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한 함락
"패배를 모른다"라던 상승장군 우페이푸의 명성도 무색하게 팅쓰차오전과 허성차오전이 북벌군의 손에 넘어감으로서 우한 삼진의 함락도 이제 초읽기였다.
창장 중류에 있는 우한 삼진은 톈진과 상하이, 광저우와 함께 중국에서 가장 근대화되고 발달된 도시 중의 하나였다. 창장의 지류인 한수이 강(漢水)를 사이에 두고 한양과 우창, 한커우 세개의 도시로 나뉜다. 그 중에서 상업의 중심지인 한커우는 외국인 조계가 몰려있어 "동양의 시카고"라 불리며, 공업의 중심지인 한양에는 동북의 펑톈 병공창과 함께 중국 최대의 군수공장인 한양 병공창이 있다. 정치의 중심지인 우창은 15년 전 신해혁명의 방아쇠였던 우창 봉기가 일어났던 곳이다. 우페이푸로서는 절대 내줄 수 없는 곳이자, 북벌군으로서는 이곳을 빼앗느냐, 마느냐에 북벌의 승패가 달린 셈이었다. 이제 혁명의 성지라 할 수 있는 이곳에서 우페이푸와 북벌군의 마지막 한판 싸움이 벌어질 참이었다.
우페이푸는 한커우에 자신의 사령부를 설치하는 한편, 한때 내쫓았던 진윈어를 다시 불러들여서 우한 수비의 총지휘를 맡겼다. 또한 사방에서 증원 병력을 끌어모았다. 우창은 제8사단장 류위춘(刘玉春)에게, 한양은 제14사단장 카오루통(高汝桐), 한커우는 후베이 육군 제25사단장 천지아모(陈嘉谟)에게 각각 방어를 맡겼다. 우페이푸 직계의 정예 2개 사단을 비롯하여 수비 병력은 약 3만명. 청조 시절 후광 총독부가 있었던 우창은 후베이성의 성도답게 사방 11km의 높고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쌓여 있었다. 우페이푸는 성벽 곳곳에 다수의 기관총좌와 야포를 배치하였다. 또한 우창 교외의 고지에도 중포가 배치되었으며 한커우의 강상에는 강방 함대 소속의 포함 10여척이 대기하였다. 허난성에서도 3개 사단이 출동하여 우한을 향하여 남하하고 있었다. 우페이푸로서는 그야말로 총력을 기울인 셈이었다. 그는 북벌군이 우한에 단 한발짝도 접근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태세였다.
북벌군의 선봉인 제4군과 제7군이 우창 교외로 육박한 것은 8월 31일 저녁. 병사들의 사기는 충천하여 단숨에 우한 삼진을 공략할 기세였다. 리쭝런은 우창성에 대한 공격명령을 내렸다. 6m가 넘는 고대의 성벽은 아래에서 올라다 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할 정도였다. 하지만 병사들은 수백개의 공성용 사다리를 들고 용감하게 돌격하였다. 창과 칼 대신 서구식 화기로 싸우는 20세기의 전쟁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장면이지만 중포가 부족했던 당시에는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들이 사거리에 들어오자 침묵을 지키던 기관총과 대포가 일제히 포문을 열고 불을 뿜었다. 콩볶는 소리와 함께 총알이 날아오고 사방에서 포탄이 작열하였다. 전장은 아비규환이 되었고 잠깐 사이에 수백여명이 쓰러졌다. 전멸할 판이었다. 리쭝런은 즉각 후퇴 명령을 내렸다. 남방의 명장인 리쭝런도 우페이푸는 여전히 만만찮은 강적이라는 사실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9월 3일 새벽 3시, 캄캄한 어둠을 틈타서 북벌군의 공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대나무로 만든 사다리를 든 결사대가 성벽을 향하여 돌진하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기관총의 십자포화와 맹포격에 부딪쳐서 막대한 사상자를 내고 격퇴되고 말았다. 장제스가 열차를 타고 도착하였다. 그는 리쭝런에게 병력을 정비한 후 세번째 공격에 나설 것을 지시하였다. 우한삼진을 눈앞에 두고 이제와서 물러설 수도 없는 처지였다.
