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난커우(南口)의 격전
장제스가 북벌의 출정에 나설 때 북방의 상황은 어떠했는가. 전황은 국민군에게 매우 불리하였다. 북쪽에서는 장쉐량이 지휘하는 펑톈군의 공세에 웨이위산은 산하이관을 버리고 롼저우로 퇴각하였다. 또한 4월 6일에는 탕위린의 제12군이 쑹저위안(宋哲元)을 격파하고 러허성을 장악하였다. 쑹저위안은 잔여 부대를 이끌고 차하르성으로 후퇴하였다. 남쪽에서는 우페이푸가 국민군 제2군을 격파하고 허난성을 장악하였고, 동쪽에서는 장쭝창-리징린의 직노연합군이 톈진을 점령하였다. 또한 산시성의 옌시산 역시 "어부지리"를 얻을 요량으로 우페이푸와 손을 잡고 산시군을 출동시켜 즈리성 남부의 스좌장을 공략하였다. 국민군이 전면 붕괴의 위기에 직면하자 국민군 제4군장 웨이위산과 제2혼성 여단장 팡빙쑨(龐炳勳) 등 일부 부대는 백기를 들고 우페이푸에게 투항하였다.
연합군이 남쪽과 북쪽, 동쪽에서 점점 포위망을 죄어오면서 국민군 총사령관 대리인 장즈장은 1926년 4월 15일 결국 베이징을 버리고 서북쪽으로 60km 떨어진 빠다링(八达岭)으로 후퇴하였다. 지난 1년 동안 베이징에서 주인 노릇을 했던 돤치루이 역시 톈진의 일본 조계로 달아났다. 사방팔방으로 길이 통한다는 "사통팔달(四通八达)"에서 유래했다는 빠다링은 해발 1천m가 넘고 산세가 매우 험준하여 그야말로 천하의 요지라 할 만한 곳으로, 수도 베이징을 지키는 관문의 하나인 쥐융관(居庸關)이 있다.
또한 빠다링에서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는 난커우(南口)라는 도시가 있었다. 난커우는 징쑤이철도(京綏鐵道, 베이징과 내몽골의 바오터우包頭를 연결하는 철도. 1905년에 착공을 시작하여 1923년에 바오터우까지 개통하였다. 총연장 842km의 철도로 전략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하다)가 관통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베이징을 빼앗긴 국민군은 빠다링에서 병력을 재정비하는 한편, 참호를 파고 진지를 구축하여 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반공 연합군으로서는 당장 베이징이 코앞에서 위협받는데다 중원에서 서북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곳을 점령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4월 26일 베이징의 새로운 주인이 된 장쭤린은 보무도 당당하게 입성하였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주요 건물과 길목마다 기관총과 박격포가 배치되었고 펑텐군 병사들이 착검을 한 채 삼엄하게 경비하는 가운데, 장쭤린이 탄 장갑열차가 베이징 역에 당도하였다. 역 플랫폼에 내린 그는 자신의 전용 방탄차인 "펑톈 1호"에 올라탔다. 그리고 앞뒤로 50여대에 달하는 차량들의 철통같은 수행을 받으면서 중심가로 향하였다. 보는 이들을 압도하는 위풍당당함은 마치 과거 왕조 시절 황제가 행차하던 것을 연상케할 정도였다. 장쭤린의 행렬이 향한 곳은 순청준왕부(順承君王府). 앞으로 이곳을 자신의 원수부로 삼아서 천하를 호령할 생각이었다.
