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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 전쟁과 인물, 사건으로 보는 중국 현대사 > 43화, 장제스의 반란/blog.naver.com/atena

* 난징 점령

창장 이남 5개 성의 주인이자 남방 최강의 실력자로서 한때 장쭤린의 가담을 서늘게 했던 쑨촨팡도 파멸이 초읽기였다. 장시성과 푸젠성에서 참패하면서 주력 부대의 거의 전부를 잃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대세가 이미 기울었다고 판단한 토박이 소군벌들은 지위와 지반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북벌군에 속속 가담하면서 쑨촨팡의 진영은 공중분해될 판이었다. 당장의 이익에 눈이 멀어서 우페이푸의 패망을 나 몰라라 했던 대가인 셈이었다. 이제 믿을 구석은 북방의 장쭤린과 손을 잡는 것이었다.

발등에 불떨어진 꼴이 된 쑨촨팡은 체면이고 뭐고 없었다. 그는 장쭤린에게 병력과 무기를 청하기 위하여 직접 톈진으로 올라간 다음 그를 안국군의 총수로 추대하였고 장쉐량, 장쭝창과는 형제의 연을 맹세하였다. "웃는 호랑이(笑虎)" 쑨촨팡의 별명이다. 그는 얼굴에 웃음을 띈 채 자신을 한껏 낮추면서 온갖 사탕발린 말로 상대를 치켜세우는 것이 특기였다. 물론 속내는 냉혹하면서 시커멓기 짝이 없었지만 거만하고 인정미라고는 없는 우페이푸와는 대조적이었다. 즈리파라고 하면 치를 떠는 펑톈의 장군들도 쑨촨팡에게는 흠뻑 빠졌다. 그동안 하이화이(淮海)를 사이에 두고 총부리를 겨누었던 장쭝창은 해묵은 감정을 내려놓고 쑨촨팡에게 온 힘을 다하여 돕겠다고 장담하였다. 득의만만하여 난징으로 돌아온 쑨촨팡은 사방에서 병사를 모으고 잔여 병력을 긁어모아서 14개 사단 4개 혼성 여단 8만명을 편성하였다.

창으로 백병전 훈련 중인 쑨촨팡의 5성연합군 병사들. 10대 초반의 엣띤 얼굴인 것으로 보아 갓 징집된 소년병들로 보인다.
북벌군에게 연전연패한 후 무기가 부족하여 창으로 무장한 5성연합군의 신병들. 낡은 군복을 걸치고 규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오합지졸의 모습이 느껴진다.

난징에는 제3사단장 저우펑치(周凤岐)의 지휘 아래 5개 사단이, 상하이에는 제9사단장 리바오장(李宝章)의 지휘 아래 6개 사단이 배치되었다. 또한 천위렁(陈仪仍)의 제1사단과 류샹팅(卢香亭)의 제2사단을 각각 쉬저우와 양저우(扬州)에 배치하여 후방을 대비하였다. 이것이 수중에 남은 군사력의 전부였다. 하지만 사단의 숫자만 많을 뿐 편제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데다 대부분 신병과 패잔병이었다. 병사와 무기도 부족하였고 그동안의 연전연패로 사기 또한 완전히 땅에 떨어졌다. 전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12월 11일 저우펑치가 반란을 일으켜 전열을 이탈한 후 북벌군에 투항하였다. 그는 난징의 수비대장으로 임명되었지만 주군인 쑨촨팡이 부하들과 의논하지도 않고 즈리파의 오랜 원수인 장쭤린과 손을 잡은 것에 반발했기 때문이었다. 저우펑치의 제3사단은 국민혁명군 제26군(저장군 제1사단, 제2사단, 포병여단)으로 개편되었다. 22일에는 저장성장 겸 저장군 제1사단장 천위위(陈仪亦)가 반란을 일으켜 쑨촨팡 직계 부대인 제8사단을 공격하는 등 그야말로 좌중지란의 상황이었다.

쑨촨팡으로는 다행히도 때마침 그를 돕기 위하여 북쪽에서 장쭝창이 이끄는 산둥군이 남하를 시작하였다. 선봉은 난폭하고 거칠기로 악명 높은 러시아인 용병 부대들이었다. 또한 중무장한 장갑열차들이 병사들과 군수품을 잔뜩 실고 요란한 경적 소리와 함께 쉬저우 역에 당도하였다. 북벌군 따위는 단숨에 무찌를 기세였다. 만약 이들이 온 힘을 모아서 반격에 나섰더라면 내분에 빠져 있던 북벌군을 크게 격파했거나 적어도 중국을 양분하는데 성공했으리라.

