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풍운의 동북
오늘날 중국 현대사에서 마오쩌둥과 함께 가장 "신화적"으로 포장된 인물이 장쉐량이다. 그가 시안 사변에서 장제스에게 내전의 중지와 항일 구국을 호소했다고 하지만 막상 자신은 일본에 맞서기는 커녕 만주 사변과 러허 사변에서는 겁에 질린 나머지 싸우기를 포기하였다. 또한 입으로는 같은 중국인끼리 싸워서는 안된다고 하면서도 중원대전 중에는 측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군을 이끌고 중원으로 출병을 강행함으로서 동북을 군사적 공백지로 만들었다. 관동군이 만주 사변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도 장쉐량의 무리한 야심과 오판 덕분이었다. 만철이 창다 철도(長大鐵道)와 지후이 철도(吉會鐵道)의 연장을 강행하면서 동북 각지에서 대규모 반일 시위가 일어나자 "배후에 공산당이 있을 지 모른다"라는 명목으로 엄중히 탄압하였다. 일본을 뼛속까지 두려워했던 그는 일관되게 저자세를 유지하였고 반일 운동을 금지했으며 단 한번도 항일을 한 적은 없지만 중국인들에게는 "항일 영웅"으로 칭송받는 점이 아이러니이다.
실제로는 아무런 공헌도 하지 않은 장쉐량이 오늘날 중국 민족의 영웅이 된 것은 "비운의 귀공자"라는 인간적인 동정심, 무엇보다도 시안 사변 덕분이라 할 수 있다. 1936년 12월 12일 장쉐량이 쿠테타를 일으켜 화청즈에 있던 장제스를 연금한 사건은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 사건은 일본의 침략에 격앙되어 있던 대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으며 거국적인 항일 연합 전선의 결성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공산당 토벌이 중단되면서 궁벽한 벽촌에 갖힌 채 파멸의 위기에 내몰려 있던 공산당은 그야말로 기사 회생하였고 합법적인 단체로 인정받았다. 마오쩌둥 지도부는 기민하게도 정세 반전의 기회로 적극 활용하였고 마치 자신들이 항일의 선봉대인양 교묘하게 선전하여 국내외의 지지를 얻어냄으로서 10여년 뒤에는 중국 대륙을 차지하게 된다.
중국에서는 시안 사변을 "항일투쟁의 전환점"으로 보지만 엄밀히 말하여 장제스 정권이 "타협"에서 "항전"으로 바꾼 것은 다양한 요인의 결과이지, 전후 상황을 쏙 빼놓은 채 마치 장쉐량 한 사람 때문에 하루 아침에 손바닥 뒤집듯 바뀌었다는 식의 기술은 지나친 단순화이자 정치적 평가에 지나지 않는다. 장쉐량이 시안 사변을 일으킨 것 또한 순수하게 항일을 위해서만도 아니었다. 어쨌거나 이 사건으로 그때까지 "싸우지 않는 장군"이라며 민중의 지탄을 받았던 그의 평가를 완전히 뒤집었다는 점이다.
중국인들에게 이른바 "젊은 원수(少帅)"라고 불리는 장쉐량은 장제스보다 14살 아래로 1901년 6월 3일 펑톈성(지금의 랴오닝성) 하이청(海城)에서 태어났다. 일설에 따르면 마적의 우두머리였던 장쭤린이 다른 마적단의 습격을 받아 만삭인 아내를 데리고 정신없이 달아나는 도중에 수레 위에서 장쉐량을 낳았다고 한다. 장성한 뒤에는 수려한 외모로 "중국의 4공자" 중 한 사람이자 사교계의 왕자로 명성을 떨치는 그였지만 어릴 때에는 체격도 작고 허약한 체질이었다.
