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제스의 시대가 열리다
장제스는 평생 여러 번의 정치적인 위기에 직면하였고 그 때마다 "사직"과 "하야"라는 카드를 내밀었다. 전쟁에 패배하거나 궁지에 몰린 군벌, 정치인들이 처벌을 모면하기 위하여 하야를 선언하고 달아났다가 기회를 보아서 슬그머니 돌아오는 것은 당시에는 흔한 관행이기도 했다. 그러나 장제스는 오히려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서 상황을 역전시키는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그를 비판하는 학자들은 그저 권모술수에 능한 인물이라고 폄하하지만 정치적인 안목이 탁월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왕징웨이나 리쭝런, 펑위샹, 장쉐량 등 다른 경쟁자들 역시 하야와 복귀를 반복했지만 누구도 장제스처럼 더 큰 기회로 삼지는 못하였다. 장제스의 하야는 당장의 면피나 천운에 거는 모험이 아니라 주변의 상황을 냉철하게 판단하고 고도로 계산한 결과였다. 무엇보다도 누구도 그를 대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몇달 전 하야를 선언하고 중국을 떠날 때만 해도 장제스의 처지는 실로 풍전등화라 할 만하였다. 정치적으로는 국민정부가 난징과 우한으로 분열되었고 군사적으로는 쉬저우에서 참패하였다. 동맹자였던 리쭝런, 보충시조차 그에게 은근히 하야를 종용할 정도였다. 만약 장제스가 범용한 인물이었다면 끝까지 버티면서 장쭤린과 손을 잡고 우한 정부에 대항하려 했을 것이다. 그는 작은 지반을 차지했을지는 모르지만 중국의 분열은 고착화되었을 것이고 북벌 또한 물 건너 갔을 것이 틀림없으리라.
장제스가 하야를 선언하고 야인으로 돌아간 뒤, 국민정부는 파벌 싸움이 격화되면서 분열상이 한층 심화되었다. 왕징웨이는 최대의 걸림돌인 장제스만 사라지면 자신이 새로운 국민정부의 영수가 되리라 여겼지만 다른 계파들의 견제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자리를 던지고 우한으로 돌아갔다. 북벌군 총사령관의 자리를 노리던 탕성즈는 리쭝런에게 밀려나자 우한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자립을 선언하였다. 난징 정부는 10월 18일 탕성즈 토벌령을 선언하고 서정군(西征軍)을 출동시켰다. 왕징웨이는 탕성즈에게 승산이 없다고 보고 재빨리 광저우로 달아났다. 고립무원이었던 탕성즈는 여지없이 패배하여 11월 11일 하야를 선언한 후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여기다 국공합작의 결렬로 국민당에서 쫓겨난 공산당은 각지에서 무장 반란을 일으키는 등 혼란의 연속이었다.
국민정부의 옛 수도였던 광저우로 돌아온 왕징웨이는 광둥군벌의 수장이자 북벌군 후방 위수 사령관인 리지선과 손을 잡고 자기 세력을 끌어모아 새로운 정부를 세울 준비를 하였다. 물론 진짜 속내는 난징 정부와의 협상에서 더 많은 정치적 지분을 얻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왕징웨이의 힘만으로는 어림도 없는 얘기였다. 그에게는 혁명 원로이자 쑨원의 오른팔이었다는 명성 이외에는 스스로 정점에 설만한 역량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매번 남의 힘을 빌려서 경쟁자들을 견제하려다 오히려 자신이 군벌들의 틈바구니에 끼인 채 휘둘리는 식이었다. 처음에는 장제스를 견제할 요량으로 탕성즈와 손을 잡았지만 그를 통제할 수도 없었을 뿐더러 반란을 일으키자 여기에 연루되지 않으려고 도망친 것이다.
또한 "영한 합류" 이후 새로운 지도부의 구성을 놓고 우한과 난징, 상하이 등 여러 계파들의 싸움이 격화되고 군부에서는 리쭝런의 광시파가 주도권을 잡으면서 왕징웨이의 입지는 점점 좁아졌다. 이런 우유부단한 인물이 사람들의 인망을 얻기는 힘든 법이다. 결국 기댈 곳은 장제스 밖에 없다고 여겼다. 그는 일본에서 외유 중이던 장제스에게 비밀 전보를 보내어 조속히 귀국할 것을 요청하였다. 장제스의 무력과 "혁명의 성지"인 광저우, 그리고 자신의 명망만 있다면 정무는 자신이, 군권은 장제스가 나눠 가지는 연합 정권을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난징 정부 역시 장제스의 복귀를 절실히 바라고 있었다. 장제스를 후원하던 저장 재벌들이 등을 돌리면서 재정적으로는 파산 직전에 내몰린데다 탕성즈가 반란을 일으키는 등 북벌군이 분열되는 양상까지 벌어지자 허잉친과 리쭝런, 보충시까지도 연명으로 장제스에게 전문을 보내어 자신들을 지휘해 달라고 요청하는 판이었다. 장제스의 복귀에 장애가 되는 사람들은 외국 시찰 등의 명목으로 잠시 중국을 떠나도록 하였다. 너도나도 장제스의 빈 자리를 절감하면서 그의 몸값은 천정부지로 뛰었다.
11월 8일 일본을 출발한 장제스는 이틀 후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상하이로 돌아왔다. 그는 여전히 하야를 번복할 생각이 없으며 야인으로 남을 것이라고 공언했지만 믿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국민당 지도부는 장제스를 찾아가서 현안을 논의하고 국민당 전국대표대회를 위한 예비 회의에 참석해 달라고 요청할 정도였다. 그는 중무장한 장갑열차를 타고 엄중한 호위 속에서 개선 장군마냥 앞으로 중국의 새로운 수도가 될 난징으로 귀환하였다. 몇달 전 "우울하고 낙담했던"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그의 표정에는 그토록 꿈에도 그리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기쁨과 각오가 넘쳐 흘렀다.
