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쭤린 최대의 위기
궈쑹링의 반란은 장쭤린에게는 그야말로 허를 찌르는 사건이었다. 양위팅, 지앙덩선 등이 남방에서 쑨촨팡의 공격으로 패배하자 장쭤린은 펑톈군을 우리의 야전군에 해당하는 6개의 방면군으로 개편하고 재차 반격의 준비를 하였다. 그 중에서도 장쭤린은 장남 장쉐량에게 제3방면군의 지휘를 맡기는 한편, 일본에 관전 무관으로 나가있었던 궈쑹링을 급히 불러들여서 장쉐량을 보좌토록 하였다. 명목상으로는 장쉐량이 제3방면군의 사령관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궈쑹링이 장악하였다.
제3방면군의 전력은 3개군(제8, 제9, 제10군) 6개 사단(제4사단, 제5사단, 제6사단, 제7사단, 제10사단, 제12사단) 외에 2개 포병여단, 5개 공병 대대 등 8만명에 달했다. 동북과 베이징을 연결하는 교통로를 방위하는 펑톈군의 전략 예비대이자 최강 부대였다. 나머지 5개 방면군은 제3방면군에 비하면 병력과 무기, 장비의 수준, 훈련도 등 어느 면에서도 감히 비교가 되지 않았다. 또한 제3방면군에 소속된 부대는 모두 이전에 궈쑹링이 지휘하거나 훈련시킨 부대였다. 또한 고위 간부들 중에는 양위팅의 사관파인 제8군 군장 우진(于珍), 제9군 군장 한린춘(韓麟春) 등 다른 계파 출신들도 있었지만 정작 실권은 궈쑹링이 임명한 여단장, 연대장, 대대장 등 중견 간부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제3방면군은 궈쑹링 한 사람에게 충성하는 사병 집단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톈진에 사령부를 둔 제3방면군의 역할은 산하이관을 포함한 즈리성 동북부의 방어였다. 중국 통일의 야심이 있는 장쭤린으로서는 관내 진출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생명선을 맡긴 셈이었다. 또한 장쭤린의 잠재적인 적이자 베이징을 차지하고 있는 펑위샹을 견제하는 역할도 하였다. 만약 이곳을 잃는다면 관내에 출동 중인 펑톈군의 태반은 퇴로가 차단되어 괴멸할 것이며 중원 진출 또한 포기해야 할 것이다. 그런 중책을 다른 심복들을 제쳐두고 굳이 궈쑹링에게 맡겼다는 것은 그만큼 장쭤린이 절대적으로 신뢰했다는 의미였다. 제2차 펑즈 전쟁을 전후하여 벌어진 펑텐파 내부의 갈등이나 궈쑹링의 불만과는 상관없이 장쭤린이 그를 조금이라도 의심하거나 신뢰를 거두어들였다는 증거는 없다.
사실 장쭤린으로서는 궈쑹링을 의심할 충분한 소지가 있었다. 창장 하류에서 쑨촨팡이 즈리파 군벌들을 규합하여 반격에 나서고 장쭤린의 동맹자였던 펑위샹과도 서로의 모순과 불신이 깊어지면서 양측의 충돌은 폭발 직전이었다. 장쭤린은 우선 펑위샹의 국민군을 격파하여 후방을 안정시킨 연후에 다시 남방으로 진출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궈쑹링은 이미 일본에서 한푸쥐를 통하여 펑위샹과 밀약을 맺고 서로 공격하지 않기로 약속하였다. 그는 장쭤린의 거듭된 명령에도 불구하고 명분없는 전쟁이라며 완강하게 반대하였다. 또한 장쭤린에게 관내 진출을 포기할 것과 군대를 되돌려서 동북의 보경안민(保境安民)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항명이나 다름없었다. 여기다 궈쑹링의 처 한수슈는 펑위샹의 처와 옌징 대학(燕京大学)에서 함께 동문수학하여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궈쑹링이 펑위샹과 내통할 여지가 충분히 있었음에도 펑톈군의 생명선을 맡긴 것은 분명 위험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궈쑹링은 장쭤린이 직접 발탁한 사람이고 장남 장쉐량과는 사제지간이자 의형제이기도 하였다. 또한 사람 보는 눈 하나로 그 자리까지 올라온 장쭤린은 타고난 자신의 동물적인 감각과 궈쑹링의 인격을 철썩같이 믿고 있었다. 따라서 비록 궈쑹링이 불만이 있어도 등 뒤에서 느닷없이 비수를 들이대리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그는 자신의 지시에 거듭 항명하면서 움직이지 않는 궈쑹링을 장쉐량과 함께 불러들여서 설득할 참이었으나 그것이 궈쑹링을 벼랑끝으로 내몬 격이 되었다. 그동안의 항명에다 펑위샹과 내통하고 있던 궈쑹링은 만약 이대로 펑톈으로 돌아가면 틀림없이 장쭤린에게 잡혀서 죽을 것이라고 지레 겁을 먹었던 것이다. 온갖 산전수전을 겪은 장쭤린도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한 셈이었다.
