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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 전쟁과 인물, 사건으로 보는 중국 현대사 > 30화 - 쑨원 죽다/blog.naver.com/atena

*돤치루이 허수아비 총통이 되다

제2차 펑즈전쟁으로 차오쿤-우페이푸의 천하는 4년 3개월만에 끝장나고 말았다. 과거 안-즈 전쟁에서 우페이푸에게 패배하여 톈진으로 도망쳤던 돤치루이가 펑위샹의 정변이 일어난 직후 베이징으로 복귀하였다. 그는 총통부에 연금된 대총통 차오쿤에 대하여 "불법 뇌물 선거로 대총통의 지위를 훔쳐서 국가와 민중에게 해를 끼쳤다"라고 규정하고 모든 지위와 권한을 박탈한다고 선언하였다. 하루 아침에 서로의 신세가 완전히 뒤바뀐 것이다.

같은 시간, 산하이관 방면에서는 즈리군이 붕괴되었다. 산하이관 주변은 펑톈군의 손에 넘어갔다. 베이징으로 가는 길은 열렸다. 11월 8일 장쭤린의 본대가 위풍당당하게 산하이관을 넘어 남하하였다. 산하이관에서 베이징과 톈진에 이르기까지 길목마다 펑톈군 부대로 넘쳐났다. 또한 펑톈군은 항복한 즈리군만이 아니라 같은 편인 펑위샹의 국민군 부대까지 습격하여 무장 해제시킨 후 강제로 무기를 빼앗았다.

장쭤린과 펑톈파 수장들.

즈리 성장 왕청빈은 펑위샹과 손을 잡고 베이징 정변을 주도한 주역 중의 한 사람이다. 장쭤린에게는 동맹자이지 적이 아니다. 하지만 펑톈군 제2군장 리징린(李景林)은 왕청빈의 군대를 접수하고 그를 톈진의 영국 조계로 쫓아버렸다. 이해 타산을 앞세운 군벌들의 합종연횡은 어차피 오래 갈 수 없는 법이다. 게다가 당초 산하이관을 결코 넘지 않겠다고 펑위샹에게 굳게 약속했던 장쭤린은 이제와서 자신이 베이징을 차지하려는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이것은 약속 위반이었다. 하지만 보고를 받은 펑위샹은 격분하면서도 실력에서 열세인 이상 속수무책이었다. 그로서는 장쭤린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군대를 뒤로 물리라고 지시하는 수 밖에 없었다.

11월 22일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었다. 펑위샹과 장쭤린, 돤치루이의 연합 정권이었다. 또한 차오쿤이 대총통에서 쫓겨나자 돤치루이가 소위 임시 집정에 추대되었다. 말은 임시 집정이지만 대총통과 다를 바는 없다. 돤치루이가 새로운 대총통이 되지 못한 것은 대총통은 국회에서 선거를 통해 선출되는데 국회가 이미 유명무실화되었기 때문이었다.

명목상 임시 집정의 권한은 막강했다. 신해혁명 당시 쑹자오런이 기초한 중화민국 약법에서는 서구식 의회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권력이 어느 한 사람에게 집중되지 않도록 국가 원수로서의 대총통과 행정부 수장으로서의 국무총리로 나누고 있다. 하지만 임시 집정은 대총통과 국무총리의 권력을 한 손에 쥐는 것이었다. 대외적으로는 국가 원수로서 중화민국을 대표하며, 대내적으로는 민정대권과 중화민국 육해군의 통수권을 장악하고 각 부 장관과 정부 각료들을 소집하여 국무 회의를 주관한다. 그야말로 초법적인 존재로 위안스카이조차 감히 누려보지 못한 지위였다. 돤치루이로서는 그동안 꿈에나 그리던 지존의 자리를 비로소 차지한 셈이었다. 하지만 군벌로서는 완전히 몰락한 채  일개 정객에 불과한 돤치루이는 더 이상 아무런 실력도 없었다. 그의 권력 지반은 오직 펑위샹과 장쭤린 두 군벌이 뒷받침하였다. 그는 이들의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다.신해혁명 이후 오랜 군벌들의 항쟁 속에서도 그나마 유지되었던 중국의 의회 민주주의는 장쭤린-펑위샹의 반란을 끝으로 마지막 명맥마저 완전히 사라진 셈이었다.