장제스는 화려하게 돌아온 반면, 왕징웨이의 입장은 더욱 곤란해졌다. 장제스를 만나기 위하여 왕징웨이와 리지선이 광저우를 잠시 비운 사이 11월 17일 제2방면군 사령관 장파쿠이(張發奎)와 제5군 군장 리푸린(李福林), 신편 제2사단장 쉐웨(雪岳) 등이 공모하여 리지선의 하야를 요구하면서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뒷통수를 맞은 격이었던 리지선도 자파 세력을 모아서 반격에 나섰다. 광시성 주석 황사오홍(黃紹竑)이 지휘하는 광시군이 서쪽을, 천지당(陳濟棠)의 광둥군이 동쪽을, 천밍추(陳銘樞)의 제11군이 북쪽을 각각 맡아서 삼방향에서 광둥성을 침공하였다. 광둥성 접경 지대에서 양측 군대가 충돌하면서 이른바 "양광전쟁(兩廣戰爭)"이 시작되었다. 왕징웨이는 직접 반란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사방에서 비난이 쏟아지면서 스스로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고 12월 16일 프랑스로 떠났다. 두번째 하야였다.
한편, 대부분의 병력이 전방으로 출동하면서 광저우의 방비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잔류 부대는 예젠잉(叶剑英)의 제4군 교도 연대 1500여명과 특무대대, 무장 보안대 정도였다. 이들 상당수는 공산당원이었기에 난창 봉기가 실패한 뒤 재기를 꾀하던 공산당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 외에도 각지에서 국민당의 토벌을 피하여 몸을 숨기고 있던 많은 공산당원들도 광저우의 지하로 숨어들었다. 광둥성 공산당 서기인 장타이레이(张太雷)는 장파쿠이와 리지선이 싸우는 틈을 타서 광저우를 장악할 계획을 세웠다.
총지휘관은 장타이레이, 그리고 예팅(叶挺)과 예젠잉 등이 현장 지휘를 맡았다. 훗날 인민해방군 10대 원수의 한 사람이 되는 예젠잉은 윈난 강무당을 졸업하였고 쑨원의 경호부대를 지휘하였다. 또한 황푸군관학교의 창설에 참여하여 교관을 지냈으며 장제스와 함께 천중밍 토벌과 북벌전쟁에 참여하였다. 원래 그는 공산당원이 아니었으나 얼마 전에 저우언라이에게 포섭되어 몰래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2월 11일 새벽 3시 교도 연대 사령부에서 신호가 오르자 약 4천여명에 달하는 교도연대 병사들과 노동자 적위대원들이 일제히 봉기하였다. 그 중에는 훗날 김일성의 오른팔로서 북한군 초대 인민무력부장을 지내게 되는 최용건, <헤이그 밀사>로 유명한 이준의 장남으로 청산리 대첩에도 참가하였던 이영(李瑛) 등 100여명의 조선인들도 있었다. 이들은 봉기에 참여를 거부하는 장교들을 총살시킨 후 낫과 망치가 그려진 붉은 깃발을 들고 광저우 공안국과 광둥성정부, 제4군 사령부, 제12사단 사령부 등을 공격하였다. 감옥에 갇혀 있던 2천여명의 죄수들 또한 풀려나서 봉기에 가담하였다. 생각지도 못한 반란에 혼비백산한 장파쿠이와 광둥성 주석 천공보(陳公博) 등은 간신히 빠져나와 광저우 교외에 있는 리푸린의 제5군 사령부로 피신하였다. 다음날 오후 광저우 소비에트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곧장 장파쿠이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광저우 남서쪽에 있는 관인산(观音山)을 놓고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다. 장타이레이는 최일선을 순시하면서 병사들을 독려하는 중 저격을 받아 전사하였다. 그날 밤 내내 시가전을 벌인 끝에 봉기 부대는 대부분 소탕되었고 다음날 아침 광저우는 다시 장파쿠이의 손에 넘어갔다.봉기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서 전사하거나 붙들려 처형된 사람은 무려 5700여명에 달했으며 그 중에는 5명의 소련인도 있었다. 조선인들 또한 대부분 죽임을 당하였다. 예젠잉과 예팅, 네룽전(聂荣臻)은 홍콩으로 피신하였고 쉬샹첸(徐向前)은 얼마 안되는 잔여 병력을 이끌고 포위망을 탈출하여 동쪽으로 달아났다. 공산당으로서는 또 한번의 뼈아픈 실패였다.
공산당 지도부는 군벌들이 싸우는 틈을 이용하여 꾸준히 봉기와 소요를 일으키다보면 러시아의 10월 혁명처럼 언젠가 중국 전역의 노동자, 농민들이 소비에트 혁명을 일으켜 세상을 뒤엎으리라 믿었다. 따라서 1928년 여름까지 각지에서 무장 봉기를 시도했지만 충분한 준비와 동조 세력 없이 일부 군인들을 선동하여 산발적으로 반란을 일으키는 구태의연한 방식으로는 금새 진압당하기 일쑤였다. 그 과정에서 많은 공산당원들만 무익하게 희생되었다. 과거 쑨원의 혁명당 또한 이런 방식을 고수하다가 쓴맛을 보았던 것을 새삼 재현하는 꼴이었다. 국민당은 이들이 일석일조에 쓰러뜨리기에는 너무나 거대한 존재였다.