11월 22일 밤, 궈쑹링이 보낸 "내전 반대"와 "장쭤린 하야"의 전문이 펑톈에 도착하자 펑톈군 사령부는 완전히 혼란에 빠졌다. 그야말로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던 장쭤린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자신의 방안에 틀어박혀 허공을 바라보며 담배만 연신 피울 뿐이었다. 그를 더욱 충격에 빠뜨린 것은 즈리 독군 리징린(李景林) 역시 궈쑹링의 편을 들었다는 점이었다. 원래라면 궈쑹링을 견제하고 감시해야 할 리징린이 함께 배반한 것은 장쭤린에 대한 원한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리징린은 즈리성 짜오창현(枣强县) 출신으로 북양 육군속성학당을 졸업하였다. 그는 장쭤린의 마적 집단으로 구성된 구파도 아니었고, 양위팅의 사관파나 궈쑹링의 육대파에도 속하지 않았다.
제2차 펑즈 전쟁 당시 펑톈군이 산하이관을 돌파하고 즈리군을 무너뜨리자 장쭤린은 제2군 군장이었던 리징린에게 러허성을 공략하라고 지시하였다. 하지만 리징린은 즈리성을 자신이 차지할 욕심으로 장쭤린의 명령을 어기고 멋대로 톈진을 점령한 후 즈리 성장 왕청빈을 쫓아내었다. 항명에 격분한 장쭤린은 분노를 터뜨리면서 당장 리징린을 잡아다가 총살하라고 길길이 날뛰었다. 하지만 궈쑹링이 나서서 무마한 덕분에 장쭤린은 불문에 붙이기로 하였고 리징린은 목숨을 건졌다. 이 사건으로 리징린은 궈쑹링에게 큰 은혜를 받은 셈이었지만 펑톈군 내부의 모순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장쭤린을 정점으로 하는 펑톈파는 안후이파나 즈리파 등 다른 북양 군벌들에 비하여 비교적 결속력이 강한 편이기는 했으나 주종의 관계로서의 충성심이나 의리를 찾아볼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궈쑹링이 리징린에게 은밀하게 펑위샹과의 동맹과 장쭤린 타도를 제안하자 그 또한 당장 찬성하였다. 그리고 궈쑹링이 거병하자 리징린 또한 즉시 전문을 발표하여 장쭤린더러 양위팅을 비롯한 주변의 간신배들을 처벌할 것과 모든 대권을 "작은 장군(小師)" 장쉐량에게 넘기고 편안한 말년을 즐기라고 하였다. 사흘 후인 11월 25일 펑위샹도 전국에 통전을 보내고 "장쭤린은 전쟁만 좋아하여 국가에 큰 화를 끼쳤다. 마땅히 자리에서 물러나서 동북3성의 정권을 인민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부하들의 복잡한 파벌 싸움과 갈등을 모를 리 없는 장쭤린은 궈쑹링이 반란을 일으킨 것도 그동안 자신이 양위팅을 중용하자 불만을 품은 탓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쑨촨팡에게 패하여 장쑤성을 잃고 펑톈으로 도망쳐 온 양위팅을 급히 불러들여서 한바탕 호통을 친 후 모든 직위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그리고 장쉐량을 궈쑹링에게 보내어 설득토록 하였다. 장쉐량은 몇몇 측근만 데리고 펑톈을 출발한 후 잉커우(營口)에서 연습함 전하이(鎭海)를 타고 11월 26일 친황다오에 도착하였다.