또한 펑위샹과 돤치루이, 장쭤린 사이의 모순 또한 갈수록 심화되었다. 돤치루이와 장쭤린은 비록 안-즈전쟁 때 서로 총부리를 겨눈 바 있지만 이렇다할 개인적 원한은 없다. 게다가 안-즈 전쟁에서 몰락한 돤치루이를 적극적으로 비호했던 사람이 장쭤린이었다. 만약 장쭤린이 즈리파를 견제하지 않았더라면 돤치루이는 재기는 커녕 국법에 따라 엄중한 처벌을 받았을 것이다. 돤치루이와 장쭤린이 서로 연합하여 펑위샹을 견제하자 펑위샹은 남쪽의 쑨원에게 북상을 요청하였다. 쑨원과 손을 잡아 세력 균형을 유지하겠다는 계산이었다. 이렇듯 베이징의 정세는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한편, 차오쿤이 하야하고 우페이푸가 패퇴하면서 기댈 곳이 사라진 즈리파는 분열되었다. 장쑤 독군 지씨에위안, 푸젠 독군 쑨촨팡 등 창장 유역 10여성의 즈리파 실력자들이 난징에서 모였다. 이들은 10성 동맹 회의를 개최하고 서로 연합하여 장쭤린의 남하에 대항하는 한편, 돤치루이 정권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들 입장에서 본다면 돤치루이는 안후이파의 수장이지만 또한 북양의 원로이기도 했다. 비록 그동안 안후이파와 즈리파로 분열되어 서로에게 총부리를 들이대었지만 어쨌든 원래는 다같은 북양의 식구들이 아니던가. 적어도 북양의 직계가 아닌 장쭤린이나 펑위샹보다는 믿을 수 있다고 여겼다.

장쭤린-펑위샹 연합군에게 패퇴한 채 바다로 도망쳤던 우페이푸는 패잔병을 이끌고 11월 17일 후베이
성의 성도 우한에 입성하였다. 허난성과 후베이성은 여전히 그의 세력권이었다. 비록 중앙 정계에서는 멀어졌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몰락하지는 않았다. 그는 "호헌(護憲) 군정부"의 수립을 선언하였다. 또한 적법한 절차를 밟지 않은 돤치루이 정권은 불법이며 정통성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비록 중난하이의 대총통부에 갖힌 신세이지만 우페이푸에게는 여전히 차오쿤이 합법적인 대총통이었다. 

제2차 펑즈 전쟁 이후 중국의 세력은 다시 재편되었다. 승자들 간의 논공행상이 실시되어 동3성과 러허성, 톈진을 포함한 즈리성 동부 지역과 창장 하류 이북 전체가 장쭤린의 세력권이 되었다. 돤치루이는 이전에 장-저 전쟁에서 즈리 연합군에게 패주하여 일본으로 도망쳤던 前 저장 독군 루융상과 前 톈진 경찰청장을 지낸 양이더(楊以德)를 각각 즈리 군무 독판과 성장에 임명하여 자신의 지반을 회복하려 했다. 하지만 장쭤린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쳐 결국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즈리 군무 독판 겸 즈리 성장의 자리는 장쭤린의 심복인 리징린에게 돌아갔다. 장쭝창은 장쑤성과 안후이성, 산둥성 토벌 총사령관(蘇皖魯三省剿匪总司令)과 산둥 군무 독판에 임명되어 산둥성을 지배하는 한편, 쉬저우로 진군하여 창장 유역의 즈리파 군벌들을 압박하였다.

펑위샹은 서북변방독판(西北边防督办)에 임명되어 차하르성과 쑤이위안성, 간쑤성 등 서북의 광대한 건조 지대를 차지하였다. 그동안 자신의 독자적인 지반이 없었던 펑위샹은 처음으로 영토를 획득했다. 하지만 알짜배기는 장쭤린에게 죄다 빼앗기고 아무 쓸모 없는 궁벽한 황무지만 얻은 셈이었다. 또한 펑위샹과 함께 싸운 후징위는 허난 독군으로 임명되었지만 허난성은 여전히 우페이푸가 쥐고 있었다는 점에서 결국 제 힘으로 차지해 보라는 얘기나 다름없었다.

