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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 전쟁과 인물, 사건으로 보는 중국 현대사 > 27화 - 장쭤린 칼을 갈다/blog.naver.com/atena

* 왜 중국은 조각나지 않았는가

장쭤린은 베이징 정부가 자신을 동3성 순열사에서 파면하자 오히려 1922년 6월 8일 동북의 주요 정치인과 관료, 군인들을 모두 모아서 "동3성 회의"를 개최한 후 동3성의 독립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동3성 보안총사령(东三省保安总司令)"이라는 거창한 직함을 만들어서 스스로 그 자리에 앉았다. 펑-즈전쟁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장쭤린 정권이 붕괴되지 않은 채 독립을 선포하고 중앙에 대항할 수 있었던 것은 동북 인민들이 그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여기서 말하는 "독립"이란 단순히 중앙 정부의 명령에 따르지 않겠다는 소극적인 의미일 뿐, 아예 중국에서 떨어져 나와서 주권 국가로서 분리 독립을 하겠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이다. 장쭤린 외에도 신해혁명 이래 군벌 내전기에는 숱한 군벌들이 "독립"을 선언했다가 취소하기를 반복하였다. 우창 봉기가 일어나자 각 성 정부는 차례로 독립을 선언하였고 청조가 무너지고 중화민국이 수립되면서 독립을 취소하였다. 또한 위안스카이가 제제를 선언하고 옥좌에 앉으려고 했을 때에도 윈난 독군 차이어가 윈난성의 독립을 선언한 후 호국 전쟁을 일으켰다. 그의 반란에 여러 성들이 호응하자 결국 위안스카이도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이 시기의 독립 선언이란 중앙과 지방의 갈등 속에서 중앙에 대한 일종의 불복종 운동이자 자치 운동일 뿐,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독립운동"이나 "분리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민국 시대의 혼란기에 실질적으로 중국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주권 국가로서 분리 독립을 시도한 예는 중국 내 수많은 소수 민족 중에서도 외몽골과 티베트, 위구르족 정도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실제로 독립을 쟁취한 경우는 외몽골 정도에 불과하였다.

1911년 영국의 후원을 받아 청조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던 티베트는 국제 사회에서 주권국가로 인정받지 못한데다 1951년 12월 마오쩌둥의 무력 침공과 정치적 압박에 못 이겨 결국 독립을 취소한 후 중국의 일개 성으로 편입되었다. 신장성 서부 지역에서는 1930년대부터 40년대까지 일부 위구르족을 중심으로 분리 독립 운동이 전개되었다. 중일전쟁 중에는 위구르 족이 무장 반란을 일으켜 1944년 11월 12일 우루무치에서 동 투르키스탄 공화국(Eastern Turkistan Republic)의 건국을 선포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근"과 "채찍"을 앞세운 장제스 정권의 압박으로 독립을 선언한 지 1년 여만인 1946년 1월 중국 내 자치 공화국의 지위를 인정받는 조건으로 독립을 취소하였다. 국공내전 말기 펑더화이가 이끄는 중공군이 1949년 8월 신장성을 침공하자 위구르족 지도부는 중공과 타협하여 공화국을 해체하고 신장성에 편입되는데 동의하였다.

이 과정에서 티베트와 위구르족 지도부는 독립을 지지하는 강경파와 자치를 지지하는 타협파로 분열되었고 결국 타협파가 승리했다. 중국으로의 편입을 끝까지 반대했던 민족주의 강경파들은 대부분 체포되어 처단되었고 일부는 국외로 탈출한 후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꾸준히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하지만 국제 사회의 후원을 받지 못하는데다 실질적인 독립의 역량 또한 미미하기 짝이 없다. 비록 소수 민족의 분리 독립 운동이 중국 사회의 불안 요소로 꼽히기는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들이 독립을 쟁취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물론 일차적인 이유는 중국의 강력한 동화 정책과 탄압 때문이지만, 이들 민족 내부에서도 모두 "독립"에 찬성하는 것은 아니기에 투쟁 역량을 하나로 모을 수 없다는 점이다. 결국 외몽골만이 독립을 쟁취한 유일한 케이스이지만 열강들 사이의 복잡한 정치적 역학 구도 속에서 소련이 외몽골을 무력으로 점령한 후 괴뢰 정권을 수립하여 중국과의 완충지대로서 삼은 덕분이었다. 소련의 개입이 아니었다면 외몽골 역시 독립을 획득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외에도 청 말에 열강들이 중국의 일부 지역을 분할 점령한 것이나 중일전쟁 중에는 일본이 동북과 내몽골 일대에 만주국, 몽강국과 같은 친일 괴뢰국을 세우고 소수 민족의 분리 독립 운동을 강력하게 후원한 바 있지만 일본의 패망과 함께 모두 끝장났다.

그렇다면 왜 실패했는가. 어째서 중국은 분열과 내전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이나 오스만 제국, 또는 냉전 종식과 함께 17개의 나라로 쪼개졌던 구소련처럼 완전히 해체되어 여러 개의 나라로 갈라지지 않았는가. 왜 소수 민족들은 정치적 혼란을 기회삼아 독립 투쟁에 나서지 않았는가. 또한 티베트와 위구르의 독립 운동은 왜 실패로 끝났는가. 장쭤린이나 여러 지방 군벌들은 소극적인 불복종 운동이 아니라 아예 독자적인 정부를 수립하고 분리 독립을 하려고는 하지 않았는가.

유럽이 로마 제국의 붕괴 이후 수많은 나라들로 분열된 것과 달리 중국은 다민족 국가로서 거대한 국가를 유지하는 이유에 대하여 제럴드 다이아몬드를 비롯한 많은 서구 학자들은 그동안 "유럽에 비하여 중국은 산이나 하천과 같은 지리적인 경계가 적기 때문"이라고 설명해 왔다. 하지만 《정복의 조건(Why Did Europe Conquer the World?)》의 저자 필립 T. 호프먼(Philip T. Hoffman) 교수는 유럽식 사고 방식에 근거한 막연한 생각일 뿐, 중국 역시 유럽만큼이나 지리적 경계가 되는 산과 하천이 많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없다고 일축한다.

중국을 하나로 묶은 근본적인 이유는 자연 지리가 아니라 사람들의 의식에 있었다. 중국은 한족을 비롯한 중국 내 여러 민족들을 "중화 사상"으로 통합하는데 성공하였다. 춘추시대만 해도 중원의 열국들은 주나라를 상국으로 떠받든다는 것 이외에는 상호 동질감이 없었으며 각국은 도시 연맹에 머물렀다. 하지만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더 이상 봉신적 계약관계가 아닌 임금이 관료를 지방으로 보내어 직접 통치하는 중앙집권화를 실현하였으며 사상적으로도 유가와 법가와 같은 국가와 백성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이데올로기가 등장하였다.