5일 새벽 3시, 장제스가 직접 최일선으로 나와서 관전하는 가운데 제4군과 제7군, 그리고 새로 도착한 제1군 제2사단이 우창의 각 성문을 포위한 채 총공격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기관총이 쉴 새 없이 불을 뿜고 포탄이 작열하자 병사들의 태반은 성벽 가까이 가기전에 수수다발처럼 쓰러져 나갔다. 우창의 방어를 맡은 류위춘은 동북 강무당을 졸업한 엘리트로 실전 경험이 풍부한 장군이었다. 또한 제8사단은 우페이푸군 최강 부대였다. 이들이 사생결단으로 저항하는 한, 장제스와 리쭝런도 도저히 힘으로는 우창성을 함락시킬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같은 시간 탕성즈의 제8군이 한양으로 진격하였다. 여기서도 일진일퇴의 치열한 전투가 장장 16시간에 걸쳐서 벌어졌다. 그런데 뜻밖에도 한양의 수비군 중 하나인 후베이군 제2사단장 류저우롱(刘佐龙)이 반란을 일으켜 북벌군에 가담하였다.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우페이푸로서는 치명타였다. 갑자기 그의 사령부 주변으로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깜짝 놀란 우페이푸는 직접 류저우롱에게 전화를 걸어서 "어찌된 일이냐!"라고 묻자 류저우롱은 "실수입니다"라고 대답한 후 끊었다. 하지만 포탄은 계속 떨어졌고 우페이푸도 그제야 그가 배신했다는 사실을 절감하였다. 우페이푸는 허둥지둥 소수의 측근들만 데리고 한커우를 빠져나와 허난성의 신양(信陽)으로 달아났다. 6일 저녁 한양은 탕성즈의 손에 넘어갔고 다음날에는 한커우의 수비대도 항복하였다. 류저우롱은 그 공으로 장제스로부터 후베이 성장에 임명되었고 그의 부대는 국민혁명군 제15군으로 개편되었다.
하지만 우창성은 여전히 건재하였다. 우페이푸는 류위춘에게 "반드시 구원할테니 그때까지 기다려라"라고 지시하였다. 류위춘도 "죽음으로서 사수하겠다"고 굳게 약속하였다. 장제스는 이들의 각오가 만만치 않다고 판단하고 일단 포위만 한 채 공격을 서두르지 않았다. 대신 성을 철저하게 봉쇄하고 물과 식량은 물론, 개미 한마리 오가지 못하도록 차단하였다. 만약 위반할 경우 군법에 의해 처형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공병대가 성벽 밑으로 땅굴을 파서 진입을 시도하는 한편, 비행기로 우페이푸가 외세와 결탁한 것을 비난하고 병사들의 투항을 권고하는 삐라를 뿌렸다. 성안은 극심한 기근에 시달리면서 병사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한달 동안 아사자만 2천명이 넘었다. 그런데도 우페이푸가 약속했던 원군은 당도할 기미가 없었다.
그럼에도 수비병들은 끈덕지게 버텼다. 북벌군으로서도 여지껏 이렇게 고전하기는 처음이었다. 10월 9일 우창 수비대 중 하나인 허난군 제3사단이 반란을 일으켰다. 탕성즈가 몰래 공작하여 이들을 매수한 것이었다. 반란군이 성문을 열자 북벌군 병사들이 쏟아져 들어갔다. 류위춘은 우창 강변에 있는 서산(蛇山)에서 최후의 항전을 시도했지만 결국 패배하여 포로가 되었다. 우창이 북벌군의 손에 완전히 넘어간 것은 다음날인 10월 10일 오전 7시 반이었다. 장장 40일에 걸친 포위전이었다. 때마침 그 날은 우창 봉기가 일어난 15주년이기도 했다. 우한 삼진의 점령과 함께 후베이성 서부 지역에도 공격에 나서 샤시(沙市), 이창(宜昌), 징저우(荊州) 등을 점령하였고 우페이푸의 주력 부대는 거의 소멸하였다.
