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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자바해 해전(40)-탄종프리옥 소개(1)/http://blog.naver.com/imkcs0425/221358732478


40. 탄종프리옥 소개(1) - 해상학살 및 인원소개

헬프리히 제독이 반둥으로 옮겨가면서 1942년 2월 19일자로 바타비아 및 탄종프리옥의 해군시설에 대한 지휘권은 무어맨 중령에게 넘어왔는데 그의 권한은 제한적이었다. 우선 탄종프리옥의 모든 함정 및 선박에 대한 지휘권을 가진 반 드 린트 중령이 무어맨 중령보다 선임이었다. 실제로 린트 중령은 무어맨 중령에게 제3 및 제5소해분대 소속 1 1척의 소해정에 보급할 연료와 식량을 확보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무어맨 중령은 이 명령을 따르기 위하여 2월 28일에 탄종프리옥에 입항한 휴스턴과 퍼스에 대한 연료보급을 거부했다가 큰 갈등을 빚었다. 다행히 무어맨 중령은 린트 중령 및 서부타격부대사령관인 영국해군의 존 콜린스 준장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으므로 이들의 지원을 받아 자신 의 임무를 그럭저럭 수행할 수 있었다. 당시 이 방면의 지휘구조는 복잡하고 모순적이었다. 가령 린트 중령의 임무 중에는 탄종프리옥의 파괴가 있었는데 막상 파괴를 실시하려 면 바타비아 및 탄종프리옥의 방어를 맡고 있던 제1보병사단장 위브란더스 실링 육군소장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탄종프리옥은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의 수도이자 최대 도시인 바타비아의 외항이었기 때문에 항상 혼잡했다. 1942년 2월 15일 현재 탄종프리옥에는 여러 국적의 상선 146 척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무어맨 중령은 이들에게 출항을 종용했으나 20일에도 120척 가까운 상선이 남아 있었다. 다급해진 무어맨 중령은 콜린스 준장의 지원을 받아 상선들 을 반강제로 출항시켰고 그 결과 27일까지 100척 이상이 떠났다. 그래도 3월 1일이 되었을 때 탄종프리옥에는 10척이 넘는 상선이 남아 있었다.


늦게 출항한 선박 일부는 댓가를 치렀다. 네덜란드동인도제도유조선회사 소속의 3,110톤짜리 유조선 아우구스티나는 27일에 탄종프리옥을 출항했다. 모먼 선장은 순다해협 은 위험하다고 보고 북동쪽으로 항해하여 보르네오 남쪽까지 북상한 다음 남하하여 롬복해협을 거쳐 탈출할 계획을 세웠다. 당시 그는 적에게 나포당하게 되면 선박을 자침시 키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무사히 보르네오 근해까지 북상한 후 남하하던 아우구스티나는 3월 1일 오후 1시에 보르네오 남쪽 50km 해상에서 일본구축함 1척을 만났다. 일본구축함이 선수를 가로질러 포탄 1발을 쏘아 정선시키자 모먼 선장은 자침 명령을 내렸다. 모먼 선장을 포함하여 42명의 선원들은 선창, 보일러실 및 기관실의 침수밸브를 연 다음 구명정 2척을 타고 배를 떠났다. 그 직후 모먼 선장은 일본군의 호출을 받고 1등 기관사와 함께 일본구축함에 올라 함장을 만났다. 일본군 함장은 아우구스티나로 돌아가서 침수밸브를 닫고 선박을 구하라고 명령했다. 아우구스티나로 돌아간 승조원들은 선창과 보일러실의 밸브는 닫을 수 있었으나 기관실은 이미 침수되어 밸브를 닫을 수 없었으며 따라서 침몰도 막을 수 없었다. 이 소식을 듣고 화가 치민 일본군은 구명정에 기관총 사격을 가했다. 많은 승조원들이 총알을 피해 바다로 뛰어들었으나 일본군은 샅샅이 수색하면서 사살한 후 구명정 을 불태우고 사라졌다.


