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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자바해 해전(42)-칠라찹 탈출(1)/http://blog.naver.com/imkcs0425/221361852256


42. 칠라찹 탈출(1) - 일본해군의 소탕작전과 탈출 시작

남방부대지휘관인 제2함대사령장관 곤도 노부다케 중장은 1942년 2월 22일에 셀레베스의 스티어링만에 입항하여 난인부대지휘관인 제3함대사령장관 다카하시 이보우 중 장 및 기동부대지휘관인 제1항공함대사령장관 나구모 주이치 중장과 향후 작전을 논의했다.


2월 25일 오전 7시에 곤도 중장이 이끄는 남방부대본대는 나구모 기동부대와 함께 스티어링만을 출항했다. 당시 남방부대본대는 제4전대(아타고, 다카오, 마야)와 제4구축대 제1소대(아라시, 노와키)로 이루어져 있었다. 남방부대본대는 오후 2시에 기동부대와 헤어져 티모르섬을 향하여 남하했다. 이때 제3전대제2소대(공고, 하루나)도 기동부대를 떠나 남방부대본대에 합류했으나 곧 이탈했다. 2월 26일 오전 10시 30분에 티모르섬 서남단의 쿠팡 앞바다에서 제15구축대제2소대의 하야시오를 합류시킨 남방부대본대는 숨바와섬 남방해상을 통과한 후 자바 남쪽 해상을 향하여 서진했다. 3월 1일 새벽이 되었을 때 남방부대본대는 칠라찹 남쪽 130km 해상에 있었다. 곤도 중장의 임무는 나구모 중장과 마찬가지로 인도양을 통하여 자바에 증원하려는 연합군의 시도를 차단하고 일본육군의 주력이 자바섬에 상륙에 성공함으로써 자바를 탈출하여 호주로 달아나는 연합 군 함정들을 격침시키는 것이었다. 남방부대본대는 서서히 남하하면서 연합군 함정을 찾았다.


민간인으로서 칠라찹의 항만관리소장이었다가 전쟁 발발과 함께 해군에 편입되어 얼떨결에 중령 계급장을 달게된 칠라찹 해군사령관 쇼킹 중령은 1942년 3월 1일 오후 11시 에 수라바야 해군사령관 피터르 쿤라드 소장으로 전화를 받았다. 다음날 아침부터 3,000명의 인원이 칠라찹에 도착할 것이니 그들을 재우고 먹이고 선박에 태워 탈출시킬 준 비를 하라는 것이었다. 지원은 커녕 사전에 아무런 귀띔조차 받지못한 쇼킹 중령은 자신이 가진 것만으로 최선을 다하는 수 밖에 없었다. 3월 2일 오전 7시에 펠거 대위가 이끄 는 승조원 200명이 칠라찹 역에 도착한 것을 시작으로 자바 각지에서 모인 장교, 승조원, 관리 및 가족 일부가 도착했다. 칠라찹에 도착한 인원은 네덜란드 해군 약 4,500명, 영국군 약 3,000명(주로 영국 및 호주공군)에 달했으며 탈출하려는 민간인도 1,000명이 넘었다.


칠라찹을 통하여 탈출한 미군은 소수였다. 이들은 2월말까지 대부분 잠수함과 선박편으로 미리 탈출했으며 일부는 항공편으로 탈출했다. 미육군은 호주 콴타스 항공과 임대 계약을 맺고 대형 수상기 4대를 동원하여 2월 22일에서 28일까지 10번에 걸쳐 88명의 인원과 7톤의 화물을 수송했다. 호주 북서해안의 브룸을 이수한 비행정은 8시간 동안 논스톱으로 1,950km 를 날아 칠라찹에 착수했다. 비행정은 착수하자마자 인원과 화물을 싣고 급유를 받은 다음 이수하여 브룸으로 돌아갔다. 칠라찹에서 탈출에 실패하여 포 로가 된 미군은 전부 해군으로 160명 정도였다.


칠라찹에서 탈출하라는 명령을 받은 네덜란드 해군병력 중 상당수는 가족이 자바에 남았으므로 자바 잔류를 원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쇼킹 중령에게 실론 또는호주로의 철수 명령이 강제사항이냐고 물었다. 쇼킹 중령은 상부의 지시대로 철수는 강제사항이며 만일 승선을 거부하면 탈영으로 간주될 것이라고 대답했다.