물론 우페이푸도 지지 않았다. 장쭤린이 입경한 이틀 뒤, 우페이푸 또한 화려하게 장식한 특별 열차를 타고 비행기의 호위까지 받으며 베이징으로 들어왔다. 장쭤린은 직접 그의 숙소를 방문하여 환대하였다. 몇 년 전 차오쿤 앞에서 우페이푸더러 "한낱 사단장 따위"라고 모욕을 주었던 일은 완전히 잊은 듯, 장쭤린은 자신보다 두 살 많은 우페이푸에게 넉살 좋게 "형님"이라고 부르면서 그를 흡족하게 하였다. 두 사람의 속내가 어떻든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장쭤린은 국민군 공격에 대한 총지휘권도 우페이푸에게 순순이 양보하였다. "우리 부대는 모두 형님의 지휘를 받겠습니다." 그로서는 우페이푸를 슬쩍 치켜세워줌으로서 힘든 일을 죄다 떠맡기고 자신은 가만히 앉아서 실속을 챙길 생각이었지만 단순한 성격의 우페이푸는 장쭤린의 속셈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오히려 뜻밖에도 고분고분한 장쭤린의 태도에 더욱 의기양양해졌다. 그는 자신의 군사적 역량을 장쭤린에게 뽑낼 요량으로 열흘 안에 국민군을 격파하고 난커우를 점령하겠다고 큰소리쳤다. 또한 부하들에게는 가장 먼저 난커우를 점령한 사람에게 차하르성을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우페이푸는 베이징 남서쪽 창신뎬(长辛店)에 사령부를 설치하였다. 즈리군 주력 4개 군(제1~4군)과 장쉐량, 한린춘이 지휘하는 펑톈군 제3, 제4방면군 4개 군(제9군, 제10군, 제16군, 제17군)이 속속 베이징으로 집결하였다. 또한 북쪽에서는 헤이룽장성 독판 우쥔승이 지휘하는 펑톈군 제6방면군 3개 군(제8군, 제12군, 기병 제1군)이 차하르성으로 진격하여 둬룬(多倫)을 공격하는 한편, 국민군의 후방인 장자커우(張家口)를 위협하였다. 장쭝창-리징린의 직노 연군 역시 4개 군(제1군, 제5군, 제6군, 제11군)을 북상시켜 창핑(昌平), 사허(沙河)에 주둔하면서 난커우 공략의 정면을 맡았다. 남서쪽에서는 옌시산의 부장 샹전(商震)이 이끄는 산시군 4개 사단 및 1개 포병 연대가 산시성 북쪽의 다퉁(大同)에서 국민군의 측면을 치고 퇴로를 차단할 태세를 갖추었다. 국민군은 서쪽을 제외하고는 삼면이 완전히 포위된 형세가 되었다. 연합군의 병력은 거의 50만명에 달했다.
국민군도 병력을 둘로 나누어 루쭝린을 동로군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4개 군(제1군, 제2군, 제4군, 제9군) 10만명으로 난커우를 굳게 지키는 한편, 쑹저위안을 서로군 총사령으로 임명하고 3개 군(제5군, 제6군, 제8군) 8만명으로 다퉁을 치게 하였다. 또한 장홍위(蔣鴻遇)가 지휘하는 제12사단을 예비대로 남겼다. 양군의 전투는 5월 18일부터 시작되었다. 남쪽에서 쑹저위안의 서로군이 옌시산의 산시성을 침공하여 펑전(丰镇)과 양가오(阳高)를 점령하고 다퉁으로 진격하였다. 옌시산으로서는 뜻밖의 통격이었다. 이 기회주의자는 국민군과 우페이푸가 치열하게 싸우는 동안 느긋하게 굿이나 보면서 적당히 어부지리를 얻을 심보였다. 하지만 쑹저위안의 맹렬한 공격으로 산시성 북부의 요충지인 다퉁을 빼앗긴 채 남쪽으로 밀려났다. 이와 동시에 우페이푸도 난커우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그런데 우페이푸의 공격은 뜻밖에도 지지부진하였다. 작전의 문제라기보다 눈앞의 탐욕에 눈이 먼 군벌들의 모순 때문이었다. 즈리군 제1군을 맡고 있는 진윈어(靳雲鶚)가 국민군과 몰래 내통하다 발각되었다. 돤치루이 정권에서 국무총리를 지낸 진윈펑의 동생이자 우페이푸의 오랜 심복이었던 그는 얼마 전 허난성에서 국민군을 몰아낸 공을 인정받아 우페이푸로부터 허난성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독자적인 기반을 마련한 그는 더 이상 국민군과의 싸움은 관심 밖이었고 새로 획득한 영토를 지배하기에 급급했다. 여기다 산둥성까지 욕심을 내었는데, 예전에 즈리파에 속했던 부대들을 회유하여 3개 사단을 자신의 휘하에 흡수하였다. 산둥성은 장쭝창의 영토였기에 장쭝창은 물론이고, 장쭤린 역시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이 때문에 펑톈군과 즈리군이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눌 뻔했으나 이 사실을 안 우페이푸가 진윈어를 불러서 호되게 질책한 후 잠시 자리에서 물러나도록 하였다. 그러나 우페이푸의 처사는 도리어 한쪽팔을 제 손으로 자른 꼴이었다. 진윈어는 얼마 뒤 북벌군을 막기 위하여 다시 기용되기는 했지만 이 일을 잊지 않았고 앙심을 품은 그는 결국 북벌군에 가담하여 상전의 목에 비수를 들이대게 된다.