이로서 양호(후베이, 후난성)에서 우페이푸의 세력이 완전히 일소되자 그때까지 관망하던 쓰촨성과 구이저우성, 양호의 소군벌들도 줄줄이 북벌군에 가담하기 시작하였다. 대표적으로 구이저우 군벌 위안쭈밍(袁祖銘)이 국민혁명군 제12군, 쓰촨 군벌 양썬(楊森)이 제20군, 충칭 군벌 류상(劉湘)이 제21군, 쓰촨성 남부를 지배하던 류원후이(劉文輝)가 제24군이 되었다. 또한 윈난성에서는 병변이 일어났다. 그동안 우페이푸와 손을 잡고 윈난성을 14년 동안 지배하면서 온갖 폭정을 저질렀던 탕지야요(唐繼堯)가 쫓겨나고 롱윈(龙云)이 정권을 잡았다. 그는 국민정부에 귀순하여 국민혁명군 제38군 군장으로 임명되었다. 북벌군의 세력은 갈수록 불어나면서 위세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 쑨촨팡 움직이다
우페이푸가 한커우를 버리고 달아난 다음날인 9월 7일. 장쭤린은 펑톈에서 주요 지휘관들을 불러모아 긴급 회의를 개최하였다. 주된 안건은 물론 우페이푸의 구원과 북벌군의 대응에 대한 것이었다. 의견은 크게 두가지로 나뉘어졌다. 우쥔셩, 장쭤샹 등 원로파들은 대부분 남하를 반대하고 동북을 지키면서 기회를 엿보자고 주장하였다. 반면, 장쭝창, 주위푸 등 야심 넘치는 소장파들은 우페이푸를 돕자는 명목으로 펑톈군을 남하시켜 즈리성과 허난성을 통째로 차지하자고 하였다. 만약 그렇게 되면 우페이푸는 남은 지반까지 상실한 채 완전히 몰락하는 꼴이었다.
천하의 야심을 버리지 못했던 장쭤린은 결국 후자를 선택하였다. 하지만 자신의 상황도 좋지 못했다는 점이다. 뛰어난 재정 전문가였던 왕융장이 탄탄하게 내실을 다져두었던 펑톈 정부의 재정도 거듭된 전쟁으로 군비가 이미 완전히 고갈된 상황이었다. 1924년만 해도 연간 세수가 2,930만 위안에 1,640만 위안의 흑자를 내었지만 제2차 펑즈 전쟁과 궈쑹린의 반란, 국민군과의 싸움 등으로 1926년 한해 동안 지출은 6천만 위안이 넘었고 그 중 90% 이상이 군사비였다. 세수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규모였다.
이 때문에 장쭤린은 특별세를 징수하고 염세와 징펑철도의 이권을 저당잡혀 일본으로부터 거액의 돈을 빌려야 했다. 게다가 그는 그동안 다른 군벌들과 달리 아편을 엄중하게 금지해 왔음에도 군비의 조달을 위하여 아편 판매를 허용하고 세금을 거두었다. 또한 동북의 지폐인 펑표(奉標)를 마구 남발하면서 인플레이션은 하늘을 찔렀고 동북 경제가 무너질 판이었다. 따라서 민심의 이반도 심각하여 여기저기서 농민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총체적인 위기에 직면했음에도 장쭤린은 허황된 야심에 눈이 먼 나머지 제 발밑을 보지 못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서두르지 않고 몇년만 와신상담하면서 동북의 내정에 힘을 쏟았더라면 천하의 주인은 틀림없이 그가 되었으리라.
