선홍잉이 반란을 일으켜 광저우를 공격하는 일이 일어났다. 예전에 양광왕 루롱팅의 부하였던 그는 루롱팅이 쑨원에게 패배하여 몰락하자 우페이푸에게 귀순하여 제17사단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천중밍이 우페이푸와 손을 잡고 쑨원을 쫓아내는 등 북벌군이 분열된 것을 기회로 삼아 1922년 11월 광시성을 공격하여 구이린, 류저우, 우저우 등을 차례로 점령하였다. 또한 쑨원의 세력이 우세해지고 천중밍이 열세에 내몰리자 선홍잉은 쑨원과 화해하고 힘을 모아서 천중밍을 격파하고 광저우를 탈환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쑨원과 천중밍의 싸움을 이용하여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려는 술책일 뿐이었다.

선홍잉은 비밀리에 군대를 동원하여 쑨원을 기습했으나 윈난군 총사령관 양시민(楊希閔)과 광시성 제2로 총사령관 리우전환(劉震寰)의 발빠른 대응으로 단숨에 격파되고 말았다. 선홍잉은 잔존 병력을 이끌고 구이린으로 퇴각하였다. 쑨원의 위기는 지나갔고 오랫동안 주변 군벌들의 위협에 시달렸던 그의 정권은 비로소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광동성 동부에는 천중밍이 건재하였고 광시성에는 한때 쫓겨났던 루롱팅이 복귀하여 다시 세력을 규합하면서 광시파 군벌들끼리 치열한 항쟁을 벌이는 등 여전히 갈 길은 멀고도 험난하였다. 광저우 역시 상인 연합회인 상단과 범죄 조직들이 장악하고 있었고 쑨원의 영향력은 미미하기 짝이 없었다.  

* 국공, 합작하다

소련에서는 병석에 있던 레닌을 대신하여 스탈린(Joseph Stalin)이 새로운 소비에트 공산당 서기장의 자리에 올랐다. 45살의 한창 나이였던 스탈린은 레닌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강력한 경쟁자인 트로츠키와 치열한 권력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스탈린은 대중 노선을 놓고 국공합작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한 반면, 트로츠키는 국민당은 유산계급의 정당이므로 공산당과는 본질적으로 달라서 합작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코멘테른이 손을 들어준 쪽은 스탈린이었다. 스탈린은 중국의 적화를 자신의 정치적 업적으로 삼아서 트로츠키에 대한 우위에 설 속셈으로 쑨원에 대하여 아낌없이 후원을 하였다. 200만 루블에 달하는 군자금을 비롯해 많은 무기가 블라디보스톡에서 광저우로 수송되기 시작하였다. 참고로, 소련이 중공에게 제공하는 지원금은 연간 1만2천 루블에 불과했다.

또한
쑨원은 소련과의 관계를 긴밀하게 할 목적으로 대표단을 조직하여 모스크바에 파견하였다. 단장은 6.16사변 이후 혁명파의 주요 인물로 급부상하고 있었던 장제스였다. 장제스는 쑨원의 국공 합작과 연소 용공에는 회의적이었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중요한 기회를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쑨원에게 편지를 썼다. "모스크바로 가고 싶습니다. 만약 허락하지 않는다면 저는 광저우를 떠나겠습니다." 스스로도 인정했듯, 괴팍한데다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이 사나이는 어쨌거나 이미 쑨원의 마음을 확실하게 사로잡고 있었다는 점이다. 쑨원은 별 말 없이 수락하였다. 

쑨원과 장제스. 쑨원은 위대한 사상가이자 혁명파의 정신적 구심점이기는 했으나 정치가로서의 리더쉽이 부족한데다 북양 군벌과의 투쟁 과정에서 쑹자오런, 황싱, 천치메이 등 자신을 대신하여 혁명의 선봉에 설 수 있는 행동파 간부들을 차례로 잃고 사실상 고립된 신세였다. 그는 이들을 대신하는 자신의 새로운 수족으로 장제스를 주목하였다.

1923년 8월 16일, 장제스가 이끄는 이른바 "쑨이센 박사 대표단(孫逸仙博士代表團)"은 광저우를 출발하였고 약 보름 뒤인 9월 2일 모스크바에 도착하였다. 장제스는 병중에 있던 레닌은 끝까지 만날 수 없었다. 병세가 이미 너무 깊은데다 의식도 불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결국 다음해 1월 21일에 죽었다. 대신 소련 지도부 2인자였던 트로츠키를 만날 수 있었고 중국 혁명을 위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긍정적인 답변을 받아낼 수 있었다.

장제스의 대표단은 약 3개월간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를 체류하면서 소련의 당과 군, 행정 기구의 조직을 보고 운영 방식을 배웠으며 주요 공장과 소비에트 회의, 사관학교를 견학하였다. 그리고 11월 29일 모스크바를 출발하여 12월 25일에 상해로 돌아왔다. 이 여행은 장제스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경험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반공주의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고 오히려 더욱 경계심을 품게 되었다. 그는 모스크바 방문 중 공산당 입당을 권유받기도 했지만 거절하였다.

또한 귀국 후 쑨원에게 제출하는 보고서에 "소련의 정치제도는 전제와 공포에 있습니다. 이는 삼민주의와 근본적으로 같지 않습니다."라며 자신은 여전히 소련과의 합작을 반대한다고 적었다. 결국 그는 뒷날 국공합작을 파기하였고 공산당과 숙명의 싸움을 벌이게 된다. 하지만 이 때 만약 장제스가 열렬한 공산주의자가 변신했다면 중국의 역사는 어떻게 흘러갔을지 상상해 보는 것도 재미있지 않을까.

