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펑톈 제일의 지장, 거병하다
1925년 11월 21일 야심한 밤, 톈진에서 북동쪽 약 150km 떨어진 롼저우(灤州)의 열차역에서 급히 군사 회의가 열렸다. 회의의 주최자는 펑톈군 제3방면군의 부사령관 궈쑹링(郭松龄)이었다. 옆에는 그의 처인 한수슈(韓淑秀)도 함께 있었다. 회의장에는 알 수 없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사방에는 완전 무장한 위병들이 실탄이 장전된 소총을 들고 착검을 한 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회의장에 모인 사람은 100여명. 제3방면군 연대장급 이상의 주요 간부들이 모두 모였지만 서로 영문조차 모른 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궈쑹링의 안색만 살폈다. 한동안 정적이 흐른 다음, 궈쑹링은 침통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중화민국이 성립된 지 10여년이 지났지만 병화는 끊이지 않고 민생은 도탄에 빠져 있다."
그렇게 서두를 꺼낸 궈쑹링은 모든 잘못은 양위팅에게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양위팅은 노장군(老帅, 장쭤린)의 총애만 믿고 그동안 온갖 전횡을 일삼았다. 머리가 백발이 되도록 싸운 것은 우리인데 양위팅, 지앙덩선이 장쑤와 안후이의 독군이 되었다. 그들은 지금 장쑤, 안후이의 인민들에 의하여 추방되었으니 이제 우리가 싸워서 그 땅을 다시 찾아야 한다. 하지만 더 이상 그들을 위하여 싸우지는 않을 것이다."
궈쑹린의 격앙된 목소리에 그 자리에 모인 간부들은 아연실색하였다. 궈쑹린은 양위팅을 성토하고 있었지만 결국 그 뒤에 있는 장쭤린을 비난하는 것이었다. 그는 종이 한장을 꺼내어 탁자 앞에 놓았다.
"나는 이미 마음을 정하였다. 더 이상 국내의 전쟁에는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 동북의 토지는 넓고 산물은 풍부하다. 개간을 하고 둔전을 한다면 어떤 전쟁이라도 두려워 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 종이에는 두가지 방책이 있다. 어느 쪽이건 각자 원하는 곳에 서명하라. 첫번째 안은 군대를 동북으로 돌려서 농업에 종사하되 국내 전쟁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두번째 안은 계속 싸워서 무력 통일을 한다."
회의장의 긴장감은 한층 높아졌다. 사람들은 다들 어찌할 바를 몰라하면서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군대를 동북으로 돌리겠다는 것은 이 자리에서 반란을 일으켜 상전인 장쭤린에게 총부리를 들이대자는 말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후자를 선택하는 것은 궈쑹링의 거사를 반대한다는 말이므로 목숨을 담보할 수 없었다.
한동안 서로의 눈치를 보던 사람들은 하나 둘 일어서서 첫번째 안에 서명을 하였다. 하지만 사단장 4명이 마지막까지 서명을 거부하였다. 제3방면군은 총 6개 사단(제4사단, 제5사단, 제6사단, 제7사단, 제10사단, 제12사단)이 있다. 그 중에서 제4사단은 지금 이 자리에 없는 장쉐량의 부대였고 제6사단장은 궈쑹링이 겸임하고 있었으니 결국 휘하 사단장 전부가 반대한 셈이었다. 그 외에도 30여명의 장교들이 장쭤린을 배신할 수 없다고 끝까지 버텼다.
"반대하는 자는 지금 이 자리에서 나가도 좋다!" 궈쑹링의 말에 서명을 거부한 장교들은 자리에 일어서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물론 순순히 돌려보낼 생각은 없다.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총부리를 겨누어야 한다. 이들은 뒤따라 나간 위병들에게 모두 체포되어 톈진으로 보내졌다. 내부를 정리한 궈쑹링은 드디어 反펑톈의 기치를 올리고 거병하였다. 목표는 장쭤린의 사령부가 있는 펑톈. 약 8만명에 달하는 반란군이 파죽지세로 북쪽으로 진격을 시작하였다. 이것이 중국 역사에서 말하는 "반펑전쟁(反奉戰箏)"이다.
비록 쑨촨팡의 반격에 패하여 상하이, 난징을 빼앗기고 창장 이북으로 물러나기는 했지만 장쩌린은 여전히 동북의 패자이자 중국 최강의 실력자였다. 그의 지위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궈쑹링은 왜 이 시점에서 느닷없이 장쭤린 타도를 외치면서 반란을 일으킨 것인가. 게다가 그는 여느 인물이 아니었다. 펑톈군 최강이라 불리는 제3방면군의 수장이자 장쭤린의 후계자 장쉐량과는 일찍이 형제의 맹을 맺었으며, 장쭤린의 극진한 신임을 받으며 펑톈군의 군정 대권을 한손에 쥐고 있었다. 그런 그가 과연 무엇이 불만이었는가.
