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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 전쟁과 인물, 사건으로 보는 중국 현대사 > 47화, 장제스와 쑹메이링, 세기의 결혼/blog.naver.com/atena

* 일본을 방문하다

1927년 9월 28일 장제스는 일본의 국제 항구 나가사키에 발을 디뎠다. 중국을 떠난 그가 제일 먼저 일본을 방문한 이유는 두 명의 중요한 인물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이 만남은 장제스 자신의 운명은 물론, 훗날 중국과 세계 역사까지 좌우하게 된다.

그 중 한 사람은 쇼와 금융 공황의 책임을 지고 사임한 와카쓰키 레이지로(若槻禮次郞)를 대신하여 새로운 총리로 임명된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였다. 야마가타 야리토모와 같은 조슈번 출신인 그는 문관 출신으로 비교적 온건파였던 전임자와는 달리 육군 대신을 지낸 군부의 원로로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종군하였고 시베리아 출병을 강행하는 등 대표적인 군국주의자였다. 또한 이토 히로부미가 결성한 극우 정당인 입헌정우회의 총재이기도 했으며 1924년에는 대일본연합청년단을 조직하고 학생들에게 군국주의 사상을 주입하는데 앞장했다.

지난 몇년 동안 시데하라 기주로(幣原喜重郎)의 소위 "협조 외교"로 중일 양국의 관계는 비교적 안정을 누리고 있었다. 1920년대 초반에 오면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비롯하여 과거 침략 전쟁에 앞장섰던 원로들이 모두 죽거나 늙고 쇠진하여 물러나 있었다. 덕분에 봉건적인 족벌 정치에서 벗어나 대중에 의한 정당 정치와 의회 민주주의가 실현되었고 경제적으로는 눈부신 성장을 이룩하였다. 군비는 축소되고 군부는 위축되어 국민의 눈치를 보았다. 일본인들로서는 메이지 유신 이래 처음으로 맛보는 평화로운 시대였다. 조선의 지배 또한 무단 통치에서 문치 통치로 전환되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외무 장관이었던 시데하라는 1924년 7월 이른바 "시데하라 3원칙"을 선언하여 중국의 주권과 영토를 존중하고 내정 간섭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였다. 중국에서 군벌들의 항쟁이 격화되고 있었음에도 일본의 개입이 없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만약 이 때 일본이 무력 침략에 나섰더라면 중국으로서는 속수무책이었으리라. 5.4운동 이래 극도로 악화되었던 양국 관계 또한 모처럼 봄을 맞이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오래 가지 못하였다. 1926년 12월 25일 쇼와 천황의 즉위, 그리고 5개월 뒤 다나카 내각의 출범은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종식과 본격적인 군국주의 시대를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하였다. 다나카는 국가를 멋대로 좌지우지 하면서 침략 전쟁을 벌이다 결국에는 패망으로 몰아놓는 소위 "쇼와 군벌"의 시작이었다. 그동안 시데하라 외교를 연약하다고 비난했던 그는 자신과 코드가 맞는 강경파들로 내각을 채워넣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동3성을 중국에서 분리시켜 일본이 지배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외무 차관 모리 가쿠(森恪), 그리고 관동군 사령관으로 육군 대신이 된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대장이었다. 이들은 다나카조차 능가하는 망상가들이었다. 침략 전쟁을 비판하던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반정부 운동가들은 탄압을 받았고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목소리 또한 사라졌다. 일본은 다시 군인들의 천하가 되었다.

본격적인 일본 군국주의 시대를 연 다나카 내각(왼쪽 앞줄 네번째가 다나카 기이치). 그러나 그의 허황된 야심은 공명심에 가득찬 젊은 장교들의 모험주의를 부추기는 꼴이 되었고 정부의 수장이자 군부의 원로인 다나카조차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 이때부터 일본은 폭주하기 시작하여 브레이크 없이 태평양전쟁까지 내달리게 된다.

다나카는 취임 직후인 1927년 4월 22일 새로운 대중국 방침을 발표하였다. 여기서 그는 "일본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중국이다. 일본은 동아시아의 평화 유지를 책임지고 있는 나라로서 중국의 일에 결코 무관심할 수는 없다"라면서 본격적인 간섭에 나설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가장 눈의 가시는 장제스, 펑위샹 등이 이끄는 북벌군이었다. 만약 장쭤린이 이들에게 패배하여 통일된 중국이 들어선다면 일본에게는 재미없다. 중국은 여러 조각으로 분열되고 있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북벌군을 "적화 군대"라고 부르며 노골적으로 적개심을 드러내면서 장쭤린, 쑨촨팡, 장쭝창 등 친일 군벌들에게 막대한 무기와 자금을 제공하는 한편 여차하면 무력 개입조차 배제하지 않겠다는 식이었다.