동북의 주인이 된 장쭤린은 장남 장쉐량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을 요량으로 엄격하게 훈련시켰다. 1919년 3월 동3성 육군강무당(동북강무당)이 문을 열자 장쉐량은 포병과 1기 생으로 입교하였다. 1년 뒤 장쉐량이 졸업하자 장쭤린은 당장 경호부대의 여단장으로 임명하였고 반년 후에는 펑톈군 제3혼성여단장으로 승진시켰다. 장쉐량은 아버지의 후광을 등에 업고 승승장구하였다. 제2차 펑즈 전쟁에서는 펑톈군 최강부대인 제3군을 지휘하여 궈쑹링과 함께 산하이관을 돌파하여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925년 6월에는 장쭝창을 돕기 위하여 약 2천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화려한 국제 도시 상하이에 잠깐 주둔한 적이 있었는데 이 때 한 댄스 파티장에서 우연히 쑹메이링을 만났다는 얘기도 있다.
장쭤린은 장쉐량에게 항상 자신의 최정예 부대를 맡겼다. 최신 무기로 무장한 부대를 새로이 창설할 때마다 그 부대의 지휘는 반드시 장쉐량의 몫이었다. 구식 순방영과 토비를 재편하여 만든 다른 부대와 장쉐량의 부대는 전투력에서 하늘과 땅 차이였다. 1920년대 초반 장쭤린은 공군력의 확충을 위하여 동삼성 항공처와 동북항공학교를 설립하였는데 장쉐량에게 항공처장과 학교장을 겸임케 하였다. 펑톈군 유일의 기갑 대대 또한 장쉐량의 휘하에 있었다. 장쭤린으로서는 나름대로 아버지로서 온갖 애정을 쏟은 셈이었지만 뜻밖의 사건으로 부자의 관계에 금이 갔다. 1925년 12월 궈쑹링의 반란이었다. 궈쑹링은 장쉐량의 부사령관이면서 사제지간이자 의형제이기도 하였다. 톈진에 있었던 장쉐량은 궈쑹링의 반란을 막지도 못하고 설득하는데도 실패한 채 허둥지둥 도망쳐서 펑톈으로 돌아왔다. 격분한 장쭤린은 장쉐량을 불러서 "너도 그놈과 한패가 아니냐!"면서 호되게 야단을 쳤다.
궈쑹링은 결국 패하여 몰락하였지만 그 후로도 장쭤린과 장쉐량의 관계는 회복되지 못하였다. 일설에는 장쭤린이 죽을 때까지 두 사람은 서로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고 한다. 그 전에도 사교계를 누비면서 온갖 염문을 뿌리고 다녔던 장쉐량은 이 사건 이후 한층 난봉꾼이 되었고 아편에도 손을 대어 만주사변에 오면 아편 중독으로 주체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말년의 그는 젊은 시절을 회고하면서 "아편과 여인들 틈에서 허우적거렸다. 지금 내 나이 93세, 이렇게 오래 살 줄은 생각도 못했다. 쉰 살까지만 살아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라고 쓴웃음을 짓기도 하였다.
* 펑톈의 삼대 파벌
1991년 12월 10일 오랜 연금 생활에서 막 풀려난 장쉐량은 타이페이에서 NHK와 인터뷰를 하였다. 이 자리에서 그는 장쭤린 폭사와 관련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처음에는 아버지의 죽음을 알지 못하였다. 내 부하는 나에게 아버지가 부상을 입고 펑텐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전해 주었을 뿐이다. 게다가 나는 국민당의 북벌에 대비하여 베이징에 있었고 군을 이끌어야 했다. 따라서 당장 펑톈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하지만 부하가 만약 아버지의 죽음을 처음부터 알려주었다면 나는 즉시 돌아갔을 것이다."