또한 장쭝창을 대신하여 직노 연군 총사령관이 되어 난커우 공격의 정면을 맡은 리징린 역시 이전과 달리 싸움에 소극적이었다. 그 역시 국민군을 공격하는 것보다 자신의 원래 지반이었던 즈리성을 되찾는 것이 우선이었다. 게다가 장쭤린과 결별하고 독립 세력으로 자립하겠다는 야심까지 품고 몰래 국민군, 쑨촨팡 등과 연합하여 우군인 장쉐량, 한린춘을 공격할 준비를 하였다. 몇달 전 궈쑹링의 반란에 가담했다가 장쭤린에게 한번 용서를 받은 바 있었던 그는 여전히 허황된 욕심을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음모는 금새 발각되었다. 낌새가 수상하다고 여긴 장쉐량은 발빠르게 대응하였고 주위푸(褚玉璞)를 시켜서 리징린의 사령부를 선제 공격하였다. 거사를 시도해보지도 못하고 무장 해제당한 리징린은 6월 29일 하야를 선언하고 상하이로 달아났다. 그리고 쑨촨팡에게 귀순하려 했으나 거절당하였고 장제스의 북벌군이 북상하여 쑨촨팡을 격파하자 이번에는 북벌군에게 투항하려 했지만 가던 도중에 주위푸의 부하들에게 붙들려 포로가 되었다. 그나마 그와 친분이 있었던 일본 영사관이 중재한 덕분에 풀려날 수 있었지만 군벌로서의 생명은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후 난징에서 은거하면서 무술 학원을 운영하다가 1931년에 산둥성 지난에서 병사함으로서 카멜레온같은 인생에 종지부를 찍었다.
한편, 남쪽에서는 즈리파 "5성 연합군"의 수장인 쑨촨팡이 쉬저우에 대군을 주둔시킨 채 어느 편에 붙을 지 모호한 태도로 관망하고 있었다. 원래 우페이푸의 부하였던 그는 창장 이남의 5개 성에 걸쳐 거대한 세력을 구축하고 장쭤린, 우페이푸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군벌이 되자 더 이상 옛 상전의 명령을 따를 이유가 없었다. 쑨촨팡은 우페이푸, 장쭝창과 연합하여 허난성을 공격하기로 하고서도 막상 병력을 출동시키지 않은 채 도리어 산둥성을 넘볼 태세였다. 이 때문에 후방을 위협받은 장쭝창은 만약을 대비하여 상당한 병력을 남겨두어야 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눈앞의 적을 두고도 군벌들은 서로 보조가 맞을 리 없었다. 한동안 소란스러운 내부를 정리한 뒤 우페이푸의 공격이 비로소 재개된 것은 7월 19일이었다.
장쉐량, 장쭝창이 전선 사령관을 맡아 최일선에서 직접 독전하였다. 중국 최강을 자랑하는 펑톈군 포병여단을 투입한 것 외에도 장쭝창은 러시아인 용병들이 운용하는 장갑 열차를 여러 대 끌고 나와서 포격을 퍼부었다. 국민군 진지에 쏟아지는 포탄은 일일 평균 1만발이 넘었다. 군벌 시대에 전례없는 맹포격이었다. 국민군도 지지 않았다. 최일선을 맡고 있던 제10사단장 류루밍(劉汝明) 역시 포병대를 동원하여 장쭝창의 장갑열차 부대를 향하여 포격을 집중하였다. 예상치 못한 호된 반격에 당황한 장쭝창은 금지옥엽같은 장갑열차를 잃을까 싶어서 허둥지둥 이들을 베이징으로 후퇴시켰다. 즈리와 펑톈, 산둥 연합군은 압도적인 전력으로도 국민군의 견고한 방어에 부딪쳐 한발짝도 전진할 수 없었다. 게다가 우쉬즈(吳世子)가 지휘하는 즈리군 제40여단이 국민군에게 투항하고 총부리를 돌리는 등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장쭝창은 우페이푸의 지휘가 형편없고 즈리군에게 싸울 의지가 없다면서 불만을 터뜨렸다.
한편, 서쪽에서는 허난군벌 류전화(劉鎭華)가 우페이푸의 지원을 받아서 퉁관(潼关)을 점령하고 샨시성의 성도 시안으로 쇄도하였다. 병력은 무려 10만명. 비록 대부분은 토비를 긁어모은 오합지졸이었지만 엄청난 기세로 4월 16일 시안을 완전히 포위하였다. 시안을 방어하는 국민군 병력은 양후청(楊虎城)의 제3사단과 리후천(李虎臣)의 제10사단 등 2개 사단 1만명에 불과하였다. 1:10의 차이다보니 시안은 금새 함락될 것처럼 보였지만 두 사람의 용전으로 류전화의 군대는 한발짝도 전진할 수 없었다. 결국 11월에 포위를 풀고 물러났지만 일진일퇴의 치열한 혈전과 오랜 포위로 인한 기근 등 8개월에 걸친 포위전 동안 죽은 사람은 무려 5만명에 달할 만큼 참혹하였다. 사람들은 양후청, 리후천이 시안을 끝까지 지켜낸 것을 "이호수장안(二虎守長安, 두 호랑이가 장안(시안)을 지켰다)"라면서 크게 칭송하였다.