장쭝창 휘하의 대표적인 러시아 용병부대인 제65독립사단. 적백 내전에서 패배한 백군 출신 러시아인들로 술과 마약에 찌든데다 규율도 엉망이었지만 전투에서는 매우 용맹한데다 실전 경험이 풍부하였고 무엇보다도 중화기와 기계류를 다루는데 매우 능숙하였다. 어차피 나라를 잃고 오갈 곳 없는 신세였던 그들로서는 장쭝창에게 무조건적으로 충성할 수 밖에 없었다.
장쭝창이 자랑하는 장갑열차 중 하나인 "산둥호" 기관사를 비롯한 약 100여명에 달하는 운용요원들은 모두 러시아인들이었다.
장쭝창의 지시로 산둥성 지난 병공창에서 제작한 중국 최초의 전차. 체코 출신 기술자 페르디난드 호스칠트(Ferdinand hauschildt)가 설계 및 제작을 맡았다. 영국제 휘핏(whippet) 고속 경전차를 차체로, 좌우에 두개의 포탑을 설치하고 각각 기관총 한정씩 탑재하였다. 또한 차체 전면에도 기관총이 있었다. 이 사진 이외에 현재까지 남아 있는 자료가 거의 없어 구체적인 성능이나 제원, 생산대수는 알 수 없다. 중국에서 장쭝창은 "개고기 장군"이라 불리며 무지한 군벌의 대명사로 조롱의 대상으로 치부될 뿐이지만 그가 당대 여느 군벌들 중에서도 독보적일 만큼 중국군의 근대화와 기계화 부대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만큼은 높이 평가할만하다.
위와 마찬가지로 산둥성 지난 병공창에서 제작한 중국산 장갑차. 역시 정확한 제원이나 생산대수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장쭤린의 진짜 속셈은 따로 있었다. 교활한 그는 우페이푸, 쑨촨팡이 북벌군을 견제하는 동안 허난성의 진공을 명령하였다. 마지막까지도 대의보다는 당장의 이익에 눈이 먼 군벌의 탐욕스러운 본성을 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장쉐량이 지휘하는 펑톈군 주력이 북쪽에서, 장쭝창의 산둥군이 동쪽에서 우페이푸를 협공하였다. 남쪽에서는 북벌군, 서쪽에서는 펑위샹을 간신히 저지하고 있었던 우페이푸는 장쭤린의 뒷치기에 단숨에 무너져 내렸다. 결국 얼마 안되는 병력을 수습하여 쓰촨성의 바이팅청으로 달아났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1927년 1월 1일 장제스는 난창에서 군사 회의를 열었다. 우한과 난창의 승리로 북벌의 제1단계가 끝났다고 보고 제2단계 작전을 하달한 것이다. 목표는 쑨촨팡의 심장부인 난징. 전 병력을 셋으로 나누었다.

동로군 : 총사령관 보충시, 제1군, 제14군, 제17군, 제19군, 제26군
중로군 : 총사령관 장제스, 제2군, 제6군, 제7군
서로군 : 총사령관 탕성즈, 제4군, 제8군, 제11군

"동로군은 푸젠성에서 북상하여 저장성을 친 후 항저우와 상하이로 진격하라. 중로군은 주장에서 창장을 따라 동진하여 안후이성을 공략하고 난징으로 진격하라. 서로군은 우한에서 북상하여 허난성으로 진격하라." 또한 주바이더의 제3군과 리푸린의 제5군은 전략 예비대로서 각각 난창과 광저우에 주둔하면서 북벌군의 후방을 맡았다. 장제스는 단숨에 창장 이남을 석권한 다음 여세를 몰아서 북상하여 장쭤린을 격파하고 천하를 통일할 생각이었다.

보충시, 허잉친이 지휘하는 동로군은 병력을 둘로 나누어 서쪽과 남쪽에서 일제히 저장성을 침공하였다. 동로군의 선봉은 새로 투항한 저우펑치의 제26군. 허잉친의 제1군도 해안선을 따라서 북상하면서 원저우(温州)와 타이저우(台州)를 차례로 점령하였다. 1월 27일 저장성 서남부의 룽유(龍游)에서 허잉친의 제1군이 제26군과 협격하여 치열한 격전 끝에 쑨촨팡 휘하의 저장군 주력부대를 포위 섬멸하였다. 2월 1일 란시(兰溪)와 진화(金华)를 점령하였고 항저우 남쪽 푸양(富阳)에서 쑨촨팡군을 또 한번 대파하였다. 2월 18일 저장성의 성도인 항저우가 북벌군의 손에 넘어왔다. 21일에는 닝보(寧波)에 입성하면서 저장성 공략 작전을 종료하였다. 이제 상하이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또한 중로군은 쳉쳰과 리쭝런이 각각 전선 총사령관을 맡아서 장시성 주장에서 창장을 따라서 동진하여 안후이성을 침공하였다. 하지만 격전이 벌어진 저장성과 달리, 안후이성에서는 변변한 전투 한번 없었다. 이미 전의를 상실한 채 싸우지도 않고 줄줄이 백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3월 4일에는 안후이성 총사령관을 맡은 제6사단장 천티아오위안(陳調元)과 제3혼성여단장 왕진(王晋)이 안칭(安慶)에서 반란을 일으켜 북벌군에게 가담하였다. 이들은 각각 국민혁명군 제37군장과 제27군장에 임명되었다. 같은 날 안후이성의 성도 허베이(合肥)의 수비를 맡은 환북진수사(晥北鎭守使) 마양빈(马祥斌)도 투항하면서 안후이성은 북벌군의 손에 들어왔다.