첫번째가 앞서 언급했던 제1차 산둥 출병이었고 두번째는 6월 27일부터 7월 7일까지 열린 "동방 회의"였다. 다나카 기이치를 비롯하여 모리 가쿠, 주중 공사 요시자와 겡키치, 펑텐 총영사 요시다 시게루, 관동군 사령관 무토 노부요시, 육군 참모본부 제2부장 마쓰이 이와네, 해군 차관 오스미 미네오 등 일본 정계와 군부의 쟁쟁한 실력자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였다. 이들은 일본의 원조 없이 장쭤린이 북벌군을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일본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직접 개입하지 않으면 안된다는데 공감하였다. 특히 마쓰이 이와네는 산둥성이 북벌군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하였고 무토 노부요시는 동북이 일본의 국방에 반드시 필요하니 중국에서 분리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다나카가 이들의 의견을 종합하여 수립한 것이 소위 "대중정책 강령"이었다. 여기에는 8개의 기본 원칙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제6항과 제7항, 제8항에서는 "동3성은 일본의 세력권이며 만약 이를 누군가가 침해한다면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력으로 대응하겠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국제 사회의 비난과 중국의 반발을 우려하여 외부에는 철저히 숨기고 공개하지 않았다. 일본의 속셈은 북벌군에 의한 중국의 통일을 그저 지켜보지 않을 것이며 장쭤린 정권을 꼭두각시로 내세워 동3성을 자신들이 완전히 먹어치우겠다는 의미였다. 이들의 허황된 야심을 보다 명확하게 드러낸 것이 소위 "다나카 상주문(田中上奏文)"이었다.

"내각 총리 대신 다나카 기이치는 소인은 여러 군신들을 대표하여 천황께 우리 제국의 만몽(滿蒙, 만주와 몽골)에 대한 적극적이고 근본적인 정책에 관하여 아룁니다."라고 시작하는 이 문서에는 동북과 내외몽골이 면적은 일본의 3배이면서 인구는 2800만명으로 1/3에 불과한 반면, 천연 자원이 무궁무진하다는 점을 설명하였다. 또한 조선과 타이완에 대한 지배를 더욱 강화하고 거대한 잠재력을 가진 만몽을 개척할 때 비로소 야마토 민족의 무궁한 번영을 누릴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무력을 써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특히 앞으로 가장 큰 방해물은 미국이 될 것이며 미국과의 일전 또한 각오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였다. 여기에는 추상적인 원칙론을 넘어서 철도와 해상 수송의 장악, 금융의 지배, 중국인의 추방 등 앞으로 만몽 지배를 어떻게 추진할 것인지 구체적인 방법까지 거론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나카 상주문은 1929년 12월 난징의 "시사월보(時事月報)"라는 잡지에서 처음 폭로되어 큰 충격을 주었다. 일본 정부는 사실 무근이라며 부정했지만 중국 민중의 반일 감정에 기름을 부운 꼴이 되었고 중국 전역으로 배일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이로서 중일 양국 민족의 골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깊이 파였고 다시는 회복되지 못하였다. 훗날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한 뒤 도쿄 전범재판에서도 다나카 상주문은 세계 지배를 꿈꾸었던 일본의 야욕을 보여주는 증거로 활용된다. 일본 학자들은 일부 틀린 점이 있다는 이유를 내세워 "위작"이라며 문서 전체를 부정하지만, 진위를 떠나서 중요한 것은 일본 지도부가 여기에 적힌 그대로 행동에 옮겼다는 사실이다.

육군 대신 시절의 다나카 기이치(왼쪽 첫번째)

다나카는 앞으로 북벌군을 가로막을 가장 큰 장애물이 될 것이 틀림없는 인물이었다. 비록 야인의 신분이 되었다고는 하나 장제스는 북벌의 꿈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중국의 유력한 차기 지도자로서 일본과 직접 담판하여 자신의 의지를 보여주면서 상대의 의중 또한 살펴보겠다는 것이었다. 그저 외세라고 하면 꼬리부터 내리고 비위 맞추기에 급급했던 북양의 군벌, 정치인들과는 대조적이었다. 이것은 장제스가 단순한 일개 군인이 아니라 정치적인 안목 또한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장제스가 만나려는 또 한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는 다나카 이상으로 중요한 사람이었다. 다름아닌 중국 정재계의 큰 손으로 일컬는 쑹가 집안의 노마님 니꾸이쩐(倪桂珍)이었다. 그녀는 쑨원에게는 장모이며 쑹메이링의 어머니이기도 하였다.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자수성가한 남편 쑹자수(찰리 쑹)과는 달리, 명문 사대부 집안의 규수였던 니꾸어쩐은 당시 중국 여성으로서는 몇 안되는 서양식 교육을 받은 일세대 신여성이기도 하였다. 쑹자수와 니꾸어쩐 사이에는 6명의 자녀가 있었다. 놀랍게도 그들 모두가 중국에서 내로라 하는 인물이 된다.

장남 쑹쯔원(宋子文)은 미국 하버드 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한 엘리트로서 일찌감치 장제스의 오른팔이 되어 난징 정부의 재정을 책임지고 있었다. 장제스가 여러 군벌들을 격파하고 중국 천하를 쥘 수 있었던 것도 전적으로 쑹쯔원이 재정적으로 뒷받침한 덕분이었다. 또한 루즈벨트 대통령과 대학 동기였던 그는 대미 외교에서도 크게 활약하여 불평등 조약의 개정과 항일 원조를 얻는 등 미국을 중국의 편으로 끌어들이고 국제 무대에서 중국의 지위를 회복하는데 지대한 공을 세운다. 둘째 아들 쑹쯔량(宋子良)은 외교부 국장과 중국중앙은행 총재를 지냈다. 셋째 아들 쑹쯔안(宋子安) 또한 하버드 대학을 졸업했으며 중국통화공사 이사와 홍콩 광둥 은행 이사를 지냈다.