1923년 10월 9일 소련 코민테른에서 공산주의 혁명가 미하일 보로딘(Mikhail Markovich Borodin)이 스탈린의 대리인 겸 쑨원의 정치 고문으로 파견되어 광저우에 왔다. 라트비아 출신의 유태인인 그는 러일전쟁 직후 일어난 제1차 러시아 혁명에 참가했다가 실패하자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1917년 제정 러시아가 무너지고 소련이 건국된 뒤 귀국한 그는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아 유럽을 떠돌며 사회주의 혁명 전파에 나섰다. 비록 대부분 실패로 끝났지만 그 과정에서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배웠다. 바로 사회주의 혁명은 마르크스가 제창한 것과 달리 부유한 자본주의 국가보다 오히려 가난한 빈농의 국가에서 더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에게 새로운 실험대는 중국이었다. 보로딘은 쑨원에게 소련식 혁명 방법과 대중의 동원, 선전 활동의 중요성을 설명하였다. 그의 말은 쑨원의 환심을 사는데 성공하였다.

보로딘과 요페, 마링 등의 주도로 국민당과 공산당의 합작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그 전까지 쑨원은 공산당과의 연합전선을 고민해본 적이 없었다. 국민당과 공산당은 서로 어떤 유사성도 없었고 추구하는 목적과 방식도 전혀 달랐다. 국민당은 둘로 나뉘었고 그 중에는 국공합작에 찬성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당원들은 "유산 계급"이었기에 무산계급의 투쟁을 외치는 공산주의에 대하여 우호적일 리 없었다. 게다가 현실적으로 국민당만큼이나 공산당도 세력이 미미하기 짝이 없어서 서로 손을 잡는다고 해서 그다지 큰 힘이 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려운 형편이었다.

쑨원은 공산주의 이념에 대하여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소련이 단 한번의 혁명으로 제정 러시아를 무너뜨렸으며 여전히 내전에 빠져 있는 중국과 달리 빠르게 안정을 찾았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였다. 또한 소련의 지원이 절실했던 그로서는 보로딘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처지인데다, 젊고 의욕 넘치는 공산당원들이 입당한다면 느슨하고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국민당에 새로운 활력이 되리라고 기대하였다.

국공합작에 회의적이기는 공산당도 마찬가지였다. 천두슈, 장궈타오를 비롯한 대부분의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쑨원이 친일 매국 군벌인 장쭤린, 돤치루이와 손을 잡은 적이 있다는 점에서 "말만 反제국주의, 反군벌일뿐 실제로 하는 행동은 군벌과 뭐가 다른가"라면서 비판하면서 합작에 반대하였다. 하지만 그들도 회유를 반복하는 보로딘과 마링의 압박 앞에 결국 굴복할 수 밖에 없었다. 저우언라이 등 일부 간부들은 국민당의 노선에는 반대하지만 국공합작은 공산당의 세력을 확대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면서 적극적으로 찬성하였다. 어차피 중공은 당시만 해도 생겨난지 얼마 되지 않아 세력이 미미한데다 소련 코민테른에 종속된 하부 조직에 불과했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또한 1923년 2월 7일 징한 철도에서 중공이 주도한 철도 노동자 총파업이 우페이푸에 의해 가차없이 진압당하자 자신들의 역량이 얼마나 초라한지를 절감하였다. 1923년 6월 개최된 제3차 공산당 전국 대회에서 "국민당은 중국 혁명의 중심 세력이며 우리는 국민당 아래에 결집하여야 한다"라고 선언하여 국공합작에 동의하기로 결정하였다. 공산당원들은 개인자격으로 국민당에 차례로 입당하였다.

1924년 1월 20일 광저우 원밍루(文明路)에 있는 광저우 고등사범학교(廣東高等師範學校) 강당에서 제1차 국민당 전국 대표 대회가 개최되었다. 주석에는 쑨원이, 후한민과 왕징웨이, 린썬, 세츠(謝持) 4명의 국민당 간부와 공산당 지도자인 리다자오 등 5명으로 주석단이 구성되었고 24명의 중앙집행위원과 17명의 후보위원이 선출되었다. 그 중에서 중앙집행위원 중 3명이, 후보위원 중 5명이 공산당원이었고 후보위원 중의 한 사람이 마오쩌둥이었다. 그리고 "소련과 손을 잡고 공산당과 손을 잡아 노동자와 농민을 돕는다(聯蘇容共·工農扶助)"을 국민당의 새로운 강령으로 삼아 국민당과 공산당이 손을 잡고 강력한 혁명 정당을 만들어 노동자, 농민이 주도하는 중국 혁명을 일으키는데 합의하였다. 이것이 역사에서 말하는 "국공합작"이다. 물론 거대한 군벌 세력들에 비하면 쑨원 진영은 여전히 한줌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시작될 혁명 전쟁을 향하여 일단은 첫발을 내딛은 셈이다. 이 날의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은 국공합작이 앞으로의 중국 역사에 어떤 여파를 끼치게 될 지 감히 짐작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서로의 이해타산만 앞세워서 근본적인 이념 차이나 갈등과 불신을 해소하지 못한 채 미봉책으로 놔둔 것이 쑨원식 국공합작의 한계였다. 결국 유일한 구심점이었던 쑨원이 죽은 지 얼마되지 않아 갈등은 폭발하였고 서로에게 총부리를 돌리게 된다.

