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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이야기

씨알사상과 동학/김경재(한신대. 명예교수)


-강연목차-
1. 들어가는 말
2. 씨알사상과 씨알운동의 핵심본질
3. 동학의 본질파악과 씨알사상과의 공명과 공동사명



1. 들어가는 말

 경북대구동학공부방이 발족되어 그동안 동학공부에 관련하여 뜻깊은 강좌가 지속되는 것을 축하드리며, 귀한 자리에 초청해주신 것을 감사한다. 특히 최근 대구에서 수운 최제우 선생이 조선조말의 타락한 국가권력에 의해 참형당하신 순교터가 확인되고, 수운선생 순도비 건립운동이 김성순선생을 비롯하여 뜻있는 겨레들의 양심과 영성의 발로로서 추진되고 있음을 알고 존경과 함께 미력이나마 참여하는 맘으로 이 자리에 섰다.  

 오늘 강연의 주제는 < 씨알사상과 동학>이다. 주최측의 주제선정에 강연자가 흔쾌히 동의한 것이다. ‘씨알사상’이라는 것은 강연중에서 좀 더 밝혀지겠지만, 多夕 유영모( 1890-1981)와 信天 함석헌(1901-1989)에 의해 한국사회에 알려지고 있는 비주류 기독교계의 생명철학이요 삶의 신앙이다.

 오늘의 강연의 첫째목적은 ‘씨알사상’을 밝혀가면서 예수가르침이 어떻게 한국인의 심장(心臟) 속에 흡수되어, 선교사들에 의해 전해진 교리적 기독교와 차별화된 진리로서, 어떻게 체화(體化)되어 가는 중인가를 확인해보는 것이다.

 둘째 목적은 씨알사상과 주체적 한국인의 동학사상이 얼마나 상통하는 점이 많은가를 기독교계 인사들과 동학운동을 펼쳐가는 인사들에게 소개하고자 하는 것이다. “아는 것만큼 보이고, 이해하는 것만큼 친해진다”는 말이 있다. 한국 종교들은 서로서로 좀더 마음 문을 열고 서로 깊이 이해하고 배울 필요가 있다.

 셋째 목적은 지구촌의 생태론적 위기와 사회정치적 갈등폭력이 점증해가는 사회 상황에서 , 동학(천도교)과 기독교가 1919년 3.1 만세운동에서도 그러했듯이 한국사회의 문명위기를 극복하는데 서로 협력함이 얼마나 타당하고 협력할 점이 무엇인지를 성찰하려는데 목적이 있다.

2. 씨알사상과 씨알운동의 본질

 2.1. 민(民), 씨알, 씨알의 용어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하이데거)라는 말이 있다. 언어(言語)란 언문(言文) 글자와 달리 순수 우리 소리글로 표현하면 ‘말’이다. 생각이나 느낌을 음성으로 전달하는 수단과 체계다. 종종 ‘언어’라는 어휘를 가지고 문자도 포함하여 넓은 뜻하는 사용하기도 하지만, 문자가 생긴것은 고작해서 3,000년 전이다.      문자가 없을 때에도 말을 통해 생각과 느낌을 서로 통하는 일이 10만년-100만년도 더 된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라는 현생인류의 출현은 ‘생각하는 인류’의 출현이며, 그 것은 말을 사용하는 생각하는 사람이 출현했다는 것이다.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뜻이 담긴  ‘말’과 ‘생각’은 동전의 앞뒤처럼 함께 일어났다. 생각을 말로 표현했고, 말이 있어서 생각이 가능했다. 표현한 말과 생각을 잊어버리지 않으고 기록으로 남기는 기호체계가 문자 곧 글인데 그것은 훨씬 훗날에 된 일이다. 우리들은 흔히 생각한 다음에 말이라는 표현행위를 실행한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소리내는 말 없이도  맘으로나 혹은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며, 생각행위가 이미 소리없는 말가운데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는 철인의 갈파는 심오한 진실을 표현하는 것이다. ‘집’은 은유  로서 사용되고 있다. 집은 무엇인가? 허허벌판 공간에 돌담이나 나무로 벽체와 지붕을 덮어 공간을 구체적으로 제약하면서, 그 안에 생명이 살수있도록 하는 고마운 것이다. 하이데거는 그의 저술물 『형이상학 입문』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말과 언어는 쓰고 말하는 사람들의 교섭을 위해 사물들을 포장하는 포장지가 아니다.
오히려 사물들을 존재케 하고 또 그 사물들이 사물로서 존재 할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말과 언어 이다.

위 인용문에서 ‘포장지가 아니다’라는 표현은 단순한 그릇이거나 기호표식이 아니라는 의미다. 해당하는 적절한 말과 언어를 갖지 못하면 ‘존재하는 것’(seiende, beings)은 적어도 인간에게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 주위엔 많은  존재하는 것들은 이름 곧 언어라는 집속에 담겨있다. 예들면 소나무, 책상, 강아지, 별, 구름, 은하수등 형태있는 것들과 사랑, 증오, 미움, 감사등 감정표시의 말들 까지 다양하다. 우리들의 ‘삶의 세계’는 말과 언어로 구성된 세상인 것이다.

