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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풍경예술

예술 작품을 통하여 획득하는 교육 내용의 개념:가다머(H. G. Gadamer)의 ‘유의미한 전체’를 중심으로/홍윤경.영남대



<요 약>
본 논문의 목적은 예술 작품을 통하여 획득하는 교육 내용의 개념을 가다머의 ‘유의미한 전
체’에 의거하여 밝히는 것이다. 가다머는, 플라톤이 예술 작품의 원천으로 간주한 ‘신성한 광기’
를 ‘자기 망각’으로 해석하고 그 원형을 놀이에서 찾는다. 놀이는 특정한 목표에 묶여 있지 않
은 상태로서 행위의 주체인 놀이자가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놀이의 질서, 즉 ‘이리저리로의 움
직임’을 따르는 것이다. 가다머에 의하면 예술 작품은 놀이의 존재 양상을 띠면서도 관객의 감
상에서 완성된다는 점에서 놀이의 완성된 형태이다. 관객의 감상을 통하여 학습되는 ‘유의미한
전체’는 공유될 수 있는 진리라는 점에서 예술 작품에 들어 있는 교육 내용으로 해석될 수 있
다. 유의미한 전체는 그 공유 가능성에 주목하면 초월성을 가지며, 자유로운 자기 표현을 가능
케 한다는 점에서 인격성을 지닌다. 유의미한 전체에 들어 있는 이중성, 즉 초월성과 인격성은
교육 내용의 습득과 자유로운 자기 표현이 다르지 않다는 점을 시사한다. 유의미한 전체에 비
추어 보면 교육 내용은 창작자와 감상자가 공유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개인을 초월하면서도 자
기 표현을 가능케 하는 원천이라는 점에서 개인의 삶과 밀착되어 있다. 예술 작품을 통하여 획
득하는 교육 내용은 양립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는 초월성과 인격성을 모두 충족시킨다.


주제어: 예술 작품, 신성한 광기, 자기 망각, 놀이, 유의미한 전체, 초월성, 인격성


Ⅰ. 예술 작품의 가치: ‘자기 망각’
본 논문의 목적은 예술 작품을 통하여 획득하는 교육 내용의 성격을 가다머(H. G.
Gadamer)의 ‘유의미한 전체’에 의거하여 밝히는 것이다. 가다머는 플라톤이 노래와 시의
원천으로 간주한 ‘신성한 광기’를 ‘자기 망각’으로 해석하고, 자기 망각은 곧 ‘유의미한 전
체’의 학습이라고 본다. ‘신성한 광기’라는 비유가 교육 내용과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갖
는 이유는, 노래와 시로 대표되는 예술 작품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중요한 교육 내용으
로 간주되어 왔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가다머는 예술 작품의 의미를 분석함에 있어서


교육사상연구
The Journal of Korean Educational Idea
제32권 제2호 (2018), pp.157~170
10.17283/jkedi.2018.32.2.157
교육사상연구 (제32권 제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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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광기’를 자기 망각과 그것의 원형인 놀이, 그리고 예술 작품에 의거하여 해석함으
로써 예술 작품을 통하여 획득하는 교육 내용은 ‘유의미한 전체’임을 부각시킨다.
‘유의미한 전체’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플라톤이 말하는 ‘신성한 광기’가 교
육 내용과 관련하여 어떤 질문을 일으키는지를 예비적으로 고찰할 필요가 있다. 플라톤
은 대화편 『파이드로스』에서 신성한 광기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그것이 노래와 시의 원
천임을 부각시킨다. 플라톤에 의하면 광기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한가지는 인간의
질병으로부터 오는 것이고, 다른 한가지는 하늘이 기존의 관습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해줄 때 생기는 것이다(Phaedrus, 265). 광기는, 만약 그것이 천상의 선물로 주어진다면
최상의 축복을 받는 경로가 된다(Phaedrus, 244). 신성한 광기로 인하여 얻을 수 있는
축복에는 네 가지가 있다. 그것은 첫째, 미래의 일을 예언하고 말하는 기술인 예언술, 둘
째, 죄의 고통을 제거하기 위한 비의와 정화의 기술, 셋째, 과거의 업적을 찬양하는 노래
와 시를 창작하는 기술, 마지막으로 에로스 신에게서 오는 사랑이다. 이 네 가지 중에서
도 교육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것은 뮤즈 신으로부터 온 신성한 광기이다.1) 앞서 언
급했듯이 뮤즈 신에 기인한 노래와 시 등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중요한 교육 내용이
되어 왔다. 이 점에 주목하면 신성한 광기는 노래와 시에 들어 있는 교육적 가치를 강조
하기 위한 비유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신성한 광기’는 문자 그대로 일상적 삶을 초
월한 ‘신성’과 정상성으로부터 이탈한 ‘광기’가 조합된 단어이다. 그러므로 이 비유적 표
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만들어낸 예술 작품이 어떻게 ‘초월성’을 갖는가, 그리
고 정상성으로부터 이탈한 ‘광기’가 어떻게 교육 내용의 원천이 될 수 있는가의 질문에
어떤 방식으로든 대답해야 한다.
