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칠라찹 탈출(3) - 마지막 탈출
탈출을 위하여 칠라찹에 집결한 네덜란드해군병력은 수송선에 올랐는데 장교는 타야할 수송선이 할당되었지만 병사들은 대충 눈앞에 보이는 배에 올라탔다. 탈출하려는 숫자 에 비하여 수송선이 모자라서 수천명의 병력이 탈출하지 못하고 포로가 되었다.
7,089톤짜리 네덜란드 상선 치사로아는 네덜란드 해군장교 45명과 병사 500 - 700명을 태우고 3월 2일 저녁에 칠라찹을 출항했다. 치사로아는 3월 4일 오후 2시 50분에 자 바 남쪽 320km 해상에서 일본구축함 아라시에게 나포되어 8일에 마카사르에 도착했다. 탑승자는 모두 포로가 되었다.
1,030톤 짜리 네덜란드 상선 뒤마 반 트위스트는 네덜란드 해군장교 10명과 병사 300명을 태우고 3월 2일 오후 6시에 칠라찹을 출항했다. 뒤마 반 트위스트는 3월 4일 오후 7시 15분에 자바 남쪽 320km 해상에서 일본순양함에게 나포되어 8일에 마카사르에 도착했다. 탑승자는 모두 포로가 되었다.
정부선단 소속으로 해군에 징발되었던 얀선은 네덜란드 해군을 포함한 약 750명의 피난민을 태우고 3월 2일 오후 6시에 칠라찹을 떠났다. 원래 정부선단에서 징발된 초계정 발크와 동행하기로 했으나 발크의 현지인 승조원이 모두 달아나는 바람에 발크는 출항할 수 없었다. 얀선은 처음에는 일본기의 눈을 피해 자바 남해안을 따라 항해했다. 3월 4 일 오전 11시 45분에 얀선은 자바 남해안에서 16km 떨어진 연안에서 제로기 2대의 기총소사를 받았다. 비무장 선박인 줄 알고 초저공으로 내려와 기총소사를 가하던 제로기는 얀선이 기관총으로 반격하자 놀라 사라져 버렸다. 선체의 피해는 미미했으나 탑승자 중에서 사상자가 나왔다. 그러자 승선한 네덜란드해군 중 최고 계급인 대령이 배를 해안에 대라고 명령했다. 배를 육지에 대는 순간 얀선의 현지인 선원이 모두 도망칠 것을 알고 있던 선장은 거부했다. 그러자 대령은 상륙할 수 있도록 구명정을 내줄 것을 요구했 다. 결국 약 250명이 구명정을 타고 배를 떠났는데 얀선의 현지인 선원도 모두 배를 떠났다. 얀선에 남은 네덜란드인 선원은 소수였으나 다행히 모두 경험이 풍부했으므로 이 들의 지휘 아래 남은 승객 중 자원자들이 떠나버린 현지인 선원의 빈자리를 메웠다. 얀선은 4일 오후 6시에 항해를 재개하여 다행히 일본군을 만나지 않고 3월 14일에 프리맨 틀에 도착했다. 정부선단 58척 중 탈출에 성공한 것은 주더크루이스와 얀선, 2척 뿐이다.
7,214톤짜리 네덜란드 상선 코타바루는 네덜란드 해군장교 30명과 병사 650명을 태우고 3월 2일 오후 해가 진 후에 칠라찹을 출항했다. 14노트로 상선치고는 빠른 코타바 루는 일본군의 눈을 피하여 3월 12일에 콜롬보에 도착했다.
네덜란드 상선 슬로터딕. http://www.arendnet.com/hal48.htm
9,230톤짜리 네덜란드 상선 슬로터딕은 네덜란드 공군이 구매한 버팔로 전투기와 팔콘 연습기를 싣고 칠라찹에 입항했다. 화물을 하역한 슬로터딕은 윗더위드의 승조원 50 명, 방커트의 승조원 50명, 그리고 수라바야 해군사관학교 생도를 포함한 350명의 해군병력과 장교의 가족 일부를 태우고 3월 2일 저녁에 출항했다. 현지인 선원이 모두 도망 쳐 버려 승객으로 탑승한 해군 승조원들이 빈자리를 메웠다. 최고 속력이 15노트로 빠른 편인 슬로터딕은 도중에 적을 만난 상선의 구조 요청을 들을 때마다 빠른 속력을 이용 하여 우회함으로써 일본군을 만나지 않고 3월 8일에 호주의 프리맨틀에 도착했다.
