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벌 끝나다
"나는 어젯밤 장쭤린이 펑톈에서 일본이 매설한 지뢰로 묵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펑톈에서는 일본인의 소행이라고 의심하지만 일본인은 우리 편의대의 행위라고 한다. 일본인의 음모는 이처럼 악랄하다. 동북을 지키기란 이렇게 어려운가!" - 1928년 6월 5일자 장제스의 일기 |
장쭤린이 베이징 역에서 펑톈으로 향하는 열차에 오르고 있을 때 북벌군은 사방에서 물밀듯이 쇄도하고 있었다. 일본군을 우회하여 황허를 신속하게 도하한 장제스의 제1집단군은 진푸 철도를 따라서 파죽지세로 북상하여 1928년 5월 28일 선봉부대가 창저우(滄州)에 입성하였다. 창저우는 톈진 남동쪽으로 100km, 베이징에서 240km 거리였다. 남서쪽에서는 펑위샹의 제2집단군이 징한철도를 따라 북상하였고 서쪽과 북쪽에서는 옌시산의 제3집단군이 동진 중이었다. 또한 제4집단군 전선 총사령관 보충시가 지휘하는 5개 군(제12군, 제17군, 제30군, 36군, 제44군) 16개 사단도 우한에서 출동하여 펑위샹, 옌시산의 부대와 합세하였다. 5월 31일에는 즈리성 중부 요충지의 바오딩이 무혈 함락되었다. 안국군은 전 전선에서 붕괴된 채 패주하였다. 사실상 싸움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제3집단군 선봉이 베이징 교외의 창신뎬(长辛店)까지 진출하면서 이제 베이징 함락도 초 읽기였다.
상황이 급박하자 장쭤린은 장제스에게 전문을 보내어 화해를 청했지만 장제스는 성의가 보이지 않는다며 묵살하였다. 백기 들고 투항하라는 의미였다. 산전 수전을 겪었던 장쭤린도 이제는 백가지 계책이 막힌 꼴이었다. 그는 끝까지 베이징을 사수할 생각이었으나 이미 대세가 기울데다 장쉐량, 양위팅마저 철수를 권고하자 고집을 꺾지 않을 수 없었다. 6월 1일 장쭤린은 각국 공사들을 자신의 원수부로 초청하여 정식으로 철수를 선언하였다. "단지 대원수부를 베이징에서 펑톈으로 옮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비록 쇠락했지만 어쨌거나 나는 장쭤린이다. 나라를 팔지는 않겠다."
다음날에는 북양의 원로인 왕스진(王士珍)이 장쭤린을 방문하였다. 위안스카이 시절 돤치루이, 펑궈장과 함께 "북양 삼걸"이라고 불리었으며 십여년 전만 해도 육군 총장으로 북양군을 호령했던 그도 지금은 까마득한 후배들에게 밀려난 채 베이징 박물관의 관장이라는 한직을 맡고 있을 뿐이었다. 왕스진은 장쭤린더러 자금성과 중국의 찬란한 문화 유적으로 가득한 박물관이 또다시 전란에 휩쌓이지 않도록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노인의 눈물 어린 호소는 장쭤린의 마음을 감동시켰고 베이징을 싸움터로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하였다. 장쭝창만이 마지막까지 싸울 것을 주장했다. 산둥성을 잃고 톈진으로 퇴각한 그는 장쭤린이 동북으로 물러날 경우 그야말로 갈 곳 없는 신세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장쭤린은 그의 만류를 뿌리치고 베이징을 떠나는 열차에 올랐다. 베이징은 부저항 도시로 선언되었다. 치안을 위하여 바오위린(飽毓麟)의 1개 여단만 남기고 모든 병력이 동북으로 철수를 시작하였다.
한편, 산둥 출병에도 불구하고 북벌군의 황허 도하를 저지하는데 실패한 일본은 다음 책략으로 장쭤린과 장제스 양쪽에게 다음과 같은 최후통첩을 보냈다.