국내에서는 군벌 내전기의 중국 현대사 자체가 여전히 생소한 분야이기는 하나, JTBC의 <차이나는 도올>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장쭤린-장쉐량 정권을 다루면서 궈쑹링에 대해서도 잠시 언급한 바가 있다.(2016.5.1일자 9화 참고)
도올 김용옥 선생은 궈쑹링에 대하여 "당시 군벌로서는 보기 드문 민족주의자이자 애국 장군"이라면서 극찬을 한다. 하지만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주장은 "장제스, 장쭤린 등 군벌 정권은 친일 反민족, 여기에 대항하는 세력은 민족주의"라는 식의 평면적이고 이분적인 시각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 현대사가 전문이 아닌 도올 선생이 중국 군벌의 본질에 대한 충분한 이해없이 일반 중국인들이 막연하고 관념적으로 가지고 있는 역사관을 무비판적으로 답습한 것은 아닌가 싶다.
실제로 중국 학계는 과거에는 공산주의 특유의 유물론적인 사관에 따라 군벌을 단순히 半봉건, 反혁명적인 존재로서 외세와 결탁하여 국가 이권을 팔아먹고 민중을 착취하던 타도의 대상으로만 규정하였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는 군벌의 성격 또한 어느 한가지만이 아니라 다양한 면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쪽이다. 또한 장쉐량, 궈쑹링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그들의 드라마틱한 삶과 비극적인 말로에 대한 인간적인 동정심도 있다는 것 또한 간과해서는 안된다.
궈쑹링은 당시 군벌치고는 비교적 "개명"된 편에 속하기는 했으나, 그 또한 본질적으로는 군벌이며, 도올의 말대로 장쭤린과 일본이 결탁하자 궈쑹링이 반발했다는 식은 지나치게 단순하게 접근하는 것이다. 전쟁 명분을 위하여 상대를 친일, 매국이라고 비난하면서 내전 중지와 反외세, 민족주의를 외치는 것은 궈쑹링만이 아니라 당시 군벌들의 상투적인 행태였기 때문이다. 장쭤린 역시 1920년 안즈전쟁에서 즈리파와 손을 잡고 돤치루이를 공격할 때 상대를 "군벌"이라 부르면서 똑같은 주장을 한 바가 있다.
중요한 것은 허울 뿐인 구호가 아니라 과연 실제로 反외세 민족주의의 의지가 있었는가, 그런 행동을 했는가이다. 또한 장쭤린이 정말로 친일 반민족 군벌이었는가 역시 짚어볼 일이다. 이런 전후 맥락을 두루 살펴보아야만 비로소 궈쑹링의 반란이 진정으로 네셔널리즘의 성격을 가지는지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 궈쑹링과 장쉐량
궈쑹링의 고향은 펑톈 선징즈(深井子, 현재의 선양시 훈난 구)이다. 그는 장쭤린이나 펑위샹, 돤치루이 등 청나라 말기 젊고 야심 넘치던 한족 출신의 신식 군인들과 마찬가지로 먹고 살기에도 급급한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비록 장줘상, 장징후이, 탕위린처럼 소시적부터 장쭤린과 호형호제하면서 함께 도적질을 하던 녹림 출신은 아니었지만 궈쑹링 또한 어엿한 펑톈 출신이므로 다른 군벌들에 비하여 유별나게 폐쇄적이고 출신을 따지면서 외지인을 배척하던 펑톈파에서 결코 아웃사이드라고 할 수는 없었다.
어린 시절 매우 빈한했던 그는 당초 과거 시험을 보아 문관이 되기를 원했으나 포기하고 대신 군인이 되기로 결심하였다. 1904년 자희신정이 선포되면서 전통적인 과거제도가 일제히 폐지되었고 중국 각지에서는 신식 군사 학교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1905년 펑톈에서도 펑톈 육군소학당이 설립되었다. 참고로, 육군소학당(陆军小学堂)이란 일본의 육군유년학교를 흉내낸 것으로, 장교를 꿈꾸는 청소년을 위하여 신식 학문과 기초 군사 교육을 실시하였다. 만15세부터 만18세 사이(최고 20세까지)의 학생들이 입교할 수 있었다. 수업 기간은 3년, 정원은 학교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략 100~300여명 정도였다. 학비가 저렴하고 약간의 생활비도 지급되는데다 무엇보다도 전통 학문에서 벗어나 신식 교육을 받을 수 있어 당시 야심 만만하고 혈기 넘치는 가난한 한족 출신의 많은 젊은이들이 지원하였다.