친황다오는 이미 궈쑹링의 수중에 넘어가 있었다. 장쉐량은 궈쑹링의 진영으로 가서 그를 만나려고 했으나 궈쑹링은 만나주지 않았다. 다음날 장쉐량은 예전에 궈쑹링을 치료한 적이 있는 일본인 의사에게 자신이 쓴 서신을 동봉하여 궈쑹링에게 보냈다. 궈쑹링은 고민 끝에 "작은 장군님(少帅, 장쉐량을 가리킴).이번 거사는 이미 여러 번 심사숙고한 결과입니다. 이제와서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만약 지금이라도 노장군(老帅, 장쭤린)께서 과거를 뉘우치고 스스로 물러난다면 나 또한 동북의 대권을 모두 작은 장군(장쉐량)에게 넘기고 일본으로 가서 자유로이 여생을 보내고자 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또한 자신의 뜻은 관동군 사령관인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중장을 통하여 보증할 수 있다고 장담하였다. 이것은 향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궈쑹링의 거병이 결코 반일 민족주의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궈쑹링은 장쭤린의 죄를 거론하면서 첫째로, 교육을 파괴한 죄, 둘째로 여론을 억압한 죄, 셋째로 내전을 일으킨 죄, 넷째로 인사가 공정치 않은 죄, 다섯째로 막대한 군비와 사치로 동북 인민의 생활을 어렵게 한 죄를 들었지만 막상 장쭤린이 일본과 결탁하여 국가 이권을 넘기려고 했다거나 국내 문제에 일본군을 끌어들이려고 하였다는 말은 없었다. 또한 그는 일본에 대하여 기존의 권익과 특혜는 모두 보장할 것이며 다만 앞으로 새로운 권익을 약속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만 했을 뿐이었다.
결국 그가 반란을 일으킨 가장 큰 이유는 펑톈군에 만연하던 파벌 싸움, 그리고 이를 묵인하는 장쭤린에 대한 개인적인 불만에 있지, 반일 네셔널리즘의 성격이나 군벌이 할거하는 중국의 혼란상을 해결하겠다는 의지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궈쑹링의 거병은 때마침 상하이에서 5.30운동으로 촉발된 反펑톈, 反제국주의 분위기와 연결되어 큰 환영을 받았다. 광저우를 비롯한 중국 전역에서 그를 지지하는 운동이 벌어졌고 공산당 역시 12월 1일 "궈쑹링에 호응하여 돤치루이-장쭤린 정권을 무너뜨리고 통일 정권을 수립하여 인민들에게 권력을 돌려주자"라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어쨌거나 장쉐량은 궈쑹링 설득에 실패하였고 그대로 다롄을 거쳐서 펑톈으로 돌아와야 했다. 장쭤린은 비로소 궈쑹링의 불만이 단순히 양위팅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름아닌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궈쑹링은 장쭤린을 대신하여 동북의 새로운 왕이 되겠다는 꿈을 꾸고 있었다. 이제 일전은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막을 수 있는가. 펑톈군의 태반은 산둥성에서 쑨촨팡과 대치하고 있었고 리징린마저 궈쑹링에게 가담키로 한 이상 장쭤린에게는 병력도, 무기도 변변찮은 2선급 부대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여기다 펑톈으로 귀환 중이던 지앙덩선(姜登選)이 11월 27일 궈쑹링에게 체포되어 총살당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쑨촨팡에게 패하여 산둥성으로 철수한 그는 더저우(德州)에 주둔한 채 패잔병을 수습하는 한편, 장쭝창과 연합하여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장쭤린은 그를 제4방면군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병력의 휴식과 재편을 위하여 펑톈으로 돌아오라고 지시하였다. 지앙덩선은 자신의 군대를 거느리고 진푸 철도를 통하여 올라오던 도중 궈쑹링이 있는 란저우에 도착하였다. 궈쑹링은 자신의 참모장을 보내어 그를 초대하였다. 그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몰랐던 지앙덩선은 아무런 의심도 없이 궈쑹링을 만나러 갔다가 어이없이 살해되고 말았다.