1928년 6월 18일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제6차 중국공산당 전국대회에서 소련 코민테른은 그동안의 실패를 취추바이(瞿秋白)가 무모한 모험주의를 벌인 탓이라며 죄다 뒤집어씌운 후 총서기에서 해임하고 중공 지도부에서 내쫓았다. 그리고 더 이상의 무장 봉기를 금지하고 역량 보존에 주력할 것을 지시하였다. 연이은 실패로 공산당이 이대로 소멸하는 것도 시간문제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장시성 일대의 농촌을 새로운 근거지로 삼아서 투쟁의 햇불을 드는데 성공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마오쩌둥이었다.
그는 흩어진 패잔병들을 모으고 주변 농민들을 규합하는 한편, 유격전을 벌이며 토벌군을 격파하였다. 마오쩌둥은 이론에만 능할 뿐 우유부단하기 짝이 없는 여느 유학파 지도자들에게 찾아볼 수 없는 탁월한 지도력과 리더쉽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의 곁에는 주더, 펑더화이, 린바오, 허룽, 뤄룽환(罗荣桓) 등 훗날 중국 전역에 이름을 떨치게 되는 쟁쟁한 장군들이 있었다. 아직은 홍군의 한개 부대에 지나지 않았지만 빠르게 세력을 확대해 나가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장제스조차 위협을 느낄 정도로 성장한다. 이른바 "마오쩌둥 신화"의 시작이었다.
어쨌거나 공산당의 봉기는 진압되었지만 그 사이 황사오홍의 광서군이 광저우로 진격하였다. 장파쿠이는 전투에서 대패한데다 부하들까지 등을 돌리자 결국 12월 21일 하야를 선언한 후 일본으로 도망쳤다가 북벌 전쟁이 끝난 뒤 슬그머니 돌아왔다. 얼마 뒤 장제스와 리쭝런 사이에 "장계전쟁(蒋桂战争)"이 벌어지자 처음에는 장제스를 지지했지만 펑위샹이 리쭝런의 편을 들면서 전황이 장제스에게 불리하다고 판단한 그는 또다시 반란의 깃발을 들고 스스로 "호당구국군 제8로 총사령관"을 칭하였다. 그러나 허잉친의 토벌로 또 한번 패주하였고 결국 장제스에게 투항한다.
한편, 장파쿠이의 반란에 연루되면서 장제스와 합작도 못해 본 채 망신만 당하고 일본으로 망명했던 왕징웨이는 2년 뒤 중원대전이 폭발하자 다시 귀국하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反장제스 진영의 추대를 받아서 베이징 임시 정부의 수장에 오르지만 이 또한 오래 가지는 못하였다. 장제스의 공격과 장쉐량의 개입으로 反장제스 진영이 패배하면서 베이징 정부가 수립된 지 고작 10일 만에 무너진 것이다. 왕징웨이는 또 한번 하야를 선언하고 물러나야 했다. 그는 그 후로도 몇번이나 하야와 복귀를 반복하면서 군벌들을 선동하여 장제스와 대립하였다. 만주사변 이후에는 대표적인 친일파가 되어서 중국 민중의 들끓는 항일 열망을 무시한 채 장제스의 대일 강경론과 군사력 증강이 도리어 일본을 자극할 수 있다며 비판하였고 대일 유화노선을 주장하여 국민적인 지탄을 받았다.
젊은 시절 직접 폭탄을 제조하여 순친왕의 암살을 꾀했으며 중국 동맹회 시절부터 쑨원의 최측근으로서 혁명을 위하여 온 몸을 바쳤던 순수했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점점 권력의 화신으로 변하면서 박쥐마냥 변절을 거듭하였다. 지조도, 신념도 찾아볼 수 없었다. 결국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38년 12월 일본에 회유되어 충칭을 탈출한 후 난징에서 친일 괴뢰 정권을 수립하게 된다. 오늘날 그는 이른바 "친일파 1호"로 불리며 중국인들에게 가장 미움 받는 사람 중의 하나이다.
상하이에서 장제스와 쑹메이링이 성대한 결혼식을 거행한 지 이틀 후인 1927년 12월 3일 장제스의 자택에서 국민당 예비 회의가 열렸다. 주요 간부들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만장 일치로 장제스의 복직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귀 동지의 직권은 우리 당 중앙에서 부여하였으며 그 동안의 공적은 전 국민이 알고 있다. 현재 군벌들이 여전히 저항하고 있고 귀 동지는 은퇴할 시기가 아니다. 당의 싸움을 차단하고 북벌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귀 동지가 계속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으로서 직분을 다해주기를 요청한다."
1928월 1월 4일 장제스는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 취임하였다. 하야를 선언한 지 넉달 반 만이었다. 2월 2일부터 7일까지 난징에서 국민당 제2차 4중 전국대표대회가 개최되어 29명의 중앙 위원이 임명되었다. 난징 정부의 초대 주석에는 후난 군벌이자 국민당의 원로인 탄옌카이(譚延闓)가 선출되었다. 이른바 "난징 22년(1928~1949)"이라 불리는 새 역사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탄옌카이(1880~1930)는 장제스와 같은 저장성 출신으로 항저우가 고향이다.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신동"이라고 불리었으며 24살에는 회시(會試, 복시)에 1등으로 합격하여 한림원에서 관직 생활을 하였다. 광서제의 스승인 웡통허(翁同龢)는 그의 재능에 감탄하여 "천하의 기재(奇才)"라고 했을 정도이다. 후난성 자의국 의장을 지내면서 대표적인 "입헌파"로서 조정에 입헌군주제의 실시를 주청하였다.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후난성에서 반청 혁명을 주도했으며 스스로 후난 도독에 올랐다. 위안스카이, 돤치루이의 북양 정권에 맞서 제2차 혁명에 참여하고 후난 자치 운동을 벌였으나 돤치루이의 사주를 받은 부하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쫓겨나 쑨원에게 의탁하였다. 이후 쑨원 정권에서 내무부장과 제2군 군장을 역임하며 북벌전쟁을 준비하였다. 경력과 지위에서는 장제스 따위는 감히 견줄 수도 없는 쟁쟁한 인물인 셈이다. 그는 정부 주석과 행정원장 등을 지낸 다음 1930년 9월 22일 병사하였다. 장제스는 위대한 노선배를 국장으로 성대하게 장례를 지낸 다음 쑨원의 곁에 묻었다.