그 사이 남쪽에서는 혁명의 기치를 내선 장제스가 이끄는 10만명의 북벌군이 드디어 출정하였다. 여기에 호응하여 후베이성과 후난성 각지에서도 일제히 봉기가 일어났다. 상황이 다급하자 후베이 독리(湖北督理督理, 독리=북양정권 시절 각 성의 군무를 총괄하는 장관으로 독판, 도독, 독리, 독군 등 여러번 명칭이 바뀌었지만 모두 같은 것이다. 난징 정권 수립 후 정부 조직이 개편되면서 폐지되었다.) 천지아모(陳嘉謨)가 우페이푸에게 하루에도 몇번씩 급전을 날리면서 우한으로 속히 돌아올 것을 요청하였다. 우페이푸의 마음이 흔들렸다. 하지만 여전히 천하에 야심이 있었던 그로서는 자신의 오랜 숙원이었던 북방의 평정을 쉽사리 포기할 수 없었다. 만약 지금 물러난다면 베이징을 장쭤린에게 양보하는 꼴이 될 것이고 결국 자신도 장쭤린의 수하로 전락할 것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장쭤린에게 굽히고 싶지 않았던 그는 고민 끝에 북벌군을 일단 내버려둔 채 국민군을 제압하는데 모든 힘을 다하기로 결심하였다.
8월 1일 아침 전 전선에 걸쳐서 연합군의 총공세가 다시 시작되었다. 장쭝창의 직노 연군이 좌익을 맡고 우젠(于珍)의 펑톈 제10군이 중앙을, 가오웨이위에(高维岳)의 펑톈 제9군이 우익을 맡았다. 우페이푸와 장쉐량, 장쭝창이 직접 최일선에서 독전하는 가운데, 펑톈군은 산포, 유탄포, 중박격포 등 100여문에 달하는 각종 야포를 집결시키고 맹포격을 가하고 공중에서는 펑톈군의 항공기들이 파리떼처럼 날아다니며 국민군 진지에 쉴 새 없이 폭탄을 떨어뜨렸다. 또한 북쪽에서는 우쥔승의 제6방면군이 둬룬을 점령하였고 남쪽에서는 옌시산이 반격에 나서면서 국민군을 압박하였다.
특기할 사건은 이 날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전차 부대가 실전에 투입되었다는 사실이었다. 1922년 말 소련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톡을 통하여 처음으로 프랑스 르노 FT-17 경전차 12대를 구입한 장쭤린은 그 이후로도 추가로 24대를 더 구입한 후 1926년 1월 펑톈군 제1기병여단 산하에 "탱크 대대"를 편성하였다. 대대장은 상예창(商业昌) 소교(소령)이었고 휘하에는 6개 중대에 각 중대는 6대의 전차를 보유하였다. 장쭤린은 이 부대를 장쉐량 직속 부대로 삼았다. 이것이 중국 최초의 전차 부대로 1926년 5월에야 첫번째 전차 대대를 편성한 일본보다도 빨랐다.
장쉐량은 국민군 진지를 돌파하기 위하여 이 "호랑이 새끼"들을 투입하기로 결정하였다. 9대의 FT-17가 보병들과 함께 포연을 뚫고 끼익끼익 굴러갔다. 국민군의 사격이 집중되었지만 전차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비록 훗날 수십톤에 달하는 거대한 중전차에 비하면야 겨우 6.5t에 불과한 작은 경전차이지만 인간을 압도하기에는 충분하였다. 전차들은 마치 불사신의 괴물마냥 사방에서 쏟아지는 총탄을 모조리 튕겨내면서 포를 쏘고 기관총을 발사하였다. 전기 철조망이나 온갖 장애물도 전차를 막기에는 소용이 없었다.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사정없이 뭉개면서 앞으로 굴러오는 육중한 위압감에 국민군 병사들도 겁에 질린 나머지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기까지였다. 포탄이 직격하자 전차가 폭음과 함께 불타올랐다. 선두에 섰던 3대가 파괴되자 나머지 전차들은 그대로 뒤돌아 달아났다. 전차 부대가 후퇴하자 국민군 병사들의 사기는 올라간 반면, 펑톈군 병사들은 전의를 상실한 채 도망쳤다. 중국 전쟁사에서 전차의 데뷔전은 이렇게 실패로 끝났다. 국민진 방어선을 돌파하기에는 전차의 숫자가 너무 적었던 것이다. 유럽전선에서 증명되었듯, 한번에 대량의 전차를 투입하지 않으면 한낱 무용지물에 불과하다는 사실만 확인한 셈이었다. 장쉐량은 다시 시도하는 대신 귀중한 전차들을 더 이상 잃을까 싶어서 후방으로 되돌려보냈다.
