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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 전쟁과 인물, 사건으로 보는 중국 현대사 > 50화, 관동군, 만주 지배를 꿈꾸다/blog.naver.com/atena

* 장쭤린 폭사의 전모

황고툰 사변이 일어나기 몇시간 전이다. 황고툰 역에서 펑톈(지금의 선양) 쪽으로 수백 미터 가다보면 산둥차오(三洞桥)라는 육교가 있다. 이곳은 징펑 철도(베이징 ↔ 펑톈)와 남만주 철도가 교차하는 지점으로 1905년 12월 22일 만주선후조약(満州善後条約)이 체결된 이래 관동군의 관할 구역이었다.

아직 해가 뜨기 전의 캄캄한 어둠 속에서 한 무리의 병사들이 땀을 흘리면서 부지런히 뭔가를 작업하고 있었다. 이들은 펑톈 독립수비대 제4중대와 조선 주차군 소속 가메야먀 공병대의 공병들이었다. 병사들은 후지이 사도우(桐原貞寿) 중위의 지휘 아래 철로에 폭탄을 설치하였다. 폭탄의 위력은 무려 600kg에 달하였다. 폭탄의 설치가 끝난 다음, 주변에 두 구의 중국인 시체를 아무렇게나 던져 놓았다. 이들은 아편에 중독된 부랑자들로 많은 돈을 준다는 말을 듣고 왔다가 살해된 것이다. 

6월 3일 새벽 5시. 장쭤린의 전용 열차는 황고툰 역에 잠시 멈춘 후 다시 출발하였다. 조금만 더 가면 그의 수도인 펑톈이었다. 심복인 우쥔셩이 장쭤린에게 말했다. "날이 춥습니다. 옷을 더 입으십시오." "뭘, 곧 도착할건데" 그 순간이었다. 열차가 조금씩 속도를 올리면서 삼둥차오를 막 통과하는 순간 요란한 폭음과 함께 대폭발이 일어났다. 폭탄은 장쭤린이  탄 차량과 식당차량 중간에서 폭발하였다. 10mm 두께의 두꺼운 철판을 두른 장갑열차도 바로 아래에서 터지는 강력한 폭탄에는 무용지물이었다. 장쭤린이 탄 차량은 10미터나 치솟았다가 떨어졌다.

땅에 떨어진 차체는 바퀴와 바닥만 온전할 뿐 원형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부서졌다. 앞뒤의 차량 역시 폭발과 화재로 고철이 되었고 삼둥차오의 철교도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폭탄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하였다. 우쥔셩은 머리에 파편을 맞아 즉사했다. 죽은 자가 20명, 부상자가 53명에 달했다. 장쭤린은 아직 숨은 붙어있었지만 생명이 위독했다. 즉시 병원으로 옮겨졌다. 하지만 상처가 너무 깊었기에 오전 9시 결국 절명하였다. 나이 54세. 난세에 태어나 파란만장하게 살면서 천하를 호령했던 풍운아의 마지막이었다. 동시에 앞으로 중국에 불어닥칠 더 큰 폭풍을 알리는 것이기도 하였다.

사건 발생 직후 불타는 차량의 모습.

다음날 아침 우치다 고로우(内田五郎) 펑톈 영사를 비롯한 일본과 펑톈 경찰이 합동으로 현장 조사에 나섰다. 일본측은 현장에서 발견된 중국인 시체를 "남군(북벌군)의 편의대(便衣隊, 게릴라)"라고 주장하면서 장제스가 사주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펑톈측은 사고가 발생한 지점이 일본군이 관할하는 남만주철도의 교차점이며 따라서 일본인의 소행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편의대가 폭탄을 철로로 던져서 터진 것이라는 우치다의 주장에 대해서도 폭탄의 위력으로 보아서 절대 손으로 던질만한 것이 아니라고 반박하였다. 실제로 일본측 역시 현장을 확인할 결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폭탄을 던져서 장쭤린의 열차에 정확하게 맞춘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철로에 폭탄을 설치한 후 전기선을 조작하여 폭파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매우 치밀한 사전 준비가 있었다는 얘기이다. 