궈쑹링이 지앙던선을 죽인 것은 무엇 때문인가. 지앙던선은 양위팅의 "사관파"였고 제2차 펑즈전쟁에서는 산하이관 돌파를 놓고 궈쑹링과 크게 싸운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앙덩선이 궈쑹링의 초대를 받자 아무런 경계도 없이 혼자서 그의 사령부를 찾아갔다는 점에서 불구대천의 철천지 원수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궈쑹링은 지앙덩선을 처형한 이유로 "민심을 잃고 사리사욕만 챙기려 했기 때문"이라고 했으나 정당한 재판도 없이 비열한 방법으로 목숨을 빼앗았다는 점에서 오히려 사람들은 도량이 좁은 그가 이전의 원한을 잊지 않고 보복을 한 것이라고 여겼다.
어쨌거나 궈쑹링은 지앙덩선을 죽이고 제4방면군까지 장악하여 세력을 한층 불렸다. 부군장 한린춘은 때마침 몸이 좋지 않아 잠시 병원에 있었는데 그 소식을 듣고 재빨리 달아났다. 11월 30일 궈쑹링은 전군을 5로로 나누어 펑톈으로 진군을 개시하였다. 또한 일부 부대를 남쪽으로 보내어 랑팡(廊坊)과 창저우(滄洲) 등을 점령하여 후방의 위협을 제거하였다. 장쭤린도 정식으로 궈쑹링에 대한 토벌령을 내리고 장쉐량을 토벌 총사령관에 임명하여 전선으로 내보냈다. 한때 면직당했던 양위팅도 다시 복직하였다.
궈쑹링의 군대는 하늘을 찌르는 기세로 러허성을 침공하였다. 러허성을 지키는 수비 부대는 장쭤상의 제5방면군에 속한 러허 도통 칸자오시(闞朝璽)의 제12군이었다. 병력은 약 4만명. 하지만 2선급의 예비 부대에 불과했기에 오합지졸에 지나지 않았다. 칸자오시는 원래 순방영 시절 장쭤린의 서기였던 자로 펑톈육군강무당 보병과를 졸업한 후 장쭤린 휘하에서 여러 차례 공을 세운 역전의 장군이었다. 하지만 그도 궈쑹링의 기세에 눌려 감히 대항하지 못하였다. 제11사단장 탕위린(湯玉麟)은 소시적부터 장쭤린과 함께 마적질을 하면서 호형호제하던 사이였으나 오만불손한데다 매우 부패하고 무능한 자로 장쭤린의 눈 밖에 나는 바람에 한동안 추방당하기도 했던 위인이었다. 옛 친분을 앞세워 용서를 빈 덕분에 제11사단장이 되어 러허성의 요충지인 자오양(朝阳)에 주둔하고 있었으나 속으로는 여전히 과거의 앙금이 남아 있었다. 제16사단장 우천청(于琛澂)도 이전부터 장쭤린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특히 우천청의 제16사단은 산하이관 이남의 베이다이허(北戴河)에 주둔하고 있었기에 궈쑹링이 군대를 이끌고 북상하려면 반드시 거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들은 장쭤린과 궈쑹링 사이에서 서로 어느 편이 유리한지 저울질하면서 궈쑹링 쪽에 몰래 접근하여 편을 드는 대가로 높은 지위와 새로운 영토를 요구하였다. 주변의 참모들은 궈쑹링에게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여서 같은 편으로 끌어들여야 한다고 건의했으나 정세가 매우 유리하다고 생각했던 궈쑹링은 한귀로 흘러버렸다. 결국 이들은 궈쑹링이 장쭤린과 한창 결전을 벌이고 있을 때 뒷통수를 침으로서 궈쑹링 몰락에 한축을 맡게 된다.
또한 궈쑹링은 펑톈파의 2인자로서 지린성장인 장쭤상을 끌어들일 요량으로 포로가 된 그의 아들을 석방하고 밀사로 파견했으나 반란에 가담할 생각이 없었던 그는 오히려 아버지에게 궈쑹링의 반란을 밀고하였다. 그 외에도 궈쑹링의 편을 들어봐야 별 재미가 없다고 판단한 펑톈군의 간부들은 어느 한 사람 그의 진영에 가담하지 않았다. 휘하의 항공 부대 역시 모두 펑톈으로 도주하였다.