전국시대 말기 6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각국의 서로 다른 법 제도와 통치철학, 문화, 사상을 진나라의 방식에 따라 하나로 통일하였고 진나라를 제외한 나머지 6국은 단순히 진나라의 피정복민이 아니라 "같은 중원의 백성"이라는 인식을 점차 공유하게 되었다. 덕분에 진나라는 진시황이 죽은 뒤 얼마되지 않아 내란으로 붕괴되었지만 다시 춘추전국시대로 돌아가는 대신 짧은 내전을 겪은 뒤 한나라로 재통일되었다. 이후 2천년이 넘는 시간 동안 중국은 왕조 말기에 여러 세력으로 분열되었다가 다시 통일되기는 반복하였으며 주변 이민족의 끝없는 침략에도 불구하고 분열되기 커녕 오히려 중국의 일부로 흡수하였다.

중국의 소수 민족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티베트나 위구르 등 독립 투쟁을 벌이는 일부 민족을 떠올리고 마치 중국 내 모든 소수 민족들이 그렇다는 식으로 성급하게 생각한다. 어떤 이는 언젠가 중국이 다시 혼란에 빠지면 소수 민족들이 분리 독립하여 여러개의 나라로 쪼개질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단일 민족=단일 국가라는 개념에 익숙하여 다민족국가인 중국 사회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중국 사회에서 반드시 "소수 민족=이민족"은 아니다. 이것은 엄연한 별개이다.

청말 이래 중국은 전체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한족과 55개의 소수 민족으로 구성된 나라이다. 한족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다보니 자연스레 한족 중심이 될 수 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한족이 다른 소수 민족을 일방적으로 통치하는 지배-피지배 관계는 아니다. 오랫동안 중국의 변방에서 생활하던 소수 민족들은 문명 수준이 낮고 인구가 희박하며 독자적인 국가를 수립해 본 경험도 거의 없는데다 중국에 편입된 지 적어도 수백년 이상의 시간이 흘렀다. 따라서 소수 민족들은 한족과 차별화되는 자신들만의 국가 정체성을 형성할 수 없었으며 자연스레 중국 사회의 일부로 융합되었다. 그나마 중국에 가장 늦게 편입된데다 19세기 중엽까지도 변방으로서 고도의 자치권을 누렸던 티베트와 위구르, 외몽골만이 강한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하였지만 이들 역시 독자적인 국가를 수립하기에는 역량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20세기에 와서 전 세계적으로 근대적인 민족주의가 대두되었음에도 만주족을 비롯한 중국 내 대부분의 소수 민족들은 한족과 마찬가지로 "중국인"이라는 국가적인 정체성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중국 전역에 흩어져 있는데다 한족에 동화되었기에 독립의 의지는 거의 없었다. 따라서 중국의 민족주의는 개별 민족들의 민족주의가 아니라 중국 사회 전체를 아우르면서 외세에 대항하기 위한 소위 "중화 민족주의"가 되었다. 비록 한족과 소수민족의 갈등은 존재하지만 어디까지나 중국이라는 테두리 안에서의 문제일 뿐, 중국을 분열시킬 정도로 크지는 않다. 이는 미국 사회의 뿌리깊은 흑백갈등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분열이나 분리 독립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과 같다.

반면, 로마 제국은 그들의 우수하고 찬란한 문화와는 별개로 정치와 사회 구조상 느슨한 도시 연맹 체제에서 탈피하지 못하였다. 로마 제국을 유지하는 것은 오직 "로마"라는 존재에 있기에 그 구심점이 사라지자 로마 제국 또한 하루 아침에 사라진 것이다. 또한 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 더 이상 정치적으로 유럽을 통합할 수 있는 세력은 등장하지 못했으며 유럽 각국은 서로 분리된 채 대립과 경쟁을 벌이며 각자 독자적인 정체성을 형성하였다. 이것이 유럽과 중국의 차이이다. 오스트리아와 오스만 제국 역시 황제의 권위와 강압적인 통제 정책으로 억지로 제국 내 여러 민족들을 묶었을 뿐, 이들에게 "한 나라의 국민"이라는 정체성을 부여하지는 못했다. 따라서 통제력이 사라지자 제국도 통째로 사라진 것이다.

장쭤린이 동북을 중국과 분리하여 별도의 국가로 만들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이다. 영구적인 독립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몇몇 사람이나 정치 세력의 의지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와 함께 국가로서 자립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고 독자적인 법 제도를 마련해야 하며 국제 사회에서 독립 국가로 인정받기 위한 외교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일개 군벌 정권에 불과한 장쭤린 정권은 그만한 역량이 없을 뿐더러 동북 인민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쳤을 것이다. 장쭤린 정권에 가담한 지식인 관료 계층은 물론이고 대다수 동북 인민들의 입장에서 "자치"는 몰라도 장쭤린 때문에 아예 "중국인"이라는 정체성까지 벗어던질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설령 장쭤린이 일본과 결탁하여 동북의 분리 독립을 추진한들 인민의 지지와 자립 역량이 없는 이상 결국 푸이의 만주국처럼 한낱 괴뢰 정권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장쭤린 스스로도 그럴 의사는 없었다. 그는 본질적으로 봉건 군벌이지 독립 운동가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자신의 지반을 이용하여 중앙의 권력을 다투는 것이 목적이었다. 따라서 장쭤린이 말하는 "동3성의 독립"이란 정치적 라이벌인 우페이푸에게 대항하기 위한 정략적인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 동북을 개혁하다

펑즈 전쟁에서 장쭤린은 우페이푸가 지휘하는 즈리군의 실력을 확실하게 절감하였다. 군대의 숫자와 무기에서는 일본의 후원을 받는 펑톈군이 우세하였다. 그러나 위안스카이가 남긴 북양군의 적계부대인 즈리군은 중국의 중앙군으로서 최강의 군대였다. 반면, 지방 순방영과 비적떼를 긁어 모아서 편성한 펑톈군은 군복을 걸친 도적떼일 뿐이었다. 아무리 좋은 무기라도 돼지목의 진주였다.

지휘관의 역량은 더욱 컸다. 우페이푸를 비롯한 즈리군의 장군들은 실전경험이 풍부한 백전노장이었지만 장쭤린의 부하들은 대부분 마적 시절부터 함께 했던 자들이었다. 의리와 충성심은 있어도 군사 교육을 받은 적도 없고 전투의 경험도, 지휘 능력도 없었다. 애초에 싸움이 될 리 없었던 것이다. 전투는 주먹구구식이었으며 기율도 엉망이었다. 심지어 펑톈군의 지휘관들은 상황이 불리해지자 부하들을 버린채 혼자 도망쳤고 덕분에 많은 부대가 총 한발 쏘지 않고 투항하였다. 이로서 전군이 괴멸하였다.

그러나 펑톈군 중에서도 일본군 교관들에 의해 훈련받았고 유능한 지휘관이 지휘하는 부대는 매우 강했다. 대표적인 예가 장쉐량의 제3 혼성여단과 궈쑹링의 제8 혼성여단이었다. 산하이관에서 장쭤린이 즈리군의 강력한 공격을 끝까지 저지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이 때문이었다. 만약 모든 부대를 이렇게 바꿀 수 있다면 펑톈군은 중국에서 감히 대적할 상대가 없을 것이다.

장쭤린은 비록 마적 출신의 무식한 군인이었지만, 세상을 보는 탁월한 눈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현실에 안주하거나 구태의연한 방법으로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위인이 아니었다. 우페이푸를 이기기 위해서는 동북을 뿌리부터 바꾸는 수 밖에 없다고 여긴 그는 머뭇거림없이 강도 높은 개혁을 시작하였다. 오나라 임금 부차에게 복수하기 위해 쓰디쓴 쓸개를 씹었던 월나라 임금 구천의 모습이라 하겠다.