이 날 장제스는 정치위원회 주석과 군사위원회 주석이 되어 당권과 군권을 한손에 쥐게 되었다. 탄옌카이 역시 장제스의 오랜 맹우였다는 점에서 장제스는 명실상부한 쑨원의 후계자로서 국민정부의 최고 지도자로 등극하였다. 장제스의 나이 41살. 드디어 그의 천하가 온 것이다. 한편으로, 왕징웨이를 비롯하여 지도부에서 배제된 사람들은 불만을 품은 채 反장제스 전선을 구축하였고 군벌들과 연합하여 장제스에게 꾸준히 도전하였다. 이 때문에 북벌 이후에도 정국은 여전히 소란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장제스는 비록 반대 세력을 밀어내거나 잠시 손을 잡을 수는 있었으나 링컨처럼 포용하여 자기편으로 만들 만큼 관대하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마오쩌둥이나 스탈린처럼 철두철미하게 처단하여 아예 싹을 뿌리채 뽑아버릴만큼 악독하지도 못했다. 그 어중간함이 장제스의 천하가 오래가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 제2차 북벌을 준비하다
북벌의 재개를 앞두고 장제스는 전군의 재편성에 착수하였다. 1926년 7월 처음 북벌에 나섰을 때 8개군 10만명 남짓에 불과했던 국민혁명군은 1928년 초에 오면 펑위샹과 옌시산의 군대를 제외하고도 100만명이 넘었다. 1년 반 사이에 10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그 중에는 혁명에 동조하여 스스로 자원하거나 새로이 응모하여 편성한 부대도 있었지만 태반은 북상 과정에서 흡수된 지방 소군벌들이었고 우페이푸, 장쭝창, 쑨촨팡의 부하였다가 투항한 군벌 군대도 많이 있었다. 따라서 양적으로는 폭발적으로 커졌지만 자질이 천차만별이었고 부대의 편제와 지휘계통 또한 중구난방이었기에 혼란스럽기 짝이 없었다.
군사위원회는 1928년 1월 18일 <국민혁명군 육군 편제 대강>을 발표하였다. 독립된 전술 작전을 수행하는 기본 단위는 군(軍)이었다. 1개 군은 3개 보병사단과 교도연대, 포병연대, 기병연대, 공병대대, 통신대대, 헌병대대, 군악대 각 1개씩 배속되어 제병협동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군 사령부는 참모처와 부관처, 경리처, 군의처, 군법처, 정치 훈련처 등으로 구성되었다. 1개 군은 약 2만명 정도로 타국의 사단에 맞먹었다. 또한 군의 상급 제대로 로군(路軍) 또는 군단(軍團), 그 위로는 최상위 편제로 집단군이 있었으나 상설 편제가 아니라 전쟁 중에만 편성되는 임시 편제였다.
군의 하위제대인 사단은 기존의 3-3제(하위 부대를 일괄적으로 3개씩 묶어 상위 부대를 구성하는 편제)를 버리고 "갑"종 사단과 "을"종 사단으로 나누었다. 갑종사단은 2개 여단 4개 연대, 을종사단은 3개 연대로 편성되었으며 사단 직할 부대로 특무 대대와 포병 대대가 있었다. 1개 연대는 3개 대대와 1개 박격포 중대, 1개 기관총 중대, 1개 위생대가 있었으며 1개 대대는 4개 중대로 편성되었다.
단위 | 반(班) | 배(排) | 연(連) | 영(營) | 단(團) | 여(旅) | 사(師) |
분대 | 소대 | 중대 | 대대 | 연대 | 여단 | 사단 | |
편성 | - | 3개 반 | 3개 배 | 4개 연 | 3개 영 | 2개 단 | 2개 여 |
인원 | 14명 | 45명 | 130명 | 520명 | 1600명 | 3500명 | 7~8천명 |
"갑"종 사단은 약 7~8천여명, "을"종 사단은 4~5천여명 정도였다. 북벌 초기에 비하여 편제상에서 사단 전투력이 상당히 강화되기는 했으나 여전히 지원부대가 빈약하여 서구의 사단처럼 제병협동부대로서 독립된 작전을 수행할 수준에 도달하지는 못하였다. 또한 소련식 정치 장교 제도는 국공합작의 파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지되어 중대 이상의 단위 부대마다 국민당에서 파견된 "정치공작지도원(政治工作指導員)"들이 배속되었다. 이들의 권한은 "즉결처분권"까지 가지고 있던 소련에 비하면 훨씬 약하였고 주로 지휘관의 견제와 장병들의 사상 교육을 맡았다.
개편 작업은 장제스 직계의 일부 부대에 국한되었다. 국민혁명군은 잡다한 군벌들로 구성된 연합군인데다 군벌 우두머리들은 중앙의 방침을 따르지 않고 경쟁적으로 자신의 부대를 확장하는데에만 광분했기 때문이었다. 군벌에게는 얼마나 많은 병사를 가졌는가가 곧 자신의 정치적인 위상을 나타내는 잣대이기도 하였다. 또한 중앙으로부터 더 많은 군비를 타낼 속셈으로 서류상으로만 인원수를 부풀이기도 하였다. 1개 군은 적게는 1만명이 채 되지 않았고 많게는 4~5만명에 달하기도 했다. 이것은 국가 재정에 심각한 부담을 주었을 뿐더러 지휘 계통 역시 어지러웠으며 일부 정예부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은 숫자만 많을 뿐 전투력은 형편없었다. 정규군과 비정규군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고 인원수와 편제도 불분명하여 확인되지 않는 부분도 많다.