이 학살로 42명의 승조원 중 모먼 선장을 포함한 39명이 목숨을 잃었으나 3등 기관사 메이어와 중국인 갑판원 2명은 죽은척 하고 해상에 떠 있음으로서 일본군의 눈을 속이고 살아남았다. 일본구축함이 사라지자 3명은 아직 가라앉는 중이던 아우구스티나에 올라 새 구명정을 띄웠다. 3월 3일 저녁에 3명은 다른 일본구축함에게 구조되어 마카사르에 상륙했다. 해상에서의 학살에서 살아남았다고 사실대로 말하면 그들 역시 살해될 가능성이 컸으므로 3명은 미리 입을 맞춘대로 아우구스티나가 침몰할 당시 선실에서 자고 있 다가 늦게 탈출하여 다른 선원들의 소식은 모른다고 둘러대었다. 이들 3명은 모두 포로생활을 견디고 종전까지 살아남았다.


A급 네덜란드 유조선 아우구스티나. https://www.helderline.com/tanker/augustina

아우구스티나의 승조원을 학살한 일본구축함이 무엇인지는 불확실하다. 역사학자들은 하루카제를 가장 유력하게 보며 하타카제일 가능성도 있다고 보지만 이들의 항해일지를 그대로 믿는다면 2척 다 학살을 저지르기는 불가능하다. 사실 일지를 믿는다면 당시 일본구축함 중 아우구스티나의 승조원을 학살할 수 있는 배는 없다. 따라서 학살을 저지른 구축함은 일지를 누락하거나 조작했을 가능성이 큰데 조작가능성을 믿는다면 하루카제나 하타카제뿐 아니라 이카즈치를 비롯한 다른 구축함 몇척도 의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2월 27일 밤에는 영국배로 이루어진 야라 선단이 칠라찹을 향하여 떠났다. 선단은 수송함 안킹(3,472톤), 유조선 브리티시 저지, 프라콜(2,000톤) 및 워 서더(5,542톤)로 이 루어져 있었고, 호위함정은 호주해군 슬루프함 야라(1,060톤), 인도해군 슬루프함 줌나(1,250톤), 포경선을 개조한 보조소해정 게마스(207톤), 소해정 MMS 51(229톤) 이 었다. 안킹은 동인도제도 전투 기간에 탄종 프리옥에 정박한 상태로 지상의 영국해군사령부와 해상의 영국함정을 이어주는 통신센터 역할을 했으며 이때는 탈출하는 영국 및 호주인 수백명을 싣고 있었다. 야라 선단은 출항 직후 호주해군제21소해분대(발라랏, 골번, 메리보로, 툼바, 울롱공)와 합류했다.


2월 28일 오전 4시 30분에 워 서더가 탄종 프리옥 북서쪽에 있는 스리부 제도의 작은 섬에 좌초했다. 울롱공이 남아서 견인하려 했으나 650톤짜리 소해정으로서는 역부족이 었다. 결국 워 서더의 승조원들은 배에 불을 지르고 상륙했으며 울롱공은 야라 선단과 합류하기 위하여 떠났다.


야라 선단은 28일 하루동안 공습에 시달렸다. 경항공모함 류조의 함재기와 수상기모함 치토세와 미즈호, 그리고 몇몇 순양함에서 발진한 수상기들이 하루종일 공습을 가했다. 호위함정들의 분전으로 폭탄에 맞은 배는 없었으나 야라가 기총소사를 받아 안테나가 꺾이고 구명정이 부서졌으며 굴뚝에 구멍이 숭숭 뚫렸다. MMS 51도 기총에 맞아 피해 를 입었다. 공습이 끝난 직후 브리티시 저지가 순다해협 남쪽 16km 해상에서 일본잠수함 I-58이 발사한 어뢰 1발을 맞았다. 침몰은 면했으나 속력이 크게 떨어져 선단에서 낙 오되었다. 브리티시 저지는 나중에 울롱공과 합류하여 야라 선단을 뒤따랐다. 야라 선단은 3월 2일 오전 11시에 칠라찹에 도착했다.


3월 1일 새벽이 되자 제1보병사단으로부터 린트 중령에게 일본군이 상륙했다는 전갈이 왔다. 오전 7시 30분에는 초계정 벨라트릭스와 메렐, 그리고 기뢰부설함 리겔이 탄종 프리옥에 입항했다. 순다해협 해전을 목격했던 리겔의 함장은 밤새 샌니콜라스곶 부근에서 대규모 해전이 있었으며 순다해협은 완전히 봉쇄되었다고 말했다.


이제 마지막이 다가왔다. 무어맨 중령은 반둥으로부터의 지시에 따라 회의를 열고 3월 1일 오후 5시까지 모든 함정에게 출항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린트 중령은 제1보병사단 장 실링 소장으로부터 탄종프리옥을 파괴하겠다는 허락을 구했다. 실링 소장은 민간인의 소개가 완료되고 나서 2일 오전 4시부터 파괴를 시작하라고 명령했으나 시간이 촉박 하다고 느낀 린트 중령은 1일 저녁부터 파괴를 시작했다.