가다머는 위의 질문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그에 의하면 ‘신성한
광기’에 사로잡히는 것은 자기 망각에 빠지는 것을 가리킨다. 관객이 된다는 것은 자신
을 망각한 상태에서 자신이 바라보는 것에 자신을 내어 주는 것이다. 즉 자기 망각은 목
하의 문제를 온전히 주목하는 데서 생긴다. 그것은 관객의 고유한 긍정적 성취이기 때문
에 모종의 결핍 상태가 아니다(Gadamer, 1992: 126). 플라톤이 창작의 원천을 ‘신성한 광
기’에 비유함으로써 그 초월성과 일탈성을 부각시켰다면, 가다머는 관객의 감상을 자기
망각으로 해석하고 그것은 모종의 결핍이 아니라 관객이 무엇인가에 온전히 집중함으로
써 얻게 되는 긍정적 성취임을 강조한다.


1) 영어 뮤즈(Muse)로 번역되는 희랍어 무사(Mousa)는 시가와 춤 그리고 철학이나 천문학 등의 모
든 지적 탐구를 관장하는 신들이다. 시가를 의미하는 헬라스 말 무시케(mousike)는 Mousa가 관
장하는 기예라는 뜻이다(Plato, 1997: 137). 시와 노래를 창작하는 기술 이외의 세 가지 축복도
각각에 해당하는 신에 기인한다. 예언술은 아폴로, 비의와 정화의 기술은 디오니소스, 그리고 사
랑은 에로스에게서 온다(Phaedrus, 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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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다머는 자기 망각의 원형을 놀이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보고, 놀이를 통하여 얻는 긍
정적 성취가 어떤 것인지를 드러낸다. 가다머에 의하면 놀이의 목적은 놀이자가 놀이를
하면서 자기를 망각할 때 완수된다(Gadamer, 1992: 102). 놀이는 일상의 목표와 그 성취
를 위한 노력으로부터 벗어난 활동이다. 이 점은 대부분의 일상적 행위가 목표 지향성을
띤다는 점과 대비된다. 예컨대 장사의 경우 이 활동에는 그 주체가 뚜렷이 의식하는, ‘이
윤의 극대화’라는 목표가 사전에 정해져 있다. 그리고 이 목표는 장사를 지속시키는 활
동의 추동력이 된다. 이 점을 반대편에서 말하면 장사하는 사람은 이 목표의 성취에 도
움이 되지 않는 요소들을 의식의 표면에서 배제함으로써 이 활동이 보다 큰 효과를 거
둘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 우리의 일상을 채우는 정상적인 활동들은 이 점에
서 장사와 유사하다. 일상의 행위를 지속시키는 것은 뚜렷한 목표를 의식하는 행위의 주
체이다.
이에 반해 놀이를 지속시키는 것은 놀이자가 성취하려는 목표가 아니다. 놀이자를 한
동안 놀이로 끌어 당겨 놀이 안에 머물게 하는 것은 게임 그 자체이다(Gadamer, 1992:
106). 공놀이의 경우를 예로 들면, 공이 예상치 못한 움직임을 보이며 스스로 온갖 방향
으로 자유롭게 나아가기 때문에 놀이는 영원히 지속될 수 있다. 공은 예기치 않은 방향
으로 움직이고, 놀이자 역시 공의 움직임에 대하여 상이한 동작으로 반응하기 때문에 공
놀이는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Gadamer, 1992: 106). 물론 놀이의 주체가 없다면 공의
움직임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놀이자는 자신이 목표한 대로 공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
서 임의대로 공의 움직임을 조작할 수 없다. 그러한 조작을 하는 순간 공놀이는 놀이이
기를 멈춘다. 놀이자는 자유롭게 자신의 동작을 만들 수 있지만 공이 그것에 어떤 반작
용을 보일지에 관한 한, 공에게 모든 것을 맡길 수 밖에 없다. 즉 공놀이는 놀이자의 동
작과 공의 움직임이 서로에게 반응할 때 지속될 수 있는 것이지 놀이자가 관철시키려는
특정한 목표 때문에 지속되는 것이 아니다. 물론 놀이자는 게임에서의 승리를 목표로 삼
은 채 공놀이에 임한다. 그러나 이 목표는 공놀이의 고유한 질서에 철저하게 순응할 때
만 유의미하므로 목표 자체가 놀이를 지속시킨다고 말할 수 없다. 요컨대 공놀이를 지속
시키는 것은 놀이자나 공이 아니라 놀이의 고유한 질서이다. 놀이자를 놀이 안에 머물게
하는 것은 게임 그 자체라는 가다머의 말은 놀이의 고유한 질서가 있다는 점을 뜻한다.
