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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 전쟁과 인물, 사건으로 보는 중국 현대사 > 31화 - 장쭤린, 중국 통일을 꿈꾸다/blog.naver.com/atena

* 펑톈군 남하하다

제2차 펑즈전쟁의 승리로 장쭤린(張作霖, 장작림)은 드디어 최강의 호적수였던 우페이푸(吳佩孚, 오패부)를 꺾고 산하이관을 넘어 중원에 한발을 내밀었다. 또한 투항한 즈리파 군대까지 흡수하면서 펑텐군의 군사력은 일거에 두배 이상 증가하여 20개 사단 및 7개 혼성 여단, 1개 기병 여단, 2개 포병 여단 등 도합 40만명에 달했다.

장쭤린은 한편으로는 쑨원을 베이징으로 초청하여 남북 평화 회담을 개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최강의 무력을 앞세워 남쪽으로 진군을 시작하였다. 비천한 마적 출신이 여지껏 위안스카이나 북양의 쟁쟁한 실력자들도 해내지 못했던 통일의 야심을 드러낸 것이다. 장쭤린의 첫번째 목표는 상하이, 난징, 푸저우 등 중국에서도 가장 알짜배기라 할 수 있는 중국 동남 해안가이었다. "펑톈군이 남하한다!" 창장 이남의 즈리파 군벌들은 겁에 질렸다.

사열 중인 펑톈군 병사들. 막강한 포병은 중국 최강이었으며 전차 부대와 해공군까지 갖추고 있었다.

저장 독군 루융상(盧永祥, 노영상)은 안후이파로 제2차 펑즈 전쟁 당시 장쭤린과 손을 잡고 우페이푸에게 맞서다가 장쑤 독군 지씨에위안(齊爕元, 제섭원)과 푸젠 독군 쑨촨팡 등 사방에서 즈리파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패주했다. 일본으로 도망쳤던 그는 베이징 정변으로 우페이푸가 몰락하자 귀국하여 장쭤린에게 의탁하였다. 군사력에서 열세했던 장쭤린이 우페이푸를 꺾을 수 있었던 것은 루융상의 공이 컸다. 만약 그가 남쪽에서 즈리군의 절반을 묶어두지 않았더라면 산하이관에서 펑톈군은 즈리군에게 압도당했을 것이고 펑위샹 역시 감히 정변을 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다.

장쭤린은 동맹자인 루융상을 후원하여 즈리파를 격파하고 저장성과 장쑤성을 회복한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출동시켰다. 펑톈군 제1군 군장 지앙덩솬(姜登選, 강등선)이 선무군(宣撫軍) 총사령관에, 제2군 부군장인 장쭝창(張宗昌, 장종창)이 선봉을 맡았다. 병력은 약 10만명. 장쭝창은 2년 전만 해도 빈털털이로 펑톈으로 와서 장쭤린에게 의탁했던 객장에 지나지 않았다. 군인으로서의 역량은 변변치 않았지만, 호탕하고 용맹한데다 뛰어난 정치적 수완으로 금새 장쭤린과 의기투합하였다. 제2차 펑즈 전쟁에서는 제3사단을 지휘하여 산하이관에서 즈리군 10만명의 퇴로를 차단함으로서 즈리군이 총붕괴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장쭤린의 신임은 더욱 깊어졌고 그의 지위와 실력은 펑톈군의 여러 쟁쟁한 간부들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을 정도였다.

베이징에서 돤치루이, 장쭤린, 펑위샹의 연합 정권이 수립된 지 약 한달 후인 1924년 12월 장쭤린의 대군은 진푸철도를 따라서 남하를 시작하였다. 펑톈군 중에서도 가장 거칠기로 이름난 장쭝창은 톈진에서 노획한 화물 열차를 개조한 장갑열차를 타고 보무도 당당하게 남진하였다.