"제국 정부로서는 전란이 만주에 미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적당하고 유효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남군(북벌군)이 베이징에 입성하기 전에 펑톈군이 산하이관 이북으로 철수하는 것은 인정하지만 남군의 만주 진입은 용납하지 않는다. 둘째, 남군과 펑톈군이 베이징-톈진 지구에서 교전을 하거나 양군이 함께 만주로 진입할 경우 양쪽 모두 무장 해제하겠다."
또한 관동군은 동북 각지에 배치된 병력을 모두 펑톈에 집결시키고 사령부 또한 다롄에서 펑톈으로 이동하였다. 본격적으로 실력을 발휘하겠다는 의미였다. 관동군 사령관 무라오카의 속셈은 "치안 유지"라는 명목으로 동북의 입구라 할 수 있는 진저우로 병력을 출동시킨 다음,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동북으로 들어오는 중국군을 모조리 붙잡아 무장해제시킬 생각이었다.
그러나 관동군의 임무는 어디까지나 만철의 보호이므로 이런 행동은 엄연히 중국 주권과 워싱턴 조약의 위반이었다. 국민정부는 물론이고 장쭤린도 "동북은 중국 고유의 영토이므로 이러한 조치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라고 반발하였다. 미국마저 일본을 비난하는 항의 성명을 발표하자 다나카 내각은 굴복하여 관동군의 출동을 취소케 하였다. 잔뜩 벼르고 있다가 김빠진 꼴이 된 관동군 내부에서는 다나카를 나약하다며 성토하는 목소리가 들끓었다. 결국 얼마 뒤 <황고툰 사변>으로 터지게 된다.
북벌의 완성을 눈앞에 두자 그동안 힘을 모았던 동맹자들 사이에 미묘한 균열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5월 29일 장제스는 펑위샹과 회견을 하였다. 그 자리에서 베이징과 톈진의 점령은 옌시산의 몫으로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유하였다. 제2집단군의 보급 상태가 좋지 못한데다, 베이징의 열강 공사들이 펑위샹에게 우호적이지 않다는 이유였다. 펑위샹은 마지못해 동의했지만 속으로 불만이 컸다. 장제스가 자신과 옌시산을 이간질하려는 속셈이 뻔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베이징과 톈진은 원래 펑위샹의 영토인데다 중국에서 가장 궁벽한 서북 지방을 지반으로 하고 있던 그로서는 금싸라기라 할 수 있는 이곳을 반드시 되찾지 않으면 안되었다. 오랜 맹우였던 두 사람의 관계도 이 때부터 금이 가기 시작하였다.
6월 4일 장쭤린이 황고툰에서 폭사하였다. 이 사건은 중국과 일본은 물론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으나 그렇다고 북벌군이 진군을 멈출 리는 없었다. 장제스는 옌시산을 정식으로 경진(베이징, 톈진) 지구 위수 사령관에 임명하였다. 이틀 뒤인 6일 오전, 제3집단군의 선봉 부대인 쑨추(孫楚)의 제6사단이 베이징에 처음으로 입성하였다. 뒤이어 상전(商震)의 제1군이 도착하였다. 베이징에 잔류하고 있던 바오위린 부대는 그 직전에 롼저우로 철수하였다. 베이징 시내 곳곳에는 북벌군을 상징하는 청천백일기가 나부꼈으며 수많은 인파들이 모여들어 북벌군의 입성을 환영하였다. 이로서 베이징은 북벌군의 손에 넘어갔다.