가다머는 놀이의 질서를 가리켜 놀이의 ‘움직임’이라고 부른다. 그에 의하면 놀이의 핵
심은 움직임이다. 놀이에서 의도되는 것은 이리 저리로의 움직임이며, 이 움직임은 그것
을 완결 짓고자 하는 어떤 목표에도 묶여 있지 않다. 놀이는 움직임 그 자체의 발생이다
(Gadamer, 1992: 103). 다시 말하면 공놀이의 움직임은 놀이자의 동작과 공의 반응을 분
리시킬 수 없게 만드는 놀이의 질서이다. 놀이는 그것에 들어 있는 이리 저리로의 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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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이 저절로 따르는 질서를 분명하게 표현한다(Gadamer, 1992: 104). 그러므로 일상적
행위에서와 달리 놀이의 주체가 의식하는 목표는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 일상적 행위
의 경우, 행위자의 목표가 달성되는 순간 행위도 종결되는데 반해 놀이는 움직임의 발생
이외의 목표를 갖지 않기 때문에 영원히 지속될 수 있다. 놀이에서는 능동성과 염려를
지닌 존재를 규정하는 모든 유목적적 관계들이 사라질 뿐만 아니라 신기하게도 정지해
버린다(Gadamer, 1992: 102). 놀이는 ‘목표’를 제공하는 대신 놀이 자체의 고유의 질서를
따르도록 놀이자를 압도한다. 일상적 삶은 행위자가 의식하는 수많은 목표들, 그것을 성
취하려는 노력들로 구성되는 반면 놀이는 그러한 목표와 긴장과 무관한 질서, 즉 ‘이리
저리로의 움직임’이 지배하는 영역 안으로 놀이자를 진입시킨다.
성취해야 할 목표를 매 순간 의식하며 ‘제정신을 똑바로 유지하는’ 일상적 삶을 기준
으로 삼으면 놀이에의 몰입 때문에 목표를 망각한 상태는 ‘제정신을 잃은’ 상태이다. 자
기 망각은 놀이의 질서에 압도됨으로써 목표를 망각한 상태를 가리킨다. 목표를 가질 때
우리는 실패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며 노심초사한다. 그러므로 목표를 뚜렷하게 의식할
때는 목표를 기획하고 확인하며 그것을 달성하기 위하여 애쓰는 자아가 전면에 부각된
다. 이 자아는 일상적 삶을 지속시키는 가장 원초적인 힘이다. 이에 반해 놀이자는 특정
한 목표를 의식하지 않기 때문에 적어도 놀이하는 동안 만큼은 그의 일상적 삶이 중단
된다. 가다머는 자기 망각을 가리켜 긍정적 성취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목표를 달성하려
는 능동성과 전혀 다른 것이다. 2) 자기 망각은 목표를 망각한다는 점에서 보면 일탈이
지만 놀이의 질서를 파악한다는 점에서는 긍정적 성취이다.
‘자기 망각’에 비추어 보면 ‘신성한 광기’와 관련하여 제기되었던 두 가지 의문, 즉 초
월성과 일탈성의 의미가 보다 분명해진다. 자기 망각은 목표를 망각했다는 점에서 정상
성을 이탈한 것이며, 목표를 추구하는 일상적 자아를 초월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자기 망각은 예술 작품의 가치를 적극적인 방식으로 드러내지는 못한다. 자기 망각이 일
상적 삶을 지속시키는 목표를 잠시 망각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이것은 예술 작품의 가치
를 소극적인 방식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예술 작품의 가치가 자기 망각에 있다면, 자기
망각은 예술 작품을 통하여 무엇인가 가치로운 것을 배운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가다머
는 그 내용을 가리켜 ‘유의미한 전체’라고 부른다. 이 점을 고찰하기 위해서는 먼저 놀이
와 예술의 관계에 대한 가다머의 설명을 살펴보아야 한다.