또한 이곳을 졸업한 후 중등과정에 해당하는 육군중학당이나 육군속성학당, 육군강무당에 진학하여 초급 장교로 임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고급 지휘관과 참모를 양성하기 위한 청나라 최고 군사 학부로서 베이징 육군대학당(육군대학)이 있었다. 그러나 신군의 규모가 폭발적으로 팽창하면서 장교의 수요에 비하여 공급이 턱없이 부족했기에 소학당만 졸업하고 바로 초급 장교로 임관하는 예도 많이 있었다. 군벌 내전기 중국군의 수준이 낮았던 가장 큰 이유 또한 잘 훈련된 간부가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궈쑹링은 이미 22살이었기에 원래는 육군소학당에 입학할 수 없었으나, 입교 성적이 매우 우수하여 특별히 입교가 허락되었다. 그는 3년 과정을 1년만에 마친 다음 성경장군(盛京将军, 청나라 시절 동3성의 군정과 내정을 총괄하는 정1품의 지방관으로 1907년 관제 개편으로 동3성 총독으로 개칭된다.) 자오얼쉰(趙爾巽)의 직접 추천을 받아서 펑톈 육군속성학당에 입교하였고 1년 뒤에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그리고 펑톈에 주둔한 북양군 제3진의 초관(哨官, 소대장)에 임명되어 군문에 들어섰다. 이후 자신을 신임하는 동3성 총독 주칭란(朱慶瀾)이 쓰촨 총독이 되어 임지로 떠나자 곁에서 수행하여 쓰촨 총독부의 경비를 맡은 관대(管带, 대대장)이 되었다.
당시 신군 내부에는 "멸만흥한"의 혁명 사상이 한창 유행처럼 퍼져나가고 있었다. 궈쑹링 또한 다른 젊은 신군 간부들처럼 혁명에 동조하였고 중국 동맹회에 가입하였다. 1911년 10월 10일 우창 봉기가 일어났을 때 궈쑹링도 청두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펑톈으로 돌아온 그는 동북에서 반청 혁명을 일으키겠다면서 무장 봉기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펑톈 순방영 통령으로 동북의 치안을 맡고 있던 장쭤린이 발빠르게 대응한 덕분에 동북의 혁명파 인사들은 거사를 시도조차 해보지 못하고 모조리 체포되거나 살해되었다. 궈쑹링 역시 장쭤린에게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으나 주변의 탄원 덕분에 운좋게 목숨을 건지고 석방될 수 있었다. 여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람이 바로 궈쑹링에게 평생의 반려자가 되는 한수슈였다. 그녀는 부유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당시 중국 여성으로서는 그야말로 보기 드물게 대학 교육까지 마친 대표적인 신여성이었다. 또한 여성 교육과 빈민 구제에 앞장서는 등 펑톈 사회에서 상당한 명망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청조가 무너지고 위안스카이가 대총통이 되면서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궈쑹링도 사면되어 베이징 장교연구소(北京将校研究所)에 입교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 다시 펑톈으로 돌아와 펑톈 도독부 참모가 되었으나 얼마 뒤 사직하고 베이징 육군대학에 입학하였다. 1916년에 졸업한 그는 교관으로 활동하다가 위안스카이가 죽고 광저우에서 호법정부를 수립한 쑨원이 북양 정권의 타도를 외치면서 "호법 전쟁"을 일으키자 궈쑹링 또한 광저우로 내려가 쑨원 진영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호법정부가 분열되고 쑨원이 실각하여 일본으로 망명하자 실망한 그는 펑톈으로 되돌아 왔다.
당시 동3성의 주인은 장쭤린이었다. 과거 장쭤린에게 체포되어 처형당할 뻔했던 궈쑹링으로서는 서로 악연이 있었지만 두 사람 모두 지난 과거는 더 이상 마음에 두지 않았다. 중원 진출에 야심을 두고 있었던 장쭤린은 우수한 청년 장교들을 확보하기 위하여 1919년 3월 동북 육군강무당(东北陆军讲武堂)을 설립하였다. 당시 펑톈군은 장쭤린의 사병 집단이었다. 구식 순방영과 마적들을 모아서 만든 군대였기에 질적으로 형편없었다. 간부들 역시 태반이 마적 출신이거나 청말의 구식 군인들이라 거칠기만 할 뿐, 근대전에 대한 소양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런 군대로 막강한 북양군을 상대하겠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얘기였다. 베이징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근대적인 군사 소양을 두루 갖춘 궈쑹링은 그야말로 천군만마와 같은 인재였다. 장꿔린은 궈쑹링을 중교(중령) 참모 겸 전술 교관에 임명하여 생도들의 훈련을 맡겼다.
동북 육군강무당은 전국의 수많은 군사 학교들 중에서도 톈진 육군강무당, 윈난 육군강무당과 함께 군벌 시기 중국 3대 군사 학교의 하나로 손꼽힐 정도였다. 교육기간은 1년, 기수당 입학 정원은 당초 220여명에서 꾸준히 확대되어 1920년대 말에 오면 2천여명이 넘었다. 1919년부터 1931년 9월 18일 만주 사변으로 폐교될 때까지 11년 동안 1만여명에 달하는 졸업생을 배출하여 펑톈군의 중핵을 차지하게 된다. 같은 시기 다른 군사 학교들이 극심한 재정난으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한 것에 비하여 역사도 짧은 동북 육군강무당이 전국적인 명성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은 장쭤린의 아낌없는 후원 덕분도 있지만 생도들을 엄격하게 훈련시킨 궈쑹링의 역할도 컸다고 하겠다.