 그런데, 온갖 나라살림을 맡아 감당하고, 전쟁나면 전쟁터에서 나라 지키고 , 세금내고 사회를 이루어가는 실질적 생명체에 대한 순수한 우리말 이름이 없다는 것을 다석 유영모는 어느날 세삼스럽게 발견했다. 전혀없는 것은 아니라 한문글로서 ‘민(民(민))’이라는 호칭이 있지만, 언제나 국민(國民), 군관민(軍官民), 서민(庶民), 상민(常民), 백성(百姓)  이라 불리었지 자기자신의 독자적인 이름, 말, 어휘가 없었다. 그만큼 있으나 마나한 존재자들이요, 집이없기 때문에 ‘존재의 위협’을 받는 하찮은 존재자들이었다.  

  다석 유영모는 1956년 12월 27일, 겨울 어느날 서울 YMCA 강좌에서 함석헌을 비롯한 몇사람을 앉혀놓고 유교의 고전 『대학』을 되새김질 하는 가운데 ‘민’(民)을 ‘씨알’이라는 우리말로 새겨 읽었다.

“한 배움의 길은(大學之道), 밝은 속알 밝힘에 있으며(在明明德), 씨알어뵘에 있으며(在親民), 된데 머무름에 있느니라(在止於至善)”
 
 ‘재친민’(在親民)을 ‘씨알어뵘’으로 순수우리말로 표현했다. ‘친’(親)이라는 글자를 ‘어뵘’이리고 표현한 것은, 시집간 딸이 친가에 가서 부모와 일가친척을 보러가는 일을 ‘근친간다’라고 하였다. 특히 어버이를 뵈러가는 것이다. ‘뵈러간다’는 말은 얼굴보러간다는 단순한 뜻이 아니라, 시집가서 더욱 절실하게 느끼게 된 자기를 존재하게한 뿌리생명체인 부모님께 감사하고 잠시라도 정성으로 효도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진정한 참 공부, 바른 학문을 한 선비는 나라의 온갖 생명체의 뿌리인 씨알(民)을 어버이 뵙고 모시듯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하튼 다석 유영모의 『대학』의 첫구절 삼강령(三綱領) 해설중 ‘친민’(親民)을 ‘씨알어뵘’이라고 순수 우리말로 표현한 강좌에서 함석헌은 ‘민’을 ‘씨알’로 표현한 것을 깊이 맘에 새겨들었다. 씨알이란 순수 우리말은 ‘씨’와 ‘알’의 합성어지만 생각이나 지조가 없는 사람을 비판할 때  “씨알머리 없는 놈”이라고 하고, 잡은 물고기나 거둔 과일이나 알곡이 틀실하고 옹근 결실을 맺을 때 “씨알이 굵다”라고 서민들은 표현하곤 했다.

 함석헌은  ‘씨알’이라는 어휘를 1960년대 이후 자주 사용하기 훨씬 이전부터,  1930년대『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속에서도 민중(民衆) 중심의 역사관을 피력했고, 영웅호걸의 영웅사관이거나 엘리트정치를 비판하고 민중의 중요성을 강조하곤 했다. 함석헌은 다석 유영모로 부터 ‘민에 해당하는 우리말 표현이 씨알이다’라는 것에서 깊은 영감을 받고 ‘씨알’을 ‘씨알’이라고 표기하면서 진정한 의미에서 ‘씨알사상과 씨알운동’을 정립했다. 함석헌의 씨알사상과 씨알운동에서 ‘씨알’은 무엇이며, 그 사상과 운동의 본질적 주장은 무엇인가? 핵심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 ‘씨알’은 단순한 ‘민중’의 무리가 아니고 스스로 “깨어있는 순수한 맨사람”이다.
생물체의 씨와 알은 훗날 성장해갈 때 생물학적 특성을 발현하고, 인간의 경우 사회적 삶을 살아가면서 ‘페르소나’(마스크, 인간관계적 위상)를 갖게된다. 부모, 사장, 선생, 관리, 군인, 농부, 노동자,성직자, 예술가, 대통령 등등이다. 그러나, 그런 마스크를 벗어버리고 순수인간의 맨 사람이 ‘씨알’이다.

  둘째, ‘씨알’은 기본적인 생명의 기본단위체 이면서도 자신 안에 ‘전체’를 담고있는 ‘개체적 전체’라는 의식을 가진자라야 한다.         

  ‘씨알’은 인간생명인 경우 특히 그렇지만, 닫혀지고 지폐증 환자처럼 혼자 독립적 인간 생명은 없다고 본다. 그의 사람됨 자체가 역사적 영향과 퇴비를 먹고자라며, 관계적 존재이고, 전체미래생명에 동참하는 개체이다. ‘씨알사상’은 전체주의도 부정비판 하지만 유아론적인 개인주의도 부정비판한다. 그것은 생명의 본래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함석헌이 주간으로 창간한 월간지 『씨알의 소리』 뒷표지에 천명하는 <우리가 내세우는 것>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씨알은 하나의 세계를 믿고 그 실현을 위해 세계의 모든 씨알과 손을 잡기를 힘씁니다. ... 씨알은 어떤 형태의 권력숭배도 반대합니다. 씨알은 같이 살기운동을 펴나가려고 힘씁니다.”  