공격은 또 한번 실패했지만 우페이푸는 물러서지 않고 끈질기게 공격에 공격을 가하였다. 그는 매일 수개 여단 씩 새로운 부대를 번갈아 투입하였다. 또한 직접 대도를 들고 독전을 하면서 물러서는 부하들은 계급 고하를 막론하고 그 자리에서 참수하였다. 제아무리 국민군이라도 이런 공격에는 언제까지고 버틸 수 있을 리 없었다. 국민군의 손실 역시 적지 않았고 탄약 또한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여기다 둬륜을 점령한 우쥔승이 기병 부대를 이끌고 국민군의 후방인 구위안(沽源)으로 진격하자 퇴로를 위협받은 국민군은 결국 8월 14일 난커우를 버리고 퇴각하였다. 우젠의 제10군이 난커우에 입성하였다. 5월 18일부터 장장 3개월에 걸친 전례없이 치열한 혈전이었다.
국민군은 서북으로 퇴각을 시작했지만 우페이푸는 이번 기회에 다시는 재기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때려눕힐 생각으로 추격에 나섰다. 펑톈군은 8월 19일 장자커우를 점령하였고 같은 날 옌시산의 부하 샹전 역시 쑹저위안을 밀어내고 다퉁을 탈환하였다. 그리고 계속 북상하여 9월 1일에는 쑤이위안성의 성도이자 징쑤철도의 종착역인 바오터우(包頭)로 진격하였다. 바오터우를 지키던 제6군장 시요우산(石友三)과 제8군장 한푸지(韓復榘)는 싸우지 않고 옌시산에게 항복하였다. 퇴로가 막힌 국민군 부대들은 도처에서 투항하였다. 쑤이위안성을 차지한 옌시산은 샹전을 쑤이위안성 도통에 임명하였다.
9월 4일 옌시산의 수도인 타이위안에서 장쉐량, 옌시산의 회담이 열렸다. 두 사람은 서로의 경계선을 정하고 서북의 통치와 국민군의 처리는 옌시산이 맡기로 하였다. 국민군은 서북 변방의 우위안(五原)까지 쫓겨간 채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으나 간쑤성과 샨시성 일부, 쑤이위안성 서부를 제외한 거의 모든 영토를 잃었고 한 때 40만명을 헤아렸지만 남은 전력은 5개 사단 및 2개 기병 사단 등 겨우 5~6만명에 불과하였다. 이것으로 장장 8개월에 걸쳐 북중국 전역에서 벌어진 북방 대전은 일단락되었다. 북방 대전은 위안스카이가 죽은 뒤 북양 군벌들 사이에 벌어진 최대의 격전이자 마지막 패권 싸움이기도 하였다.
이로서 장쭤린, 우페이푸 양웅이 손을 잡고 북방을 완전히 평정하였다. 하지만 "한 우리에 두 호랑이가 있을 수 없다"라는 중국의 오랜 속담대로 싸움이 끝나자말자 당장 논공행상을 놓고 신경전이 벌어졌다. 우페이푸는 장쭤린을 재쳐놓은 채 중앙 정부의 이름으로 장쭝창, 장쉐량 등 펑톈군의 주요 간부들에게 직위와 계급을 수여하였다. 게다가 그는 장쭝창에게 육군 상장과 함께 "의위 상장군(義威 上將軍)"이라는 거창한 칭호까지 하사하려 하였다. 이것은 장쭤린의 부하인 장쭝창을 장쭤린과 동격에 놓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으므로 장쭤린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장쭝창과 장쉐량은 "우리가 싸운 것은 오직 장쭤린 노원수의 명에 따른 것"이라면서 우페이푸가 주는 서훈은 받을 이유가 없다면서 거절하였다. 우페이푸로서는 어설픈 계략을 부리려다 체면만 깎인 꼴이 되었다. 또한 우페이푸가 승전을 축하한다면서 전투에 참전한 각 진영의 간부들을 모두 초청하여 성대한 연회를 풀었지만 펑톈군은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럴 돈이 있으면 자기 부하들에게나 쓸 것이지"면서 이죽거렸다. 평소 우페이푸가 매우 인색하여 인망이 없음을 비꼬는 것이었다. 장쭤린은 장쭤린대로 자신이야말로 천하의 진정한 주인인양 우페이푸와 의논하지 않고 멋대로 자신의 심복인 가오웨이위에를 차하르 도통에 임명하였다. 그렇다보니 또 한번 두 사람의 진검승부가 벌어질 참이었지만 우페이푸로서는 장쭤린과 천하 패권을 다툴 겨를이 없었다. 남쪽에서 북벌군이 후난성 전역을 단숨에 석권하고 우페이푸의 심장부인 우한을 향해 무서운 기세로 북상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국민군이 거의 괴멸한 채 서북으로 쫓겨가고 있을 때 모스크바에 있던 펑위샹은 급전을 받고 8월 17일 급히 귀국길에 올랐다. 1926년 1월 초 장쭤린, 우페이푸의 압박을 받은 그는 하야를 선언하고 중국 밖으로 출국하였다. 그가 향한 곳은 소련. 그리고 5월 9일 모스크바에 도착하였다. 중국에서 "붉은 장군"이라 불리우며 중국의 여러 군벌들 중에서는 처음으로 소련을 방문한 펑위샹은 북방 대전이 벌어지는 동안 소련에 머물면서 소련 정부로부터 최고의 대우를 받았고 스탈린과 트로츠키, 레닌의 부인 나데즈다 크룹스카야(Nadezhda Krupskaya)를 비롯한 소련 지도자들과도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또한 국민당에도 가입하고 혁명전쟁에 참여할 것을 선언하였지만 소련 공산당에 가입하지는 않았다.