산하이관을 놓고 장쭤린과 우페이푸의 싸움이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팽팽할 때 우페이푸를 한방에 무너뜨릴 수 있었던 것은 펑위샹의 정변 덕분이었다. 우페이푸의 실력은 만만찮은 반면, 장쭤린의 군비는 여전히 불충분하였다. 만약 펑위샹이 장쭤린에게 붙어서 우페이푸의 뒷통수를 치지 않았다면 제2차 펑즈 전쟁의 결과는 어떻게 흘러갔을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열매는 죄다 장쭤린에게 돌아갔으니 남 좋은 일만 시킨 셈이다. 펑위샹은 장쭤린에게 할 말이 많았지만 결국 군벌의 힘은 실력이었다. 장쭤린의 실력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이상 펑위샹은 일단 머리를 숙이고 권토중래하면서 기회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부하들은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면서 펑위샹 앞에서 공공연히 "장쭤린을 죽이겠다"고 떠들었다. 대경실색한 펑위샹이 "그와 같은 짓을 하면 펑톈파가 가만히 있겠느냐"면서 이들을 만류하였다. 또한 장쭤린 역시 의심이 많은 인물이므로 만약에 대비하여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쌍방의 긴장은 일촉즉발이었다. 이럴 때 돌발사건이 일어났다면 펑위샹의 국민군과 펑톈군 사이에 전면전으로 확대되었을 것이고 펑위샹은 패망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장쭤린과의 실력 차이를 절감하고 있는 그는 다른 쪽으로 눈을 돌렸다. 자신의 동맹자인 허난성을 깊숙이 침공하여 우페이푸와 싸우고 있는 후징위의 국민군 제2군을 지원하는 한편, 쑨원에게 북상할 것을 거듭 요청하였다.

제2차 펑즈 전쟁 직후(1924년 말)의 중국 정세. 천하는 크게 네개의 세력으로 재편되었다. 장쭤린의 동북, 펑위샹의 서북, 창장 중하류를 차지하고 있는 즈리파의 동남, 쑨원의 서남. 그 중에서도 가장 강하고 천하 대권에 가까이 간 것은 역시 장쭤린이었다.

장쭤린이 장쭝창을 앞세워 창장 유역의 즈리파 군벌들을 압박하자 여기에 대항하여 쑨촨팡이 우페이푸를 대신하는 새로운 실력자로 부상하였다. 원래 우페이푸의 부하였던 그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우페이푸로부터 독립한 후 창장 유역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의 세력은 단숨에 장쭤린, 펑위샹, 우페이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였다. 광둥성에서는 쑨원과 천중밍이 여전히 패권 싸움을 벌이고 있었고, 광시성에는 리쭝런의 신계계 군벌과 선훙잉(沈鴻英), 前 양광 순열사 루롱팅이 삼파전을 벌였다. 여기다 윈난 군벌 탕지야요까지 가세하여 광시성을 침공하는 등 그야말로 혼란의 극치였다. 또한 그동안 우페이푸의 영향권 아래 있었던 쓰촨성 역시 중소 군벌들이 자립하여 서로 한치의 땅이라도 더 먹겠다면서 치열하게 싸웠다.

특히 주목할 사실은 "다크 호스"로 등장한 산시 군벌 옌시산이었다. 오랫동안 산시성 밖으로 한발자국도 나오지 않은 채 산시성의 통치에만 만족하던 그가 드디어 야심을 드러냈다는 점이다. 옌시산은 우페이푸와 펑위샹, 장쭤린의 싸움을 기회삼아 진푸 철도가 관통하는 교통의 요충지인 스자좡을 점령하고 즈리파 군대의 북상을 가로막았다. 그의 군비는 충실했고 군대의 사기 또한 충천했다. 이런 숨은 실력자가 본격적으로 중앙의 싸움에 끼어든다면 앞날은 그야말로 예측불허였다. 