국공합작과 함께 쑨원은 그동안 자신이 제창해 왔던 혁명 이념인 삼민주의에 대해서도 내용을 대폭 수정하였다. 신해혁명 이후 중국 사회와 국제 정세의 변화를 반영한 것이다. 중국 민족의 해방과 反 제국주의를 원칙으로 5족 공화(五族共和, 중국을 구성하는 5개 민족은 평등하다), 경자유기전(耕者有其田, 땅을 경작하는 사람만이 토지를 가져야 한다), 주권 재민 사상 등 당시 봉건적인 중국 사회의 분위기에서는 그야말로 파격적인 내용이었다. 인민이 오직 군주를 위해 존재했던 중국 5천년 역사에서 처음으로 인민에 의한, 그리고 인민을 위한 정치를 인정한 것이다. 그동안 "멸만흥한"이라는 추상적인 한족 중심의 민족주의에 머물러 있었던 삼민주의는 비로소 체계화되었고 일반 민중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대중적인 사상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를 이전의 삼민주의와 구분하여 新 삼민주의라고 한다.

쑨원이 일개 혁명 지도자가 아닌 중국의 국부로 이름을 남기고 신화화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신 삼민주의 때문이다. 신 삼민주의는 국공합작과 중국 혁명의 기본 이념이 되었으며 국민당은 물론, 공산당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경자유기전"은 공산당이 국공내전에 승리한 뒤 대대적인 토지 개혁을 실시하게 되는 기본적인 원칙이 되었다. 훗날 마오쩌둥은 "신 삼민주의이야말로 쑨원이 남긴 위대한 공적"이라며 높이 평가하였다. 또한 신 삼민주의를 기초로 "신 민주주의 이론"을 수립하여 사회주의 혁명의 이전 단계로 삼기도 했다. 오늘날 타이완과 중국이 서로 자신들이야말로 쑨원이 제창했던 삼민주의의 계승자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 삼민주의는 현대 중국을 만들어낸 사상적 토양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삼민주의는 우리가 익숙한 서구식 민주주의와는 다르다. 중국 특유의 전통적인 색채와 유교적 사고방식을 토대로 서구식 민주주의와 소련식 사회주의가 결합한 것이다. 말하자면 "중국식 민주주의"라고 하겠다.

1924년 6월 16일 중국 국민당 육군군관학교(黃浦軍官學校)가 문을 열었다. 광저우 교외의 황푸섬(黃埔島)에 있었기 때문에 흔히 황푸 군관학교라고 불리었다. 광둥성에는 양무운동 시절 양광총독 장즈퉁이 설립한 광저우수륙학당(廣東水陸師學堂)을 비롯하여 여러 개의 군사 학교가 있었지만 군벌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쑨원은 삼민주의 사상과 혁명 정신으로 철저히 무장한 군사 간부들이 필요했고 따라서 별도의 군사 학교를 세운 것이다. 초대 교장은 장제스, 부교장은 광둥군벌 중 한 사람인 리지선(李濟深)이었다. 또한 예젠잉(葉劍英)은 교육부 부주임에, 덩옌다(鄧演達)은 교련부 부주임에, 저우언라이(周恩來)에 정치부 부주임에 각각 임명되는 등 공산당의 유력한 인물들이 포진하였다. 

교관은 소련에서 파견된 군사 전문가들 이외에 일본 육사나 국내 군사학교를 졸업한 중국인들이 맡았다. 허잉친(何應欽), 류즈(劉峙), 구주퉁(顧祝同), 첸다쥔(錢大鈞) 등 하나같이 쟁쟁한 인물들로, 뒷날 중국군의 수장들이 된다. 초기의 국민혁명군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독일, 일본군을 모방한 북양군과는 달리 철저하게 소련식 편제에 따라 소련식으로 훈련되었다.

1924년 6월 16일 열린 황푸군관학교 입교식. 가운데가 쑨원, 왼쪽의 부동자세를 취한 사람이 장제스이다.

1,200여명이 응모하여 엄격한 선발 기준을 거쳐서 499명이 최종 선발된 후 제1기생으로 입교하였다. 생도들 중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것은 후난성 출신으로 약 30%에 달했다. 그 다음으로 광둥성 출신이 16% 정도로 두번째로 많았다. 그 외에도 다양한 지역에서 모여든 청년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들은 4개 대(隊) 12개 구대(區隊)로 편성되어 각종 이론 교육과 체계적인 군사 훈련을 받았다. 교육기간은 원래 3년이었지만 국민혁명군의 확충과 북벌전쟁의 시작으로 간부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실제로는 6개월 정도로 대폭 단축되어 속성 과정으로 교육받은 후 최일선에 투입되기도 했다.

5개월만인 1924년 11월 30일에 1기생 465명의 졸업생이 배출되었다. 이들은 허잉친을 연대장으로 하는 교도연대로 편성되었다. 그동안 군벌의 힘을 빌려야 했던 쑨원은 처음으로 자신에게 충성하는 군대를 가지게 된 것이다. 1925년 1월 30일에는 2개 교도 연대로 구성된 "교군(校軍)"이 편성되었다. 2월 1일 쑨원은 천중밍 토벌의 출정령을 내렸다. 장제스는 교군을 이끌고 제1차 동정(東征)에 나섰다.

