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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정치

종교정당에 관한 한․일 비교:청우당과 공명당을 중심으로*/박세준.덕성여대


[논문요약]
대한민국과 일본의 헌법에는 종교정당의 활동을 금하는 명확한 내용
은 없다. 대한민국의 경우는 종교를 내세운 정당이 의회에 진출한 적이
없다. 일본에서 종교를 내세운 정당이 의회에 진출했고, 연정을 통해 여
당으로 활동하고 있다. 양국의 종교정당이 이처럼 다른 모습을 보이는
데에는 어떠한 요인들이 작용했는지를 밝히는 것이 본 연구의 목적이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종교정당을 둘러싸고 있는 내부환경과
외부환경을 비교해서 살펴본다. 종교정당의 내부환경은 종교정당의 모체
가 되는 종교의 교세와 그 종교의 교리, 종교정당의 정책 그리고 종교정
당의 활동이다. 종교정당의 외부환경은 해당국가의 정치상황, 해당국가
의 종교지형 그리고 국제질서다. 내부환경 요인 네 개와 외부환경 요인
세 개, 총 일곱 개의 요인을 비교해서 한국과 일본의 종교정당을 비교한
다. 한국의 경우는 남북한의 천도교청우당을, 일본의 경우 공명당을 연
구대상으로 한다.
교세의 면에서 남한의 천도교는 20여만 명, 북한은 180여만 명, 창가학
회는 500여만 명이다. 이들은 당시 종교지형에서 남한은 기독교와 불교
에 밀려 세 번째였고, 북한은 신도가 제일 많은 종교였다. 창가학회는
불교로 볼 경우 전통신토를 제외한 최대 종교의 일원이고, 불교계 신종
교로 봐도 기독교나 전통신토계 신종교보다 많은 교세를 자랑하고 있다.
천도교와 창가학회 모두 교리에 사회참여와 정치참여에 적극성이 있다.
이러한 교리 실천의 방법으로 종교정당을 만들어 현실정치에 참여한다.


* 이 논문은 2015년 7월 18일 일본 도시샤(同志社) 대학에서 발표한 논문을 수정
보완한 것임을 밝혀둔다.
** 저자: 박세준(덕성여자대학교 지식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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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청우당의 정책은 “조선적 민주주의”라는 중도좌파에 가까웠고, 창
가학회의 정책은 중도주의를 표방했으나 우파에 가까웠다. 이러한 정책
으로 천도교청우당은 남과 북 모두 다른 세력과 연계를 통해 활동했다.
남쪽의 천도교청우당 경우, 신파는 중도좌파를 포함한 좌익계와 구파는
중도우파를 포함한 우익계와 연계했다. 반면 공명당의 경우 보수당과
혁신당이 신경쓰지 않는, 틈새를 파고들며 활동했다. 보수에 유리한 보
혁대립이라는 정치지형이 공명당의 “틈새전략”과 맞아떨어진 것이다. 공
명당의 정계진출 시작이 됐던 일본의 “55년 체제”는 냉전의 산물이었고,
공명당이 연정의 동반자로 처음 여당이 된 시기는 냉전이 해체되던 시
기였다. 남과 북에서 천도교청우당이 활동하던 정치지형은 남쪽은 우익
에 유리한 좌우분열이었고, 북쪽은 좌익에 유리한 좌우분열이었다. 이에
중도좌익 노선이었던 천도교청우당은 남쪽에서는 불리한 위치였고, 북
쪽은 유리한 위치였다. 물론 이러한 정치지형은 냉전의 시작기였기 때
문이다.
이상에서 봤을 때, 천도교청우당과 공명당은 국제질서로 인해 구조화
된 국내 정치지형에 맞는 종교정당의 정책에 따라 실패와 성공으로 나
아가게 됐다. 특히나 중도주의를 표방했던 공명당이 냉전해체 이후 보수
정당과 손을 잡으면서 우편향 됐다는 점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종
교정당은 결국 대중정당이기 때문이다. 해당 국가 내에 종교지형이나 교
세, 종교정당의 활동과 같은 요소들은 종교정당의 등장이나 종교정당이
정계에 진출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의회에 진출할
수 있는, 즉 종교정당의 성공요소는 아니다.


주제어 : 종교정당, 천도교청우당, 공명당, 천도교, 창가학회
종교정당에 관한 한․일 비교: 청우당과 공명당을 중심으로 219


Ⅰ. 서론
한국과 일본은 이웃해 있지만 서로 다른 것이 많다. 닮은 것보다
다른 것이 많은 두 국가지만 각각의 헌법 제20조는 종교에 대한 내
용이다. 한국은 헌법 제20조(종교의 자유, 국교의 부인, 정교(政敎)의
분리)에서 “①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 ② 국교는 인정
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로 정하고 있다. 일본은 헌
법 제20조(信敎의 自由, 국가의 宗敎活動 禁止)에서 “① 신교(信敎)의
자유는 누구에게나 이를 보장한다. 어떠한 종교단체도 국가로부터
특권을 받거나, 또는 정치상의 권력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 ② 어떠
한 사람도 종교상의 행위, 축전, 의식 또는 행사에 참가하는 것이
강제되지 않는다. ③ 국가 및 그 기관은, 종교 교육 기타 어떠한 종
교적 활동도 해서는 안 된다”라고 정하고 있다.
두 국가의 헌법 제20조는 종교의 자유와 국가와 종교의 분리 혹
은 국가의 종교활동 금지를 밝히고 있다. 하지만 두 국가 모두 종교
정당의 활동을 금하는 명확한 내용은 없다. “국가와 종교의 분리”
또는 “종교단체의 정치상의 권력 행사 금지”라는 표현을 통해 종교
정당에 대해 에둘러 금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영향 때문인지 양
국가 모두 종교를 내세우는 정당이 단독 여당이 되거나 제1야당이
되는 경우는 없었다.
한국의 경우는 종교를 내세운 정당이 각급 선거에서 당선인을 배
출한 적도 없었다. 다양한 종교가 다양한 시기에 다양한 정당을 결
성해서 선거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어느 시기, 어느 종교, 어느 정당
도 한 명의 당선인을 배출하지 못했다. 일본의 경우는 다르다. 일본
에서 종교를 내세운 정당이 단독 여당이 되거나 제1야당이 되지는
못했지만 각급 선거에서 당선인들을 배출했다. 또 다른 당과 연정을
통해 여당이 됐다. 이 정당이 공명당(公明黨)이다. 공명당은 불교계
일련정종 계열의 종교단체인 창가학회(創價學會)가 중심이 되어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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든 정당이다. 1964년에 창당한 공명당은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1993
년에 들어 연립정권에 참여해 정부 내각에 진출했다.
양 국의 종교정당이 이처럼 다른 모습을 보이는 데에는 어떠한
요인들이 작용했는지를 밝히는 것이 본 연구의 목적이다. 이 비교의
결과를 통해 한국에서 종교정당의 성공가능성까지 타진하기로 한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종교정당을 둘러싸고 있는 내부환
경과 외부환경을 비교해서 살펴본다. 종교정당의 내부환경은 종교정
당의 모체가 되는 종교의 교세와 그 종교의 교리, 종교정당의 정책
그리고 종교정당의 활동이다. 종교정당의 외부환경은 해당국가의 정
치상황, 해당국가의 종교지형 그리고 국제질서다. 내부환경 요인 네
개와 외부환경 요인 세 개, 총 일곱 개의 요인을 비교해서 한국과
일본의 종교정당을 비교한다.
일본의 경우는 공명당을 연구대상으로 한다. 앞서 말했듯이 공명
당은 종교정당으로서 일본 정치계에서 자리를 확고하게 잡았기 때
문이다. 한국의 경우는 천도교청우당을 대상으로 한다. 한국에서 종
교정당은 일본과 달리 뚜렷한 자취를 남기지 못했다. 따라서 어느
정당을 연구대상으로 선정한다고 해도 한국의 종교정당을 설명하는
데 있어 모자람이 없다. 하지만 천도교청우당(天道敎靑友黨)은 한국
의 다른 종교정당과 다른 점이 있다. 다른 종교 정당의 경우 해당
종교의 한 종파가 중심이 되어 창당했다. 그렇기 때문에 해당 종교
전체를 대표하지 않는다. 천도교청우당은 천도교를 대표한 정당이
다. 이러한 차이점과 일본의 공명당이 창가학회를 대표하는 정당이
라는 점 때문에1) 한국에서 종교정당의 연구대상은 천도교청우당으
로 한다.
본격 비교에 앞서 확인하고자 하는 종교정당의 내외부 변수와 방


