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민 정부의 분열
1925년 8월 20일 오전 10시. 쑨원의 오랜 측근이자 국민정부 재정부장인 랴오중카이(廖仲愷)가 온 몸에 네 발의 총탄을 맞고 암살당하였다.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에 출석하기 위하여 국민당 중앙당 건물에 들어서다가 정문에서 저격당한 것이다. 그는 급히 광둥대학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나이 48세. 쑨원이 죽은 지 겨우 4개월만에 벌어진 이 사건은 그의 유산이라 할 수 있는 광저우 혁명정부의 복잡한 사정과 분열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랴오중카이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중국계 이민 2세대였다. 부모는 광둥성 출신으로 돈을 벌기 위하여 미국으로 건너가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던 당시 수많은 중국인 중의 하나였다. 그는 1893년 17살의 나이로 중국에 귀국하였고 홍콩에서 공부하다가 1902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에 입학하였다. 이 때 그는 일본에서 공부하던 많은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반청혁명사상에 눈을 떴고 일본에 망명 중이던 쑨원의 동맹회에 가입하였다. 왕징웨이와 함께 초창기부터 쑨원과 혁명을 함께 해 온 그는 쑨원의 비서이자 자금줄 역할을 했으며 쑨원에게 소련과의 연계를 건의하고 국공합작을 주도하였다. 또한 재정 부장말고도 공인부장(工人部長), 중앙농민부장, 황푸군관학교 당대표 등을 맡아서 각종 선전 활동과 노동자, 농민의 조직 등 연소용공, 공농부조((聯蘇容共·工農扶助)에 앞장섰다. 따라서 국민당 우파들에게는 "좌파"의 우두머리 쯤으로 여겨지고 있었지만 원래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 그저 혁명을 위해서는 소련과 손을 잡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현실적인 선택이었을 뿐이었다. 덧붙여, 랴오중카이의 부인 허샹닝(何香凝)과 아들 랴오청즈(廖承志)는 훗날 국민당과 결별하고 열렬한 공산주의자가 되어 국공내전이 끝난 뒤 공산 정권에서 고위직을 역임한다.
혁명의 중진이자 왕징웨이, 후한민과 함께 국민정부 지도부의 한축이었던 그의 죽음은 광저우는 물론이고 중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랴오중카이를 저격한 암살범은 진순(陣順)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현장에서 사살되었지만 배후가 누군지 알아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왕징웨이는 즉각 특별 위원회를 구성하고 자신이 직접 위원장을 맡아서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의 조사에 착수하였다. 100여명이 체포되었고 그 중에서도 핵심 배후로서 3명의 용의자가 지목되었다. 후위성(胡毅生), 린즈미엔(林直勉), 주조우원(朱卓文) 등 모두 쑨원의 옛 측근이자 국민 정부의 간부들이었다. 즉각 이들에 대한 체포령이 내렸지만 두 사람은 재빨리 광둥성 밖으로 도망쳤다. 과거 쑨원의 비서를 맡았던 미국 화교 출신의 린즈미엔 만이 붙잡혔다. 세 사람 모두 범행을 부인하면서도 "랴오중카이는 공산당이며 민중의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들이 실제로 랴오중카이의 암살에 가담했다는 증거는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누가 진짜 배후이건 상관없이 사건은 국민정부 전체의 분열로 이어졌다. 쑨원이 죽은 뒤 국민정부는 크게 세 개의 파벌로 나눠줬다. 처음부터 국공합작을 반대했던 후한민을 중심으로 하는 반공 우파, 국공합작에 찬성했던 랴오중카이의 친공 좌파, 그리고 중도파이면서 어느 쪽과도 비교적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던 왕징웨이. 하지만 실제로는 이념과 상관없이 서로 복잡한 이해 관계가 얽혀 있었기에 칼로 물베듯 간단하게 나눌 수 없는 것이 당시 국민정부의 복잡한 속내였다. 국민당은 쑨원에 의해 만들어졌고 그의 카리스마에 전적으로 의존해 왔다. 그렇다고 따로 후계자를 지목하지도, 그를 대신할 만한 사람도 없었기에 구심점이 하루 아침에 사라지자 분열되고 대립하는 것은 당연하기도 했다.
공산당과 국민당 좌파 쪽은 랴오중카이의 암살을 우파의 책동이라고 비난하였다. 실제로 유력한 용의자 중의 한 사람인 후위성은 우파 쪽 간부중 한 사람이자 후한민의 사촌동생이기도 했다. 좌파 쪽은 연일 맹비난을 쏟아냈고 그 중에서도 황푸군관학교의 정치부 부장이었던 저우언라이는 "당의 원수를 잊지 말자"라면서 생도들과 혁명군 병사들에게 공공연히 선동을 일삼았다. 국민정부의 상황 노릇을 하던 보로딘은 이것을 우파 숙청의 기회로 여겼다. 그리고 사건 조사를 맡은 특별위원회에서 자신이 작성한 "체포자 명단"을 들고 나와서 후한민을 비롯한 우파쪽 간부들을 모조리 체포하자고 주장하였다. 그의 제안은 우파는 물론이고 후한민과 가까웠던 중도파들 역시 강력한 반대에 나서면서 실패했지만 자신의 사촌이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당한 후한민으로서는 정치적으로 곤란에 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왕징웨이는 후한민에게 출국을 제안했고 결국 후한민은 거의 쫓겨나듯 소련으로 떠나야 했다. 게다가 옆에는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기 위해 보로딘이 붙여놓은 심복까지 데리고 말이다.
