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이징 정변(北京政变)
펑톈군의 맹공 앞에 산하이관의 전황은 점점 악화되었다. 즈리파의 거점은 하나씩 함락되었고 해군을 동원한 우페이푸의 후루다오 상륙작전도 펑톈군의 공습에 막혀서 되돌릴 수 밖에 없었다. 장쭤린은 예비대를 투입하여 한층 공격을 강화하였다. 산하이관 돌파도 시간 문제였다.
하지만 상황이 반드시 우페이푸에게 불리하다고만은 할 수 없었다. 같은 시간 남쪽에서는 쑨촨팡과 지씨에위안 등이 지휘하는 즈리군이 저장 독군 루융상을 격파하고 항저우와 상하이를 점령하였다. 루융상은 10월 13일 하야를 선언한 후 일본으로 도망쳤다. 루융상을 도와서 저장성의 안후이파 군대를 총지휘하였던 쉬수청(徐树铮)은 상하이 공동조계에 도망가 몸을 숨었다. 그는 안후이파 간부들을 자신의 은신처로 불러모아 회의를 열고 장쭤린과 연계하여 계속 항전할 방안을 논의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안 상하이 조계 당국이 경찰을 보내어 이들을 급습한 후 체포하였다. 물론 그 뒤에는 즈리파의 사주가 있었다.
광저우의 쑨원에 대해서는 천중밍으로 견제하였다. 후이저우(惠州)를 거점으로 광둥성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천중밍이 건재한 이상 쑨원은 움직이지 못한다. 천중밍은 광저우의 상인들을 부추겨 반란을 일으키게 했다. 이 때문에 광둥성 북부 사오관(韶關)에서 장쭤린에 호응하여 한창 출전을 준비하고 있던 쑨원은 부랴부랴 광저우로 돌아와야 했다. 세명의 강적을 상대로 남북 2천여 km에 달하는 광대한 전선을 일사분란하게 지휘하는 것만 보더라도 전략가로서 우페이푸의 노련함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는 막상 자신의 발밑이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하였다.
한달 만에 루융상을 무찌르고 남방을 평정한 우페이푸는 즉각 병력을 북쪽으로 돌렸다. 저장성 방면에 투입된 즈리파 군대는 약 20만명에 달했다. 이만한 대군이 진푸철도를 따라서 올라온다면 펑톈군이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수에서 밀리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허난성과 산시성(陕西省), 후베이성, 후난성 등 서쪽에서도 증원부대가 속속 올라오고 있었다. 즈리군의 총병력은 50만명이 넘는다. 전열을 가다듬을 수 있다면 전세는 단숨에 역전할 수 있다. 우페이푸는 그렇게 믿었다. 그는 산하이관의 모든 군대에 철퇴 불가를 엄중하게 하달하였다. "명령없이 물러나는 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즉결처분한다!" 허난 독군 겸 제14사단장 장푸라이(張福來)를 후방 증원부대의 총사령관에 임명하여 베이징으로 북상 중인 군대와 물자의 수송을 더욱 독려케 하였다. 그야말로 총력전에 들어간 것이다.
우페이푸는 "전선이 급박하다"라면서 러허성에서 펑톈군과 대치 중인 왕화이칭(王懷慶)의 제2군과 펑위샹의 제3군에 대하여 산하이관 방면으로 출동하라고 지시하였다. 베이징의 수비를 맡은 후방 부대에도 총동원 명령이 떨어졌다. 그는 즈리파의 모든 전력을 산하이관으로 집중시켜 장쭤린과 결전을 벌일 참이었다. 우페이푸의 모든 관심이 장쭤린에게 쏠린 것은 펑위샹에게 그야말로 하늘이 내려준 기회였다.
10월 19일 저녁 그는 심복들을 불러모아서 비밀 회의를 열고 베이징으로 회군한다고 선언하였다. "중국 인민을 위하여 장쭤린, 쑨원과 손을 잡아 차오쿤, 우페이푸를 친다" 물론 어느 한 사람 이의는 없다.