장쭤린은 우페이푸에게 전문을 보내어 원군을 보낼테니 같이 힘을 모아서 북벌군을 치자고 제안하였다. 하지만 우페이푸도 바보가 아니므로 장쭤린의 시커먼 속을 모를 리 없었다. 자신의 영토에 펑톈군을 들였다가는 "가도멸괵(假途滅虢)"의 신세가 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그는 한사코 펑톈군의 남하를 반대하면서 자신에게 아직 10만의 정예 병력이 남아 있으니 원군은 필요없고 무기와 군수품만 보내주면 우한을 반드시 탈환해 보이겠다고 장담하였다. 대신 발해 함대에 즈리와 산둥의 군대를 실고 직접 북벌군의 심장부인 광저우를 공격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하였다.
장쭤린은 우페이푸를 말로 설득하기를 포기하고 힘으로 누르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갑자기 베이징으로 군대를 보내어 우페이푸가 임명한 베이징 위수 사령관 왕징화(王景和)를 쫓아내고 그 자리에 자신의 심복인 펑톈군 제10군장 위전(于珍)을 임명하였다. 또한 9월 9일에는 두스구이(杜錫珪) 내각을 강제로 해산시키고 외교총장 구웨이쥔(顧維鈞)을 새로운 임시집정으로 추대하였다. 돤치루이 정권이 무너진 뒤 겨우 3개월 동안 3번째 내각 교체였다. 하지만 구웨이쥔 정권 역시 고작 반년 남짓 지탱했을 뿐이었다. 1500년 전 오호 십육국 시절 군벌 실력자들이 멋대로 황제를 세웠다 폐위하기를 반복했던 것처럼 베이징 정부 역시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이름 뿐인 허수아비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장쭤린은 우페이푸더러 즈리성의 성도인 바오딩(保定)과 다밍(大名)을 내놓고 즈리성에서 물러나라고 요구하였다. 장쭝창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바오딩 근처까지 밀고 들어왔다. 사면초가였던 우페이푸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그에게는 이미 펑톈군에게 대항할 힘이 없었다. 그저 잠시 시간을 달라고 애원할 뿐이었다.
한편, 우페이푸가 패주하면서 발등에 불 떨어진 꼴이 된 것은 쑨촨팡도 마찬가지였다. 이른바 "5성 연합군"의 총사령관이었던 그는 그동안 우페이푸의 거듭된 구원 요청을 무시한 채 관망하고 있었다. 우페이푸는 "14성 연합군"의 총수이며 여기에는 쑨촨팡의 5개 성도 포함되므로 쑨촨팡은 우페이푸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이미 자립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한 쑨촨팡은 우페이푸가 어찌되건 알 바가 아니었다. 오히려 두 호랑이가 서로를 물어뜯다가 양쪽 모두 지칠 때를 기다리다가 자신은 기회를 보아서 양쪽 모두를 잡아먹겠다는 심보였다. 그런데 북벌군의 기세가 예상을 뛰어넘어 우한까지 파죽지세로 육박하자 그도 생각이 달라졌다. 이대로 우페이푸가 멸망한다면 다음 차례는 당연히 자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제야 무거운 엉덩이를 들어 우페이푸를 돕겠다고 나섰다.
만약 이들이 처음부터 손을 잡았더라면 북벌군도 승산은 없었으리라. 따라서 장제스도 창사를 점령한 직후인 8월 12일 쑨촨팡에게 "만약 귀하가 혁명 전쟁에 가담한다면 귀하의 지위와 영토를 보존할 것을 나 중정이 보장하겠다"라는 전문을 보내어 북벌군으로의 합류를 권유하였다. 하지만 쑨촨팡은 거부하고 5성 연합군의 총동원을 선언하였다. 전면전을 결심한 것이다. 8월 25일 난징에서 회의가 열렸다. 그는 사태가 심각하다면서 저장성 총사령관 루샹팅(卢香亭)에게 우선 저장성과 장쑤성, 안후이성의 병력을 모을 것을 지시하였다.