* 관동군 개입하다
상황이 썩 유리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궈쑹링의 거병 초반에는 연전연승이었다. 과연 펑톈군 제일의 전술가답게 전투에서는 누구도 감히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그는 징펑 철도(베이징~펑톈을 연결하는 철도)를 따라서 북상하면서 앞을 가로막는 장쭤린 측의 부대를 모조리 격파하고 러허성을 손쉽게 장악하였다. 여기에는 칸자오시를 비롯하여 러허성에 배치된 펑톈군 부대들이 대부분 중립을 지키면서 싸움을 회피한 덕분이기도 했다. 12월 2일에는 폭설이 쏟아지는 가운데 롄산(連山)으로 육박하여 하루 만에 점령하였고 12월 7일에는 동북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진저우를 공략하였다. 수비대는 변변히 싸우지도 않고 달아났다. 진저우에서 펑톈까지는 고작 150km에 불과하다. 진저우 함락의 보고를 받은 장쭤린은 안색이 새하얗게 변했다.
장쭤린은 급히 회의를 열고 침통한 표정으로 "대세가 결정된 것같으니 아무래도 내가 물러나야겠다"라고 말하였다. 산전수전을 겪었던 장쭤린조차 부하들 앞에서 제 입으로 하야를 거론할 정도로 상황은 급박하였다. 그는 자신의 사령부 앞에 수십대의 차량을 대기시켜놓고 허둥지둥 사재를 실은 다음 처첩과 어린 자식들과 함께 랴오둥 반도의 다롄으로 내려보냈다. 랴오둥 반도는 러일전쟁 이래 일본의 조차지로 일본은 "관동주"라 불렀다. 또한 다롄에는 관동군 사령부가 있었다. 따라서 만약 전쟁에 패한다면 중국의 주권이 미치지 못하면 다롄으로 도피하거나 일본으로 망명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장쭤린이 가장 두려워 하는 일은 주력부대가 궈쑹링을 막고 있는 사이, 펑텐에서 병변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가장 믿었던 부하에게 배신당한 그는 이미 누구도 믿을 수 없었기에 관동군의 힘을 빌리기로 마음 먹었다. 펑톈 성장 대리인 왕융장이 일본 총영사관으로 가서 일본군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1천여명의 일본군이 즉각 출동하여 펑톈의 성문과 정부 청사, 교차로 등에 속속 배치되어 엄중하게 경계하였다. 하지만 궈쑹링이 군대를 이끌고 당장이라도 펑텐에 들이닥친다면 장쭤린으로서는 어떻게 해 볼 수도 없다. 여기다 산둥 독군 장쭝창은 장쭤린을 돕기는 커녕, 도리어 이때다 하면서 "자립"을 선언하였다. 의리나 충성심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위인이었다. 어차피 장쭝창으로서는 남쪽에서 북상하는 쑨촨팡을 막기에도 급급하여 장쭤린을 도울 처지도 아니었다. 펑톈에 남은 병력이라고는 베이다잉(北大營)에 주둔한 왕루이화(王瑞華)의 제4보충 여단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전에 궈쑹링의 제6혼성여단에서 부연대장으로 복무한 적이 있었다. 궈쑹링과 내통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셈이었다.
진저우가 함락된 다음날인 12월 8일 아침, 장쭤린은 왕루이화를 비롯한 위관급 이상 장교 100여명을 모두 자신의 사령부로 불러모았다. 장쭤린은 살기어린 표정으로 노려보면서 호통을 쳤다. "내가 너희들을 부른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잘 알 것이다. 궈가놈(郭鬼子)이 모반을 일으켰다!" 그는 궈쑹링에 대한 욕을 한바탕 퍼부은 후에 자신을 따를지 궈쑹링을 따를지 양자 택일을 하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왕루이화 이하의 장교들은 모두 장쭤린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끝까지 싸우겠다고 선언하였다.