1) 일련정종이 일본 불교의 한 종파이고 창가학회는 다시 또 일련정종의 종파로
시작했지만 현재 창가학회는 일련정종과 전혀 상관없는 종교, 불교계 신종교로
구분한다.
종교정당에 관한 한․일 비교: 청우당과 공명당을 중심으로 221


법론에 대한 논의와 공명당과 천도교청우당에 대한 기존의 논의들
을 살펴보기로 한다.


Ⅱ. 방법론과 선행연구
1. 변수에 대한 논의
정당은 공식화된 조직, 계획된 프로그램, 정권획득의 전략이 있어
야 한다(Brocker and Künkler, 2013:175). 이 세 가지 기준을 가지고 역
사상 모든 정당을 분류하면 총 15가지 종류의 정당이 나올 수 있
다.2) 이중 종교정당은 대중 기반 정당에 속한다. 종교정당은 다원주
의, 민주주의, 관용의 정도와 종교정당으로서의 세속이데올로기를
바라보는 데 있어서 해당 교리가 어느 정도 반영되고 있는 지 여부
에 따라 교파주의 정당과 근본주의 정당으로 분류된다.3) 대중기반
정당은 대중의 지지를 받도록 노력을 해야 한다. 종교정당을 가장
확실하게 지지하는 대중은 결국 해당 종교를 믿는 신자들이다. 따라
서 종교정당의 성공 또는 실패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종교의 교세와
해당 국가의 종교지형을 살펴봐야 한다. 또한 종교정당이 교파주의
정당인지 근본주의 정당인 지를 구분하기 위해 종교정당의 기반이
되는 종교의 교리와 정당의 정책을 확인해야 한다.


2) 정당의 지지기반에 따라 엘리트기반, 대중기반, 민족기반, 선거주의와 운동주의
정당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대중기반 정당은 다시 사회주의정당, 국
가주의정당, 종교정당으로 나뉘게 된다(Gunter&Diamond, 2003:173).
3) 이 두 가지 기준으로 교파주의 정당과 근본주의 정당으로 구분이 된다. 전자의
경우는 독일 기독교민주당이나 폴란드의 기독교국가연합, 체코의 기독교민주주
의연합이 있다. 이들의 정권획득의 전략은 민주주의와 대중기반이다. 후자의 경
우는 알제리의 이슬람구원전선과 터키의 복지정당이 있다. 이들은 정권획득을
하는데 있어 비민주주의인 경우가 많다(Gunter&Diamond, 2003:182-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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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가 자신들의 정당을 만드는 것은 종교의 정치참여 방식 중
하나로 볼 수 있다(강인철, 2013:00). 종교가 정치와 관계를 맺는 방
식은 크게 영향력 전략과 합법화 전략,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전자
는 주류 종교 측이 제도상 이익증진을 목적으로 정치와 국가에 대
한 영향력을 유지하거나 확대하기 위함이다. 후자는 비주류 내지 주
변에 위치한 종교들이 자신들에게 이미 부여되었거나 앞으로 부여
될 가능성이 높은 부정의 호명이나 사회의 낙인, 오명 부여와 같은
것들을 피하면서 ‘종교시민권’을 회복하기 위함이다.4) 종교정당을 만
들었다는 것은 해당 종교가 스스로 최소한 비주류 내지 주변화된
종교가 아니라고 판단했다는 방증이다. 그러나 종교조직 자체 판단
과 실제 평가는 다를 수 있다. 따라서 해당 국가의 정치상황을 살펴
봐야 한다. 정치상황을 살펴볼 때 주의해야할 점이 있다. 제2차세계
대전 이후 국내정치는 국제질서를 떼어놓고 바라볼 수 없다. 특히나
한국과 일본은 국제질서 속에서 정치상황이 요동친 국가였다. 따라
서 국제질서 역시 빼놓지 않고 살펴봐야 하는 요소다. 해당국가의
정치상황과 함께 종교정당의 활동 또한 살펴봐야 한다. 종교정당의
활동을 통해 주류 종교에서 비주류 종교로 또는 비주류 종교에서
주류종교로 이동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해당 종교의 교세와
종교 지형도 이러한 판단의 근거가 될 수 있다.
두 국가의 종교정당을 비교하는 방법의 기초는 일치법과 차이법
이다. 두 연구대상의 어떠한 점이 일치를 했고, 어떠한 점이 차이를
보여서 지금의 결과가 나왔는지를 분석하는 데 있어 일치법과 차이
법만한 방법론은 없다. 이러한 일치법과 차이법에 기초하여 각 연구
대상의 주요 변수들을 비교하는 거시인과분석을 실시한다. 다만 각


4) 영향력 전략은 다시 최고통치자 접근전략, 정당전략, 사회운동전략, 정치사회에
대한 영향력 전략, 선거 전략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합법화전략은 지배이데올로
기편승전략, 민족화전략, 현지화(토착화)전략, 공신력전략, 탈정치화(정치전향)전
략, 정치보호막구축전략으로 구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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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수들이 맥락에서 벗어나거나 역사성이 사라지지 않게 유념해야
한다. 연구대상으로 상정된 한일 양국의 종교정당들이 활동한 시기
는 서로 다르다. 따라서 탈맥락화와 몰역사성에 매몰될 경우 올바른
결론에 도달하지 못할 경우도 생길 수 있다.


2. 종교정당에 대한 논의
종교정당이 나타난 것은 19세기 말 무렵의 유럽에서였다. 당시에
는 유럽문화의 뿌리 중 하나인 가톨릭과 개신교를 기반으로 등장했
다. 현재는 유럽뿐만 아니라 기독교5) 문화권인 남북아메리카에서도
종교정당이 활동을 하고 있다. 기독교 계열 종교정당뿐만 아니라 터
키나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국가에서는 이슬람을 기반으
로 하는 종교정당이 활동 중이다. 이스라엘에서는 유대교 종교정당
이, 인도에서는 힌두교나 시크교 종교정당이 있다. 그리고 일본에서
는 앞서 말했던 공명당이 활동 중이다. 공명당에 대한 연구는 해외
에서는 활발한 상태이나 국내에서는 많지가 않다. 그 또한 주로 일
본정치를 연구하는 데 있어 공명당을 분석하는 경우가 많다.6) 공명
당과 창가학회를 연구대상으로 한 연구는 국내에서는 공명당과 중
도주의를 연계한 연구(백승헌, 2002)가 유일한 정도다.
국내에서 종교정당에 대한 논의는 많지 않다. 종교정당이 각종
선거에서 큰 성과를 내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종교의 정치참
여 또는 정치세력화에 대한 연구는 있지만7) 종교의 정치참여에 있
어 최종 형태인 종교정당에 대한 연구는 많지 않다. 그 중에서도 천
도교청우당에 대한 연구가 대부분이다. 해방 후 천도교청우당의 정