* 장제스, 상단군을 토벌하다

천중밍을 몰아내고 광저우를 탈환한 쑨원이었지만 여전히 그의 세력은 광저우와 그 주변에 지나지 않았다. 광둥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그를 "쑨대포(孫大砲)"라고 비웃었다. 중국에서 "대포"란 옛날 대포처럼 소리만 요란할 뿐 실속 없는 허풍쟁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쑨원 역시 말만 그럴싸할 뿐 실력도 없고 매번 실패만 거듭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과거의 쑨원이었다. 이제 그는 몇몇 정객들의 우두머리가 아니라 막강한 군대를 갖춘 실력자로 거듭나고 있었다. 소련의 원조를 받아서 설립한 황푸군관학교의 생도들로 구성된 이른바 "교군(校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적백내전의 영웅이자 20여년 뒤 장구펑에서 일본 관동군을 상대로 호된 일격을 먹였던 바실리 콘스탄티노비치 블류헤르와 장제스, 저우언라이가 황푸군관학교 생도들을 철저하게 훈련시키고 근대 전술을 가르쳐 오합지졸을 정예 부대로 거듭나게 하였다.

1921년 쑨원이 광저우에 자리잡은 이래 광저우를 지배하는 상인 세력들과의 갈등이 날로 심화되었다. 게다가 쑨원이 광둥성의 실력자인 천중밍과 대립하면서 재정 수입이 급격히 감소하여 1921년 4300만 위안에서 1924년에는 1200만 위안으로 1/4 정도로 줄어들었다. 심각한 재정난에 허덕인 쑨원은 광저우의 상인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였다. 상인들의 불만은 갈수록 고조되었다. 게다가 쑨원이 국공합작을 추진하여 공산당과 손을 잡은데다, 광저우 노동자들이 노조를 결성하고 상단에 대항하여 대규모 파업을 전개하자 적극적으로 지지하여 상인들은 큰 손실을 입었다. 상인들은 불복종 운동에 나섰다. 광저우 상단의 우두머리는 천롄보(陳廉伯)라는 매판 자본가였다. 그는 광둥 총상회 회장이자 영국계 금융인 후이펑 은행(匯豊银行)의 광저우 지점장을 역임하였고 영국의 후원을 받고 있었다. 광저우에 조계를 가지고 있던 영국, 프랑스 역시 소련과 결탁하여 反제국주의를 외치는 쑨원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 천롄보영국, 프랑스의 지원을 받는 한편, 쑨원 최대의 정적인 천중밍과 손을 잡고 쑨원을 몰락시키겠다는 음모에 착수하였다. 쑨원을 무너뜨린 후 군벌 세력을 몰아내고 광저우에 상인 정권을 수립하겠다는 속셈이었다.

물론 쑨원도 이들의 동태를 모를 리 없었다. 그는 장제스에게 지시하여 엄중히 감시케 하는 한편, 상단 세력에 반격할 기회를 엿보았다. 1924년 8월 10일 노르웨이 선적의 밀수선 한척이 광저우 황푸강에 들어오다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장제스에게 발각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장제스는 밀수선을 황푸군관학교로 강제로 끌고와서 압수수색을 하였다. 선적된 무기의 양은 소총과 권총 9천여정에 350만발에 달하는 탄약이었다. 쑨원은 이 무기를 즉시 압류하였다. 상단측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천롄보는 광저우의 혼란 속에서 상인들이 어쩔 수 없이 자위를 목적으로 무장한 것이므로 압류한 무기를 즉각 반환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쑨원이 강경하게 거부하자 상단은 시장을 철거하고 총파업에 들어갔다. 영국 정부도 간섭하여 만약 쑨원이 무력을 동원하여 상단을 진압할 경우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며 협박하였다.

쑨원은 영국 수상에게 내정 간섭을 중단하라는 항의 서한을 직접 보내는 한편, 상단측과 협상하여 무기의 절반을 돌려주되 그 대가로 벌금을 받기로 합의하였다. 때마침 제2차 펑즈전쟁이 시작되어 장쭤린과 우페이푸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쑨원은 이에 호응하여 북벌전쟁을 시작할 생각으로 광저우를 떠나 광둥성 북쪽의 사오관에서 대본영을 세웠다. 10월 10일, 광저우 거리에서는 우창 봉기 기념 행사가 진행되었다. 이 날 무기를 돌려 받으러 간 상단 대표단을 황푸군관학교 생도들을 위시한 학생, 노동자로 구성된 시위대가 가로막았다. 감정이 격앙되어 있던 쌍방이 결국 충돌하여 그 자리에서 수십여명의 사상자가 났다. 상단측은 쑨원이 약속을 위반했다면서 광저우의 상업지구를 폐쇄하고 곳곳에 자위대를 배치하여 본격적으로 일전을 준비하였다.