그제야 장쭤린은 노기를 누그러뜨리면서 왕루이화를 혼성 여단장으로 임명하고 나머지 장교들도 한계급씩 특진시키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리고 무기와 돈을 줄테니 병사를 모집하여 궈쑹링과 한바탕 싸우라고 하였다. 그는 기자들을 불러모아서 "대등한 상대라면 몰라도 부하에게 패하여 하야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결코 참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10만의 병사를 모아서 요하에서 그를 일거에 섬멸할 것이다"라며 기세 등등하게 말하였다. 급히 다링허(大凌河)의 철교를 폭파시켜 궈쑹링군의 진격을 지연시키는 동안, 동쪽에서는 지린 독군 장쭤상과 헤이룽장 독군 우쥔성(吳俊陞)이 군대를 수습하여 각각 지린군과 헤이룽장 군을 이끌고 전선으로 달려왔다. 구파의 원로들인 이들은 비록 능력은 없지만 우직하고 야심이 적으며 장쭤린에 대한 오랜 충성심이 있었다. 다른 펑톈군 간부들이 어느 쪽에 붙을까 저울질 하면서 눈치만 보는 것과 달리, 이들은 결코 두 마음을 품지 않았다. 아직 장쭤린의 운은 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12월 10일, 궈쑹링 군의 선봉이 다링허를 도하하였다. 펑톈군은 펑톈 북서쪽 50km 떨어진 신민(新民)에서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신민에는 고구려 시절 요수(遼水) 또는 요하(遼河)라 불리었던 쥐류허(巨流河)가 흐른다. 양군은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였다. 진저우까지 파죽지세로 북상한 궈쑹링이었지만 점차 피폐해지고 있었다. 추위와 폭설로 많은 병사들이 동사하였고 식량은 물론 무기와 탄약도 부족하였다. 자신이 장쭤린 타도의 깃발만 올리면 그동안 장쭤린에게 불만이 있는 자들이 한꺼번에 들고 일어나리라고 여겼지만 크나큰 오산이었다. 대부분의 간부들은 중립을 지키거나 장쭤린에게 충성하였고 궈쑹링에게 가담하는 자는 거의 없었다.
궈쑹링의 부하들 역시 그의 대의명분에 동조했다기보다 마지못하여 따르는 것이다보니 전선을 이탈하거나 원래의 상전인 장쭤린에게 투항하여 총부리를 되돌리는 자들도 많이 있었다. 동맹자인 펑위샹은 움직일 수 없는 처지였고 리징린 역시 말로만 궈쑹링을 지지했을 뿐, 막상 도움을 주지는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상황을 방관하면서 자신의 지반을 굳히기에만 급급하였다. 궈쑹링은 고립무원이나 다름없었다. 여기다 그가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끼어들었다. 바로 관동군의 개입이었다.
일본은 러일전쟁 이래 남만주에서 많은 이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남만주 철도, 이른바 "만철"이었다. 1901년 러시아는 만주 전역에 동청 철도를 부설했으나 러일전쟁에서 패배하면서 동청 철도 중에서 창춘 이남의 철도를 일본에게 넘겨야 했다. 이것이 남만주 철도이다. 1906년 12월 7일에 남만주철도주식회사가 설립되었다. 주요 간선과 지선을 포함하여 총길이는 1,100km. 뤼순에서 출발하여 펑톈, 창춘, 안둥 등 남만주의 주요 도시를 모두 관통하였다. 또한 일본군은 철도 경비를 명목으로 철도 연선과 철도가 관통하는 도시마다 군대를 주둔시킬 수 있었고 만철은 만주 침략의 첨병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 수년 뒤 일어나는 만주 사변 역시 만철의 권익을 놓고 벌어진 사건이었다.
오랫동안 장쭤린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왔던 관동군은 궈쑹링이 반란을 일으키자 겉으로는 중립과 불간섭을 선언하면서도 뒤로는 장쭤린, 궈쑹링 양쪽에게 접근하였다. 이것은 중국 내전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본국 정부의 방침을 정면으로 어기는 것이지만 양다리를 걸치고 어느 쪽에 가담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더 이익이 될지 저울질한 것이다. 궈쑹링은 일본의 기존 권익에 대해서는 유효하다고 했지만 그 이상의 것은 양보할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관동군은 궈쑹링이 이겨도 자신들이 별로 얻을 것은 없다고 판단하였고 장쭤린의 편에 서기로 하였다.