황푸군관학교는 전술학, 군제학, 병기학, 축성학 등 근대적인 군사교육 외에도 중국의 역사와 제국주의 침략사, 삼민주의, 국민당사, 사회주의 사상 등 정치와 역사 사회 전반에 걸친 정치 교육도 실시되었다. 단순한 군인이 아니라 "정치 학교"로서 앞으로의 중국을 짊어질 고급 간부 집단을 양성하는 것이 진정한 목표였다. 이 점이 황푸군관학교가 바오딩 군관학교나 윈난 강무당 등 중국의 다른 군사 학교들과는 다른 점이었다. 황푸군관학교 출신들은 역량이 매우 우수하였고 왜 싸우는가에 대한 목적 의식이 분명하였으며 엘리트 집단으로서 강한 결속력을 갖추고 있었다. 중국 현대사에서 이들이 남긴 역할은 일본 메이지 유신 당시 조슈번의 무장 집단으로서 막부군을 격파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다카스키 신사쿠의 기병대(寄兵隊)에 비견될 만 하였다.

장제스가 북벌전쟁을 시작하자 이들은 그 선봉에 섰고 많은 생도들이 최일선에 싸우다 전사하였다. 1927년 4월 12일 이른바 "4.12사건"으로 국공이 분열되고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일부 생도들이 8월 1일 난창에서 반란을 일으키면서(난창 봉기) 황푸 군관학교가 일시적으로 폐교될 때까지 약 3년 동안 총 6기 7천여명에 달하는 생도들을 배출하였다. 쑨원이 죽은 뒤 장제스는 이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기반으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국민정부의 주도권을 쥘 수 있었다.

또한 일부는 장제스에 맞서 공산군을 지휘하였다. 대표적인 인물이 팔로군 참모장이었던 쭤취안(左权, 1기생)과 쉬샹첸(徐向前, 1기생), 린뱌오(林彪, 4기생) 등이다. 즉, 황푸군관학교는 아마추어 정객들의 엉성한 모임에 지나지 않았던 국민당과 공산당 양쪽 모두에게 군벌을 상대로 전쟁을 할 수 있는 무장 역량을 제공하였다. 만약 황푸군관학교가 없었다면 북벌도 없었을 것이며 국공의 내전 또한 없었을 것이다. 중국은 여전히 봉건 군벌들이 난립한 채 일본의 침략에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다.

황푸 군관학교에는 당시 중국에서 활동하던 우리 독립운동가들도 다수 입교하였다. 보로딘의 소개로 쑨원과 친분을 쌓게 된 여운형은 국민당에서 활동하면서 조선의 무장 독립을 위하여 황푸 군관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협조를 요청하였다. 또한 의열단의 단장이었던 김원봉은 직접 쑨원을 찾아가 입교를 신청하여 4기생으로 입교하였다. 3기생 5명을 시작으로 6기까지 적어도 40여명 이상이 입교하였고 교관으로 활동하던 이들도 여러명 있었으나 당시 여건상 많은 사람이 일본의 눈을 피하여 가명을 쓸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정확한 인원수는 여전히 알 수 없다.

* 쉬스창 하야하다

장쭤린을 꺾고 베이징을 장악한 우페이푸의 칼날은 쉬스창에게 향하였다. 쉬스창은 원래 돤치루이가 옹립하여 그 자리에 앉은데다 장쭤린과도 가깝다. 즈리파와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즈리파 군벌들을 부추겨 쉬스창 공격의 포문을 열도록 하였다.

첫번째가 창장 상류 경비 총사령관 겸 제2사단장 쑨촨팡(孫傳芳)이었다. 양호전쟁에서 활약했던 그는 우페이푸의 눈에 들어서 하루 아침에 즈리파의 유력한 군벌이 되었다. "혼란을 끝내고 분열된 남북이 통일을 하려면 가장 먼저 법통을 회복해야 한다! 법통이 회복되면 다른 깃발은 자연스레 없어질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리위안홍 총통을 복위시키고 국회를 소집해야 한다." 즉, 쉬스창은 합법적인 대총통으로 인정할 수 없으며 지금의 혼란 또한 쉬스창 때문이니 스스로 물러나라는 의미였다.

우페이푸 역시 쉬스창에게 직접 전문을 보내어 "이미 전국의 십여개 성에서 같은 뜻입니다."라며 물러나라고 종용하는 한편, 톈진에서 직예파 독군들을 불러모아 리위안홍의 복직을 논의하고 주요 언론에는 쉬스창의 비방과 퇴진을 요구하는 기사를 실도록 하였다. 그야말로 조조에게 핍박받는 한 헌제처럼 군벌 실력자들에게 좌지우지 되는 것이 대총통이었다. 리훙장 이래 북양의 원로라는 왕년의 명성도 시대의 흐름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쉬스창도 더는 버틸 수 없었다. 그는 1922년 6월 2일 병을 이유로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1918년 10월 제4대 대총통(위안스카이-리위안홍-펑궈장-쉬스창 순)의 자리에 오른 지 3년 8개월 만이었다. 그나마 신해혁명 이래 역대 대총통 중에서는 위안스카이 다음으로 가장 오랫동안 자리를 지킨 셈이었다. 쉬스창은 즈리성 톈진 출신으로 원래는 명문가이지만 아버지가 일찍 죽으면서 몰락하여 어린 시절은 매우 가난했다. 26살에 향시에 합격한 후 리훙장과 위안스카이의 눈에 들어 측근이 되었다. 청일전쟁 직후 위안스카이가 조정의 명령에 따라 신건육군(북양군의 전신)을 창설하자 쉬스창은 비록 군인은 아니었지만 그의 참모가 되어 뛰어난 관료적 역량을 발휘하였다. 북양군은 위안스카이의 권력 기반이 되었고 위안스카이가 조정의 실권을 잡자 쉬스창 역시 출세가도를 달려 동3성 총독을 거쳐 국무경이 되었고 대총통까지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쉬스창의 40년 관직 생활을 평가한다면 전형적인 청말 관료의 그것이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큰 업적을 남긴 것도 없다. 다만 처세에 능하고 무리하지 않으며, 자기 의견 없이 남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라 할 뿐이다. 사람을 대할 때에는 얼굴에 항상 미소를 띄웠다. 관료로서는 유능하지만 지도자감은 아닌 그가 난세에 만인지상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던 것은 오직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라도 말년에 와서 거의 20살이나 어린 까마득한 후배인 우페이푸의 핍박에 못이겨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 결코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울분을 참고 하야를 선언한 후 고향인 톈진에서 은거하였다.