첫번째는 대대적인 숙군 작업이었다. 그동안 펑톈군의 핵심은 장쭤린, 장징후이, 탕위린과 같은 장쭤린과 젊은 시절부터 호형호제하던 자들이었다. "구파(舊派)"라고 불리는 이들은 무능하기 짝이 없는데다 장쭤린과의 인간적인 관계를 이용하여 부정축재나 일삼고 있었다. 장쭤린은 이들을 차마 하루아침에 쫓아내지는 않았지만 대신 군권을 빼앗고 명예직을 맡겨 세력을 약화시켰다. 구파를 대신해 봉천군의 새로운 실세는 양위팅과 궈쑹링이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 포병과 출신의 양위팅(楊宇霆)은 오만하지만 주변에서 '小 제갈량'이라 불릴 만큼 유능한 자였다. 그는 펑톈군 참모장 겸 동3성 병공창(东三省兵工厂)의 총감을 맡아 장쭤린의 오른팔이 되었고 펑톈군 내에 일본 육사 출신들로 구성된 "사관파"를 형성하였다. 

또 한사람은 베이징 육군대학 출신의 궈쑹링(郭松齢)이었다. 중국 현대사 교양 프로그램인 《차이나는 도올》에서 도올 선생이 "장쉐량의 참 스승"이라며 격찬하는 궈쑹링은 젊은 시절 중국 동맹회에 가입하였고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펑톈에서 반청 혁명을 일으키려다 펑톈의 치안을 맡고 있던 장쭤린에게 체포되기도 했다. 또한 1917년 쑨원이 호법전쟁을 일으키자 자신의 지위를 내던지고 광시성으로 내려가 혁명군에 가담하는 등 단순히 자신의 출세와 부귀 영화에 눈이 먼 것이 아니라 외세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중국을 근대화하고 하루라도 빨리 내전을 끝내야 한다는 근대 혁명 사상가이기도 했다.

위안스카이가 죽은 뒤 중앙의 정세가 갈수록 혼란스러워지자 세력 확대의 기회로 여긴 장쭤린은 펑톈군의 간부를 육성하기 위하여 1919년 2월 동3성 강무당을 대대적으로 확충하였다. 펑톈 교외에 있는 동3성 강무당은 자희 신정 시절인 1906년 동3성 총독이었던 쉬스창에 의해 설립되었다. 위안스카이가 톈진에 세운 북양육군강무당과 윈난 육군 강무당과 함께 중국 삼대 육군 사관학교 중 하나로 손꼽히는 명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신해혁명 이후 극심한 재정난으로 침체되었고 교관과 장비, 시설 부족으로 수준도 매우 낮았다.

장쭤린은 동3성 강무당을 간부가 매우 부족한 펑톈군의 핵심 간부 양성소로 바꾸기 위하여
스스로 교장을 맡아 조직과 편제를 체계화하고 궈쑹링을 교관으로 임명하고 생도들에게 근대 전술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어린 학생들은 물론이고, 펑톈군의 고급 간부들도 장쭤린의 권유를 받아 줄줄이 입교한 후 근대 군사 교육을 받았다. 

그 중에는 장쭤린의 장남 장쉐량도 있었다. 그는 포병과에 입교하였다. 궈쑹링은 장쉐량을 엄격하게 훈련시켰으며 장쉐량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두 사람은 의형제를 맺고 서로 호형호제할 만큼 오랫동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비록 훗날 궈쑹링은 장쭤린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참혹한 죽음을 맞이하지만 그가 육성한 "육대파"는 장쉐량의 강력한 지지 기반이 되었고 장쭤린이 폭사한 뒤 장쉐량은 육대파의 지지를 받아서 다른 파벌을 누르고 신속하게 대권을 계승할 수 있었다.

"동3성 강무당"의 전경. 1927년 9월 장쉐량은 "동북 육군 강무당(東北陸軍講武堂)"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황푸 군관학교와 윈난 강무당, 바오딩 군관학교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중국의 4대 군관학교 중 하나가 되었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일어나 폐교될 때까지 총 8900명에 달하는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장쭤린은 전투에서 비겁했던 자는 용서없이 총살시켰다. 또한 잘못을 저지른 자, 능력이 부족한 자 역시 엄중하게 처벌하였다. 빈자리는 근대적인 군사 교육을 받은 인재들을 전국에서 초빙하여 채워 넣었다. 특히 일본 육사 출신과 베이징 육군대학 출신을 중용하였다. 병사들 중에서 늙고 병들고 쓸모없는 자는 넉넉한 노잣돈을 주고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젊고 능력있는 자만 가려 남겼다. 이로 인해 펑톈군은 20만명에서 7만명 정도로 줄어들었고 2/3가 숙군되었지만, 그만큼 정예부대로 거듭난 것이었다.

포병 훈련 중인 펑톈군 병사들.

두번째는 육해공군의 현대화였다. 장쭤린은 펑즈전쟁을 통하여 단순히 군대의 머릿수만 늘리는 것은 의미가 없으며 현대전에서 화력과 기동력, 해공군의 중요성이 어느 정도인지 절감하였다. 그는 일본과 구미 각지에서 최신 무기를 대량으로 들여오는 한편, 무기 확보를 외세에 예속되지 않도록 동북의 군수 산업을 확충하는데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가장 대표적인 군수공장이 동3성 병공창(东三省兵工厂)이다.

동3성 병공창의 전경. 만주 사변 이후에는 관동군에게 접수되어 38식 소총과 92식 중기관총 등 일본제 무기를 생산하였고 중일전쟁이 끝난 뒤에는 국민정부가 접수했으나 국공내전 말기 랴오선 전역에서 패배하자 장제스는 공산군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공군을 출격시켜 병공창을 폭파시켰다.

1921년에 설립된 동3성 병공창은 펑즈전쟁 이후 양위팅의 주도로 대대적으로 확충되었고 중국 최대의 군수공장이 되었다. 제2차 펑즈전쟁이 일어나는 1924년 당시 동3성 병공창은 매년 각종 야포 150문과 포탄 20만발, 독일제 마우저 Gew98 소총 6만정, 탄약 60만발, 기관총 1천여 정을 생산하였다.    

프랑스제 르노 FT-17 경전차와 영국제 휘펫 中전차(Mark A Whippet)으로 편성된 펑톈군의 장갑부대. 장쭤린은 당시 최신 무기였던 전차에도 주목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의 걸작 전차인 르노 FT-17은 무겁고 둔중하면서 다포탑을 탑재한 초기 전차들과 달리, 현대 전차의 기본을 갖춘 최초의 전차로 이후 전차 설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장쭤린은 1922년 말에 블라디보스톡을 통하여 36량을 수입한 후 중국 최초의 기갑 부대를 편성했다. 우페이푸와의 전쟁 등에 활용되었으며 1929년에 있었던 펑-소 전쟁에서도 투입되었고 일부는 만주사변 이후 관동군의 손에 넘어갔다.