장쭝창은 철수 행렬에 동참하지 않은 채 잔존 부대를 이끌고 톈진에 남아 있었다. 숫자는 무려 5만명에 달했지만 한낱 패잔병의 무리에 불과하였다. 가지고 있는 총도 2만정이 채 되지 않았다. 그는 옌시산에게 사람을 보내어 항복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옌시산으로서도 이 신의없고 골치 아픈 사나이를 받아들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펑톈군의 행렬을 따라서 동북으로 퇴각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장쉐량이 그의 동북 진입을 거부한 것이다. 그야말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장쭝창은 6월 11일 일단 롼저우로 철수한 채 장제스의 처분을 기다려야 했다. 다음날 푸줘이의 제5군이 톈진에 무혈 입성하였다. 또한 이 날 신장성장 양증신(楊增新)도 국민정부에 복종을 선언하였다.
6월 15일 국민정부는 전국에 "북벌의 종료"와 "국가 통일"을 정식으로 선언하였다. 장제스가 북벌을 선언한 지 꼭 1년 11개월 만의 일이었다. 전쟁은 끝났다. 베이징은 베이핑(北平)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황제가 직접 통치한다"는 의미의 즈리성(直隶省) 역시 "황허 이북"이라는 허베이성(河北省)이 되었다. 쿠빌라이가 1276년 "대도(大都)"라 부르며 원나라의 도읍으로 삼은 이래 약 650여년 동안 중국의 수도였던 베이징은 허베이성의 일개 도시로 전락한 것이다.
7월 6일 베이징에서 북벌군의 4대 수장, 즉 장제스와 펑위샹, 옌시산, 리쭝런이 한 자리에 모였다. 이들이 향한 곳은 베이징 교외의 비윈사(碧雲寺). 이곳에는 3년 전 눈을 감은 쑨원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었다. 쑨원은 죽기 전 유언으로 북벌이 끝나면 자신을 난징에 묻어달라고 유언한 바 있었다. 이제 그 유언을 지킬 때가 온 것이다.
국민정부의 주요 인사와 장군들, 각계 대표 등 수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장제스는 쑨원의 관 앞에 무릎 끓고 쑨원이 생전에 그토록 꿈꾸었던 북벌을 완수했음을 보고하였다. 그로서는 실로 감회가 남달랐을 것이다. 혁명에 평생을 바쳤던 쑨원은 결국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채 회한만 남기고 눈을 감아야 했다. 쑨원의 앞에 놓인 벽은 그가 극복하기에는 너무나 두터웠고 야심차게 시도했던 북벌은 변변히 나아가지도 못한 채 매번 실패로 끝났다. 쑨원은 장제스를 그저 쓸만한 인재로만 여겼을 뿐 자신의 후계자로 여긴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런 장제스가 쟁쟁한 원로들을 재쳐놓고 쑨원의 뒤를 이어서 중국을 통일한 것이다. 리쭝런은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한다. "장제스는 쑨원의 관을 붙들고 한없이 울었다. 펑위샹과 옌시산도 덩달아 울었다. 나 또한 그 옆에 서서 뭐라고 애도할까 생각하는 와중에 눈물이 절로 흘러내렸다." 일년 뒤 쑨원의 운구는 난징으로 옮겨졌고 성대한 국장과 함께 쯔진산(紫金山)에 묻혔다.
한편, 펑톈군 주력은 산하이관 이북으로 철수한 반면 북벌군은 베이징에서 전진을 멈추면서 베이징 북쪽부터 산하이관 이남 사이는 사실상 공백지대나 다름없었다. 이곳에는 펑톈군의 패잔병 무리들로 가득했고 치안도 엉망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악명높은 인물이 "동릉대도(東陵大盜)" 쑨디엔잉(孫殿英)이었다. 토비의 우두머리였던 그는 장쭝창의 휘하에 있다가 장쭝창이 패하자 장제스에게 항복하여 국민혁명군 제6군단 제12군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매우 탐욕스러웠고 삼민주의나 혁명 사상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쑨디엔잉은 부하들을 데리고 탕산(唐山)으로 갔다. 이곳에는 청나라 역대 황제의 무덤이 있다. 혼란을 기회삼아 무덤을 도굴할 속셈이었던 것이다. 그의 부하들은 서태후와 건륭황제의 묘를 파헤쳤다. 쑨디엥잉은 서태후의 관을 꺼낸 다음 서태후가 입에 물고 있는 야명주를 꺼낼 요량으로 직접 칼로 목을 찢어버렸다. 병사들은 서태후가 입고 있던 용포와 바지, 버선, 심지어 속옷까지 죄다 벗겨 버렸고 서로 더 많이 약탈하려고 다투다가 밟혀 죽는 일도 있었다. 쑨디엔잉은 무덤을 샅샅이 훝은 다음 마차 3대 분에 달하는 막대한 보물을 차지하였고 그 중 일부는 장제스와 옌시산에게 뇌물로 바쳤다.