"리밍충(李鳴鐘)의 제8여단은 장신톈을 점령하여 징한, 징펑 철도를 차단하라! 후징위(胡景翼)의 산시 제1사단은 롼저우와 준량청을 점령하고 우페이푸가 서쪽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저지하라!" 또한 베이징의 경비를 맡은 쑨위에(孫岳)의 제15혼성여단은 주요 성문을 장악하고 우페이푸측 부대를 무장해제토록 하였다. 청더 방면에 나가 있는 장즈지앙(張之江), 쑹저위안(宋哲元) 여단에도 즉시 회군하여 베이징으로 향하라고 지시하였다. 펑위샹 자신은 직계부대인 제11사단을 이끌고 구베이커우를 출발하여 직접 베이징으로 향했다. 루쭝린(鹿鐘麟)의 제22여단이 선봉에 서서 전속력으로 내달았다.
구베이커우에서 베이징까지 거리는 약 120km. 이미 베이징에는 펑위샹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하지만 즈리군의 주력은 산하이관 방면에 묶인 채 장쭤린과 악전 고투를 벌이고 있는데다 베이징 주변을 지키고 있던 우페이푸 측의 유력한 부대들 역시 대부분 최전선으로 출발했기에 베이징은 빈 집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베이징 위수 사령관 쑨위에, 즈리성장 겸 즈리군 부사령관 왕청빈이 이미 펑위샹에게 가담키로 약속한 이상 쿠테타는 이미 성공한 셈이었다. 여기다 약 3만명에 달하는 펑위샹의 군대가 베이징으로 들어온다면 무슨 수로 막을 것인가.
한편, 여전히 후루다오 상륙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우페이푸는 발해 함대를 이끌고 친황다오 인근 해상에서 체류하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하지만 19일 당일에도 펑톈군 폭격기들의 공습으로 기함 하이치(海圻)가 여러발의 폭탄을 맞았고 나머지 군함들도 큰 피해를 입는 등 우페이푸의 사령부는 마비 상태나 다름없었다. 뒤늦게야 펑위샹이 멋대로 군대를 돌려서 베이징으로 향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그로서는 완전히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장푸라이에게 즉시 저지하라고 지시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10월 22일 밤 9시, 루쭝린의 부대가 베이징 교외의 베이위안(北苑)에 당도하였다. 120km를 3일만에 주파했으니 하루 평균 40km를 쉬지 않고 걸어온 셈이다. 이들은 동북쪽에 있는 안징문(安定門)을 통하여 베이징 성내로 진입하였다. 성문은 이미 쑨위에의 부하들이 장악하고 있었기에 저항이 있을 리 없었다. 그 뒤를 이어서 리밍충(李鳴鐘)의 제8여단과 펑위샹의 본대도 차례로 베이징에 도착하였다. 같은 시간 후징위(胡景翼)의 산시 제1사단도 베이징과 산하이관을 연결하는 요충지인 퉁저우(通州)를 장악하였다. 베이징 주변은 이미 펑위샹의 군대로 넘쳐났다.
병사들은 너나할 것 없이 "서사구국(誓死救国, 목숨으로 나라를 구한다)", "불요민(不扰民,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다)", "진애민(真爱民, 진심으로 백성을 사랑한다)"라고 적힌 흰색 완장을 차고 있었다. 다음날 새벽까지 주요 정부 청사와 여러 성문들, 기차역, 전신국, 신문사 등이 모조리 펑위샹의 수중에 넘어갔다. 또한 성내의 모든 전화선이 끊어졌다. 베이징은 외부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신세가 되었다. 중난하이에 있는 차오쿤의 대총통부는 대도를 든 병사들이 포위하였고 총통부 경비부대와 우페이푸 측 부대는 모두 무장해제 되었다. 저항은 없었다. 마지막 황제 푸이가 여전히 거주하고 있는 자금성 북쪽 징산(景山)에는 야포 4문이 배치되어 베이징 시내를 겨냥하였다. 하루밤 사이 일어난 변란에 경악하기는 열강들도 마찬가지였다. 외국 공사관들과 거류민들이 모여 있는 둥쟈오민샹(东交民巷)에는 경비병들이 엄중하게 경계하면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 각국 외교관들은 사태를 파악하느랴 정신이 없었다.