그의 인터뷰대로라면 사건 직후에만 해도 장쉐량조차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는 얘기이다. 이것은 그가 어째서 신속하게 펑톈으로 귀환하지 않고 2주일이나 지체했는지 설명해 준다. 황고툰 사변이 일어났을 때 장쉐량은 롼저우(滦州)에서 양위팅 등과 함께 군대의 철수를 지휘하고 있었다. 장쭤린의 죽음은 극비였다. 만약 그가 급사했음이 알려질 경우 동북 전체가 극도의 혼란에 빠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펑톈성장 리우창청(劉尙淸)은 장쭤린의 명의로 "노원수는 병원에서 치료 중"이며 모든 업무는 장쉐량이 대신할 것이라고 공식 발표하였다. 그리고 장쉐량더러 펑톈으로 조속히 귀환할 것을 요청하였다.
장쉐량이 언제 아버지의 죽음을 알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펑톈으로 귀환하기 전에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는 큰 충격에 빠졌지만 그렇다고 서둘러 출발하지 않았다. 정세가 워낙 혼란스러운데다 일본의 속셈 또한 불분명하였고 자신의 앞날은 물론, 누가 동북의 새로운 주인이 될 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장쭤린 시절 동북에는 크게 세개의 파벌이 있었다. 하나는 "구파(舊派)"라 하여 장쭤린이 동3성 순열사가 되기 이전부터 함께 하였던 자들이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지린 독군 장쭤샹과 육군총장을 지낸 장징후이, 러허 도통 탕위린(汤玉麟), 만푸린, 장하이펑(張海鵬), 마좐산(马占山) 등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젊은 시절 장쭤린과 함께 마적질을 했거나 청말의 구식 군인, 관료 출신들이었다. 비록 역량은 부족했지만 장쭤린과 끈끈한 인간 관계를 유지하였고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하였다. 두번째는 펑톈군 총참모장 양위팅을 중심으로 하는 "사관파"였다. 대개 일본 육사 출신들로 군사적 역량이 뛰어났으며 관동군의 비호를 받았다. 양위팅은 장쭤린의 최측근이자 모사로서 "작은 제갈량"이라고 불리었고 중국 최대의 군수 공장인 동3성 병공창을 장악하고 있었다. 특히 교통총장으로서 동북의 재정을 한 손에 주무르고 있던 창인후아이(常蔭槐)가 그의 심복이었다. 마지막 세번째가 장쉐량의 "육대파"였다. 궈쑹링을 비롯하여 베이징 육군대학 출신의 교관들이 키워낸 동북 강무당 출신의 젊은 중하급 장교들이 주축이었다. '장쭤린의 아이들'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은 민족주의 의식이 강했으며 장쭤린, 장쉐량의 전위대이기도 하였다.
동북 정권은 돤치루이나 차오쿤, 우페이푸의 북양 정권처럼 북양군 출신의 여러 군벌들이 느슨하게 손을 잡은 연합 정권이 아니라 장쭤린 한 사람을 구심점으로 뭉친 일인 정권이었다. 따라서 동북에서 장쭤린의 위상은 절대적이었으며 누구도 감히 도전하지 못하였다. 민국 시대에 수많은 군벌들이 있었지만 이만한 권위를 누린 사람은 위안스카이와 쑨원, 그리고 장쭤린 밖에 없었다. 문제는 장쭤린이 없는 경우였다. 장쭤린은 독재자라도 봉건 황제는 아니었다. 그의 정권은 외형상으로는 공화정이었다. 또한 자신의 건강을 자신했던 장쭤린은 자기 후계자를 지목하지도 않았고 유사시를 대비하여 평화로운 권력 승계에 필요한 준비도 없었다. 그러니 "동북의 황태자"인 장쉐량이 장쭤린의 혈육이라는 이유만으로 자동으로 그 자리를 물려받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장쉐량의 지위는 애매하였는데, 군사적으로는 펑톈군 최강 부대인 제3, 제4방면군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막상 정치적 지반은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나이도 젊고 경력에서도 불리하였다. 동북에는 그를 제외하고도 쟁쟁한 경쟁자들이 얼마든지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력한 사람이 구파의 장쭤샹과 사관파의 양위팅이었다. 장쭤샹은 장쭤린의 의형제이자 실질적인 동북 정권의 이인자였다. 장쭤린보다는 6살 아래인 그는 펑톈성 진저우 이현(义县) 출신으로 장쭤린과 마찬가지로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마을의 건달이었던 그는 어느날 20여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빠찌아오타이(八角臺, 현재 랴오닝성 신민시에 속함)에서 자경단 부두목 노릇을 하던 장쭤린을 찾아가서 그의 막하에 들어갔다. 자경단의 두목은 훗날 만주국의 총리가 되는 장징후이였다. 셋 다 같은 "장씨"였으므로 금새 의기투합하였고 형제의 연을 맺었다. 가장 나이가 많은 장징후이가 큰형, 장쭤린이 둘째, 장쭤샹이 막내가 되었다. 말하자면 삼국지에 나오는 유관장 삼형제의 도원결의를 재현한 셈인데, 도량이 크고 처세에 능하면서 수완이 좋은 장쭤린에게 인망이 모였기에 자연스레 이들의 우두머리 또한 장쭤린이 되었다.