쑨촨팡의 병력은 약 20만명. 다섯 성의 모든 병력을 6개 방면군으로 나누었다. 저우인런(周荫人)의 제4방면군을 푸젠성에 남기고 나머지는 장시성으로 진군시켰다. 출동 부대는 다음과 같았다.
제1방면군 : 군장 덩루저우(邓如琢) 5개 사단 3개 혼성여단
제2방면군 : 군장 정준옌(郑俊彦) 1개 사단 4개 혼성여단
제3방면군 : 군장 루샹팅(卢香亭) 2개 사단 2개 혼성여단
제5방면군 : 군장 천티아오위안(陈调元) 1개 사단 4개 혼성여단
제6방면군 : 군장 옌징충(颜景崇) 3개 혼성여단
계 : 12개 사단 16개 혼성여단
각 부대에 작전 명령이 떨어졌다. "제1방면군과 제3방면군은 후난성으로 진군하여 창사를 공략하고 북벌군의 퇴로를 차단한다. 제4방면군은 광둥성으로 진군하여 북벌군의 근거지를 공략한다. 제5방면군은 후베이성으로 진격, 우한의 포위를 푼다. 제2방면군과 제6방면군은 북벌군 주력과 결전을 한다!" 쑨촨팡도 군함을 타고 난징을 출발하여 장시성 주장(九江)에 사령부를 설치하였다. 직접 진두 지휘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쑨촨팡이 움직였다는 사실을 안 장제스는 적이 공격할 때까지 앉아서 기다릴 생각은 없었다. 그는 병력을 신속하게 재배치하고 선제 공격에 나섰다. 쑨촨팡의 병력이 집결을 완료하기 전에 각개격파할 생각이었다. 또한 우창성을 포위한 병력만 남기고 우한 방면에 집중되었던 병력 대부분을 남쪽으로 이동시켰다. 9월 6일 북벌군은 장시성의 경계를 넘어 삼방향에서 총공격에 나섰다.
좌로군을 맡은 제2군 제5사단과 제14군이 당일날 장시성 중부의 요충지 간저우(赣州)를 함락시키고 후퇴하는 적을 추격하여 지안(吉安) 방면으로 진격하였다. 중로군인 제1군 제1사단과 제6군이 청치엔(程潛)의 지휘 아래 9월 10일 수수이(修水)를 공략하였으며, 주바이더(朱培德)가 지휘하는 우로군 제2군과 제3군도 장시성 서북쪽의 핑샹(萍乡)를 점령한 후 9월 18일에는 가오안(高安)를 점령하였다. 쑨촨팡으로서는 그야말로 허를 찔린 꼴이었다. 뜻밖의 공세에 쑨촨팡군은 도처에서 무너져 내렸고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정신없이 후퇴하는 판이었다. 9월 19일에는 성도인 난창(南昌)이 무혈 함락되었다. 청치엔이 난창의 방어 태세를 살피기 위하여 정찰대를 보내었는데 적병들이 죄다 달아나고 성안은 텅 비어있는 것을 알고 재빨리 병력을 보내어 점령케 한 것이다.
하지만 쑨촨팡도 그저 당하고 있지 않았다. 부하들을 닥달하여 무슨 수를 써서건 난창을 탈환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난창 탈환에 전체 병력의 절반인 3개 방면군(제1~3방면군) 10만명이 투입되었다. 또한 쑨촨팡 자신이 최일선으로 나와서 독전하였다. 난창을 지키고 있었던 청치엔의 병력은 겨우 1만명. 상대가 될 리 없었다. 격전이 벌어졌다. 하지만 중과부적으로 결국 난창성을 버리고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9우러 24일 난창은 다시 쑨촨팡의 손에 넘어갔다. 그는 붙잡힌 포로들과 북벌군에게 호응했던 농민들, 학생들을 모조리 잡아다가 남녀노수 가리지 않고 참수한 후 본보기로서 성벽에 내걸었다.
