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쟁군사이야기

< 전쟁과 인물, 사건으로 보는 중국 현대사 > 41화, 우페이푸의 패망/blog.naver.com/atena

* 펑위샹의 부활

펑위샹이 소련 군사 고문단들과 함께 모스크바를 떠난 것은 1926년 8월 17일. 오랜 여정 끝에  9월 8일 외몽골의 울란바토르를 거쳐서 서북으로 들어온 그들은 9월 15일 내몽골의 황량한 벽촌 우위안(五原)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펑위샹이 소련에 체류하는 동안 국민군은 장쭤린, 우페이푸, 옌시산의 삼면 협공을 받아서 사분오열하여 서쪽으로 패주하였다. 펑위샹의 눈에 비친 부하들의 몰골은 실로 참담하였다.

"우위안에는 얼마나 남아 있는가?" 펑위샹의 질문에 장즈장이 면목없다는 듯 대답하였다. "4천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아직도 그만큼이나 남았는가. 나는 4백명만 있어도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펑위샹의 얼굴에는 낙담은 커녕, 오히려 자신감이 넘치고 있었다. 모스크바를 출발할 때 소련 정부는 그에게 막대한 원조를 제공하기로 약속하였다. 소총 3만5천정, 탄약 5천만발, 중기관총 270정, 야포 60문, 포탄 6만발, 십여대의 장갑차, 그리고 1천만 루블에 달하는 거금까지. 이미 첫번째 원조로 소총 1만5천정과 1500만발의 탄약, 3만발의 수류탄 등 대량의 무기가 우위안으로 당도하였다. 그는 결코 소련에서 시간을 헛되이 보낸 것이 아니었다.

9월 17일 오후, 우위안 현성 앞에서 1만명이 넘는 장병들이 모인 가운데 펑위샹은 쑨원의 유지를 받들어 혁명 전쟁의 참전을 선언하였다. 남방에서 장제스의 북벌군과 쑨촨팡의 오성연합군이 치열한 일진일퇴의 싸움을 한창 벌이고 있을 때, 북방에서 또다른 혁명의 깃발이 우뚝 선 것이었다. 우위안에는 오색기를 대신하여 혁명을 상징하는 청천백일의 깃발이 나부꼈다. 국민군은 "국민혁명군 연군(聯軍)"으로 개칭되었고 펑위샹 스스로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병사들에게 동정(東征)을 앞두고 규율을 바로잡기 위하여 "금령 3조"를 선언하였다. "민가에 함부로 들어가지 마라. 백성을 보호하라. 주색과 아편을 금하라. 만약 이를 어길 경우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죄의 경중을 따져서 엄히 다스리겠다." 그의 법령은 추상같았다.

우위안에서 북벌 참여를 선언하는 펑위샹. "평민장군(布衣将军)"이라는 별명대로 병사들 앞에서 그의 모습은 매우 소박하다. 장쭤린, 우페이푸, 쑨촨팡 등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유럽식 복장으로 남에게 과시하기 좋아했던 다른 군벌들과는 대조적이다. 북벌군에 대항하기 위하여 장쭤린을 중심으로 군벌 세력이 하나로 집결하는 가운데 펑위샹의 가세는 전국(戰局)의 상황을 또 한번 뒤흔드는 중대한 사건이기도 했다.

다음으로 사방으로 흩어졌던 병력을 모아 반격에 나설 차례였다. 간쑤성과 닝샤성, 쑤이위안성, 샨시성 등 광대한 서북 여기저기에 흩어진 국민연군의 잔여 부대는 약 5만명. 또한 펑위샹은 오랜 심복이면서 난커우 전투에서 퇴로가 차단되어 옌시산에게 투항했던 쉬여우산, 한푸지에 대해서도 옛 잘못은 묻지 않겠으니 돌아오라는 편지를 보냈다. 두 사람은 허둥지둥 펑위샹 앞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무릎 꿇고 눈물로  참회하면서 다시는 배신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펑위샹은 전군을 5개 군으로 재편성한 후 둘로 나누었다. 그리고 동로군의 지휘는 제2사단장 쑨량성(孫良誠)에게 맡기고 동쪽으로 진격시켰다. 목표는 샨시성의 성도 시안. 시안은 우페이푸 쪽 군벌인 류전화(劉鎭華)가 이끄는 10만 대군에게 포위당한 채 장장 7개월에 걸쳐 참혹한 방어전을 치루고 있었다. 시안의 수비를 맡은 사람은 양후청과 리후천이었다. 두 사람은 여러 차례의 항복 권고를 거부한 채 성문을 굳게 걸어잠구고 항전하였다. 하지만 사방이 겹겹히 포위당한 채 식량이 떨어진지는 오래였다. 성내에서는 동물과 식물을 찾아볼 수 없었고 가죽 허리띠까지 죽으로 끓여서 허기를 채우는 판이었다. 심지어 시체에서 인육을 잘라먹는 일도 있었다. 기아와 전염병, 혹독한 추위로 생지옥이나 다름없는 참상이었다. 성안에서 죽은 사람은 무려 5만명에 달하였다. 성의 함락이 시간 문제라 여긴 류전화는 양후청, 리후천 두 사람의 목에 10만 위안의 현상금을 걸었다.