장쭤린은 해공군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펑즈전쟁에서 약 40대의 항공기를 가지고 있던 즈리군은 펑톈군의 머리 위를 맴돌며 쉴새 없이 폭탄을 떨어뜨리고 기총 사격을 가했다. 하늘로부터의 공격에 속수무책이었던 펑톈군은 폭음을 울리며 날아오는 항공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공황에 빠질 정도였다.
물론 펑톈군도 안-즈 전쟁 당시 안후이군에게 노획한 십여대의 항공기가 있었다. 하지만 그걸 조종할 수 있는 파일럿도 없었고 훈련시킬 교관도 없었다. 정비 기술자도 없었다.

공군의 건설은 장남 장쉐량이 앞장섰다. 장쭤린은 1922년 9월 4일 동3성 항공처를 설립하고 장쉐량을 총감으로 임명하였다. 이전부터 장쉐량은 비행기에 무척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스스로 조종술을 배울 정도였다. 그는 펑톈 외곽에 비행장을 건설하고 프랑스인 교관과 항공기 기술자를 영입하여 공군을 갖추었다. 또한 파일럿의 훈련을 위해 동북 강무당 생도 중에서 우수한 자를 선발하여 35명을 프랑스의 항공학교로 유학보냈다. 이들은 제2차 펑즈전쟁에는 참여하지 못했지만 장쭤린이 승리한 뒤에 귀국하여 동북 공군의 핵심이 되었다.

제2차 펑즈전쟁에서 3개 비행대 100여대의 항공기를 보유했던 동북 공군은 군비 부족에 허덕이던 우페이푸의 중앙 항공대를 압도하는 등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었다. 이후에도 꾸준히 확충되어 만주 사변 직전에 오면 1개 혼성 항공대(5개 비행 중대) 약 300여대의 각종 항공기와 100여명의 파일럿을 보유하는 등 외형적으로는 중국 최강의 전력을 갖추었다. 다른 군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장제스조차 1936년에 와서야 그 정도의 전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동북 공군의 실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보여준다.

동북 공군 초기의 주력 기체 중 하나인 프랑스제 Caudron G.3 전투기. 1914년에 생산을 시작했으며 80마력 엔진을 탑재하였다. 최고 속력은 106km/h 정도였으며 1정의 기관총을 탑재하였다. 장쭤린은 30여대를 구매하였다.
마찬가지로 동북 공군 초기의 주력 기체였던 프랑스제 Breguet 19 전투 폭격기. 1922년에 생산을 시작했으며 승무원 2명에 450마력 엔진을 탑재하였다. 최고 속력은 214km/h에 7.7mm 비커스 기관총 1정을 탑재하였다. 장쭤린은 1923년부터 1928년까지 총 70여대를 구매하였다.
▲ 프랑스제 Potez 25 전투기. 1924년에 개발되었으며 475마력 엔진​을 탑재하고 최고 속도는 214km/h에 달했다. 제2차 펑즈전쟁 이후에 도입되었다.

동북에는 1918년까지 단 한척의 군함조차 없는 실정이었다. 중-소 국경을 따라 흐르는 쑹화 강과 헤이룽장 강을 항해하는 상선들은 주변에서 노략질을 하는 마적떼의 공격에 속수무책인 형편이었다. 따라서 당시 헤이룽장 독군이었던 바오구이칭(鮑貴卿)의 요청으로 1919년 7월 해군부는 제2함대에 소속된 포함 4척을 넘겨주었다. 그 중의 3척(리쑤利綏, 리지에利捷, 리톈利川)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돤치루이 정권이 대독 선전포고를 한 후 중국에 있던 독일, 오스트리아 포함을 나포하여 몰수한 것이었다. 

연안용 포함 리쑤(利綏), 원래는 독일 제국 해군 동양 함대 소속으로 함명은 "SMS Vaterland". 1903년에 schichau 조선소에서 건조되어 1905년에 상하이에 배치되었다. 창장을 항해하면서 중국 내 독일 조차지의 경비를 맡았다. 제1차대전 발발 당시에는 난징에 있었으나 중립을 지켰던 중국이 1917년 대독선전포고를 하면서 중국 정부에 의해 압류되어 중국 해군에 편입되었다. 배수량 280톤, 승무원 47명, 최고 속력 13노트, 88mm 포 1문, 50mm 포 1문, 맥심 기관총 2정 등으로 무장하였다.

또한 1912년 12월에는 하얼빈에 지린-헤이룽장 강방 함대 사령부가 설립되어 중-소 국경의 쑹화강과 헤이룽장강의 경비를 맡았다. 1920년 4월에는 상선을 개조한 4척의 포함을 추가로 확보하였고 강방함대의 전력은 포함 8척, 배수량 2,070톤으로 늘어났다. 동북의 유일한 해군 전력이었다.

그런데 강방함대는 장쭤린의 동북 정권이 아니라 베이징의 해군부 소속이었기에 장쭤린의 지시를 받지 않았다. 하지만 펑즈전쟁이 끝난 직후 장쭤린은 강방함대 사령관 왕충원(王崇文)과 협상하여 강방함대를 접수하였다. 강방함대는 해군부에서 독립하여 "헤이룽장 강방함대"로 개칭하고 동3성 보안 사령부에 편입되었다. 이로서 장쭤린은 처음으로 해군을 갖추게 되었다.

물론 이 정도로는 중국 해군의 태반을 장악하고 있는 우페이푸에게 대항하기에는 어림도 없다. 우페이푸를 꺾고 중원을 장악하려면 보다 강력한 해군력이 필요하였다. 장쭤린은 정규 함대로의 확대와 해군 전문 인력을 양성할 목적으로 1922년 8월 항경처(航警处)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강방함대 참모장 천훙리에(沈鸿烈)을 처장으로 임명하였다. 천훙리에는 일본 해군병 학교 출신으로 원래는 즈리파였다가 펑톈파로 전향하였다. 또한 당시 중국을 통틀어 몇 안되는 해군 전문가이기도 했다. 

천훙리에는 가장 먼저 일본 유학 시절의 동기생 20여명을 영입하여 동북 해군의 창설을 위한 간부를 확보하였다. 또한 해군 전력을 확충하기 위하여 상선을 개조한 2,700톤급 "전하이(镇海)"와 2,000톤급 "웨이하이웨이(威海)" 두척을 구입하여 해군 생도들을 훈련하기 위한 연습함으로 사용하였다. 전하이는 나중에 중국 최초의 수상기 모함으로 개조되어 장제스의 북벌군이 장악한 상하이를 폭격하기도 했다.

중국 최초의 수상기모함 전하이. 원래는 독일 해군의 수송선으로 독일 패전 이후 민간 상선으로 사용되다 장작림이 구입하여 연습함으로 사용하였다. 1926년 3월 친황다오에서 동북 해군 산하 "수상기부대(水面飞机队)"가 창설되면서 전하이를 수상기모함으로 개조하였다. 1927년 3월 7일 장제스의 북벌군을 저지하기 위하여 전하이와 순양함 하이치가 상하이로 파견되었고 전하이에서 출격한 수상기는 장제스 군대를 폭격하였다. 중국 해군사에서 군함에서 출격한 항공기가 육상 폭격을 실시한 최초의 사례였다. 최대 속도 10노트, 47mm 포 2문, 3인치 포 3문, 어뢰 등으로 무장했으며 수상기 2대를 탑재할 수 있었다.