그 때까지도 우페이푸만 믿고 있던 차오쿤은 자신의 관저에서 태평스레 잠을 자고 있었다. 하지만 반란군이 몰려온다는 말을 듣자 변변히 옷가지도 챙기지 못하고 잠옷 바람에 허둥지둥 네덜란드 공사관으로 도망쳤다. 펑위샹은 총 한발 쏘지 않고 중국의 수도를 수중에 넣었다. 베이징의 주인이 된 그는 자신의 군대를 "국민군(國民軍)"이라고 칭하기로 하였다. 이것은 쑨원의 국민당에서 따온 것이었다. 과거 중국 동맹회에도 가입하였던 펑위샹은 오래전부터 쑨원을 흠모해 온데다 쑨원과 합작하기로 했으니 국민군이라 칭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10월 24일 장쭤린, 쑨원, 펑위샹과 4자 동맹을 맺고 막후에서 지원하였던 안후이파의 영수 돤치루이도 톈진에서 베이징으로 왔다. 4년 전 안-즈전쟁에서 우페이푸에게 패배하여 몰락했던 그는 그동안 톈진의 일본 조계에서 은거하면서 재기를 꿈꾸고 있었다. 드디어 기회를 잡은 것이다. 거사의 주모자들인 왕청빈, 펑위샹, 쑨위에, 돤치루이가 서로 연명하여 내전 중지와 화평을 요구하는 전문을 전국으로 발송하였다. 또한 재정총장 왕커민(王克敏), 총통부 내지처장 리옌칭(李彦青) 등 그동안 차오쿤, 우페이푸의 수족 노릇을 하던 즈리파 정치인, 관료들도 줄줄이 체포되었고 일부는 외국 조계로 숨을 숨겼다. 차오쿤의 동생이자 군수총감을 맡고 있던 차오루이(曹锐)는 구금되자 절망한 나머지 아편을 먹고 자살했다.
왕청빈은 네덜란드 공사관으로 피신한 차오쿤을 만났다. 그리고 정전 명령을 내릴 것과 우페이푸의 파면, 대총통의 인장을 내놓고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바로 1년 전 차오쿤의 명령을 받아 리위안홍을 대총통에서 끌어내렸던 그가 이제는 상전인 차오쿤에게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차오쿤은 오랫동안 자신의 충실한 심복이었던 왕청빈이 안색을 바꾸어 자신을 핍박하는 모습에 어안이 벙벙했다. "너희들은 나더러 작년에는 대총통이 되라고 하더니 지금은 내려오라는 것이냐. 나는 그런 말에 절대로 따를 수 없다." 고집을 부리는 차오쿤에게 왕청빈은 냉랭하게 말했다. "대총통부를 버리고 도망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기에 있으면 당신 자신은 난을 피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일가친족의 목숨과 재산은 지킬 수 없을 것입니다. 우선 대총통부로 돌아가십시오. 그럼 저희가 안전을 책임지겠습니다."
차오쿤은 고개를 돌린 채 대꾸하지 않았지만 이미 생사여탈권이 이들의 손에 넘어가 있는데 버틸 재간이 있을 리 없었다. 결국 그는 왕청빈과 함께 대총통부로 돌아간 다음 이들의 요구 조건을 모두 수락하였다. 우페이푸는 모든 직위에서 파면되었고 서북의 티베트 고원에 위치한 칭하이성의 간무사업독판(墾務事業督辦, 변방의 개척을 맡은 감독관)이라는 한직이 주어졌다. 변방으로 유배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차오쿤은 그대로 대총통부에 연금된 채 포로나 다름없는 신세로 지내다가 1년 반이 지난 1926년 4월에야 석방되었고 남쪽으로 내려가 우페이푸에게 몸을 의탁하였다.