폭탄으로 휴지조각처럼 박살난 차제.
사건 다음날 현장을 조사 중인 중일 합동 조사단. 철교가 완전히 내려앉아 있다. 사용된 폭탄의 위력이 어느정도였는지 보여준다.

하지만 어떻게든 책임을 면피해야 했던 우치다는 펑톈측을 협박하면서 남군 편의대의 짓으로 결론내리자고 우겼지만 펑톈측은 끝까지 거부하였다. 또한 펑톈측은 별도로 러시아인 전문가들을 보내어 조사하였는데, 현장에 대량의 폭탄이 정교하게 설치되어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일본이 남군 편의대라고 주장하는 시체 역시 몸에 주사 바늘 자국이 많은 것으로 보아서 아편 중독자이며 도저히 군인이라고 볼 수 없었다. 아편쟁이 두 사람이 철로에 정교한 폭탄을 설치하고 열차가 지나가는 순간에 맞추어 한치의 오차 없이 터뜨릴 수 있다는 말인가.

일본 국내도 발칵 뒤집어졌다. 게다가 "사건의 주모자는 관동군"이라는 의혹이 일파만파로 퍼져나가면서 정치권의 비난은 물론이고 당장 국제 문제로 비화될 판이었다. 다나카 내각은 부랴부랴 현장으로 조사팀을 급파하였고 이들 또한 금새 관동군이 깊숙히 개입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하지만 까발려서 좋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서로 쉬쉬하면서 입을 다물었다. 중국으로서는 심증은 있지만 결정적인 증거를 찾지 못한 채 사건의 전모는 결국 흐지부지되었다. 

그로부터 약 20년 뒤, 도쿄전범재판에서 육군 예비역 소장이었던 다나카 류키치(田中隆吉)라는 장군이 법정의 증언대에 섰다. 그는 1930년대에 대중국 특무기관에서 활동하면서 화북 일대에서 온갖 첩보와 모략을 주도했던 것으로 악명을 떨쳤다. 1932년 1월에 일어난 제1차 상하이 사변 또한 그의 작품이다. 하지만 출세욕만 있을 뿐 소인배에 지나지 않은 인물이기도 했다. 연합군의 처벌이 두려웠던 다나카는 혼자서만 살아남을 요량으로 재판관들 앞에서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술술 불었다. 도조 히데키가 A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처형되는데는 그의 증언이 결정적이었다. 또한 개인적으로 앙숙이었던 무토 아키라(武藤章) 중장은 다나카의 증언으로 유죄가 선고되자 "귀신이 되어서 저주해주겠다"라고 악담을 퍼붓는 등 웃지 못할 희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다나카가 폭로한 것 중에는 장쭤린 폭사의 전모도 있었다. 

"장쭤린의 죽음은 당시 관동군 고급 참모였던 고모토 다이사쿠(河本大作) 대좌(대령)가 주도한 것이다. 그는 장쭤린을 제거하고 장쉐량을 내세워 만주를 장악하려 하였다. 열차를 폭파한 것은 조선 경성에 주둔한 제20연대 소속 일부 장교들과 공병들이었다." 

장쭤린 폭사의 배후에 관동군이 있었음을 일본 지도부급 인사가 처음으로 인정한 것이다. 또한 고모토는 펑톈군 병사들이 격분하여 멋대로 날뛰거나 일본인을 공격할 경우 이를 빌미삼아 관동군을 출동시켜 만주 전체를 장악하겠다는 계획까지 세워 두고 있었지만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기에 행동에 옮기지 못했다고 하였다. 그의 폭로는 중국과 일본은 물론,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도쿄 전범재판에서 증언 중인 다나카. 동료들의 범죄를 까발린 대가로 자신은 불기소 처분되었으나 양심에 찔렸는지 말년에는 "무토의 귀신이 보인다"라면서 여러 차례 자살 시도를 하는 등 정신 이상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1972년에 78살의 나이로 죽었다.
* 관동군과 장쭤린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된 고모토 다이사쿠는 과연 누구인가. 그는 일본육군유년학교와 육군사관학교를 거쳐서 러일전쟁에 참전하였고 육군대학을 졸업한 전형적인 엘리트 군인이었다. 1926년 4월 관동군 고급 참모에 임명되어 만주로 왔다. 고급 참모란 관동군 사령부의 직책 중 하나로, 작전, 정보, 후방 등 여러 참모들 중에서도 선임급 참모이며 관동군 내에서는 중장급의 사령관과 소장급의 참모장, 참모부장 다음의 서열 4위였다.