당시 중국의 주요 해군은 우페이푸의 중앙 해군과 저장 독군 루융상 휘하의 상하이 독립 함대, 쑨원의 광둥 해군으로 나뉘었다. 하지만 군비 부족으로 열악하기 짝이 없었고 군함 역시 신해혁명 이전에 구입된 노후함들이었다. 전력을 보강하기는 커녕 군함의 수리조차 변변히 하지 못하는 처지인데다 장병들의 봉급은 몇개월씩 체불되는 등 사기도 땅에 떨어진 실정이었다. 하지만 장쭤린은 해군의 육성을 위해 다른 부처의 예산을 전용해서 지원할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비록 장쭤린이 육성한 해공군의 실력은 제2차 펑즈전쟁에서는 드러나지 않았으나, 그가 우페이푸를 꺾은 뒤  본격적으로 중원을 향해 남하하면서 막강한 함대와 공군력을 앞세워 단숨에 중국의 절반을 차지하게 된다. 1927년에는 발해 함대가 동북으로 귀순하였다. 이로서 동북 해군은 중국 전체 해군의 70%를 차지할 만큼 확대되었다.

장쭤린은 여러 군벌 중에서도 머릿수만 많은 군대를 현대적인 전투 부대로 탈바꿈하는데  적극적으로 나섰던 유일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동북의 경제력과 재정적 역량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른 군벌들이 설령 장쭤린 만큼이나 군의 현대화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고 한들 돈이 없는 이상 불가능하였다. 장쭤린의 가장 큰 차이점은 근대 공업과 철도 건설을 앞장서는 등 동북의 경제 발전에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다른 군벌들이 군비를 조달하기 위하여 농민들에 대한 가혹한 착취와 아편 판매에 혈안이 되고 휴지나 다름없는 화폐를 마구잡이로 남발하여 지역 경제를 붕괴시켰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심지어 혁명을 외치는 쑨원의 광둥 정부조차 아편 판매가 주된 수입원 중의 하나였다.

물론 장쭤린도 아편을 전혀 팔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그의 주요 수입원은 염세와 철도 운용에서 나오는 수익금, 연간 400만톤에 달하는 대두(大豆)의 수출이었다. 또한 그가 펑톈 독군이 된 직후인 1917년 11월 유능한 관료인 왕융장(王永江)을 재정청장으로 기용했다는 점이다. 왕융장은 향시에 합격한 생원 출신으로 일본인이 세운 신식 학교에서 근대 행정을 배웠다. 이후 장쭤린의 막료가 되어 부정부패한 관료들을 처형하는 등 기강을 바로 잡는 한편, 세입을 늘리고 세출을 절감하는 등 동북의 재정을 대대적으로 개혁하였다. 또한 공업을 장려하고 황무지를 개간하였다.

덕분에 위안스카이는 물론이고 돤치루이, 우페이푸 등 중앙을 장악한 군벌들이 매년 수천만원에 달하는 적자에 허덕이는 동안, 장쭤린 정권은 세입이 꾸준히 늘어나면서 외채를 일부 상환하고도 1923년에는 820만원, 1924년에는 1,640만원에 달하는 막대한 흑자를 내었을 정도였다. 장쭤린 정권이 당시 군벌들 중에서는 보기 드물게 장기 집권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재정적인 안정 때문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제2차 펑즈 전쟁에 승리한 장쭤린이 왕융장의 반대를 무릅쓰고 무리하게 전쟁을 확대하면서 1926년 이후 군비 지출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특히 궈쑹링의 반란은 동북의 재정을 파탄지경에 내몰게 하였다. 이것이 장쭤린이 재정적으로 소련과 광둥-저장 재벌들의 후원을 받고 있던 장제스에게 패배하게 된 이유이다. 하지만 동북의 탄탄한 경제력은 장쭤린 이후 장쉐량 대에 와서도 여전하였다. 동북 역치로 명목상 장제스에게 굴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장쉐량은 동북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장제스의 간섭을 배제한 채 만주 사변이 일어나기 전까지 독자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 떠오르는 장쭤린, 저무는 우페이푸

장쭤린의 가장 강력한 적은 물론 즈리파의 실세인 우페이푸였다. 그의 세력은 북으로는 즈리성에서 남으로는 장시성, 서로는 산시성(陝西省)에 걸쳐서 중원의 9개 성을 장악하고 있었다. 병력은 50만명에 달했다. 서구의 언론들은 우페이푸를 '중국 최강의 군벌'이라고 부르며 앞으로 중국 내전에서 최종적인 승자가 될 가장 유력한 군벌로 여기고 있었다. 제아무리 펑톈군을 개혁한다고 해도 장쭤린 혼자서 승리를 장담할 수는 없었다.

제1차 펑즈 전쟁 직후의 중국 군벌들의 할거 상황. 중원은 우페이푸의 즈리파가, 동북은 장쭤린의 펑톈파, 저장성은 안후이파의 류융상이, 서남 4개 성은 쑨원을 비롯한 서남 군벌들이 혼전을 벌이고 있었다. 또한 산시성은 옌시산이, 후난성은 자오헝티의 통치 아래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였고 쓰촨성은 쓰촨 군벌들의 혼전 상태였다. 내몽골과 서북은 사실상 정치적 공백지였다.

그는 우페이푸를 꺾기 위하여 신중하고 교묘하게 두가지 포석을 추진하였다. 첫번째는, 안후이-쑨원-장쭤린의 反즈리 삼각동맹의 재건이었다. 제1차 즈리전쟁 당시 反즈리 삼각 동맹은 장쭤린의 성급한 개전과 내부의 갈등으로 보조가 제대로 맞지 않아 동맹은 실패로 끝났다. 장쭤린이 펑즈전쟁일 일으키자 쑨원도 이에 호응하여 북벌군을 출동시켰지만 천중밍의 반란으로 도로 회군해야 했고, 안후이파의 루융샹은 돤치루이의 출전 명령에도 불구하고 중립을 지킨 채 지켜보았다. 결국 막강한 즈리군을 혼자서 상대해야 했던 펑톈군은 괴멸하고 말았다.

장쭤린은 물론이고 쑨원도, 돤치루이도 혼자서 우페이푸를 이길 수 없다. 우페이푸는 너무나 거대한 상대였다. 세 진영이 함께 손을 잡아야만 비로소 대등해 질 정도였다.  또한 예전에 돤치루이의 무력 통일에 반발했던 우페이푸는 막상 중앙을 장악한 뒤에는 화평 통일을 반대하고 무력으로 다른 군벌들의 정벌에 나서고 있었다. 따라서 쑨원과 돤치루이로서는 우페이푸와의 모순이 너무 깊다보니 결코 타협하거나 양립할 수 없는 처지였다. 하지만 장쭤린에 대해서는 이렇다할 모순이 없었고 오히려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저장 독군 루융샹 역시 사방이 즈리파에게 둘러싸여 고립된 신세였기에 장쭤린과 손을 잡을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세 진영은 부지런히 오가면서 우페이푸 타도를 위한 합종 연횡에 나섰다.