그런데 때마침 북벌전쟁을 시작한 장제스의 북벌군이 파죽지세로 올라왔다. 우페이푸는 장제스에게 대패하면서 완전히 몰락하였다. 갈 곳 없는 신세가 된 차오쿤은 톈진의 일본 조계로 가서 은거하였고 정치에서 완전히 손을 뗀 채 서민들 사이에 묻혀서 조용히 살다가 1938년 5월 17일 병사하였다. 그의 나이 75세. 가난한 선박 수선공의 아들로 태어나 포목점의 장돌뱅이에서 만인지상의 지위까지 그야말로 난세에 어울리는 파란만장한 인생이었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뒤 일본이 그에게 접근하여 친일을 하는 대가로 높은 지위를 주겠다면서 회유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한 시대를 풍미한 군벌 정치인으로서 그나마 마지막 자존심이라고 하겠다.
* 푸이, 자금성에서 쫓겨나다
베이징이 반란군에게 점령되고 대총통 차오쿤이 우페이푸를 파면하는데 동의했다고 해서 그것으로 모든 일이 끝날 리는 없다. 우페이푸와 즈리군의 주력 부대는 여전히 건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에는 장쭤린의 펑톈군이, 뒤에는 펑위샹의 반란군으로 둘러싸인 상황에서 군대는 동요하고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게다가 베이징 정변의 소식을 들은 펑톈군은 더욱 사기가 올라서 산하이관을 향해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우페이푸는 장푸라이에게 산하이관 방면을 맡기고 한발짝도 물러나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 그리고 10월 26일 자신은 직접 최정예부대인 제3사단과 제26사단 일부 등 8천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베이징으로 향하는 한편, 남쪽의 다른 즈리파 군대에게도 베이징으로 진격하라고 지시하였다. 또한 펑위샹에게 화평 교섭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펑위샹의 입장은 완강했다. 우페이푸가 모든 직위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페이푸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므로 교섭은 결렬되었다.
펑위샹은 톈진을 점령하고 진푸 철도와 통신선을 차단하였다. 이로 인해 남쪽에서 올라오던 즈리파 군대와 우페이푸 사이의 모든 연락이 끊어졌다. 또한 그동안 중립을 지키던 산시 독군 옌시산도 펑위샹과 손을 잡았다. 여지껏 산시성의 통치에만 만족하던 옌시산이 드디어 중원의 싸움에 관여한 것이다. 산시군이 동쪽으로 진격하여 즈리성을 침입하였다. 그리고 철도의 요지인 스좌장(石家莊)을 점령한 후 징한 철도를 차단하고 허난성과 후베이성에서 북상 중이던 즈리파 군대를 강제로 무장해제시켰다. 준량청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베이징 탈환을 준비하던 우페이푸 역시 펑위샹 휘하의 후징위 부대에 의해 후방이 차단되었다. 나아갈 수도, 물러날 수도 없는 사면초가의 신세였다.
10월 30일 새벽, 우페이푸의 선봉 부대인 제23사단 1개 연대가 베이징과 톈진 중간에 있는 랑팡(廊坊)에서 펑위샹 군대를 공격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두시간에 걸친 일진일퇴 끝에 결국 격퇴당했다. 펑위샹은 여세를 몰아서 총공격을 명령했다. 11월 1일 베이징 교외의 양촌(陽村)에서 결전이 벌어졌다. 리밍충, 장즈지앙, 시요우산(石友三) 등 펑위샹 휘하의 부대들이 우페이푸 군을 포위한 후 사방에서 공격하였다. 여단장 판홍쭝(潘鸿钧)을 비롯하여 4천여명이 죽거나 포로가 되면서 완전히 괴멸하였다. 우페이푸의 사령부가 있는 준량청도 포위되었다. 대세는 결정났다. 우페이푸는 겨우 2천여명의 병력만 수습한 채 11월 2일 다구(大沽)항에서 화물선을 타고 바다로 도망쳤다. 그리고 영국 군함의 호위를 받으면서 남쪽으로 내려간 후 상하이와 우한을 거쳐서 자신의 근거지인 뤄양으로 갔다. 그에게는 아직 허난성과 후베이성이 남아 있었고 그곳에서 재기를 꿈꾸었다.