장쭝창의 장갑열차. 19세기 말 구미 각국을 중심으로 군대의 생명줄인 열차를 적의 공격에서 보호하고 이동식 화력으로 활용하기 위해 열차에 두꺼운 장갑과 대포, 기관총을 탑재한 장갑열차를 대량으로 이용하였다. 장쭝창은 중국에서 장갑열차를 전쟁에 활용한 첫번째 군벌이었다. 그는 백군 출신 러시아인들의 도움을 받아서 노획한 열차 4량을 장갑열차로 개조하고 각각 75mm 야포 6문과 중기관총 24정을 탑재하였다. 그의 장갑열차 부대는 쑨촨팡과의 전투에 활약했으나 북벌전쟁을 개시한 장제스와의 전투에서 보충시 부대의 공격으로 전멸하였다.

이미 즈리파는 지리멸렬이었다. 산둥 독군 정스지(鄭士琦, 정사기)는 당장 깃발을 바꾸어 달고 펑톈군의 남하를 지지했지만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쫓겨났다. 안후이 독군 마리엔찌아(馬聯甲, 마연갑)와 장시 독군 차이청쑨(蔡成勳 ,채성훈) 역시 부하들의 반란으로 도망쳐야 했다.

장쭝창은 산둥성을 거쳐서 장쑤성으로 파죽지세로 진군하였다. 쉬저우에는 지씨에위안 휘하의 쉬저우 진수사(徐州鎭守使) 천댜오위안(陳調元, 진조원)이 제6사단을 이끌고 지키고 있었다. 남북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인 쉬저우가 펑톈군의 손에 넘어가면 상하이와 난징도 위태롭다. 지씨에위안은 천댜오위안에게 긴급 전문을 보내어 쉬저우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천댜오위안은 싸울 의사가 없었다. 월등히 우세한 펑톈군을 상대로 싸워 본들 승산은 없다. 게다가 그는 장쭝창과 오랜 친분이 있었다. 따라서 장쭝창이 내려온다는 소식을 듣자 당장 백기를 내걸고 성문을 열었다. 덕분에 총 한발 쏘지 않고 요충지인 쉬저우를 손에 넣은 장쭝창은 여세를 몰아서 창장 도하를 준비하면서 상하이와 난징으로 진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발등에 불 떨어진 지씨에위안은 부랴부랴 병력을 모아서 창장에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하지만 이미 대세가 결정되었다고 여긴 병사들은 흩어지거나 펑톈군에게 항복해 버렸다. 또한 난징에서는 병변이 일어나 반란을 일으킨 폭병들이 시가지에 불을 지르고 약탈을 저지르는 등 좌중지란이었다. 1925년 1월 10일 장쭝창은 난징에 무혈 입성하였다. 지씨에위안은 쑨촨팡과 손을 잡고 잔여 병력을 모아서 쑤저우에서 마지막 결전을 각오했지만 사기가 땅에 떨어진 부하들은 도무지 싸울 의지가 없었다. 결국 그는 일전 한번 해보지도 못한 채 하야를 선언한 후 일본으로 도망쳤다. 장쭝창은 그야말로 무주 공산으로 진격하여 2월 2일 상하이를 점령하였고 이어서 쑤저우와 상저우(常州)까지 손에 넣었다.

일본제 75mm 41식 산포로 사격 훈련 중인 장쭝창의 산둥군. 독특한 군모가 특징이다. 청말 자희신정 시절 독일군과 일본군의 군복을 모방했던 북양군이 그 후로도 외형에서 큰 변화가 없었던 반면, 펑톈군은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군복을 디자인하여 차별화되었다.

상하이는 인구가 거의 300만명에 달하여 "동양의 파리"라고 불릴 만큼 중국에서 가장 발달하고 근대화된 국제 도시이자 금융, 무역의 중심지였다. 또한 외국 조계를 통하여 해외의 온갖 산물이 들어오는 풍요로운 곳이며 중국 3대 병공창의 하나인 상하이 강남 제조국이 있어서 무기도 자급할 수 있었다. 제2차 펑즈전쟁의 발단이 된 장저전쟁 역시 상하이를 놓고 루융상과 지씨에위안이 서로 다투었기 때문이었다. 장쭝창은 넝굴째 굴러들어온 이 알짜배기 땅을 놓칠세라 잽싸게 차지하였다. 그는 자신의 주력부대를 상하이에 주둔시키고 상하이의 유력한 실력자들과 친분을 쌓으면서 세력을 빠르게 확장해 나갔다.

