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탄종프리옥 소개(2) - 처분 및 파괴
1942년 3월 1일 오후에 탄종프리옥의 동쪽 입구는 싱가포르에서 온 상선 2척을 처분하여 막았다. 북쪽 입구는 6,200톤짜리 화물선 탄족을 침몰시켜 막았는데 처분 과정에서의 실수로 배가 삐딱하게 가라앉는 바람에 완전하게 막히지 않았다. 결국 1,378톤짜리 기뢰부설함 리겔과 작은 배 3척을 더 가라앉혀 폐쇄했다. 나중에 일본군은 탄족과 리겔을 건져 사용했다. 탄종 프리옥 주변의 기뢰원 사이에 나있는 통로에는 2,770톤짜리 유조선 파울라를 침몰시켜 막았는데 나중에 일본군이 건져내어 사용했다.
탄종프리옥에 대한 파괴는 3월 1일 저녁부터 시작되었다. 기중기, 창고, 석탄저장고와 기름탱크, 송유관, 부유선거 등이 파괴되었다. 수상기 기지를 담당한 파괴반은 기지 입구에 배를 가라앉혀 폐쇄하고 격납고에 불을 질렀다. 파괴반은 1일 오후 9시에 린트 중령에게 파괴를 마쳤다고 보고한 후 반둥으로 떠 났다. 그러나 린트 중령이 점검해 본 결과 파괴가 불완전했다. 결국 세관에서 파견한 50명이 추가로 파괴한 후 반둥으로 철수했다.
탄종프리옥 건선거 회사가 건조하던 310톤짜리 B급 초계정은 모두 파괴했다. 같은 회사가 건조하던 170톤짜리 보조소해정 팍팍, 플로레스, 그로잇, 그리시도 모두 파괴했으 나 나중에 일본군이 건져내어 사용했다. 정부선단 소속의 초계정이었다가 보조소해정으로 개조중이던 60톤짜리 체리마이도 파괴했다. 역시 정부선단 소속의 초계정이었다가 프라우윈비어 조선소에서 보조소해정으로 개조 중이던 60톤짜리 메라피와 슬라맛도 파괴했다.
오비, 이포, 킨타, 드 클레르크, 반 모론동, 반 베르빅, 그리고 소형 범선 몇척은 3월 2일에서 4일 사이에 항구 내에 처분했다.
탄종프리옥 항.The Allied Defense of the Malay Barrier, 1941-1942. P.284
제1계류장(1st BASIN)에는 상선 1척을 침몰시켰다. 제2계류장 입구에는 부유식 석탄저장고인 잔 반 니즘을 침몰시켰다. 선박 처분은 3월 6일 오전 6시까지 계속되었다. 합계 20,000톤이 넘는 12척 이상의 상선이 처분되었는데 일본군은 나중에 15,547톤에 달하는 9척을 건져 사용했다. 세관은 3월 1일에 기능을 멈추었으며 직원들은 마지막 조사선을 처분한 후 반둥으로 철수했다.
모먼 중령은 반둥에서의 지시에 따라 3월 1일 오후 1시에 회의를 가진 후 탄종프리옥의 모든 해군함정에게 오후 5시까지 출항하라고 명령했다. 당시 해군함정 중 전술적 가치 가 있는 것은 정부선단에서 해군에 징발된 6척(아렌트, 벨라트릭스, 파잔트, 메렐, 리겔, 풀스터)과 제3소해분대(아로에, 알로르, 보고, 반탐, 세람, 체리본), 그리고 제5소해분 대(젬버, 좀방, 잠페아, 엥가노, 엔데)정도였다.
이들 중 정부선단에서 징발된 6척은 승조원이 대부분 현지인이었기 때문에 탈출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러자 벨라트릭스, 메렐, 그리고 리겔의 함장이 모먼 중령을 찾아왔다. 그들은 화가 나서 씩씩거리면서 자신들도 탈출하여 일본에 대한 싸움을 이어나가고 싶으니 탈출을 허용해 달라고 요구했다. 모먼 중령은 원한다면 탈출하라고 허용했으나 탈 출은 불가능했다.
반 스테베린 소장의 명령에 따라 모먼 중령은 정부선단 소속이었다가 해군에 징발된 배의 선원들에 대한 소집을 해제하여 민간인으로 되돌려야 했으나 소집해제 사실이 알려 지면 원래 해군 소속의 현지인 승조원들도 덩달아 탈영해버릴 가능성이 컸다. 따라서 모먼 중령은 소집해제령을 해군함정들의 탈출 시한으로 정한 1일 오후 5시에 발표할 계획 이었다. 그러나 1일 아침부터 소집 해제에 대한 소문이 돌면서 정부선단, 해군 할 것 없이 현지인 승조원이 대거 탈영했다. 실제로 모먼 중령으로부터 탈출 허락을 받은 리겔의 함장이 자신의 배로 돌아가자 67명의 승조원 중 통신사를 포함한 3명만이 남아 있었고 심지어 정장 혼자 남고 승조원이 모두 사라져 버린 배도 있었다. 따라서 탈출은 무산되 었다. 돌이켜보면 그때 출항해서는 살아남을 가능성이 희박했으므로 차라리 의미없는 희생을 줄였다고 볼 수도 있다. 이때 탈영한 현지인 승조원들은 소집해제에 따라 민간인 신분이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나중에 일본군이 처분된 배를 인양하여 재사용하면서 기존 선박의 승조원들은 다시 불려와서 일본인의 지휘 아래 일해야 했다.