5) 특별한 언급이 없으면 기독교는 천주교와 개신교를 의미한다.
6) 일본 정치와 공명당에 관한 연구는 전황수(2000), 이기완(2006), 이기태(2015), 김
용복(2015)의 연구결과에서 확인할 수 있다.
7) 한국에서 종교의 정치참여에 대한 연구는 이진구(2008), 박희택(2008), 강원돈
(2008), 박준영(2008), 전명수(2014)의 연구결과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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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활동과 통일정부수립운동(성주현, 2001), 해방공간에서 천도교청우
당의 활동(임형진, 2002), 1945년에서 48년까지 북한 천도교청우당의
정치노선과 활동(정용서, 2004), 개벽과 청우당의 이상국가를 중심으
로 한 논의(임형진, 2011), 남북한 청우당을 역사사회학 관점에서 비
교(박세준, 2010), 해방 후 천도교청우당의 정치운동(정용서, 2014)에
서 천도교청우당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그러나 종교정당인 천도교
청우당의 내용에 그칠 뿐 어느 것도 한국종교지형에서 종교정당이
성공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한 분석은 없다.
천도교가 아닌 종교정당에 대한 논의는 개신교와 통일교를 기반
으로 한 정당이 총선에 등장하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종교정당 출
현과 그 의미를 분석한 연구다(이진구, 2009). 이 연구에서는 종교정
당을 종교적 이념 혹은 종교적 세계관에 근거하여 정치세력화를 추
구하는 정당으로 정의한다(이진구, 2009:72). 직접 방식의 정치권력을
추구하지 않고, 정당의 형태를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기독교뉴라이
트연합, 가톨릭뉴라이트, 기독교사회책임과 같은 단체는 종교정당이
라고 보지 않는다. 또한 의회진입보다는 사회운동에 주력하는 종교
계 NGO와도 선을 긋는다.
한국에서 종교정당이 등장한 것은 2008년이 처음이 아니다. 앞서
나왔던 천도교청우당도 있었고, 북한지역에서는 개신교 지도자들이
기독교사회민주당, 기독교자유당을 창당했던 사실도 있다. 이후 종
교정당은 2000년에 들어서 다시 나타났다. 2002년 대선에서 승려 출
신 후보가 국태민안호국당이라는 이름으로 출마했다.8) 불교계에서
는 종단소속도 아닐뿐더러 한국전통불교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라며 선을 긋기는 했지만,9) 개신교계에서는 이를 계기로 정당을 만
들 결심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불교계는 2008년 불교연합당이라


8) 이 후보는 최종 51,104표를 얻었다. 득표율은 0.2%다.
9) 실제로 대선에 출마한 승려가 속한 종파는 세계불교 법왕청이라는 곳이었고,
이는 한국불교계의 3대 종파인 조계종, 천태종, 태고종에 속한 곳은 아니다.
종교정당에 관한 한․일 비교: 청우당과 공명당을 중심으로 225


는 이름으로 총선에 참가한 불교계 종교정당은 0.1%의 득표율에 그
쳤다.10) 2016년 총선에서는 그린불교연합당으로 참가해서 마찬가지
로 0.1%의 득표율을 얻었다.11) 불교계 종교정당 외에도 개신교계를
자극한 종교가 통일교다. 통일교는 2003년 천주평화통일가정당을 창
당했다. 물론 이 정당은 창당 이후 여러 선거에 단 한 명의 후보도
내지 않아 사라졌다. 그러나 2008년 통일교는 평화통일가정당이라는
이름으로 총선에 나왔고 모든 지역구에 후보를 냈다. 하지만 어느
한 곳도 당선인을 배출하지는 못했다.12)
불교와 통일교계 종교정당이 창당한 것을 계기로 개신교계에서도
종교정당을 만들어 선거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2004년 총선에서 기
독당은 1%가 넘는 득표율을 받았고13), 2008년 총선에서는 기독사랑
실천당이 2.5%의 득표율을 기록한 적이 있었다.14) 2012년 총선에서
는 기독자유민주당과 한국기독당이 나왔는데 각각 1%대와 0.2%의
지지율을 보였다.15) 2016년 총선에는 기독자유당과 기독민주당이
2.6%와 0.5%의 득표율을 얻었다.16)
이러한 한국의 종교정당 역사 속에서 천도교청우당을 앞서 제시
한 네 개의 내부환경과 세 개의 외부환경을 중심으로 알아보기로
한다.


10) 36,262표, 득표율 0.16%
11) 31,141표, 득표율 0.13%
12) 비례대표 득표 결과 180,857표, 득표율 1.05%
13) 228,837표, 득표율 1.08%
14) 443,775표, 득표율 2.59%
15) 기독자유민주당 257,190표, 득표율 1.20%, 한국기독당 54,332표, 득표율 0.25%
16) 기독자유당 626,853표, 득표율 2.63%, 기독민주당 129,978표, 득표율 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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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실패한 종교정당, 한국의 천도교청우당
한국의 종교지형의 특징은 한 종교가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
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한국 인구의 절반 가까이는 종교가 없다.
2015년 인구주택 총조사에 따르면 기독교는 개신교와 천주교 각
960여만 명, 380여만 명으로 총 1,300여만 명이 있고, 불교는 760여
만 명이 믿고 있다. 이는 종교인구 중에서 각 45%, 18%, 35% 정도
를 차지하고 있어 총 종교인구의 98%를 세 종교가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전체인구로 보면 이들 종교는 각각 19%, 8%, 16%에 불과하
다. 이러한 현재 한국의 종교지형은 80년 전과는 달랐다. 1926년 기
독교는 35만 명이었고, 불교는 20여만 명이었다. 당시 최고 많은 신
도를 가진 종교는 천도교로 200만 명이었다.17) 1926년의 한국 종교
지형은 해방 당시에도 이어진다. 해방 당시 천도교를 믿는 신자의
수도 200여만 명으로 추산된다. 그 중 약 15% 정도인 30여만 명이
38선 이남에 있었다. 동학농민혁명이후 천도교신자는 늘 남쪽보다
북쪽에 더 많았다.18) 이때 기독교인의 수는 70여만 명으로 북한에
20~30여만 명이 있었다.


17) “조선종교현황”(동아일보, 1926. 07. 10.)
18) 북조선천도교종리원 법도부장 문재경에 따르면 1947년 6월과 1950년 3월 당시,
38선 이북 천도교교세분포현황은 다음과 같다.
도별
시군수
(개)
1947. 06. 1950. 03.
교호수(호) 교인수(명) 교호수(호) 교인수(명)
평안북도 21 68,352 449,030 158,277 680,591
평안남도 17 78,038 405,798 145,019 623,582
황해도 19 41,874 217,745 87,723 377,209
강원도 15 29,231 152,091 70,363 302,561
함경남도 16 57,026 296,535 112,140 482,202
함경북도 15 32,480 168,896 93,069 400,197
계 103 325,001 1,690,095 666,591 2,866,342
출처: 이재순(1971a:94)
종교정당에 관한 한․일 비교: 청우당과 공명당을 중심으로 227