그 중에서도 장쭝창의 가장 큰 공은 발해함대(渤海艦隊)를 손에 넣었다는 사실이다. 장쭤린은 해군력의 필요성을 절감하면서도 상선을 개조한 구식 포함 수척과 두 척의 연습함 외에 변변한 해군력이 없었다. 중국 해군은 대부분 중앙을 장악하고 있는 우페이푸의 수중에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전력이 산둥성 칭다오에 주둔한 발하함대였다. 발해함대는 하이치를 비롯하여 방호 순양함 3척과 포함 4척, 구축함 3척, 수송선 1척 등을 보유하였다. 그런데 우페이푸가 장쭤린에게 패배하여 우한으로 도망치자 발해함대는 하루 아침에 주인 잃은 신세가 된 채 어느 편에 붙을 지 고민하고 있었다. 

산둥성을 차지한 장쭝창은 군비 지급과 높은 지위를 미끼로 발해함대 사령관 원수더(温樹德)를 설득하였다.  결국 원수더는 오패부와 결별하고 장쭤린에게 붙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반발한 일부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장쭝창이 군대를 보내어 가차없이 진압하였다. 노후화가 심했던 하이첸(海琛)와 자오허(肇和) 두척의 순양함과 구축함 1척은 수리를 위해 칭다오에 남았지만 나머지는 7월 19일 친황다오에 입항하여 동북 해군에 편입되었다. 동북 해군의 전력은 비약적으로 강화되어 명실공히 중국 최강의 전력을 갖추게 되었다.

1927년을 기준으로 동북 해군 산하에는 두개의 함대가 있었는데, 하얼빈에 주둔한 강방함대와 발해함대를 재편한 동북해방함대였다. 당시 전체 중국 해군의 규모가 장병 5,400여명에 총배수량 42,000톤 정도였는데 그 중에서 동북해군의 전력은 대소 군함 27척과 장병 3300여명, 총배수량 32,200톤에 달하여 전체의 77%를 차지하였다. 당시 장제스의 북벌군에 속한 광둥 해군의 전력이 장병 800여명, 총배수량 8,000여톤에 불과했다는 점에서 동북 해군의 위용이 어느 정도였는지 보여준다.
 
장쭤린이 즈리군을 격파하고 지씨에위안을 몰락시키자 루융상도 장쑤 독군이 되어 난징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장쭤린의 힘을 빌리고 옛 부하들을 불러 모으며 저장성을 탈환하려 하였다. 몇달 전만 해도 저장성의 주인이었던 그는 자신의 영토를 되찾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였다. 한번 지반을 상실하여 돈도 없고 총도 없는 군벌은 누구도 따르지 않는다. 게다가 앞으로 천하 대권의 주인은 장쭤린이라고 생각했기에 너도나도 펑톈파에 연줄을 대기 급급하였다. 루융상은 이미 끈 떨어진 갓에 불과했던 것이다. 저장성을 되찾기는 커녕, 장쑤 독군으로서의 업무도 보지 못할 형편이었다. 결국 4개월도 되지 않아 병을 핑계로 장쑤 독군의 자리도 내놓고 정계에서 물러나야 했다.