1942년 2월 27일 저녁에 영국상선 시티오브맨체스터와 네덜란드 상선 23척이 칠라찹을 출항했는데 이들 중 시티오브맨체스터를 포함한 12척이 격침되거나 나포되거나 실 종되었다.


1) 8,917톤짜리 영국상선 시티오브맨체스터는 27일 저녁에 칠라찹을 출항하였으나 28일 날이 밝기 직전에 일본잠수함 I-53의 어뢰에 맞아 불이 났다. 주변에 다른 함정이 없 다는 것을 확인한 I-53은 부상하여 갑판포로 격침하고는 사라졌다. 승조원 및 승객 156명은 랭글리의 생존자를 수색하던 미국소해함 라크와 휘푸어윌에 구조되어 칠라찹으로 돌아가 영국이 임대한 네덜란드 상선 잔담에 수용되었다.


2) 1,021톤짜리 네덜란드 증기선 빈토한은 27일 저녁에 칠라찹을 출항했으나 속력이 6노트로 느려서 낙오되었다. 28일은 무사히 넘겼으나 3월 1일 아침에 일본수상기에게 발견되었고 1시간 내로 달려온 일본구축함 아라시에게 나포되었다. 이후 아라시를 따라다니던 빈토한은 2일 오후에 격침된 영국구축함 스트롱홀드의 승조원 약 50명을 구하 여 마야에 넘겨 주었다. 반 지크 선장이 고분고분하게 굴자 마음을 놓은 일본군은 발리섬으로 가라는 명령과 함께 아무런 감시도 없이 빈토한을 보내 주었다. 하지만 일본군에 게 배를 넘길 생각이 없던 반 지크 선장 이하 승조원들은 배를 자바 근해로 끌고 간 후 3일 새벽에 육지 가까운 곳에서 자침시키고 상륙했다.


3) 5,412톤짜리 네덜란드 상선 엥가노는 27일 저녁에 칠라찹을 출항하여 호주의 프리맨틀로 향하다가 3월 1일 오후 2시에 자바 남쪽 500km 해상에서 다카오의 수상기에게 공격을 받았다. 1번 선창에 폭탄 1발을 맞아 불이 났는데 선원들이 진화하는데 실패하여 싣고 있던 폭발물이 유폭하자 코르 쇼엔 선장은 퇴선명령을 내렸다. 1시간 후에 마야 가 접근하여 엥가노의 상태를 살펴보고는 사라졌다. 2일 새벽 3시에 네덜란드상선 타왈리가 불타는 화염을 보고 찾아와 승조원 65명 전원을 구조했다. 이후 엥가노는 가라앉 았다.


4) 3,271톤짜리 네덜란드 상선 르마이르는 27일 저녁에 호주로 가기 위하여 칠라찹을 출항한 이후 소식이 끊겼다. 일본잠수함에 의하여 격침되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당시 일 본잠수함의 활동 내역을 적은 서류는 전후에 많이 파기되어 확인이 불가능하며 당시 르마이르에 몇명이 타고 있었는지도 확인할 수 없다.


5) 865톤짜리 네덜란드 상선 메르쿠스는 토바 및 반고엔스와 함께 27일에 칠라찹을 출항하여 콜롬보로 향하던 중 낙오되었다. 3월 4일 오전 10시에 메르쿠스는 보르네오 남쪽 740km 해상에서 일본잠수함 I-7에게 들켰다. I-7은 부상한 상태로 다가와 승조원들에게 퇴선하라고 명령한 후 갑판포로 메르쿠스를 격침했다. I-7은 구명정에 탄 승조원을 해치지는 않았지만 구하지도 않은 채 사라졌다. 승조원들은 최장 2주일 동안 바다를 표류하다가 여러 곳에 흩어져 상륙했으며 모두 포로가 되었다.