신해혁명 이래 군대가 황제의 무덤을 도굴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이 사건은 중국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북벌군의 도덕성을 땅에 떨어뜨렸다. 또한 혁명의 의미를 퇴색시켰다. 특히 톈진의 일본 조계에서 살고 있던 푸이는 격분하였다. 만주 사변이 일어나자 그가 일본에 회유되어 만주국 건설에 참여하게 된 것 또한 이 사건이 결정적이었다.
북벌 초기에만 해도 열렬한 혁명 사상으로 충만했던 북벌군의 열기는 이미 사라졌고 200만명이 넘는 군대의 태반은 강도떼나 다름없었다. 장제스를 비롯한 북벌군의 수장들이 서로 세 불리기에만 급급한 나머지 투항병들의 출신과 자질을 가리지 않고 마구 아군으로 흡수하였고 이들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었다. 결국 그로 인한 대가를 또다른 전쟁으로 치루지 않으면 안되었다.
* 역치냐, 독립이냐
중국 전역에서 청천백일기가 휘날리지 않는 곳은 동북 밖에 없었다. 펑위샹은 무력으로 산하이관을 돌파하여 동북을 제압하자고 강경하게 말했지만 장제스는 현실론을 내세워 무력보다는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일본이 동북을 침입한지 오래되었다. 우리 또한 신중하고 주도면밀하게 처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전란의 도화선이 되어 수습할 수 없게 된다. 우리는 평화통일의 원칙에서 동북에 대하여 역치(易幟, 중앙으로의 귀속)를 촉구해야 한다" 장제스의 의견에 리쭝런과 옌시산도 찬성하였다.
장쉐량의 저항은 두려울 것이 없지만 이 때문에 일본과 싸우는 상황은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싸우면 무조건 진다. 그것만큼은 피해야 했다. 장제스만이 아니라 일본에게 잔뜩 겁을 먹은 것은 누구 할 것 없이 중국 지도자들의 공통된 모습이기도 했다. 소위 "중화 민족주의"로 교육받은 오늘날의 중국인이라면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성장기를 보냈고 일본의 발전상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 몸소 체험했던 그 시절 사람들의 공포심과 트라우마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 정도로 일본은 두려운 존재이자 넘을 수 없는 벽이기도 하였다.
장쭤린의 뒤를 이어서 동북의 새로운 주인이 된 장쉐량 역시 마찬가지였다. 수십년 뒤 NHK와의 인터뷰에서 장쉐량은 분노를 터뜨리면서 "일본은 아버지의 원수이자 내 나라의 적이었다. 나는 일본을 결코 두렵지 않았다."라고 당당히 말한다. 그러나 그런 모습과는 달리 당시의 그는 오히려 비밀리에 일본에 접근하고 무려 4억 엔에 달하는 거금을 원조하는 조건으로 합작을 제안하였다. 실로 이율배반이었다. 만약 일본이 받아들였다면 장쉐량은 역치는 커녕, 동북의 분리 독립을 선언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터무니없는 요구로 일본이 역치를 반대하지 못하도록 만들기 위한 고도의 계산인지도 모른다. 당시 일본의 연간 예산이 18억 엔, 군사비는 5억 엔 정도였기에 장쉐량의 요구는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장쉐량의 진짜 속셈은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이것만은 분명했다. 일본을 적으로 돌릴 생각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아버지 죽음의 배후에 관동군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그렇지 않다. 분명 그는 일본을 원수로 여기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일본에 맞서는 대신 한없이 저자세를 고수하였다. 일본의 보복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북벌군과 힘을 합하여 일본과 일전을 벌이는 것은 그야말로 파멸을 의미했다. 그에게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만한 결단력과 용기가 없었다.