왕징웨이와 후한민, 랴오중카이는 젊은 시절부터 쑨원의 곁에서 평생을 함께 혁명을 위해 투쟁해 왔던 동지였다. 또한 두 사람은 매우 가까운 사이이기도 했다. 쑨원이 죽은 뒤 광저우 정부는 세 사람이 중심이 되어 끌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권력은 부모 형제와도 나눌 수 없는 것이었다. 랴오중카이는 비명횡사하였고 왕징웨이는 보로딘의 부추김에 오랜 우정마저 저버린 채 후한민을 하루 아침에 쫓아내었다. 국민 정부는 왕징웨이 한 사람이 권력을 좌지우지하는 꼴이 되었다. 문제는 왕징웨이는 쑨원이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쑨원이 평생을 바쳐서 일군 혁명의 근거지가 소련의 손에 넘어가는 것은 국민당의 간부들 입장에서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또한 그들에게 왕징웨이란 인물은 권력에만 눈이 먼 나머지 보로딘에 부화뇌동하는 하수인에 지나지 않았다. 후한민의 추방은 갈등의 불씨에 더욱 불을 붙였다.
여기다 보로딘은 혁명의 원로이자 우파의 중진인 린썬(林森)과 저우로(鄒魯)에 대해서도 화북의 민중을 계몽하여 혁명에 동참시켜야 한다는 명목으로 베이징으로 파견하였다. 말이 파견이지, 추방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식으로 국민당 지도부에서 눈에 거슬리는 우파들을 하나씩 제거해 나갔고 이들의 빈 자리는 공산당원들이 차지하였다. 1923년 1월 23일 "쑨원-요페 선언"으로 국공합작이 결성된 지 겨우 1년 반, 쑨원이 죽은 지 7개월 만에 국민정부의 중추부는 소련의 후원을 받는 공산당에게 장악된 것이었다.
우파들은 공산당에게 이를 갈지 않을 수 없었다. 쑨원의 국공합작은 양당이 대등한 관계에서 합작한 것이 아니라 공산당원들이 개인 자격으로 국민당에 가입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여기에는 국민당의 강령에 절대 복종해야 한다는 약속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와서 국민당이 공산당의 손에 넘어가서 공산당이 마음대로 좌지우지되는 것은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는 꼴이었다. 따라서 격분한 나머지 광저우를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이들은 처음에는 서북의 장자커우(張家口)로 가려고 하였다. 장자커우는 국민군의 수장 펑위샹의 영토였다. 펑위샹은 여러 군벌 중에서 유일하게 국민당에 호의적인 인물이었다. 또한 북방에서 가장 강력한 실력자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그를 우군으로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우파들로서는 그야말로 천군만마였을 것이다. 하지만 펑위샹은 이미 소련과 접촉하고 있었기에 반공을 내건 이들과의 손을 잡기를 원치 않았고 결국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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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11월 23일, 린썬, 저우로, 스지(謝持) 등은 베이징 교외 시산(西山)의 비윈사(碧雲寺)에 있는 쑨원 무덤 앞에 모였다. 이들은 공산당이 국공합작의 정신을 어기고 혁명 정부를 장악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다고 분노를 터뜨렸다. 또한 공산당이 국공합작에 동의한 것도 소련의 앞잡이가 되어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는데 목적이 있으며 중국과 소련은 역사도 다르고 정세도 다르기에 국민 혁명과 계급 혁명은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공산당원들의 당적을 박탈하고 국민당 지도부에서 몰아내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서 리자다오(李大釗)와 마오쩌둥, 장궈타오(張國燾) 등 9명의 공산당 간부들의 당적을 박탈하였다. 국민 정부 주석인 왕징웨이에 대해서도 보로딘의 꼭두각시처럼 행동하고 있다면서 당적을 박탈할 것과 중앙집행위원에서 해임하기로 결의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시산 회의"이다. 그리고 우파들은 상하이 지부를 국민당 중앙 당부로 삼았다. 국민정부가 상하이와 광저우 양쪽으로 갈라진 것이다.
국민 정부의 최고 의결권과 집행권을 쥐고 있는 것은 중앙집행위원회였다. 여기에는 24명의 간부들이 있었는데 이들 중에서 시산 회의에 참가한 사람은 총 10명으로 전체에서 절반에 조금 못 미쳤다. 보로딘과 공산당이 장악한 광저우 정부에 맞서기에는 충분했던 것이다. 좌파쪽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이들은 "시산 회의"를 드디어 국민당 내에서 우파를 완전히 일소할 수 있는 호기로 여겼다. 그리고 1926년 1월 16일 "시산 회의 탄핵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주된 내용은 시산 회의를 주도한 저우로와 스지의 당적을 영구적으로 박탈할 것,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서는 2개월 이내에서 스스로 반성할 것과 그렇지 않으면 국민당에서 추방한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당을 떠나던가 투항하던가 양자 택일을 하라는 것이었다. 양측의 대립은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과연 어느 쪽이 승리할 것인가. 그 열쇠를 쥔 자는 다름아닌 장제스였다. 황푸군관학교 교장이자 국민혁명군 제1군의 군장인 장제스는 어느 편에도 서지 않은 채 한발 물러나 있었다. 오히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는 "좌파"에 가까웠다. 그는 소련과의 합작을 강조하는 한편, 혁명군이 노동자, 농민의 편에 서서 제국주의를 타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황푸군관학교를 운영하면서 소련 공산당의 조직과 방식을 모방하였다. 특히 1925년 6월에는 장남 장징궈가 소련 유학을 위해 모스크바로 떠났다는 사실이었다. 장제스는 보로딘이나 공산당과도 그런대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등 좌파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장제스는 우리와 같은 편"이라고 여길 만하였다. 하지만 사람을 보는데 탁월한 눈을 갖춘 저우언라이는 장제스를 정확하게 꿰뚫어 보았고 보로딘에게 결코 방심하지 말라고 충고하였다.