쑹씨 가족들. 쑹자수(뒷줄 앞에 있는 중년의 남성)가 아직 살아 있었던 1917년에 촬영한 사진이다. 앞줄 가운데 아이가 셋째아들 쑹쯔안, 오른쪽 첫번째부터 둘째딸 쑹칭링, 장남 쑹쯔원, 장녀 쑹아이링이다. 그리고 맨뒤 왼쪽이 둘째 아들 쑹즈량이며 오른쪽이 쑹메이링, 그 앞의 중년 여성이 어머니인 니꾸이쩐이다. 돈과 권력, 명예 모두 쥐고 있었기에 사람들은 "쑹가 왕조(宋家王朝)"라고 불렀다.

딸들은 더 대단한 명성을 누렸다. 이른바 "쑹씨 세자매"의 첫째 딸 쑹아이링(宋蔼龄)은 쑨원의 비서를 지냈으나 자신보다 23살이나 많은데다 이름난 바람둥이였던 쑨원이 그녀에게 반하여 청혼을 하자 거부하고 부유한 은행가였던 쿵샹시(孔祥熙)를 선택하였다. 쿵샹시는 장제스 정권에서 재정과 외교를 맡아서 화폐 개혁과 중국-독일 합작을 주도했다. 쑨원의 곁은 둘째였던 쑹칭링(宋慶齡)이 언니를 대신하여 차지하였다. 비록 오랜 친구이지만 본처가 버젓이 있는 유부남인 쑨원이 자신의 딸을 데려간다는 것에 큰 배신감을 느낀 쑹자수는 쑹칭링과 의절하면서까지 결혼을 반대했지만 결국 막을 수 없었다. 덕분에 쑹칭링은 "혁명과 결혼한 여자"라는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그녀는 비록 쑨원과의 결혼 생활을 10년도 채 유지하지 못했지만 쑨원이 죽은 뒤에도 재혼하지 않은 채 1981년 81세로 죽기까지 무려 56년 동안 혼자 살면서 쑨원의 정신을 지키려 하였다.

마지막으로 셋째딸이 나중에 중국 최초의 퍼스트 레이디가 되는 쑹메이링(宋美齡)이었다. 장제스와 쑹메이링이 처음 만난 것은 벌써 몇 년 전의 일이었다. 아직 쑨원이 살아 있던 시절 그의 집에서 열린 파티에서 우연히 쑹메이링을 보게 된 장제스는 그녀의 활달하고 사교적인 모습에 한눈에 반하였다. 쑹메이링은 쑨원에게는 처제이기도 했기에 장제스는 당장 쑨원을 찾아가 단도직입적으로 그녀와 다리를 놓아달라고 부탁하였다. 쑨원은 승락했지만 막상 쑹메이링은 시큰둥했다. 나이도 10살이나 차이가 나는데다 당시에만 해도 장제스는 이렇다할 직책도 없이 그저 쑨원의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무위도식하는 건달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녀에게는 이미 미국 유학 시절부터 함께 했던 류지원(劉紀文)이라는 약혼자도 있었다. 류지원은 부유한 상인 집안 출신인데다 미남이었고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엘리트였으니 요샛말로 하자면 그야말로 "엄친아"인 셈이었다. 그는 광저우의 쑨원 정권에서 농공청 청장을 맡고 있었다. 그러니 쑹메이링의 눈에 혁명을 한답시고 거들먹거릴 뿐 돈 한푼 없고 미래도 불확실한 장제스 따위가 눈에 찰 리가 없었다.

쑹메이링의 첫사랑이었던 류전원. 만약 쑹메이링이 장제스 대신 류전원을 선택했더라면 그녀의 인생은 물론이고, 이후의 중국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쑨원이 죽은 뒤 장제스의 지위가 빠르게 올라가자 쑹메이링의 생각 또한 점차 달라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장제스를 탐탁치 않게 여겼던 쑹칭링과 달리, 그의 역량과 장래성을 높이 평가하였던 큰 언니 쑹아이링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중매를 섰다. 장제스 또한 꾸준히 편지를 보내며 구애를 하였다. 수년에 걸친 노력 끝에 결국 쑹메이링도 마음을 돌려서 류지원을 버리고 장제스를 선택하기로 결심하였다. 젊고 야심만만한 쑹메이링은 변변찮은 남편의 내조에나 만족할 만한 여성이 아니었다. 그녀는 큰 물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기 원했다. 장제스 역시 쑹씨 집안과의 연합은 이렇다할 뒷배경이 없는 그로서는 비할 바 없이 강력한 후원자를 얻는 일이었다. 뉴욕 타임즈 상하이 주재 기자였던 미셸 위츠는 장제스가 일본으로 떠나기도 전인 9월 17일 자 기사에 <장제스와 쑹메이링의 결혼>이라는 제목으로 마치 두 사람의 결혼이 기정 사실인양 적었는데 아마도 장제스에게 사전 언질을 받았던 것이 틀림없다.