2) 자기 망각의 긍정적 성취는 예술 작품을 통하여 학습하는 ‘유의미한 전체’이다. 이하 Ⅲ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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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예술 작품에 들어 있는 진리
자기 망각이 예술 작품의 가치라는 점에 주목하면 자기 망각의 원형인 놀이와 예술
작품이 긴밀하게 관련되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아닌게 아니라 가다머는 놀이야말로 예
술 작품이 존재하는 양상이며, 그 자체로서 예술에 관한 경험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Gadamer, 1992: 101-102). 3) 놀이와 예술이 공유하는 중요한 요소는 양자가 모두 ‘구조’
를 갖는다는 점이다. 가다머에 의하면 놀이는 원칙상 반복 가능하기 때문에 영속성을 지
닌다는 점에서 하나의 구조로 일컬어질 수 있다(Gadamer, 1992: 110). 무엇인가가 구조
를 갖는다는 것은 그 바깥에 있는 것과 단절되어, 외부에서 통용되는 규칙의 영향을 받
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예컨대 연극은 전혀 다른, 폐쇄된 세계 안에서 일
어나지만, 하나의 구조인 한 그 자신의 척도가 되며 자신을 평가함에 있어서 외부의 그
무엇에도 의거하지 않는다(Gadamer, 1992: 112). 즉 예술 작품으로서의 연극은, 놀이와
마찬가지로, 현실의 규범과 질서가 적용되지 않는 고유한 질서, 즉 구조를 가진다.
놀이에서와 마찬가지로 예술 작품의 구조 역시 행위의 주체와 대상 간에 있는 이리저
리로의 움직임을 가리킨다. 예술 작품은 행위의 주체와 대상 중 어느 한쪽에 속하는 고
정된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둘 사이에 존재하는 움직임이다. 위대한 예술 작품
의 직관에 몰두해 있을 때 우리는 주관적 세계와 객관적 세계 사이의 분리를 느끼지 않
는다. 우리는 물리적 사물들로 되어 있는 명료하고 평범한 현실 속에 살고 있는 것이 아
니며 또한 온전히 개인적인 영역 속에서만 살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 두 영역의 저 너
머에 우리는 하나의 새로운 왕국, 즉 조형 미술적, 음악적, 시적 형상의 왕국을 찾는다
(Cassirer, 2008: 253). 예술작품의 구조는 이러한 주관적 세계와 객관적 세계 간의 움직
임 또는 질서로 표현될 수 있다. 물론 이 움직임은 아무런 지향성 없이 제멋대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구조’로 일컬어지는 이유는 그 안에서 준수되는 모종의 질서
가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놀이와 예술 작품은 ‘구조’를 갖는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지만 양자가 모든 면에서 동
일한 것은 아니다.
놀이하는 자를 바라보는 관객 안에서 비로소 놀이는 완전한 의미를 얻는다. 놀이하는 자들
은 모든 놀이에서처럼 자신의 역할에 따라 행동한다. 그래서 놀이는 표현된다. 놀이 그 자체


3) 노래와 시는 교육 내용이기도 하고 예술 작품이기도 하다. 물론 예술 작품에는 노래와 시 이외에
도 그림, 무용 등의 분야가 포함되지만 본 논문에서는 예술 작품의 범위를 플라톤이 언급한 노래
와 시, 그리고 이와 유사한 연극, 드라마로 한정하여 논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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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놀이하는 자와 관객을 포함하는 전체이다. 실제로 놀이는 함께 놀이하는 자가 아니라 관객
에 의해서 가장 고유하게 경험되며, 놀이가 ‘의미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 관객에게
표현된다(정연재, 2008: 107, 재인용).