반대로 일본과 힘을 합하여 장제스와 싸울 것인가. 이 또한 일본의 주구로 전락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데다 동북의 민심이 허용하지 않을 것이었다. 사면초가였다. 그는 장제스와 일본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친 채 꾸준히 저울질하면서 어느 쪽에 붙어야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으면서 지반과 권력 또한 유지할 수 있을까 고뇌하였다. 일본의 협박, 민족주의로 격앙된 반일 여론, 장제스의 회유. 그 사이에 끼인 처지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기도 쉽지 않았다. 장쉐량은 결코 범용한 인물은 아니었지만 아버지가 이룩한 유산을 물려받았을 뿐 스스로 역경을 헤쳐나갈 의지는 없었던 것이다.
1928년 7월 3일 장쉐량이 동북의 권력을 승계한 뒤 12월 29일 동북역치를 단행하기까지 약 반년 동안 동북의 상황은 그야말로 긴박하게 돌아갔다. 그 과정에는 장쉐량과 장제스, 일본 사이의 치열한 암투가 있었다. 장쉐량은 동북으로 귀환한 직후부터 난징과 담판에 나섰다. 만약 북벌군이 산하이관을 넘을 경우 일본은 결코 묵과할 리 없다. 기어코 병력을 출동시킬 것이고 결국 동북 전체가 전장터가 될 것이 틀림없었다. 따라서 북벌군의 동북 진입은 반드시 막아야 했다. 장쉐량은 동북 역치를 불가피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렇다고 장제스에게 굴복할 생각 또한 없었다. 그의 목적은 장제스와 일본, 어느 쪽과도 싸우지 않고 간섭도 받지 않으면서 자신의 왕국에 대한 통치권을 보장받는 것이었다. 그는 일본의 권익만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상관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일본의 꿍꿍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었다. 동북을 자신들의 반식민지로 여겨 왔던 일본은 이번 기회에 중국에서 완전히 떼어낼 요량이었던 것이다.
다나카는 하야시에게 무슨 수를 써서건 장쉐량이 난징 정부와 타협하지 못하도록 막으라고 지시하였다. 하야시 펑톈 총영사는 그를 방문하여 "남방과 합작하는 것은 어떤 이유로건 일본에 대항하는 것을 의미한다"며 강력하게 경고하였다. 장쉐량은 하야시에게 "일본이 우려할 만한 것은 없다"라고 하면서도 일본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관동군은 본국의 육군성에 "때가 무르익었다"라고 보고하는 등 공공연히 행동에 나설 태세였다. 일본의 태도는 갈수록 고압적이었다. 하야시로부터 보고를 받은 다나카 기이치는 "우리의 태도가 너무 호의적이라서 일본을 만만하게 본 것"이라고 격노하면서 더욱 강경하게 상대하라고 지시하였다. 7월 19일 하야시는 장쉐량에게 다나카의 편지를 전달하였다.
1. 난징 정부는 지위가 불안정한데다 좌파적인 색깔이 남아 있어 동북이 합작할 필요가 없다.
2. 만약 난징 정부가 무력으로 동북을 압박한다면 일본은 힘을 다하여 원조할 것이다.
3. 동북의 재정이 어렵다면 일본의 은행이 충분히 구제할 것이다.