1926년 봄 쿵샹시의 집에서 장제스와 쑹메이링. 당시 국민정부에서 군부 실력자가 된 장제스는 자신의 출세를 쑹메이링에게 자랑하여 그녀의 마음을 조금씩 끄는데 성공하였다.

남은 일은 쑹씨 집안의 허락이었다. 쑹자수는 이미 몇년 전에 죽었기에 집안의 어른은 니꾸이쩐 밖에 없었다. 그녀는 때마침 일본 동부의 한적한 도시 가마쿠라의 한 호텔에서 요양 중이었다. 장제스는 단정한 차림에 손에는 선물을 들고 곧 장모가 될 니꾸이쩐을 방문하였다. 원래 니꾸이쩐은 쑹칭링과 마찬가지로 장제스를 그다지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결혼을 두번이나 한 유부남인데다 나이도 많고 사생활 또한 문란하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 입장에서 이런 사위에게 딸을 주고 싶을 리 없는 것은 당연하였다. 그러나 쑹쯔원과 쑹아이링이 중간에서 설득하고 쑹메이링의 마음 또한 이미 정했다는 말을 듣자 두 사람의 결혼에 동의하기로 하였다. 한가지 조건이 있었다. 독실한 감리교도였던 그녀는 장제스에게도 세례를 받고 감리교도가 되기를 요구한 것이다. 장제스는 약속을 지켰다. 그것도 잠시 시늉만 한 것이 아니라 중국의 최고 지도자가 된 뒤에도 평생 신앙심을 유지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순수한 사랑만은 아니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저 이해타산에 의한 정략 결혼이었다고 폄하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 두눈 뜨고 약혼녀를 빼앗긴 류지원은 어떻게 되었을까. 쑹메이링이 장제스에게 부탁한 덕분에 난징 시장 자리를 얻었다. 북벌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28년 7월부터 1930년 4월까지 난징 시장을 지낸 그는 쑨원의 묘를 난징으로 이전하여 중산릉을 건설하는 일을 맡았고 난징 거리 곳곳에 중산로, 중산문이라 하여 쑨원의 호를 딴 이름을 붙였다. 이후 광저우 시장과 재정부 국장 등을 역임했다. 전형적인 부잣집 도련님으로 놀기 좋아하는 한량에 우유부단한 성격이었던 그는 이렇다 할 업적이나 더 높은 직책을 맡지는 못하였지만 국공내전에 패배한 뒤 장제스 부부를 따라 타이완으로 갔으며 총통부 국책고문을 맡기도 했다. 평소 "영웅이 아니면 결혼하지 않겠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쑹메이링을 그를 버리고 영웅을 선택했지만 나름의 의리는 지킨 셈이다.

* 다카나와 담판하다

장제스는 한달 남짓 일본에서 머물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정을 보냈다. 그는 젊은 시절 청나라 유학생으로 파견되어 도쿄에 있는 진무학교에서 공부한 적이 있었다. 혈기 넘치던 여느 중국인 지식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혁명 사상에 눈을 떴고 쑨원의 동맹회에도 가담하였다. 그 때의 젊은이들이 신해혁명을 일으켰고 새로운 중국을 만들었다. 장제스 역시 그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20여년만에 일본에 돌아온 그는 감회가 새로왔다. 일본의 발전 속도는 한층 더 빨라졌고 여전히 봉건적이고 낙후된 채 군벌들의 싸움이 반복되고 있는 중국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장제스는 자신의 일기에 "이전에 나는 물질은 정신을 타락시킨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본은 여전히 전속력으로 발전하고 있다. 우리는 언제쯤 똑같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썼다.

장제스는 일본에서도 이미 유명인사였다. 다나카 기이치는 속내가 어쨌든 앞으로 중국의 새로운 지도자가 될 장제스를 푸대접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따라서 그의 일본 방문을 환영하는 축사를 보내고 국가 원수에 준하는 대우를 하였다. 장제스는 가는 곳마다 무장한 경호원들의 엄중한 호위를 받았다. 고베에 있는 화교 단체들은 그에게 연설을 요청하였다. 또한 장제스는 일본 유학 시절 다카다(高田市)에 주둔한 일본군 제13사단에서 실습생으로 잠깐 복무한 바 있었는데 그 시절의 사단장이었던 나가오카 가이시(長岡外史) 예비역 중장도 만날 수 있었다. 물론 나가오카는 졸병에 불과했던 장제스에 대한 인상이 남아 있을 리 없었지만 자신의 나라에서 큰 성공을 거둔 그를 따뜻하게 축하해 주었다. 장제스는 일본 국민을 향하여 중일 양국이 서로에 대한 오해를 풀고 공존과 공영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호소하였다.

일본에 머무는 내내 정재계와 군부 인사들과의 만남으로 정신없었던 장제스는 11월 5일 일본의 수장인 다나카 기이치와 회견하였다. 장제스로서는 일본 방문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자 서로의 속내를 떠보고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한 중요한 회담이기도 하였다. 도쿄 아오야마에 있는 다카나의 저택에서 열린 회담은 장제스의 비서인 장춴(張群)과 사토 야시노스케 소장이 각각 통역을 맡았다. 장춴이 기록한 두 사람의 대화는 다음과 같다.