베이징이 펑위샹의 수중에 넘어가고 우페이푸마저 패주하여 도망치자 즈리군의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10월 28일 장쭝창의 제4군 2만여명이 즈리군의 방어선을 돌파하여 베이징 북쪽의 롼저우(滦州)를 점령하였고 31일에는 즈리군의 사령부가 있는 친황다오가 함락되었다. 산하이관의 상공에서는 펑텐군의 비행기들이 날아다니면서 "베이징 정변"을 알리는 대량의 삐라를 즈리군 머리 위에 뿌렸다. 10만명이 넘는 즈리군이 완전히 붕괴되었다. 투항한 병사만도 3만명이 넘었고 소총 3만정 이상, 기관총 2천정, 대포 200문이 펑톈군의 손에 넘어갔다.
장쭤린의 대군은 여세를 몰아서 베이징을 향하여 파죽지세로 남하하였다. 이로서 즈리파가 중원을 호령하던 시대는 끝났다. 이것은 위안스카이가 남겨놓은 북양 군벌의 시대가 종지부를 찍었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장쭤린, 펑위샹은 북양파의 방계에 속하기는 했지만 엄밀히 말하여 위안스카이가 키어낸 것이 아닌 스스로 일어선 세력이다. 난세의 혼란 속에 패권은 한 세력에서 다른 세력으로 넘어갔고 구 세력이 무너지자 신진 세력들이 빠르게 그 자리를 차지하였다.
위안스카이가 죽은 뒤 지난 8년 동안 천하 패권을 다투던 양대 세력인 안후이파와 즈리파는 역사의 뒷전으로 밀려난 채 더 이상 주도권을 쥘 수 없었다. 안후이파의 영수 돤치루이는 과거의 명망 이외에는 이렇다할 세력도 기반도 없는 일개 정객에 지나지 않았다. 즈리파 역시 차오쿤이 몰락하고 우페이푸가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자 분열되어 푸젠 독군 쑨촨팡이 새로운 실세가 되어 전열을 정비하였다. 같은 시간 남쪽의 광시성에서는 리쭝런(李宗仁), 보충시(白崇禧), 황샤오훙(黃紹竑) 등 이른바 "신 광시파"들이 세력을 규합하여 루롱팅, 선훙잉 등 "구 광시파"와 싸워서 패권을 장악하였다. 광시 육군 소학당 출신인 이들은 뛰어난 군사력 역량과 강한 결속력을 가지고 있었고 훗날 장제스의 난징파, 펑위샹의 서북파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막강한 "광시파"를 형성하여 국공내전까지 난징 정부의 한축을 차지하게 된다.
광저우에서는 국공합작과 함께 장제스가 빠른 속도로 유력한 군사적 실력자로 부상하고 있었다. 그는 1924년 11월 20일 황푸군관학교의 생도들로 구성된 교군(校軍)을 조직하고 광저우의 막강한 상단 세력을 격파한 후 천중밍 토벌을 준비하였다. 당시 장제스의 오른팔로 활약한 사람이 훗날 중국의 총리가 되는 저우언라이였다. 프랑스 유학에서 막 돌아온 그는 황푸군관학교에서 정치부 부주임을 맡았다. 장제스는 자신보다 11살이나 어린 저우언라이의 뛰어난 조직력과 탁월한 수완, 카리스마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저우언라이는 공산주의자였고 장제스는 반공주의자였다. 국민당과 공산당의 모순과 불신이 해소되지 않는 한 이들의 밀월은 오래갈 수 없었다.