  셋째,  ‘씨알’은 자신을 ‘역사적 존재’로서 철저하게 이해하는데, 그 말 뜻은 사람이란 ‘역사에 의해 지어져가는 역사에 빚진자’ 요 동시에 ‘역사를 창조적으로 만들어가는 역사의 주체자’라는 것을 의미한다.

   함석헌의 종교시 ‘맘’ 이라는 제목의 다음같은 시구절은 씨알사상에서 씨알의 자기해석을 잘 나타내고 있다.

맘은 꽃 / 골짜기에 피는 난(蘭)  / 썩어진 흙을 먹고 자라 / 맑은 향을 토해.
맘은 씨알 /꽃이 떨어져 여무는 여무진 알/모든 자람의 끝이면서/또 온갖 형상의 어머니.

 맘 곧 인간의 개체적 존재를 꽃과 씨알에 비유하는 시인은, 그 꽃이 골짜기에서 피어날 때 혼자 제 힘으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 “썩어진 흙은 먹고자라며 그래서 향기를 발할 수 있다”고 말한다. ‘썩어진 흙’이란  역사적 정신유산의 총체, 정신적 문화적 전통, 개인이 성장하면서 받는 온갖 정신적 영양소를 말한다.  그것들 없이 혼자서 독립적으로 인간이 될 수 없다. 고립된 개인주의는 있을 수 없다. 함석헌은 개인과 역사의 관계를 ‘씨와 숲의 관계’로서 비유한바있다. “개인이 씨라면 역사는 숲이다. 씨를 메기자는 것이 숲이요, 숲을 이루자는 것이 씨다”

  뿐만 아니라, 인간 개인은 개인으로서 생명을 마치는 것이 아니라, 조상대대로와 인간 생명의 역사의 마지막 달리기 바통을 손에 쥔 존재임을 자각하고 다음 생명에게 영향을 끼치는 존재이다. “모든 자람의 끝이면서 온갖 형상의 어머니”란 구절은 다시한번 개인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전체생명’의 것임을 자각한다.

 그래서, 『씨알의 소리』표지 뒷면에서 선언하는 <우리가 내세우는 것> 끝 부분에 다음같은 내용이 나온다:  “씨알은 선(善)을 혼자서 하려 하지 않습니다. 씨알은 너 나가 있으면서도 너 나가 없습니다. 네 마음 따로 내 마음 따로가 아닌 것이 참 마음입니다. 우리는 전체 안에 있고, 전체는 우리 하나 하나 속에 다 있습니다”

넷째, 씨알 사상의 특징은 그 ‘저항정신’에 있다. 씨알은 스스로가 역사의 주체인 것을 자각 할 뿐만 아니라 “씨알의 자람과 활동을 방해하는 모든 악과 싸우는 것을 자기의 사명으로 아는 맨사람들”인 것이다. 다만 그 씨알들의 저항적 투쟁방법은 “비폭력을 그 사상과 행동의 원리로 삼는다”.

 씨알은 맨사람이요, 나라 살림의 바닥 사람들이요, 평화주의자 들이지만  생명이 바르고 건강하게 자라는 것을 방해하거나 억압하는 정치-경제-사회-문화-종교의 힘에 피동적으로 당하고만 있는 소극적 생명체들이 아니다. 특히 씨알 사상은 현대인간들의 삶을 거의 규정하고 명령하는 ‘국가주의’ 권력과 ‘경제권력’과 ‘문화권력’에 대하여 저항하고 비판하면서 자신의 생명을 지키고 성장하는 조건을 확보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잘못하면 저항에는 항상 물리적-정신적 폭력이 동반하기 쉬운데, 씨알사상은 간디에게서 배운 ‘비폭력적 저항’을 행동의 원리로 삼는다.

다섯째, 씨알사상의 특징은 1970년대 한국기독교 진보계열에서 일어난 민중신학과 다른 점이 있다. ‘민중’ 개념은 보다 ‘사회정치적 범주개념’인데 비하여 ‘씨알’은 보다 ‘종교적이고 존제론적 범주개념’이다. <씨알>글자풀이에서 함석헌은 다음같이 말한다.

“씨알이란  말은 민(民, people)의 뜻인데, 우리자신을 모든 역사적 죄악에서 해방시키고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자격을 스스로 닦아내기 위해 일부러 만든 말입니다. ‘o’ 은 극대(極大) 혹은 초월적(超越的)인 하늘을 표시하는 것이고, ‘ ◬ ’는 극소 혹은 내재적(內在的)인 하늘 곧 자아(自我)를 표시하는 것이며,  ‘ㄹ’은 활동하는 생명의 표시입니다.”

 위 인용문에서 특히 ‘씨알“ 글자중 둘째글 ‘알’을 파자(破字)하여 해설하면서 초월적 존재인 하늘과 내재적 하늘인 자아의 관계를 ‘상호 불가분리적이며 불일불이(不一不二)적인 역동적 관계, 생명활동적 관계’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둘의 관계가 존재론적으로 구별되면서도 분리되지 않다는 점과, 그 관계가 생명의 약동을 표현하는 움직이는 형상으로 표기한다는 점이다. 이점은 다음 장에서 언급하겠지만, 동학의 신관및 종교체험과 매우 상통한 역동성을 나타낸다.