놀이는 누군가를 위하여 표현되는 것이 아니다. 즉 놀이에서의 표현은 관객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그러나 드라마는 그 본성상 관객을 요구하는 일종의 놀이하기이다
(Gadamer, 1992: 109). 가다머는 놀이의 구조가 관객에게 공유될 때 비로소 놀이가 완전
해진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다시 말해서 놀이는 그것이 관객을 가진 하나의 예술 작품이
될 때 완성된다. 이를테면 관객은 연극을 보면서 ‘내가 주인공과 동일한 처지에 있었다
면 어떻게 행동했을 것인가, 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가?’ 등의 질문을 품게 되고, 이러
한 질문들을 가짐으로써 일상의 삶에서 볼 수 없었던 무엇인가를 새롭게 보게 된다. 즉
놀이의 질서가 ‘이리저리로의 움직임’으로 지속되는 것을 넘어서, 관객으로 하여금 현실
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것을 감지하도록 할 때 놀이는 비로소 예술 작품이 된다. 연
극의 행위는 [현실보다] 우월한 진리를 말한다는 가다머의 주장(가다머, 2015: 166)은 관
객이 현실에서 볼 수 없었던 것, 즉 현실보다 우월한 진리를 파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술 작품의 감상이 진리를 파악하는 것이라면 창작은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다. 가다
머에 의하면 예술은 미메시스[모방]를 통해 현실의 진리, 즉 현실이 그 자체로는 갖고
있지 않은 진리를 드러낸다(Warnke, 1999: 110).4) 작가는 모방을 함에 있어서 어떤 부분
은 강조하고 어떤 부분은 생략한다. 그는 무엇인가를 지시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좋아
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것을 강조하지 않으면 안된다(Gadamer, 1992: 115). 예술 작품
은 그것이 지시하는 것이 실지로 거기에 있기 때문에 단지 그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술 작품은 존재의 증대를 상징한다(Gadamer, 1986: 35). 다시 말하면 예술 작
품은, 그 작품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그 존재의 여부를 몰랐을 그 무엇을 드러낸다는 점
에서 존재의 증대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모방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복제하는 것이 아니
라, 일상적 현실에서는 결코 불가능한 존재의 증대를 가능케 한다. 예술은 미메시스를
통해 현실 그 자체는 갖고 있지 않은 진리를 획득할 수 있게끔 계기를 제공한다(정연재,


4) 미메시스(mimesis)는 영어권과 프랑스어권에서 대체로 ‘imitation’으로 번역되었고 국내에서도
통상 ‘모방’이라고 번역되었다. 그런데 ‘모방’은 원본에 대한 저급한 복제라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미메시스의 탄력적 의미를 담기 위해서는 ‘재현’(representation)이라는 번역어가 낫
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왔다. 특히 예술적 미메시스는 단순한 의미에서의 모사나 복제가 아니라
창조적 변형을 가리킨다. 따라서 모방보다는 재현이 낫지만, 그렇다고 해서 ‘재현’이 미메시스 본
연의 창조적 측면을 온전히 살려주는 것 같지는 않다. 이런 이유로 절대 다수의 연구자들이 모방
이나 재현이라는 번역어보다 ‘미메시스’라는 발음 표기를 선호하는 것처럼 보인다(유기환, 2010:
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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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109). 이 말은 예술 활동이 일상적 경험과 단절되어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 속에
서는 발견할 수 없는 새로운 그 무엇, 즉 진리에 눈뜨게 한다는 뜻이다. 요컨대 예술 작
품은 ‘이리저리로의 움직임’에 머물러 있는 놀이를 존재의 증대로 완결 짓는다. 이 때 드
러난 존재는 개인에 따라 달라지는 ‘사적인’ 것이 아니라 예술가와 관객이 공유할 수 있
는 진리이다.
이를테면 관객은 비극을 접할 때 그것을 단순한 허구나 가상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관객은 비극을 대할 때 운명의 힘에 직면해서 자기 자신과 자신의 유한한 존재를 인식
한다. 위인들이 겪는 것은 전형적인 의미를 갖으며 비극적 비애에 동의하는 것은 비극의
과정 그 자체 또는 영웅을 덮치는 운명의 정당성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
게 유효한 형이상학적 존재 질서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구나’라고 깨닫는 것은 다른 사
람과 함께 사로잡혀 있던 미망에서 깨어나 되돌아온 일종의 자기 인식이다(가다머, 2015:
188). 말하자면 관객은 주인공과 자신을 분리시키지 않고 마치 자신이 그러한 운명에 처
한 것처럼 생각하면서 자신의 유한성을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가다머에 의하면 비극
적 불행의 그러한 과도함에서 경험되는 것은 진정한 공동의 것이다(가다머, 2015: 188).
요컨대 관객이 감상을 통하여 깨닫는 것은 작가가 표현한 형이상학적 존재 질서와 다르
지 않으며, 이 점에서 관객과 작가는 진리를 공유한다.
물론 관객과 작가가 공유하는 진리는 누구에게나 동일한 명제의 형태로 주어지지 않
는다. 명제가 추상성을 띤다면 진리는 드라마 속의 인간 행위를 통하여 표현된다는 점에
서 구체성을 띤다. 또한 진리는 우리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알려주는 자기 인식으로
안내한다. 말하자면 예술 작품은 작가와 감상자의 구분에 상관없이 자기 인식을 가능케
하는 진리의 표현이다. 진리의 표현으로서의 예술 작품을 배운다는 것은 추상적 명제를
그대로 복제하는 것도 아니고 주관성을 띤 사적 경험도 아니다. 그것은 자기 인식을 획
득하는 것이며 작가와 관객이 진리를 공유하는 것이다.