그는 마음만 먹으면 국민혁명군의 총사령관이 될 수도 있었고 실제로 장제스는 펑위샹에게 그 자리를 빼앗길까 노심초사하였다. 장제스보다 5살 연상인 펑위샹은 명성과 지위, 경력, 세력 어느 면에서 보더라도 감히 비할 바가 아니었다. 장제스가 자신보다 훨씬 쟁쟁한 경쟁자들을 재치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어떤 면에서는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민족주의자면서 봉건 군벌이었던 펑위샹은 중국에서 소비에트 혁명을 일으킬 생각은 없었다. 그의 바램은 중국을 통일하고 내전을 끝내어 민중이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고 소련이 적극적으로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하여 스탈린의 승락을 얻어내었다.
귀국길에 나섰을 때 그의 옆에는 중국 공산당원이자 소련 모스크바 쑨중산대학 지부의 서기인 류보지엔(刘伯坚)과 국민당에서 파견된 우여우런(于右任), 우스만 이반노프(Usman Ivanov)를 비롯한 여러 명의 소련 고문들이 있었다. 그 중에는 덩시센(邓希贤)이라는 앳된 얼굴의 키 작은 청년도 있었다. 그가 바로 훗날 마오쩌둥의 뒤를 이어서 중국의 지도자가 되는 덩샤오핑이다. 쑨중산대학에 재학 중이던 그는 중국 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펑위샹과 함께 귀국에 나섰다. 이 때 나이는 겨우 22살. 이미 지도자급의 위치에 있었던 마오쩌둥이나 저우언라이와는 달리 펑위샹조차 기억하지 못했을 만큼 지위도 대수롭지 않은 애송이에 지나지 않았다.
펑위샹의 일행은 모스크바를 출발하여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외몽골을 거쳐서 중국 서북으로 들어왔다. 험난한 길을 통하여 오랜 여정 끝에 쑤이위안성의 궁벽하고 황량한 도시 오위안에 도착한 그는 여기서 자신의 군대를 수습하였다. 국민군은 많은 타격을 입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괴멸하지는 않았다. 장즈장, 루쫑린, 쑹저위안, 쑨위웨, 쑨롄중, 쑨량성 등 그동안 펑위샹과 동거동락을 함께 하였던 수하들도 여전히 건재하여 그의 귀환을 반겼다. 흩어졌던 군대가 다시 집결하고 한때 옌시산에게 투항했던 한푸지, 쉬여우산도 용서를 빌면서 복속을 청하였다.
9월 17일 우위안에서 1만명의 장병들이 모인 가운데, 펑위샹은 국민혁명군의 가입과 혁명전쟁을 선언하였다. "우리는 쑨원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국민혁명과 삼민주의를 실천한다" "간쑤성을 지키고 샨시성을 원조하며 허난성을 도모한다" 광저우와 함께 우위안에도 혁명을 상징하는 청천백일의 깃발이 섰다. 국민군은 국민혁명군 연군으로 개칭되었고 남방의 북벌군과 호응하여 동쪽으로 진군을 시작하였다. 이를 중국 역사에서는 "우위안 선서(五原誓师)"라고 말한다. 이로서 중국 내전은 더 이상 봉건 군벌들 사이의 패권 쟁탈이 아니라 "혁명"과 "反혁명"의 싸움이 되었다. 신해혁명 이래 20여년에 걸친 오랜 전쟁도 이제 마지막을 향하여 달리려는 참이었다.
* 북벌 전쟁, 막을 열다
1926년 7월 1일 장제스는 국민정부 군사 위원회 주석의 이름으로 전군에 북벌의 동원령을 하달하였다. 7월 4일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 북벌을 정식으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전국에 이를 공포하고 각계각층에서 적극적으로 호응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다음날인 5일 장제스는 광저우에 국민혁명군 총사령부를 설치하고 북벌군의 조직과 인사를 발표하였다. 광둥성과 윈난성, 광시성 등 남방 각지에서 모여든 군대가 광저우에 집결하였다. 그리고 7월 9일 황푸군관학교 연병장에서 5만명에 달하는 군인, 민간인들이 모인 가운데 장제스는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 취임하고 북벌전쟁의 시작을 선언하였다.