한편, 북쪽에서는 우창에서 철수한 리쭝런의 제7군이 장시성을 넘어 주장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10월 3일 주장 남서쪽의 더안(德安)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더안의 수비대는 약 4만명. 그것도 쑨촨팡 휘하의 최강 부대인 제3방면군 2개 사단이었다. 여기에 철로에는 각종 야포로 무장한 장갑열차가 포진하면서 이동 포대의 역할을 하였고 방어진지에는 수많은 기관총과 야포가 배치되어 있었다. 방어의 견고함은 한달 여전에 격전이 벌어졌던 팅쓰차오전에 필적할 정도였다. 만약 정면에서 공격한다면 중화기가 부족한 북벌군으로서는 막대한 손실을 감수해야 할 판이었다.
하지만 리쭝런은 정면 공격 대신 배후로 우회한 다음, 철로를 장악하여 병참선을 끊고 적진의 후방으로 쇄도하였다. 예상치 못한 기습에 쑨촨팡군은 혼비백산하였다. 하지만 적장인 루샹팅 역시 북양 무비학당과 일본 육사 기병과를 졸업한 인재였기에 일석일조로 허둥지둥 무너지지는 않았다. 처절한 격전이 벌어졌다. 쑨촨팡군의 손실은 전사 1천명에 포로 1천명, 강으로 밀려서 익사한 자도 수백여명에 달하였다. 하지만 리쭝런의 제7군 역시 손실이 컸다. 전사자만 2천명이 넘었다. 단일 전투의 손실로서는 북벌 전쟁이 시작된 이래 최대였다.
더안이 리쭝런에게 함락되었다는 소식에 쑨촨팡은 격분하여 당장 탈환하라고 명령하였다. 적의 대군이 몰려온다는 소식에 리쭝런도 더안을 버리고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전황은 일진일퇴였고 그야말로 예측불허의 상황이었다. 장제스가 직접 가오안으로 와서 지휘에 나섰다. 또한 난창을 버리고 물러난 제1사단장 왕바이링(王柏龄)을 파면하고 연대장 1명을 총살하였다. 왕바이링은 장제스의 오랜 친우이자 의형제이기도 했지만 군율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얼마 뒤 다시 군직에 복귀할 수는 있었지만 더 이상 일선에 나설 수는 없었다.
제1사단장에는 예전에 예팅과 함께 쑨원의 경호대장이었던 쉐웨(薛岳)가 임명되었다. 10여년 뒤 중일전쟁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창사를 세번 지켜냄으로서 "창사의 호랑이", 서놀트로부터는 "동양의 패튼"이라는 찬사를 받게 되는 그는 장제스보다 9살 아래로 황푸육군소학당과 바오딩 군관학교를 졸업하였으며 북벌군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장군 중의 한 사람이었다. 문제는 그가 비록 공산당원은 아니었지만 공산주의자인 덩옌다와 예팅과는 황푸육군소학당에서 함께 동문수학하여 친분이 돈독한데다 장제스와는 사이가 썩 좋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장제스는 북벌군 참모장 바이충시와 함께 제1군 3개 사단(제2사단, 제4사단, 제6사단)과 제2군, 제14군을 이끌고 직접 난창의 재공략에 나섰다. 또한 장시성 남쪽에서는 제1군 제1사단과 제6군이 젠창(建昌)으로 진격하여 쑨촨팡군을 견제케 하였다. 우창성이 함락된 다음날인 10월 11일 북벌군은 난창성을 완전히 포위하였다. 그동안의 승리로 병사들의 사기는 한껏 고조되어 난창성 따위는 단숨에 점령할 기세였다. 그런데 북벌군의 뒤로는 창장의 지류인 간장강(赣江)이 흐르고 있었다. 강을 등에 지고 군대를 포진시키는 것은 말그대로 배수의 진으로 매우 위험하기 짝이 없는 짓이다. 보충시는 반대했지만 장제스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장제스는 밤에 어둠을 이용하여 총공격에 나서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지신이 직접 최일선으로 나와서 진두 지휘를 하였다.