장제스 : 중일 양국의 관계는 동아시아 앞날의 화복을 결정하는 일입니다. 각하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다나카 : 먼저 각하의 포부부터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장제스 : 저의 생각은 세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중일은 성의를 가지고 연합할 것과 진정한 평화를 기반으로 공존공영을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은 부패한 군벌이 아니라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국민당을 상대해야 합니다. 두번째로 국민혁명군은 북벌을 계속할  것입니다. 일본은 중국 혁명에 간섭할 것이 아니라 도와주시기를 희망합니다. 세번째로 일본의 대중국 정책은 무력이 아니라 경제 협력을 수단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제가 귀국을 방문한 것은 이 문제를 놓고 각하와 의견을 교환하기 위함입니다.
다나카 : 북벌의 목표는 창장 이남의 통일에 두어야 합니다. 어째서 북벌을 서두르는 것입니까?
장제스 : 중국 혁명의 목적은 중국의 통일입니다. 태평천국과 같은 실패를 반복할 수 없습니다. 북벌은 빨리 완성해야 하며 만약 중국을 통일하지 못한다면 동아시아는 안정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중국에게는 큰 화일 뿐더러 일본에게도 복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장제스의 설득은 다나카에게는 끝까지 쇠귀에 경 읽기였다. 그의 말투는 정중했지만 의도는 분명했다. 장제스더러 남방을 지배하는데 전념하고 북방의 일에는 관여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만약 거부한다면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는 은근한 협박도 잊지 않았다. 결국 창장을 경계로 중국을 장쭤린의 북방과 장제스의 남방으로 분리시키겠다는 속셈이었다. 회담은 2시간 만에 끝났다. 장제스는 그날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다나카에게는 조금의 성의도 찾아볼 수 없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는 연합의 가능성이 없으며 일본은 우리의 혁명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반드시 우리 혁명군을 방해하고 중국의 통일을 저지하리라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일본이 상대하는 북양군벌은 부패하고 이기적인 무리이다. 이것이 일본인들에게 중국인을 더욱 경멸케 만드는 것이다. 다나카는 나를 그들처럼 대하면서 적당히 다루고 구슬리려 할 뿐이다. 나는 일본을 바꿀 수 없었지만 그들의 속셈을 엿볼 수는 있었다. 나에게 전혀 헛일은 아니었다."

장제스의 예상대로 반년 후 북벌군이 산둥성으로 진격하고 장쭤린의 패망이 초읽기에 들어가자 다나카는 제2차 산둥 출병을 단행하였다. 출병한 병력은 더 많았고 상황도 훨씬 심각했다. 북벌군과 일본군은 전면전 직전까지 갔다. 장제스는 일본군과 섯불리 싸우지도, 그렇다고 꼬리를 내리고 물러서지도 않은 채 우회하여 베이징으로 진격하였다. 일본은 지리한 협상을 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산둥성에서 철수해야 했다. 중국으로서는 외세의 군대를 아무런 대가 없이 스스로 물러나게 한 것은 아편전쟁 이래 처음이었다. 북벌군이 베이징을 점령하고 장쉐량이 백기를 들면서 중국은 드디어 하나의 깃발로 통일되었다. 다나카의 위신은 완전히 땅에 떨어졌고 군부의 비판이 쏟아지면서 자리에서도 물러나야 했다. 이것은 전적으로 다나카와의 회담에서 얻은 장제스의 성과라 하겠다.

이로서 장제스의 일본 방문은 끝났다. 그는 미국과 구미를 방문할 생각이었지만 주변의 상황이 내버려 두지 않았다. 빨리 귀국하여 북벌군 총사령관으로 복직하라는 전문이 하루가 멀다 하고 날라오는 판이었다. 그가 떠난 뒤 정국의 분열과 혼란상은 한층 더한 지경이었다. 왕징웨이와 리쭝런을 비롯하여 장제스의 정적들마저 그의 복귀를 요구하는 판이었다. 11월 6일에는 상하이에서 장제스의 복직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열렸다. 장제스는 고민 끝에 중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였다. 다나카와의 회견이 있은 지 삼일 뒤인 11월 8일 아침. 장제스 일행은 고베 항구에서 상하이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35일에 걸친 일본 방문은 끝났다. 장제스의 정치적 부활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다.

* 장제스과 쑹메이링

12월 1일 장제스는 상하이의 호화로운 마제스틱 호텔에서 자신의 오랜 숙원이었던 쑹메이링과의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식장은 쑹씨 일가와 정재계의 주요 인사들, 각국 영사들을 비롯하여 1300여명에 달하는 내빈들로 발디들 틈조차 없을 정도였다. 또한 수십여명의 내외신 기자들도 모여서 이 세기의 결혼식을 카메라에 담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야말로 온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셈이었다.