Ⅲ. ‘유의미한 전체’:초월성과 인격성
가다머는 예술 작품을 통하여 획득하는 진리를 ‘유의미한 전체’라고 표현한다. 유의미
한 전체의 본래적 의미는 놀이와의 연관성에서 찾을 수 있다. 가다머에 의하면 놀이가
구조라는 말은, 놀이는 놀이됨에 의존함에도 불구하고, 이러이러한 것으로 반복적으로
표현될 수 있고 그 의미가 이해될 수 있는 유의미한 전체라는 것을 뜻한다(Gadamer,
1992 : 117). 즉 유의미한 전체는 놀이의 움직임에 들어 있는 것, 반복적으로 표현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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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것, 그 의미가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놀이의 진정한 완성은 예
술이므로 유의미한 전체는 당연히 예술적 경험에서 완성된 형태로 드러난다. 제식에서
신의 표현, 연극에서 신화의 표현은, [제식과 연극에] 참여하여 놀이하는 사람이 표현하
는 놀이에 몰두해서 자신의 고양된 자기 표현을 발견하는 방식의 놀이만은 아니다. 이
표현들은 그 자체로부터 놀이하는 사람이 관객을 위해서 어떤 의미 전체[유의미한 전체]
를 표현하는 데로 이행한다(가다머, 2015: 161). 말하자면 ‘유의미한 전체’는 특정한 개인
에 국한되지 않고 놀이자(연기자)와 창작자(작가), 그리고 감상자(관객)에게 공유된다.
물론 이 공유성은 연극의 대본이나 논평문 등의 명제들로 실체화될 수 없다. 그것은 창
작, 연기, 감상 등의 구체적인 인간 행위를 통해서만 표현된다는 점에서 인격성을 띤 공
유성이다.
‘유의미한 전체’는 획일적이고 추상적 명제가 아닌 개인의 자유로운 자기 표현으로 나
타난다. 이를테면 연기자는 ‘유의미한 전체’를 표현함에 있어서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
을 보여준다. 즉 ‘유의미한 전체’는 공유 가능한 것이지만 개인의 자유를 제압하지 않는
다. 이 점은 예술가 뿐만 아니라 감상자에게도 적용된다. 감상자는 ‘내가 주인공이 한 특
정한 행동을 그대로 한다면 주변인들은 나의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주변인들
의 생각과 무관하게 나는 그 행동을 할 수 있을까, 주인공처럼 행동할 수 없다면 그 이
유는 무엇인가’ 등의 질문들을 품고 연극을 감상한다. 다시 말하면 감상은 일상에서는
궁금해 하지 않던 것들에 관한 질문을 구성하고 그 답을 탐색함으로써 자신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과정이다.
연극에서의 사건들은 관객들을 휘어잡는 사건이다. 그것들은 단지 영웅에게만 일어나는 사
건이 아니다. 또 그것들은 관객들에게 단순히 가능성으로만 재인식되는 그런 사건도 아니다.
오히려 영웅의 운명은 곧 관객의 운명이며, 비극을 보면서 관객들은 자신들도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강력한 힘과 인과응보에 종속되어 있다고 재인식한다. 따라서 관객이 연극에 개입하
는 양상은 전면적이다. 결국 연극의 요구는 배우와 허구적인 인물들에게뿐만 아니라 관객들
에게도 해당된다(Warnke, 1999: 114).
참된 의미의 감상은 연극 안의 이야기를 타인이 아닌 자신의 이야기로 만듦으로써 이
때까지 자신조차 알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을 표현한다. 극장에서 웅장하게 상연되는 비
극이 모든 사람의 삶 안에 들어 있는 예외적 상황을 아무리 많이 보여준다고 해도, 그것
은 일시적 도취를 일으킨 후 현실의 존재로 돌이키기 위하여 깨우는 모험적 경험이 아
니다. 관객을 사로잡는 고양되고 강렬한 감정은 오히려 관객 ‘자신과의 연속성’을 심화한
다. 관객은 비극의 행위 안에서 자신을 재발견한다(Gadamer, 1992: 133). 즉 감상자는 예
예술 작품을 통하여 획득하는 교육 내용의 개념: 가다머(H. G. Gadamer)의 ‘유의미한 전체’를 중심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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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작품이 아니었다면 상상할 수도 없었던, 자신에 관한 질문을 만들어 내고 이 과정을
통하여 새로운 자신의 모습을 표현한다. 이러한 자기 표현은 감상자로 하여금 반복적,
기계적 일상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하며, 유일한 현실인 줄 알았던 일상을 달리 볼 수 있
도록 해준다. 독자는 이야기의 등장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하거나 거리를 둠으로써 인물
을 해석하고 판단을 내리며 거꾸로 이런 해석을 통해 독서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자기’를 발견한다(김한식, 2011: 256). 자신을 표현하고 발견한다는 점에서 예술가와 감
상자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 유의미한 전체의 학습은 특정한 작가 개인의 생각, 정서, 가
치관을 학습하는 것도 아니고 감상자 개인의 주관적 체험도 아니다. 그것은 작가와 감상
자가 공유한다는 점에서 개인을 초월하며 자기 인식을 통하여 자기 표현을 가능케 한다
는 점에서 인격적인 것이다.