 씨알사상을 정립한 함석헌의 하나님 이해는 신플라톤 철학이 말하는 초역사적 일자(一者)가 아니고, 비인격적인 우주원리나 법칙도 아니고, 만유의 창조적 과정속에 함께하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우주과정의 뒤에 있어서, 그 흐름의 밑에 있어서, 그 생명의 속에 있어서, 자기 몸소의 즐거움에서 역사를 지어내기 위하여, 자기를 제한하여 만물 속에 나타내고, 만물 위에 그 생명을 붓는 이다....간섭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르고 보호하고 이끈다”   

 이상의 다섯가지 특징을 통하여 씨알사상의 특징과 그 본질을 개략적으로 파악하여 보았다. 더 깊은 연구를 하려면 다음 연구자료를 참고하면 다소 도움이 될 것이다. 이상의 씨알사상을 바탕에 깔고서 한 그리스도교 신학자로서 동학사상과 운동의 알짬을 어떻게 보고 평가하는가 허심탄회하게 다음장에서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3. 동학의 본질파악과 씨알사상과의 공명과 공동사명

 동학에 문외한이었던 필자가 감히 동학에 관하여 관심을 가지고 처음 글을 쓴 것은 박종홍교수가 이끌고 가던 ‘한국사상연구회’가  수운선생 탄생 150주년 기념론집으로서 『崔水雲硏究: 「韓國思想 12집』(1974)에 「최수운의 신개념」이라는 논문을 발표한 때였다. 벌써 42년이 지났으니 그동안 동학연구는 수많은 젊은 학자들의 연구가 있었고, 동학과 천도교 관련의 참고자료로도 많이 쌓이게 되었다.

 동학연구에 전문가는 아니지만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 연유는 한국사람으로서 동학이 지니는 중요성과 그 의미가 한국에서 기독교신학을 하는 사람에게도 중요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박종홍선생은  『韓國思想 12집: 崔水雲 硏究』발간사에서 다음같이 갈파했다:

東學이 한국사상에 있어서 차지하는 位置와 意義는 천도교 신자가 아니라도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짐작하는 바이어니와 그 基本精神은 우리의 전통적인 모든 사상의 眞髓가 하나로 엉기어 이루어진 結晶體라고도 하겠다. 과연 東學에는 한국의 황토 흙냄새가 풍긴다. 한국인의 體臭가 속속들이 배어있는 것이다.

 당대의 석학 박종홍교수의 발간사는 깊은 성찰을 후대사람들에게 요청한다. 동학은 “우리의 전통적인 모든 사상의 진수가 하나로 엉기어 이루어진 결정체”라는 말에 주목해야 한다. 단순히 유불선 3종교의 혼합적 종합이라는 말이 아니다. 그런 앞선 사상이나 종교체험과는 아무런 영향없이 단독적으로  최수운의 계시체험으로 이루어진 전무후무한 독창적 사상이라는 것도 아니다. “진수가 하나로 엉기어 이루어진 결정체”라는 말은 ‘핵심적 요소들의 융합을 통한 창발적 결실물’이라는 뜻에 가깝다.

 지식인의 두뇌에서 종합된 것이 아니라 고뇌하는 지성인의 가슴에서 그 진수들이 녹아 정신적 생화학 반응을 일으켜, 이전에 없던 새로운 것이 발생하는  ‘창조적 발생’(creative emergence) 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초월적 개입’ 개념이 깃든 ‘창조’라는 단어와 ‘내재적 이법(理法)’이라는 개념이 깃든 ‘발전’이라는 두가지 개념이 통전적(統全的)으로  이해될 때, 동학사상과 동학 운동은  ‘창발’개념 안에서  바르게 이해되어 진다.

  수운 최제우, 해월 최시형, 의암 손병희 3대로 이어지는 동학의 도통의 전개과정에서  동학이라는 ‘살아있는 나무’는 그 사상과 생동력이 깊어지고 넓어지고 높아져 갔지만, 어떤 점에서는 약화되고 후퇴되고 희미해져간 퇴행도 보이는 것이다.  천도교 신자가 아닌 울타리 밖의 사람인 필자에게 느껴지는 동학의 본질과 그 특징은 4가지로 파악된다: ① 인류종교사에서 범재신론(凡在神論, panentheism)으로 분류되는  侍天主 신앙 ② 생태론적 영성의 기틀이 되는 三敬思想 ③ 역사의 更新(renewal)과 變革(transformation)에 인간이 참여하는 後天開闢思想 ④ 데카르트의 이원론 뿐 아니라 헤겔의 변증법과도 다른 不然其然 思想 , 이상 4가지 요소이다.

  필자는 위에서 언급한 4가지 사상이 동학에서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 가를  압축하여 서술하고, 그러한 동학사상의 특징이 ‘현대기독교신학’(contemporary theology) 에서는 어떤 닮은 ‘신앙과 신학운동’으로서 대변혁이  진행되고 있는가를 소개하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동학과 씨알사상, 혹은 동학과 기독교 신앙의 서로 통하는 점과 서로 다른 차이가 드러나게 될 것이다.