1924년 9월, 쑨원의 장남 쑨커가 아버지의 밀지를 들고 상하이에서 배를 탔다. 그리고 라오둥 반도 남단 일본 관동군의 수중에 있는 다롄을 거쳐 열차로 펑톈에 도착하였다. 쑨커는 펑톈에서 장쭤린의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당시 29살이었던 손커는 장쭤린에 대해 훗날 이렇게 회고하였다. "키는 크지 않았다. 생김새가 단아한 것이 도무지 마적 출신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의 집무실에서 함께 아침을 먹었다. 그의 아침 식사는 좁쌀 따위를 끓인 검소한 것들이었다. 식사가 끝나면 비서장이 공문을 수북히 들고 왔다. 보고가 끝나면 구두로 지시했다. 매일 100건이 넘는 문서를 1시간도 걸리지 않아 모두 처리했고 하나도 잘못된 것이 없었다. 그는 매우 총명한 사람이었다. 정원의 문에는 신행(愼行, 행동을 삼가하라)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장쭤린의 사저에서 쑨커와 장쭤린의 아들 장쉐량, 루융샹의 아들 루샤오찌(盧小嘉)가 한 자리에 모여서 이른바 '삼공자 회의(三公子會議)'를 열었다. 세 사람 모두 장래가 촉망되는 20대의 젊은 청년들이었다. 여기서 공수 동맹의 맹약이 체결되었다. 1923년 9월 15일의 일이다.

장쭤린의 두번째 포석은 즈리파 내부를 무너뜨리는 일이었다. 대상은 펑위샹이었다. 허난 독군이었던 그는 우페이푸의 눈밖에 난 덕분에 몇달도 되지 않아 자리에서 쫓겨나 베이징 육군부의 검열사라는 한직으로 내몰렸다. 우페이푸는 매월 120만원의 군비를 지급했다고 약속했지만 막상 와보니 온데간데 없었다. 이는 굶어 죽으라는 얘기와 같았다. 그나마 차오쿤이 호의를 베풀어 준 탓에 펑위샹은 군비의 일부라도 충당할 수 있었지만 속으로 우페이푸에 대한 증오심으로 이를 갈았다.

장쭤린의 심복 중에 마빙난(馬炳南)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예전부터 펑위샹의 심복인 장수성(張樹聲)과 매우 가까운데다 펑위샹과 마찬가지로 카톨릭 교도이기도 했다. 마빙난은 장수성을 통해 펑위샹과 우페이푸의 관계가 극도로 나쁘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장쭤린에게 보고하였다. 장쭤린은 손뼉을 치며 기뻐하였다. 대군을 거느리고 베이징 교외에 주둔하고 있는 펑위샹을 끌어들일수만 있다면 그야말로 우페이푸의 등에 비수를 꼽는 것과 같았다. 장쭤린은 마빙난을 펑위샹에게 접근시켰다.

때마침 좋은 기회가 왔다. 1924년 2월, 펑위샹이 14살 연하의 같은 카톨릭 교도인 이더좐(李德全)을 두번째 부인으로 맞이하여 혼례를 올린 것이다. 덧붙여, 리더좐은 펑위샹과 평생 해로하였고 뒷날 펑위샹이 죽고 국공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이 승리하자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와 인민정치협상회의 부주석 등을 역임한다. 두 사람의 결혼식에 축하객으로 참석한 마빙난은 펑위샹을 몰래 만나서 장쭤린의 뜻을 전하였다. 물론 펑위샹은 두 말 않고 흔쾌히 받아들였다.

물론 장쭤린은 고작 한마디 말로 상대를 철썩같이 믿을 만큼 어리숙한 인물이 아니다. 어차피 조석으로 변하는 것이 인심인데다, 말 뿐인 약속 따위는 아무것도 보장하지 못한다. 장쭤린은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는데 무엇이 최고의 즉효약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바로 돈이다. 그는 펑위샹더러 군비에 보태쓰라며 배포있게 200만원의 돈을 보내줬다. 자영 농민의 연간 수입이 50원, 병졸의 월급이 10원에 불과하던 시대에 200만원은 엄청나게 큰 돈이었다. 산전수전 다 겪어본 펑위샹만한 사나이도 그 돈 앞에서는 당장 기가 죽었다. 다른건 몰라도 재력에서 우페이푸와 장쭤린은 천양지차였다. 아무리 우페이푸가 전쟁에 능하다고 한들 결국 전쟁은 돈이었다. 펑위샹은 앞으로의 전쟁에 누가 이길지 뻔히 보였다. 이로서 그의 마음이 어느 쪽에 쏠리게 되었는지는 새삼스레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장쭤린의 기세가 욱일승천하는 것에 반비례하여 즈리파는 오히려 저무는 해였다. 이야기를 조금 앞으로 당겨보자. 앞서 리위안홍을 우격다짐으로 톈진으로 쫓아내었던 차오쿤은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대총통의 자리를 노렸다. 주변에서 "아직 때가 아닙니다."라고 간언했지만 욕심에 눈이 먼 차오쿤의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중화민국 약법에 따라서 대총통이 되려면 우선 국회를 소집해야 했다. 차오쿤은 베이징의 국회의원들에게 뇌물을 마구 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안 쑨원도 차오쿤을 방해할 생각으로 톈진으로 몰래 사람을 보내어 국회의원 중에서 즈리파에 불만이 있는 의원들을 매수하였다. 일시금으로 500원을 주고 상하이로 오면 매월 300원씩 더 주기로 약속하자 당장 200여명의 국회의원들이 베이징에서 상하이로 내려왔다. 루융샹 역시 차오쿤이 뇌물 선거를 벌이고 있다며 비난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 때문에 의원들이 하나둘씩 베이징을 떠났다. 국회가 열리자 않으면 대총통 선거를 할 수 없다. 다급해진 차오쿤은 더 많은 돈을 내걸었다. "일주일에 100원씩 주겠다. 대총통 선거에 참여하는 자는 5천원을 준다. 지방에 내려간 의원은 특별비로 1만원을 더 얹어주겠다." 그가 쓴 돈은 무려 1350만원에 달했다. 가뜩이나 재정난에 허덕이는 베이징 정부의 반년치 세수와 맞먹는 돈이었다. 그 돈은 즈리성장 왕청빈이 즈리성의 170개 현을 사정없이 쥐어짠 결과였다. 각 현마다 적게는 1만원에서 3만원씩 내놓아야 했다. 그래도 부족했다. 영국과 프랑스에서 차관을 빌리고 기업가들에게도 이권을 대가로 뇌물을 받았다.