궈쑹링이 맡은 1기 학생들 중에는 장쭤린의 장남 장쉐량도 있었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이었다. 궈쑹링 37살, 장쉐량 21살이었다. 포병과 생도였던 장쉐량은 군사에 조예가 깊고 매사 솔선수범하면서 타인은 물론, 자신에게도 엄격했던 궈쑹링의 모습에 큰 감명을 받았다. 술과 도박에 찌들어 있던 펑톈군의 여느 장교들과는 너무나 달랐던 것이다. 동북에 주둔한 관동군도 궈쑹링에 대하여 "한번 결심하면 반드시 실행하고 두뇌가 명석하다. 품행이 방정하고 술과 담배를 즐기지 않고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는다. 중국의 고관으로는 보기 드문 인물이다."라고 높이 평가했을 정도였다. 장쉐량은 궈쑹링과 형제의 맹을 맺고 스승이자 큰형으로 모셨다. 1년 후인 1920년 장쉐량이 강무당을 졸업하였고 장쭤린이 동3성 순열사 경호대의 여단장에 임명하자 장쉐량은 궈쑹링에게 자신의 참모장 겸 제2연대장을 맡겼다.
얼마 뒤 허베이성에서 돤치루이와 우페이푸 사이에 안즈 전쟁이 폭발하였다. 중원 진출의 호기로 여긴 장쭤린은 즉각 병력을 출동시켰다. 궈쑹링도 장쉐량을 대신하여 1개 연대를 이끌고 산하이관을 넘었다. 톈진 주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그는 안후이파의 룽지광(龙济光)이 지휘하는 진무군(振武軍) 2개 여단을 과감하게 기습하여 단숨에 섬멸하였다. 숫적으로 우세했던 적군은 우왕자왕하다가 무너져 내렸다. 그동안 펑톈군 간부들은 실전 경험이 없는 궈쑹링에 대하여 "이론에 능하다고 싸움을 잘 한다고 할 수 없다"라면서 깔보았으나 그의 첫 데뷔전은 주변의 질투 어린 말을 한방에 쏙 들어가게 하였다.
궈쑹링을 눈여겨 본 장쭤린은 새로이 4개 혼성 여단을 만들면서 장쉐량을 제3 혼성여단에, 궈쑹링을 제8 혼성여단으로 임명하고 궈쑹링에게 두 여단의 실질적인 지휘를 맡겼다. 장쉐량을 자신의 후계자로서 실력을 키워줄 생각이었던 장쭤린은 궈쑹링을 장쉐량의 든든한 후견인으로 삼은 것이었다.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부족했던 장쉐량 역시 궈쑹링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무슨 일이건 그가 하자고 하는대로 따랐다. 장쉐량은 주변 사람들에게 입버릇처럼 "내가 무신(茂宸, 궈쑹링의 호)이고 무신이 곧 나다(我就是茂宸,茂宸就是我)" 라고 말하였다. 궈쑹링 역시 장쉐량의 신뢰에 부응하여 제3, 제8 여단을 철저하게 훈련시켜 펑톈군 최강 부대로 만들었다.
1922년 4월 장쭤린과 우페이푸 사이에서 제1차 펑즈 전쟁이 폭발하였다. 노련한 우페이푸 앞에서 오합지졸에 불과한 펑톈군은 감히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결국 장쭤린의 뼈저린 패배로 끝났다. 산하이관을 넘은 10만 펑톈군의 대부분이 괴멸했지만 그나마 부대의 건재를 유지한 채 철수에 성공한 부대는 장쉐량, 궈쑹링이 지휘하는 두개 여단이었다. 만약 궈쑹링의 용전으로 우페이푸의 추격을 지연시키지 못했다면 장쭤린은 산하이관으로 돌아오지도 못했을 것이고 동북도 지키지 못했을 것이었다.