또한 정치적으로는 한 깃발 아래 뭉쳤다지만 여지껏 피터지게 싸워왔던 군벌들의 봉건적인 체질이 하루 아침에 달라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명목상 우군일 뿐 군벌들은 더 많은 영토와 전리품을 차지할 속셈으로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기 일쑤였다. 한가지 일화를 말한다면 1928년 3월 허난 군벌인 제45군장 판중슈(樊钟秀)과 펑위샹 휘하의 제5군장 쉬여우산(石友三)이 충돌하여 허난성 덩펑(登封)에서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판중슈는 패배하여 결국 펑위샹에게 투항했지만 이 과정에서 15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소림사(少林寺)의 대부분이 불타고 수백여명의 승려가 죽임을 당하였다. 오늘날의 소림사는문혁이 끝나고 덩샤오핑 시대에 와서 다시 중건된 것이다. 참고로, 2011년에 류더화(劉德華), 청룽(成龙)이 주연한 영화 <샤오린(新少林寺)>이라는 영화가 개봉한 적이 있는데, 영화에서는 군벌 내전기에 군대의 공격으로 소림사가 파괴되는 모습을 담고 있지만 픽션일 뿐 실제 역사와는 관계가 없다.
나중에 군정부장(국방부 장관)이 되는 허잉친은 "무기와 제식이 일치하지 못하고 장비가 매우 결핍되어 있으며 병사들 또한 정예화되지 못하여 현대적인 군대에 걸맞지 못하다"라고 하였는데 이 시기 중국군의 현실을 단적으로 말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북벌이 끝난 뒤 장제스는 꾸준히 군의 정편과 국군화를 추진하였고 이 때문에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군벌들과의 충돌로 이어지면서 장장 2년에 걸친 "신군벌 내전"이 벌어졌다. 중원대전 중에는 갑종사단(3개 여단 6개 연대), 을종사단(2개 여단 4개 연대)로 바꾸었다가 내전이 끝난 뒤인 1932년 5월 12일 <육군 신편제 안>을 발표하여 2개 여단 4개 연대 체제를 원칙으로 모든 부대를 통일하기로 결정하였다. 1935년 1월 26일에는 전국군사정리회의를 개최하고 <60개 사단 정군 계획>을 수립하였다.
1935년 하반기부터 1937년 상반기까지 3차례에 걸쳐 중앙군과 동북군 30개 사단이 이른바 "정편사단(整編師團)"으로 개편되었다. 독일군의 편제를 참고했기에 "독일식 사단(德式师)"이라고도 불렀다. 각 사단은 2개 여단 4개 연대(12개 대대) 및 포병대대, 공병 대대, 수송 대대, 위생 중대, 특무 중대, 기병 중대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총 인원은 1만1천명 정도였다. 또한 독일군의 제식 소총이었던 M1898소총을 라이선스한 중정식 소총으로 무장하였고 체코제 ZB26 경기관총, 24년식 맥심 중기관총(독일제 MG-08의 라이선스), 75mm 크루프 M1903 야포, 75mm 보포스 M1930 산포, 38mm Pak36 대전차포를 보유하였다. 비로소 중국은 내전기의 전근대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현대적인 군대를 갖추게 된 것이다.
* 소련 대신 독일을 선택하다
국공합작의 파기에도 불구하고 당장 소련과의 단절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소련 코민테른은 공산당을 부추겨 무장 봉기를 사주하는 등 적대적으로 행동하는 이상 방관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소련 역시 더 이상 국민당과의 관계를 유지할 이유가 없었다. 앞서 12월 3일 열린 예비 회담에서 장제스는 지도부에 소련과의 절교를 건의하였다. "각지의 소련 영사관이 공산당의 정치 기관이 되고 소련의 극동은행은 공산당의 금융기관이 되어 있다. 이 기관들을 봉쇄하지 않는 한 공산당의 소요는 멈출 수 없다. 우리의 혁명이 성공한 뒤 적절한 시기에 국교를 회복하면 된다."
그의 건의를 받아들여 국민정부는 12월 13일 정식으로 대소 단교를 선언하였다. 그리고 각지의 소련 영사관을 폐쇄하고 우한에서 여전히 체류 중이던 소련인 고문단을 모두 추방하였다. 이로서 1923년 1월 <쑨원-요페 합작 선언>이래 약 6년에 걸친 소련과 국민당의 관계는 완전히 끝났다. 중소 양국의 관계가 다시 회복된 것은 10년이나 지난 뒤인 1937년 8월 21일 중소불가침조약이 체결되면서였다.