또한 안후이 독군 왕위탕(王揖唐, 왕읍당)은 위안스카이의 비서를 지낸 북양 군벌의 원로로 예전에 돤치루이가 한창 위세를 떨칠 때에는 쉬수청과 함께 안복구락부를 조직하여 국회를 장악하기도 했다. 2차 펑즈 전쟁 직후 마리엔찌아가 부하들의 반란으로 쫓겨나자 안후이 독군이 되었다. 하지만 안후이 성은 그동안 이 세력, 저 세력의 각축장이었기에 여러 파벌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돈도 총도 없는 그가 안후이 성을 제대로 통치할 수 있을리 없었다. 결국 그 또한 얼마 되지 않아 주변의 핍박에 못이겨 거의 쫓겨나듯 자리에서 물러났다. 물론 그 뒤에는 장쭤린의 은밀한 사주가 있었다.

이들이 알아서 사임하자 장쭤린은 잽싸게 자신의 모사이자 심복인 양위팅을 장쑤 독군에, 지앙덩솬을 안후이 독군에 각각 임명하였다. 또한 제2군 군장 리징린(李景林, 이경림)은 즈리 독군을, 제5군 부군장 칸자오스(阚朝玺, 감조새)는 러허 도통을 차지했다. 장쭝창 역시 장쑤-안후이-산둥 삼성의 초비 총사령관(蘇皖魯三省剿匪总司)과 산둥 독군이 되었다.

장쭤린과 펑톈군벌. 제2차 펑즈 전쟁에서 승리한 장쭤린은 중국 최강의 군벌이 되어 그 위세는 위안스카이 못지 않았다.

장쭤린은 동3성 이외에 러허성에서 즈리성의 절반, 산둥성, 장쑤성, 저장성과 안후이성까지 광대한 지역을 수중에 넣었다. 중국의 부와 힘이 모두 집중된 지역이었다. 더욱이 수도 베이징이 있는 즈리성은 말할 것도 없고, 장쑤성은 위안스카이 시절 북양군의 이인자였던 펑궈장의 지반이었던 곳이다. 안후이성 역시 돤치루이의 고향이자 정치적 기반이기도 하였다. 북양 군벌들로서는 뿌리이자 심장부였다. 그런데 장쭤린이 안후이 파 독군들을 반 강제로 몰아내고 자기 부하들에게 나눠주자 돤치루이는 분노를 터뜨리면서도 냉혹한 현실을 절감해야 했다.

13년 전 신해혁명이 일어났을 때만 해도 장쭤린은 한낱 변방인 펑톈의 치안을 맡은 일개 순방영의 통령에 지나지 않았고 부하들 또한 비적 떼를 긁어모은 오합지졸이었다. 면, 돤치루이는 위안스카이를 대신하여 청나라의 모든 군권을 쥐고 북양군을 호령하는 육군 총장이었다. 장쭤린 따위는 감히 올려다보지도 못할 구름 위의 존재라 할 만 하였다.

하지만 리훙장이 설립한 북양무비학당을 졸업하고 위안스카이와 함께 북양군을 창설했던 북양의 원로들은 청조가 몰락하고 군웅들이 치열한 항쟁을 하는 과정에서 하나같이 쫓겨나거나 허울 뿐인 존재로 전락하였다. 지금 천하의 실력자들 중에서 더 이상 북양의 정통 계승자라고 칭할 만한 자는 남아 있지 않았다. 한 때 높은 지위와 광대한 지반, 막강한 군사력을 가졌던 그들이 몰락한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봉건 시대 중국의 관료 사회를 다룬 천웨이 교수의 <관리의 비밀>에서는 당시 조정 관료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윗 사람의 비위를 잘 맞추고 동료들과 말썽이 없으며 아랫 사람들을 잘 통제하는 것이다. 이것을 잘 하는 사람이 바로 유능한 관료였고 출세하는 방법이었다. 나라 밖의 사정이나 백성의 마음은 읽지 못하여도 조정 내의 사정에는 모르는 것이 없었다. 그래야 벼슬은 물론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지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치세의 기준이다. 치세에는 능신이라도 난세에 일어선 자들을 무슨 수로 이기겠는가. 과거 "북양의 호랑이"이라고 불리었던 돤치루이는 그나마 이들 중에서 가장 나은 축에 속했지만 이제는 실권 없는 허수아비로 장쭤린의 눈치를 보아야 할 판이었다. 설령 위안스카이가 있었더라도 다르지 않았으리라.