원래 관동군은 일본군의 편제에서 일개 변방군에 지나지 않고 예하 병력 또한 1개 사단 및 독립 수비대(6개 대대) 등 1만 4천여명에 불과하였다. 조선 주차군이 2개 사단(제19사단, 제20사단)을 고정 배치하고 병력 또한 평시 편제(약 5천명~1만명)이 아니라 준 전시 편제(1만 5천명)를 유지한 반면, 관동군은 만주 사변 이전만 해도 고정 사단이 없고 본국의 여러 부대가 2년 단위로 돌아가면서 파견 근무하는 식이었다. 인원과 장비 또한 최소한의 수준을 유지하였다. 관동군의 임무가 적과의 전투보다는 철도 경비라는 지엽적인 임무였다면 조선군이야말로 유사시 대륙으로 즉각 출동하기 위한 실전 부대이자 신속 대응군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치적인 파워는 조선군보다 오히려 관동군이 더 컸다. 관동군은 군부 핵심층에서 거대한 파벌을 형성하여 막강한 발언권을 발휘하였다. 관동군의 뒤에는 남만주의 철도사업을 담당하고 있는 남만주철도 주식회사, 이른바 만철(滿鐵)이 있었다. 만철은 단순한 철도 회사가 아니라 대륙 침략을 위한 첨병이자 식민지 정부로서 일본판 "동인도 회사"인 셈이었으나 실질적인 경영권은 본국 정부가 아니라 관동군이 쥐고 있었다. 만철의 운영은 거대한 이권이 좌우하는 일이었기에 관동군 장교들은 본연의 업무보다 오히려 만철과 결탁하여 이런저런 이권에 끼어들어 한몫 잡는데 혈안이 되었다. 만철에서 나오는 막대한 자금은 일본의 정계와 군부로 흘러들어갔다. 만주는 관동군의 "왕국"이나 다름없었다. 여러 일본군 중에서도 관동군이 유독 타락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만주사변 당시의 관동군 병사들. 관동군은 조선군과 지나주둔군(베이징,톈진 경비대), 타이완군과 함께 4대 변방군 중의 하나로서 일본군 전체로 본다면 일개 부대에 지나지 않았고 규모 또한 2개 사단으로 구성된 조선군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만철의 막대한 자금을 앞세워 정재계와 군부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만주는 관동군의 왕국이다. 또한 군 수뇌부 중에는 관동군 사령관과 참모를 역임한 자들이 많았기에 서로 끈끈한 인간 관계를 유지하였다. 정부와 군의 묵인 속에서 더욱 기고만장해진 관동군은 무모한 행동을 반복하면서 일본을 전쟁의 나락으로 빠뜨렸고 결국 이로 인하여 패망하게 된다.

당시 관동군과 장쭤린의 관계란 서로 불가분이면서도 어느 한가지로 간단하게 말할 수 없는 실로 복잡 미묘한 것이었다. 소위 "만몽의 특수 권리"를 주장하는 일본은 오랫동안 장쭤린 정권에게 아낌없이 투자하였다. 장쭤린 정권을 내세워서 만주은 물론 동몽골(러허성, 차하르성)까지 지배하겠다는 것이 일본의 속셈이었다. 만약 장쭤린이 일본의 지시에 고분고분하게 따르는 꼭두각시였다면 문제가 없었겠지만 그는 오히려 야심만만하면서 걸출한 지도자였다. 뒷날 만주국의 허수아비 황제 푸이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악명 높은 크로아티아의 괴뢰 수장이자 히틀러의 앞잡이 노릇을 했던 안테 파벨리치(Ante Pavelić) 따위에 비할 인물이 아니었다. 또한 장쭤린은 일본에 의해 그 자리에 옹립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차지하였다. 그런 그가 일본의 손바닥 위에서 그저 시키는 대로 춤 출 리 없었다.