제1차 동정 작전에서 승리한 장제스는 당내의 입지를 탄탄하게 굳혔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일개 교장에 지나지 않았고 수중의 군대 역시 겨우 3천여명에 불과하였다. 국민 정부 산하의 여러 쟁쟁한 군벌 군대에 비하면 한줌에 불과한 세력이었다. 국민혁명군 중에서 가장 강력한 실세는 광둥군의 우두머리이자 광둥성 주석 겸 군사 부장이었던 쉬충즈(許崇智)이었다. 쉬충즈는 장제스와 나이는 동갑이었지만 명망이나 군사 경력에서 감히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일본 육사 보병과를 졸업하였고 신해혁명이 일어났을 때 이미 푸저우에 주둔한 신군 제10진 제20협의 협통(协统, 여단장)이었다. 이 때의 장제스는 변변한 지위도 계급도 없었다. 신해혁명이 일어났을 때 반청 혁명에 가담했던 쉬충즈는 쑨원의 몇 안되는 역량 있는 군사 지휘관으로서 제2혁명과 호국전쟁에 참여하였고 쑨원이 광저우로 내려온 뒤에는 광둥군 제2군을 지휘하였다. 쑨원이 북벌전쟁을 일으켰을 때에는 북벌군을 이끌고 푸젠성 공략에 나섰다가 천중밍이 "6.16 사변"을 일으켜 쑨원이 광저우에서 쫓겨나자 군대를 돌려서 천중밍을 토벌하였다. 제1차 동정작전에서도 쉬충즈는 전선 사령관으로서 장제스의 상관이었다.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과 관련하여 보로딘이 우파 숙청에 나서자 쉬충즈는 앞장서서 제동을 걸었다. 이 때문에 그를 눈의 가시로 여긴 왕징웨이나 당내 좌파들과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다. 광둥성의 군권을 쥔 쉬충즈가 건재한 이상 언제 자신들이 우파의 역습을 받아서 쫓겨날 지 모른다고 여긴 왕징웨이는 쉬충즈를 견제하기 위하여 장제스를 광저우 경비 사령관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장제스를 시켜서 기습적으로 쉬충즈의 군대를 무장해제시키고 그의 사령부를 포위토록 하였다. 쉬충즈는 하루 아침에 몰락한 채 상하이로 추방되었다. 장제스는 광둥성의 군권을 장악하고 쉬충즈를 대신하여 가장 강력한 군사적 실세로 등장하였다.
9월 28일에는 동정군 총사령관이 되어 국민혁명군 제1군 3개 사단과 광둥군 제11사단 등 4개 사단과 기타 지원부대까지 총 2만명의 병력을 3개 종대로 편성한 후 제2차 동정 작전을 실시하여 천중밍의 근거지인 후이저우(惠州)를 단숨에 점령하였다. 그리고 잔당들을 광둥성 끝까지 추격하여 완전히 분쇄해 버린 후 12월 초 당당하게 광저우로 돌아왔다. 이로서 국민정부는 광둥성 전체를 장악하였고 장제스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 또한 새로운 영토 덕분에 세수도 이전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풍족해졌다. 여기에다 랴오중카이를 대신하여 새로운 재정부장으로 쑹즈원(宋子文)이 임명되었다. 쑹칭링의 남동생으로서 쑨원의 손아래 처남이자 훗날 장제스와도 처남 관계가 되는 쑹즈원은 미국 하버드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한 엘리트로서 당시 중국에서 가장 뛰어난 재정 전문가이기도 했다. 또한 미국 정재계에도 발이 넓었으며 미국 대통령이 되는 프랭클린 루즈벨트와는 대학 동기이기도 했다. 장제스가 경쟁 군벌들을 제압하고 자신의 권력을 더욱 단단하게 다질 수 있었던 것은 쑹즈원의 재정적인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왕징웨이는 자신보다 4살 연하이면서 지위나 경력에서도 한참 아래인 장제스를 한낱 애숭이로만 생각할 뿐, 그저 자신에게 충실한 수족이라고만 여겼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장제스는 야심이 큰 인물이었다. 또한 그것에 걸맞는 그릇과 결단력, 추진력을 갖추고 있었다. 즉, 왕징웨이는 늑대를 쫓아내려다 호랑이 새끼를 키우고 있는 셈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베이징에서 우파들이 결집하여 시산 회의를 개최한 후 국민 정부는 완전히 분열되었다. 보로딘과 공산당은 왕징웨이를 내세워 광저우 정부를 사실상 장악하였다. 그리고 1926년 1월 1일 광저우에서 제2차 국민당 전국대표대회를 개최하였다. 여기서 지지 세력을 규합하여 "모반"을 일으킨 시산파들을 일거에 척결해 버리겠다는 것이었다. 대회 참가자를 심사하는 "심사 위원회"는 3명의 공산당원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마오쩌둥이었다.