유의미한 전체에 초월성과 인격성이 함께 들어 있다는 것은 교육 내용과 관련하여 중
요한 점을 시사한다. 첫째, 위의 이중성은 학습자의 자기 표현과 교육 내용의 습득이 다
르지 않다는 점을 시사한다. 교육 내용의 보편성과 객관성을 중시하는 입장에 따르면 교
육 내용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동일한 객
관성을 견지한다. 이 입장에 따르면 교육 내용은 일련의 명제들, 기호들로 실체화되며,
학습자 개인의 자기 표현과 양립할 수 없는 객관적 성격을 띤다. 그러나 유의미한 전체
는 명제 등으로 실체화될 수 없고 창작과 감상이라는 개인의 구체적 행위 안에서 비로
소 존재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유의미한 전체의 학습은 개인의 자유로운 자기 표현과
다르지 않다. 즉 유의미한 전체를 학습하는 경우, 교육 내용의 습득과 자기 표현은 다르
지 않다.
둘째, 초월성과 인격성은 교육 내용의 상대성을 주장하는 것이 그릇되다는 점을 시사
한다. 교육 내용의 상대성을 주장하는 입장은 교육 내용과 정보를 동일시하는 견해와 연
결되어 서로의 입장을 지지하고 강화한다. 이를테면 오늘날의 정보화 사회 또는 지식 기
반 사회는 정보 통신 기술의 발달, 정보 유통 네트 워크의 확장, 다양한 미디어의 출현,
정보 서비스의 확산 등의 기술 · 공학적 지원을 받아 지식이 생산, 유통, 공유, 가공되면
서 개인 및 사회의 생산성과 효율성, 경쟁력을 높이는 사회로 받아들여진다(노진호,
2001: 38). 이 입장에 의하면 지식 또는 교육 내용은 정보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되고, 교
육 내용은 새로운 기술의 혁신과 문화의 변동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으로
규정될 수밖에 없다. 정보화 사회에서는 개인 및 사회의 효율성 제고를 위하여 새로운
정보를 교육 내용에 포함시키거나 기존의 정보를 교육 내용으로부터 배제하는 것이 권
장된다. 요컨대 정보와 동일시된 교육 내용은 기술과 문화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
성을 띨 수밖에 없다. 그러나 ‘유의미한 전체’에 비추어 보면 교육 내용은 정보와 동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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될 수 없다. 정보가 생산, 유통, 가공된다거나 정보의 효율성을 제고해야 한다는 주장은
정보가 명제나 기호처럼 실체화될 수 있다는 전제하에서만 가능하다. 예술 작품을 통하
여 획득하는 유의미한 전체는 창작과 감상 등의 자기 표현으로만 존재할 뿐 문자나 실
물로 실체화될 수 없다. 교육 내용의 객관성과 상대성을 주장하는 각각의 입장은 서로
상반된 것처럼 보이지만, 교육 내용을 실체화한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그리고 이 전
제를 견지하는 한 명제나 기호 등으로 실체화된 정보에 접하는 것이 어떻게 학습자의
자기 표현으로 연결되는지 설명될 수 없다.