북벌군의 진격 속도는 그야말로 전광석화였다. 저장성과 안후이성을 속전속결로 휩쓴 다음 난징과 상하이로 육박하면서 쑨촨팡의 멸망이 초읽기에 들어가자 느긋했던 장쭤린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쉬저우에 있던 장쭝창이 부랴부랴 직접 대군을 이끌고 내려왔다. 그가 난징에 도착한 날은 2월 23일. 장쭝창의 산둥군과 쑨촨팡의 5성 연합군이 서로 힘을 모으면서 직노연군이 결성되었다. 허난 작전을 총지휘하고 있던 장쉐량도 남쪽의 상황이 급박하자 병력을 쉬저우 방면으로 돌려서 쑨촨팡, 장쭝창을 지원할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펑톈군의 가세도 북벌군을 저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3월 6일에는 쳉쳰의 제6군이 난징 남서쪽으로 겨우 80km 떨어진 우후(芜湖)를 점령하였다. 북벌군은 세 방향에서 난징과 상하이에 대한 포위망을 점점 좁혀들어오고 있었다. 북벌군이 상하이로 진격하자 상하이에 막대한 이권을 가지고 있던 열강들도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병력을 증파하였다. 미 해병대와 일본 육전대, 영국 경보병 연대가 속속 상륙하면서 상하이 조계에 집결한 열강 군대는 약 3만명에 달하였다. 또한 상하이 앞바다에는 60여척에 달하는 군함들이 닻을 내린 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3월 7일 중국 해군사에서는 특기할만한 일이 일어났다. 상하이 앞바다에 체류 중이던 동북 해군 산하의 수상기 모함 진하이(鎭海)에서 발진한 수상기 한대가 북벌군의 머리 위에 폭탄을 떨어뜨린 것이다. 물론 큰 피해는 없었지만 중국에서는 처음으로 항공기가 군함에서 발진하여 육상 폭격을 실시한 사례였다.

중국 최초의 수상기모함 진하이. 원래는 독일 해군의 수송선으로 독일이 제1차세계대전에서 패전한 뒤 민간 상선으로 사용되다 장쭤린이 구입하여 연습함으로 사용하였다. 1926년 3월 천황다오에서 동북해군 산하 "수상기부대(水面飞机队)"가 창설되면서 진하이를 수상기모함으로 개조하였다. 배수량 2700톤, 최대 속도 10노트, 47mm 포 2문, 3인치 포 3문, 어뢰 등으로 무장했으며 수상기 2대를 탑재하였다.

3월 15일 창장 남안을 따라서 동진 중이던 촁첸의 제6군이 일제히 창장 이북으로 도강에 나섰고 장쭝창-쑨촨팡 연합군의 방어선을 돌파하였다. 또한 남쪽에서는 동로군이 창저우(常州)를 점령하여 상하이와 난징의 연결을 끊었다. 3월 19일 북벌군을 우쑹(吴淞)을,  21일에는 쑤저우(苏州)를 점령하여 상하이를 고립시켰다. 하지만 궁지에 몰린 직노연군의 저항 또한 만만치 않았고 북벌군은 피를 피로 씻으며 진격하였다. 장쭝창은 4개 혼성여단과 1개 러시아인 연대로 반격을 시도했지만 결국 격파되어 패주하였다. 게다가 상하이 위수 사령관인 제9사단장 리바오장이 반란을 일으켜 북벌군에 가세하였다. 상하이 방어선의 한축이 무너진 것이다.

상하이의 공동 조계를 경비 중인 열강의 수비대. 당시 상하이에는 미국과 일본,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5개국의 조계가 있어 대중 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북벌군이 상하이로 접근하자 열강들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군함과 육전대를 증파하였다.

한편, 공산당은 상하이로 몰래 무기를 반입하고 노동자들을 규합하여 무장 봉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들의 목적은 이 곳에 노동자들의 정권을 수립하여 장제스의 손에 넘기지 않는 것이었다. 상하이에는 약 100만명에 달하는 노동자가 있었으며 70%이상이 노조에 가입하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중국 공산당의 후원을 받는 상하이 총공회가 있었다. 북벌군이 예상 밖의 선전을 하면서 상하이, 난징으로 진격하자 공산당 지도자 천두슈는 상하이 봉기를 지시하였다.

봉기의 총책임은 저우언라이가 맡았다. 당시 29세. 비록 나이도 젊고 경험도 부족했지만 문무를 겸비한 인재였던 그는 뛰어난 리더쉽과 추진력, 탁월한 인망으로 장래가 촉망받는 지도자였다. 3월 초 소수의 공작대를 이끌고 상하이의 지하로 잠입하는데 성공한 그는 노동자들에게 무기를 나누어주고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한편, 치밀한 봉기 계획을 수립하였다. 3월 19일 "중공 상하이구 위원회 행동대강"을 하달하였다. 작전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총파업과 함께 무장 봉기를 일으켜 경찰국을 비롯한 주요 공공기관을 신속히 장악하고 직노연군의 패잔병들을 무장해제시킨다. 상하이 소비에트 정부를 수립하고 노동자 규찰대를 치안을 맡으며 북벌군을 맞아들인다."