톈진은 수도 베이징과 가까우면서 근대 공업이 집중된 화북 경제의 중심지였다. 또한 북방 최대의 무역 상업 도시이자 상하이, 광저우와 함께 중국 최대의 국제 도시로서 온갖 정보가 모였다. 쑨원을 비롯한 혁명파가 주로 상하이와 광저우를 무대로 활동한 반면, 베이징 정부의 정치가들과 군벌, 정객, 관료들이 권력 다툼에 패배하면 가장 먼저 톈진의 외국 조계로 몸을 피하였다. 여기에 있으면 베이징의 정치적 동향을 기민하게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신변을 보호하면서 사업에 뛰어들어 막대한 돈을 벌거나 정세의 변화에 따라 정계로의 복귀를 꿈꾸기도 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리위안홍, 돤치루이, 청조의 복벽을 꿈꾸었던 장쉰, 마지막 황제 푸이이다.

1920년대의 톈진. 북방에서 가장 발달된 도시이자 지정학적으로 수도 베이징과 가까워 정치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권력 다툼에서 패배하여 몰락한 군벌들은 대개 베이징과 가까운 톈진에서 은거하면서 후일을 도모하곤 했다.

하지만 쉬스창은 1939년 6월 84살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정치에는 완전히 손을 뗀 채 이곳에서 독서를 하면서 유유자적하게 노년을 보냈다. 중일전쟁이 일어난 뒤 화북을 점령한 일본이 그를 회유하려고 했으나 끝까지 거절하였다. 아마도 10년 정도 더 살았다면 마오쩌둥의 공산군이 천하를 차지하는 것까지 지켜보았을 것이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한 나라의 흥망성쇠를 보았다는 점에서 역사의 산 증인이나 다름없었다. 신을 쫓아낸 차오쿤과 우페이푸, 장쭤린이 차례로 몰락하고 이름도 없던 장제스가 중국 전토를 통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삼국지에서 '일을 하는 것은 사람이지만 이루는 것은 하늘(謀事在人 成事在天)'이라고 탄식했던 제갈량의 마음이 실로 헤아려졌을 것이다.

* 즈리파의 분열

즈리파의 영수인 차오쿤은 이전부터 대총통이 되겠다는 야심이 있었다. 눈의 가시같았던 쉬스창이 사라지자 당장 자신이 그 자리에 앉으려는 욕심을 부렸다. 자신이 대총통이 된 다음 즈리의 깃발을 앞세워 중국을 평정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페이푸가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만류하자 부득이 뜻을 접을 수 밖에 없었다. 차오쿤은 사사건건 간섭하는 우페이푸가 점점 성가시게 여겨졌다. 더욱이 돤치루이와 장쭤린을 꺾은 우페이푸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면서 사실상 차오쿤마저 재쳐놓고 즈리파의 실세인양 행세하기 시작했다. 차오쿤은 불쾌했다.

우페이푸가 신임 대총통으로 추대한 사람은 리위안홍(黎元洪)이었다. 겉보기에는 풍체 좋고 위엄이 넘치지만 쉬스창과 마찬가지로 무색무취인데다, 장쉰의 복벽사건 당시 스스로 대총통의 자리를 던지고 도망쳤을만큼 용렬한 위인이었다. 결코 일국의 지도자 감은 아니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우페이푸가 "누구도 반대하지 않을 사람"이라며 추천한 이유였다. 리위안홍은 쑨원과도 친분도 있는데다 세력도 실력도 없으므로 조종하기도 쉬웠다. 필요가 없어지면 간단하게 끌어내릴 수 있었다.

톈진에 은거한 채 사업가로 변신한 리위안홍은 먹고 사는데 궁핍하지 않을 뿐더러 베이징 정부의 암투는 신물이 날 정도로 겪었다. 따라서 이제와서 즈리파 군벌들이 우루루 몰려와서 다시 대총통의 자리에 오르라고 하는 것이 달가울 리가 없었다. 그러나 이들의 핍박에는 도무지 견딜 방법이 없었다. 결국 ​6월 11일 리위안홍은 베이징으로 돌아와 제5대 대총통에 취임하였다. 리위안홍이 아니꼬왔던 차오쿤은 바오딩의 저택에 틀어박혀 아프다는 핑계로 참석하지 않았다.


며칠 뒤, 우페이푸가 차오쿤의 저택을 방문하여 이런저런 국사를 논하였다. 그런데 베이징 정부의 관료들이 느닷없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차오쿤이 아니라 우페이푸를 만나러 왔다며 차오쿤더러 자리를 비켜달라고 하였다. 차오쿤은 당연히 화가 났다. "내 집에서 나보고 나가라니 어디로 가란 말이냐!" 그리고는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그들이 온 목적은 매국 관료로 이름난 차오루린()의 체포와 재산 몰수에 동의를 받기 위함이었다. 그는 돤치루이 시절 일본의 니시하라 차관과 관련하여 2천만원에 달하는 거액의 공금을 횡령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 안-즈 전쟁에서 돤치루이가 몰락한 뒤에도 장쭤린이 비호한 덕분에 처벌을 피할 수 있었지만 장쭤린이 패배한 이상 보호막도 사라진 셈이다.