양후청(1893~1949) 훗날 장쉐량과 함께 시안사변을 일으켜 중국은 물론, 전 세계를 놀라게 하여 명성을 떨치게 되는 인물이다. 그의 인생은 파란만장했는데, 샨시성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가 어릴 때 아버지는 비밀 종교의 수령이었던 백부를 대신하여 관아에 끌려가 참수당하였다. 22살 때 위안스카이가 칭제를 하면서 토원전쟁이 발발하자 샨시 호국군에 참가하여 군인이 되었다. 1925년 7월 쑨웨가 샨시독판이 되자 그의 부하가 되어 제3사단장에 임명되었다. 1927년 5월 공산당에 가입했고 자신의 부대를 "중국공농홍군"이라 일컬었다. 장제스와 펑위샹 사이에서 중원대전이 폭발하자 그는 펑위샹을 배반하고 장제스의 편에 섰고 샨시성 주석과 제17로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군의 잔당들이 장제스의 토벌을 피하여 샨시성 북부로 들어오고 동북군의 수장 장쉐량 역시 서북초비 부사령관이 되어 시안으로 오자 양후청의 입장은 매우 난처해졌다. 결국 장쉐량과 의논하여 시안사변을 일으켰지만 결국 모든 지위에서 파면되어 난창에 연금당하였다. 이 때문에 그의 가족은 매우 궁핍한 생활을 해야 했다. 국공내전 말기인 1949년 9월 6일 충칭에서 가족, 측근들과 함께 처형당하였다.

10월 15일 쑨량성의 동로군이 시안에 당도하여 류전화를 공격하였다. 류전화 역시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완강하게 저항하였다. 일진일퇴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시안의 성벽에서도 저 멀리서 격전이 벌어지는 광경이 보일 정도였다. 40여일의 격전에도 불구하고 적의 숫자가 너무 많아서 도저히 정면 돌파는 어렵다고 판단한 쑨량성은 11월 26일 야음을 틈타서 기병 부대로 우회하여 적의 사령부를 기습하였다. 또한 전군에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이 때문에 류전화군이 대혼란에 빠지자 이 때를 맞추어 성내의 방어군도 성문을 열고 일제히 뛰어나와서 적을 공격하였다. 류전화는 일거에 대패하여 소수의 병력과 함께 퉁관(潼关)으로 도주했다. 다음날 정오 시안의 포위는 결국 풀렸고 국민연군은 첫 승리를 거두었다. 장장 8개월에 걸친, 군벌 전쟁을 통틀어 가장 처절했던 포위전이었다. 사람들은 시안을 끝까지 지켜낸 두 명장 양후청과 리후천을 "이호수장안(二虎守長安, 두 호랑이가 장안(시안)을 지켰다)"라고 하였다. 또한 쑨량성은 패주하는 적을 쫓아서 12월 2일에는 퉁관을 점령하여 샨시성 전역을 탈환하였다.

한편, 펑위샹은 서로군 2개 사단 및 1개 기병여단을 이끌고 서쪽으로 진군하여 닝샤성과 칭하이성, 간쑤성 등 서북 변방을 평정하였다. "마(馬)씨"성을 가진 회교도 군벌들은 펑위샹에게 항복하여 그의 휘하에 들어갔다. 참고로, 마씨란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마호메트에서 따온 것으로 당나라 시절 실크로드를 따라서 중국으로 들어온 투르크 계통의 후예들이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닝샤성의 마훙쿠이(馬鴻逵), 칭하이성의 마부팡(馬步芳), 간쑤성의 마훙빈(馬鴻賓)이 있었고 이 셋을 합하여 "서북 삼마"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서북을 평정한 펑위샹은 다시 군대를 돌려서 1927년 1월 26일 시안에 입성하였다. 그리고 시안을 굳게 지킨 두 사람을 크게 치하하는 한편, 자신의 사령부를 이곳에 설치하였다. 이제는 남쪽에서 올라오는 북벌군에 호응하여 중원을 넘볼 태세였다.