* 쑨촨팡, 오성연합군을 결성하다

즈리파의 맹주인 우페이푸가 제2차 펑즈 전쟁의 패배로 겨우 목숨만 건져서 근거지인 뤄양으로 도망친 뒤, 스스로 지리멸렬하는 즈리의 세력을 다시 규합한 것은 푸젠 독군 쑨촨팡(孫傳芳, 손전방)이었다. 그는 북양육군속성학당(北洋陸軍速成学堂, 1903년 위안스카이가 북양의 인재를 배출하기 위해 수립한 군사학교. 당시 중국 3대 군사학교의 하나로 손꼽혔다. 신해혁명 이후 "바오딩 육군군관학교(保定陸軍軍官學校)"로 개칭한다.)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인재였다. 쑨원의 후원을 받는 자오헝티가 후베이성을 침공하자 이를 격파하였고 북벌에 나선 쑨원의 군대를 무찌르고 푸젠성을 탈환하는 등 그의 군사적 역량과 지략, 리더쉽은 우페이푸, 펑위샹에도 결코 뒤지지 않았다.

한편, 장쭝창이 창장 하류 유역을 차지한 뒤 펑톈군은 더 이상 남하하지 않은 채 주저앉은 채 쑨촨팡과 대치 상태를 유지하였다. 만약 장쭤린이 여세를 몰아서 숨쉴 틈 없이 파죽지세로 밀어붙였다면 천하의 주인은 틀림없이 그가 되었을 것이다. 진격이 지지부진한 것은 군비와 병참 문제도 있었지만 장쭤린 스스로 중국의 지도자에 걸맞는 국가 대계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생일 잔치를 성대하게 열거나 돤치루이, 펑위샹과 권력 다툼을 하면서 베이징 정부의 주도권을 장악하기에만 급급하였다. 결국 장쭤린은 벼락 출세한 군벌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 부하들 역시 자기 지반을 확장하고 조금이라도 더 많은 땅을 먹는데만 혈안이 되었다. 

우두머리들이 이러하니 펑톈군의 말단 병사까지도 기강이 해이해지는 것은 당연하였다. 점령지에서 온갖 행패를 부리며 민가를 약탈하거나 열차를 습격하여 물건을 강탈하는 등 비적질도 서슴치 않았다. 한낱 군벌의 용병에 불과한 이들에게는 장제스의 북벌군이나 훗날 국공 내전에서 마오쩌둥의 공산군이 보여주는 인상적인 열의와 의지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민심은 점점 장쭤린에게서 멀어졌다.

논공행상을 놓고 펑톈군 내부의 파벌 싸움도 격화되었다. 장쭝창이 중국 최대의 국제 도시 상하이를 차지하자 장쭤린은 그의 세력이 지나치게 커져서 통제 불능이 될까 "역시 산둥성은 산동 사람이 다스려야 한다"면서 산둥 독군에 임명하였다. 장쭝창은 감히 장쭤린을 거역할 수 없어서 순순히 고 상하이에서 물러나야 했지만 마음 속으로 불만이 컸다. 장쭤린은 처음에는 상하이와 난징이 딸려 있는 장쑤성을 제1군장 지앙덩선에게 맡기고 안후이성은 제3군 부군장 궈쑹링(郭松齡, 곽송령)에게 줄 참이었다. 그런데 장쭤린의 참모창 양위팅(杨宇霆, 양우정)이 장쑤성을 탐을 내어 결국 그 자리를 차지하였다.

양위팅(杨宇霆, 1886~1929) 일본 육사를 졸업한 후 제27사단장이었던 장쭤린에게 발탁되어 펑톈군 참모장과 훈련총감, 동3성 병기총감 등 주로 후방 임무를 맡았으며 궈쑹링과 함께 오합지졸에 불과했던 펑톈군을 현대화된 최강의 군대로 만들어 내었다. 장쭤린-장쉐량 시절 펑톈군에는 크게 3개의 파벌이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양위팅의 사관파(일본 육사 출신)이었다. 그러나 야심가인데다 장쭤린을 믿고 오만방자하게 행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장쭤린이 죽은 뒤 관동군을 등에 업고 장쉐량과 권력 다툼을 하다가 결국 장쉐량의 책략에 넘어가 총살당한다.