뤄양에서 그 꼴을 보고 있는 우페이푸는 불만이 많았다. 허울 뿐인 대총통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런 돈이 있다면 군대를 양성하여 중국을 평정하는 것이 우선이다. 이미 즈리군은 몇개월씩 월급이 체불된데다 장비도 피폐한 실정이었다. 장쭤린과 쑨원이 남북에서 부지런히 칼을 갈고 있는데도 감투 따위에 매달리는 차오쿤의 행태는 실로 기가 막힌 모습이었지만 우페이푸는 입을 다문 채 모른 채 했다. 어차피 자신의 간언을 들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1923년 10월 5일 대총통 선거가 열렸다. 그동안 그렇게 많은 돈을 뿌렸는데도 선거에 출석한 의원은 전체 874명 중 절반도 채 되지 않는 400여명에 불과했다. 차오쿤은 "무조건 출석만 시켜라. 그럼 수고비로 5천원을 주겠다."라며 닥달했다. 그럼에도 선거가 끝날 때까지 출석한 사람은 555명이었다. 대총통을 뽑으려면 전체 의원의 2/3인 583명은 모여야 한다. 30명이 모자른 것이다. 그럼에도 중의원 의장 우징링(吳景濂)은 593명이 출석했다고 기재하였다. 대총통 선거가 시작되었다. 개표 결과 차오쿤이 480표, 선거에 출마하지도 않은 쑨원이 18표를 얻었다. 엉터리 선거였지만 어쨌거나 10월 10일 차오쿤은 제6대 중화민국 대총통에 취임하였다. 톈진에서 옷감을 팔던 가난한 장돌뱅이가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최악의 대총통 선거라면서 이른바 "차오쿤 회선(曹錕賄選)" 즉, 차오쿤의 뇌물선거라고 말한다. 차오쿤은 돈으로 대총통의 자리를 사는데는 성공했지만 그런 대총통이 무슨 권위가 있을 것인가. 민중은 더욱 즈리파로부터 등을 돌렸고 민심은 이반되었다.

* 린청 열차강도사건

베이징 정부의 무능함과 중국의 무정부 상태를 단적으로 보여준 대표적인 사건이 1923년 5월 6일 산둥성 린청(臨城)에서 있었던 "린청열차강도사건"이다. 난징에서 출발하여 진푸철도를 타고 베이징으로 향하던 특급 열차가 한밤중에 린청역 인근에서 토비들의 습격을 받았다. 열차를 습격한 토비의 숫자는 무려 천여명에 달했다. 사방에서 벌떼처럼 몰려든 이들은 총을 쏘아 열차를 세운 후 열차 안으로 뛰어들어 승객들을 밖으로 끌어내고 짐을 약탈하였다. 인질이 된 승객들은 100여명이 넘었다. 대부분 중국인들이었지만 그 중에는 부유한 상인이나 정부 관료들도 적지 않았고 수십여명의 외국인도 있었다. 또한 영국인 1명이 저항하다가 토비의 총에 맞아 죽었다. 객실에서 잠을 자다가 날벼락을 당한 승객들은 옷과 신발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토비의 소굴로 끌려갔다.

베이징 정부는 경악했다. 각국 언론들은 대서 특필했고 열강들은 단순한 강도 사건이 아닌 외국인 배척 운동이라고 간주하고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심지어 이탈리아와 일본은 중국의 철도를 열강들이 공동으로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미국은 군대의 출동을 논의하기도 했다. 5월 9일 열강들은 "3일 안에 인질들을 구해내던가 그렇지 않으면 하루가 지날 때마다 배상금을 두배로 늘이겠다"고 으름짱을 놓았다. 만약 거부한다면 당장이라도 출병할 기세였다. 중국의 주권은 안중에도 없었다. 의화단의 난 이래 최악의 상황이었다. 국제 문제로 비화되고 열강들이 간섭하면서 베이징 정부는 크든 작든 모든 업무를 뒤로 미루고 오직 외국인 인질을 구출하는데에만 머리를 맞대었다. 현지 치안의 책임자인 산둥 독군 티엔위쭝(田中玉)은 급히 군대를 현장으로 출동시켜 토비들의 추격에 나섰다. 하지만 토비들도 영악한지라 자신들의 산채가 있는 바오두구(抱犢崮)로 잽싸게 도망친 다음 싸울 준비를 하였다.

바오두구는 천하 절경이면서도 험준하기 짝이 없는 천험의 요새였다. 정부의 군대라도 쉽사리 공격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토비의 우두머리인 쑨메이야오(孫美瑤)는 티엔위쭝에게 협상을 요구했다. 군대를 뒤로 물릴 것과 자신들을 사면하고 정규군으로 편입할 것, 1년치 급료와 군수물자를 지급할 것 등이었다. 평소라면 어림도 없는 요구였지만 정부로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처지였다. 열강들이 자국인 인질들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다는 이유로 토벌 작전을 즉각 중지하라고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힘없는 백성들 앞에서는 온갖 거드름을 부리면서도 외세가 호통을 치면 벌벌 떠는 것이 청말 이래 중국 위정자들의 흔한 모습이다. 군벌들이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었다.

특히 대총통의 자리에 앉을 기회만 엿보고 있던 차오쿤은 열강들의 비위를 쓸데없이 건드리는 것은 자신에게 좋은 일이 아니라고 여겼다. 티엔위쭝에게 토비들의 요구를 무조건 수락하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내각총리 장샤오청(張紹曾)과 교통총장 우위린(吳毓麟)이 반대하고 나섰다. 토비의 요구를 무조건 받아들였다가는 자칫 좋지 못한 선례가 되어 다른 지방의 토비들 또한 비슷한 사건을 일으킬 수 있으므로 반드시 토벌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차오쿤은 묵살했다. 열강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실세가 고집을 부리니 다른 사람들이 무슨 힘이 있겠는가.

정부가 저자세로 나오자 오히려 콧대를 세우는 쪽은 토비들이었다. 쑨메이야오는 점점 요구조건을 높였다. 협상은 한동안 난항을 겪다가 결국 6월 2일 양측은 평화협정에 합의하였다. 티엔위쭝은 토비의 산채로 2천여벌의 군복과 5만원의 돈을 보내주었다. 또한 전원에게 사면령을 내리고 고향에 가려는 자는 보내주고 군대에 남기를 원하는 자들은 모아서 1개 정규 여단으로 편성하였다. 쑨메이야오는 소장 계급을 부여받고 여단장이 되었다. 하루아침에 토비 두목에서 벼락출세한 셈이었다. 인질들도 모두 석방되었다.

국가의 중요 철도가 토비떼에게 습격당한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일개 토비들에게 일방적으로 휘둘린채 요구 조건을 무조건 수락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베이징 정부는 무기력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열강들이 중국의 주권을 침해하는데도 눈치 보기에만 급급하였다. 또한 이 사건을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는 외국인을 인질로 삼을 요량으로 철도와 열차를 습격하는 사건이 빈벌하게 발생했지만 베이징 정부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위상은 더욱 땅에 떨어진데다 열강들은 중국 정부의 사죄와 티엔위쭝을 비롯한 책임자들의 처벌, 거액의 배상금까지 요구했다. 우페이푸조차 부당한 내정간섭이며 요구조건이 지나치게 가혹하다고 반발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리위안홍을 쫓아내고 뇌물 선거로 대총통에 당선된 차오쿤은 열강들의 요구를 무조건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열강들이 자신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대총통 취임식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경고했기 때문이었다. 안그래도 불법적인 선거에다 국민적 지지를 받지 못하여 정통성이 결여된 차오쿤으로서는 열강들의 지지라도 얻어야 할 판국이었다. 티웬위쭝은 산둥 독군에서 쫓겨났고 차오쿤은 각국 정부에 굴욕적인 사죄문을 발송하였다. 또한 인질들에게는 직접적인 손해 배상 이외에도 정신적 고통을 당한 것에 대한 위자료까지 계산하여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하였다. 보상금의 산정 방식과 액수도 중국 정부가 아닌 열강들이 정하였다.