3월 21일 자베이와 훙커우, 푸둥 등 상하이 각 지역에서 노동자들의 봉기가 시작되었다. 참여한 노동자의 숫자는 약 30만명에 달했다. 공공기관이 습격당하고 시내를 순찰 중이던 직노연군 병사들이 사격을 받았다. 노동자들은 무기를 들고 직노 연군을 무장해제시키는 한편, 시가지의 주요 거점을 신속하게 장악하였다. 비록 그 와중에 300여명이 죽고 1천여명의 부상자가 났지만 다음날 상하이 소비에트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상하이를 점령한 노동자 군대. 그동안 중국 정부는 북벌전쟁 당시 상하이의 해방을 "민중 혁명의 쾌거"라며 저우언라이의 치밀한 사전 준비와 리더쉽을 강조하지만 실제로 상하이를 점령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쪽은 노동자들이 아니라 북벌군이었다. 북벌군이 아니었다면 엉성한 조직과 빈약한 무기를 쥔 노동자들은 여지없이 제압당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상하이 교외에서 북벌군과 싸우고 있던 직노연군 제8군은 퇴로가 차단되었다. 군장 비쑤청(毕庶澄)은 상황이 급박하자 비겁하게도 부하들을 버린 채 일본 상선을 타고 혼자 산둥성으로 달아났지만 대노한 장쭝창이 그를 잡아다 총살시켰다. 나머지 부하들은 백기를 들고 투항하였다. 쉐웨(薛岳)가 지휘하는 북벌군 제1군 제1사단이 상하이 시내로 당당하게 입성하였다. 인구 300만명의 중국에서 가장 크고 발달된 국제 도시는 북벌군의 수중에 넘어갔다.

북벌군의 난징, 상하이 공략(1927년 1월 ~ 3월)

3월 22일 남쪽에서 북상 중이던 동로군이 난징 동쪽의 전장(镇江)을 점령하였다. 또한 서쪽에서는 쳉쳰의 제6군이 쉬안청(宜城)을 점령하고 난징을 향하여 동진 중이었다. 난징은 삼방향에서 포위당한 형국이었다. 쑨촨팡과 장쭝창은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였다. 이들도 북벌군의 기세가 대단하여 난징을 지킬 수 없다는데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는 잔여 병력을 어떻게든 최대한 많이 창장 이북으로 철수시키는 것이 관건이었다. 창장을 천연의 방어선으로 삼아서 북벌군의 북상을 저지하겠다는 것이었다. 언젠가 다시 난징을 되찾을 기회는 오리라. 쑨촨팡은 후일을 기약하면서 난징을 떠났다.

3월 23일 북벌군의 총공세가 시작되었다. 바다에서는 북벌군에 가담한 해군 함대가 난징성을 향하여 함포 사격을 쉴 새 없이 퍼부었고 육지에서는 포병의 엄호 아래 북벌군 병사들이 난징의 두터운 성벽 아래로 새까맣게 몰려왔다. 이미 전의를 상실한 수비대는 무기를 버리고 속속 투항하였다. 이날 저녁 난징성에는 청천백일기의 깃발이 나부꼈다.

* 중국 해군, 북벌군에 가세하다

한편, 파죽지세로 진격하는 북벌군의 위세와 점점 기울어져 가는 북양 군벌의 쇠락 속에서 중국 해군 총사령관 양수장(楊樹莊)은 고심하고 있었다. 과연 어느 편에 붙는 것이 해군의 미래와 부하들을 위하는 것인가. 그동안 해군은 군벌들의 사설 함대나 광저우의 국민정부로 넘어간 몇몇 군함을 제외하고 대부분은 중립을 지키면서 중국의 복잡한 정세에 한발짝 떨어져 있었다. 육군이 국가가 아닌 군벌에 충성하고 군벌의 용병으로 싸웠던 것과 달리, 이들은 오직 베이징 정부를 중화민국의 정통 정권으로 인정하고 복종할 뿐이었다. 설령 베이징 정부의 주인이 누구로 바뀌건 상관없다는 식이었다.

하지만 펑위샹의 베이징 정변으로 대총통 차오쿤이 쫓겨난 뒤 베이징은 그야말로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었다. 주인을 잃은 꼴이 된 해군도 분열되어 최강의 전력을 자랑하던 칭다오의 발해 함대는 장쭤린에게 포섭되었다. 이에 반발한 일부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장쭝창에게 가차없이 진압되었고 1925년 7월 19일 친황다오로 가서 동북 해군에 편입되었다. 상하이와 난징에는 중국 해군 소속의 중앙 제1함대와 제2함대, 연습함대 등 40여척에 달하는 대소 군함이 체류하고 있었지만 극심한 군비 부족으로 낡은 군함은 수리조차 못한 채 항구에서 썩어가고 있었고 병사들은 수개월 째 봉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였다.