천도교는 동학을 계승한 종교다. 친일단체로 변한 일진회와 관계
를 끊기 위해 1905년 손병희가 이름을 바꿨다. 천도교의 교리는 시
천주(侍天主), 사인여천(事人如天),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종지(宗旨)
로 한다. 이를 밑바탕으로 해서 후천개벽을 통해 지상천국을 꿈꾼
다. 후천개벽을 이뤄내기 위한 방법은 바로 교정쌍전(敎政雙全)이다.
교정쌍전은 천도교와 동학이 정치와 사회에 큰 관심을 갖는데 중요
했다. 종교조직이지만 다른 종교조직과 달리 정치와 사회에 적극 참
여하는 데는 바로 교정쌍전의 교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동학농민혁
명 때 동학군이 외쳤던 보국안민(輔國安民), 포덕천하(布德天下), 제
폭구민(除暴救民), 진멸권귀(盡滅權貴), 축멸왜이(逐滅倭夷), 광제창생
(廣濟蒼生)들은 모두 이 교정쌍전을 구체화한 교리다. 이 중에 보국
안민은 ‘국가를 바로잡고(輔) 백성을 안녕케 하는’ 뜻으로 ‘은혜를 갚
거나(報)’, ‘보호하는(保)’하는 것이 아니기에 천도교의 정치참여는 적
극성과 능동성을 보인다.
천도교는 교정쌍전을 실행하기 위해 전위단체를 만들었다. 전위
단체는 종교조직으로서 나서기 어려운 일을 행하기 위해 만든 조직
이다. 따라서 이 단체가 하는 일이 곧 천도교가 하는 일이다. 천도
교는 일제강점기 때 처음 전위단체를 조직했다. 1919년 처음 조직한
천도교청년교리강연부는 교리 선전과 연구를 위해 만들었지만 곧
새로운 문화운동으로 영역을 넓혔다. 어린이 운동, 농촌운동, 계몽운
동과 같은 활동을 하면서 천도교청년회로 이름을 바꾼 전위단체는
1922년 교단이 보수-혁신으로 분열되자 더 이상 활동을 못하게 됐
다. 분열이 수습된 1923년 청년단체보다 정치성이 강한 정당형태의
조직인 천도교청년당을 만들어 활동을 다시 시작한다. 하지만 1925
년 제1차 신구 분열로 청년당과 청년동맹으로 따로 활동을 해야 했
다. 1931년 신구파가 합동을 하자 천도교청우당이라는 이름으로 통
합하지만 1933년 제2차 분열로 인해 다시 따로 활동을 해야 했다.
이름만 “당”이었지 사회운동조직에 불과했던 천도교청우당은 해


228 사회사상과 문화


방이 된 후 부활한다. 1945년 9월 천도교청우당부활준비위원회를 꾸
리고 곧바로 부활취지문을 발표했다. 한 달 후, 천도교청우당 부활
전당대회를 개최하고, 당규와 정강정책들을 발표함과 동시에 민족통
일기관결성 촉진, 전재동포 구제, 실업대책, 기관지 발행들을 결의했
다. 천도교청우당은 민족자주의 이상적 민주국가의 건설, 사인여천
정신에 맞는 새 윤리의 수립, 동귀일체의 신생활이념에 기한 경제도
의 실현, 국민개로제를 실시하여 일상보국의 철저를 강령으로 채택
했다(천도교중앙총부교서편찬위원회, 2006:405). 천도교가 청우당을
통해 건설하려는 신국가는 자본가 중심의 자본주의와 무산자 독재
의 프로민주주의가 아닌 “조선적 민주주의”였다. 조선적 민주주의는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을 동일한 목적으로 하는 민주주의로 자주독립
과 민주정치, 민주경제, 민주문화, 민주도덕을 동시에 실현하고자 하
는 것이다. 이러한 천도교의 정치노선은 우파나 중도우파보다 중도
좌파와 결이 맞았다.
분단이 고착화되어 남북한의 왕래가 힘들게 되자 38선 이북의 천
도교인들은 1946년 2월 북조선천도교청우당을 조직했다. 북조선천도
교청우당의 당원은 30여만 명까지 성장한다. 30여만 명 중 90% 가
까이가 노동자와 농민이었다. 이러한 당의 계급구성으로 조선노동당
과 소군정은 북조선천도교청우당에게 호의를 보였다. 당의 계급구성
도 비슷하고 무엇보다도 리(里)단위까지 뻗어 있는 천도교의 조직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조선노동당은 우당으로 생각했던 조선민주당을
버리고 북조선천도교청우당을 우당으로 삼았다. 북조선천도교청우당
역시 소군정과 가까운 조선노동당을 통해 이상국가 건설에 가까이
다가가길 원했다. 양 당의 대등한 관계는 소군정이 조선노동당에게
급격히 힘을 실어주고, 통일정부가 아닌 남북한 단독정부로 흘러가
게 되자 깨지게 된다.
1948년 2월 남북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3.1재현운동”이 사
전에 발각되어 실패로 돌아가자 북조선천도교청우당은 조선노동당
종교정당에 관한 한․일 비교: 청우당과 공명당을 중심으로 229
의 힘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북조선천도교청우당과 천
도교에서 소군정과 조선노동당에 반대하는 당과 교회 안의 우파와
중도좌파들이 축출 당했다. 그러나 북조선천도교청우당은 사라지지
않고 지금까지도 북한의 정당 중 하나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북
조선천도교청우당 내부는 남한의 천도교와 협력하자는 쪽과 북조선
내에서 활동을 하자는 쪽으로 나뉘어 있었다. 3.1재현운동의 실패와
이에 따른 우파와 중도좌파들의 축출은 천도교와 북조선청우당 지
도부가 후자로 재편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들은 조선노동당과 함께
“교정쌍전”을 실천하고자 했다. 그리고 휴전 이후 확고한 권력기반
을 잡지 못한 김일성은 천도교인들이 많이 속해있는 소위 갑산파의
힘이 필요했다. 김일성과 천도교의 이러한 이해관계 속에서 북조선
천도교청우당의 간부들은 김일성 일인독재가 확립됐던 1958년까지
각종 위원회에서 활동했다.19)
남쪽의 천도교청우당은 북조선천도교청우당과 다르게 흘러갔다.
천도교청우당은 신탁통치반대운동은 물론 미소공동위원회에 한국민
에게 정치적 자유를 부여하고 내정을 간섭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그
러나 제3차 신구분열이 일어나면서 천도교청우당은 신파들의 정당
이 되었고, 구파들은 천도교보국당을 창당해 활동하기 이른다.20) 신
파는 분열 전부터 중도좌파 정치단체들과 손을 잡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당연히 청우당은 민주주의민족전선과 같은 좌파노선과 함
께 했다. 천도교 신파가 좌파와 연대를 맺은 것은 그들이 추구하는
조선적 신민주주의와 민족해방, 계급해방이 우파보다는 좌파와 가까
웠기 때문이다. 민족해방은 민족개벽이고 계급해방은 사회개벽이었
다. 민족개벽은 또한 보국(輔國)이었고 사회개벽은 안민(安民)이었다.