*"북양 연합" 대 "북벌 연합"

북방의 군벌들로서는 발등에 불 떨어진 꼴이었다. 서쪽에서는 펑위샹이, 남쪽에서는 북벌군이 파죽지세로 올라오고 있었다. 장시성과 푸젠성에서 쑨촨팡은 완패하여 주력 부대의 대부분을 잃은데다 안후이성 총사령관 천티아오위안(陳調元)의 태도도 불분명하였다. 쑨촨팡은 잔여 병력을 죄다 끌어모아서 14개 사단 4개 혼성여단 등 약 15만명의 병력을 난징과 상하이 주변으로 집결시켜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후베이성에서 패주하여 우한 삼진을 빼앗긴 채 간신히 허난성 신양(信陽)으로 후퇴한 우페이푸는 거의 몰락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의 위세가 땅에 떨어지자 부하들이 줄줄이 등을 돌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11월 14일 톈진에서 회의가 열렸다. 회의의 주최자는 장쭤린이었다. 또한 장쭝창, 우쥔셩, 장쉐량 등 펑톈군의 쟁쟁한 간부들 외에도 쑨촨팡, 우페이푸, 옌시산의 대표들도 참석하였다. 그동안 서로 총칼을 겨누었던 군벌 진영들이 모두 참여한 셈이었다. 물론 공동의 적에 맞서기 위함이었다. 그 자리에서 장쭤린은 자신에게는 대총통이 되려는 야심 따위는 없으며, 지금의 가장 큰 일은 북양파가 단결하여 군사적인 문제를 우선 해결하는 것이니 그 다음에 정치 문제를 해결하자고 너스레를 떨었다. 또한 친구의 위기를 지켜볼 수 없으니 펑톈군을 남하시켜 도울 것이며 쑨, 우, 옌 장군도 여기에 동의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하지만 쑨촨팡이나 우페이푸, 옌시산으로서는 무얼 믿고 승냥이같은 장쭤린의 군대를 제 영토에 들일 것인가. 가도멸괵(假途滅虢)의 꼴이 될 지 모를 판이었다. 이들은 군대의 지원은 필요없고 군사비와 무기의 원조를 요구하였다. 당장 공멸의 위기를 눈앞에 두고서도 서로의 모순과 불신 때문에 힘을 모으지 못하는 것이 군벌들의 모습이었다. 장시성에 패배하여 난징으로 후퇴한 쑨촨팡은 상황이 급박하자 자세를 낮추어 장쭤린과 타협하려는 태도였지만 우페이푸는 결코 굽힐 생각이 없었다. 그는 어떻게든 장쭤린의 세력이 허난성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견제하였다. 하지만 장쭤린은 몰래 손을 써서 우페이푸의 부하들을 포섭하는 등 그의 남은 지반마저 흔들었다.

12월 1일 장쭝창, 쑨촨팡, 옌시산 등 16명의 주요 군벌들의 지지를 받아서 장쭤린은 톈진에서 이른바  "안국군(安國軍)" 총사령관으로 추대되었다. 장쭤린의 영토인 동3성과 러허성, 즈리성, 산둥성 외에도 옌시산의 영토인 산시성과 차하르성, 쑤이위안성, 샨시성, 쑨촨팡의 영토인 장쑤성, 장시성, 안후이성, 저장성, 푸젠성, 여기에 우페이푸의 영토인 허난성까지. 티베트와 신장을 제외한 전국 27개성 중에서 16개 성을 아우르는 대세력이었다.

이로서 북벌군에 맞서는 거대한 북양 연합군이 탄생하였고 장쭤린은 위안스카이 이래 지난 10년 동안 누구도 감히 꿈꾸지 못했던 북양 군벌의 최고 수령이 되었다. 일본과 영국, 미국도 장쭤린의 안국군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또한 그는 쑨촨팡과 장쭝창, 옌시산을 각각 안국군 부사령관에 임명하였고 각 전선을 책임지도록 하였다. 중국의 전국(戰局)은 북양 연합 대 북벌 연합의 형세가 되었다. 물론 장쭤린의 진짜 속셈은 고작 군벌들의 추대를 받아서 그들의 영수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중국 천하를 제 발밑에 놓는 것이었다. 12월 27일 베이징으로 들어온 그는 본격적으로 군정부의 조직과 대원수(대총통)의 자리에 오를 준비를 착착 준비하였다.