하지만 차오루인은 차오쿤과도 친분이 있었다. 차오쿤이 알면 반대할 것이 뻔했으므로 우페이푸는 차오쿤에게는 아무런 상의도 없이 그 자리에서 동의하였다. 덕분에 차오쿤은 차오루린이 체포되었다는 사실을 다음날 아침
조간 신문을 통해 알게 되었다. 우페이푸는 물론이고 누구한테도 언질도 받지 못한 그는 완전히 무시당한 셈이었다. 격분한 그는 자기 집에서 머물고 있었던 우페이푸를 당장 불러 내었다. 꼭두새벽에 자다가 불려나온 우페이푸 역시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어르신께서는 도대체 얼마나 중요한 일이길래 이렇게 부르십니까?" "흥, 너도 이제 출세했다고 나 따위는 안중에 없는가 보구나." 우페이푸는 길길이 호통을 치는 차오쿤을 달랜다고 한동안 진땀을 빼야 했다. "제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호되게 때려주십시오. 화는 몸에 좋지 않습니다." 차오쿤이 고개를 돌린 채 더 이상 대꾸하지 않자 우페이푸는 분을 참고 절을 한 다음 뤼양으로 돌아갔다. 두사람의 십년 지기 관계도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원래 즈리파란 북양 군벌들 중에서 돤치루이의 전횡에 불만을 품은 일부 군벌들이 뭉친 것에 불과하였다. 그 선봉에 선 펑궈장, 차오쿤이 즈리성 출신이기에 즈리파라고 통칭한 것이다. 서로의 유대감도 없고 결속력도 없었다. 단지 합종연횡으로 뭉친 군벌들의 느슨한 연합체일 뿐이었다. 이 점이 장쭤린의 펑톈파, 옌시산의 산시파, 펑위샹의 서북파, 장제스의 황푸파 등 한 사람의 수장을 정점으로 뭉친 다른 군벌 세력들과 다른 점이었다. 펑즈 전쟁이 끝난 후 즈리파는 점차 두개의 파벌로 분열되기 시작했다. 하나는 차오쿤의 바오딩파였고 또 하나는 우페이푸의 뤄양파였다.

차오쿤의 동생이자 즈리 성장 차오루이(曹銳)는 펑즈 전쟁 당시 장쭤린과 내통한데다 펑톈군이 몰려오자 제일 먼저 톈진으로 도망쳤다. 덕분에 차오쿤의 신임을 잃자 우페이푸는 이를 빌미로 인사 조차를 하면서 자신의 부하인 제23사단장 왕청빈(王承斌)을 그 자리에 앉혔다. 하지만 이것은 왕청빈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우페이푸의 술책이었다.

왕청빈은 처음부터 오패부의 심복은 아니었다. 몇년 전만 해도 우페이푸와는 동렬의 지위였다. 게다가 장쭤린과 같은 펑톈 출신이었기에 쉬스창은 왕청빈에게 장쭤린과의 조정 역할을 맡긴 바 있었다. 왕청빈은 어쨌든 대총통의 지시이므로 부지런히 양 진영을 오가면서 화해를 주선하였다. 장쭤린에 대한 악감정이 있었던 우페이푸는 눈치없는 왕청빈이 아니꼽게 여겨졌고 차오쿤에게 "장쭤린과 내통하고 있다"고 참소하였다. 덕분에 왕청빈은 즈리파 사이에서 내통자로 낙인찍히게 되었다. 여기다 펑즈 전쟁에서의 공을 높이 사는 척하면서 즈리 성장에 임명하는 대신 군대를 빼앗자 왕청빈은 우페이푸를 원망하였다. 군벌의 위세는 오직 무력에 있었고 무력이 없으면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즈리파 가운데
또 한 명의 불만 분자는 펑위샹이었다. 그는 펑즈 전쟁에서 허난 성장 자오티의 반란을 진압한 공을 인정받아 1922년 5월 14일 허난 독군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성도인 뤄양에는 양호 순열사 우페이푸가 있었고 정저우에는 진윈어의 제14사단이, 또한 후징위(胡景翼)의 제24사단이 징한철도 경비를 명목으로 허난성 북부에 주둔하였다.
모두 우페이푸의 측근이었다. 펑위샹은 말이 허난 독군일 뿐 카이펑만 겨우 차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우페이푸는 펑위샹에게 일시금으로 80만원을, 그리고 매월 20만원의 군비를 중앙으로 상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터무니없는 요구였다. 펑위샹은 단칼에 거부하였다. "그런 명령은 들을 수 없습니다. 굳이 하겠다면 당신이 직접 허난성을 맡으시구랴."

허난 성은 중국에서도 가장 토비가 많고 관리들의 가렴주구가 극심하였다. 펑위샹은 토비를 강력하게 척결하는 한편, 탐관오리를 처벌하고 아편의 판매와 병사들의 약탈을 엄중히 금지시켰다. 또한 독실한 기독교도였던 그는 그동안 관아와 결탁하여 주민들에게 온갖 피해를 주었던 사찰들에 대해서도 엄중히 단속하여 학교로 개조하였다. 병사들의 밀린 봉급은 자오티의 재산을 몰수하여 지급하고 백성의 것을 하나도 빼앗지 않았다. 당시의 군벌로서는 보기 드문 선정이었다.
펑위샹의 인기가 날로 높아지자 우페이푸는 그를 질시하면서 "불교를 탄압하는 것은 공산주의자들이나 하는 짓"이라며 비난하였다. 게다가 펑위샹이 휘하의 제11사단 외에도 제7혼성여단, 제8혼성여단, 제25혼성여단 등 3개 여단을 추가로 편성하는 등 세력을 점점 확대하자 우페이푸로서는 내심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우페이푸는 1922년 10월 31일 펑위샹을 쫓아내고 자신의 충복인 장푸라이를 그 자리에 임명하였다.