연단 위에는 쑨원의 커다한 초상화가 걸려 있었고 좌우로는 국민당의 당기와 청천백일기가 놓여 있었다. 주례는 前 베이징 대학 총장이자 난징 정부의 교육부장을 맡고 있던 차이위안페이(蔡元培)였다. 그는 량치차오, 후스와 함께 가장 명망있는 사상자이자 중국 근대 교육의 아버지이기도 하였다.

결혼식은 호화스러우면서도 엄숙하기 짝이 없었다. 그저 두 남녀의 결합이 아니라 중국에서 가장 권세 있는 집안과 앞으로 중국의 지도자가 될 사람의 결합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장제스가 비로소 쑨원의 실질적인 계승자가 되었음을 선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쑹메이링은 쑨원의 처제였기에 그녀와의 결혼은 뒷배경이 변변찮은 장제스에게 비로소 지도자에 걸맞는 권위를 부여하였다. 막상 쑨원의 미망인인 쑹칭링은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비록 공산당원은 아니지만 공산주의에 우호적이었던 그녀는 반공 쿠테타를 일으켜 국공합작을 파토낸 장제스를 평생 철천지 원수처럼 여겼다. 또한 당시 소련에서 망명 생활 중이었으므로 참석할 처지도 아니었다. 그녀는 북벌이 끝난 뒤에야 귀국하였다.

분위기가 적당히 무르익자 장제스와 쑹메이링은 빠져나와 200여명에 달하는 경호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전용열차를 타고 신혼여행을 떠났다. 다음날 <뉴욕타임즈>는 머릿기사에 결혼식의 성대한 장면을 보도하면서 "장제스는 다시 한번 중국의 실권자가 될 것이다"라고 썼다. 그리고 9일 뒤 장제스는 북벌군 총사령관으로 복직하였다. 그의 권위와 실력은 한층 더 높아졌다.

1997년에 대륙에서 제작된 장완정 감독의 《쑹가황조(宋家皇朝)》에서는 "쑹아이링은 돈과 결혼하고, 쑹칭링은 나라와 결혼했으며, 쑹메이링은 권력과 결혼했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오늘날 대륙 사람들의 쑹씨 자매에 대한 관념적인 인식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쑹메이링에 대한 이해 부족과 오해에 지나지 않는다. 쑹메이링은 그저 권력만을 탐닉하면서 천하를 어지럽혔던 서태후같은 여성이 아니라 오히려 20세기 역사에서 대처 수상과 함께 가장 위대하고 탁월한 여성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다. 엄밀히 말하여 진정으로 "권력과 결혼한 여자"라는 칭호는 쑹메이링이 아니라 오히려 마오쩌둥의 욕심 많고 경박했던 황후 장칭에게 걸맞을 것이다. 상하이의 3류 여배우였던 장칭은 권력에 접근할 목적으로 옌안에 가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마오쩌둥을 유혹하였다. 결국에는 마오쩌둥의 부인이자 혁명가였던 허쯔전을 쫓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데 성공하였다. 훗날 그녀는 마오쩌둥을 부추겨 문화대혁명을 일으켰고 수많은 혁명 원로들과 무고한 사람들을 박해하여 죽음으로 내몰았다. 반면, 쑹메이링은 그녀가 권력을 찾아나섰다기보다는 장제스가 적극적으로 구애한 결과였다.  

북벌이 끝난 뒤 장제스는 중국군의 현대화를 위하여 공군력의 육성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쑹메이링에게 공군 건설 위원장 대리를 맡겼다. 그녀는 각국에서 우수한 교관과 인재들을 불려모아서 미약하기 짝이 없었던 중국 공군을 빠르게 조직하였다. 그 중에서도 미국 정부에 요청하여 퇴역 대위였던 클레어 셔놀트(Claire Lee Chennault)를 공군 고문으로 데려온 일은 실로 큰 공헌이라 할 만 하다.

셔놀트는 군인보다는 카우보이에 가까울 만큼 지나치게 자유분방한 성격인데다 교본에 맞지 않는 선진적인 전술을 주장하여 보수적인 미 육군 수뇌부의 눈 밖에 나서 강제 예편된 처지였다. 쑹메이링은 셔놀트가 난징에 오자 직접 공항까지 마중나갈 만큼 환대하였다. 그동안 찬밥신세였던 셔놀트는 감격하여 그녀에게 깊은 호감을 드러냈다. 그는 쑹메이링의 환대에 부족함이 없도록  중국 공군을 철저히 훈련시켰다. 또한 중국의 충실한 친구로서 루즈벨트를 상대로 장제스 정권에 대한 원조를 설득하였으며 미국인 의용 파일럿들을 모아서 플라잉 타이거즈를 조직하여 불후의 명성을 떨치게 된다. 짧은 시간 괄목하게 달라진 중국 공군은 중일전쟁이 폭발하자 일본에 맞서 치열한 제공권 쟁탈전을 벌였으며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 쑹메이링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쑹메이링이 처음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떨친 것은 시안사변이었다. 장쉐량의 쿠테타로 장제스가 위기에 처했을 때 허잉친을 비롯해 다른 지도자들은 서로 눈치를 보기 급급하였다. 하지만 쑹메이링은 직접 위험을 무릅쓰고 적지 한가운데에 들어가 장쉐량, 저우언라이와 담판하여 평화 협상에 합의하였다. 그녀의 용기와 베짱, 결단은 어지간한 사내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으며 실로 여장부라 할 만하였다. 덕분에 장제스의 목숨을 구했을 뿐더러 자칫 내전으로 확대될 뻔했던 시안사변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게 하였다. 타임지는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여성"으로 그녀를 선정하였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뒤에는 장제스를 대신하여 최일선을 돌면서 병사들의 사기를 독려하였으며 후방 지원을 주도하였다. 이 때문에 그녀는 종종 죽음의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상하이 전투 중에는 시찰 중에 일본 전투기의 폭격으로 그녀가 탄 차가 전복되면서 중상을 입었고 이 때 척추에 입은 상처는 그녀를 평생 괴롭혔다. 이것은 단 한번도 옌안의 동굴에서 나온 적이 없는 마오쩌둥은 물론이고, 장제스조차 감히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다.