훗날 장제스의 숙적이 되는 마오쩌둥 역시 장제스와 마찬가지로 차곡차곡 자신의 입지를 다지고 있었다. 1924년 1월에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후보 위원의 한 사람으로 지명된 그는 이미 국민당이나 공산당 내에서 상당한 지위에 올라 있었다. 또한 1925년 10월에는 왕징웨이가 그를 국민당 중앙 선전부장에 임명하였고 광저우 정부와 다른 지역의 국민당 지부와의 연락을 책임지도록 하였다. 국민당 전당대회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마오쩌둥을 비롯한 공산당원이 멋대로 부여하면서 256명의 전국 대표 중에서 1/3이 넘는 90명이 공산당원이었다. 비록 공산당은 아니라도 공산당에 우호적인 좌파 인사까지 합할 경우 전체의 60%에 달하는 168명이었다. 중도파는 65명, 우파는 겨우 45명에 불과하였다. 특히 중앙집행위원의 경우 36명 중 7명이 공산당원이고 14명이 좌파였다. 국민당 지도부는 사실상 공산당 간부와 좌파 인사들에 의해 거의 장악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들은 이리저리 분열된 국민당과는 달리 마오쩌둥, 장궈타오, 탄핑산(譚平山) 등 공산당 지도부에게 복종하면서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국민당 전당대회의 주요 안건은 중앙에 "반역"을 일으킨 소위 시산파를 어떻게 처분할 것인가였다. 이미 공산당이 국민당의 핵심을 거의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누가 감히 반대하고 나설 것인가. 그런데 뜻밖에도 장제스는 이렇게 연설하였다. "우리 국민당은 총리(쑨원)이 남겨준 것이다. 우리는 총리의 마음을 우리 당의 마음으로 삼고 총리의 뜻을 우리 뜻으로 삼아야 한다. 대회의 결과가 하늘에 있는 총리를 탄식케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파를 처벌하는 것은 국민당을 분열시키는 것이므로 엄중히 반대한다는 말이었다. 잔뜩 벼르고 있었던 공산당과 좌파들로서는 그동안 자신들의 편이라고 여겼던 장제스가 뜻밖에도 우파의 손을 들어주자 그야말로 찬물을 끼얹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다. 누구도 장제스의 편을 들지 않았던 것이다. 장제스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은 결국 시산파에 대한 탄핵안을 강행하였다. 또한 국민당 조직부장에 탄핑산이, 농민부장에는 린주한(林祖涵), 부녀부장에는 쑹칭링을 대신하여 저우언라이의 아내인 덩잉차오(鄧穎超)가 각각 임명되었다. 국민당 지도부의 주요 요직이 죄다 공산당의 손에 넘어간 것이다. 지도부에서 공산주의자가 아닌 사람은 장제스와 제2군 군장이었던 탄옌카이(譚延闓) 정도였다. 게다가 두 사람 모두 군인이었고 정치와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었다. 쑨원이 죽은 뒤 첨예하게 벌어진 국공의 권력 투쟁은 겨우 반년 만에 공산당의 완전한 승리로 끝날 참이었다.
그동안 장제스는 그저 군사 분야에서만 활약할 뿐, 지도부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권력 투쟁에 대해서는 중립을 지킨 채 우파와 좌파 어느 쪽에도 서지 않은 채 명확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쑨원의 유지를 떠받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면서 당의 분열을 반대하고 양쪽의 중재자 역할에 노력하였다. 하지만 주변은 그를 모호한 태도로 놔두지 않았다. 1926년 1월 4일 밤에 열린 회의에서 장제스는 처음으로 북벌 전쟁을 거론하였다. "현재의 전국을 보건대 우리 국민당은 반드시 중국을 통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북방의 군벌들은 이미 붕괴되고 있으며 우리가 단결하여 노력한다면 금년 안에 군벌을 모두 타도하여 베이징을 손에 넣고 총리의 운구를 난징으로 모셔와 반드시 쯔진산(紫金山)에 안장할 수 있다" 이것은 북방을 양분하고 있던 장쭤린, 우페이푸와 펑위샹 사이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는 6일에도 "지금의 국민혁명군은 당과 정부의 통제 아래에 있다. 명령 한번이면 8만 5천 명의 병사를 동원할 수 있으며 총은 6만정이 있다. 또한 각지의 군사학교에도 6천 여명의 생도가 있어 1개 사단에 필적한다. 이것은 삼민주의의 힘으로 쟁취한 것이다. 혁명군이 가는 곳에는 민중의 열렬한 환영이 있으며 민중의 조력이 있었다. 혁명군은 민중의 군대이며 무장 역량이다." 라면서 북벌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왕징웨이와 보로딘을 비롯한 지도부는 겉으로는 반대하지 않으면서도 그렇다고 썩 달가워 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들은 우파 척결을 반대한 장제스를 이미 적으로 간주하고 있었고 그를 제거해야 한다고 여겼다. 장제스 자신도 갑자기 달라진 주변의 냉담한 모습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민혁명군은 물론이고, 황푸군관학교에서도 장제스의 명령에 노골적으로 항명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제 장제스는 지위는 물론이고 생명까지 위태로운 판이었다.
* 장제스, 권력을 쥐다
1926년 2월 3일, 보로딘과 소련 군사고문단을 맡고 있던 블류헤르가 소련으로 소환되었다. 이들을 대신하여 온 사람은 적백내전에서 제1군의 정치 위원을 맡았고 스탈린 정권에서 소비에트 국가계획위원회 의장을 역임하게 되는 발레리안 쿠이비셰프(Valerian Kuybyshev)였다. 스탈린의 충실한 심복이었던 그는 1935년에 심장마비로 죽었지만 구 소련 시절 여러 개의 도시가 그의 이름을 땄을 정도였다. "키산카(Kisanka)"라는 가명을 사용하는 쿠이비셰프는 광저우에 오자말자 노골적인 간섭에 나섰다. 그는 장제스의 북벌 계획을 "시기상조"라면서 노골적으로 반대하였다. 충분히 준비가 되지 않은 지금 공격에 나섰다가는 반드시 패배한다는 것이었다.