갈등의 직접적인 원인은 철도였다. 만주에서 철도는 크게 남만주의 남만주 철도와 북만주의 중둥 철도, 그리고 베이징과 펑톈을 연결하는 징펑철도로 나뉘었다. 그 중에서 남만주 철도와 중둥 철도는 각각 일본과 소련의 수중에 있었다. 청나라 말기 영국에서 차관을 빌려서 1912년에 개통한 847km의 징펑 철도만이 중국의 국유 철도였다. 일본은 남만주 철도를 조선과 연결하는 한편, 꾸준히 지선을 부설하여 만주 구석구석까지 영향력 확대에 나섰다. 덕분에 동3성은 중국에서도 가장 철도가 조밀하였고 근대화의 속도 또한 빨랐다. 장쭤린의 입장에서는 결코 반길만한 일이 아니었다. 만철의 세력이 확대될수록 자신에 대한 통제 또한 강화된다는 의미였기 때문이었다. 장쭤린은 자신의 군대를 수송하려 해도 만철을 이용할 수 밖에 없었지만 그때마다 반드시 일본의 허가를 받아야 했고 펑톈군 병사들은 무장해제된 채 일본군의 엄중한 감시를 받아야 했다. 무기와 장비는 따로 수송하는 식이었다. 그렇다고 일본은 장쭤린이 만철의 경영에 관여하거나 지분을 차지하는 것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았다. 장쭤린 입장에서는 일본의 총칼 앞에서 완전히 발가벗겨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장쭤린이 아니라 어떤 지도자라도 자신의 생사여탈권이 남의 손아귀에 있는 것을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마적 출신의 장쭤린은 집권 초기에만 해도 정치적 기반이 취약하고 경험도 부족했기에 일본의 비위 맞추기에 급급하였고 감히 거역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또한 그의 관심사는 오직 중앙으로 진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권력이 점점 커지고 지반 또한 강화되면서 슬슬 일본의 통제에서 벗어나 자립을 꿈꾸었다. 1924년 5월 7일 펑톈 성장 왕융장을 위원장으로 동북교통위원회를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만철에 대항하는 철도의 건설에 나섰다. 1926년 5월 시펑(西豊)과 카이위안(开原)을 연결하는 63.7km 길이의 카이펑(开豊) 철도의 개통을 시작으로 동북 각지에는 장쭤린 정권이 직접 투자하거나 민간에서 출자한 철도들이 꾸준히 부설되었다. 1921년부터 1927년까지 약 6년 동안 장쭤린의 주도 아래 동북에 건설된 철도는 903km에 달했다. 같은 시기 동북을 제외한 중국 전체에서 건설된 철도가 고작 485km에 불과했으니 장쭤린이 철도에 어느 정도 목을 매었는지 보여준다.

장쭤린의 철도 자립화는 그가 죽은 뒤 장쉐량에게 계승되었다. 장쉐량은 1930년 4월 동북교통위원회에 <동북철도망건설계획>의 제정을 지시하였다. 여기에는 향후 10년 내에 8천km에 달하는 철도와 일본의 다롄항에 대항하는 대규모 군항을 후루다오(葫蘆島)에 건설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실로 전례없는 장대한 계획이었다. 만약 계획대로만 되었다면 동북에서 일본의 힘은 그야말로 반감되었을 것이며 동북의 주권 또한 중국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중국인들은 이런 점을 높이 사서 장쭤린-장쉐량 정권이 비록 겉으로는 친일을 했지만 실제로는 중국 민족의 자립을 꾀하였으며 이 때문에 일본의 질투와 미움을 받아서 결국에는 목숨까지 잃었다고 여기고 있다. 장쭤린 평전을 쓴 쉬처 교수는 "장쭤린은 동북의 주권을 지키려고 일본에 대항하였고 어느 한가지도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비록 봉건 군벌이지만 애국심과 민족의 기개를 가진 인물이었다"라고 주장한다.