허난 독군에 임명된 지 겨우 5개월만에 쫓겨난 펑위샹은 내심 자신의 고향인 안후이 독군을 원했지만 막상 돌아온 자리는 아무런 실권도 없는 육군부 검열사였다. 베이징 정부의 육군부는 원래라면 중국 육군 전체를 통솔하는 최고의 기관이지만 군벌이 난립하고 대총통도 허수아비인 현실에서 무슨 힘이 있겠는가. 우페이푸의 푸대접에 펑위샹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았다. 그는 바오딩으로 가서 차오쿤을 찾아가 하소연하였다. 펑위샹은 즈리파의 원로였던 루지안장의 외조카이기도 했다. 차오쿤은 그를 좋은 말로 위로하였다. "베이징 주변에는 쓸만한 병력이 없다. 그대의 군대는 강하다. 남의 눈치를 보며 허난성에 남아있기보다 병력을 이끌고 베이징으로 온다면 훗날의 장래에 큰 도움이 될 것이네. 또한 산둥성은 지금 독군과 성장이 서로 싸우고 있으니 그대는 기회를 보아서 산둥성을 차지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또한 군대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경비는 충원먼(崇文門, 베이징 내성에 있는 성문 중 하나)의 통과세로 충당케 하여 편의를 봐주었다. 물론 1개 사단과 3개 혼성여단 약 2만명에 달하는 대군을 먹여살리는데는 턱없이 부족했지만 펑위샹은 일단 감내하기로 했다. 두 사람은 기분 좋게 헤어졌지만, 차오쿤은 이날의 배려가 나중에 크나큰 비수로 자신의 등에 꽂힐 줄이야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2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베이징으로 올라온 펑위샹은 베이징 교외의 난웨이(南苑)에 병력을 주둔시킨 채 혹독하게 훈련시켰다. 그의 군대는 대부분 즈리성과 허난성, 산둥성의 가난한 소작농 출신들이었다. 따라서 궁핍한 환경에 익숙했고 인내심과 끈기가 강하였으며 명령에 절대 복종하였다. 펑위샹 자신부터 빈민 출신이었다. 부모는 그가 열살 남짓이었을 때 아편 중독으로 죽었다. 살던 집은 고리대금업자의 손에 팔렸다.
오직 먹고 살기위해 15살의 나이에 졸병으로 입대해야 했다. 우페이푸같은 엘리트 출신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기구하기 짝이 없는 팔자인 셈이다. 밑바닥 인생을 경험했던 그는 누구보다도 민중의 삶을 잘 이해하였고 군벌들이 힘없는 농민들을 함부로 착취하는 현실에 분노하였다. 그 분노로 병사들을 엄한 규율로 훈련시켰고 계급고하의 차별없이 똑같은 생활을 하며 동거동락하였다. 중국의 모든 군대를 타락시켰던 술과 아편, 담배, 사치품도 펑위샹의 군대에서는 엄중히 금지되었다. 사소한 규율 위반조차 엄벌을 받았다. 그의 군대는 가난뱅이 오합지졸에서 즈리파 최강의 군대로 탈바꿈하였다.

펑위샹의 명령이 한번 떨어지면 전군이 10분 이내에 도열하여 출동 준비를 끝낸다. 영하 10도 이하의 강추위에서도, 비바람이 몰아치는 어둠 속에서도 40km 이상을 쉬지 않고 강행군하여 공격에 나설 수 있고 꽁꽁 언 땅에 재빨리 참호를 파서 방어 태세를 갖출 수 있다. 중국의 어느 군대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또한 그의 휘하에는 20년 이상 함께 했던 루쭝린(鹿鍾麟), 장즈찌앙(張之江), 쑹쯔위안(宋哲元), 펑즈안(馮治安), 류루밍(劉汝明), 장쯔중(张自忠) 등 뛰어난 지휘관들이 있었다. 뒷날 장제스, 리쭝런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거대한 서북군벌을 형성하는 이들은 펑위샹과 장제스가 손을 잡고 북벌전쟁을 추진하자 선봉에 섰고 중일전쟁이 일어난 뒤에는 항일명장으로 중국 전역에 명성을 떨치게 된다.

펑즈 전쟁 승리 이후 즈리파 수장들은 서로 경쟁적으로 자기 세력을 확장하는데만 급급하였다. 창장 상류 총사령관 쑨촨팡은 2개 사단(제2사단, 제12사단)으로 푸젠성을 침공하였다. 리후지를 몰아내고 푸젠성을 차지하였던 쑨원의 북벌군은 천중밍을 토벌하기 위해 대부분 남쪽으로 철수한 상황이었다. 또한 샤면 해군연습함대 사령관 양수좡(楊樹莊)도 샤먼의 해군 부대를 규합하여 안후이파 군벌 왕융촨(王永泉)을 격파하였다. 덕분에 쑨촨팡은 이렇다할 저항을 받지 않고 1924년 4월 12일 푸저우를 점령하고 푸젠성 대부분을 장악할 수 있었다.