키산카가 북벌을 반대한 이유는 장제스에게 군권이 집중되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었다. 국민 혁명군에는 장제스의 제1군을 비롯하여 7개군이 있었지만 쉬충즈가 사라진 지금 북벌군의 총사령관을 맡을 만한 사람은 장제스를 제외하고는 없었다. 하지만 국민 정부가 왕징웨이의 좌파와 상하이의 우파로 분열된 상황에서 우파에 동정적인 장제스에게 군권을 주었다가 언제 뒷통수를 맞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키산카는 장제스를 견제하는 한편, 황푸군관학교의 경비를 멋대로 삭감하고 군인들의 봉급을 지불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이것은 장제스의 입지를 약화시키기 위함이었다. 왕징웨이는 소련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그가 시키는대로 고분고분 따를 뿐이었다. 국민 정부는 소련의 괴뢰 정권이나 다름없었다. 격분한 장제스는 2월 27일 왕징웨이를 직접 찾아가 키산카를 소련으로 돌려보내던가 아니면 자신이 모든 직위에서 물러나겠다고 경고하였다. 또한 왕징웨이가 처음에는 북벌에 찬성했으면서도 키산카가 반대하자 태도를 바꾼 것을 지적하고 그의 우유부단함을 비난하면서 소련과 손을 잡더라도 혁명의 자주성만큼은 지켜야 한다고 충고하였다. 왕징웨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때부터 키산카와 왕징웨이, 장제스 사이의 암투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26년 2월 26일 제1군 제2사단장과 광저우 경비 사령관 대리를 맡고 있던 왕마오공(王懋功)이 장제스에 의하여 갑자기 체포되는 일이 벌어졌다. 장제스는 그가 카신카의 사주를 받아서 반란을 꾀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모든 직위에서 파면시키고 소련으로 추방하였다. 제2사단장은 황푸군관학교의 교관이자 장제스의 심복인 류즈(劉峙)로 교체되었다.
왕마오공이 실제로 반란을 계획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원래 쉬숭츠의 부하였던 그는 장제스와의 관계가 썩 매끄럽지 못했고 따라서 장제스가 키산카를 공격하기 위한 희생물로 활용했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이 일로 장제스에게 앙심을 품은 왕마오공은 한동안 소련에서 머물다가 북벌 전쟁이 한창이었던 1928년에 산시 군벌 옌시산의 제3집단군에 가담하여 제11군의 군장이 되었고 북벌이 끝난 뒤에는 反장제스 운동에 앞장서서 중원대전에도 참전하였다. 그러나 만주사변 이후 중국에서 항일 분위기가 고조되자 장제스와 화해한 후 장쑤성 주석을 역임하였다. 국공내전에서 장제스가 패하자 함께 타이완으로 도주하였다. 그리고 장제스의 총통부 고문을 맡아서 평온한 생활을 보내다 1961년에 병사하였다.
황푸군관학교의 교관들 중에도 생도들 앞에서 장제스를 공공연히 비방하였고 학교 내에 장제스를 비난하는 선전 삐라가 뿌려지기도 했다. 여기다 3월 14일에는 왕징웨이가 장제스에게 넌저시 "광둥성을 잠시 떠나 있으라"라는 권유를 하였다. 장제스의 지위는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신세였다. 이런 상황에서 벌어진 사건이 "쭝산함 사건(中山艦事件)"이었다.
쭝산함은 아직 청조가 건재하던 1910년 해군 대신 짜이순(載洵)이 해군 재건을 위하여 일본 나가사키 조선소에 의뢰하여 건조한 군함이다. 구입 비용은 68만엔, 배수량 780톤의 소형 포함으로, 1350마력 엔진을 탑재하였고 승무원 140명, 최고 속력 13.5노트, 암스트롱 105mm 속사포 1문과 호치키스 47mm 부포 4문, 37mm 부포 2문을 탑재하였다. 1913년에 취역하여 대총통 위안스카이는 직접 "용펑(永豊)"이라고 이름 붙이고 중국 해군 제1함대에 배속되었다. 1917년 호법 전쟁 당시 용펑함을 비롯한 제1함대가 반란을 일으켜 쑨원과 함께 광저우로 내려왔다.
이후 북상에 나선 쑨원의 북벌군이 천중밍을 비롯한 여러 군벌들의 배신으로 분열되면서 해군 역시 주력은 이탈하여 도로 북양 정권에게 귀순했지만 용펑함만큼은 여전히 남은 채 쑨원에게 충성을 다하였다. 용펑함은 국민 정부 해군이 보유한 가장 큰 군함이었다. 소형 포함에 불과한 용펑함이 세상에 이름을 떨친 것은 1922년 "6.16 사변"이었다. 천중밍의 반란군에게 쫓겨서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 쑨원을 구출한 것이 바로 용펑함이었다. 쑨원은 용펑함의 선상에서 55일 동안 체류하면서 반란군의 진압에 나섰고 결국 광저우를 되찾을 수 있었다. 만약 용펑함이 없었더라면 쑨원은 천중밍에게 붙들려서 죽음을 면치 못했으리라. 당시 장제스도 융펑함과 함께 하면서 쑨원의 호위를 맡았다는 점에서 인연이 깊었다. 쑨원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4월 13일 그의 호를 따서 용펑함은 쭝산함으로 개칭되었다.