이것은 돈과 무력을 내세워 동북을 사실상 일본의 보호령으로 삼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분노를 참을 수 없었던 장쉐량은 하야시더러 "나는 일본이 중국의 통일을 바라지 않으며 일본의 간섭으로 동북이 역치를 할 수 없다는 것을 난징에 보고코자 한다. 그래도 좋은가?"라고 묻자 하야시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또한 장쉐량은 "역치는 나의 뜻이 아니라 부하들과 동북 인민들의 뜻이기에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다. 만약 역치를 허용하지 않는다면 하야해야 할지도 모른다."라고 은근히 압박하였다. 하지만 그런 정도로 하야시가 쉽게 물러날 리 없었다.
장쉐량은 베이핑에 있던 장제스에게 급히 사람을 보내어 일본이 역치를 완강히 반대하고 있어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호소하였다. 장제스는 "장쉐량에게 일본의 공갈에 굴복하지 말고 결연하게 중앙에 복종한다는 통전을 발신하라고 전달하라. 그게 동북을 구하고 중국을 구하는 길이다!"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장쉐량은 고민 끝에 역치를 연기하기로 결정하였다. 만약 역치를 강행할 경우 일본이 즉각 무력 행동으로 나설까 두려웠던 것이다. 장쉐량이 결국에는 일본의 협박에 굴복했다는 말을 들은 장제스는 크게 통탄하면서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썼다. "동북이 일본의 횡포로 저지당하여 계획이 암초에 걸리고 말았다. 아직도 외세는 우리의 내정에 간섭하고 있다. 중국의 무력함은 이와 같다. 생각만 해도 참혹하다."
8월 4일 장쭤린의 장례식이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황고툰 사변이 일어난 지 두달 만의 일이었다. 다나카의 특사로 예전에 베이징 주재 일본 공사를 지낸 하야시 곤스케(林權助)가 펑톈에 왔다. 명목상 장쭤린의 조문이라지만 진짜 속셈은 장쉐량을 회유하여 일본에 굴복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는 일본의 권고를 무시하면 행동으로 나설 것이라고 사실상 최후 통첩을 전달하였다. 장쉐량도 격앙되어 일본의 내정간섭은 결코 받아들이지 않겠다며 반발하였다. 회유는 커녕 자존심만 건드린 꼴이었다. 회담은 결렬되었다.
다나카는 장쉐량을 협박하여 역치를 잠시 연기시키는데 성공했지만 상대의 사정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힘만 믿고 고압적으로 몰아부치는 식은 오히려 장쉐량의 반감을 살 뿐이었다. 장쉐량 또한 장쭤린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힘을 빌려서 그 자리에 앉은 것이 아닌 이상 쉽사리 굴복하지 않으려는 것은 당연하였다. 군인 출신이었던 그로서는 외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강자에게는 한없이 비굴하면서도 약자는 가차없이 밟아버린다는 것이 사대주의 근성에 찌든 일본 지도부의 사고 방식이었다.
펑톈 총영사로서 장쉐량과의 교섭을 맡은 하야시 또한 다나카에게 불만이 컸다. 북벌 전쟁 이후 중국은 어느 때보다도 열렬한 민족주의 열풍이 고조되어 있었다. 또한 동북 지도부도 대부분 역치에 동조하였다. 만약 이제와서 장쉐량이 일본의 압박에 못 이겨 굴복한다면 내부의 격렬한 반발에 직면하여 결국에는 정권 자체가 붕괴될 것이 불보듯 뻔했다. 따라서 장쉐량으로서는 물러설래야 물러설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러니 일본이 아무리 그를 핍박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얻는 것은 없이 중국의 감정을 불필요하게 자극하고 일본의 입장만 더욱 난처하게 될 뿐이었다.