3.1. 侍天主 신앙 : 초월적 유신론과 내재적 범신론을 넘어선 동학적 凡在神觀

 동학이 사상운동이요 삶의 혁명운동이지만, 단순히 종교철학이나 사회비판 철학이 아니고 종교로서 자리매김 되는 갈림길은 신관에 있다. 하눌님, 상제(上帝), 창조주, 브라만, 태극, 비로자나불 등등 무어라고 이름을 붙여 부르던지간에 종교는 신관(神觀)이 핵심이다. 동학이 새로운 민족종교로서 19세기 말에 출현하여 동학혁명에 까지 이르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오게된 단초에 최수운의 ‘하눌님 체험과 그가 정리한 하눌님 이해’ 가 있다.  그것을 동학에서 ‘시천주 신앙’이라 부르기로 하겠다. ‘시천주’ 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하여 수운자신이 21자 주문을 해설하는 가운데 다행이 기본핵심을 설명해 놓았다.
 
至氣今至願爲大降 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
侍者 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

 ‘모심’이란 내 몸안에 신령의 임재를 체험함이요, 내 몸 밖으로는 만물과 더불어 유기적 관계 안에서 氣의 소통순환을 느낌이요, 세상 모든 사람이 (하눌님은 각자 몸에서) 옮겨 떼어놓을 수 없는 분임을 깨닫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위와 같은 신관 혹은 신체험을 현대종교학과 현대신학에서는 ‘범재신론’(凡在神論, panentheism)이라고 부른다. 범재신론은 ‘초월적 유신론’과 ‘내재적 범신론’의 단점을 극복하고 장점은 새롭게 살려 두 입장을 지양(止揚)한 가장 성숙한 신관이다.

  ‘초월적 유신론’(transendent theism)은 일명 ‘초자연적 유신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 신관은  신이라고 하는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는 가시적인 대자연의 물질세계를 초월하는 존재요, 더 나아가서 눈에 보이지않는 일체의 이념이나 관념적 실재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절대주권적 창조자로서 자리매김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만유 너머에 있는 절대존재’(God above All)로서 신은 절대주권, 전지전능, 영원자존, 절대순명과 경외가 강조된다. 수운이 동학을 창도할 때, 당시 서학이라고 일컬었던 당시 천주교의 신관이 이것과 비슷한 입장이어서 수운은 서학(당시 천주교)의 신관을 비판하였다.

  ‘내재적 범신론’(immanent pantheism)은 글자그대로 만유(pan)가 곧 신(theos) 이라는 입장의 신관이다. 그러나, 물론 이 내재적 범신론은 원시종교의 소박한 정령신앙과 구별된다. ‘내재적 범신론’은 마치 사람이 몸과 정신의 이중구조로서 이루어지듯이,  “자연을 포함한 세계만유는 곧 신의 몸이고, 신은 세계만유의 정신”인 셈이다.  만유(萬有)는 신성이 드러나는 몸체요 빛이요 소리요 암호이다. 그렇게 만유와 궁극적 실재(신)은 불일불이(不一不二)의 관계이다. ‘내재적 범신론’을 지지하는 종교에서 ‘궁극적 실재’는  경외, 찬양, 예배의 대상이라기보다는 관조, 명상, 합일의 대상이다. 결국 신은 ‘만유로서 신’(God as Many)라는 간단한 도식으로 표현된다.

 ‘포용적 범재신론’(inclusive pan-en-theism) 이란 어떤 입장인가? 만유(萬有, pan)가 하느님(Theos) 안(en)에 포용되면서 신이 만유 안에 함몰되지 않고, 만유를 떠나서 분리되어 있지도 않는다. 신의 입장에서보면 만유안에 내재하면서 초월(자유)하고, 만유입장에서 보면 신을 자기안에 모시면서 자율성과 창조적 자유를 향유한다는 입장이다. 서양사상사 속에서 범재신론의 주장자들은 계몽주의시대 이후 셸링, 헤겔, 떼이야르 샤르뎅, 화이트헤드, 폴 틸리히, 죤 캅 교수등 과정신학자들,  그리고 맥페이그등 현대 여성신학자들이다.   

  필자가 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동학의 하느님 이해를 접했을 때, 시천주 신앙은 경탄스러운 것이었다. 시천주 해설에서 수운은 동학의 신이해가 당시 유불도 삼교에서 희미해진 점 곧  어버이처럼 모시고 경외해야할 ‘인격적 존재’이면서도, 당시 서학(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천계에 머물며 이 세상에 군림하는 절대군주같은 ‘초월적 절대타자’는 아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동학의 하눌님은 만물을 형성하고 구성해가는  ‘至氣’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성경신(誠敬信)에 감응하는 ‘하눌님’이었던 것이다.

 만인을 평등하고 존엄한 존재자로 형성해가면서, 후천개벽하라고 격려하고 함께 일하자고 타이르는 하눌님이었다. 이 새로운 신관이 당시 민중에게 전해질 때, 그들은 한민족 조상 대대로 신앙해오던 하눌님을 다시 되찾아 힘을 얻었고, 자신의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깨닫게되었고, 역사를 새롭게 변혁해야할 사명에 투신 할 수 있었다.