19) 물론 세습독재로 넘어가던 1967년에 갑산파가 숙청당하면서 북한의 천도교와
천도교청우당은 예전만 못한 위상으로 남게 된다.
20) 이하 천도교 신파의 천도교청우당은 청우당으로, 천도교 구파의 천도교보국당
은 보국당으로 한다.
230 사회사상과 문화


보국안민을 내세운 청우당으로서는 신탁통치를 찬성할 수 없었고,
단정단선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때문에 좌우합작운동을 비롯해 미
소공동위원회지지, 입법의원 참여, 남북 단독정부수립 반대, 남북협
상 참여에 다른 중도좌파 정치단체들과 같은 목소리를 냈다. 남북한
단독정부가 확실시 될 때에도 북쪽의 천도교와 3.1재현운동을 기획
한 것 역시 천도교 신파와 청우당이었다.
이에 반해 구파는 분열 전부터 우파정치단체들과 같이 활동했다.
천도교 구파와 우파정치단체들의 인연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이어진
다. 구파의 수장 격인 사람들은 이승만이 조직한 독립촉성국민회의
의 회장과 고문을 맡으면서 보수우파와 정치제휴를 하고 있었다.21)
천도교 신구파의 분열로 청우당의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게 된 천도
교 구파는 보국당이라는 이름의 전위단체를 조직한다. 보국당의 당
시는 “인내천주의의 교정일치의 실현, 오심여심의 민족적주의독립국
가의 건설, 동귀일체의 세계적평화의 수립”이었다(김완수, 2003:316).
천도교 구파의 정치노선이 보수우파였듯이 보국당의 정치노선도 보
수우파였다. 우경화되었다고 비판을 받았던 입법의원에도 보국당 대
표는 흔쾌히 참여를 했고, 미소공위가 결렬된 후에는 한독당보다는
한민당과 손을 잡았다. 남북한 총선에 대해 소련이 북한입경을 거부
한 문제를 두고도 보국당은 군정철수가 아닌 군정연장 반대의 입장
을 밝힐 정도였다.
천도교청우당이 청우당과 보국당으로 분열된 가장 큰 이유는 제3
차 신구분열이었다. 그러나 당시 정치지형도 큰 몫을 했다. 해방공
간이라는 정치지형의 특징 중 하나는 과잉정치화와 극심한 좌우대
립이었다. 과잉정치화로 인해 같은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라도 정치
노선이 조금만 달라도 쉽게 갈라섰다. 이미 여러 차례 분열과 통합
을 하던 천도교로서는 정치노선조차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갈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신파와 구파의 정치노선은 당시 기준으로양극단에


21) 권동진이 고문이었고, 오세창은 회장이었다.
종교정당에 관한 한․일 비교: 청우당과 공명당을 중심으로 231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분열이 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한
상황이었다.
청우당과 보국당은 좌와 우에서 각각 천도교의 전위단체로서 활
동을 했지만 두 당 모두 실패하고 만다. 정당 활동의 결과물인 의회
에 진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948년 남한의 제헌의회에는 청우당
과 보국당 출신 의원이 없다. 단정단선을 반대한 청우당은 물론 단
정단선을 지지했던 보국당에서도 후보조차 내지 않았다. 천도교 인
물 중 이종린과 구중회가 의회에 진출하긴 했지만 둘 모두 무소속
으로 출마했다.22) 청우당과 보국당이 후보조차 내지 못한 이유는 당
시의 정치지형보다는 국제질서에 영향이 컸다.
38선 이남을 담당하고 있던 미군정은 자신들의 통치이념에 맞는
정치단체가 정부를 수립하기 원했다. 미군정이 원하는 정치단체는
우선 반공의식이 투철해야 한다. 다음으로 남북 분단현실을 인정하
고 전후 세계경제체제에 공산주의국가가 아닌 자본주의국가로 편입
할 의사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서구식 교육을 통해 서구 민주주의
수용에 적극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조건을 만족하는 정치단체는 우
파보수 성향의 단체였다. 그리고 천도교 신파의 청우당은 이러한 조
건에 모두 맞지 않았다. 천도교 구파의 보국당 역시 모든 조건을 만
족한 것은 아니었다.
미군정의 통치이념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청우당과 보국당이 후
보를 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청우당과 보국당은 후보를 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좌우합작운동이 실패가 될 때 즈음 천도교 신파는
우파 정치단체와 추종세력, 미군정 그리고 심지어 천도교 구파에게
까지 공격을 받는다. 이들은 보성사를 습격하고, 좌익계 인사에 대
한 검거령을 내리고, 기념식장에서 신파를 공격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북조선천도교청우당은 미군정을 비난하는 성명서를 발표한
다. 이 성명서로 인해 남한에서는 천도교를 미군정과 대립하고 북한


22) 이종린은 충남 서산군 갑, 구중회는 경남 창녕에서 당선되었다.
232 사회사상과 문화


과 연계되어 있는, 중도좌파 세력이 아닌 “빨갱이”로 인식하기 시작
했다. 청우당이 완전자주독립과 편좌편우가 아닌 중도의 길을 간다
는 성명서도 소용없었다. 북조선천도교청우당이 있는 이상, 그것도
조선노동당의 우당으로 있는 이상 천도교와 청우당은 “빨갱이집단”
이었다.
천도교의 신구파는 1948년 4월 다시 통합한다. 많은 교인수가 있
는 북한과의 왕래가 불가능한 가운데 분열된 상황은 정치와 종교의
영향력을 발휘하는 데 힘들기 때문이라는 것이 공식 이유였다. 하지
만 보수우파의 정치승리가 확실한 상황에서 “빨갱이집단”으로 몰린
천도교 신파가 보수우파와 연계되어 있는 구파에게 도움을 요청하
기 위한 통합이었다. 신파는 정치패배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생
존”을 걱정했다. 어떠한 경우라도 구파와 합치는 것이 자신들의 “생
존” 확률을 높이는 것이었다. 천도교 구파들은 많은 것을 양보받고
통합에 응했지만 그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천도교
인들은 신파와 구파를 구별했지만 일반인들은 그 차이를 알지 못한
다는 점이었다. 천도교는 그리고 천도교청우당은 여전히 조선노동당
의 우당으로서 있는 북조선천도교청우당과 연계된 “빨갱이집단”이었
다.
정부수립 이후에도 천도교청우당 간부들과 천도교인들은 간첩 혐
의로 기소되었고, 천도교청우당은 정당신청이 취소된다. 휴전후 교
정쌍전을 주장하는 천도교는 정당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
명으로 전위단체의 활동을 사회문화활동으로 못 박았다. 1960년 4월
혁명 이후, 동학당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활동을 재개하려 했으나 이
듬해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부가 반공을 국시로 하자 ‘빨갱이’ 논
란에 휩싸이는 것이 두려워 계획을 철회하고 만다. 이후 천도교가
전위단체 활동을 다시 시작한 것은 군사독재가 끝난 1990년대 초반
이었다. 그나마 정당이 아닌 시민단체로서의 활동이었다.