차오쿤의 뇌물 선거와 함께 린청 사건은 즈리파 정권의 무능함을 단적으로 증명하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안-즈 전쟁과 펑즈 전쟁에서 연달아 승리하고 즈리파의 수장인 차오쿤이 대총통에 취임함으로서 즈리파의 전성기를 맞이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미 저무는 해였다. 국민들 사이에서 차오쿤은 매국노로 낙인찍혔다. 특히 열강들의 압력에 못이겨 같은 즈리파 독군인 타웬위쭝을 책임을 묻고 파면한 것은 차오쿤 스스로 자신의 한쪽 팔을 자른 것이나 다름없었다. 누가 이런 정권을 지지하겠는가. 중국 민중은 물론 그동안 베이징 정부를 중국의 정통정부로 인정하고 떠받치던 정치인, 관료, 향신 계층들마저 즈리파 정권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하였다. 이들은 군벌들을 타도하지 않으면 중국의 현실을 극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였다. 국공합작 이후 장제스가 민족주의와 반제국주의, 군벌 타도를 외치며 북벌에 나서자 민중들은 열렬한 지지를 보내게 된다.

덧붙여서 강도질하다가 여단장으로 벼락 출세한 쑨메이야오의 행운은 오래가지 않았다. 반년 뒤인 12월 9일 정부의 연회에 초대를 받아서 참석했다가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총살당하였다. 그의 부하들도 모조리 죽임을 당하였다. 중국 역사에서 조정이 무능할수록 토벌하기 어려운 비적떼에게 높은 관직을 미끼로 회유한 뒤 적당한 기회를 보아서 비열한 술책으로 제거하는 것은 흔하게 볼 수 있는 모습이기도 하다.

한편, 우페이푸는 홀로 고군분투하는 실정이었다. 1923년 7월 쓰촨성에서는 前쓰촨 독군 슝커우(熊克武)가 쑨원의 후원을 받아 "쓰촨 자치"를 외치면서 쓰촨성 탈환에 나섰다. 그는 쓰촨성 내 反 즈리파 군벌들을 규합하여 위안주밍(袁祖銘), 양썬(楊森), 류샹(劉湘) 등 즈리파 군벌들과 일진일퇴의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우페이푸도 중앙군 제7사단과 제15혼성여단 등 대규모 증원군을 보내었다.  또한 광둥성의 천중밍을 후원하여 쑨원을 견제하였다. 하지만 천중밍은 쑨원에게 참패하였고 쓰촨성의 전황도 결코 유리하지 않았다. 푸젠성에서는 쑨촨팡이 우페이푸의 원조를 받아 쑨원-안후이 연합군을 격파하고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는 이를 기회삼아 자신의 지반을 확장하기에만 급급하였다. 더욱이 재정 파탄과 무리한 남방 원정은 별다른 성과는 없이 즈리군을 극도로 피폐하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사기는 극도로 떨어졌고 무기도 탄약도 바닥났다. 병사들은 봉급과 양식을 받지 못하자 탈영하여 토비가 되었다.

우페이푸와 즈리파 지휘관들의 반목 역시 날로 더해졌다. 유능하지만 오만한 성격인 우페이푸는 그동안 자신을 위해 분골쇄신했던  역전의 부하들을 찬밥대우하면서 군권마저 빼앗으려 하였다. 그는 느슨한 연합체에 불과한 즈리파를 일사분란하게 지휘하기 위하여 모든 군권을 자신에게 집중시키려는 것이었으나 자신의 수족을 스스로 자르는 것과 같았다. 그는 여전히 중원의 지배자였지만 사상 누각일 뿐이었다.

* "관내로 출동한다"

저장 독군 루융샹은 북양의 원로이자 안후이파 군벌로서 유일하게 독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우페이푸도 세력이 막강한 루융샹만큼은 쉽사리 건드릴 수 없었다. 그가 차지하고 있는 상하이는 인구 250만명에 중국 금융과 상공업이 집중한 중국 최대의 도시였다. 관세 수입만 연간 1300만원이 넘었다.

이 먹음직한 노른 자위를 이웃한 장쑤 독군 지씨에위안(齊爕元)이 탐내고 있었다. 또한 쑨촨팡이 푸젠성을 장악하면서 양화자오(杨化昭)의 푸젠군 제2사단을 비롯하여 그동안 푸젠성에 할거하면서 즈리군에게 대항하던 1만명이 넘는 안후이파 군대가 쫓겨나 루융샹에게 귀순하였다. 이들은 무기와 장비를 갖춘 정예부대였기에 루융샹의 군사력은 크게 강화되었다. 안그래도 루융상은 차오쿤을 비난하고 있는데다 장쭤린과 손을 잡으면서 즈리파로서는 제거하지 않으면 눈의 가시이기도 했다. 결국 지씨에위안은 차오쿤에게 루융샹의 토벌을 상주하였다. 차오쿤도 즈리파 독군들이 장악하고 있는 안후이성과 장쑤성, 푸젠성, 장시성 등 남방 4개 성에 루융상 토벌을 명령하였다.

1924년 9월 3일 지씨에위안은 휘하의 군대에 상하이로 출정을 명령하였고 루융샹 역시 차오쿤 토벌을 선언한 후 군대를 출동시켰다. 제2차 펑즈 전쟁의 서막인 장-저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한편, 즈리파가 저장성을 공격했다는 보고를 받은 장쭤린도 수수방관할 수 없었다. 그는 즉시 여단장 이상의 간부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았다. 루융샹에 호응하여 즈리파 토벌의 깃발을 올릴 것인지를 묻기 위함이었다. 그 자리에서 장쉐량은 "아직 군비가 충실하지 못합니다."라며 신중론을 펼쳤다. 대부분의 제장들 역시 같은 의견이었다. 우페이푸의 대군에 맞서기에는 펑톈군의 실력은 아직 장담할 수 없었다. 장쭤린은 고심하였다. 이 결정에 펑톈군 전체의 운명이 걸려 있는 것이다.

잠시 후 장쭤린이 입을 열었다. "관내로 출동한다!" 이어서 말했다. "저장을 도와야 한다. 광둥과 협력해야 한다. 동맹을 깰 수 없다. 만약 즈리가 전국을 손에 넣는다면 동북도 무사할 수 없다. 그 때에는 군비가 완성되어도 무슨 소용이 있는가." 장쭤린이 결심한 이상 펑톈군에 누가 이견을 달 것인가. 장쭤린의 말 한마디에 모든 것이 결정되는 것이 여러 군벌들의 이해타산으로 뭉쳤을 뿐인 우페이푸나 쑨원의 진영과 다른 점이다. 회의가 끝나자말자 지휘관들은 부대로 돌아가 신속하게 출동 준비를 마쳤다.

같은 날, 쑨원도 북벌의 재개를 선언하였다. "저장을 돕고 광둥을 지키자!" 장-저 전쟁으로 시작된 싸움은 단숨에 중국 전역으로 확대되면서 바야흐로 전례없는 혈전이 시작될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