쭝산함의 함장은 리즈룽(李之龍)이라는 장교였다. 당시 29살이었던 그는 산둥성 옌타이(烟台) 해군학교를 졸업한 후 황푸군관학교에 입학하여 1기생으로 졸업하였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 광둥성 해군국 국장을 겸임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가 골수 공산당원이기도 했다는 점이었다. 광저우에서 수리 중이던 쭝산함이 3월 18일 갑자기 리즈룽의 지휘 아래 황푸로 왔다. 그리고 황푸군관학교에는 장제스의 명령에 따른 것이라고 통보하였다. 쭝산함은 평소 장제스가 광저우와 황푸를 오갈 때 이용하는 군함이기도 했다. 당시 장제스는 업무 차 광저우에 와 있었다. 그런데 19일 아침 왕징웨이의 부인 천비쥔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그녀는 왕징웨이 대신에 전화했다면서 장제스더러 언제 황푸로 떠나는지 물었다. 전화는 세번이나 연거푸 걸려왔다. 여기다 한 시간 후에는 리즈룽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쭝산함이 황푸군관학교 근처에 정박 중이라고 보고하면서 광저우로 돌아가도 되겠냐고 물었다. 장제스는 이상하게 여기면서 "나는 쭝산함을 황푸로 가라고 한 적이 없다. 왜 나한테 그것을 묻는건가"라고 되물었다. 리즈룽이 교장의 명령이라고 대답하자 장제스는 자신이 그런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고 말했다. 쭝산함은 광저우로 되돌아왔지만 마치 언제라도 출동할 것처럼 보일러에는 불을 켜놓은 채 포문의 덮개는 열려 있었다.
이미 왕징웨이와 키산카에 대한 극도의 불신감으로 신경이 곤두서 있었던 장제스는 이 수상쩍음을 왕징웨이 일당이 눈의 가시인 자신을 제거하려는 음모라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곧장 광저우의 경비 사령부로 돌아가서 광저우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할 것을 지시하였다. 또한 상황이 여의치 않을 경우 여차하면 산터우로 도망칠 준비도 하였다. 그 곳에서 군대를 규합하여 일전을 벌일 생각이었다. 왕징웨이와 일전을 각오한 것이었다. 일단 결심하면 결코 망설이는 바가 없는 그는 신속하게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3월 20일 새벽, 광저우 해군 학교 부교장인 어우양거(歐陽格)에게 지시하여 해군 함대를 장악할 것과 리즈룽의 체포를 지시하였다. 리즈룽은 체포되어 광둥군 제20사단 본부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광저우 시내에 군대를 보내어 주요 도로와 정부 청사를 장악하고 공산당 휘하의 노동자 무장 조직을 습격하여 강제로 무장 해제시켰다. 공산당 간부들이 자택에서 모두 체포되고 키산카를 비롯한 소련 고문들이 묵고 있는 숙소 또한 군인들에게 포위되었다. 억류된 사람 중에는 저우언라이도 있었다.
완벽한 기습이었다. 하지만 아주 위험한 행동이기도 했다. 장제스는 비록 휘하에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위도 낮을 뿐더러 왕징웨이와 소련 고문단, 공산당원들을 죄다 쫓아내고 국민 정부를 통째로 장악할 만큼의 실력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의 쿠테타는 처음부터 치밀한 계획 아래 진행된 것이 아니라 즉흥적이었고 상하이에 있는 우파들과 연계했던 것도 아니었다. 국민혁명군의 다른 군장들 역시 장제스에게 동의한다는 보장도 없었다. 따라서 외부의 도움 없이 단 한번의 공격으로 국민 정부를 장악하고 있는 공산당에게 승리한다는 것은 감히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소련과의 합작이 끝장날 수 있었다. 소련의 원조 없이는 국민 정부를 지탱할 수도 없고 북벌 역시 꿈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백기를 든 쪽은 장제스가 아니라 오히려 좌파들이었다. 장제스는 쭝산함이 자신을 납치한 후 소련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톡으로 끌고 가려 했으며 음모의 배후에는 소련 고문단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좌파 측은 오히려 장제스가 정권을 차지하기 위해 사건을 날조했다고 비난하였다. 과연 어느 쪽이 사실인가. 이 사건은 결코 돌발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 양측의 감정이 극도로 격앙된 상황에서 장제스 입장에서 충분히 정황적으로 의심할 만한 상황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불확실한 심증 이외에 실제로 그를 납치하려는 직접적인 증거가 발견된 것은 아니었다.
진실은 어차피 중요하지 않았다. 이것은 서로의 사활을 건 권력 투쟁이었다. 양측의 주장은 팽팽했고 어느 쪽도 물러날 수 없었기에 유혈 충돌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사건 이틀 뒤인 22일 광저우 주재 소련 영사관이 개입하였다. 이들은 장제스를 면담하고 "이것은 개인적인 문제인가, 아니면 소련 전체를 적으로 삼기 위함인가?"라고 물었다. 물론 그의 대답은 뻔했다. 자신은 키산카를 비롯한 소련 고문단의 횡포에 대한 그동안의 불만을 털어놓으면서 자신은 결코 소련을 적으로 돌릴 생각은 없다고 말하였다.