전문 외교관으로서 중국의 상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그는 장쉐량과 감정적으로 대립하기보다는 차라리 역치를 인정하고 대신 철도 문제에서 양보를 얻어내는 등의 실리 외교가 더 이익이라고 여겼다. 야당인 민정당 역시 다나카의 고압적인 외교를 비판하면서 더 이상 중국 내정에 간섭하지 말라고 주장하였다. 이렇듯 일본 내부에서도 반발이 나오는 판이었다. 그러나 다나카의 입장은 여전히 확고부동했다. 오히려 하야시더러 만주를 소련과의 완충지대로 삼기 위해서는 반드시 중국과 분리시켜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도 무릅써야 한다고 단언하였다. 결국 자신의 체면만 앞세운 완고함이 도리어 일을 그르친 꼴이 되었다.
* 장쉐량 동북 역치를 선언하다
롼저우에는 장쭝창이 이끄는 5만명의 패잔병들이 잔류하고 있었다.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된 이들은 토비로 전락할 판이었다. 장쭝창은 옌시산에게 항복을 거부당한데다 동북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장쉐량은 그에게 40만 위안의 군비를 주는 조건으로 군대를 스스로 해산시키라고 권고했지만 분개한 장쭝창은 반란을 일으켰다. 8월 2일 백군 출신 러시아 용병들이 탑승한 장갑 열차를 앞세운 그의 반란군은 롼허(滦河)를 도하한 후 징펑 철도를 따라서 북상을 시작하였다. 무기도 변변치 않은데다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으니 자포자기나 다름없는 짓이었다. 장제스는 보충시에게 즉각 토벌을 명령하였다. 장쉐량 또한 양위팅을 총사령관으로 토벌군을 출동시켰다. 양면에서 협공을 받은 장쭝창은 여지없이 패주하여 다롄으로 달아났다. 남은 병력은 모두 백기를 들고 투항하였다.
1928년 9월 16일 장쉐량은 펑톈군을 동북변방군(약칭하여 '동북군')으로 개칭하고 지나치게 비대해진 군대를 정예화하기 위하여 대대적인 정편 작업에 착수하였다. 전략의 기본 단위는 여단이었다. 군단과 군, 사단 편제가 폐지되고 모든 부대는 "국방여단"으로 통일되었다. 각 여단은 3개 연대로 구성되었으며 직할 부대로 기병중대와 중박격포 중대, 통신 중대, 위생 중대가 있었다. 또한 각 연대는 3개 대대로 구성되었고 연대 직할로 기관총 중대와 박격포 중대, 평사포 중대, 통신 중대가 있었다.
한때 7개 방면군 50개군 100만명에 달했던 동북군은 개편 이후 27개 보병 여단, 6개 기병 여단, 10개 포병 연대, 8개 공병 대대, 2개 치중대, 9개 헌병대로 축소되었다. 그 외에 각 성에는 성방군이라 하여 성내 토비 척결과 치안을 담당하는 부대가 있었다. 도합 30만명 정도였다. 동북 해군은 3개 함대(제1함대, 제2함대, 강방함대)로 편성되었으며 휘하에는 대소 전함 21척에 총배수량 3만2천톤, 수병 3300명이 있었다. 또한 해군 항공대와 해군 육전대 3개 대대 2천명이 있었다. 동북 공군은 5개 대대로 구성되었고 270대의 항공기를 보유하여 중국 최강의 전력을 자랑하였다. 쓸모없는 노약자와 부상병들은 내보내고 신체가 강건한 자만 남았다. 정예 부대로 재편되면서 동북군의 전투력은 크게 향상되었다.
1928년 10월 10일 난징 정부는 북벌기의 군정(軍政) 시대를 끝내고 훈정(訓政)의 실시를 선언하였다. 정부 조직은 대대적으로 개편되어 오원(입법원, 행정원, 사법원, 고시원, 감찰원)정부가 수립되었다. 장제스는 정부 주석 겸 육해공군 총사령관에 취임하였다. 군정 대권을 한손에 쥐면서 그의 일인 독재 체제가 확립된 것이다. 장쉐량은 국민정부 지도부를 구성하는 15명의 최고 위원 중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장제스는 장쉐량을 국민정부 일원으로 임명하여 역치를 촉구하려는 것이었다. 또한 동북 정부의 인사권과 행정권, 군사권을 모두 위임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이것은 사실상 동북을 "국가 속의 국가"로 인정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는 일본의 핍박으로 진퇴양난의 처지에 몰려 있던 장쉐량을 어떻게든 회유하기 위하여 최대한의 양보를 한 셈이었다.