다시 얘기를 베이징으로 돌려보자. 펑위샹의 칼끝이 향한 곳은 자금성이었다. 자금성에는 청나라 12대 황제인 선통제 푸이(溥儀)와 만주족 귀족들이 살고 있었다. 신해혁명 이후 청조의 통치는 끝장이 났지만 자금성 안은 여전히 청나라 시절에서 시간이 멈추어 있었다. 비록 1917년 7월 장쉰의 복벽이 그 평온함을 잠시 깨뜨리기는 했지만 푸이는 여전히 前 황제로서 중화민국이 보장한 지위와 온갖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그런데 11월 5일 아침 오랜 평화가 깨졌다. 펑위샹은 중국은 이미 공화제를 실시한지 10여년도 더 지났는데 구 시대의 유물인 푸이가 여전히 자금성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겼다. 그는 루쭝린과 군대를 보내어 자금성을 포위한 후 금군 병사들을 강제로 무장해제하였다. 그리고 최후 통첩을 전달하였다. "황제의 존호를 영원히 폐지한다. 황제는 앞으로 중화민국의 일반 국민과 동등한 법적 권리를 누린다. 청 황실의 생활비로 연간 50만원을 지급한다. 청황실은 오늘 중으로 자금성을 떠나되, 앞으로 거주할 곳은 자유로이 정할 수 있다."
신해혁명 이래 자금성을 경계로 안과 밖은 서로 딴 세상이나 다름없었다. 중국의 정치적 혼란에도 불구하고 자금성 안은 외부와 철저히 차단된 채 평화를 누렸다. 그 평화가 영원할 것같았지만 하루 아침에 끝장이 나고 말았다. 자금성 안은 패닉 상태나 다름없었다. 20여명의 병사를 대동한 채 18살의 황제 앞에 선 루쭝린은 "조금이라도 지체한다면 우리는 그 결과를 책임질 수 없다"라며 엄포를 놓았다. 또한 어떠한 협상이나 타협도 없다고 못을 박았다. 신해혁명 당시 청조가 저항하지 않는 대가로 중화민국 정부가 약속했던 우대 조건을 하루 아침에 헌신짝처럼 저버리는 것에 푸이는 분개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옛 황제의 황후였던 두 노부인은 "이 곳을 떠나느니 차라리 자살하겠다"라며 버텼다. 하지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또한 자금성에 거주하던 470여명에 달하는 만주족 환관과 시동들도 모조리 쫓겨났다.
푸이는 자금성을 떠나기로 결심하였고 황후와 두명의 시동만 데리고 차에 올라탄 후 출발하였다. 처음에는 자금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부친의 저택으로 가려고 했지만 베이징 성내에는 자신이 갈 곳이 없다는 사실을 금새 깨달았다. 결국 베이징을 벗어나 톈진의 일본 조계로 갔다. 푸이가 자리잡은 곳은 청조의 옛 관료인 장뱌오의 저택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장뱌오는 신해혁명의 첫 방아쇠였던 우창 봉기가 일어난 제8진의 사단장이었다. 그의 무능함이 우창 봉기가 중국 전역으로 확대된 원인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청조에 대한 충성심만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고 푸이를 자신의 저택으로 모신 후 죽을 때까지 성심을 다하였다. 푸이는 이곳에서 장뱌오가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지냈지만 1927년 장뱌오가 죽자 경제적으로 매우 궁핍해졌고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일어난 뒤 일본의 회유를 받아들여 만주로 가게 된다.
펑위샹은 장쭤린과 손을 잡고 베이징의 새 주인이 되었다. 오월 동주의 관계는 오래될 수 없었다. 장쭤린도 천하를 노리는 이상 결국 서로에게 총부리를 돌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