 ‘侍天主’라는 본래 동경대전에 나타나는 동학의 신관이 ‘人乃天’과 동의어로 이해되는 것은, 초기 동학의 신관이  존재론적 철학적 신관으로 옷을 갈아입듯이 문자표현적 겉모습만 변형된 것이라고 강변하지만,  “동학의 성격에서 중요한 종교적 본질이 빠져나가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는 김용휘의 비판적 성찰에 필자는 동의한다.  

  오늘날 천도교인들이 그리스도교의 신관을 단순히 ‘초월론적 유신론’으로만 고정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진실과 다르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당시 서학(천주교)만이 아니라 중세기 이후 그리스도교가  헬라철학의 영향을 받아서 ‘초월론적 유신론’으로 변질이 되었다. 아직도 보수적 기독교인들은 ‘범신론’과 ‘인본주의’를 아주 꺼려하여 그러한 비성경적 신관에 칩거하는 신도들이 많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경전 특히 신약성경의 다음 사례에서 알수 있듯이, 그리스도교의 신관은 동학의 창도자 최수운이 체험한 하눌님과 더 상통하는 점이 많다는 것을 인지함이 필요한 것이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시인 가운데서도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이다’하고 말 한 바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습니다.”  (신약, 사도행전, 17:27-28)
“하나님은 모든 것의 아버지시요,  모든 것 위에 계시고, 모든 것을 통하여 계시고,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 (신약, 에베소서, 4:6)


3.2. 三敬思想(敬物, 敬人, 敬天) : 현대 생태학적 윤리와 영성의 기초

 동학사상 및 천도교가  일반사람들에게 깊은 관심을 갖게된 계기는 필자의 기억으로는 1960년대 중반이후 특히 1970-90년대라고 본다. 두가지 사건이 사회적 문제로서 주목받던 배경이 있다.  그 하나는 군사정권이 장기집권하면서 ‘민족부흥, 절대빈곤 극복, 근대화, 산업화’의 기치를 내걸고  중앙권력 집중적인 경재정책을 관철시키면서 수많은 ‘의식있는 학생들과 지성인’들의 인격을 몰수하고 감옥살이를 시켰다.

  인격존중 보다 경제건설, 생명보다는 물질, 유연함 보다는 강함, 작은 것보다는 큰 것이 강조되고 강요되던 시기였다.  장일순, 김지하, 황대권씨 같은 대표적 인물들만이 아니라, 동시대 많은 사람들 맘 속에 여리고 작은 생명있는 것들의 신성함에 눈뜨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동학과 천도교의 생명존중사상 특히 ‘경물’ 사상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육축(六畜)이라도 다 아끼며, 나무라도 생순을 꺽지말라”는 해월선생의 가르침에 감동을 받았고, 동학사상과 천도교 안에서 새로운 시대의 ‘생태학적 윤리와 영성’의 가능성을 보았던 것이다.

 사실 사인여천(事人如天) 사상이나, 경신(敬神)사상은 모든 고등종교에서 가르치는 윤리적-영적 덕목들이었다. 동학에서도 至氣一元論的 실재관과 侍天主신앙에 기초할 때,  사인여천이나 경신의 덕목은 놀라울 일이 아니다. 그런데, 경물사상은 해월선사에 이르러 더욱 강조되고있다. 삼경(三敬), 이천식천(以天食天), 내수도문(內修道文), 내칙(內則), 양천주(養天主), 십무천(十毋天)등 해월의 가르침은 당시 농경사회의 삶의 자리를 감안하더라도 동학의 종교적 영성을 구체적 삶의 현실에까지 육화(肉化)시킨 생명존중 사상의 표출이었던 것이다.

  현대문명의 위기들 중에서 지구 기후붕괴와 생태계 파괴가 가장 심각하고 모든 ‘생각하는 사람들’이 관심과 해결에 집중해야한다는 점에 동서 지성계가 일치하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생태계 담론’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초 『성장의 한계: 로마클럽보고서 』가 나온 때이어서 인류가 매우 늦게 문제의식을 갖게되었다는 점에 있다. 그 문제와 관련한 학계의 담론중에서 특히 린 화이트(Lynn White)교수의 「생태학적 위기의 역사적 뿌리」는 주요한 논문이었다.

  린 화이트는  서양의 산업혁명이후 기계기술문명이 자연과 생태계를 파과하게 된 그 사상적 뿌리와 자연관에 그리스도교의 자연관 특히 창세기의 창조설화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 것이다.  성서적 자연관은 ‘자연자체’ 속에 마법적 주술력이 있다고 보지 않도록하여 자연 연구에 공헌도 했지만, “자연을 정복하고, 지배하라!”는 관점이 기조음이었고, 그리스의 철학의 원자론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근대의 데까르트의 정신/물질 이원론 등과 합작하여 무자비한 자연파괴와 자연정복의 문명출현에 큰 책임을 지고 있다는 논지였다.