"인민이 수재와 전란의 고통으로 도탄에 빠져 있는데도 토비 군벌들은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제국주의는 중국에 대한 침략을 확대하고 있다. 우리가 군대를 일으키는 것은 나라를 구하고 인민을 위해서이다. 장병들이여! 인민의 선두에 서서 전진하라. 물러나지 마라. 국가에 충성하고 삼민주의를 실행하며 자신을 희생하여 충심으로 혁명 정신을 다하라!"
또한 그는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으로서 스스로 다짐하였다. "첫째로 나는 제국주의자들과 그 주구들과 끝없이 싸울 것이며 절대 타협하지 않을 것이다. 둘째로 전국의 군인들과 힘을 모아서 삼민주의를 조속히 실현한다. 세번째로 혁명군을 인민과 결합하여 인민의 군대로 만든다."
쑨원이 회한을 남기고 눈을 감은 지 1년하고 4개월. 드디어 장제스는 그의 유지를 받들어 통일을 향한 전쟁에 나섰다. 북벌군의 진용은 다음과 같았다.
총사령관 장제스, 총참모장 리지선, 참모차장 보충시, 정치부 주임 덩옌다
제1군(광둥계) - 군장 허잉친, 5개 사단(제1~3사단, 제14사단, 제20사단) 총 19개 연대
제2군(후난계) - 군장 탄옌카이, 4개 사단(제4~6사단, 교도사단) 및 1개 포병연대, 총 12개 연대
제3군(윈난계) - 군장 주바이더(朱培德), 3개 사단(제7~9사단) 및 포병, 헌병 각 1개 대대, 총 8개 연대
제4군(광둥계) - 군장 리지선, 4개 사단(제10~13사단) 및 1개 독립연대, 2개 포병연대, 총 15개 연대
제5군(푸젠계) - 군장 린푸린(李福林), 2개 사단(제15~16사단) 및 2개 독립연대, 1개 포병대대, 총 8개 연대
제6군(광둥계) - 군장 청치엔(程潛), 3개 사단(제17~제19사단) 및 2개 포병대대, 총 9개 연대
제7군(광시계) - 군장 리쭝런, 9개 여단 및 2개 포병대대, 총 18개 연대
제8군(후난계) - 군장 탕셩즈, 6개 사단(제2~5사단, 교도사단, 독립사단) 및 포병연대, 교도연대, 총 24개 연대
또한 현대전의 경험이 부족한 국민혁명군의 간부들을 위하여 소련군의 유능한 명장이자 적벽내전에서 풍부한 경험을 가진 바실리 블류헤르 장군이 군사 고문으로서 전쟁 지도와 전략 수립을 도왔다. 총병력은 8개 군 27개 사단 및 9개 여단, 113개 연대 약 10만명에 달하였다. 그 중에서 린푸린 제5군은 광저우의 수비를 위하여 남았고 다른 군단 역시 일부 사단을 잔류시킴으로서 실제로 출정한 부대는 20개 사단 및 4개 여단 등 약 8만명 정도였다. 각 부대 간의 전투력은 같지 않았고 그 중에서 장제스의 직계 부대이자 황푸 생도들이 포진하고 있는 제1군과 리지선의 제4군, 그리고 리쭝런의 제7군이 비교적 장비와 무기가 충실하고 군기가 엄정하여 강군이라 할 만 하였다.
공군력에서는 국민혁명군 총사령부 산하에 항공처를 설치하고 북벌 항공대를 조직하였다. 광저우 항공학교 교장인 린웨이청(林伟成)이 항공처장 겸 항공대 대장에 임명되었다. 항공대는 소련에서 제공된 Polikarpov R-1 경폭격기 3대와 독일제 융커스 F-13 수상비행기 1대를 보유하였다. 비록 한줌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들은 용감하게 전선의 정찰과 지상 폭격 등을 지원하였다.
해군은 광둥 해군 산하 대소 군함 60여척 총 배수량 8천여톤 정도였다. 그러나 모두 500톤 미만의 강상용 소형 함선인데다 청말에 도입된 것들이라 노후화 또한 매우 심하였다. 북벌전쟁에 활용할 수 있는 500톤 이상의 대형 군함은 850톤급 해방(海防) 구축함 페이잉(飛應)과 750톤급 포함 중산 두 척밖에 없었다. 이들은 북벌군과 함께 출동하지 않은 채 광저우에 그대로 남았고 북벌 전쟁에서 해군의 역할은 몇차례 함포 지원을 한 것 이외에는 거의 없었다.