Ⅳ. 결론
가다머에 의하면 플라톤의 ‘신성한 광기’는 자기 망각으로 해석될 수 있다. 자기 망각
은 목표에 묶여 있지 않은 ‘놀이’에서 그 원형을 찾을 수 있으며 놀이는 예술 작품의 감
상에서 완성된다. 자기 망각은 단순한 지적 공백 상태가 아니라 ‘유의미한 전체’를 학습
하는 것이다. 유의미한 전체는 특정한 명제, 기호들로 실체화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작가와 감상자가 공유한다는 점에서 개인의 주관적 취향을 넘어선 초월성을 지니며, 그
와 동시에 개인의 스타일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즉 ‘유의미한 전체’는
양립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는 두 가지, 즉 초월성과 인격성을 포함한다. 플라톤의 ‘신성
한 광기’는 예술 작품이 일상적 현실로 환원될 수 없는 초월성을 가진다는 점을 부각시
킨다. 그러나 가다머의 ‘유의미한 전체’는 초월성 뿐만 아니라 인격성도 부각시킨다고 보
아야 한다. 즉 자기 망각은 개인의 삶을 떠나 있거나 그것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자기 표현을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개인의 삶과 가장 근원적인 면에서 연결되어
있다.
가다머의 예술론에 비추어 보면, 플라톤의 ‘신성한 광기’는 예술 작품이 천재적 예술가
의 영감에 기인한다는 점을 주장하기 위한 비유가 아니다. 예술 작품의 가치가 유의미한
전체의 학습에 있다는 점을 받아들이면, 신성한 광기는 양립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는 초
월성과 인격성을 둘 다 포함하는 ‘신비’를 부각시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예술 작품
은 학습자의 자기 표현을 통해서만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창작자와 감상자에 의하여 공
유되고 지속될 수 있다는 신비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신비는 자기 표현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앞서
언급했듯이 비극을 통하여 관객이 긍정하는 것은 인간의 유한성이다. 그러나 인간의 유
한성을 학습한다는 것은 단순히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다’라는 명제의 문자적 의미를 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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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하는 것도 아니고 주인공의 연기를 중립적 입장에서 관찰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삶
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과 행동을 유한성의 관점에 입각하여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앎은 대단히 막연한 것으로서 그 앎의 범위를 한정하거나
일련의 명제로 요약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것은 감상자의 지식과 감정, 태도, 감지력,
판단력 등이 모두 섞인, ‘감’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감’은 우리가
자신과 타인의 구별없이 삶 전체를 대하는 느낌 또는 태도와 유사한 것이다. 그러나 그
것이 실체 없이 막연한 것이라고 해서 중요하지 않거나 그 영향력이 미미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삶에서 어떤 방식으로든지 표현될 수밖에 없을 만큼 강
력하고 근원적인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 뿐만 아니라 타인의 삶에서 나타
나는 모든 사건과 행동을 보는 ‘일상적’ 또는 ‘부분적’ 관점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유의미한 전체의 학습은 이 의미의 ‘감’을 삶의 모든 영역에서 표현하게 한다. 다시 말하
면 자기 망각은 개인의 삶을 떠나 있거나 그것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자기 표현
을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개인의 삶을 지탱하는 근원적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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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고접수: 2018년 4월 10일/ 수정완료: 2018년 5월 9일/ 게재승인: 2018년 5월 16일
□ 홍윤경: 영남대학교 기초교육대학 교육중점교수. 연구 관심 분야는 서양의 고대 교육
사상, 도덕교육, 예술과 교육 등 yunice46@ynu.ac.kr
교육사상연구 (제32권 제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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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 Study on the Concept of the Educational Content Implied in
the Work of Art: In light of H. G. Gadamer’s ‘the Meaningful
Whole’
Hong, Yun-Kyung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clarify the concept of the educational content
implied in the work of art. In Plato's Phaedrus, “divine madness” is identified as the
origin of creating poems worth teaching for posterity. According to Gadamer, “divine
madness” is to be interpreted as the self-forgetfulness. The typical self-forgetfulness
is to be found in human play. Gadamer insists that play is not the purpose-directed
activity, but purpose-free one. Almost every activity in life is focusing on the
purpose, which is the force to persist one’s daily life. In contrast, play has no purpose
but to preserve itself. While playing, players are able to forget themselves, for they
leave behind the purposes with which they are concerned.
According to Gadamer, play has the “to-and-fro movement”, which is an order in
play itself. “Human play comes to its true consummation in being art” in virtue of
structure. Structure in the work of art corresponds to the movement in human play.
The transformation into structure is itself transformation back into the truth, which is
otherwise hidden in the purpose-directed activity. Imitation represents "the meaningful
whole" to spectators as well as artists. “The meaningful whole” as the educational
content refers to the truth in the work of art. The meaningful whole is not the object
of learning which is to be isolated with the learning subject. The meaningful whole
has the common worth as well as the self-expression‎ of the learning subject. The
meaningful whole as the educational content has the transcendence as well as
personality.
Key Words:divine madness, the work of art, play, self-forgetfulness, the meaningful
whole, imitation, transcendence, personal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