  그리스도교의 2,000년 역사속에는 자연신비주의 운동도 있었고, 13세기 성 프란체스코 성인의 수도원 운동에서 처럼 자연을 정복의 지배대상이 아니라 자연동체감의 자연찬양의 사상도 있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성서해석의 기조음은 ‘구원사’적 관점에서 자연은 고작해서 ‘역사’가 그 위에서 전개되는 ‘무대’정도로 인식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린 화이트의 비판적 논문이 발표된 이후, 그리스도교계는  기독교가 본래 성서의 메시지를 곡해했고, 히브리적 영성에서 이탈하여 <자연-여성-육체-물질>을 억압하는 가부장적 지배이데올로기로 변질했었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반성하고 회개하게 되었다.

  오늘날, 진보적 기독교 사상가들과 교회지도자들은 동학이나 천도교에 매우 친화성을 보이는데, 그것은 특히 동학과 천도교가 삼경사상(三敬思想) 에 근거하여 생태학적 영성및 생태학적 윤리에 큰 공헌을 한다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리스도교의 입장은 ‘생태학적 담론’에서 전통적인 인간중심주의는 극복해야하지만, 지구의 전체 생태시스템에서 인류가 갖는 독특한 위치와 사명에 주목해야하고 소박한 ‘자연주의: 자연으로 돌아가자!’ 든지, 범신론적 자연주의를 경계하는 입장이다.

  그 대표적 저술물이 장회익의 『삶과 온 생명』이다. 장회익은 이 주목할만한 저서에서, 기독교의 지난 자연정복과 자연지배사상을 철저히 비판하고, 동시에 기독교의 자연관리의 비유인 ‘청지기론’의 윤리도 비판하고, 인류와 지구생명체의 관계비유는 <중추신경계와 몸 전체의 관계>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3.3. 후천개벽사상:  역사 갱신과 변혁에 민중의 주체적 참여와 책임

  그리스도인으로서, 씨알사상의 입장에서 동학에 관심하고 주목하는 3번째 주제는 동학(천도교)의 역사이해이다.  기존의 동양종교사상의 일반적 공동특징인  역사순환론이나 운세론에 멈추지 않고, 역사를 미래지향적 창조적 열린지평으로 보았다는 후천개벽사상이 동학의 새로움인 것이다.  기독교라는 종교에서도 그 특징은 ‘역사의식’이 강하다는 것이다. 인간은 역사에 의해 지음받아 만들어지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적극적으로 역사를 창조해가고 짊어져가는 존재라는 것, 인간 공동체는 역사공동체라는 것, 그것의 새로운 갱신과  변혁에 적극 참여하라는 것이다.

  동학운동과 그 이후 천도교로 교단 명칭을 바꾼 이후,  동학사상이 본래 지닌 사회변혁사상, 더 나아가 역사갱신과 변혁운동체로서 성격이, 현실정치 권력의 종교박해를 피하여 많이 약화되거나 종교화되어가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1860년에 창도된 최수운의 동학은 왕조의 쇠망을 예언하고, 양반지배층에 대신할 민중(창생)이 보국안민(輔國安民)의 주체로 상승되어, 후천개벽(後天開闢)의 새 세상이 도래할 것을 대망한 유토피아적 혁명의 이념이기도 했다”는 론지에 씨알사상가들과 진보적 기독교사상가들은 동의하고 주목한다.

 종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내면화의 길’을 취하여 인간내면 세계의 참된 모습을 회복하는 일이나, ‘초월화의 길’을 취하여 사후세계나 형이상학적 순수관념세계를 지향하려는 두 가지 방향을 취하기 쉽다. 그 두가지 길은, 가변적이고 혼탁한 세속적 차원과 가치를  넘어서려는 의도로서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살아있는 생명적 종교는 ‘역사 현실의 장’을 외면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현실 도피적이거나 현실 야합적인 종교는  종교의 ‘경직화’요 ‘세속화’인 것이며, 종교가 교리와 체제집단으로 굳어져버린 징조인 것이다.   

 종교는 ‘역사너머의 차원’을 담보해야 하지만, 역사를 관통하고 역사를 갱신-변혁하는 동력을 제공하는 것이 핵심과제중 하나이다. 이점에서 동학이 <선천시대 5만년>이 끝나고 <후천시대 5만년>이 지금 새로 동트고 있다는 카이로스 의식을 가지고, 동학도들 민중의 자발적 참여로서 ‘조선조말기의 썩은 역사현실’을 주체적 참여를 통해 개혁하려고 한 것은 동학혁명의 성공실패를 넘어서 한국사 속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세계현실과 한국사회 현실은 어떤가? ‘민주공화국’이라는 국체의 본질을 박탈당하고 ‘제도적 형식 민주주의’ 허울 안에서, 정치권력-경제권력-문화권력-종교권력들이 서로 카르텔을 형성하여 민중의 삶이 비인간화 되고있다.  역사의 ‘갱신과 변혁’이라는 공동과제 앞에서 동학과 그리스도교의 씨알사상은  친화성과 동지의식을 갖는다. 1919년 기미독립운동 때의 경험이 그것을 증명한다.   