종교정당에 관한 한․일 비교: 청우당과 공명당을 중심으로 233


Ⅳ. 성공한 종교정당, 일본의 공명당
일본인은 흔히 종교에 대한 관심이 낮고, 종교에 관한 지식도 거
의 없다고들 한다. 그러나 많은 일본인은 정월 초하루나 여러 기념
일에 신사에 가서 절을 올리거나 일반 가정에 불단 또는 신단을 설
치한다. 이는 일본인들이 제도종교에는 크게 관심이 없지만, 문화로
서 종교에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2014년 일본의 종교지형을 보면 전통신토 또는 종교가 없다고 대답
한 사람이 전체 인구의 51.8%에 이른다. 종교가 없다는 것이 무교
또는 종교를 믿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제도종교를 믿지 않을 뿐
이지 문화로서 종교행위까지도 거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
라서 일본 전통문화로서 의례를 행하는 사람들까지도 전통신토로 분
류할 수 있다. 다음으로는 불교가 34.9%이며 전통신토에 기반한 신
종교가 4%, 그리스도교가 2.3%다(Agency for Cultural Affair, 2016:72).
전통신토를 문화행위로 판단해서 제외하면 일본 종교지형에서 최대
종교는 불교가 된다. 2012년 CIA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의 종교 비율
은 전통신토가 79.2%, 불교가 66.8%, 그리스도교가 1.5%, 기타가
7.1%23)로 공명당의 모체가 되는 창가학회는 불교계 신종교로 분류
가 된다.
창가학회의 교세는 해당 종교는 827만 세대, 1,700만 명로 발표하
고, 일본 문화청에서는 542만 명의 신도가 있다고 발표했다. 2015년
현재 일본의 인구가 1억 2천여만 명으로 창가학회의 주장으로 보면
전체 인구의 14%, 문화청 발표로 보면 전체인구의 4%가 창가학회
신도다. 이는 문화청의 수치로 봤을 때도 그리스도교 비율보다 높
고, 전통신토에 기반한 신종교를 믿는 사람들의 수치와 비슷한 수준
23) 총합이 100%가 넘는 이유는 전통신토와 불교 복수응답을 했기 때문이다(CIA
Facebook; https://www.cia.gov/library/publications/resources/the-world-factbook/fields/ 2122.html#ja,
2122.html#ja, 2016년 8월 3일 확인).
234 사회사상과 문화
의 교세를 보이고 있다.
창가학회는 일련종(日蓮宗)의 하부신자조직이었다. 하지만 일련종
이 명치유신 이후, 국가사회주의와 결합되는 것에 반대한 일련정종
(日蓮定宗)의 하부신자조직으로 보는 것이 옳다.24) 일련정종의 재가
신자들은 1930년대에 창가교육학회라는 이름으로 종교학술단체를
만들었다. 이후 1946년 창가학회로 개칭하고, 1951년 전투적 포교방
법인 “샤쿠부쿠(折伏) 대행진”25)을 선언한 이래 빠르게 성장해 갔다.
주로 중소 영세 상공업자, 노동자와 빈곤층, 중년 부인층과 같은 도
시중하층을 중심으로 신자수를 확대해 나갔다.
창가학회의 대종파인 일련종은 앞서 밝혔듯이 현실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일련정종이 일련종에 반대를 한 것은 국가사회주의와 결합
되는 것이었지 정치참여에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26) 따라서 창가학
회 역시 현실정치에 관심이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회악이
사라지지 않은 이유는 일련의 정법이 행해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
는 것이 일련정종과 창가학회의 주장이다. 공명당은 사회악을 없애
고 일련의 정법을 세우는 교리를 실현하기 위해 만든 창가학회의
전위단체였다.
창가학회의 처음 계획은 정당색이 없는 참의원이나 지방의회에
불법의 자비정신을 지닌 정치가를 보내는 것이었다. 1955년에 지방
선거에 등장했고, 이듬해에는 참의원 선거에서 지역구 1명, 전국구
2명, 총 3명이 당선했다. 이후 꾸준히 당선자 수를 늘려가면서 최대
14명, 최고 득표율 15.7%까지 성장했다. 공명당의 참의원 선거별 결
과는 <표 1>에서 확인할 수 있다.
24) 1991년 교리논쟁 끝에 일련정종은 창가학회를 파문했고, 이후 창가학회는 일
련정종과 관계없이 독자행보를 하게 된다.
25) 샤쿠부쿠 대행진은 악인과 악법을 억누르고 굴복시키는 불력이다.
26)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신찰을 거부해서 20여 명의 간부가 체포될 정도였다.
종교정당에 관한 한․일 비교: 청우당과 공명당을 중심으로 235
연도(년) 지역구(명) 득표율(%) 전국구(명) 득표율(%)
1956 1 1.4 2 3.5
1959 1 1.6 5 8.5
1962 2 2.6 7 11.5
1965 2 5.1 9 13.7
1968 4 6.1 9 15.4
1971 2 3.5 8 14.1
1974 5 12.6 9 12.1
1977 5 6.2 9 14.2
1980 3 5 9 11.9
1983 6 7.8 8 15.7
1986 3 4.4 7 13
1989 6 5.1 5 10.9
1992 8 7.8 6 14.3
1995
1998 2 3.3 7 13.8
2001 5 6.4 8 15
2004 3 3.85 8 15.41
2007 2 6 7 13.18
2010 3 3.88 6 13.1
2013 4 5.13 7 14.2
2016 7 7
<표 1> 역대 선거별 공명당의 참의원 결과
출처: 일본 위키피디아 해당 선거항목 참고 후 작성
참의원 진출에 성공한 창가학회는 청년부 출신인 이케다 다이사
쿠(池田大作)가 회장에 취임하면서 제대로 된 정치활동을 마음먹고
준비한다. 1961년 외곽정치단체인 공명정치연맹을 결성하고, 1964년
이 연맹을 공명당으로 발전시켜 1967년 중의원선거에 참가한다. 이
선거에서 공명당은 32명의 후보자를 내서 25명이 당선한다. 이때 총
득표율은 5.38%였다.
공명당은 수정자본주의를 정치노선으로, 대중복지주의를 정책의
근간으로 확정했다. 공명당의 정책은 사회복지정책에 의한 부분적
개량, 노사협조, 중소기업의 보호, 헌법옹호, 핵병기반대를 내걸었다.
236 사회사상과 문화
이와 동시에 인간성 사회주의, 불법민주주의, 세계민족주의를 새로
운 정치이념으로 내세웠다. 이러한 이념과 정책으로 지역사회에 밀
착한 지역구활동을 통해 중도정당으로서 기반을 쌓았다. 고도성장과
도시화의 60년대를 통해 자민, 사회 양당은 사회변동에 충분히 대응
하지 못한 것도 공명당 성장에 큰 요인이었다. 가치관이 다양해지
고, 생활기반의 차이도 있어 노동조합이 충족시켜주지 못한 것들을
창가학회와 공명당이 충족시켜주게 되자 도시중하층의 지지자들이
큰 폭으로 늘었다. 또한 공명당이 내건 복지, 환경, 참여 의제는 기
존 이데올로기 대립과는 다르다는 점이 일반인들에게 좋은 작용을
하게 된다(백승헌, 2002:48-9).
첫선거에 자신감을 가진 공명당은 다음 선거인 1969년에는 76명
의 후보자를 내서 47명 당선, 득표율 10.9%의 성적표를 받았다. 첫
선거보다 약 2배가량 성장한 것이다. 하지만 다음 선거에서는 창가
학회를 비판한 책의 출판을 막는 과정이 알려지면서 절반으로 줄게