3월 1일 오전 11시 15분에는 반둥으로부터 바타비아 및 탄종프리옥의 해군병력에 대한 소개명령이 떨어졌다. 영국해군의 콜린스 준장과 참모들은 이미 칠라찹으로 떠났고 주 피터의 생존자를 포함한 영국해군병력들이 기차를 타고 뒤를 따랐다.


네덜란드 해군병력들도 서둘러 철수했으며 뒷처리는 군무원들이 했다. 군무원들은 서류, 전보, 암호책을 태우고 텔렉스나 주파수변환기같은 중요한 기계들은 떼어내서 철수하 는 병사에게 건네 주었다. 뒷처리를 맡은 군무원에 대한 철수계획은 없었으며 주로 젊은 여성으로 이루어진 군무원들은 대부분 포로가 되었다.


보네칸은 셀레베스 연안해운사 소속의 142톤짜리 연안화물선이었는데 1941년 12월에 해군에 징발되어 초계정으로 활동했다. 1942년 2월 28일 밤에 에레탄웨탄 앞바다에 있던 보네칸은 상륙하러 접근하는 일본선단을 발견했다. 이미 도망치기는 늦었으므로 보네칸은 선단에 섞였다. 선단을 호위하던 일본함정들이 몇번이나 탐조등을 비추면서 발 광신호를 보내왔지만 보네칸은 무시했다. 하지만 공격은 받지 않았는데 일본함정들이 자기편이라고 착각한 것이 분명했다. 보네칸은 그렇게 일본선단에 섞여 있다가 기회를 보아 빠져나와 3월 1일 오후 4시에 탄종프리옥에 입항했다. 하지만 보네칸이 보고해야 할 해군사령부는 이미 기능을 멈춘 상태였다. 보네칸은 3월 2일 아침에 항내에서 처분 되었다.


수송선 시로는 2월 28일 오후 7시에 고무를 싣고 탄종프리옥을 출항했다. 시로는 순다해협을 통하여 호주로 탈출하려 했으나 3월 1일 오전 2시 45분에 일본함정 2척에게 들 켜 포격을 받았다. 8발의 포탄이 명중했는데 그중 1발이 기관실에 명중하여 동력이 끊어졌다. 시로는 1일 오전 5시에 전복되어 침몰했다. 승조원 중 22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나머지는 포로가 되었다.


영국해군의 보조소해정 라만, 신 아익 리, 그리고 항만초계정 ML1063(47톤)은 순다해협을 통해 칠라찹으로 탈출하기로 하고 1일 오후 3시 30분에 출항했다. 라만과 신 아익 리는 원래 싱가포르해협 증기선 회사의 200톤짜리 증기선으로 영국해군에 징발되었다. 라만은 22m 짜리 세일링 요트인 화이트 스완을 꽁무니에 매달고 있었는데 화이트 스 완은 원래 싱가포르의 영국공군장교 소유로서 자바로 철수한 후 영국해군에 기증한 것이었다. 라만과 신 아익 리는 순다해협으로 접근하다가 일본구축함 2척의 포격을 받아 2 척 모두 정장이 전사하고 배는 침몰했다. 뒤따르던 ML1063도 포격을 받았으나 어둠을 틈타 달아나 탄종 프리옥으로 돌아갔다. 일본함정은 화이트 스완을 무시하고 사라졌으 므로 퇴함한 라만과 신 아익 리의 승조원들은 화이트 스완에 올라탔다. 화이트 스완은 순다해협을 따라 남하하다가 구명보트를 타고 표류 중이던 영국공군의 항공승무원 2명을 발견하고 구조했다. 3월 2일 오전에 화이트 스완은 일본구축함을 2번 만났으나 2척 다 무시하고 사라졌다. 그러나 2일 오후에 만난 3번째 구축함은 화이트 스완을 정선시키고 일본군이 상륙 중이던 반탐만으로 가라고 명령했다. 이 명령에 따라 화이트 스완은 반탐만으로 갔으며 탑승자들은 포로가 되었다. 일본수송선에 옮겨진 화이트 스완의 탑승자 들은 그곳에서 휴스턴 및 퍼스의 생존자들과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