중화민국 초기 해군의 원로 중 한 사람이었던 양수장(1882~1934) 푸젠성 푸저우 출신으로 광둥성 황푸수사학당 항해과를 졸업하였다. 우창 봉기에 참여했으며 포함 "추관(楚观)", 순양함 "퉁지(通济)"의 함장 등을 역임하였다. 1923년 해군 중장으로 승진하여 푸젠성 하문의 방어 사령관을 맡았으며 1925년 돤치루이 정권에서 해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북벌군이 북상하자 해군을 이끌고 국민정부로 귀순하였고 북벌전쟁이 끝난 뒤 해군 상장으로 승진하여 난징 정권의 해군부 초대 부장(장관)이 되었다. 1932년 1월 해군을 은퇴한 후에도 해군의 발전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했으나 1934년에 병사하였다.

북벌군이 난징과 상하이로 육박해 오자 2월 27일 쑨촨팡은 양수장에게 해군을 상하이에 집결시켜서 북벌군과의 싸움을 지원하라고 명령하였다. 양수장은 모든 함대에 출동 지시를 하달하였다. 또한 장쭤린의 발해 함대도 친황다오를 출발하여 상하이로 남하하고 있었다. 그러나 십오년 전 우창봉기가 폭발했을 때 어뢰정 "후잉(湖鹰)"을 이끌고 제일 먼저 혁명군에 가담하여 청군과 싸운 바 있었던 양수장은 아무런 이념도 비전도 없이 그저 자신의 사리사욕에만 눈이 먼 장쭤린이나 쑨촨팡 같은 군벌을 위하여 싸울 생각이 없었다. 이미 군벌들에게 미래가 없다고 여긴 그는 마침 장시성 주강(九江)에서 작전을 총지휘하고 있던 장제스에게 은밀히 사람을 보내어 귀순 의사를 밝혔다. 물론 장제스로서는 크게 기뻐할 일이었다. 두 사람의 의기 투합은 성사되었고 3월 14일 중국 해군은 국민혁명군에 정식으로 가입을 선언하였다.

중국 해군의 주력함 중 하나였던 방호순양함 잉루이(应瑞). 1909년 해군총장 사전빙(萨镇冰)이 해군재건계획으로 구미 각지에서 주문한 군함 중 하나로 영국 암스트롱 사에 의뢰하여 건조하였고 1911년 12월 2일 완공되었다. 자매함으로는 자오화(肇和)가 있다. 건조비용은 20만 파운드(약 25만냥). 배수량 2500톤, 엔진출력 6천마력에 항속 거리 9300km, 최고 속력은 20노트 정도였다. 승무원 270명. 152mm 속사포 2문과 102mm 부포 4문, 76mm 부포 4문, 어뢰 2문을 탑재하였다. 중국 해군이 보유한 군함 중에서는 비교적 대형함이었으나 열강의 기준에서는 2등 순양함에 지나지 않았고 군벌 내전기에는 이미 노후화가 심하여 주로 수병들의 훈련을 위한 연습함으로 운용되었다. 중일전쟁 초반 양쯔강 하류에서 일본 해군의 창장 진입을 막기 위하여 과 맞서다가 1937년 10월 24일 일본 급강하 폭격기의 공습으로 격침당했다.
수송함 화안(华安). 배수량 7600톤으로 중국 해군이 보유한 가장 큰 군함이기도 하였다. 원래는 오스트리아의 상선이었다. 1917년 돤치루이 정권이 독일, 오스트리아에 기습적으로 선전포고하면서 중국 내에서 운항중인 독일, 오스트리아 국적의 선박들은 모두 강제로 압류되어 중국 정부의 소유가 되었다. 화안 역시 중국 해군에 편입되어 수송함으로 사용되다 1929년에 스크랩 처리되었다.

당시 중국에는 장쭤린의 동북 해군과 즈리파의 중앙 해군, 국민정부의 광둥 해군이 있었는데, 중앙 해군이 북벌군에 가담함으로서 전국의 판세는 크게 뒤바뀌게 되었다. 이로서 국민혁명군 해군은 2개 주력함대와 연습함대, 어뢰유격대, 광둥 함대 등 총 5개 함대로 재편되었다.

제1함대(함대 사령관 천지량陳季良) : 방호 순양함 2척(하이융海容, 하이처우海籌,  2800톤급), 포함 3척(600톤급), 수송함 3척, 소형 포정(100톤 미만) 4척
제2함대(함대 사령관 진샤오콴陳紹寛) : 포함 7척(900톤~1천톤급), 강상용 포함 5척(200~300톤급), 소형 포정 3척(120톤급)
연습함대(함대 사령관 천쑨잉陳訓泳) : 연습용 순양함 3척(잉루이應瑞, 퉁지通濟, 딩안靖安)
어뢰유격대(함대 사령관 정이딩曾以鼎) : 구축함 2척(400톤급), 어뢰정 8척
광둥함대(함대 사령관 천처陳策) : 수송함 1척, 포함 2척, 강상용 소함정 60여척

3월 22일 진샤오콴의 지휘하에 해군 함대가 출격하여 육군과 함께 상하이의 오쑹 포대를 제압하였다. 또한 상하이, 난징을 버리고 퇴각하는 직노연합군(直魯聯合軍)의 철수 행렬에 맹렬한 포격을 퍼부어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한편, 창장에서 철수 작전을 수행 중이던 적군의 선박을 나포하거나 마구 격침시켰다. 이 때문에 퇴로가 차단된 직노연군 3만명은 전의를 상실하여 북벌군에 투항하였다.