국민당이 소련을 대신하여 새로운 친선 대상으로 삼은 나라는 독일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돤치루이 정권은 대독 선전 포고를 하고 독일과의 모든 국교를 단절한 바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새로이 수립된 바이마르 민주 정부는 1921년 5월 20일 중국과의 국교 정상화에 합의하였다. 또한 의화단의 난 이래 독일이 중국에서 누렸던 모든 권리와 지위를 포기하고 상호 평등의 원칙에서 접근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미국 등 다른 열강들이 중국의 주권을 침해하고 무력 개입을 일삼았던 것이나, 소련이 말로는 약소 민족의 자결을 존중하겠다고 약속했음에도 실제로는 여느 열강들의 행태와 다를 바 없어 중국 민중의 감정을 자극했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장제스는 광저우 손중산 대학 교장이자 베를린 대학을 졸업한 주자화(朱家驊)를 통해 1926년부터 이미 독일 정부와 접촉하고 있었고 북벌 전쟁에서도 독일의 물적 지원을 받았다. 또한 독일은 패전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군사 강국이었으므로 소련 군사 고문단이 철수한 뒤 장제스는 바이마르 정부에 군사 고문단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그가 초빙을 원했던 사람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타넨베르크 전투에서 러시아군을 섬멸했던 전쟁 영웅이자 독일군 참모차장을 지낸 에리히 루덴도르프(Erich Ludendorff) 대장이었다. 그러나 극우주의자로서 정계 진출을 꿈꾸고 있었던 그는 중국 근무를 거부하고 대신 자신의 작전 참모였던 막스 바우어(Max Bauer) 대령을 보냈다. 바우어 대령은 북벌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28년 11월 중국에 도착하여 장제스의 군사 고문을 맡았으며 중원대전에서 장제스가 승리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바우어 대령을 시작으로 장장 10년에 걸쳐서 5명의 쟁쟁한 독일군 고위급 장교들이 군사 고문단장으로 파견되어 중국군의 현대화에 일조하게 된다. 또한 많은 중국군 장교들이 독일로 파견되어 군사 교육을 받았다. 그 중에는 장제스의 차남인 장웨이궈도 있었는데, 그는 뮌헨의 육군사관학교에서 전차 교리를 배웠고 독일 제98산악보병연대와 제8보병사단에서 견습 장교로 근무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폭발하자 귀국하여 전차 제1연대를 지휘하였다.
다른 열강들이 자국의 중요한 시장이었던 일본의 눈치를 보느라 중국에 무기 수출 엠바고(embargo)를 내리고 소극적으로 행동했기에 독일은 중국에게 사실상 유일한 동맹국이자 최대의 원조국이기도 하였다. 중국은 무기 생산에 필수적인 희귀금속인 텅스텐과 안티몬을 독일에 제공하고 중국에게 절실했던 최신 무기와 기계류를 제공하였다. 또한 일본이나 소련과 달리 독일은 중국의 주권을 존중하고 어떠한 내정 간섭도 하지 않은 채 오직 군사와 경제 협력에만 주력하였다. 중독 합작은 히틀러가 일본과 삼국동맹을 체결하고 중국에 대한 원조 중단을 결정하는 1938년 5월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그 후로도 국교가 단절된 것은 아니며 민간 차원의 교류는 계속되었다. 전쟁 중 임시 수도였던 충칭에는 독일 대사관이 있었고 중국의 정보를 일본에 몰래 제공하기도 하였다. 그 중에는 일본 공정부대가 독일 대사관의 도움을 받아서 충칭에 몰래 잠입한 후 장제스를 생포하는 계획도 있었으나 현지 대사관의 반대로 실현되지는 않았다. 양국의 관계는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직후 서로 선전포고를 하면서 비로소 끊어지게 된다.
* 장제스, 전군에 총공격을 명령하다
1928년 2월 9일 쉬저우에서 군사 회의가 열렸다. 장제스와 리쭝런, 펑위샹, 옌시산 북벌군의 네 거두를 비롯하여 국민정부 주석 탄옌카이, 국민당 중앙감찰위원장 차이위안페이, 해군 총사령관 양수좡(楊樹莊), 군사위원회 총참모장 겸 제8로군 사령관 리지선(李濟深), 제1군 군장 허잉친, 제3군 군장 주바이더(朱培德), 제6군 군장 청치엔(程潛), 동로군 총사령관 보충시 등 쟁쟁한 인물들이 모두 참여하였다. 주요 안건은 정부의 개조 이외에 <북벌의 완수>였다. 1년 반 전 장제스가 처음 북벌을 선언한 이래 그동안의 내부 분열과 대립을 완전히 끝내고 북방의 군벌들을 분쇄하여 중국에 통일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북벌군은 4개 집단군으로 재편되었다. 제1집단군 총사령관에는 장제스, 제2집단군 총사령관에는 펑위샹, 제3집단군 총사령관에는 옌시산, 제4집단군 총사령관에는 리쭝런이 각각 취임하였다. 전투 서열은 다음과 같았다.