장쭤린이 출세하자 장징후이와 장쭤샹 또한 덩달아 출세하는 식이었다. 장쭤린이 제27사단장이 되자 장쭤샹은 예하 포병연대의 연대장이 되었고 장쭤린이 동3성 순열사에 임명된 뒤에는 장쭤샹이 제27사단장이 되었다. 그러나 장쭤린의 세력이 커지고 동북을 벗어나 중앙으로 진출하자 장쭤샹처럼 충성스럽고 용맹하기는 해도 근대 군사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구식 군인은 쓸모가 없었다. 녹림 시절의 심복들로서는 도저히 천하를 차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한 장쭤린은 이들에게서 군권을 빼앗았다. 그리고 양위팅, 궈쑹링, 지앙덩선, 리징린처럼 국내의 명망있는 군사학교나 일본 육사를 졸업하여 뛰어난 역량을 갖춘 신진 세력들이 일선에 등장하였다. 물론 장쭤린은 오랫동안 자신과 함께 한 옛 심복들을 버릴 생각이 없었다. 장쭤샹은 비록 일선 지휘에서는 더 이상 중용되지 못했지만 대신 지린 독군 겸 성장에 임명되었다. 헤이룽장 성에는 예전에 장쭤린과 같은 순방영 통령이었던 우쥔셩이 임명되었다.
장쭤린은 자신의 등 뒤를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부하에게 맡긴 것이다. 이들은 헛된 야심을 품는 대신, 장쭤린의 지시에 충실히 따르면서 무난하게 책무를 다하였다. 제2차 펑즈전쟁과 궈쑹링의 반란, 장제스의 북벌전쟁까지 장쭤샹은 주로 후방에서 예비대와 병참선의 보호를 맡았다. 특히 반란을 일으킨 궈쑹링이 펑텐 코앞까지 진격하여 장쭤린이 절대절명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 장쭤샹이 후방 부대를 이끌고 도우러 오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패망했을지도 모른다. 또한 낙후된 지린성의 발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지린 대학을 설립하여 교장을 맡기도 하였다. 장쭤샹은 야심이 없고 성실하고 강직하여 주변의 많은 인망을 받았기에 마음만 먹는다면 동북의 주인이 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반면, 사관파의 우두머리인 양위팅은 그야말로 야심으로 가득찬 인물이었다. 그는 1886년 펑톈성 파쿠현(法库县, 현재의 선양시 북쪽에 있는 도시)에 태어났다. 장쭤샹보다 5살 아래, 장쉐량보다는 15살 위였다. 가난한 농가 출신이었던 그는 어린 시절부터 글읽기를 매우 좋아하였다. 일자 무식의 농꾼이었던 아버지는 공부 따위는 필요없다고 여겼으나 결국 아들의 고집을 꺾지 못하여 근처의 서당에 보내어 학문을 배우도록 하였다. 스승이 놀랄만큼 양위팅의 재기는 매우 총명하였고 16살에 이미 향시에 합격하여 수재(秀才, 생원)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더 이상 낡은 경전을 공부하면서 과거를 준비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고 젊고 혈기 왕성한 한족 청년들은 신식 학문을 배우는 것이 유행이었다. 양위팅 또한 사촌 형의 도움을 받아 일본으로 건너간 뒤 일본 육군사관학교 포병과 제8기로 입교하였다.