27일 새벽에는 동북 해군의 방호 순양함 하이치, 수상기 모함 진하이(鎭海)가 상하이를 빠져나가려는 중 하이처우와 잉루이 두 척의 방호 순양함과 부딪치면서 짧은 해전이 일어났다. 얼마 전까지 한솥밥을 먹던 처지였지만 이제는 적이었다. 쌍방은 서로 포문을 열고 치열한 함포전을 벌였다. 양쪽 모두 많은 사상자와 손상을 입었지만 치명타를 가하지는 못한 채 물러났다. 군벌 내전기에 해군끼리 직접 포문을 겨누는 일은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군함들이 해상에서 직접 포탄을 주고 받은 것은 매우 드문 사례였다.

* 장제스, 칼을 뽑다

북벌의 순조로움과 달리, 장제스와 우한 정부의 갈등은 그야말로 일촉즉발이었다. 국민정부가 광저우에서 우한으로 옮긴 지 약 한달 뒤인 1927년 1월 11일 장제스는 천도 후 처음으로 우한을 방문하였다. 난징 공격을 앞두고 그로서는 화해를 위한 마지막 제스쳐였다. 하지만 더욱 깊어진 감정의 골만 확인했을 뿐이었다. 장제스를 환영한답시고 모인 행사에서 보로딘은 "일부 혁명군이 노동자와 농민들을 압박하고 공산당을 반대하고 있다. 우리는 그를 타도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장제스의 면전에 대고 그의 얼굴에 침을 밷은 꼴이었다. 또한 군비 문제를 놓고 장제스와 보로딘은 서로 격한 감정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중산함 사건 당시에만 해도 비교적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던 두 사람의 관계는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장제스는 분노를 참으며 1월 17일 난창으로 되돌아오자말자 가장 먼저 소련 코민테른에 전보를 보내어 보로딘을 소환해 달라고 요구했지만 묵살되었다. 양측의 관계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악화되었고 연일 서로를 향하여 "반혁명"이라면서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었다. 우한 정부는 장제스가 당권과 군권을 혼자 장악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다고 주장하였고 장제스는 독재를 하는 쪽은 자신이 아니라 공산당과 손을 잡고 국민당을 장악하려는 좌파들이라고 반박하였다.

국민당 제2차 3중 대회. 공산당과 국민당 좌파가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장제스와의 갈등이 재점화되었다. 두번째줄 오른쪽 세번째가 마오쩌둥이다. 이 대회로 양측의 대립은 더욱 격화되어 결국 국공분열로 이어졌다.

북벌군이 난징과 상하이로 육박하고 있던 3월 10일부터 17일까지 우한에서는 국민당 제2차 3중 전국대회가 개최되었다. 일주일에 걸친 회의는 그야말로 장제스에 대한 성토장이었다. 중립파였던 탄옌카이는 어떻게든 국민정부의 분열을 막을 요량으로 회의의 연기를 주장했으나 장제스에 대한 격렬한 증오심을 숨기지 않았던 공산당은 묵살하고 회의를 강행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의결하였다.

1. 최고 의결 기관으로서 중앙집행위원회를 조직하고 정치위원회와 군사위원회를 하부에 둔다.
2. 군사위원회의 위원 중 일부는 군인이 아닌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중에서 선출하며 군인이 아닌 위원 3명 이상이 참석해야 회의가 성립할 수 있다.
3. 군장 이상의 지휘관은 중앙집행위원회의 의결을 거쳐서 임명한다.
4. 총정치부는 중앙집행위원회의 명령에 따른다.

이것은 군을 당에게 복속시켜서 장제스의 지위와 권한을 격하시키고 당의 명령에 복종하기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또한 지도부에서 장제스와 가까운 사람들은 모두 배제되었다. 국민당은 보로딘의 지시에 충실히 따르는 공산당이 거의 장악한 상태였다. 장제스더러 백기를 들거나 아니면 군권을 내놓고 알아서 물러나라는 얘기였다. 그의 두번째 부인이었고 얼마 뒤 쑹메이링에게 그 자리를 빼앗기게 되는 천제루(陳潔如)는 자신의 회고록에 "통보를 받은 장제스는 미친 사람처럼 울부짖으며 보로딘을 저주하였다"라고 기록하였다. 심지어 그녀는 장제스가 자살할까봐 두려워서 그의 권총을 몰래 숨겨야 했다.

갈등의 책임은 과연 어느 쪽에 있는가. 공교롭게도 국공의 첫번째 대결이었던 중산함 사건이 일어난 지 꼭 2년 째 되는 날이었다. 장제스는 비록 중국의 봉건 교육을 받은 보수적인 인물이었고 마르크스 주의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적어도 중산함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우파보다는 오히려 "중도 좌파"에 속하였다. 왕징웨이의 편에 서서 후한민을 비롯한 우파를 견제하였고 자신의 장남인 장징궈를 모스크바에 유학을 보냈을 정도로 국공합작에도 열성적이었다. 그런 그가 결국에는 공산당과 총부리를 겨누는 사이가 된 것이다. 대륙쪽의 공산주의 사관에서는 용공 좌파에서 반공 우파로 넘어가는 그의 변신을 "기회주의"로 규정하고 민중을 배반했다는 식으로 서술한다. 하지만 국공의 근본적인 모순과 전후의 과정을 쏙 빼놓은 채 오로지 국공 분열의 책임을 전적으로 그에게 떠넘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장제스가 부당하게 권력을 탈취했다는 것과 그럼으로서 마오 정권에 정통성을 부여하려는데 목적이 있다.