이쯤에 오면 다나카의 기세도 이전과 달리 한풀 꺾였다. 사방에서 비난 여론이 쏟아지는데다 더 이상 장쉐량을 몰아붙여 보았자 실익이 없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5월 이후 펑톈에 집결한 채 언제라도 출동할 태세였던 관동군은 10월 2일 비상이 해제되면서 원래 주둔지로 되돌아갔다. 장쉐량도 일본의 분위기가 달라졌음을 체감하고 있었다. 때마침 교토에서 히로히토 즉위식이 열리자 그는 다나카의 속을 떠볼 요량으로 펑톈성 주석을 지낸 모더후이(莫德惠)를 축하 사절로 보내어 일본의 사정을 탐색케 하였다. 다나카는 장쉐량의 사절단을 전에 없이 융숭하게 환대하였다. 모더후이는 다나카와의 회담에서 "우리는 내년 초에 동북 역치를 실시할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묻자 다나카는 대수롭지 않은 듯 "중국이 알아서 할 문제"라고 대답하였다. 무력조차 불사하겠다는 것과는 180도 달라진 모습이었다.
비로소 자신감을 가지게 된 장쉐량은 1928년 12월 29일 드디어 동북 역치를 선언하였다. 동북 각지에는 오색기를 대신하여 청천백일기가 나부꼈다. 이로서 중국은 하나의 깃발로 통일되었다. 그러나 장쉐량은 역치의 의미를 분명히 하였다. "비록 중앙에 복종하지만 동북을 지키는 것은 부친에 대한 효"라고 하였다. 또한 장제스와 자신은 서로 섞일 수 없지만 국가를 위하여 합작하였다고 말하였다. 즉, 그저 깃발만 바꿔 달았을 뿐 실질적으로 장제스에게 복종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였다. 장제스는 동북으로 군대를 보낼 수도 없었고 행정권을 행사하거나 세금을 징수할 수도 없었다. 국민당의 활동 또한 금지되었다. 동북은 장쉐량의 독립 왕국이었다. 어쨌거나 장제스는 체면을 얻었고 장쉐량은 실리를 얻었다. 일본은 아무것도 얻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잃은 것도 없었다. 만주를 통째로 삼킬 속셈이었던 관동군에게는 그것만으로도 굴욕이었다. 장쉐량과 관동군의 모순은 결국 3년 뒤 만주 사변으로 폭발하게 된다.
비록 북벌 전쟁은 끝났지만 천하에는 또다시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북벌군의 4대 수장들이 권력과 전리품의 배분을 놓고 서로 대립하기 시작한 것이다. 난징의 장제스, 우한의 리쭝런, 타이위안의 옌시산, 시안의 펑위샹. 여기에 동북의 장쉐량까지. 누구에게도 머리를 숙일 생각이 없었던 이들은 천하의 주인을 놓고 겨룰 수 밖에 없었다. 1929년 3월 제일 먼저 광시성의 명장 리쭝런이 反장제스의 기치를 올렸다. 뒤이어 펑위샹, 장파쿠이가 차례로 반란을 일으켰다. 또한 이전에 장제스에게 패하여 일본으로 달아났던 탕성즈도 돌아와서 반란에 가세하였다. 반란의 불길은 금새 중원 전체로 확산되었다. 장장 2년에 걸쳐서 진행되는 군벌 내전 최대 최후의 하이라이트인 이른바 "신군벌 내전"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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