우페이푸는 양수좡을 해군 총사령관에, 쑨촨팡을 푸젠 독군에 각각 임명하였다. 그리고 쑨촨팡에게 여세를 몰아서 광둥성을 공격하라고 명령하였다. 하지만 모처럼 자기 기반을 차지한 쑨촨팡은 더 이상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더욱이 광둥성에는 쑨원이 이끄는 남방 4개성의 대군이 모여 있었기에 쑨촨팡으로서는 쉽사리 공격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하지만 우페이푸로서는 체면을 구긴 셈이었다.

허수아비 대총통 리위안홍이 자리를 차지한지 1년이 되자 인내심이 바닥난 차오쿤은 슬슬 그를 쫓아낼 궁리를 시작했다. 4월 26일 펑위샹을 비롯해 즈리파 간부 85명이 대총통부 앞에 모여서 그동안 밀린 군비를 내놓으라고 시위를 하였다. 국무총리 장샤오청(張紹曾)이 부랴부랴 우선 140만원을 3번에 걸쳐 지급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펑위샹은 자기 부대에 미지급된 돈만 139만원이라며 그 돈부터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또한 일부 각료들마저 내각 총사퇴를 요구하는 등 베이징 정부는 마비 상태였다. 장샤오청은 사직서를 던지고 야반도주하듯 톈진으로 도망쳐 버렸다.

6월 7일에는 500명에 달하는 즈리파 군인들이 대총통부 앞에서 소란을 피웠다. 다음날에는 톈안먼 앞에서 차오쿤의 어용 정당인 공민당 소속의 회원 수백명이 모여 "국민대회"를 열어 리위안홍의 퇴진을 외쳤다. 9일에는 베이징 경찰들이 파업을 선언했다. 또한 리위안홍의 저택을 경비하는 부대가 멋대로 철수하였고 심지어 수도와 전기, 전화까지 죄다 끊어버렸다. 그 다음날에는 수백여명의 군인과 경찰, 공무원들이 운집하여 리위안홍의 저택앞에서 모여서 체불된 월급을 내놓으라고 시위를 하였다. 베이징 전체가 난장판이나 다름없었다.

리위안홍도 "이래서는 대총통의 직을 수행할 수 없다. 부득이 대총통부를 톈진으로 옮긴다."라면서 6월 13일 밤 소수의 측근들을 데리고 베이징 역으로 가서 톈진행 기차에 올랐다. 장쉰의 복벽 사건 이후 두번째 야반도주였다. 리위안홍이 제알아서 베이징을 떠나자 그동안 모르쇠로 일관하던 차오쿤은 파업을 하던 군인들과 공무원, 경찰들에게 즉시 복귀하라고 지시했다. 소란은 일순간에 잠잠해졌다.

그런데 그 직후 차오쿤에게 내무총장 가오링웨이(高凌霨)로부터 보고가 들어왔다. "아무리 찾아보아도 대총통의 인장이 보이지 않습니다." 차오쿤은 아차 싶었다. 리위안홍이 들고 간 것이다. 산전수전 다 겪은 리위안홍도 차오쿤의 그냥 당할 생각은 없었다. 대총통의 인장은 옛 왕조의 옥새와 같다. 중화민국의 원수이자 정부의 수반이며 육해군 통수권의 권위를 상징한다. 그게 없으면 여지껏 해온 것도 무용지물이고 차오쿤이 대총통의 자리에 오르는 꿈 또한 허사였다. 급히 톈진에 있는 왕청빈에게 급전을 보냈다.

리위안홍의 특별열차가 톈진 교외의 양춘(楊村)역에 멈추어 섰다. 완전 무장한 경찰들이 역사에 쫙 깔려 있었다. 그 앞에는 왕청빈이 서 있었다. "무슨 일인가?" 불쾌한 표정으로 묻는 리위안홍에게 왕청빈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대총통의 인장을 내놓으십시오." "모른다. 나는 가지고 있지 않다." "사실을 말할 때까지 이곳을 떠날 수 없습니다." 왕청빈의 협박에도 리위안홍은 끝까지 버텼다. 하지만 왕청빈은 무슨 수를 써더라도 대총통의 인장을 받아낼 생각이었다. 한동안의 실랑이 끝에 결국 리위안홍은 굴복하고 대총통의 인장을 내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왕청빈은 리위안홍에게 대총통의 직에서 물러날 것과 국무총리에게 권한 대행을 맡긴다는 선언을 하라고 윽박질렀다. 다음날 새벽 리위안홍은 간신히 풀러날 수 있었다. 중화민국 대총통이 일개 성장에게 장장 12시간 30분이 넘도록 붙들려 있어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십여년 전 우창봉기에서 청조를 무너뜨렸던 혁명군의 원수가 정계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이기도 하였다.

그는 한때 남쪽으로 내려가 쑨원과 연합하는 방안을 고려하기도 하기도 했으나 쑨원의 시큰둥한 반응에  결국 포기하였다. 또한 제2차 펑즈 전쟁으로 우페이푸가 몰락하자 리위안홍을 대총통으로 다시 추대하자는 움직임도 있었으나 리위안홍은 더 이상 군벌들의 손아귀에서 꼭두각시마냥 놀아나는 정치에는 뜻이 없었다. 그는 유유자적한 은거 생활을 보내다 1928년 6월 3일 톈진에서 뇌출혈로 타계했다. 때마침 북벌에 성공하여 톈진을 점령한 장제스는 리위안홍을 중화민국 국장으로 성대한 장례를 치뤄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