된다.27) 공명당은 1972년 선거에서는 후퇴를 했지만 창가학회와 공
명당의 분리라는 수습책으로 1976년에는 다시 50여 석과 10%대의
득표율을 회복했다. 제3당으로서 입지를 다진 공명당은 1993년 최초
로 비자민정권 연정에 참여한다. 1994년 공명당과 공명신당으로 분
당하지만 1998년 다시 합당을 하고, 2000년 이후에는 자민당과 연정
을 통해 정권에 참여하고 있다. 공명당의 중의원 선거결과는 <표
2>에서 확인할 수 있다.
27) 후지와라 히로다츠(藤原弘達)가 쓴 창가학회를 처단한다라는 책의 출판을 둘
러싸고 공명당의 다케이리 요시가츠 위원장은 자민당의 나나카 가쿠에이 간사
장에게 “출판사쪽에 압력을 가해서 출판을 못하게 해달라”고 부탁하여 출판을
저지시켰다. 그러나 저자측은 이 책을 다른 출판사를 통해 세상에 내놓았고 출
판을 방해했던 사실마저 알려지게 되었다. 그래서 더욱 화제가 되었고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전황수, 2000:238).
종교정당에 관한 한․일 비교: 청우당과 공명당을 중심으로 237
연도(연) 지역구(명) 득표율(%) 비례대표(명) 득표율(%)
1967 25 5.38
1969 47 10.91
1972 29 8.46
1976 55 10.91
1979 57 9.78
1980 33 9.03
1983 58 10.12
1986 56 9.43
1990 45 7.98
1993 51 8.14
1996
2000 7 2.02 24 12.97
2003 9 1.49 25 14.78
2005 8 1.44 23 13.25
2009 0 1.11 21 11.45
2012 9 1.49 22 11.83
2014 9 1.45 26 13.71
<표 2> 역대 선거별 공명당의 중의원 결과
출처: 일본 위키피디아 해당 선거항목 참고 후 작성
언론출판방해사건의 해결을 위한 정교분리로 공명당은 겉으로는
종교색이 없는 중도주의 정당이 됐다. 그러나 공명당의 조직을 보면
완전히 분리된 것은 아니다. 창가학회의 조직은 지역분할로 되어 있
는데 이 구분은 선거구에 맞춰서 정해져 있어서 사실상 투표행동을
위한 신자 동원이 용이하다. 회장직속의 행동조직인 청년부의 남녀
부대와 부인부도 지역분할로 정비되어 선거전에서 가장 효과 있게
활동할 수 있는 조직형태로 이행했다. 의회 밖에서는 조직도 사람
도, 창가학회 그 자체가 공명당이다. 공명당원도 아닌 창가학회 신
자가 실제로는 공명당의 당무를 맡고 있다. 공명당은 창가학회신자
238 사회사상과 문화
가 아닌 사람도 입당할 수 있지만, 비신자당원에 대해서는 기관지에
보도되는 예가 거의 없을 정도로 존재가 확실하지 않다(백승헌,
2002:124-125). 정치자금 조달 면에서도 공명당과 창가학회의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신고액수 3위의 공명당은 자민당의 절반가량으로
일체의 기부를 받지 않는다. 주된 수입원은 기관지인 공명신문 발행
등의 사업수입이 전체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공식발
표 외에 공명당은 창가학회의 자금기부로 인해 자민당을 제외한 타
정당들28)에 비해 가장 풍족한 자금을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황수, 2000:239).
창가학회가 현실정치에 참여하던 시기는 이른바 일본의 “55년 체
제”가 시작된 때였다. 55년 체제의 특징은 자민당과 사민당이라는
형식상 양당제이지만 실제로는 자민당이 사회당보다 두 배 가까운
의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상황은 사회당이 정권을 획득
하지 못하지만 자민당은 헌법 개정을 위한 2/3이상의 의석을 확보하
지 못하는, 즉 정권교체와 헌법 개정이 없는 체제다. 다음으로는 보
수와 혁신의 이데올로기 대립의 시기다. 헌법개정, 안보옹호를 주장
하는 자민당을 비롯한 보수정당과 헌법옹호, 안보반대를 내걸었던
사회당을 중심으로 하는 혁신정당이 대립했다. 그리고 정권은 늘 보
수세력의 결집으로 보수정당이 독점 유지를 했던 시기였다. 보수정
당이 독점을 하면서 일본의 정치지형은 겉으로는 큰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공명당이 약진할 수 있는 ‘틈새’가 존재했다.
보수정당은 전학공투회의(전공투) 사건 이후 많은 사회운동조직을
무너뜨렸다. 조직을 동원할 수 있는 조직이 사라지면서 창가학회라
는 종교조직을 모체로 한 공명당이 거의 유일하게 조직을 동원할
28) 자민당은 재계의 기부에 크게 의존하고, 재계의 자민당에 대한 정치자금 창구
인 국민정치협회로부터의 기부가 당 수입의 60%를 차지한다. 사회당도 정치자
금이 자민당의 20%에 달하는 적은 액수로 대부분이 당비에 의한 수입으로 총
평계노조원을 중심으로 부담해왔다(전황수, 2000:239).
종교정당에 관한 한․일 비교: 청우당과 공명당을 중심으로 239
수 있었다. 또한 보수와 혁신이 대립하는 가운데 환경, 평화를 내세
우는 정책도 공명당이 자리잡을 수 있는 또 하나의 틈새였다. 실제
로 69년 중의원 선거 때까지 공명당의 이미지는 “실행력”이었다.(무
라카미 시게요시(村上中良), 1970:116)29) 공명당이 제3당까지 성장한
데에는 이러한 실행력을 바탕으로 당시 일본 정치지형에 틈새를 파
고들었기 때문이다.
55년 체제가 무너진 1993년은 공명당이 연정에 참여하게 된 시기
와 일치한다. 55년 체제가 무너진 배경에는 국제질서의 변화가 있
다. 바로 냉전이 끝난 것이다. 냉전 종식은 보수당의 분열을 이끌
었다. 보수당의 다당화로 인해 1993년 비자민 연립정권으로 자민당
이 야당이 되었지만 이듬해 자민당은 사회당, 신당과 연정을 해서
정권을 되찾았다. 이후 여러 정당과 연정을 통해 정권을 연장해오다
가 2000년 들어 공명당과 꾸준한 연정을 지속해 오고 있다. 자민당
이 공명당을 연정 동반자로 선택한 데에는 공명당이 가지고 있는
창가학회의 강력한 조직력과 이에 따른 안정된 표 때문이다. 또 공
명당은 대중정당으로 정책과 선택을 바꾸면서 국민의 의사에 영합
했기 때문에 사회당, 공산당과 같은 이념정당보다는 유연성이 높았
기 때문이다.
처음 시작했을 때의 조직형태(종교정당)와 정책노선(중도주의)은
변했지만 공명당은 여전히 성공한 종교정당으로서 일본 정치판에서
활동하고 있다.
Ⅴ. 결론
이 논문의 목적은 한일 양 국의 종교정당이 이처럼 다른 모습을
29) 백승헌, 2002:127 재인용
240 사회사상과 문화
보이는 데에는 어떠한 요인들이 작용했는지를 밝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비교의 결과를 통해 한국 종교정당의 전망을 하는 것이
었다.
앞서 말했듯이 냉전의 영향으로 천도교청우당은 남과 북으로 갈
라졌다. 그리고 남과 북의 행보는 정반대였다. 이에 천도교청우당은
남한과 북한으로 나눠서 공명당과 함께 비교한 결과는 <표 3>과
같다.
남한천도교청우당
(실패)
북조선천도교청우당
(성공)
공명당
(성공)
교세 20만 180만 500만
교리 후천개벽 후천개벽 일련정법
정책 중도좌파 중도좌파 중도우파
활동 다른 세력과 연계 다른 세력과 연계 틈새 진출
종교지형 기독교>불교>천도교 천도교>기독교>불교
전통신토>불교>창가학