보고를 받은 쑨원은 즉시 광저우로 내려왔다. 라오중카이, 장제스는 상단의 무력 진압을 건의하였다. 쑨원은 광저우 전역에 게엄령을 선포하였다. 광둥성 경위군 사령관 우톄청(吳鐵城)이 3천여명의 군대를 끌고 광저우로 왔다. 또한 허잉칭이 지휘하는 황푸군관생도들로 구성된 교군 1개 여단 2천여명과 쑨원파 군벌 군대까지 도합 1만여명에 달했다. 총지휘는 장제스가 맡았다. 10월 15일 새벽 4시, 장제스의 명령에 떨어지자 상단군이 장악하고 있는 지역에 포탄과 기관총탄이 쏟아졌다. 오합지졸에 불과한 상단이 상대가 될리가 없었다.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고 쑨원군의 포위 공격에 상단군 병사들은 도망치다가 사살당하거나 무기를 던지고 투항하였다.

황푸군관학교 교장 시절의 장제스. 그는 광저우 상단 진압 과정에서 뛰어난 군사적 역량과 리더쉽을 증명하여 지위를 확고히 하는 한편, 쑨원의 전폭적인 신임을 얻게 되었다.

오후 2시 전투는 끝났다. 장장 10시간에 걸친 시가전 끝에 상단 본거지도 파괴되었고 우두머리인 천롄보는 홍콩으로 도주했다. 손실은 결코 적지 않았다. 재산상 피해는 5천만 위안에 달했고 군인, 민간인 포함하여 2천여명이 넘는 사상자가 났다. 광저우 시가지는 불바다가 되었다. 어쨌거나 상단을 평정함으로서 쑨원의 위상은 한층 높아졌고 그동안 변변한 땅 한뼘 없었던 그는 비로소 광저우를 자신의 지반으로 굳혔다. 특히 오합지졸 군벌 군대와 달리 장제스의 명령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황푸군관학교의 교군 병사들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이것이 앞으로 천하를 진동하게 될 장제스의 북벌전쟁 서막이었다.

* 큰 별 지다

쑨원이 상단을 평정하는 사이, 베이징에서는 펑위샹의 정변으로 즈리파 정권이 하루 아침에 무너지고 장쭤린이 북방을 평정하였다. 11월 1일 펑위샹과 돤치루이, 장쭤린은 연명으로 쑨원이 베이징으로 올라와서 국가 대계를 논하자고 요청하였다. 쑨원 역시 전문을 보내어 이들의 승리를 축하하면서 즉시 북상하겠다고 회답하였다.

하지만 중공과 소련 코민테른은 쑨원의 북상을 반대하였다. 쑨원이 군벌들과 타협하는 것은 소련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쑨원은 反군벌, 反제국주의를 외치면서도 보수 반동적인 봉건 군벌들과 손을 잡겠다는 것은 모순된 행동이자 그의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쑨원의 목적은 군벌들과 합작하여 분열된 중국에 통일 정부를 수립하고 내전을 끝내겠다는 것이었다. 상호 모순은 그 다음에 해결하면 된다고 여겼다. 이것은 그의 평생 숙원이었다. 하지만 군벌들은 쑨원의 명성을 이용하려는 것일 뿐, 권력을 나눌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이들은 앞에서는 쑨원과 모든 것을 논하겠다고 해놓고서 그의 동의도 없이 11월 22일 돤치루이를 국가 원수인 임시 집정에 추대하였다.