양위팅은 청말에는 과거에 합격하여 "수재" 칭호를 받았고 일본 육사 포병과를 졸업하였다. "小제갈량"이라고 불릴 만큼 두뇌가 명석하였고 장쭤린의 지혜 주머니 역할을 하였다. 일자 무식의 비적 출신들이 모인 펑톈군에서는 보기 드문 인재라 할 만 하였다. 제2차 펑즈 전쟁에서는 펑톈군 참모장을 맡아서 눈부신 활약을 했다. 하지만 자신의 재능을 지나치게 과신하는데다 평소 장쭤린의 신임만 믿고 교만하여 주변 사람들의 불만을 샀다. 장쑤 독군이 되어 난징으로 내려온 그는 천댜오위안을 비롯하여 자신을 마중나온 현지의 사단장들과 관료, 정치인들 앞에서 한껏 거드름을 부렸다.

"장쑤는 하는 짓이 영 마땅치 않다. 군대도 군대같지 않고 정치도 정치같지 않다. 뭐든 펑톈만 못하다. 이런 곳에는 오고 싶지 않았지만 우정(雨亭)이 굳이 나를 보내어 오게 되었다." 우정은 장쭤린의 호이다. 벼락출세한 놈이 장쭤린의 위세만 믿고 온갖 허세를 부리며 오만불손하게 말하는 양위팅에게 장쑤 사람들은 치욕을 느끼지 않을 리 없었다. 그 뒤에도 양위팅은 부하들에게 걸핏하면 말끝마다 "너희들은 도대체 수준이 형편없구먼. 잘 좀 해보게."라고 나무래면서 온갖 망신을 주기 일쑤였다. 여기다 펑톈이나 타 지역 출신들이 장쑤성의 요직을 죄다 차지하였다. 참다 못한 이들은 쑨촨팡과 몰래 손을 잡고 기회를 보아서 양위팅의 뒷통수를 치기로 하였다.

양위팅은 참모로서는 그야말로 유능했지만 도저히 한 성을 다스릴 그릇이 아니었다. 펑톈군 병사들은 군기가 매우 문란하였다. 함부로 물건을 빼앗고 마약을 팔고 부녀자들을 강간했다. 행정은 마비되어 무법천지나 다름없었다. 원성이 자자했지만 양위팅은 한귀로 흘리면서 주색 잡기에나 열을 올릴 뿐이었다. 5월 30일에는 상하이의 번화가인 난징루(南京路)에서 상하이 대학 연합회 소속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동맹 휴학과 노동자들의 대규모 파업 투쟁이 일어났다.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는 20만명, 동맹휴학에 참여한 학생은 5만명에 달했다. 5.4 운동 이래 최대의 反제국주의 운동이었다.

5.30 참안 당시 상하이 난징루에 모여든 시위대의 모습. 보름 전인 5월 15일 일본계 방직공장에서 노동자들이 공장 폐쇄에 맞서 시위를 벌이다가 일본 경찰의 총에 맞아 죽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상하이의 공동 조계 전체로 시위가 확산되었으나 장쭤린은 제국주의 열강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상하이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투입하여 철저하게 탄압하였다. 5.30 참안은 5.4운동 이래 최대의 반제국, 반군벌 시위였으며 1년 뒤 광저우의 국민정부가 군벌 타도를 외치며 북벌 전쟁을 개시하는데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런데 영국, 미국, 이탈리아, 일본 등 열강들의 군함이 상하이로 출동하고 군대가 상륙하여 상하이 시가지를 점령하였다. 또한 수만명의 시위대를 향하여 무차별적으로 실탄 발사를 했다. 수십명이 죽고 수백명이 체포되었다. 펑톈군도 출동했다. 하지만 이들은 상하이 전역에 계엄령을 선언하고 시위대의 체포에 나섰다. 자국민을 보호하는 대신 열강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데 급급했던 것이다. 이것이 중국 역사에서 말하는 이른바 "5.30 참안(五卅慘案)"이다. 이 사건은 중국 전역에 반제국주의, 반군벌 감정에 불을 붙였다. 홍콩, 광저우 등 전국 각지에서 시위가 열렸으며 장쭤린에게 비난이 쏟아졌다.