냉철하게 말하여 이러한 주장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또한 이들의 불우한 말로에 대한 인간적인 동정심과 중국 특유의 "민족주의"라는 관념적인 시각에서 바라본 것일 뿐, 당시의 상황이나 장쭤린 정권의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기도 하다. 장쭤린이 건설한 철도는 자금과 기술이 부족하고 시설이 형편없어 수송 능력에 한계가 있었고 철도들이 서로 연결되지 못하여 만철의 지선에 불과할 뿐 만철과 대등하게 경쟁하기에는 어림도 없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변방의 일개 군벌이 일본의 상대가 될 리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실제로 만철에서는 장쭤린의 철도 건설이 그다지 위협이 되거나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은 사전 협의 없이 동북 정부가 직접 철도를 건설하는 것은 1905년 청조와 일본이 체결한 <동삼성사의조약(東三省事宜条約)>의 위반이라고 하면서도 그렇다고 강력하게 압박을 가한 것도 아니었다. 만약 일본이 마음만 먹는다면 장쭤린의 손발을 묶는 것은 아주 쉬웠을 것이다. 장쭤린 또한 자신의 힘으로 일본을 쫓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며 만약 그런 시도를 했을 때 뒤따를 리스크를 모를 리 없었다. 장쭤린-장쉐량의 배일 정책이 황고툰 사변이나 이후의 만주 사변으로 이어졌다는 것은 실상 관동군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과장한 것일 뿐, 실제와는 거리가 있다는 얘기이다.

장쭤린은 일본이 시키는대로 따르는 꼭두각시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사사건건 대립하여 일본을 필요 이상으로 자극할 생각 또한 없었다. 장쭤린은 일본에 협력하면서도 때로는 "노우"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가 "노우"라고 말할 때에는 일본이 자신의 이익을 침해했을 때였다. 장쭤린이 일본의 권익을 침해하면 일본이 가만히 있을 리 없듯, 반대로 일본이 그의 이익을 침해했을 때 장쭤린이 반발하는 것 또한 당연하였다. 장쭤린과 일본의 협력 관계란 지극히 이해 타산적인 것이며 서로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바꾸어 말하면 서로가 일정한 선을 지키기만 한다면 갈등의 여지는 없는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장쭤린이 그저 눈앞의 이익을 좇아서 카멜레온마냥 변신을 거듭할 뿐 애국심이나 민족 의식 따위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소인배였을까. 이 또한 성급한 판단이리라. 장쭤린에게는 다양한 면이 있었으며 그의 뒤를 이은 장쉐량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정치가이기 때문이다. 현실 정치란 결코 도덕이나 이념의 잣대 만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 법이다.

작년에 JTBC에서 방영했던 <차이나는 도올>에서 김용옥 선생은 장쉐량을 "항일 민족주의자"라면서 극찬을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감상적인 생각일 뿐이며 당시의 상황과 현실 정치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 그저 중국인들의 관념적인 생각을 무비판적으로 답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 두개의 해는 없는 법

장쭤린 암살은 고모토 다이사쿠와 그에게 동조한 관동군의 몇몇 장교들이 독단적으로 저지른 사건이며 총리인 다나카는 물론이고 본국 정부나 쇼와 천황, 심지어 군부와도 무관한 일이라는 것이 현재까지의 통념이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다나카 류키치의 증언과 고모토가 남긴 회고록에 근거한 것이다. 하지만 다나카의 주장 또한 어디까지나 "고모토에게 들은 얘기"라는 것이고 사건에 직접 관여했거나 모든 전모를 상세하게 알았던 것은 아니다.