국공합작이 결성되기 전 쑨원은 "소련식 혁명이 아닌 중국식 혁명을 할 것"이라며 자신의 혁명 노선을 분명하게 했으며 국공합작은 공산당이 국민당의 강령에 따른다는 조건부 동의였다. 만약 공산당의 목적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있었고 국민당이 공산당의 강령에 따르기를 바랬다면 처음부터 이 점을 분명하게 밝혔어야 했을 것이다. 아마 그랬다면 국공합작은 성사되지 못했을 것이다. 쑨원의 삼민주의를 비판하고 국공합작의 약속을 깨뜨린 쪽은 분명 국민당 우파가 아니라 공산당이었다. 소련의 원조를 빌미로 국민당을 잠식해 나가자 우파가 반발하는 것은 당연하였다.

반면, 장제스는 정치와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권력 투쟁보다는 광둥성에서 천중밍의 세력을 몰아내고 북벌의 근거지를 굳히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그가 움직인 것은 국민당이 좌우로 분열되고 자신의 지위와 생명마저 위협을 받았을 때였다. 게다가 왕징웨이는 이런 상황을 해결하기는 커녕 도리어 자리를 내던진 채 무책임하게 외국으로 도피하는 쪽을 선택하였다. 장제스가 정치의 전면에 나오게 된 것은 그가 처음부터 계획했다기보다는 이러한 주변 상황이 만들어 낸 결과였다. 설령 그의 마음에 기회주의적인 야심이 있었다고 한들, 그게 장제스에게만 국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소련에서 부랴부랴 돌아온 보로딘은 장제스의 손을 들어주고 공산당의 활동을 제약하는데 동의하였다. 장제스 역시 국공합작을 와해시킬 생각은 없었으며 공산당을 모조리 쫓아내야 한다는 우파의 요구 또한 거절하였다. 따라서 공산당이 서로의 합의를 충실히만 지켰더라면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후로도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오히려 한동안 눈치를 보던 공산당은 북벌을 기회삼아 국민정부를 장악하였다. 이들은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렸을 뿐이고 드디어 장제스를 거세할 참이었다.

궁지에 몰린 장제스로서는 이제 굴복하던가, 아니면 정면 대결을 하던가 양자 택일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굴복할 생각은 없었다. 그동안 국공합작을 고수했던 것은 그가 공산주의에 동조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쑨원의 유지를 존중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그는 민족주의자였고 우한의 "태상황" 보로딘에게 머리를 숙일 생각은 없었다. 

상황은 결코 녹록하지 않았다. 우한 정부는 점점 장제스의 목줄을 죄어왔다. 그동안 재정부를 통하여 장제스의 총사령부가 직접 관할하였던 군비를 3월부터 우한 정부가 통제하였다. 게다가 군비를 배분하면서 펑위샹과 탕성즈 측에는 거액의 군비를 지급한 반면, 제1군을 비롯하여 장제스 휘하의 부대에는 한푼도 지급하지 않았다. 장제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함이었다. 또한 각 군장들을 상대로 회유 공작을 하는 한편, 병사들에게도 장제스를 제국주의와 결탁한 반혁명 군벌이라면서 공공연히 선동하였다.

3월 27일 장제스는 주장을 떠나서 상하이에 당도하였다. 하지만 노동자들에게 장악되어 "좌경화"된 이 도시는 그에게 결코 안전한 장소가 아니었다. 상하이 시내는 저우언라이가 지휘하는 "규찰대"라고 하는 5천여명의 무장 노동자 집단이 장악한 채 치안을 담당하였고 상하이에 배치된 제1사단과 제21사단 역시 "좌경화"된 부대였다. 특히 평소 장제스와 사이가 껄끄러운데다 탁월한 선견지명이 있었던 제1사단장 쉐웨는 공산당 지도부에 "장제스는 틀림없이 반혁명 쿠테타를 일으킬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난징에 배치된 루두핑(魯滌平)의 제2군과 쳉쳰의 제6군 또한 태도가 모호하여 그다지 신뢰할 수 없었다.

그나마 장제스가 믿을 수 있는 부대는 류즈가 지휘하는 제2사단 밖에 없었다. 황푸군관학교 출신의 하급 장교들 중에는 장제스가 예전에 생도들 앞에서 "코민테른에 복종해야 한다" "반공은 반혁명"이라고 연설했던 것을 상기하면서 과연 본인의 진심은 무엇인지 해명하라고 따지기도 하였다. 다른 부대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직속 부하들조차 신뢰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장제스가 주변의 인망을 얻지 못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상황은 1년 전보다 장제스에게 훨씬 불리하였다.