진저우가 궈쑹링의 손에 함락된 날, 관동군 사령관 시라카와는 참모장인 사이토 히사시(斎藤恒) 소장 등을 장쭤린에게 보내어 궈쑹링 토벌을 돕겠다고 제안하였다. 사이토 소장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장쭤린의 신변을 반드시 보장하겠다고 약속하였다. 또한 본국의 중립 방침에 따라서 관동군이 직접 장쭤린을 도와 궈쑹링을 공격할 수는 없지만 대신 이들이 남만주 철도 12km 이내에 접근하는 것을 차단할 것이며 만약 그 안으로 포탄 한발이라도 떨어진다면 결코 묵과하지 않을 것, 그리고 궈쑹링이 군대의 수송에 만철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하였다. 이렇게 되면 궈쑹링은 군대의 기동과 군사 작전에 심각한 제약을 받을 수 밖에 없었고 신속한 승리는 물건너가는 셈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조건이 있었다. 동북에서 일본인의 토지와 상업, 거주의 자유를 보장할 것과 주요 도시에 일본 영사관의 설치를 허락할 것, 간도 지구에 대한 행정권의 양도 등이었다. 이는 중국인의 터전을 빼앗고 장쭤린을 꼭두각시로 만들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장쭤린의 위기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려는 심보가 뻔히 보였지만 어차피 발등이 불 떨어진 장쭤린으로서는 일본을 상대로 협상을 할 처지도 아니었다. 만약 사이토의 심기를 건드렸다가 자칫 궈쑹링의 편에 선다면 그로서는 파멸할 판이었다. 장쭤린은 사이토에게 연신 "좋아, 좋아"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른바 "일본-펑톈밀약(日奉密约)"을 체결하였다. 장쭤린은 당장은 양보하는 척하면서, 나중에 안면을 싹 바꾸면 제놈들이 어쩌겠느냐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관동군이 그리 호락호락한 자들인가. 이 때의 경솔함이 훗날 자신의 명줄까지 앞당기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으리라.
궈쑹링은 부대를 둘로 나누어 하나는 신민, 또 하나는 남쪽의 잉커우로 진격한 후 펑톈을 남북으로 협공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잉커우로 진격하던 궈쑹링 군은 관동군의 강력한 저지를 받았다. "일본은 남만주 철로 12km 이내의 모든 전투 행위를 일체 금지한다" 또한 관동군은 남만주 철도가 지나가는 주요 도시마다 "무장 부대의 진입을 금한다"라는 푯말을 내걸었다. 일본 정부 역시 조선 주둔군을 포함하여 2개 사단을 만주로 증파하였다. 만주에 주둔한 일본군은 3개 사단 4만명에 달하였다. 펑톈 공략을 눈앞에 두고 있었던 궈쑹링으로서는 그야말로 거대한 만리장성이 땅밑에서 치솟아 올라와서 자신을 가로막는 꼴이었다. 그렇다고 일본군을 상대로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가 머뭇거리는 와중에 동북 각지에서 몰려든 병력이 속속 도착하면서 장쭤린 측의 전력은 빠르게 강화되었다. 또한 궈쑹링은 이미 무기와 탄약이 고갈된 반면, 장쭤린은 관동군으로부터 대량의 군수품을 원조받았다. 전세가 급격하게 불리해진 궈쑹링은 모든 전력을 신민을 공격하는데 투입하였다. 여기서 장쭤린과 건곤일척의 결전을 할 셈이었다. 장쭤린 또한 장쉐량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신민에 병력을 집결시켰다. 양군은 쥐류허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였다. 병력은 궈쑹링이 6만명, 장쭤린이 8만명.
12월 21일 저녁 6시, 궈쑹링은 전군에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스승과 제자의 대결이었지만 장쉐량은 궈쑹링의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격렬한 포화 속에서 궈쑹링의 선진 부대가 쥐류허를 도하하여 동쪽 강변으로 진격하였다. 궈쑹링의 공격을 견디지 못한 장쉐량은 퇴각 명령을 내렸다. 펑톈군의 최일선이 붕괴되면서 다음날 새벽 궈쑹링의 주력부대 3만명이 신민에 입성하였다. 이제 펑톈으로 가는 길은 열린 셈이었다. 궈쑹링은 전쟁에 이겼다고 생각했지만 함정이었다. 그가 정면의 적에게만 신경쓰는 사이, 장쭤린이 우쥔성을 시켜서 2개 기병사단으로 궈쑹링의 후방을 습격한 것이다. 신민에서 남서쪽으로 20km 정도로 떨어진 바이치보(白旗堡)를 기습한 우쥔성은 화물열차에 잔뜩 탑재된 궈쑹링 군의 식량과 탄약, 무기 등 보급 물자를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 불탄 탄약은 총알 2백만발, 포탄 5천발이 넘었다. 궈쑹링으로서는 그야말로 치명타였다.