장제스는 "1년 안에 승리할 수 있다"고 장담했지만 북양 군벌과의 전력을 객관적으로 비교한다면 터무니없는 허세로 보였을 것이다. 중국의 통일은 고사하고 북벌군의 전력으로는 첫번째 상대가 될 우페이푸조차 만만찮았다. 리훙장의 북양무비학당이 배출한 가장 뛰어난 장군으로 일컬어지는 우페이푸는 여지껏 전투에서 단 한번도 패배한 적이 없는 불패의 명장이었다. 게다가 그의 세력은 즈리성 남부와 허난성, 후베이성, 후난성, 쓰촨성 일부에 걸쳐 있었고 병력은 25만명에 달하였다.
여기에 창장 하류의 5개 성을 차지하고 있는 쑨촨팡이 20만명, 산둥성과 즈리성 남서부를 차지하고 있는 장쭝창이 20만명. 더욱이 명실상부한 북방의 패자인 장쭤린은 거의 50만명에 달하였다. 여전히 기회주의적인 태도였던 옌시산은 제외하더라도 북양 군벌들의 세력을 모두 합하면 100만명이 넘었고 북벌군의 10배 이상이었다. 해공군력에는 감히 비교가 되지 않았으며 경제력, 군비, 장비와 무기 어느 면에서도 군벌들이 월등히 우세하였다.
가령 무기 생산만 하더라도 자료마다 차이는 있지만, 북벌군의 유일한 군수 공장인 광저우 병공창의 경우 1925년 한해 동안 월 평균 소총 750정, 탄약 70만발, 빅커스 중기관총 8정을 생산한 반면, 우페이푸가 장악하고 있는 한양 병공창은 같은 시기 월 평균 소총 6천정, 기병용 칼빈 소총 1500정, 마우저 권총 3천정, 탄약 3백만발, 맥심 중기관총 50정, 항공기용 폭탄 120파운드(50kg) 40~50발, 박격포, 연막탄, 유탄발사기 등을 생산할 수 있었다. 장쭤린이 가지고 있는 펑톈 병공창은 규모가 더 컸다. 흔히 말하듯 "전쟁은 돈 많은 놈이 이긴다"라는 경제 논리에서 본다면 북벌군에게 승산은 없었다. 비록 광둥성이 쓰촨성 다음으로 인구가 많으며 광저우가 중국에서 손꼽히는 부유하고 근대화된 도시라고 해도 말이다.
또한 영국과 미국, 일본 등 열강들은 소련과 손을 잡은 국민 정부를 반대하고 북양 군벌들을 뒤에서 후원하고 있었다. 중국에서 소련식 공산혁명이 재현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열강들은 이미 소련의 적백내전에서도 "간섭 전쟁"이라 하여 무력 개입을 불사한 바 있었다. 이들이 소련 내전에 개입한 이유는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 위함도 있었지만 신생 소련 정부가 제정 러시아의 부채를 갚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짜르 정권은 청조와 마찬가지로 러일전쟁의 전비와 국내의 근대화 등으로 해외에서 막대한 빚을 끌어다 썼는데 1913년 당시만 해도 총 채무액은 9억 3천만 파운드에 달하였다. 이것은 당시 러시아 1년 GDP의 50%에 달하는 것이었다. 참고로, 러시아보다 훨씬 부유했던 영국의 1913년 연 수입이 1억9800만 파운드 정도였다. 또한 1차대전을 거치면서 채무는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1914~17년까지 추가된 채무는 33억 8500만 파운드에 달하여 이자분만으로도 국가 총세입을 넘어설 정도였다. 천문학적인 빚이 결국 짜르 정권을 붕괴시킨 셈이지만 제정 러시아를 무너뜨린 레닌의 소비에트 정부는 지금까지의 빚을 한푼도 갚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제정 러시아의 채무는 대부분 미국과 영국, 프랑스, 일본에서 빌린 것이었고 이들이 무력을 동원하여 간섭 전쟁에 나선 것도 당연하였다.
중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열강들은 청조 이래 막대한 채권을 가지고 있는데다 북양정권에게도 그동안 거액의 차관을 대여하였다. 또한 철도를 비롯하여 중국 내 많은 이권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이 중국에서 소련과 같은 일이 다시 반복되기를 그저 눈뜨고 지켜볼 리 없었다. 적백내전에서는 소련의 붉은 군대가 이들을 물리쳤지만 중국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한 세대 이전에 겪었던 참혹했던 의화단의 난이 재현될 것인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7월 5일 탕셩즈의 제8군이 헝양에서 출동하여 창사로 진격하였다. 우페이푸 역시 군대를 출동시켜 저지에 나섰다. 북벌전쟁이 그 막을 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