양위팅은 중국의 미래와 국가 대계에 대하여 학우들과 토론을 하였으며 중국 동맹회 지도자였던 쑨원과도 서신을 주고 받으며 식견을 넓혔다. 이 시기에 양위팅과 서신을 주고 받은 사람 중에는 도쿄 진무학교를 다니며 일본 육사 진학을 준비하던 한살 아래의 장제스도 있었다. 1910년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귀국한 양위팅은 창춘에 주둔한 제23진에 배속되어 초관(哨官, 소대장)이 되었다. 두뇌가 비상할 만큼 명석했던 그는 금새 상관의 눈에 들어 빠르게 출세하였다. 당시 제27사단장이었던 장쭤린은 동북에서는 보기 드물게 일본 육사를 졸업한 양위팅을 눈여겨 보면서 지모가 무척 심모원려하다고 여기고 30살도 채 되지 않은 젊은이를 자신의 참모장으로 임명하였다.
제1차 펑즈전쟁의 패배 이후 양위팅은 펑톈군 훈련 총감과 동3성 병기총감을 맡아서 펑톈군의 낡은 무기와 장비를 일신하였고 동북 해공군을 창설했으며 병참 부대를 근대적으로 개편하여 작전 능력을 대폭 향상시켰다. 또한 동3성 병공창을 확대하여 무기와 탄약을 자급자족하였고 황무지 개간과 근대 공업의 육성, 도로와 철도 인프라의 수축 등 동북의 발전에도 많은 기여를 하였다. 이전까지 오합지졸의 마적 무리에 불과했던 펑톈군의 실력은 비약적으로 향상되어 다른 군벌들을 압도하는 중국 최강의 군대가 되었고 2년 뒤 제2차 펑즈전쟁이 발발했을 때 장쭤린은 최대의 강적 우페이푸를 한방에 꺾을 수 있었다.
라이벌이었던 궈쑹링이 당대 가장 뛰어난 야전 지휘관이었다면 양위팅은 군정에 있어서 감히 따를 자가 없었다. 변방의 주인에 불과했던 장쭤린이 중원으로 나와 천하를 노릴 수 있었던 것도 이들 덕분이었다. 그러나 양위팅은 장쭤린의 신임만 믿고 오만하고 독선적인데다 자신의 재능을 지나치게 과신하였다. 재승덕박(才勝德薄, 재주는 있지만 덕이 없다)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궈쑹링 역시 마찬가지였다. 동북 정권은 두 사람을 중심으로 파벌이 형성되어 서로 대립하였다. 또한 야심이 컸던 양위팅은 그저 장쭤린의 측근으로 만족하지 않고 장쑤 독군이 되어 자신의 독자적인 영토를 가지려고 하였다. 궈쑹링도 장쑤 독군을 탐내고 있었기에 결국 두 사람의 갈등이 궈쑹링의 반란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비록 궈쑹링은 한달 만에 패사하지만 궈쑹링의 부하로서 산하이관의 수비장이었던 웨이위산은 양위팅을 매우 미워하였고 투항을 거부한 채 펑위샹과 손을 잡았다. 그만큼 양위팅은 펑톈군 내에서 인망이 없었다.