장쭤린은 항공기를 이용하여 궈쑹링 군의 상황을 손바닥처럼 들여다볼 수 있었고 기병부대로 궈쑹링의 후방을 교란하였다. 기병부대도, 항공기도 없던 궈쑹링은 매우 불리하였다. 또한 극심한 추위와 식량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여기에 보급부대가 괴멸하고 장쉐량이 총반격에 나서면서 궈쑹링 측 병사들은 사기가 완전히 땅에 떨어진 채 속속 이탈하여 장쭤린의 진영으로 넘어가거나 병변을 일으켰다. 승패는 결정났다. 12월 24일 오전 1시, 궈쑹링은 주요 간부들을 급히 소집하여 회의를 개최하였다. 그는 패배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모든 전투를 중지할 것을 지시하였다. 또한 자신은 부인 한수슈와 함께 200여명의 호위병을 데리고 탈출하겠다고 말하였다. 장쉐량에게도 전문을 보냈다. "사령관님, 걱정마십시오" 10여년 동안 동거동락을 함께 했던 그의 마지막 하직 인사였다.
하늘에서는 펑톈군의 항공기들이 쉴새 없이 날아다니면서 "오직 궈쑹링 한사람에게만 모든 죄가 있으며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겠다"라고 적힌 삐라를 사방에 뿌렸다. 그것을 본 궈쑹링 군은 전의를 상실한 채 속속 투항하였다. 궈쑹링 부부는 경호원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진저우 방면으로 도주했다. 하지만 도주로는 이미 펑톈군에 의하여 완전히 차단되어 있었다. 궈쑹링은 방향을 돌려서 잉커우로 향했다. 배를 타고 남쪽으로 도망칠 셈이었다. 그들은 달아나는 도중에 왕융칭(王永淸)이 지휘하는 펑톈군 제7기병 여단의 추격을 받았다. 호위병들이 격렬하게 저항하는 동안 궈쑹링 부부는 겨우 몸을 피하여 산속으로 도망쳤다. 치열한 전투 끝에 호위병들은 모두 항복하였다. 왕융칭은 병사들을 풀어서 사방을 수색하게 하였다.
이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토굴에서 발견되었다. 궈쑹링은 이미 틀렸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밖으로 나온 후 체포되어 가까운 농가에 감금되었다. 기병사단장 무춘(穆春)은 장쭤린에게 전화를 걸어서 궈쑹링 부부를 사로잡았다고 보고하였다. 장쭤린은 일단 기다리라고 한 후 다음날 아침 부관을 보냈다. 펑톈까지 끌고 올 것 없이 그 자리에서 총살시키라는 것이었다. 25일 10시 쥐류허의 강변에서 궈쑹링과 한수슈 부부는 총살당하였다. 궈쑹링 42세, 한수슈 34살이었다. 이들의 시체는 펑톈으로 보내졌고 3일 동안 사람들 앞에 전시되었다. 어떻게든 궈쑹링을 구명해 보려고 백방으로 노력 중이던 장쉐량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발을 구르며 한탄하였다. "끝났구나!" 이로서 11월 22일부터 12월 24일까지 약 한달 동안 중국 대륙을 진동케 했던 궈쑹링의 반란은 끝나고 말았다.
궈쑹링의 반란은 북방에서 군벌들의 항쟁을 더욱 격화시켰다. 또한 反외세, 反군벌, 민족주의 열기가 중국 전역으로 확산되면서 군벌 내전은 새로운 양상을 띄게 되었다. 장제스가 군벌 타도를 외치면서 북벌 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신해혁명 이래 군벌 내전은 드디어 그 종막을 향하여 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