하지만 쑨원은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북상을 강행키로 결심하였다.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의 건강은 이미 악화되어 더 이상 시간이 없다는 초조함도 있었다. 측근인 후한민에게 대원수의 직을 맡기고 11월 13일 쑨원은 부인 쑹칭링과 함께 포함 융펑(永豊)에 올라탔다. 그에게는 인연이 깊은 군함이다. 융펑호는 홍콩과 상하이, 일본 고베항을 경유하여 12월 4일 톈진에 도착하였다. 그가 가는 곳마다 수많은 인파가 몰려나와 열렬한 환영을 하였다. 쑨원의 세력이 아무리 보잘 것 없고 성과가 미미하다 해도 그의 인기는 여전히 대단하였다. 이것은 내전 종식과 통일 정부의 수립을 바라는 중국 민중의 열망이기도 했다. 그런데 장쭤린과 펑위샹이 쑨원과의 협의 없이 돤치루이를 추대하자 상하이의 언론들은 군벌들의 속셈이 의심스러우며 쑨원이 북상한들 성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냉철하게 평가하였다.

톈진에 도착한 쑨원은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오랜 지병인 간질환이 간암으로 악화된 것이다. 그의 얼굴은 창백하고 고통스러운 표정이었다. 환영식에도 나갈 수 없어 비서인 왕징웨이가 대신 낭독하였다. 쑨원은 며칠 동안 톈진에서 휴식을 취한 후 베이징으로 가겠다고 말하였다. 하지만 돤치루이와 장쭤린은 노골적으로 쑨원을 무시하는 태도를 드러내었다. 쑨원은 중국이 열강들과 체결한 불평등 조약을 취소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돤치루이는 열강들의 지지를 얻을 요량으로 오히려 "일체의 조약을 존중하겠다"라고 일방적으로 선언하였다. 쑨원은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불평등 조약의 폐지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당신네들은 지위나 부귀만 탐하면서 외국인을 무서워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때문에 나를 환영한 것인가!"

12월 4일 톈진에서 쑨원은 장쭤린을 만났다. 장쭤린은 거만한 태도로 상좌에 앉아서 쑨원을 노골적으로 무시하였다. 쑨원은 불쾌했지만 장쭤린에게 승전을 축하한다고 말했다. 장쭤린은 "별 것 아닌 일에 축하할 필요가 있느냐"라고 이죽거렸다. 쑨원과 장쭤린의 회담은 본론에 들어가 보지도 못한 채 이렇게 끝나고 말았다. 펑위샹 역시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쑨원이 북상을 결심하게 된 것은 그의 간절한 요청 때문이었다. 하지만 막상 만나보니 환대는 하면서도 중요한 문제에는 애매모호한 태도로 얼버무렸다. 펑위샹이 쑨원의 북상을 요청했을 때와는 그 사이에 중앙의 정세가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돤치루이와 장쭤린 사이에 끼어있는 신세인 그로서는 쉽사리 쑨원의 입장을 지지하여 이들을 적으로 돌리 수 없는 처지였다.

말년의 쑨원. 중국과 타이완 양쪽 모두에게 위대한 국부로 추앙받는 유일한 인물이지만 그에 대한 재평가 목소리도 많다. 쑨원의 실제 업적과 성과에 비하여 지나치게 미화되었다는 것이다. 히자만 장제스가 쑨원이 죽은 지 4년도 채 되지 않아 중국 전토를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뛰어난 역량 덕분도 있었지만 국공합작, 황푸군관학교, 삼민주의 사상 등 쑨원이 말년에 남겨놓은 정치적 유산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군벌들에 대한 실망감과 급격하게 악화되는 병세에도 불구하고 쑨원은 돤치루이에게 중국 전역의 각계각층이 참여하는 국민회의를 소집하여 새로운 통일 정부를 수립하자고 제안하였다. 이것은 그의 마지막 양보였다. 하지만 이미 임시 집정의 자리에 올라서 권력을 차지한 돤치루이는 양보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자신을 지지하는 북양 군벌과 정객들을 모아서 소위 "선후회의(善後會議)"를 개최한 후 신정부의 조직 등 주요 안건을 일방적으로 통과시켜 버렸다. 격분한 쑨원은 광저우로 전보를 보내어 돤치루이의 가짜 회의에 참여하지 말라고 지시하였다.