안국군 총사령관에 취임한 장쭤린. 반년 후에는 중화민국 육해군 대원수가 되었다. 펑톈성의 가난한 빈농에서 태어나 비적질로 먹고 살았던 그가 명실상부한 중국의 국가 원수가 된 것이다. 인생의 절정기라 할 수 있었지만 북벌군이 파죽지세로 북상하면서 영광은 1년도 채 가지 못하였다.
* 우페이푸 몰락하다

장쭤린은 우페이푸에 대해서 "안국군 전방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우한을 탈환할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우페이푸에게는 이미 그만한 힘이 남아 있지 못하였다. 장쭤린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그는 우페이푸를 돕는다는 핑계로 군대를 출동시켰다. "즈리-산둥 연합군은 카이펑을, 장쉐량의 제3방면군과 한린춘(韓麟春)의 제4방면군은 정저우를 거쳐서 우한을 접수한 후 곧장 남하하여 후난성과 광둥성을 취하라." 1927년 2월 8일 펑톈군은 허난성을 일제히 침공하였다. 두 사람의 동맹은 깨졌다.

우페이푸 또한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그는 장쭤린 토벌을 선언하고 각지에서 병력을 끌어모아서 16개 군을 편성하였다. 이를 "허난 자위군"이라 칭하였다. 또한 진윈어를 허난성 보위군 총사령관에, 카오루통(高汝桐)을 전선 총사령관에 각각 임명하고 펑톈군을 막도록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 토비를 규합한 것이기에 오합지졸에 불과한데다 전의라고는 없었다. 장갑열차를 앞세운 펑톈군이 징한 철도를 따라서 남하하자 우페이푸군은 도처에서 싸우지도 않고 투항하는 판이었다.

2월 10일에는 前 대총통 차오쿤이 직접 톈진으로 와서 장쭤린에게 투항하였다. 바오딩에서 쫓겨난 뒤 우페이푸에게 의탁하여 정저우에서 은거하던 그도 이제는 체면이고 뭐고 없었다. 장쭤린에게 붙어서 그저 목숨이라도 건지고 남은 여생을 편안히 보내자는 것이었다. 前 장쑤 독군이자 우페이푸의 부사령관 지씨에위안 역시 톈진의 일본 조계로 도망쳤고 2월 16일 허난 군무 방판(이전의 독군) 겸 허난 의군(毅軍) 사령관 미전피아오(米振標)가 투항하였다. 3월 18일에는 정저우가 함락되었다.

3월 23일 우페이푸는 카오루통을 시켜서 펑톈군의 병참선인 징한철도를 차단하고 반격에 나서도록 하였다. 카오루통은 500여명의 결사대로 야음을 틈타 펑톈군의 장갑열차를 급습토록 했으나 펑톈군의 맹렬한 사격에 격퇴당하였고 카오루통도 포탄을 맞아 전사하였다. 그나마 우페이푸가 마지막까지 남은 힘을 모두 짜냈던 유일한 반격 작전이었다. 게다가 남쪽에서는 탕성즈가 이끄는 북벌군이 북상을 시작하였고 서북에서는 펑위샹의 국민연군이 동탁의 부하 여포가 창 한자루로 제후 연합군을 막았다는 천하의 험지 한구관(函谷關, 함곡관)을 점령하고 허난성을 침공하였다. 그야말로 삼방향에서 협공당하는 샌드위치 꼴이었다.

대세가 결정났다고 본 부하들이 줄줄이 배신하기 시작하였다. 제8군장 웨이위산(魏益三)은 2만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북벌군에게 투항하여 국민혁명군 제30군장에 임명되었다. 궈쑹링의 부하였다가 펑위샹에게 투항한 후 다시 우페이푸에게 항복했던 그가 이번에는 북벌군에 붙은 것이다. 진윈어 역시 북벌군과 교섭하여 자신의 지위를 보장받는 조건으로 항복하였고 제7군 군장 티엔웨이진(田維勤)은 장쭝창에게 투항하는 등 우페이푸의 진영은 사분오열된 채 와해되었다.