군대의 전투력이란 단순히 머릿수와 우수한 무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며, 강도떼를 끌어모아 만든 펑톈군이 얼마나 허약한지 뼈저리게 절감한 장쭤린은 당장 군대의 전면적인 개조를 시작하였다. 그 중심에 선 사람이 펑톈군의 두 대들보라고 할 수 있는 양위팅과 궈쑹링이었다. 펑톈군 총참모장이었던 양위팅은 동3성 병공창 독판을 겸임하여 최신 무기와 장비의 확보에 나섰고 궈쑹링은 육군 정리처 참모장 대리로서 정군(整軍) 작업에 착수하였다. 궈쑹링은 숫자만 차지할 뿐 쓸모가 없는 노약자와 부상병을 대거 전역시키고 나이가 젊고 신체가 건강한 사람만 남겼다. 자희 신정 이래 아무런 통일성 없이 주먹구구로 운영되던 사단, 여단, 비정규 부대들은 모두 장쭤린의 동북 보안사령부 산하로 배속되어 여단 편제의 정규 부대로 통일되었다. 또한 무기를 통일하고 병력과 장비를 충실하게 하였으며 포병 화력을 강화하였다. 군기를 엄정하게 하고 훈련을 더욱 강화함으로서 펑톈군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중국 최강의 군대로 빠르게 거듭났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인재의 확보였다. 궈쑹링은 능력 있고 혈기 왕성한 청년 간부들을 양성하기 위하여 자신과 친분이 있는 베이징 육군 대학 출신을 비롯하여 바오딩 군관학교, 윈난 강무당 등 국내 유수의 군사 학교를 졸업한 인재들을 대거 초빙하여 교관과 지휘관으로 임명하였다. 펑톈군에서 연대장급의 절반, 대대장급 이하의 중하급 장교는 모두 궈쑹링이 임명한 사람들이었다. 펑톈군 내부에서 궈쑹링의 세력은 비약적으로 커져서 이른바 "육대파"라고 부르는 거대한 파벌을 형성하였다. 육대파란 궈쑹링을 비롯한 베이징 육군대학 출신이거나 이들에게 군사 교육을 받은 동북 강무당 출신들을 일컬는다. 이들의 정점에는 장쉐량과 궈쑹링이 있었고 장쉐량의 강력한 정치적 기반이 되었다. 몇 년 뒤 장쭤린이 관동군의 음모로 비명횡사하자 장쉐량은 육대파 청년 장교들의 지지를 받아 양위팅, 장작샹 등 다른 계파들을 견제하였고 권력의 공백이 된 동북 정권을 신속하게 승계하게 된다.
* 펑톈군의 모순과 반목
펑톈군은 외형적으로는 크게 강화되었지만 내부의 모순과 반목은 오히려 심화되었다. 이 시기 펑톈군에는 크게 3개의 파벌이 있었다. 첫번째는 "구파(舊派)". 과거 장쭤린의 마적 형제이거나 순방영 시절의 부하들로, 대표적인 인물이 장줘샹(張作相), 장징후이(張景惠), 우쥔성(吳俊陞), 마좐샨(馬占山) 등이었다. 이들은 비록 변변한 학식도 없고 무능하기 짝이 없는 인물들이었지만 장쭤린과 두터운 친분을 통하여 펑톈의 원로로서 대접을 받았고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두번째는 양위팅의 "사관파"로 일본 육사 출신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그리고 세번째가 장쉐량, 궈쑹링의 "육대파"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의 대립과 갈등은 심화되었고 특히 군의 인사권을 한손에 쥐고 있는 궈쑹링을 질시하고 견제하였다.
제2차 펑즈 전쟁을 전후하여 펑톈군 내부의 갈등은 점점 표면화되었다. 갈등의 중심에는 양위팅과 궈쑹링이 있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양위팅은 스스로 "작은 제갈량"이라고 할만큼 두뇌가 명석했으나 장쭤린의 신임과 자신의 역량을 과신하여 주변 사람들을 무시하고 권력을 함부로 전횡하였으며 사생활이 좋지 못하여 도덕적으로도 많은 비난을 받았다. 또한 그는 중원 진출을 꿈꾸는 장쭤린의 야심에 적극적으로 찬성하였다. 반면, 궈쑹링은 적어도 충분히 때가 무르익기 전까지는 함부로 출병해서는 안되며 우선 동북을 굳히는데 주력해야 한다는 쪽이었다.
양위팅도 오만하고 독선적이었지만 궈쑹링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는 부정부패한 양위팅과 정반대로 청렴하고 강직하며 사생활이 깨끗하여 주변의 존경을 받았으나 항상 자기 생각대로 일을 처리하고 자신과 친분이 있는 사람만 가까이 하여 많은 사람들의 불만 또한 샀다. 두 사람 모두 자기만 옳다는 식이고 타협은 없으니 갈등은 더욱 커질 수 밖에 없었고 두 사람은 점점 서로를 눈의 가시마냥 미워하였다.
하지만 분열의 가장 큰 원인은 결국 장쭤린에게 있었다. 그는 법과 제도가 아닌 개인적인 친분과 인간 관계로 동북을 다스렸다. 그는 봉건적인 면을 일소하려고 노력했지만 정작 중심에 있는 자신은 봉건성을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모습은 장쭤린만이 아니라 다른 군벌들도 결코 다르지 않았다. 심지어 백여년이 지난 지금도 구석구석에 남은 채 중국을 좀 먹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소위 "꽌시(關係)"라고 부르는 관료 사회의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인맥 문화이다. 인맥이 없으면 되는 일이 없고 인맥이 있으면 안되는 일이 없다는 것이 바로 수천년 동안 내려온 중국의 뿌리깊은 인간 관계이다. 그런 점에서 비록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워졌을지 모르나, 여전히 중국인들의 의식 세계는 청말의 연장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제2차 펑즈전쟁에서 장쭤린은 전군을 6개 군으로 편성하였다. 궈쑹링은 제3군의 부사령관에 임명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제1군까지 맡아서 즈리군이 지키는 산하이관 돌파를 총지휘하였다. 중원으로 향하는 최대의 관문인 산하이관을 얼마나 신속하게 돌파하는가에 전쟁의 승패가 달려 있었다. 산하이관을 지키는 수비장은 우페이푸 휘하의 맹장 펑수신이었고 최정예 부대의 하나인 제15사단이 배치되어 있었다. 9월 말부터 시작된 전투에서 근 한달 동안 치열한 일진일퇴가 벌어졌고 우페이푸가 제3사단을 이끌고 당도하면서 전황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었다. 궈쑹린은 직접 제27여단을 이끌고 선두에 서서 지우언커우(九問口)를 점령하고 즈리군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성공하였다. 배후가 위협받은 즈리군은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여기다 펑위샹이 베이징에서 정변을 일으키면서 승패는 결정났다.