약관 27살에 불과한데다 정치적인 지지 기반이 취약했던 장쉐량으로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아버지의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은데다 자신의 앞날을 쉽게 예측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평소에 주변의 인망을 잃지 않은데다 동북 정권의 간부들은 장쭤린에 대한 의리, 그리고 아버지를 잃은 장쉐량을 동정하여 그를 동북의 새로운 수장으로 옹립하는데 별다른 이견이 없었다. 물론 장쉐량이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장쭤샹이나 양위팅을 추천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두 사람 모두 스스로 고사하였다. 왜냐하면 장쭤샹이 수장이 된다면 양위팅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고 반대로 양위팅이 수장이 된다면 장쭤샹이 가만히 있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동북의 안정을 위해서라도 이들 역시 장쉐량을 지지하였다.
한편, 중국에서 흔히 관념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일본은 장쉐량의 승계를 결코 반대하지 않았다. 일본 지도부에게 장쭤린의 죽음은 그야말로 돌발적인 사건이었고 관동군 또한 펑톈군을 제압하고 광대한 만주를 차지할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였다. 고모토는 그저 장쭤린 한 사람만 제거하면 만주는 자연스레 자신들의 손아귀에 굴러들어오리라 태평스럽게 낙관했지만 상황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 지도부는 장쭤린의 후계자가 누가 될지 촉각을 곤두세웠다. 유력한 후보였던 장쭤샹과 양위팅은 만만찮은 인물이었다. 장쭤린의 평생지기인 장쭤샹은 이전부터 반일 성향이 강하였다. 그가 일본에 협조할 리 없었다. 일본 육사 출신의 양위팅은 동북 정권 내에서 대표적인 친일파로 손꼽히기는 했지만 정작 관동군과의 관계는 썩 좋지 못하였다. 관동군은 양위팅을 후원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를 불신하고 견제하는 처지였다. 보다 고분고분한 사람이 필요하였다. 장쉐량이었다.
당시 밖으로 알려진 장쉐량의 이미지란 플레이 보이에 망나니 도련님이었다. 게다가 술과 아편에도 찌들어 있다고 하니 외세가 조종하기 좋은 꼭두각시로는 이만큼 적임도 없었다. 관동군 사령관 무라오카 죠타로(村岡長太郎), 펑톈 특무기관장 도이하라 켄지(土肥原賢二)도 장쉐량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장쉐량은 일본이 생각하는 것만큼 한심하지 않았다. 아버지만큼 탁월하지는 않더라도 나름의 정치적 수완과 식견, 결단력을 갖춘 인물이었다. 야심도 있었다. 적어도 평생 일본의 눈치밥을 먹어야 했던 마지막 황제 푸이나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흥청망청 살다가 알콜 중독으로 죽은 스탈린의 아들 바실리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비유하자면 아둔한 유비 아들 유선보다는 조조 아들 조비 쪽이었다.
* 장쭤샹의 절개
장쭤린이 폭사한 지 13일 뒤인 6월 17일 장쉐량은 졸병의 옷을 입고 철수하는 병사들 틈에 끼여서 열차를 타고 펑톈으로 돌아왔다. 전날 펑톈성 의회는 그를 펑톈성 군무독판(軍務督辦, 성의 최고 군사령관으로 독군과 같음. 북벌전쟁 직후 장제스 정권에 의해 폐지되고 모든 군권이 중앙으로 일원화되면서 군정과 민정이 비로소 분리되었음)에 추대한다고 발표하였다. 19일 펑톈성 독판에 취임한 장쉐량은 장쭤린의 죽음을 정식으로 발표하였다. 이로서 대권에 한발짝 다가가기는 했지만 아직은 장쭤린의 후계자가 된 것은 아니었다. 6월 24일 동3성의 의회는 장쭤상을 동3성 보안총사령관에 추대하였다. 이것은 장쭤린의 권력을 그에게 넘기겠다는 의미였다. 장쉐량은 자기에게 부친이나 다름없는 장쭤샹과 권력을 다투는 대신 축하와 말과 함께 "동북의 옥새"라 할 수 있는 아버지의 인장(印章)을 보냈다.