북벌군 병사들이 공격 태세를 갖춘 채 막 진격에 나설려는 찰나, 뜻밖에도 수비대가 그들의 후방으로 나타나 기습하였다. 성의 지하 수로를 이용하여 몰래 성을 빠져나와 배후로 우회한 것이다. 적군이 등 뒤에 나타나자 북벌군은 혼비백산하였다. 장제스도 당황한 나머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면서 허둥거렸다. 때마침 보충시가 구원에 나서지 않았다면 북벌군은 전멸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심지어 장제스가 포탄에 맞아 전사했다는 오보까지 돌았을 정도였다. 10월 13일 장제스는 난창에서 일단 물러나기로 결정하였다.
장제스가 난창성에서 패배했다는 소식을 들은 쑨촨팡으로서는 반격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후방의 병력을 모두 전방으로 집결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런데 10월 16일 병력과 물자를 만재한 수송선이 난징을 출발하여 창장을 거슬러 올라오다가 폭발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북벌군에 호응하는 노동자 부대가 사보타주한 것이다. 각지에서는 노동자, 농민들이 규합하여 쑨촨팡군의 진격을 방해하고 철로를 파괴했으며 창고에 불을 질렀다.
여기다 남쪽에서는 동로군을 지휘하는 허잉친 제1군 2개 사단 1만명이 푸젠성으로 진격하였다. 푸젠성의 병력은 3개 사단 7개 여단 등 5만명에 달했으니 숫적으로는 완전히 압도하였다. 하지만 10월 3일 2개 여단이 반란을 일으켜 북벌군에 가담하였고 12일에는 광둥성과 푸젠성 접경에 있는 쑹커우(松口)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허잉친은 푸젠군의 후방을 우회한 후 기습하였다. 푸젠군의 주력은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포로만 4천명에 북벌군은 야포 십수문과 소총 4천여정을 노획하였다. 10월 17일에는 영정(永定)이 함락되었다. 이미 전의를 상실한 푸젠군은 도처에서 투항하였다. 허잉칭은 이들을 휘하에 흡수하면서 북벌군의 세력은 날로 커졌다.
쑨촨팡으로서는 더욱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10월 18일 저장성장 시아차오(夏超)가 항저우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는 국민혁명군 제18군 군장으로 임명되었고 휘하의 보안부대를 상하이로 진격시키는 한편, 창장의 교통을 끊어버렸다. 이 때문에 최일선으로 향하던 보급로가 차단되었다. 쑨촨팡은 즉각 2개 여단을 투입하여 진압에 나섰다. 시아차오는 대패하여 포로가 되었고 10월 23일 총살당하였다. 하지만 한번 기울기 시작한 전세는 회복할 수 없었다.
11월 2일 북벌군 10만명이 총공격에 나섰다. 리쭝런의 제7군이 더안을 재점령하는데 성공하였고 4일에는 주장이 함락되었다. 쑨촨팡은 군함을 타고 난징으로 도주할 수 밖에 없었다. 난창도 포위되었다. 난창으로 향하던 증원부대가 모조리 중간에서 격파되자 난창의 수비대 3천명도 사기가 완전히 땅에 떨어져서 더 이상 싸울 의지가 없었다. 결국 11월 8일 난창도 백기를 내걸면서 무혈 함락되었다. 14일에는 장시성 북쪽의 징더진(景德鎭)이 함락되면서 장시성 전체가 북벌군의 손에 넘어갔다. 약 두달에 걸친 치열한 전투에서 쑨촨팡의 주력 부대는 거의 괴멸했으며 북벌군에게 투항한 포로만도 4만명에 달했다.