제3 및 제5소해분대의 함정으로부터 승조원이 도망쳐버려 출항이 불가능하다는 보고가 계속 올라오자 모먼 중령은 할 수 없이 1일 오후 4시 30분에 함정의 처분을 명했다. 131톤짜리인 제3소해분대의 보조소해정 6척은 3월 2일에 처분했는데 반탐과 보고는 나중에 일본군이 건져내어 사용했다. 170톤짜리인 제5소해분대의 보조소해정 5척 중 젬버, 좀방, 잠페아는 3월 1일 오후에 처분했는데 나중에 일본군이 모두 건져 사용했다. 엔가노와 엔데는 탄족과 반 모론동의 처분에 동원되었으며 엔가노는 2일에 처분했는데 역시 일본군이 건져 사용했다. 정부선단에서 징발된 선박도 처분했다. 2월 27일에 일본군의 공습으로 피해를 입은 748톤짜리 초계정 아렌트는 3월 1일에 처분했는데 나중에 일본군이 건져 사용했다. 773 톤짜리 초계정 벨라트릭스는 제1계류장에 처분되었는데 나중에 일본군이 건져 사용했다.
624톤짜리 초계정 파잔트도 처분했으며 592톤짜리 초계정 메렐은 제2 및 제3계류 장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처분했다. 수상기모함 역할을 하던 1,565톤짜리 풀스터는 1일 밤에 제1계류장에 처분했다. 기뢰부설함 리겔은 2일에 북쪽 입구에 가라앉혔는데 나중 에 일본군이 건져 사용했다. 네덜란드 해군이 징발한 정부선단의 선박은 총 58척으로 이중 56척을 상실했다.
네덜란드해군의 로벤호르스트 소령은 제5소해분대의 170톤짜리 보조소해정 엔데를 타고 탈출하기로 결심하고 자원자를 끌어모았다. 팔렘방 항구 사령관이었던 비크 엔 동크 중령을 포함하여 24명이 모이자 엔데는 1일 오후 5시에 출항했다. 동크 중령이 선임이었으므로 형식상 함장을 맡았으나 실제로는 로벤호르스트 소령이 지휘했다. 순다해협이 봉쇄되었으므로 로벤호르스트 소령은 일단 벨리퉁섬을 향하여 북상하기로 했다. 거기서 위장을 한 다음 보르네오 남해안으로 간 후 남하하여 소순다열도를 통하여 인도양으로 탈출할 생각이었다.
2일 오전 4시 30분에 엔데는 경함공모함 류조를 호위하던 구축함 마츠카제 및 시오카제와 맞닥뜨렸다. 일본구축함들이 4,500m 거리에서 사격을 시작했고 첫번째 일제사격 이 엔데의 기관실에 명중했다. 7명이 사망하면서 동력이 끊어지고 치명적인 화재가 발생했다. 로벤호르스트 소령은 퇴함명령을 내렸고 엔데는 벨리퉁섬 남쪽 해상에 침몰했다. 일본함정들은 조난자를 무시하고 사라졌다.
부상자 7명을 포함한 생존자 17명은 구명정을 타고 남하하다가 3월 7일에 스리부 제도의 북쪽 끄트머리에 도착했다. 이후 스리부 제도를 남하하던 생존자들은 13일에 현지인 어부를 만났다. 동크 중령을 포함한 장교 4명이 쌀, 물고기, 그리고 작은 돛단배를 사려고 어부를 따라 현지인 마을로 갔다가 마을 사람들의 습격을 받아 죽었다. 적대적으로 돌 변한 현지인의 태도에 놀란 로벤호르스트 소령은 생존자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도망쳤다. 부상자 7명을 포함한 13명의 생존자는 구명정을 타고 스리부 제도의 섬을 따라 힘겹 게 남하했다. 이들은 3월 22일 밤에 탄종프리옥에서 불과 8km 떨어진 자바 북해안에 상륙했으며 이틀 후인 24일에 모두 포로가 되었다.