산하이관 전투의 승리는 전적으로 궈쑹링의 활약 덕분이었다. 만약 그가 저우언커우를 점령하지 못했더라면 펑위샹 역시 정변을 일으키지 못했거나 실패로 끝났을 것이다. 우페이푸는 반격에 나서 펑톈군을 격파한 다음, 여세를 몰아서 동북으로 진격했을지도 모른다. 궈쑹링의 전공은 매우 컸다. 하지만 당시 작전 회의에서 궈쑹링이 저우언커우 공략을 주장했을 때 제1군의 지휘를 맡고 있던 지앙덩선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쳤다. 지앙덩선은 양위팅과 마찬가지로 일본 육사 출신으로 "사관파"였다. 두 사람은 이전의 해묵은 감정까지 드러내면서 심한 입씨름을 하였고 격분한 궈쑹링은 멋대로 군대를 이끌고 전선을 이탈하였다. 이는 엄연한 항명이자 적전 도주로 볼 수도 있었다. 장쉐량이 중간에서 무마하지 않았더라면 궈쑹링은 당장 군법 재판에 회부되어 목숨도 부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제2차 펑즈전쟁의 승리로 장쭤린은 중원 진출의 꿈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세력이 크게 팽창하였다. 부하들 역시 경쟁적으로 자기 지반을 확장하는데 열을 올렸다. 톈진을 점령한 제2군 리징린(李景林)은 즈리 독군에 임명되었고 장쭝창은 자신의 고향인 산둥성을 차지하였다. 궈쑹링도 장쑤성이나 안후이성 가운데 어느 한 성을 차지하기를 원하였다. 당초 장쭤린은 지앙덩선을 장쑤 독군에, 궈쑹링을 안후이성 독군에 임명할 생각이었으나 결국 장쑤 독군이 된 사람은 양위팅이었다. 또한 지앙덩선이 안후이성 독군에 임명되면서 궈쑹링은 논공행상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게 되었다. 당연히 자신이 안후이성 독군이 되리라 생각하고 부임 준비까지 했던 궈쑹링으로서는 실망이 컸다.
궈쑹링은 장쭤린에게 자신이 독군 자리를 포기하는 대신 장쉐량을 즈리 독군으로, 리징린을 산둥 독군으로 임명할 것을 건의했지만 이 또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장쉐량과 궈쑹링은 경유주군사령관(京榆駐軍司令)이 되어 제3방면군을 이끌고 톈진에 주둔하였다. 베이징과 톈진, 산하이관(유관榆關이라고도 한다) 일대의 수비를 맡았다는 점에서 군사적으로는 중요한 요직임에 틀림없으나 어쨌든 다른 경쟁자들이 한 성의 주인이 된 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궈쑹링은 자신이 밀려난 것이 장쭤린의 측근인 양위팅이 농간을 부린 탓이라고 여겼다. 그의 생각에 우페이푸와의 싸움에서 목숨을 걸고 병사들을 지휘하여 산하이관을 돌파한 것도 자신이었고 즈리군을 무너뜨린 것도 자신이었다. 도대체 양위팅은 후방에 앉아서 무엇을 했던가. 장쉐량은 궈쑹링에게 기다리다보면 기회가 오지 않겠냐고 다독였지만 그의 마음 속에 한번 일어난 불만은 꺼지지 않았고 분노의 화살은 결국 장쭤린에게 향하였다.
1925년 9월 궈쑹링은 일본으로 떠났다. 10월 18일부터 미야기 현(宮城)에서 실시 예정이었던 일본 육군의 추계 대연습에 관전무관으로 참석하기 위함이었다. 궈쑹링 이외에도 펑위샹, 장쭝창 등 여러 군벌이 파견한 십여명의 장교들도 함께 하였다. 그런데 때마침 남방의 정세가 심상치 않았다. 10월 7일 쑨촨팡이 남방 5성의 즈리파 군벌들을 규합하여 5성 연합군을 결성하고 반격에 나선 것이다. 양위팅과 지앙덩선은 대패하여 소수의 측근만 데리고 북쪽으로 달아났고 10월 16일에는 상하이가, 21일에는 난징이 함락되었다. 쑨촨팡은 여세를 몰아서 쉬저우로 육박하는 등 전황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였다.