6) 8,806톤짜리 네덜란드 상선 메조케르토는 27 일 저녁에 칠라찹을 출항했다가 3월 1일에 칠라찹에서 남서쪽으로 610km 떨어진 해상에서 치쿠마에게 격침되었다. 탑승자 대부분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으며 일부가 구조되었으나 마카사르에서 엣솔의 승조원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7) 1,172톤짜리 네덜란드 상선 파리지는 다른 상선들과 함께 27일 저녁에 칠라찹을 출항했으나 속력이 7노트로 느려 낙오되었다. 28일은 무사히 넘겼으나 3월 1일 새벽 3시 30분에 일본구축함 아라시와 노와키에게 발견되어 포격을 얻어맞고 격침되었다. 승조원 36명이 호주 슬루프함 야라에 구조되었으나 야라마저 격침되면서 파리지의 승조원은 모두 죽었다.


8) 9,278톤짜리 네덜란드 상선 폴로브라스는 27일 저녁에 칠라찹을 출항했으나 3월 2일에 자바 남서해안의 위쿠프만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고 4일에 도착했다. 3월 6일 오후 8시에 폴로브라스는 ABDAFLOAT의 네덜란드해군사령관이었던 요한 반 스타베렌 소장을 비롯한 네덜란드해군, 육군 및 공군 장교와 조종사, 바타비아 석유회사의 기술자 2 9명과 임원 2명, 침몰한 다른 상선의 승조원, 여자와 어린이, 그리고 미국종군기자인 윌리엄 맥두걸과 위트 행콕 등 275명의 피난민을 싣고 콜롬보를 향하여 위쿠프만을 떠났 다. 반 스타베렌 소장과 자바해군항공대사령관 제라드 보즈와 대령은 자바를 떠나는 카탈리나를 놓치고 폴로브라스에 승선했으며 맥두걸과 행콕은 출항 직전에 올라탔다. 폴 로브라스는 다음날인 3월 7일 오전 9시에 순다해협 남쪽에서 일본기에게 발견되었고 오전 11시에 소류를 출격한 99식함상폭격기 9대의 폭격을 받았다. 명중탄 4발과 지근탄 1발을 맞은 폴로브라스에서는 크리티 선장을 포함하여 33명이 사망하면서 치명적인 화재와 침수가 일어나 오전 11시 37분에 침몰했다. 조난자 중 116명은 남부 수마트라에 상륙하여 포로가 되었으며 나머지는 모두 사망하거나 실종되었다. 보즈와 대령은 생명을 건졌지만 반 스타베렌 소장은 목숨을 잃었으며 맥두걸은 살아남았지만 행콕은 사망하 여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이후 최초로 사망한 미국 종군기자가 되었다.


네덜란드 상선 폴로브라스. http://www.stoomvaartmaatschappijnederland.nl/ms-poulou-bras-4/


9) 8,667톤짜리 네덜란드 상선 시안타는 27일 저녁에 칠라찹을 출항했다. 자바의 영국인을 탈출시키기 위하여 영국정부에 대여된 시안티는 영국 및 호주공군의 지상요원 35 0명을 싣고 있었다. 시안타는 3월 3일 아침에 칠라찹에서 남쪽으로 1,480km 떨어진 해상에서 일본잠수함 I-1에게 발각되었다. I-1은 부상하여 오전 6시 30분부터 140mm 갑판포 2문으로 75mm 포 1문을 가진 시안타와 포격전을 벌였고 시안타는 30발의 명중탄과 어뢰 1발을 맞고 10분 만에 침몰했다. 생존자 37명은 네덜란드 상선 반 스필베르 겐에게 구조되어 호주에 상륙했다.


10) 1,579톤짜리 네덜란드 상선 시글리는 27일 저녁에 칠라찹을 출항하여 3월 2일에 일본구축함 하야시오에게 나포되었다.


11) 983톤짜리 네덜란드 상선 톰혼은 27일 밤에 중국총영사를 포함한 51명의 승객을 태우고 칠라찹을 출항했다. 톰혼은 28일 오전 3시에 칠라찹 남쪽 해상에서 일본구축함 아라시와 노와키의 포격을 받아 6명이 숨지면서 침몰했다. 일본구축함은 생존자를 구하지 않고 사라졌으며 생존자들은 3척의 구명정에 타고 자바로 되돌아갔다. 3척의 구명 정 중 30명이 탄 1척은 네덜란드 상선 잔담에 의하여 구조되었고 나머지 2척은 자바에 상륙하여 탑승자들은 포로가 되었다.