정작 고모토는 황고툰 사건의 책임을 지고 예비역으로 편입된 이후에도 중국에 있다가 국공내전 중에 잔류 일본군을 이끌고 공산군과 싸우다 포로가 되었다. 10년 형을 선고받고 산시성 타이위안 수용소에서 복역하던 도중 1955년 8월 25일 사망하였다. 그는 중공 치하에서 전범으로 처벌받은 몇 안되는 일본군 고급 장교 중의 한 사람이었다. 다나카가 직접 들었다는 고모토의 "고백"이란 것은 반쯤은 자신의 공명심과 무용담의 자랑이었을 것이므로 액면 그대로 신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고모토를 제외한 다른 관련자들은 철저하게 입을 다물거나 종적을 감추었다.
때 쑨원의 군사 고문이었고 북벌전쟁 중에는 장제스를 따라서 참관 무관으로 잠시 종군한 적도 있었던 사사키 도이치 중장(佐々木 到一, 당시 중좌)은 자신 또한 황고툰 사건에 관여했다고 하면서도 "이 사건의 진상을 글자로 옮기는 일은 영원히 불가능하다"라고 말하였는데 만주에서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에서 유형 생활을 하다가 푸이와 함께 푸순 수용소로 옮겨진 얼마 뒤 뇌출혈로 사망하였다. 진상을 낱낱이 알만한 사람들은 죽음과 함께 영원히 무덤 속으로 가져가 버린 셈이다.


과연 어디까지 진실일까. 고모토는 왜 장쭤린을 암살했는가. 과연 황고툰 사건은 고모토 한 사람의 작품인가. 일본 군부는 물론이고 관동군 내에서도 고작 서열 4위에 불과한 자가 그렇게 큰 일을 독단적으로 저지를 수 있다는 말인가. 쇼와 천황이나 다나카 기이치는 정녕 이 사건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으며 사전에 관여하지 않았던가.
여기에 대하여 누구도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일본의 권위 있는 쇼와사 연구가이자 논픽션 작가로서 <쇼와 육군昭和陸軍の硏究>을 쓴 호사카 마사카즈(保阪正康)는 황고툰 사건의 진상을 알아내려고 많은 노력을 했지만 결국에는 실패하였다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관동군이 저지른 수많은 작품에서도 장쭤린 폭사만큼 지금까지도 철저하게 베일에 가리어 있는 것도 없으리라.

장쭤린은 자신이 
암살되리라는 것을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을까. 매우 기민한데다 타고난 정치적 감각을 지닌 그가 자신의 위험을 전혀 읽지 못했을리 없다. 실제로 그는 베이징에서 펑톈으로 돌아오기 전부터 암살의 음모가 있다는 얘기를 풍문으로 듣고 있었다. 장쭤린은 반신반의하면서도 나름대로는 돌발적인 상황에 대비하여 경계를 엄중히 하였고 출발 시간을 일부로 늦추기도 하였다. 그러나 펑톈 헌병 사령관이었던 지언밍(齊恩銘)이 "산둥차오 주변에서 일본군이 행인들의 통행을 막고 공사를 하고 있는 것이 낌새가 수상하니 다른 길로 오는 것이 좋겠다"라고 건의하자 대수롭지 않게 한귀로 흘려 버렸다.

장쭤린으로서는 비록 긴장이 고조되고 위험은 있지만 설마 일본이 정말로 행동으로 옮기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일본과 '다소'의 갈등은 있었어도 그렇게 심각하지 않았다는 얘기이다. 다나카 내각의 입장은 원칙적으로 장쭤린 정권을 용인하고 협력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이었다. 만약 장쭤린 정권이 무너질 경우 자칫 동북의 안정이 흔들리면서 일본으로서도 불확실성이 커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장쭤린 또한 장제스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도움이 필요했기에 결코 노골적인 배일을 할 생각은 없었다. 이것은 각자의 입장에서 나름대로 합리적인 판단과 경험에 근거했다고 할 수 있다.