장쉐량은 궈쑹링에게 급히 전보를 보내어 상황이 급박하니 당장 돌아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궈쑹링은 건강을 핑계로 일본에서 좀 더 요양하기를 원한다면서 귀국을 거절하였다. 중국의 일부 학자들은 "궈쑹링은 일본으로 가기 전에 이미 모반을 꿈꾸고 있었다"라고 주장하지만, 전후 상황을 볼 때 적어도 이 때까지는 그가 비록 마음 속에 불만은 있었어도 어떤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고 볼만한 부분은 없다. 또한 장쉐량이 거듭 귀국을 요청하자 결국 궈쑹링도 고집을 꺾고 "곧 돌아가겠다"라고 화답하였다.
그런데 며칠 뒤 펑위샹의 심복으로 마찬가지로 일본에 관전 무관으로 파견된 한푸쥐(韓復榘)가 묵고 있는 숙소에 누군가가 몰래 방문하였다. 궈쑹링이었다. 그는 일본 참모본부에 있는 중요한 사람으로부터 들었다면서 한푸쥐에게 "장쭤린이 일본과 밀약을 맺고 21개조 요구를 받아들이는 대가로 대량의 군사 원조를 얻어 펑위샹을 공격하려고 한다"라고 말하였다. 또한 장쭤린이 욕심에 눈이 멀어서 나라를 팔고 외국군대를 끌어들이려고 한다고 분개하면서 자신은 국가를 위해 몸을 바칠 뿐, 개인의 주구가 아니기에 양심을 버리고 명령에 복종할 수 없다고 하였다. 궈쑹링은 만약 장쭤린이 펑위샹을 공격한다면 자신도 결코 묵과하지 않겠다면서 한푸쥐에게 비밀 동맹을 제안하였다.
여기서 궈쑹링이 말하는 "21개조 요구"란 십여년 전인 1915년 일본 오쿠마 시게노부 내각이 위안스카이 정권에 강요했던 그것이다. 당시 대내외적으로 위기에 직면해 있던 위안스카이 정권은 일본의 압력에 굴복했으나 오히려 국내 여론이 극도로 악화되면서 위안스카이 정권 붕괴에 일조하였다. 특히 그 중에서도 산둥 권익의 포기는 중국 최대의 민족 운동인 5.4운동으로 폭발하는 등 북양 정권 시절의 대표적인 친일 매국 조약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1922년 워싱턴 조약으로 열강들 사이에 "중국 내 기회 균등의 원칙"이 체결되면서 일본도 산둥 반도를 중국에 반환하는 등 21개조 요구는 대부분 유명무실해진 상태였다. 이제와서 장쭤린이 새삼스레 일본과 밀약을 맺어 21개조 요구를 수락했다는 것은 중국인이라면 분명 천인공노할 일이었다.
하지만 과연 사실인가. 궈쑹링은 한낱 풍문을 들었다고 했을 뿐, 물적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또한 당시 장쭤린과 일본 사이에 실제로 밀약이 있었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이를 뒷받침할 구체적인 근거는 없기 때문이다. 정말로 장쭤린과 일본의 밀약이 거병의 가장 큰 이유였다면 궈쑹링이나 펑위샹은 어째서 그 사실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민심을 얻어서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려고 하지 않았는가.
만약 그러했다면 가뜩이나 중국 전역에서 反펑톈, 反제국주의 분위기가 고조되어 있는 가운데 장쭤린은 정치적으로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을 것이며 일본 역시 열강들의 비난을 우려하여 궈쑹링의 반란에 쉽사리 개입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후의 결말은 어떻게 흘러갔을지 모른다. 하지만 궈쑹링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진의 여부에 의문을 품게 하며, 궈쑹링에 대한 인간적인 동정과 그의 반란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나중에 누군가에 의하여 만들어진 얘기인 것은 아닐까. 펑위샹의 회고록 <나의 인생(我的生活)>에서는 궈쑹링이 한푸쥐를 먼저 찾아왔다고 했지만 어쩌면 그 반대였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궈쑹링이 한푸쥐와 접촉하여 장쭤린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였고 펑위샹과 손을 잡기로 했던 것은 틀림없다. 궈쑹링의 반란에 과연 민족주의적인 면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짚어보기로 하겠다.
궈쑹링이 귀국하여 톈진의 사령부로 돌아온 것은 10월 24일이었다. 하지만 이 때까지도 당장 거병을 준비했던 것은 아니다. 주변 정세는 일촉즉발이었다. 남쪽에서는 쑨촨팡에게 패퇴하여 창장 하류의 모든 지반을 상실한 채 쉬저우를 놓고 대치하고 있었고 서쪽에서는 펑위샹이, 서남쪽에서는 허난독군 위에웨이준이 쑨촨팡과 동맹을 맺고 장쭤린의 측면을 위협하였다. 후베이 성으로 쫓겨난 우페이푸 역시 재기를 꾀하면서 반격의 기회를 노리는 등 그야말로 사방이 모두 적이었다.