영국해군의 보조소해정 라만 및 신 아익 리와 함꼐 1일 오후에 출항했다가 일본구축함에 쫓겨 달아났던 영국해군의 47톤짜리 항만초계정 ML1063은 2일 아침에 탄종 프리옥 으로 돌아왔다. 정장인 뉴질랜드 해군의 이너스 대위는 린트 중령에게 라만 및 신 아익 리가 격침되었다고 보고한 후 승조원과 함께 반둥으로 철수했다. 린트 중령은 ML1063 에 네덜란드 승조원을 배치한 후 47mm 포를 사용하여 다른 선박의 처분에 사용했다. 이틀 후인 3월 4일에 ML1063은 이미 처분한 메렐의 잔해 위를 전속력으로 달리다가 좌 초되었는데 ML1063을 끌어낼만한 다른 선박은 이미 모두 처분한 후였다. 할 수 없이 승조원들은 ML1063을 포기했는데 나중에 일본군이 끌어내어 사용했다.
가장 마지막에 처분된 것은 30톤짜리 P37급 초계정 4척(P-37, P-38, P-39, P-40)이었다. 승조원들은 항만파괴반에 소속되었다가 반둥으로 철수했다.
3월 5일 아침 6시에 바타비아 석유회사의 정유소 폭파를 마지막으로 탄종프리옥의 파괴가 끝났다. 제1보병사단장 위브란더스 실링 소장이 오전 8시에 87명의 항만파괴반에 게 철수명령을 내리자 그들은 즉시 반둥으로 떠났다.
탄종프리옥을 방어하던 제1보병사단은 전날인 4일 오후 4시에 이미 철수한 후였다. 린트 중령은 파괴반과 함께 군인들 중 마지막으로 탄종프리옥을 떠났다. 바타비아와 탄종프리옥을 탈출한 해군 병력과 승조원들은 일단 동인도제도의 임시 수도인 반둥에 집결헀다. 육군은 반둥에서 최후까지 싸울 생각이었으나 해군 병력은 대부 분 호주나 실론으로 철수하기 위하여 칠라찹으로 갔다. 일부 해군장교들은 개별적으로 작은 배를 사서 자바 남해안에서 탈출하려고 했으나 대부분 실패했다. 네덜란드의 통치 가 끝나가는 것을 알아차린 현지인들이 식량과 보급품을 제공하기를 거부하는 일이 잦아졌다. 현지인들은 혼자 또는 소수로 움직이는 네덜란드 군인이나 관리를 습격하기도 했다.
자바 중부 북해안의 도시 스마랑에서는 3월 1일에 군대와 경찰 및 자경단이 철수하자 현지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남겨진 네덜란드 민간인을 공격했다. 그러자 다음날 경찰과 자 경단이 돌아와 무자비하게 진압했으나 폭도의 숫자가 압도적이라 도시 전체를 진압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폭도들 또한 총을 가진 자는 소수였고 대부분 칼로 무장했 기 때문에 화력에서 밀렸다. 결국 스마랑에서는 3월 2일에서 7일까지 경찰 및 자경단과 폭도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 기간 동안 양측의 사망자는 800명이 넘었는 데 희생자는 대부분 무장이 빈약한 현지인 폭도였다.
미국은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에 2개의 영사관을 두고 있었다. 수마트라의 메단에 있던 영사관은 2월 16일에 폐쇄했으나 바타비아 영사관은 2월 말까지 유지했다. 태평양전 쟁 개전 이래 영사관의 주요 임무는 동인도제도에 있는 미국민간인의 안전한 귀국이었다. 미국무부는 태평양 전쟁 발발 이전부터 꼭 필요한 경우 이외에는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에 대한 자국민의 여행을 금지했기 때문에 1941년 12월 초에 동인도 제도에 있던 미국민간인은 여자 및 어린이 150명을 포함하여 500명 정도였다. 이들은 주로 네덜란 드 콜로니얼 석유회사, 네덜란드 태평양 석유회사, 그리고 제너럴 모터스, 제너럴 일렉트릭 및 굿이어 타이어 회사의 자바 공장에서 일하는 관리자 및 기술자와 그 가족이었다.
바타비아 총영사 월터 푸트는 이들을 안전하게 귀국시키기 위하여 안간힘을 썼으나 쉽지 않았다. 태평양 전쟁 개전 이후 자바에 기항하는 미국선박은 거의 없었다. 영국은 자국 과 영연방의 선박으로 자국민을 수송하기에도 바빴다. 게다가 영국은 푸트가 미처 생각해내기 전에 네덜란드 선박을 임대하여 자국민을 수송했다. 다행히 푸트는 네덜란드 당국의 적극적인 협조 덕분에 2월 17일에서 20일 사이에 수라바야, 탄종프리옥 , 그리고 칠라찹에서 네덜란드 상선에 대부분의 미국민간인을 실어 보낼 수 있었다.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에서 탈출에 실패하여 포로가 된 미국민간인은 20명 정도이다.
바타비아의 미국 영사관은 2월 28일 정오에 폐쇄되었다. 푸트 총영사는 메단 영사 클레이슨 알드리지, 부영사 폴 패독, 그리고 기자 3명을 포함한 민간인 6명과 함께 칠라찹으 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