장쭤린의 유일한 오판은 관동군이 얼마나 막나갈 수 있는 집단인지 이해하지 못한 것이지만, 그보다도 다나카의 태도가 불분명하였다. 그는
1927년 6월에 열린 동방 회의에서 "만몽(만주, 몽골)에 대한 지배를 더욱 강화해야 한다"라고 하면서 장쭤린 정권을 원조하되 여차하면 그를 다른 사람으로 교체하는 방안도 배제하지 않겠다고 한 바 있었다. 이것이 반드시 장쭤린을 없애겠다는 의미는 아니었지만 고모토와 같은 일부 모험주의자들이 오판할 여지를 준 것은 틀림없다. 

또한 관동군은 장쭤린이 친일이냐, 반일이냐를 떠나서 그의
존재 자체를 거추장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장쭤린이 관동군의 허락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관동군 역시 그의 허락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점이다. 1927년 7월 만철 사장으로 부임한 야마모토 조타로(山本條太郞)은 이른바 "만몽 5철도"라 하여 남만주의 주요 도시를 연결하는 대규모 철도 확장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장쭤린을 무시한 채 만철이 입맛대로 강행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따라서 그는 장쭤린을 어르고 달래는 식으로 지리한 협상을 한 끝에 1928년 5월 15일에야 비로소 승락을 얻을 수 있었다.

말하자면 동북에는 장쭤린과 관동군 두 주인이 있었던 셈이지만 하늘에 두개의 해가 없듯, 동북 또한 주인이 둘 있을 수 없다는 점이 장쭤린과 관동군의 본질적인 모순이었다.
만철의 세력이 커지면서 관동군의 야심 또한 커졌고 장쭤린을 등에 업기보다는 아예 만주와 동몽골을 조선과 타이완처럼 직할지로 삼아서 자신들이 직접 지배하겠다는 야욕을 품었다. 장쭤린이 일본에게 철저하게 순종하거나 관동군이 야심을 꺾고 본연의 역할에만 충실하겠다면 몰라도 어느 쪽도 그럴 생각이 없다는 점에서 결국 충돌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 만주사변으로 가는 길

황고툰 사변이 그저 광기어린 군인 한 사람의 작품이건, 배후에 일본 수뇌부의 직접적인 개입이나 묵인이 있었건, 이를 떠나서 결과적으로 일본에게는 이득이 되었을까. 먼저 결론을 얘기한다면 전혀 그렇지 못하였다.

근 일년 가까이 온갖 공을 들인 끝에 장쭤린이 죽기 직전에야 간신히 밀약을 맺은 "만몽 5철도"의 계획은 하루 아침에 허공에 붕 뜨게 되었다. 원래 합의 내용은 정식 비준 뒤 3개월 후 착공을 시작한다는 것이었으나 비준을 눈앞에 둔 상태에서 장쭤린이 죽자 백지화되어 장쉐량을 상대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판이었다. 그러나 동북의 민심은 극도로 악화되었고 각지에서 철도 교섭에 반대하는 배일 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나면서 일본은 매우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장쉐량 또한 일본의 권익을 보장한다는 원론적인 말만 반복하면서 "민중의 반대가 크다"라는 이유로 명확한 답변은 회피하는 식이었다.

일본의 입장에서 만몽 5철도의 건설은 막대한 권익이 걸린 문제였으므로 물러날 수 없는 처지였다. 펑톈 총영사로서 동북 정권과의 교섭을 책임지고 있던 하야시 규지로(林久治郎)는 장쉐량더러 "계약 이행에 성의를 보이지 않는다면 일본과의 관계는 악화될 것이며 그 책임은 모두 당신에게 있다"고 노골적인 협박조차 서슴치 않았다. 그는 어떻게든 장쉐량을 굴복시키려 했으나 장쉐량은 민심이 극도로 좋지 못한데다 동북 역치의 선언 이후 외국과의 교섭권은 오직 중앙 정부에게 있으니 지방 정부의 수장인 자신이 멋대로 결정할 수 없다며 난색을 드러냈다. 교섭을 하려면 자기가 아니라 장제스를 상대로 하라는 것이었다. 협상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다나카 내각이 황고툰 사변의 책임을 지고 총사퇴하면서 결국 흐지부지되었고 일본 정계의 복잡한 사정으로 만주사변이 일어날 때까지 착공은 커녕 결론조차 내지 못하였다. 만철의 입장에서 본다면 황고툰 사건은 그야말로 다된 밥에 코 빠뜨린 격이었다.