제1집단군 - 총사령관 장제스 참모장 허잉친 4개 군단 18개 군 61개 사단 29만명
제1군단장 류즈(劉峙) 4개 군 14개 사단
- 제1군(황푸군) : 제1사단, 제2사단, 제22사단, 독립 제4사단
- 제4군(광둥군) : 제12사단, 제25사단, 제26사단, 교도사단
- 제9군(황푸군) : 제3사단, 제14사단, 제21사단
- 제10군(구이저우군) : 제28사단, 제29사단, 제30사단
제2군단장 천티아오위안(陳調元) 3개 군 9개 사단
- 제17군(푸젠, 장쑤군) : 제53사단, 제54사단, 제55사단
- 제26군(후난군) : 제62사단, 제63사단, 제64사단
- 제37군(안후이군) : 제79사단, 제80사단, 제81사단
제3군단장 허야요주(賀耀組) 3개 군 9개 사단
- 제27군(후베이군) : 제65사단, 제66사단, 독립 제3사단
- 제33군(안후이군) : 제70사단, 제71사단, 제72사단
- 제40군(후난군) : 제82사단, 제83사단, 제84사단
제4군단장 팡전우(方振武) 3개 군 9개 사단
- 제34군(샨시군) : 제88사단, 제89사단, 제90사단
- 제41군(샨시군) : 제91사단, 제92사단, 제93사단
- 제47군(샨시군) : 제107사단, 제108사단, 제109사단
예비대 총지휘관 주바이더(朱培德) 2개 군 8개 사단
- 제3군(윈난군) : 제7사단, 제8사단, 제9사단
- 제31군(윈난, 구이저우군) : 제27사단, 제28사단, 제29사단
- 독립 제7사단(저장군), 독립 제37사단(저장군)
후방경비사령관 쳰다쥔(钱大钧) 3개 사단
- 제3사단, 제20사단, 제69사단(3개 사단 모두 황푸계열)
제1집단군 직할부대 3개 군 9개 사단 5개 혼성여단
- 제12군(허난군) : 제1사단, 제2사단, 제3사단, 5개 독립혼성여단
- 제46군(황푸군) : 신편 제4사단, 신편 제5사단, 신편 제6사단
- 제48군(직노연군에서 투항한 부대) : 제1사단, 제2사단, 제3사단
난징 방위사령관 쳉첸(陳誠)
항공사령관 장징위(张静愚) 3개 중대 항공기 9대
제2집단군 - 총사령관 펑위샹 참모장 차오하오선(曹浩森) 10개 방면군 28개 군 53개 사단 31만명
제1방면군 군단장 쑨량청(孫良誠) 3개 군 8개 사단
- 제3군(펑위샹 직계) : 제2사단, 제18사단, 제19사단
- 제4군(닝샤군) : 제1사단, 기병사단
- 제5군(펑위샹 직계) : 제6사단, 제9사단, 제71사단
제2방면군 군단장 쑨롄중(孙连仲) 3개 군 8개 사단
- 제1군(펑위샹 직계) : 제29사단, 제30사단, 제31사단
- 제14군(舊즈리군) : 제4사단, 제5사단, 제12사단
- 제23군(펑위샹 직계) : 제32사단, 제36사단
제3방면군 군단장 한푸쥐(韩复榘) 1개 군 4개 사단
- 제6군(펑위샹 직계) : 제1사단, 제14사단, 제15사단, 제38사단
제4방면군 군단장 쑹저위안(宋哲元) 5개 사단
- 제1사단, 제3사단, 제8사단, 제22사단, 기병사단(닝샤군, 샨시군)
제5방면군 군단장 위에웨이준(岳维峻) - 舊 국민 제2군을 재편성 4개 군
- 제1군, 제3군, 제5군, 제7군
제6방면군 군단장 스징팅(石敬亭) 4개 군 6개 사단
- 제1군(샨시군), 제2군(샨시군), 제3군(舊 안후이군을 재편성), 독립 제1~3사단(지방군)
- 제10군(샨시군) : 제2사단, 제54사단, 제55사단
제7방면군 군단장 류위펀(刘郁芬) 2개 군
- 제11군(간쑤군), 제13군(간쑤군)
제8방면군 군단장 류진화(刘镇华) 3개 군 5개 사단 4개 여단
- 제23군(지방군) : 제76사단, 제8~제10혼성여단
- 제26군(지방군) : 제75사단, 제76사단
- 제28군(지방군) : 제73사단, 제74사단, 보충여단
제9방면군 군단장 루쭝린(鹿钟饼) 6개 군 15개 사단
- 제2군(펑위샹 직계) : 제8사단, 제10사단, 제53사단
- 제18군(펑위샹 직계) : 제68사단, 제69사단, 제89사단
- 제20군(舊 국민 제3군을 재편) : 제58사단, 제59사단
- 제21군(직노연군 투항부대) : 제64사단, 제85사단
- 제27군(舊 국민 제2군을 재편) : 제53사단, 제57사단
- 제30군(펑위샹 직계) : 제23사단, 제60사단, 제35사단
제2집단군 직할부대 2개 군 2개 사단 1개 여단
- 기병 제1군 : 제3사단, 제4사단, 제10혼성여단
- 기병 제2군, 장갑차 집단
제3집단군 총사령관 옌시산(阎锡山) 참모장 주수광(朱綬光) 10개 군 23개 사단 15만명
- 제1군(상윈商震) : 제1사단, 제3사단, 기병 제2사단, 기병 제11사단 - 산시군
- 제2군(양아이위안杨爱源) : 제2사단, 제6사단, 제12사단, 기병 제7사단, 제1~2혼성여단 - 산시군
- 제3군(쉬융창徐永昌) : 독립 제1여단, 독립 제2여단, 독립 제4여단, 독립 제6여단 - 舊국민 제3군
- 제4군(푸춘후아이傅存怀) : 제7사단, 기병 제2여단 - 산시군
- 제5군(푸줘이傅作义) : 제9사단, 기병 제6사단 - 산시군
- 제6군(펑위시丰玉玺) : 제13사단, 제16사단 - 산시군
- 제7군(장윈우张荫梧) : 제5사단, 제14사단, 제15사단 - 산시군
- 제8군(탄징린谭庆林) : 기병 제3사단, 독립 제1기병여단 - 舊즈리군을 개편
- 제10군(리웨이李维) : 기병 제4사단, 기병 제10사단 - 산시군