같은 시간 남쪽에서는 허잉친이 이끄는 동로군이 순조롭게 북상하여 12월 18일 푸젠성의 성도인 푸저우를 함락시켰다. 12월 말까지 푸젠성 전역을 장악하였다. 장제스가 북벌에 나선지 5개월. 그동안의 성과는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북으로는 양호를, 동으로는 장시성을 손에 넣었으며, 북벌군의 진로에 있지 않았던 쓰촨성과 윈난성, 구이저우 성의 소군벌들도 스스로 복속을 청하였다. 병력도 10만명에서 1926년 말에는 거의 30만명에 달하여 3배로 늘어났다. 북쪽에서는 펑위샹이 흩어졌던 병력을 모아서 다시 동쪽으로 진군을 시작했으며 교활하기로 이름난 산시성의 옌시산도 장쭤린을 손을 끊고 북벌군에 가담할 태세였다. 예전에 쑨원이 주도했던 북벌 전쟁이 번번히 광둥성을 벗어나지 못한 채 몇번의 국지전으로 흐지부지 막을 내렸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장제스는 창장 이남의 광대한 지역 대부분을 차지하였고 이제 난징을 눈 앞에 두고 있었다. 게다가 그의 눈은 창장을 넘어서 더 북쪽, 베이징을 향하고 있었다.
한편, 베이징에서는 장쭤린이 우페이푸, 쑨촨팡과 손을 잡고 연합 전선을 결성키로 하였다. 해묵은 감정을 버리고 북벌군을 공동의 적으로 삼아서 북양군 전체가 손을 잡은 것이다. 1926년 12월 1일 그는 이른바 "안국군(安國軍)" 총사령관에 취임하였다. 북벌군 타도를 위하여 전국의 15개성이 연합하였다. 그 세력은 그야말로 막강했으며 북벌군을 압도하였다.
또한 일본을 비롯한 열강들의 동태도 심상치 않았다. 열강들은 북벌군의 북상을 예의 주시하면서 중국으로 군함과 육전대를 증파하여 무력 간섭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적극적인 나라는 일본이었다. 지리적으로도 가까운데다 대륙 침략의 야심은 오랜 숙원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1922년 "중국에서의 기회 균등"을 원칙으로 워싱턴 체제가 수립된 이래 일본은 그동안 중국에 대한 간섭을 가능한 자제하고 있었다. 또한 시베리아 출병이 실패로 끝난 뒤 다이쇼 데모크라시라 하여 군부의 위상 또한 땅에 떨어졌다. 궈쑹링의 반란 당시 장쭤린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관동군이 동북 각지로 출동하기는 했지만 실제로 무력을 발동하여 궈쑹린 군을 공격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일본의 사정은 이미 1년 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극심한 경기 불황과 금융 위기가 닥치면서 온건파 총리 와카즈키 레이지로(若槻禮次郎)의 지위가 흔들리고 중국 출병을 통해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군부 강경파들이 다시 득세하기 시작하였다. 중국의 정세는 여전히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었다.
'전쟁군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 전쟁과 인물, 사건으로 보는 중국 현대사 > 42화, 북벌군 분열되다/blog.naver.com/atena (0) | 2017.12.03 |
|---|---|
| < 전쟁과 인물, 사건으로 보는 중국 현대사 > 41화, 우페이푸의 패망/blog.naver.com/atena (0) | 2017.12.03 |
| < 전쟁과 인물, 사건으로 보는 중국 현대사 > 38화 - 국민혁명군 출정하다/.blog.naver.com/atena (0) | 2017.12.03 |
| < 전쟁과 인물, 사건으로 보는 중국 현대사 > 37화 - 장제스와 공산당/blog.naver.com/atena (0) | 2017.12.03 |
| < 전쟁과 인물, 사건으로 보는 중국 현대사 > 33화 - 궈쑹링 패사하다/blog.naver.com/atena (0) | 2017.12.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