한때 천하를 호령하던 우페이푸도 이제는 사면초가에 몰려서 백가지 계책이 모두 막혔다. 이런 경우 여느 군벌들은 대개 중국의 법이 닿지 않는 톈진이나 상하이의 조계로 달아나 은거하지만 아직 포기할 생각이 없었던 우페이푸는 얼마 안되는 잔여 병력이나마 수습하여 쓰촨성의 입구인 바이팅청(白帝城)으로 달아났다. 삼국지에서 육손에게 패배했던 유비가 차마 부끄러워 촉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실의에 빠져 있다가 결국 숨을 거두었던 곳이다. 쓰촨 군벌들은 과거 우페이푸의 휘하에 있었기에 이들에게 의탁하여 재기를 꾀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쓰촨 군벌들은 이미 깃발을 바꾸어 달았고 국민정부에 복속하는 조건으로 자신들의 생명과 지위를 보장받았다. 그러니 이제와서 우페이푸를 위하여 싸울 리 없었다. 그가 이곳에서 시간을 무익하게 보내는 사이 장제스는 북벌을 성사하였다.

1928년 5월 장제스는 쓰촨 군벌 덩시호우(邓锡侯)를 시켜서 우페이푸를 공격케 하였다. 우페이푸는 돈도 부하도 없이 갈 곳 없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충칭 군벌 류상에게 잠시 의탁했다가 1931년 5월 22일 베이핑(베이징)으로 와서 장쉐량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장제스 정권에서 한 자리씩 차지했던 부하들과는 달리, 정치에서 완전히 손을 뗀 채 오직 불교 공부에 매진하고 옛 상전인 차오쿤과 종종 교제하면서 옛 추억을 나누는 등 유유자적한 은거 생활을 보낼 뿐이었다. 하지만 만주사변과 러허사변으로 그를 보호하던 장쉐량이 몰락하자 경제적으로도 매우 궁핍한 신세가 되었다.

일본이 무력을 앞세워 화북을 점차 잠식해 오는 상황에서 화북의 인사들은 우페이푸에게 베이핑에서 재기하여 항일에 앞장서기를 요청했으나 우페이푸는 거절하였다. 장제스도 명망있는 우페이푸를 위험 분자로 보고 경계의 눈초리를 감추지 않았으나 그의 마음 속에는 이미 꿈도 야심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1934년 11월 2일 장제스와 우페이푸는 베이핑에서 면담하였다. 과거 천하의 주인이었던 자와 지금 천하의 주인인 자가 격의없이 만난 자리에서 우페이푸는 장제스에게 항일에 나서주기를 충고하였다.

1935년 12월 베이핑에서 쑹저위안의 기찰 정부가 수립되었다. 쑹저위안은 우페이푸더러 자신의 고문이 되어주기를 청했지만 거절당하였다. 중일전쟁이 폭발한 뒤 베이핑을 점령한 일본군 역시 우페이푸를 괴뢰 정권의 수장으로 세우려고 온갖 회유와 협박을 하였지만 일본을 매우 미워했던 그의 절개를 꺾을 수는 없었다. 사람들은 그를 "애국 장군"이라며 칭송하였다. 하지만 괘씸하게 여긴 일본의 악명 높은 특무 책임자 도히하라 겐지(土肥原贤二)는 우페이푸를 없애기로 결심하고 1939년 12월 4일 충치 치료를 받으려고 일본인 병원을 방문한 그를 암살하였다. 우페이푸의 나이 65세. 중일전쟁이 끝난 뒤 장제스 정권은 정식으로 국장을 지냈고 그의 묘를 베이징 교외의 위취안산(玉泉山)으로 이장하였다.

우페이푸는 "수재 장군" 이라 불릴 만큼 총명하면서 곁에는 항상 책을 끼고 있었다. 당대 군벌들로서는 보기 드물게 사치를 멀리하고 청렴했으며 전장에서는 누구도 감히 따르지 못하는 탁월한 용맹함을 자랑하여 한때 중국 전토를 거의 쥘 뻔하였다. 전성기일 때에는 감히 천하에 대적할 자가 없어 장쭤린조차 정면에서 싸우기를 두려워 했을 정도였다. 또한 차오쿤에게는 항상 예를 다하였고 일본에게는 마지막까지 절개를 지켰다는 점에서 그는 가히 삼국지의 관우에 비견될 만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관우와 마찬가지로 부하들을 다루지 못하였고 그로 인하여 패망한 것도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