그러나 장쭤샹은 자신은 그만한 그릇이 아니라며 사양하고 오히려 장쉐량에게 양보하였다. 또한 다른 원로들을 설득하여 장쉐량을 지지토록 하였다. 우직한 성격의 장쭤샹은 허황된 야심을 품는 대신 장쉐량의 후견인 역할을 충실히 하기로 마음 먹었던 것이다. 펑톈 제일의 원로인 장쭤샹이 장쉐량을 지지하는 이상 경쟁자인 양위팅은 물론이고 누구도 감히 이견을 달 수 없었다. 7월 3일 장쉐량은 동3성 보안 총사령관에 취임하였다. 비로소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새로운 "동북왕"이 된 것이다. 복잡한 정세 속에서도 장쉐량이 별다른 권력 투쟁이나 유혈 없이 평화적으로 승계할 수 있었던 것은 장쭤샹의 역할이 컸다.
덧붙여, 그 후 장쭤샹은 중원 진출에 야심을 품는 장쉐량을 말렸고 관동군의 동태가 수상하다며 여러 차례 경고하였다. 장쉐량이 만약 그의 말에 귀 기울였다면 만주 사변은 일어나지 않았으리라. 결국 만주사변이 폭발하자 그동안 장쉐량의 전횡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동북의 간부들은 관동군의 꼬임에 넘어가 줄줄이 친일로 전향하였다. 그 중에는 오래 전 장쭤린, 장쭤샹과 의형제를 맺었던 장징후이도 있었다. 당시 진저우에 있었던 장쭤샹은 베이징의 장쉐량과 난징의 장제스 정부에 급전을 보내어 관동군이 만주사변을 일으켰음을 알렸다. 그러나 동북의 상황은 매우 급박하였고 장쭤샹으로서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옛 형제들이 변절하는 것과 달리 장쭤샹은 두 마음을 품지 않았다. 일본이 만주국을 세운 뒤 총리 대신의 자리에 오른 장징후이는 장쭤샹에게 부귀영화를 약속하면서 회유하려 했지만 장쭤샹은 오히려 크게 화를 내면서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시안사변으로 장쉐량이 구금되었을 때에는 장쭤샹은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장쉐량의 구명에 나섰지만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는 장제스 정권에서 어떠한 직책도 맡지 않았고 그렇다고 친일로 전향하지도 않은 채 톈진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고 항전에서 승리하면서 동북은 다시 중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장제스는 동북 사람들에게 큰 인망을 받고 있던 장쭤샹을 동북의 주인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장쭤샹은 끝까지 고사하였다. 그런 그의 우직한 충성심을 장제스도 높이 평가하였다. 국공내전 말기 전황이 악화되면서 톈진의 함락도 초읽기로 들어가자 비행기과 배편을 준비하여 장쭤샹에게 타이완 행을 권유하였다. 또한 총통부 고문이 되어줄 것을 청하기도 했지만 그의 뜻을 끝까지 굽힐 수는 없었다. 장쭤샹에게 주인은 오직 장쭤린, 장쉐량 밖에 없었던 것이다. 톈진이 공산군의 손에 넘어가자 장쭤샹도 붙잡혔으나 마침 공산군 중에서 동북군 출신이 있어서 그를 알아본 덕분에 별탈 없이 풀려날 수 있었다.
1949년 5월 7일 장쭤샹은 심장병이 발작하여 별세하였다. 그의 나이 69세. 저우언라이가 이를 알고 크게 애석해 하면서 그의 사위에게 서신을 보냈다. "노선생이 어째서 돌아가셨는가. 우리는 노선생에게 함께 일을 도모하기를 청하고자 하였다." 비록 비천한 녹림 출신이었지만 마지막까지 보여준 장쭤샹의 꿋꿋한 절개는 자신의 영달 밖에 모르던 당시로서는 실로 보기 드문 모습이었고 훌륭한 귀감이 되었다.
ps. 드디어 다음편이 마지막이 될 듯 합니다. 장장 2년에 걸친 연재도 비로소 끝이 보인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