미국 웨슬리 대학을 졸업하여 영어에 매우 능통하였으며 특히 외교에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고 있었던 쑹메이링은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중국을 대표하는 "외교부인"으로서 활약하였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11월 26일 루즈벨트의 초청을 받은 쑹메이링은 미국 방문에 나섰다. 중국 현대 외교사에서는 그야말로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녀는 그때까지도 상하이에서 입었던 부상으로 대상포진과 척추신경증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루즈벨트는 직접 병원을 방문하여 위문하였고 백악관에 초청하여 세계 각국의 외신기자들 앞에서 연설할 기회를 주었다. 당시 미국의 외교 관례로서는 파격적인 대우였다.

1943년 2월 18일 미 의회에서 연설을 하였다. 외국인 여성으로서는 최초였다. 그 자리에서 쑹메이링은 영국과 미국 정부가 중국에 대해 더 많은 원조와 물자, 무기를 제공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그녀의 연설이 끝났을 때 모든 의원들이 기립하여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한 의원은 "미국을 방문한 외국 손님들 중에서 미국 여론에 끼친 영향력에서 그녀를 뛰어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극찬하였다. 쑹메이링의 연설은 라디오를 통해 미국 전역으로 중계되었다. 미국인들은 무려 15억 달러를 헌금하였고 25만명이 그녀의 강의를 들었다. 1943년 6월에는 캐나다 정부의 요청을 받아 캐나다를 방문하였다. 중국에서 그 소식을 들은 장제스는 <대공보(大公報)>와의 인터뷰에서 "쑹메이링의 가치는 20개 사단과 맞먹는다"라고 격찬했지만 이조차도 그녀의 공헌에 충분히 걸맞는 치하라고 하지는 못할 것이다.

미의회에서 연설중인 쑹메이링. 그녀는 처음으로 미국 사회에서 중국이라는 존재를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비록 1944년 중반까지도 연합국의 선유럽 전략에 따라 원조는 미미했지만 미국은 결코 중국을 잊지 않았으며 1945년 1월부터는 레도 공도와 험프 루트를 통해 매월 수만톤의 물자가 쏟아져 들어오게 된다. 이 원조를 통해 중국군은 1945년 3월 즈장에 대한 일본군 최후의 공세를 막아내었고 본격적인 반격에 나선다.

쑹메이링은 오빠이자 외교부장인 쑹쯔원을 보좌하면서 장제스의 전권대표로서 미국, 영국 정부와의 교섭을 맡았다. 버마 반격 문제와 중국 주둔 미 제14공군의 창설, 군사 원조의 확대, 불평등 조약의 폐기, 처칠의 중국 멸시 발언에 대한 항의 등 각종 현안 문제를 놓고 교섭하여 많은 성과를 얻어내었다. 1943년 11월에 열린 카이로 회담은 중국으로서는 최초의 정상급 회담이었다. 영어를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데다 외교 지식과 경험이 전무했던 장제스를 대신하여 쑹메이링이 실질적인 역할을 하였다. 고집불통에다 마초주의자로 이름난 처칠조차 장제스는 멸시하면서도 쑹메이링에 대해서는 뛰어난 언변과 설득력에 탄복하여 "자신이 전 세계를 통틀어 높이 평가하는 소수의 여성 중의 하나"라고 인정했으며 루즈벨트에게도 "그녀는 결코 약하다고 말할 수 없다"라면서 극찬하였다.

카이로 회담이 끝날 즈음 처칠은 그동안 대중 원조에 완고했던 태도를 바꾸었고
장제스와 악수를 나누면서 "양국 군대가 버마에서 협력하기를 원한다"라면서 그동안 완강하게 반대했던 버마 탈환에 동의하였다. 또한 루즈벨트는 "나는 그동안 장제스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잘 몰랐으나 쑹메이링은 나에게 그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라고 말하다. 최대의 성과를 얻고 중국으로 돌아온 장제스는 쑹메이링을 극찬하면서 "그녀가 없었다면 이번 회담의 성공은 없었을 것이며 그녀는 유창한 영어실력과 여성으로서의 매력으로 서양 세계를 정복하였다"라고 하였다.