쑨원으로서는 큰 뜻을 품고 병든 몸을 이끌고 어렵사리 베이징까지 올라왔지만 이기적인 군벌들에게 철저하게 농락당하기만 꼴이 되고 말았다. 남북이 평화적으로 타협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는 사라졌다. 1월 26일 록펠러 재단이 운영하는 베이징협화의원(현재의 베이징협화의학원)에서 쑨원의 수술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서구의 최신 의료 기술로도 그의 병세는 너무 깊어서 회복할 길이 없었다. 쑨원은 쿠웨이진(顧維鈞)의 사저가 있는 철사자후퉁(鐵獅子胡同)으로 거처를 옮겼다. 쿠웨이진은 베이징 정부 외교부장과 국무총리를 지냈으며 국제 사회에서는 "웰링턴 쿠"라고 불리는 명망있는 외교관이지만 베이징 정변이 일어나자 톈진으로 도망갔고 그의 집은 비어 있었다. 쑨원은 쑹칭링과 측근들을 데리고 여기서 기거하면서 치료를 계속 받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침상에서도 일어설 수 없게 되었다.

1925년 3월 12일 아침 9시 30분. 쑨원은 서거하였다. 그로서는 평생을 혁명에 몸 바쳤음에도 이루어 놓은 것 없이 떠나는 것이 실로 원통했을 것이다. 죽기 직전 그는 자신이 가장 신임하는 측근인 왕징웨이를 불렀다. 최후의 말은 "평화..투쟁...중국을 구하라"였다. 쑨원의 나이 59세. 그의 세번째 부인인 쑹칭링의 나이는 겨우 33세였다.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10년도 채 되지 않았다. 쑨원의 삶은 그야말로 칠전팔기였다. 비록 쑨원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던 서구의 관찰자들은 말로는 혁명을 한다면서도 매우 호화롭고 사치스럽게 살면서 헐벗고 굶주린 수많은 중국인들의 현실에 무관심하다고 비난했지만 막상 그가 축재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쑨원은 거액의 자금을 주무르면서도 단 한푼도 자신을 위해서 빼돌리지 않았던 것이다. 쑹칭링에게는 자신이 살던 집 한채와 자신의 명성을 물려주었을 뿐이었다. 이것은 축재를 당연시하던 여러 군벌이나 정치인들과는 대조적이었다. 쑨원의 혁명이 반쪽짜리였음에도 오늘날은 물론, 당시의 중국인들이 "혁명의 아버지"라 부르며 존경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쑨원의 유해는 레닌처럼 방부처리되어 베이징 교외에 있는 "비윈사(碧雲寺)"라는 절에 안치되었다. 그는 생전에 "내가 죽거든 난징 교외에 있는 쯔진산(紫金山)에 묻어달라"라고 말한 바 있었다. 장제스는 북벌이 성공한 뒤 쯔진산에 능원(陵園)을 만들고 이장하였다. 쑨원이 죽은 지 4년 후인 1929년 6월 1일의 일이다.

1929년 6월 1일 베이징에서 쯔진산으로 이장되는 쑨원의 운구

김명호 교수의 "중국인 이야기"에서는 쑨원의 유해와 관련된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장쭤린 휘하의 군벌 중의 한 사람인 장쭝창은 "혼세 마왕"이니 "구육 장군"이니 온갖 악명을 떨치던 인물이었다. 당대 여러 군벌 중에서도 가장 거칠고 무식했던 그는 믿는 것이 오직 총칼이었고 쑨원같은 지식인 계층은 말만 번드르할 뿐이라며 질색하였다. 그런데 쑨원이 죽은 지 1년 후 장제스가 유지를 받들여 북벌전쟁에 나섰다. 장제스의 기세에 장쭝창은 여지없이 대패하였다. 그는 화풀이로 "비윈사인지 뭔지에 있는 쑨원의 시신을 없애자"라면서 부하들을 이끌고 들이닥쳐서 온갖 행패를 부렸다.

그나마 쑨원의 유해가 능욕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쑨원의 경호원 출신이었던 탄후이촨(譚惠全)이라는 충실한 묘지기 덕분이었다. 그는 재빨리 유해를 가까운 동굴 속에 숨겼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장쉐량이 장쭝창을 불러서 호되게 야단쳤다. 이후 장제스가 베이징을 점령하고 장쉐량과 평화협정을 체결하였다. 비로소 쑨원의 유해도 비윈사로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었고 1년 뒤 난징에서 성대하게 이장되었다. 만약 탄후이촨의 기지가 아니었다면 쑨원은 묻힐 곳도 없었을지 모른다. 일세를 풍미했던 그는 죽어서도 파란만장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