또 하나는 광기어린 "쇼와 군벌"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다는 것이다.
다나카는 사건 직후 진상 조사와 함께 고모토를 소환하여 경위를 추궁하였다. 또한 메이지 시대 이래의 정치 원로이자 군부와는 대립각을 세우고 있던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는 다나카를 직접 불러서 "이 문제를 제대로 조사하여 만약 범인이 일본인이라면 반드시 엄벌에 처해야 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나카는 어영부영 시간만 보내다가 결국에는 고모토 한사람을 처벌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하지만 그 처벌이라는 것도 군법에 따라 엄중히 형벌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군에서 쫓아내는 것이 전부였다. 천황에게는 "장쭤린 폭살사건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지만 경비를 소홀히 한 책임"이라고 보고하였다. 면죄부를 부여한 셈이다. 그 후 만철의 이사로 영전되어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다.

또한 고모토의 상관인 관동군 사령관 무라오카 죠타로(村岡長太郎) 중장, 참모장 미야케 미쓰노리(三宅光治) 소장에게는 아무런 책임도 묻지 않았다. 조사를 맡았던 시라오카 육군 대신은 일년이나 지난 뒤인 1929년 5월 20일 보고서를 제출하면서 "이 사건은 육군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야말로 상식 밖의 처분이었기에 친중파였던 마쓰이 이와네(松井石根) 소장을 비롯하여 군부 일각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사건을 적당히 덮어버린 다나카는 물론이고 처음에 강경하게 책임론을 제기했던 사이온지조차 이 때에 오면 "육군을 자극해서는 안된다"라고 하면서 그 이유를 묻는 내대신 마키노 노부아키(牧野伸顕)에게는 "나는 겁쟁이라서 그렇다"라고 대답하였다.

일본 지도부가 어이없이 꼬리를 내린 것에 대하여, 천황 히로히토가 패전 뒤 구술 회고록으로 남긴 <쇼와 천황 독백론>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들리는 바에 따르면 만약 군법 회의를 열어서 신문을 한다면 고모토는 일본의 모략을 전부 폭로할 것이라고 하여 군법회의는 취소키로 했다고 한다." 그 말대로라면 일개 대좌의 협박에 국가가 굴복했다는 것을 자인한 꼴이다. 사면초가에 몰린 꼴이 된
다나카는 결국 자신이 황고툰 사변의 모든 책임을 짊어지는 것으로 1929년 7월 2일 총리 자리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장쭤린을 계승한 장쉐량 정권이 동북 역치를 선택하였고 산둥 출병 또한 성과없이 물러나는 등 대중 정책이 완전히 실패로 끝나자 군부 소장파들의 비난이 쏟아지면서 더 이상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나카는 극도의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사임한 지 약 석달 여 뒤인 9월 28일 협심증으로 급사하였다.

호사카 마사야스는 <쇼와 육군>에서 "일본군은 허술하게 쌓아올린 목재 더미"라고 말하면서 국가를 패망의 길로 내몰면서 천황조차 브레이크를 걸 수 없었던 군인들의 독선을 비판한다. 그 시발점이 다름 아닌 황고툰 사변이라 할 수 있다. 다나카를 비롯한 일본 지도부는 고모토에게 면죄부를 부여함으로서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을 졸업한 엘리트 군인은 뭘 해도 처벌받지 않는다는 선례를 보여주었다. 이것은 스스로 군 통수권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관동군을 비롯한 야심만만한 군부의 소장파 장교들은 한층 기고만장해졌고 고모토를 영웅처럼 떠받들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인물이 "육군의 이단아"라고 불리던 희대의 책략가 이시와라 간지였다. 관동군의 새로운 참모로 부임한 그는 고모토조차 뛰어넘겠다는 요량으로 만주를 한방에 차지하기 위한 음모에 착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