네덜란드 상선 타왈리. https://consumer.fairfaxsyndication.com/archiv e/Telegraphic-ship-S.S.-Tawali-tied-up-at-wharf--New-South-Wales--22-August-1930-[picture].-[nla.-2ITHRGQGZHJY.html
8,300톤짜리 네덜란드 상선 타왈리는 2월 27일에 출항했으나 돌아가서 피난민을 실으라는 헬프리히 제독의 명령을 받고 칠라찹으로 회항하여 3월 3일 오전 9시에 계류했다. 회항 도중 타왈리는 일본군에게 격침된 엥가노의 승조원 65명 전원과 토라자의 생존자 30명을 구했다. 칠라찹에 도착한 후 이들 조난자들은 상륙했으나 엥가노의 선장은 타왈 리에 머물렀으며 엥가노와 토라자의 네덜란드 및 중국인 선원들도 상륙했는지 불명확하다. 정황상 이들도 부두에 계류하자마자 달아난 타왈리 현지인 선원의 빈자리를 메우면 서 머물렀을 가능성이 크다.
칠라찹에서 타왈리가 받아들인 피난민은 대부분 민간인으로 수라바야 군항 근무자 359명, 수라바야 건선거 회사 근로자 49명, 로테르담 로이드사와 자바-중국-일본해운사 직 원 20명, 여자 5명, 어린이 5명 등이었으며 영국군 및 호주군 85명도 있었다. 타왈리는 3월 3일 오후 9시에 출항했는데 칠라찹에서 마지막으로 탈출한 선박이었다. 남하하던 타왈리는 5일 아침에 안킹의 생존자 57명을 구조했다. 타왈리의 행선지는 호 주였으나 3월 5일에 헬프리히 제독이 콜롬보로 오라고 명령헀다. 서쪽으로 변침한 타왈리는 3월 14일에 콜롬보에 도착했다.
네덜란드 해군병력과 함께 약 1,500명에 달하는 영국군 병력이 비슷한 숫자의 호주군 및 영연방 민간인과 함께 탈출을 위하여 칠라찹으로 모여들었다. 영국은 이들의 탈출을 위하여 네덜란드 상선(코타 게데,제너럴 버스픽, 콘 호아, 잔담)을 임대했다.칠라찹을 통하여 탈출한 영국군과 호주군은 주로 공군이었다. 자바에 있던 영국 및 호주육군은 네 덜란드육군과 함께 마지막까지 싸울 것이었다.
코타 게데는 2월 27일에 출항하여 3월 6일에 콜롬보에 도착했다. 제너럴 버스픽은 3월 2일 10시 45분에 매리보로와 함께 출항하여 3월 10일에 프리맨틀에 도착했다. 1,258 톤짜리 네덜란드 상선 콘 호아는 영국해군 88명을 포함한 영국 및 호주군 152명을 싣고 3월 2일 저녁에 출항하여 3월 9일에 프리맨틀에 도착했다.
네덜란드 상선 잔담. https://uboat.net/allies/merchants/2357.html
10,909톤짜리 네덜란드 상선 잔담은 2월 27일에 칠라찹을 출항했으나 영국 영사의 임대 요청을 받아들인 네덜란드 당국의 명령을 받고 회항하여 3월 1일 오전 10시에 부두 에 계류했다. 잔담은 영국군, 호주군과 함께 네덜란드 조종사 몇명 및 그들의 가족, 그리고 여러 국적의 민간인들을 실었다. 미국총영사 월터 푸트, 영사 클레이슨 알드리지, 부 영사 폴 패독도 기자 3명 및 민간인 3명과 함께 승선했다. 시티오브맨체스터의 생존자 156명과 뇌격을 받아 침몰한 네덜란드 상선 보로의 선장도 탔다. 1일 오후 8시에 잔담 은 892명의 피난민을 싣고 스트롱홀드와 함께 출항했다. 칠라찹을 탈출한 상선 중 가장 빠른 잔담은 17노트를 낼 수 있었는데 반해 스트롱홀드는 연료가 모자라서 12노트 이 상은 낼 수 없었다. 따라서 그날밤 잔담은 스트롱홀드와 헤어져 호주로 향했다. 2일 아침에 잔담은 중경의 미해군 무관을 포함한 토모혼의 생존자 28명을 구했다. 이후 잔담은 전속력으로 달려 3월 5일에 호주의 프리맨틀에 도착했다.