민심이 장쭤린에게서 멀어지는 것을 알아차린 쑨촨팡은 장쭤린 타도 계획을 세웠다. 그는 자신의 참모장인 양원카이(楊文愷, 양문개)를 몰래 베이징으로 보내어 펑위샹과 손을 잡았다. 비록 우페이푸를 배신했지만 펑위샹 역시 어쨌든 즈리파의 일원이다. 또한 장쭤린의 압박을 받고 있었기에 쑨촨팡이 손을 내밀자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두 사람은 의형제를 맺고 장쭤린을 협공키로 하였다. 다음으로 양원카이는 허난성으로 향했다. 허난 성은 원래 우페이푸의 세력권이었지만 제2차 펑즈 전쟁 직후 펑위샹의 동맹자인 후징위(胡景翼, 호경익)가 즈리파 세력을 몰아내고 허난 독군이 되었다. 그러나 얼마 뒤인 1925년 4월에 병사하였고 위에웨이준(岳维峻, 악유준)이 후임자가 되었다. 위에웨이준 역시 양원카이에게 협력을 약속하였다. "저장이 펑톈의 머리를 치고, 허난이 그 허리를 치며, 서북(펑위샹)이 꼬리를 치자!"

1925년 10월 7일, 항저우에서 저장성과 안후이성, 푸젠성, 장쑤성, 장시성 등 다섯개 성의 즈리파 군벌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이른바 反펑톈 5성 연합군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쑨촨팡은 5성 연합군의 총사령관으로 추대되었다. 장쭤린 타도의 기치가 선 것이다. 신해혁명의 14주년 기념일인 10월 10일 5개 사단으로 편성된 5성 연합군의 군대가 일제히 진격에 나섰다. 목표는 상하이와 난징.

장쭤린이나 양위팅은 쑨촨팡이 공격에 나설 것이라고는 감히 꿈에도 꾸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펑톈군은 톈진에서 난징까지 약 1200km에 걸쳐서 병참선이 길게 늘어진 채 병력이 여기저기 분산되어 있었다. 상하이를 방비하는 군대는 고작 1개 여단에 불과했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 격이었던 양위팅은 기세가 하늘을 찌르는 즈리군과 감히 싸울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상하이를 포기하고 군대를 철수시켰다. 10월 16일 쑨촨팡은 상하이에 무혈 입성하였다. 펑톈군은 상하이를 버리고 허둥지둥 도망쳤다. 18일에는 쑤저우가 함락되었고 20일에는 즈리군이 난징 교외까지 진격하였다. 여기다 그동안 양위팅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천댜오위안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난징을 방어하는 펑톈군 간부들을 불러모아 술자리를 연 후 그 자리에서 모조리 체포하였다. 양위팅은 속수무책이었다.

장쭤린은 양위팅에게 전보를 보내어 모든 병력을 쉬저우로 철수시키라고 지시하였다. 양위팅도 대세가 이미 결정났다고 판단하고 밀실 통로를 이용하여 난징을 탈출하였다. 다음날 난징은 쑨촨팡의 손에 넘어갔다. 출전한지 고작 10일 만이었다. 장쭤린 스스로도 "신속의 도주"라고 평했을 만큼, 펑톈군은 변변한 전투도 없이 썰물처럼 북쪽으로 물러났다. 그 와중에 즈리군의 추격을 받아 괴멸되거나 항복하는 부대가 부지기수였다. 그나마 리우위페이(劉翼飛, 유익비)가 지휘하는 1개 여단이 난징 동쪽에서 즈리군을 저지했지만 8시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결국 중과부적으로 전멸하였다. 리우위페이는 승려로 변장하여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다.