정치지형
우익에 유리한
좌우분열
좌익에 유리한
좌우분열
보수에 유리한
보혁대립
국제질서 냉전 시작 냉전시작 냉전 해체
<표 3> 천도교청우당과 공명당 비교
교세의 면에서 남한의 천도교는 20여만 명, 북한은 180여만 명,
창가학회는 500여만 명이다. 이들은 당시 종교지형에서 남한은 기독
교와 불교에 밀려 세 번째였고, 북한은 신도가 제일 많은 종교였다.
창가학회는 불교로 볼 경우 전통신토를 제외한 최대 종교의 일원이
고, 불교계 신종교로 봐도 기독교나 전통신토계 신종교보다 많은 교
세를 자랑하고 있다. 천도교와 창가학회 모두 교리에 사회참여와 정
치참여에 적극성이 있다. 이러한 교리 실천의 방법으로 종교정당을
만들어 현실정치에 참여한다. 천도교청우당의 정책은 “조선적 민주
종교정당에 관한 한․일 비교: 청우당과 공명당을 중심으로 241
주의”라는 중도좌파에 가까웠고, 창가학회의 정책은 중도주의를 표
방했으나 우파에 가까웠다. 이러한 정책으로 천도교청우당은 남과
북 모두 다른 세력과 연계를 통해 활동했다. 남쪽의 천도교청우당
경우, 신파는 중도좌파를 포함한 좌익계와 구파는 중도우파를 포함
한 우익계와 연계했다. 반면 공명당의 경우 보수당과 혁신당이 신경
쓰지 않는, 틈새를 파고들며 활동했다. 보수에 유리한 보혁대립이라
는 정치지형이 공명당의 “틈새전략”과 맞아떨어진 것이다. 공명당의
정계진출이 시작됐던 일본의 “55년 체제”는 냉전의 산물이었고, 공
명당이 연정의 동반자로 처음 여당이 된 시기는 냉전이 해체되던
시기였다. 남과 북에서 천도교청우당이 활동하던 정치지형은 남쪽은
우익에 유리한 좌우분열이었고, 북쪽은 좌익에 유리한 좌우분열이었
다. 이에 중도좌익 노선이었던 천도교청우당은 남쪽에서는 불리한
위치였고, 북쪽은 유리한 위치였다. 물론 이러한 정치지형은 냉전의
시작기였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봤을 때, 천도교청우당과 공명당은 국제질서로 인해 구
조화된 국내 정치지형에 맞는 종교정당의 정책에 따라 실패와 성공
으로 나아가게 됐다. 특히나 중도주의를 표방했던 공명당이 냉전해
체 이후 보수정당과 손을 잡으면서 우편향 됐다는 점을 보면 확실
히 알 수 있다. 종교정당은 결국 대중정당이기 때문이다. 해당 국가
내에 종교지형이나 교세, 종교정당의 활동과 같은 요소들은 종교정
당의 등장이나 종교정당이 정계에 진출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될 수
는 있겠지만 선거에서 당선될 수 있는, 즉 종교정당의 성공요소는
아니다.
한국에서 종교정당이 성공하지 못한 데에는 한국의 정치상황이
한 몫을 한다. 한국은 30여 년 동안 군사정권이 독재를 했다. 그 이
전에는 12년 동안 자유당이 독재를 했다. 자유당과 군부 독재 당시
에도 국회는 운영되었고, 야당을 비롯한 정당은 존재했지만 이는 형
식에 불과했다. 실제 정당정치의 시작은 불과 30년이 채 안 된다.
242 사회사상과 문화
30년이 채 되지 않는 정당정치 또한 정상은 아니다. 소위 민주당 계
열의 현재 여당과 민자당부터 시작한 자유한국당으로 이어지는 야
당의 정강이나 강령, 정책을 보면 큰 차이가 없다. 이 두 정당이 차
이를 보이는 것은 북한을 바라보는 관점뿐이다. 두 정당이 신경쓰지
않는 “틈새”를 담보로 한 정당이 등장한 것은 2000년 민주노동당이
었다. 민주노동당은 2004년 국회에 10명을 진출시키고, 지방선거에
서도 꾸준히 당선자를 배출하면서 성장할 수 있는 모습을 보였다.
2000년 들어 꾸준히 종교정당이 등장하고 있는 가운데 종교정당
이 과연 국회의원 당선이라는 성공을 거둘 수 있을까? 개신교와 불
교 계열 종교정당은 종교지형과 교세를 믿고 이미 등장했다. 그러나
이들 정당은 해당 종교를 대표하는 정당이 아니다. “창가학회=공명
당”, “천도교=청우당”과 같이 한 종교를 대표하는 한 정당이 아니기
때문에 정치지형에 맞는 정책 개발 또는 정당활동을 따지기에는 이
르다. 오히려 통일교가 만든 평화통일가정당이 정치지형에 맞는 정
책을 개발한다면 개신교 계열이나 불교 계열의 종교정당보다 성공
할 확률이 높을 것이다. 만약 개신교와 불교 안의 모든 종파가 하나
의 개신교 정당, 하나의 불교 정당을 지지한다면 통일교의 종교정당
보다는 더 빨리 국회에 진입할 수도 있다. 이들은 이미 한국 정치지
형에 맞는 정책을 개발할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신교와
불교가 천주교나 창가학회, 천도교와 같이 중앙집권형 조직이 아닌
현실에서는 불가능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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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준은 고려대학교에서 사회학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
덕성여자대학교 지식문화연구소에서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천도교를
비롯한 민족종교와 종교, 역사, 조직사회학에 관심을 갖고 있다.
E-mail: estran@hanmail.net
(2018.02.23.접수; 2018.03.17.수정; 2018.03.19.채택)
DOI: http://dx.doi.org/10.17207/jstc.2018.3.21.1.217
종교정당에 관한 한․일 비교: 청우당과 공명당을 중심으로 245
The Comparative Study of Religious Political Parties
in South Korea and Japan: Focusing on Cheondoist
Chungwoo Party and Komeito
Park, SeiJoon, Duksung Women's University
Key Words: religious political party, Cheondoist Chungwoo Party,
Komeito, Cheondogyo, Soka Gakkai International, Komeito
[Abstract]
Constitutions of South Korea and Japan do not forbid religious political
parties to be active. In South Korea, no political party with religious
affiliation have entered the National Assembly. In Japan, on the other
hand, Komeito as a religious political party entered the parliament
successfully and now forms a coalition government with the Liberal
Democratic Party, the ruling party. This research aims to identify the
factors responsible for religious political parties in South Korea and Japan
to take such different paths. The focus is on the inner and outer
environments surrounding religious political parties. Inner environment refers
to the congregation, religious doctrine of specific religions, and policies and
actions of religious political parties. Outer environment includes political
landscapes, religious terrains in a nation, and international order. Variations
on seven factors, four inner environmental and three outer environmental,
are utilized in making comparison between religious political parties in
South Korea and Japan. Cheondoist Chungwoo Party and Komeito are
analyzed.
When it comes to the congregation, Choendogyo has 200,000 in South
246 사회사상과 문화
Korea and 1,800,000 in North Korea. Soka Gakkai International has
5,000,000. In terms of religious terrains, Cheondogyo was the third largest
congregation in South Korea next to Christianity and Buddhism while the
largest in North Korea. Soka Gakkai International, though categorized as a
new religion out of Buddhism, was and still has more followers than
Christianity in Japan. Both Cheondogyo and Soka Gakkai International
stress the importance of social and political participation in their doctrines.
Religious political parties were organized and participated in politics as way
of practicing what is preached. The policies by Cheondoist Chungwoo Party
were close to that of center-left, “Chosun Democracy”. Soka Gakkai
International’s policies, though claimed to be centrist, were of rightest
orientation. Cheondoist Chungwoo Party, both in South and North Korea,
acted in accordance with other groups. on the other hand, Komeito acted
alone in the beginning. Komeito first entered politics in Japanese 1955
System born out of the Cold War. Around the time when the Cold War
ended, Komeito became one of the ruling parties. Political landscapes
around the time Cheondoist Chungwoo Party was active favored the right
in South Korea and the left in North Korea. Such political landscape is
the outcome of the Cold War at the time.
Different paths of Cheondoist Chungwoo Party and Komeito can be
explained by the policies of religious political parties implemented in
response to the national political landscapes structurated by international
order. The fact that Komeito turned to the right upon connecting to
conservative party after the Cold War makes the point clearer. Religious
terrains, congregation and specific actions can serve as a foundation for
religious political parties to enter the realm of politics. However, they do
not contribute to the success of religious political parties in joining the
Parlia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