카이로 회담 당시 여러 정상들과 나란히 앉은 쑹메이링. ​

제2차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중국이 비서구권 국가로서는 유일하게 미, 소, 영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4대 열강의 하나이자, 오늘날까지 유엔 5대 상임이사국으로 남아 있는 것은 전적으로 쑹메이링의 역할이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중국은 카이로 회담에 참여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태평양전쟁 말기에 오면서 장제스와 스틸웰의 갈등이 심화되고 좌파 언론인들이 장제스 정권의 무능함과 부패성을 집중 공격하면서 그녀의 인기 또한 추락하였다. 하지만 공화당 내 보수파들은 여전히 장제스와 쑹메이링을 옹호하였다. 국공내전에 패배한 장제스가 대륙을 잃고 타이완으로 쫓겨가자 트루먼 행정부는 한때 장제스를 포기하는 것을 고려하기도 했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 양국의 관계가 다시 시작될 수 있었던 것 또한 그녀의 역할이었다. 오늘날까지도 타이완이 미국의 보호 아래에 있는 것은 미국의 전략적 필요성 때문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 그녀가 남긴 유산이라 하겠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부인 엘레노아 여사와 쑹메이링. 그녀의 재기에게 홀딱 반한 엘레노아 여사는 자신의 양녀가 되지 않겠냐며 권유하기도 했다.

그 시절 중국에는 쑹쯔원, 구웨이쥔을 비롯하여 명망있는 남성 외교관들도 많이 있었지만 누구도 쑹메이링이 남긴 업적에 비견할 수는 없다. 중국의 여러 정치인들을 통틀어 지금까지도 그녀에 비견할만한 인물은 저우언라이 정도를 제외하고는 없을 것이다. 그저 여자라는 이유로 그녀의 모든 업적을 무시한 채 "권력과 결혼했다"라고 폄하하는 것은 부당한 평가이다. 또한 쑹메이링은 몇가지 명예직 이외에 이렇다할 공식 직함을 가지려 하거나 자신의 신분을 이용하여 피비린내나는 권력 투쟁을 벌이지도 않았다. 그저 장제스의 개인비서이자 퍼스트 레이디로서의 ​역할에 만족했을 뿐이다.

장제스가 죽은 뒤 장징궈가 총통을 계승하자 쑹메이링은 장징궈와 권력 투쟁을 벌여 타이완의 정국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대신 정치에서 완전히 손을 뗀 채 타이완을 떠나서 미국으로 향하였다. 그리고 국제 사회에서 고립된 처지였던 타이완을 위하여 대미 외교에 힘을 쏟았으며 말년에는 뉴욕에서 조용히 칩거하다가 2003년 10월 24일 106살의 나이로 죽었다. 중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애도문을 발표하고 "중국근현대사에 큰 업적과 영향력을 미친 인물로서 일찍이 중국 인민의 항일운동을 지지했으며 중국의 분열에 반대하고 중국과 대만의 통일을 염원하고 중화민족의 번영을 위해 분투 노력하였다"라고 평가하였다. 권력에서 한발 물러서 있었던 그녀의 모습은 마오쩌둥을 앞세워 정치 전면에 나서고 나중에는 아예 그의 후계자가 되어 "여황제"의 꿈을 꾸다가 결국 파멸적인 운명을 맞이 하였던 장칭과는 대조적이다.

오늘날 중국 사람들은 쑹칭링더러 그녀의 순결함과 의지를 높이 평가하여 "조국과 결혼한 여성"이라고 칭송한다. 국공내전 이후 대륙에 남은 쑹칭링은 마오쩌둥 정권에 참여하여 부주석에 오른다. 그러나 막상 권력을 차지한 마오쩌둥은 소위 "신민주주의"라는 당초의 타협 노선을 버리고 본색을 드러내고 스탈린을 흉내낸 소위 "사회주의 개조"에 나섰다. 쑹칭링은 중도파를 대표하여 비판에 나섰으나 마오쩌둥의 호된 질책을 받고 신변의 위협까지 받자 더 큰 위험을 무릅쓰는 대신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공산당이 자신을 그저 쑨원의 미망인으로서 존중할 뿐 권력을 나눠줄 생각은 없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 후 정치와는 상관없는 문화와 여성 운동에만 전념했으며 마오쩌둥의 광기가 중국 전역을 휩쓸때에도 끝까지 침묵을 지켰다. 평생 장제스의 독재를 비난하면서 쑹메이링과는 의절까지 했던 그녀였지만 감히 마오쩌둥의 독재에는 도전하지 못했던 것이다. 문혁 중에는 장칭의 공격을 받아 자신과 자기 집안을 "부르조와"라고 비하하고 자아비판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결국 쑹칭링은 끝까지 쑨원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비록 장제스가 마오쩌둥에 패배하면서 쑹메이링의 역할 또한 퇴색하지 말았지만, 실질적인 공헌을 본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조국"과 결혼한 쪽은 쑹칭링이 아니라 그녀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1928년 1월 4일 북벌군 총사령관으로 복귀한 장제스는 지휘채를 손에 들고 전군에 총진군을 명령하였다. 그는 군권과 당권, 정권까지 모두 손에 넣으면서 지위와 실력은 이전과는 감히 비할 바가 아니었다. 신해혁명 이래 20여년의 내전도 바야흐로 크라이막스를 향하여 내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