뜻밖에도 소련측은 그의 말에 납득하고 더 이상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기로 했다. 오히려 장제스의 요구를 모두 수용하여 문제가 된 소련 고문단들을 모두 본국으로 송환하는데 동의하였다. 장제스가 승리한 것이다. 사건 당일 병원에 입원 중이던 왕징웨이는 뒤늦게 알고 장제스에게 크게 호통을 쳤지만 그렇다고 그를 명령 불복종으로 체포하지는 않았다. 이미 주도권이 장제스에게 넘어갔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장제스는 왕징웨이가 직접 음모에 가담했다고 힐책하지는 않았지만 그동안 공산주의자들의 횡포를 묵인한 것에 불만을 드러냈다. 어쨌거나 이 사건으로 완전히 체면이 깎인 왕징웨이는 장제스에 대한 반격에 나서는 대신, 도리어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고 모든 직위에서 물러난다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도망치듯 프랑스로 출국하였다. 결단력이 부족하고 우유부단한 성격의 그는 이런 상황을 감내할 역량이 없었던 것이다. 오직 쑨원이라는 거성이 있을 때에만 비로소 그 옆에서 빛이 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소련과 좌파들은 마음만 먹으면 장제스를 끌어내릴 수 있었음에도 왜 그렇게 하지 않았는가. 실제로 사건 직후 이 사실을 알게 된 소련 모스크바에서는 격론이 벌어졌다. 트로츠키는 장제스를 쫓아내던가 국공합작을 끝장내고 공산당더러 폭동을 일으키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스탈린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쳤다. 스탈린은 국공합작을 유지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 "다소" 양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국공합작의 총 책임자였던 스탈린으로서는 그동안 많은 자금과 물자를 쏟아붓었음에도 이렇다할 성과도 없이 합작이 깨진다면 체면이 손상될 뿐더러 그로 인한 책임을 추궁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도부는 논의 끝에 스탈린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미 주도권은 스탈린이 쥐고 있었고 그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던 트로츠키는 권력 투쟁에서 밀려서 별다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스탈린은 중국 공산당의 반발을 억누르고 국민당에 그대로 잔류할 것을 지시하였다. 소련이 장제스의 손을 들어주는 이상 공산당으로서는 일단 복종할 수 밖에 없었다. 마오쩌둥을 비롯하여 국민 정부의 주요 요직에 있었던 간부들은 모두 자리에서 물러났다.
4월 29일 키산카를 비롯한 10여명의 소련인이 송환되고 대신 보로딘이 후한민과 함께 광저우로 다시 돌아왔다. 블류헤르 역시 군사 고문으로 복귀하였다. 블류헤르는 장제스와도 가까웠고 중일전쟁 중 장제스가 스탈린에게 군사 고문으로 블류헤르를 다시 보내달라고 했을 정도였다. 장제스는 보로딘에게 소위 "당무 정리안"이라 하여 공산당이 더 이상 삼민주의를 비판하지 못하도록 할 것과 국민당적을 가진 사람만이 국민정부 내 주요 요직에 임명될 것, 중앙의 허락없이 별도의 조직을 만들 수 없으며 공산당에 입당한 사람은 국민당원이 될 수 없다는 등의 조건을 내놓고 동의를 요구하였다.
보로딘은 장제스에게 매우 부드럽고 유화적인 태도로 그의 요구를 모두 받아들였다. 이제와서 장제스를 자극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물론 국공합작은 그대로 유지되었고 소련의 원조 또한 문제가 없었다. 공산당의 세력은 대폭 약화되어 앞으로 국민정부의 지시에 복종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동안 쑨원이 죽은 뒤 국민정부를 거의 장악하는데 성공했던 공산당으로서는 마지막 한발을 남겨놓고 한방에 판세가 역전된 셈이었다. 고립 무원에 몰린 채 지위마저 위태로왔던 장제스로서는 실로 회심의 일격이었다.
3월 23일 군사위원회 회의에서 장제스는 부득이한 비상 사태였음을 강조하면서도 상부의 허락 없이 멋대로 군대를 동원하고 계엄령을 선포한 것에 대하여 솔직하게 인정하고 처분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그 책임을 물어야 할 왕징웨이는 도망쳐 버렸고 소련은 꼬리를 내렸다. 군사위원회 회의에 참여한 다른 국민혁명군의 장군들 역시 장제스에 대한 문책에 회의적이었다. 이들은 장제스를 지지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공산당의 편에 서서 장제스와 맞설 생각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누가 감히 장제스에 대항할 것인가. 처분은 흐지부지되었고 오히려 장제스는 4월 16일 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6월 5일에는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 추대되고 북벌군의 지휘봉을 들게 되면서 국민 정부의 최고 군사 실력자가 되었다. 여러 원로들에 의한 집단지도체제가 구성되었지만 실세는 군권을 장악한 장제스였다. 이로서 장제스는 명실상부한 쑨원의 후계자가 되었다. 장제스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한편으로, 장제스와 공산당의 싸움은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양자는 소련의 강요 앞에서 부득이 한발짝씩 물러났을 뿐, 어느 쪽도 굴복할 생각은 없었다. 공산당은 소련만 믿고 독자적인 군사력을 확보하지 않은 것을 반성하고 국민혁명군 내부로 점차 침투하면서 지지 세력을 만들어 나갔다. 훗날 장제스와 마오쩌둥이 벌이게 되는 거대한 숙명의 싸움은 바로 이 중산함 사건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으리라.