12) 981톤짜리 네덜란드 상선 토라자는 27일 저녁에 칠라찹을 출항했으며 3월 1일 오전에 일본구축함 아라시와 노와키에게 포격을 받고 침몰했다. 일본구축함은 이번에도 생존자를 구하지 않고 사라졌다. 사망자 11명을 제외한 생존자 30명은 네덜란드 상선 타왈리에게 구조되었다.


아라시와 노와키는 3월 1일 아침에 상선을 개조한 620톤짜리 영국소해함 스콧 할리도 격침했다. 스콧 할리는 탄종프리옥을 떠나 호주로 향하던 중이었으며 생존자는 없었다.


해군에 징발된 정부선단 소속의 주더크루이스는 2월 27일 오후 9시에 출항했다. 주더크루이스는 자바 남쪽 640km 해상까지 남하한 다음 북서쪽으로 꺾어 3월 13일에 콜롬 보에 도착했다. 정부선단 소속의 선박 58척 중 동인도제도에서 탈출하는데 성공한 배는 주더크루이스와 얀선, 2척 뿐이다.


1,422톤짜리 기뢰부설함 윌렘반데르잔은 3월 1일에 콜롬보를 향하여 칠라찹을 출항했다. 윌렘반데르잔은 일본군의 눈을 피하여 낮에는 정박하고 밤에만 자바 남해안에 바짝 붙어 서쪽으로 항해했다. 3월 3일 새벽에 자바 남서쪽 끝에 도착한 윌렘반데르잔은 북서쪽으로 항진하여 3월 9일에 콜롬보에 도착했다.


정부선단 소속인 803톤짜리 훕딘스펙터 지만의 티스머 선장은 쇼킹 중령을 찾아와 탈출하겠다고 말했다. 쇼킹 중령은 무장하지 않은 정부선단 소속의 선박은 탈출 대상이 아 니라며 연료 보급을 거부했다. 결국 티스머 선장은 3월 1일에 승조원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배를 포기했다.


1,480톤짜리 포정 숨바는 수라바야항에 정박하던 중 2월 27일 오전 5시 30분에 제로기로부터 기총소사를 받아 가벼운 피해를 입었다. 그날 오후 5시 45분에 숨바는 수마트 라 서해안에 있는 남파가이섬의 남쪽 끝인 비켄스만으로 가서 급유함 페트로넬라를 호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3월 1일 오후에 비켄스만에서 페트로넬라를 만난 숨바는 7일까 지 호위했다. 이후 네덜란드육군 병력을 싣고 자바를 탈출한 시버그를 만나 호위하라는 명령을 받고 7일 새벽에 비켄스만을 떠나 8일 오전 4시에 집결점에 도착했으나 시버그 는 오지 않았다. 2시간 후에 숨바는 콜롬보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연료가 모자랐으므로 숨바는 저속으로 항해하여 3월 15일에 콜롬보에 입항했다.


트롬프급 경순양함 야콥스 반 힘스케르크는 도먼 제독의 연합타격부대에 합류하기 위하여 2월 25일에 콜롬보를 떠나 수라바야로 향했다. 27일 밤에는 제라드 칼렌부르급 구 축함인 이삭 스위즈가 뒤를 따랐다. 이들이 도착하기 전에 연합타격부대는 참패했으므로 3월 1일 아침에 야콥스 반 힘스케르크와 이삭 스위즈는 콜롬보로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3월 1일 아침 8시에 야콥스 반 힘스케르크는 순다해협에서 남쪽으로 320km 떨어진 해상에서 일본정찰기에 발견되었으며 정오에 9대의 일본기로부터 공격을 받았 다. 대공화기를 증설한 야콥스 반 힘스케르크는 강력한 대공포화로 적의 조준을 방해하면서 고속으로 기동하여 1발의 폭탄도 맞지 않았다. 폭탄 중 1발이 9m 거리에 떨어지면 서 함체 후방이 물위로 번쩍 들렸으나 함체에는 피해가 없었다. 연료를 많이 소비한 야콥스 반 힘스케르크는 비켄스만으로 가서 페트로넬라로부터 연료보급을 받으라는 명령 을 받았으나 함장 융커 반 홀데 중령은 거부하고 바로 콜롬보로 갔다. 3월 6일에 콜롬보에 도착했을 때 야콥스 반 힘스케르크의 연료는 3% 만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