과연 우한 정부는 장제스가 도리어 반격에 나설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인가. 이들은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선수를 쳐서 장제스를 끝장낼 수 있었다. 상황은 유리했다. 하지만 신속하게 행동으로 옮기지도, 그렇다고 장제스를 자신들의 편으로 포섭하거나 회유하지도 않은 채 어정쩡한 태도로 시간을 보냈을 뿐이었다. 훗날 저우언라이가 4.12 정변을 떠올리면서 스스로도 "경험이 없고 서툴렀다"라고 고백했듯, 천두슈, 리자다오를 비롯한 공산당 지도부는 대개 봉건적이고 부유한 지주나 향신 가정에서 자라난 젊은 지식인들이었다. 언론인, 교수, 정객 등 세상 모르는 백면서생에 가까웠던 이들로서는 복잡한 정치적 역학 구도나 권력 투쟁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었고 급박한 상황에서 신속하게 움직일만한 행동력과 추진력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저 의욕만 앞세우거나 코민테른의 지시에 맹목적으로 따를 뿐이었다.

따라서 우한 정부는 장제스를 점점 궁지로 내몰면서도 그가 기껏해야 소극적인 항명이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4월 초에 와서 장제스의 동향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인식하였지만 그럼에도 "그가 한번 더 반동적인 행동을 한다면 당에서 제명하겠다"고 으름짱을 놓은 것이 전부였다. 국공합작을 파기하지도, 장제스를 파면하지도 않았다. 그만한 결단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제2군과 제6군, 제11군 등 反장제스 파 부대를 움직여서 난징을 점령하고 장제스의 군대를 무장해제시키자는 주장도 있었지만 묵살되었다. 장제스를 얕보기는 스탈린이나 보로딘 역시 다르지 않았다. 4월 5일 스탈린은 장제스와의 결별을 반대하면서 "그는 어쨌든 제국주의자와 싸우고 있다. 혁명을 위하여 마지막까지 이용해야 한다. 끝까지 즙을 짜낸 레몬처럼 된 뒤에야 버려야 할 것이다"라고 지시하였다. 이들에게 장제스는 한낱 "쓰고 버릴" 수단에 지나지 않음을 스스로 고백한 셈이다.

그 와중에 장제스는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강점은 뛰어난 순발력과 강철같은 의지였다. 여러 군장들과 비밀리에 접촉하여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몇명의 군장들이 장제스의 편에 섰다. 그 중에서도 북벌군 참모장 리지선과 제7군 군장 리쭝런의 가세는 천군만마나 다름없었다. 리지선은 광둥 군벌의 수장이었고 리쭝런은 광서 군벌의 수장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장제스와 썩 좋은 관계는 아니었지만 공산당 토벌을 위하여 손을 잡기로 의기투합하였다. 상하이와 난징 주변의 병력은 재배치되었다. 제1사단과 제21사단은 새로 편입된 제26군으로 교체되어 상하이 밖으로 이동해야 했다. 또한 제2군과 제6군을 난징에서 내보내고 대신 제7군을 배치하였다. 

4월 1일 우한 정부는 기습적으로 장제스를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의 자리에서 면직한다고 발표하였다. 또한 리지선에 대해서도 중앙의 허가 없이 함부로 상하이로 가서 장제스를 만났다는 이유로 모든 직위에서 해임하였다. 장제스는 격분하였다. 상황은 이미 폭발 직전이었다. 때마침 이날 왕징웨이가 중국으로 돌아왔다. 중산함 사건 직후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광저우를 떠나 한동안 프랑스에서 체류하던 그는 장제스와 우한 정부 양쪽의 귀국 요청을 받고 상하이에 도착한 것이다.

장제스는 왕징웨이에게 국민혁명이 위기에 처해 있음을 강조하고 공산당이 자신을 쫓아내려 한다며 호소하였다. 또한 그는 당장 보로딘과 소련인들을 모두 추방하고 국공합작을 파기할 것을 주장하면서 만약 왕징웨이가 정부의 주석을 맡아준다면 자신은 정치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오직 군무에만 전념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왕징웨이는 우한정부의 처사가 심하다고 인정하면서도 이유가 어떻든 국공합작만큼은 유지되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소련의 원조 없이는 북벌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장제스는 왕징웨이를 설득하려 했지만 요지부동으로 원론적인 대답만 반복하는 모습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왕징웨이는 공산당의 편도 아니었고 그저 장제스와 우한을 화해시켜서 최악의 상황만은 막아보겠다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중국을 떠나 있었던 그로서는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보다도 명망과 권력욕은 있어도 천하를 쥘 만한 그릇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왕징웨이는 장제스의 만류를 외면한 채 4월 6일 우한으로 떠났다.

장제스는 무력으로 공산당을 끝장내기로 결심하였다.  4월 9일에는 상하이 전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상황은 이미 일촉즉발이었다. 그는 이미 아무런 직위도 맡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허가없이 함부로 병력을 움직이는 것은 엄연한 반란이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어느 한쪽이 굴복하지 않는 한 피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12일 새벽 "상하이의 황제"라 불리는 두웨셩(杜月笙)의 청방(青幫)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앞으로 20년 동안 이어질 국공의 피비린내나는 싸움의 서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