장쭤린은 심복인 쑤란저우(許蘭洲) 등을 펑위샹의 사령부가 있는 바오터우(包頭)로 보내어 화평 교섭에 나서는 한편, 궈쑹링과 리징린에게는 비밀 전보를 보내어 펑위샹을 언제라도 공격할 태세를 갖추라고 지시하였다. 하지만 궈쑹링과 리징린은 펑위샹과의 싸움에 반대하였다. 궈쑹링의 처 한수슈와 펑위샹의 처 리더취안(李德全)은 같은 기독교도이자 옌징 대학(燕京大学)에서 함께 공부했던 사이였다. 이렇다보니 궈쑹링으로서는 펑위샹에게 총부리를 겨눌만한 이유가 없었다. 리징린 역시 펑위샹이 먼저 공격하지 않는 한 모처럼 차지한 자신의 영토 안에서 전쟁을 벌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두 사람은 장쭤린 몰래 펑위샹과 서로 공격하지 않겠다는 부전 동맹의 밀약을 맺었다.
또한 궈쑹링은 이전부터 장쭤린의 관내 출병에 대하여 시기 상조라면서 반대하고 있었다. 동북은 풍요롭지만 천하를 경영할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장쭤린 정권은 그동안 다른 군벌에 비하여 재정적으로 비교적 안정을 누리고 있었으나 제2차 펑즈 전쟁과 영토의 확장, 거듭되는 전쟁으로 군사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거의 파산 직전에 내몰리고 있었다. 이 때문에 궈쑹링 이외에도 동북의 재정을 맡고 있던 왕융장(王永江)을 비롯하여 많은 관료들과 간부들은 장쭤린의 출병에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장쭤린은 고집을 꺾지 않았고 펑위샹과의 교섭 또한 실패하고 말았다. 장쭤린은 궈쑹링과 리징린에게 밀전을 보내어 펑위샹을 공격하라고 명령하였다. 궈쑹링이 듣지 않자 펑톈으로 돌아와서 명령을 기다리라고 하였다. 궈쑹링과 함께 톈진에 있었던 장쉐량도 자신이 안전을 보장할테니 우선 펑톈으로 가서 아버지에게 본심을 말하라고 권유하였다.
하지만 궈쑹링으로서는 이대로 펑톈으로 갔다가는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만약 자신이 펑위샹과 밀약을 맺었다는 정보가 장쭤린에게 새어나갔다면 목숨도 부지할 수 없는 처지였다. 고심하던 궈쑹링은 결국 거병을 결심하고 장쉐량을 설득하였다. 장쭤린 타도에 장쉐량을 앞세울 생각이었던 것이다. 궈쑹링은 장쉐량 앞에서 장쭤린과 양위팅의 실정을 비난하면서 장쭤린을 하야시키고 장쉐량이 그 자리에 앉아서 동북 정권을 개조하자고 건의하였다. 그동안 궈쑹링을 철썩같이 신뢰하고 있었던 장쉐량은 크게 놀랐다. 하지만 그는 궈쑹링의 편을 들어서 아버지를 적으로 돌리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궈쑹링을 설득하거나 체포하지도 않았다. 그는 입을 다문 채 등을 돌려서 도망치듯 기차를 타고 펑톈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아버지 장쭤린에게 궈쑹링의 역심을 보고한 것도 아니었다. 장쉐량으로서는 두 사람 사이에서 번민을 했겠지만 이유가 어떻든 결과적으로 그의 우유부단함이 최악으로 치닫게 한 셈이었다.
장쉐량의 설득에 실패한 궈쑹링은 지병인 요도염을 치료한다는 명목으로 톈진의 일본인 병원에 입원하였다. 만약 장쭤린이 그의 역심을 알고 당장 체포령을 내렸다면 궈쑹링은 거병을 해보지 못한 채 실패했을 것이다. 그는 병원에 입원한 채 심복들을 불러서 반란을 모의하고 병력의 이동을 지시하였다. 또한 펑위샹에게도 심복을 보내어 밀약을 맺었다. 펑위샹은 서북을, 리징린은 즈리성과 러허성을, 궈쑹링은 동3성을 각각 차지하되 장쭤린을 타도한 후 동북으로 되돌아가 더 이상 중원으로 진출하지 않고 오직 동북의 경영에만 힘쓰기로 한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서로의 세력권을 존중한다는 상호 불침입, 불간섭 조약인 셈이었으나 궈쑹링은 장쭤린을 공격하는데 펑위샹의 힘을 빌리지는 않았다. 자신의 실력이라면 장쭤린 정도는 손쉽게 이길 수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펑위샹의 세력이 동북으로 들어오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지만 결과적으로 본다면 산전수전을 겪은 장쭤린을 지나치게 얕본 셈이었다. 말로는 "인민을 위해서 거병한다"고 하면서도 궈쑹링은 자신의 지반을 최우선시하는 군벌의 한계를 벗어던지지 못한 것이다.
모든 준비를 마친 그는 휘하의 제3방면군을 이끌고 란저우로 향했다. 그리고 11월 21일 밤 군사 회의를 개최하고 장쭤린 타도를 선언하였다. 그에게 더 이상 돌아갈 길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