- 제12군(팡위진方玉晋) : 제10사단, 제17사단 - 산시군
- 총예비대 : 독립 제8사단, 독립 제11사단
제4집단군 총사령관 리쭝런 참모장 보충시 16개군 59개 사단 24만명
- 제2군(루디핑鲁涤平) : 제4사단, 제6사단, 제23사단, 독립 제5사단, 교도사단, 신편 제1사단 - 후난군
- 제6군(후원두胡文斗) : 제17사단, 제18사단, 제19사단 - 후난군
- 제7군(시아웨이夏威) : 제33사단, 제34사단, 제35사단 - 광시군
- 제8군(우상吴尚) : 제1사단, 제2사단, 제3사단 - 舊탕성즈군을 개편
- 제12군(예치叶琪) : 제1사단, 제2사단, 제3사단 - 舊탕성즈군을 개편
- 제13군(보충시白崇禧) : 제2사단, 제3사단, 제4사단 - 광둥군
- 제14군(천지아여우陈嘉佑) : 제5사단, 제8사단, 제39사단 - 후난군
- 제17군(저우란周谰) : 제1사단, 제2사단, 제3사단 - 舊탕성즈군을 개편
- 제18군(타오준陶钧) : 제1사단, 제2사단, 제3사단 - 광시군
- 제19군(후쭝두오军胡宗铎) : 제1사단, 제2사단, 제3사단 - 광시군
- 제21군(시앙청지에向成杰) : 제1사단 - 쓰촨군
- 제30군(웨이위산魏益三) : 제1사단, 제2사단, 제3사단 - 舊궈쑹린군을 개편
- 제35군(허젠何键) : 제1사단, 제2사단, 제3사단, 교도사단 - 舊탕성즈군을 개편
- 제36군(초우레이瘳磊) : 제1사단, 제2사단, 제3사단 - 舊탕성즈군을 개편
- 제43군(리치李柒) : 제1사단, 제2사단, 제3사단, 제4사단, 신편 제5사단, 교도사단 - 구이저우군
- 제44군(저우펑전邹鹏振) : 제1사단, 제2사단, 제3사단 - 후난군
- 직할부대 : 독립 제2사단, 독립 제5사단, 독립 제6사단, 독립 제8사단, 독립 제9사단, 독립 제17사단
제8로군(광시성, 광둥성 수비부대) 총사령관 리지선李济深 5개 군 21개 사단 14만명
- 제4군(천지탕陳濟棠) : 제11사단, 제12사단, 제25사단 - 광둥군
- 제5군(쑤진탕徐景唐) : 제13사단, 제15사단, 제16사단, 제18사단 - 광둥군
- 제11군(천밍수陈铭枢) : 제10사단, 제24사단, 제25사단, 신편 제6사단, 보충사단 - 광둥군
- 제15군(황사오홍黃紹竑) : 제43사단, 제44사단, 제45사단, 보충사단, 교도사단 - 광시군
- 제16군(판쉬성范石生) : 제46사단, 제47사단, 제48사단, 교도사단 - 윈난군, 후난군
해군총사령관 : 양수좡(楊樹莊)
제1함대(함대 사령관 진지량陳季良) : 방호 순양함 2척(하이융海容, 하이초우海籌), 포함 3척, 수송함 3척, 소형 포정(100톤 미만) 4척
제2함대(함대 사령관 진샤오콴陳紹寛) : 포함 7척, 강상용 포함 5척, 소형 포정 3척
연습함대(함대 사령관 천쑨용陳訓泳) : 연습함 3척(응서應瑞, 통제通濟, 정안靖安)
어뢰유격대(함대 사령관 청위팅曾以鼎) : 구축함 2척, 어뢰정 8척
광둥함대(함대 사령관 천체陳策) : 수송함 1척, 포함 2척, 강상용 소함정 60여척
북벌군의 총병력은 4개 집단군과 제8로군 등 77개 군 217개 사단 113만명에 달하였다. 그 중에서 실제로 북방으로 출동한 부대는 일부에 지나지 않았으나 장쑤성과 허난성, 산시성 일대에는 청천백일기를 휘날리며 각지에서 모여든 군대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또한 직접 북벌군에 참여하지 않은 쓰촨성과 윈난성, 구이저우 성 등 서부 지역의 많은 군벌들 역시 스스로 국민정부에 복종을 선언하였다. 장제스는 공격 제대로 병력을 배치하는 한편, 상하이의 은행들과 기업가들을 압박하여 막대한 군비를 "상납" 받았다.
작전방침은 다음과 같았다. 장제스의 제1집단군이 진푸철도를 따라서 산둥성으로 북상하고, 펑위샹의 제2집단군은 허난성에서 출동하여 징한철도를 따라서 산둥성과 즈리성으로 진군한다. 옌시산의 제3집단군도 주력을 징한철도로 투입하여 펑위샹과 연합하는 한편, 일부 부대로 징쑤철도를 따라서 서진하여 베이징으로 진군한다. 리쭝런의 제4집단군은 징한철도를 따라서 우한에서 북상하여 펑위샹, 옌시산을 원조한다.
발등에 불 떨어진 격이 된 장쭤린은 급히 주요 지휘관들을 모여서 회의를 개최하고 북벌군을 막을 대책을 마련하였다. 그의 계획은 장쭝창과 쑨촨팡으로 하여금 북벌군의 주력인 장제스의 북상을 저지하는 동안 주력 부대를 펑위샹, 옌시산 방면에 투입하여 둘을 분단한 후 하나씩 각개격파한다는 것이었다.
1928년 4월 7일 장제스의 총진군 명령이 내려졌다. 그는 이번의 공격으로 완전히 끝장을 볼 생각이었다. 열강들에 대해서는 북벌군은 외국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것이라고 약속하는 한편, 장쭤린에게 어떠한 원조도 제공하지 말 것을 엄중히 요구하였다. 같은 날 펑위샹, 옌시산도 전군에 출동 명령을 내렸다. 장쭤린 또한 안국군 최강부대인 장쉐량의 제3, 제4방면군과 저위푸(褚玉璞)의 제7방면군을 허난성과 산시성 방면으로 출동시켰다. 전 전선에 걸쳐서 치열한 격전이 시작되면서 한동안 소강 상태였던 중국 대륙은 다시 피바람이 불고 있었다. 천하의 패권을 놓고 북벌군과 장쭤린이 벌이는 최대 최후의 싸움이 막 시작되려는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