* 장제스, 북벌을 선언하다
장제스가 처음 북벌을 거론한 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1926년 1월 4일이었다. 이후로도 쑨원의 유지와 북방의 형세를 내세워 여러 차례 북벌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키산카를 비롯한 소련 고문단이 "시기상조"라고 주장하면서 지지부진하였다. 공산당 역시 북벌을 반대하고 소련처럼 전국의 노동자, 농민들을 규합하여 계급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장제스에게 군권이 몰리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북벌 계획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쭝산함 사건 이후였다. 그동안의 걸림돌이었던 키산카가 소련으로 송환된데다 공산당의 세력 또한 약화되면서 국민정부의 강력한 실세로 등장한 장제스를 더 이상 걸고 넘어질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북방의 상황은 베이징을 놓고 장쭤린-우페이푸가 펑위샹의 국민군을 맹렬하게 공격하고 있었다. 사면초가에 몰렸던 펑위샹은 타협책으로 스스로 하야를 선언한 후 소련으로 망명했지만 이들의 공격을 피할 수는 없었다. 사방에서 공격을 받은 국민군은 연전연패하여 거의 괴멸 상태에 내몰렸다. 4월 15일에는 베이징을 버리고 난커우로 퇴각하였고 돤치루이 정권 또한 붕괴되었다.
4월 3일 장제스는 중앙집행위원회에 북벌 준비에 관한 건의서를 제출하였다. 여기서 그는 북방의 정세를 분석하고 8만명의 군대로 1개월 안에 북벌에 나선다면 적어도 한달이면 우한을 점령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그 시기는 국민군이 괴멸하기 전이어야 하며 만약 시기를 놓쳐서 장쭤린, 우페이푸가 북방을 평정한다면 일본, 영국 등 제국주의 국가들의 원조를 받아서 반드시 남방의 혁명 근거지를 공격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5월 초에는 보다 구체적인 작전 계획을 수립하였는데, 주공으로 후난성을 통하여 우한으로 진격하며 조공으로 동쪽의 장시성을 공격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음 단계에 대한 전략까지는 아직 구상하지 못한 채 추후에 다시 결정한다는 식이었다. 북방의 정세를 아직 예측하기 어려운데다, 북방의 패자인 장쭤린의 실력이 워낙 막강하여 북벌군의 실력으로 일거에 베이징까지 점령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장제스가 본격적으로 북벌 계획을 세우는 동안, 후난성에서 쿠테타가 일어났다. 1926년 3월 12일 후난군 제3사단장 탕성즈(唐生智)가 후난성의 지배자인 자오헝티(赵恒惕)에게 반란을 일으켜 그를 쫓아내고 창사를 장악한 것이다. 다른 후난군 부대들 역시 여기에 동조하면서 1921년부터 약 5년 동안 후난성에서 제왕으로 군림해 왔던 자오헝티는 하루 아침에 몰락한 채 하야를 선언한 후 상하이로 달아났다. 물론 이런 모습은 하극상이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던 군벌 세계에서는 밥 먹듯 일어나는 일이었다.
자오헝티의 패잔병들이 후베이성으로 몰려왔다. 탕성즈 역시 이들을 추격하여 후베이성과 후난성의 경계에 있는 웨저우(岳州)를 점령하였다. 웨저우는 우페이푸의 영토이다. 비록 주력 부대가 북방에서 국민군과 싸우고 있었지만 탕성즈의 침입을 가만히 지켜볼 리 없었다. 우페이푸는 탕성즈에게 최후 통첩을 하였다. 24시간 이내에 웨저우를 내놓고 물러날 것과 자오헝티의 복귀, 반공 동맹에 참여하여 광저우의 국민정부를 토벌하는데 앞장서라는 것이었다. 탕성즈로서는 첫번째 요구는 어떻든, 두번째와 세번째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그는 "우가놈이 후난을 바보 취급하는구나!"라며 격노하였다. 그리고 우한을 단숨에 점령하여 우페이푸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겠다고 기세등등하게 외쳤다.
탕성즈가 단칼에 거절했다는 말에 우페이푸는 코웃음치면서 창사 진격을 명령하였다. 큰 소리쳤던 것도 온데간데 없이 막강한 우페이푸의 군대 앞에서 탕성즈는 여지없이 대패하였다. 4월 19일 웨저우가 함락되었고 5월 2일에는 창사가 함락당하였다. 탕성즈는 남쪽의 헝양으로 후퇴하였다. 한달 만에 패망의 위기에 직면한 그는 잔존 부대를 모아서 헝양에서 수비 태세를 강화하는 한편, 국민 정부에 급히 도움을 요청하였다. 탕성즈를 돕는다는 것은 바꾸어 우페이푸는 물론이고 그의 동맹자인 장쭤린과도 정면으로 대결한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과연 이길 수 있는가. 하지만 장제스는 망설이지 않았다. 기다리고 기다려 왔던 북벌에 나설 호기가 드디어 온 것이었다. 군권을 쥐고 있는 장제스의 강력한 건의에 국민정부는 탕성즈의 지원에 나서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구원부대로 우선 리지선의 국민혁명군 제4군 독립연대를 헝양으로 급파하였다. 이 부대는 국민혁명군에서도 공산당이 장악하고 있는 대표적인 부대이기도 했다. 연대장은 예팅(葉挺). 바오딩 군관학교를 졸업한 유능한 인재이자 공산당원이었다.
후난 출병과 함께 북벌 계획은 빠른 속도로 현실화되었다. 그리고 1926년 6월 4일 국민 정부는 북벌의 시작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장제스가 국민혁명군의 총사령관으로 추대되어 북벌의 지휘봉을 들게 되었다. 그리고 리지선이 총참모장, 보충시가 참모차장, 덩옌다(鄧演達)가 총정치부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북벌군의 병력은 기존의 7개군에 새로이 제8군으로 개편된 탕성즈의 군대까지 합하여 도합 총 10만명에 달하였다. 선봉은 탕성즈의 제8군 1만명. 사기는 하늘을 찌르듯 충천하였다.
그리고 7월 9일 장제스는 북벌군의 출정을 선언하였다. 중국 통일을 향한 북벌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