펑톈군은 쉬저우에서 일단 멈춘 다음, 방어선을 구축하고 병력의 정비에 나섰다. 장쭤린은 쉬저우를 사수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산둥 독군 장쭝창도 자신이 자랑하는 장갑열차와 함께 제47혼성여단을 남쪽으로 급파하였다. 또한 펑톈군의 항공부대도 지상 지원을 위하여 출동하였다. 쉬저우에 집결한 펑톈군은 약 7만명에 달했다. 선두에 선 부대는 사납기로 이름난 장쭝창 휘하의 백군 출신 러시아인 부대였다. 적백내전에서 백군으로 가담했다가 패주하여 만주로 넘어온 러시아인들로 구성된 용병들이었다. 거칠고 용감하기는 했지만 군기가 엉망이었다. 11월 1일 펑톈군은 이들을 앞세우고 반격에 나섰다. 쉬저우 전면에서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다. 러시아인 용병들은 술에 만취된 채 즈리군의 진영을 향해 용맹하게 돌격하였다. 이들을 향해 기관총을 불을 뿜고 포탄이 작열하였다. 순식간에 3백여명의 시체가 쌓였다. 겁에 질린 러시아인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또한 즈리군은 우회하여 펑톈군의 후방을 급습하였다. 펑톈군은 말그대로 괴멸하였다. 장갑열차들도 파괴되거나 북쪽으로 도주하였다. 여기다 위에웨이준의 허난군이 출동하여 산둥성을 위협하자 장쭤린은 쉬저우를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펑톈군은 장쑤성에서 완전히 물러나서 산둥성으로 퇴각하였다. 11월 8일 쉬저우는 쑨촨팡의 손에 넘어갔다. 하지만 그 역시 더 이상 진군하지 않은 채 항저우로 되돌아갔다. 장쭤린의 완패였다. 장시성과 안후이성, 장쑤성에서 펑톈파의 세력은 완전히 구축되었다.

쑨촨팡은 난징에서 쉬저우 이남 5개 성의 총사령관으로 취임하였고 즈리파를 규합하는데 성공하면서 장쭤린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군벌이 되었다. 또한 일본인 군사고문을 초빙하여 군대의 정비에 착수하였다. 이때 쑨촨팡을 보좌한 사람이 태평양전쟁 당시 지나파견군 총사령관이었던 오카무라 야스지(岡村寧次)이다. 오카무라는 훗날 국공내전에 패배하여 타이완으로 도주한 장제스의 군사 고문을 맡아서 타이완군의 현대화에 앞장서게 된다.

이로서 장쭤린은 천하 통일을 코앞에서 놓친 격이었다. 일을 그르친 것은 일차적으로는 양위팅의 무능함에 있지만 가장 큰 책임은 장쭤린 자신의 교만함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작은 승리에 도취되어 군벌 특유의 나쁜 버릇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전열을 정비하고 다시 남하할 생각이었지만 그 직후 중국을 또 한번 진동하는 큰 사건이 벌어졌다. 11월 22일 장쭤린의 오른팔이자 펑톈군의 군사 대권을 쥐고 있는 궈쑹린이 장쭤린 타도의 기치를 올렸다. 이른바 "反펑톈 전쟁(反奉战争)"이 시작된 것이다.

ps. 정말 오랜만에 적은 느낌. 도올 선생이 <차이나는 도올>에서 "장쉐량의 스승이자 위대한 민족주의자"라며 격찬을 하던(내가 보기에는 개소리인) 궈쑹링의 난까지 다룰 생각이었으나 생각 외로 길어져서 다음으로 패스. 이제 장제스의 북벌 전쟁도 머지 않았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