3.4. 不然其然論: 창조적 진화론과 기계적 결정론, 새로움의 창발적 신과 만물의 화해

 기독교와 동학의 대화에서 4번째로 필자의 관심을 끄는 주제는 동학의 불연기연론(不然其然論)이다. ‘불연기연론’은 동학의 경전 『동경대전』구성편집상 동학의 핵심 종지(宗旨)가 설파되는 4개의 법문( 布德文, 論學文, 修德文, 不然其然)중 마지막 법문이다.  그만큼 중요한 법문인데, 그 동안 ‘불연기연론’은 천도교 학자들중에도 많이 연구되지 않은체 소홀하게 다루어진 주제였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문명이 실재관에서 근본적 ‘패러다임전환’을   요청하는 형국에서 ‘불연기연론’은 다시 주목을 받아 마땅하고, 기독교적 씨알사상이나 진보적 기독교 신학과 보다 심층적 대화를 필요로 한다.

 불연기연론은 최수운의 ‘실재관’ 특히 ‘생명적 실재’를 어떻게 이해해야하는 가의 깊은 고민과 사색 끝에 피력한 사상이다. 요즘말로 표현하자면, 생명출현문제를 설명하는 유물론적 환원론과 창조적 진화론의 화해, 기계론적 세계관과 목적론적 유기체론의 화해, 세계와 신과의 화해문제를 논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20세기에서 가장 진지하고 치밀하게 논한 사람은 수학자요 물리학자이면서 말년에 ‘유기체 철학’이라는 과정사상을 집대성한 알프레드 화이트헤드(Alfred N. Whitehead, 1861-1947) 이다.  화이트헤드는 최수운의 동학창도 다음해(1861)에 탄생했고, 챨스다윈의 『자연선택을 통한 종의 기원』이 출판(1859)되었던 해 1년뒤에 최수운의 동학창도(1860)가 있었다.

  먼저 동경대전에 나타난 최수운의 ‘불연기연론’ 내용을 요약해보자. 한문자 ‘불연’(不然)이란 ‘스스로 그러하지 않다’, ‘당연하지 않다’, ‘이해되지 않는 면이 있다’,  ‘앞뒤의 연속성이 없다’, ‘합리적 설명이 않된다’ 라는 복합적 의미를 담고있다. 다른 한편 ‘기연’(其然)이란 ‘자연스럽게 여겨진다’, ‘당연한 것이다’, ‘이해되고, 앞뒤 논리가 통한다’ 라는 복합적 의미를 담고있는 어휘다.  

  최수운은 불연기연론에서  삼라만물과 특히 생명체의 오늘의 다양하고도 특성있는 기질을 주목하고, 그것을 시간의 사고여행을 따라 아스라이 먼 과거, 그리고 미래, 그리고 현재의 상태를 미루어 생각하면서 ‘당연하다고’고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유습관’에 충격을 가하고 만물과 생명출현의 현실에 대하여 무이이화론적 조화지신(하눌님)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최수운은 불연기연론에서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용어로서 말하면 운동인(運動因)과 목적인(目的인)의 동시적 원인을 사유하는 ‘자연신학’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최수운은 스스로 질문하고 동학도들에게 생각하도록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불연기연론을 펼친다.

(i)  눈으로 보이는 것으로 말한다면 그럴듯하고 당연하지만, 만물의 처음 시작단계를 생    각하면 헤아리기 어려운 점이 많다.
(ii)  지금의 나와 후손을 생각하면 당연하게 지속성이 이해되지만, 태초의 조상에로 거     슬러 올라가 생각하면, 맨첨 조상과 성인들은 어디에서 출현했는가 자명하지 않다.
(iv) 처음 임금 천황씨의 도덕률과 법률지혜는 어디에서 유래했으며, 가마귀  미물의 어미와새끼사이에 온정과 자기희생은 배워서 안 것인가 타고난 본성인가? 타고난 본성이라면 그 본성은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v)  그 심오한 이치를 캐어 여기에 견주어보면 불연(不然)인데, 그 난해하고 불가해한      이치를 하눌님의 하시는 일에 부쳐보면 기연(其然)이다.

 현대인들은 우주 천체물리학과 생물진화론과 분자생물학 지식을 어느정도 가지고 있어서 자연질서와 생명체들의 현상에 대하여 합리적 이해를 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이나 세계 천재적 물리학자들은 여전히 “세계가 합리적으로 왜 이해될 수 있는가?”라는 근원적 질문에 봉착한다. 분자생물학과 진화론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지구상에 생명출현이 ‘우연과 필연’(자크 모노)의 산물이며, 모든 생명현상과 정신현상은 분자단위의 생화학적 반응기제로 설명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도킨스).

  그들 물질론적 환원주의자들은 우주는 ‘기연’(其然)의 세계뿐이다. 그러나, 그들 못지않게 과학적 지식을 갖고있는 아인슈타인, 화이트헤드등 세계적 석학들은 기연(其然)만이 아니라 ‘불연’(不然)을 말하고 있다. 다만 그 설명과 이해가 최수운 처럼 ‘하눌님의 조화’에다가 단순하게 부치지 않고 좀 더 새롭게 설명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러나, 최수운이 말하려는 ‘불연기연론’의 의미와 의도는 여전히 유효하다.

 미래의 종교와 인류문명은, 수운이 제기한 ‘불연기연론’을 어떻게 좀더 창조적으로 계승 발전시켜 새로운 세계관, 새로운 생명관을 갖느냐에 그 운명과 사활이 달렸다. 이점에서 씨알사상과 동학은 같은 문제의식을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