연합군이 두려워하던 일본군의 칠라찹 공습은 3월 4일에 시작되었다. 오전 10시에 가오슝 항공대 소속 1식 육상공격기 18대가 제로기 10대의 호위를 받으면서 칠라찹을 폭 격했다. 이 폭격으로 화물선 키돌(775톤)과 마니피(536톤), 그리고 숙영선 티드먼이 침몰하고 몇척이 피해를 입었는데 일본군은 나중에 마니피는 건져내어 사용했다. 또한 창 고가 불타고 통신시설도 부서져서 쇼킹 중령은 콜롬보에 있는 헬프리히 제독에게 공습 사실을 보고하기 위하여 북쪽으로 30km 나 떨어진 마오스까지 가야 했다. 사망자는 약 60명이었는데 주로 창고를 약탈하려던 현지인이었다.
5일에는 제1기동부대가 훨씬 대규모의 공습을 가했다. 5일 아침에 항공모함 4척(아카기, 카가, 소류, 히류)으로부터 149대의 함재기가 날아 올랐다. 97식 함상공격기 80대는 800kg, 99식 함상폭격기 33대는 250kg짜리 폭탄을 장착하고 제로기 36대의 호위를 받았다. 가오슝 항공대도 전날에 이어 1식 육상공격기 27대와 제로기 20대를 보내어 가세했다. 폭격은 오전 10시 30분에 시작되어 30분간 지속되었다. 연합군 전투기는 없었으며 3.7인치 대공포를 장비한 영국제77중대공포연대와 40mm 보포스 대공포를 장 비한 영국제21경대공포연대만이 유일하게 저항했다. 영국대공포부대는 9명의 전사자와 28명의 부상자를 내면서 분전했으나 일본기를 격추하지 못했다.
폭격은 오전 11시에 끝났다. 피해는 상당했다. 기름탱크와 탄약창을 비롯한 창고가 폭탄을 맞아 어마어마한 유폭과 함께 화재가 일어났고 빈민가에도 폭탄이 떨어져 많은 희생 자가 났다. 파괴되거나 전소된 건물이 200동에 달했고 사망자는 350명이 넘었으며 수많은 부상자가 생겼다. 재공습과 침공을 두려워한 공무원들이 도시에서 도망치면서 기차 는 운행을 멈추었고 전날 파괴되었다가 겨우 복구한 통신도 다시 끊어졌다. 칠라찹을 방어하던 육군부대는 공습으로 모든 것이 파괴되어 추가적인 파괴활동이 필요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칠라찹에 남아있던 선박 중 495톤짜리 소형유조선 아체, 4,819톤짜리 수리선 바렌츠, 563톤짜리 화물선 로칸, 982톤짜리 화물선 토히티, 훕딘스펙터 지만, 그리고 8,000톤 짜리 부유선거가 침몰했다. 일본군은 나중에 로칸과 토히티를 건져내어 사용했다.
3월 6일에 쇼킹 중령은 남아있는 선박을 모두 처분하라고 명령했다. 처분은 오후 8시에 끝났다. 일본군의 공습과 뒤이은 처분으로 칠라찹에서 침몰한 선박은 28척, 21,639톤 에 달한다. 일본군은 이들 중 15척을 온전하게 손에 넣거나 인양하여 사용했는데 모두 소형선박이라 톤수로는 5,562톤에 불과했다.
3월 6일 아침에 칠라찹 앞바다에 상선 1척이 나타나더니 닻을 내렸다. 자바-중국-일본해운사의 5,628톤짜리 화물선 치마녹이었다. 콜롬보에서 시멘트를 싣고 온 치마녹은 놀 랍게도 칠라찹의 상황에 대해 경고를 받지 못한 상태였다. 마지막 배를 놓치고 칠라찹에 남은 수천명의 피난민에게 치마녹은 마지막 희망이었다. 쇼킹 중령은 도선사와 함께 남 아있던 공무원 중 최고위 관리를 초계정에 태워 치마녹으로 보냈다. 일단 도선사와 관리가 승선하면 초계정의 지원을 받아 강제로라도 치마녹을 항구로 끌고 들어올 것이었다. 불행하게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치마녹은 초계정이 도착하기 전에 닻을 올리고 떠났다. 호주로 향하던 치마녹은 7일 오후에 MMS 51의 생존자 14명을 구조했으며 무사히 프리맨틀에 도착했다.
3월 8일에 일본군이 칠라찹을 점령했다. 네덜란드해군병력 1,000명, 영국 및 호주공군 병력 1,300명, 그리고 미해군병력 160명이 탈출하지 못하고 포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