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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자바해 해전(43)-칠라찹 탈출(2)/http://blog.naver.com/imkcs0425/221362592095


43. 칠라찹 탈출(2) - 스트롱홀드와 야라 선단

1942년 2월 말 현재 수라바야를 기지로 삼아 활동하던 미국잠수함들은 모두 초계 중이었는데 초계를 끝낸 후 수라바야가 아닌 호주의 프리맨틀로 복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데이비드 허트 소령이 지휘하는 미국잠수함 퍼치는 1942년 2월 3일에 호주 다윈을 떠나 8일에 자바해에 도착했다. 2월 28일에 퍼치는 헬프리히 제독의 명령에 따라 초계 구 역을 떠나 네덜란드군이 일본군 상륙지로 잘못 예상하고 있던 마두라 해역으로 향했다.


포퍼스급 잠수함 SS-176 퍼치. https://en.wikipedia.org/wiki/US S_Perch_(SS-176)


3월 1일 밤에 퍼치는 수라바야에서 북서쪽으로 65km 떨어진 해상에서 일본구축함 아마츠카제와 하츠카제에게 발각되어 45m 깊이의 뻘밭에 앉아 몇시간 동안 폭뢰공격을 받았다. 퍼치는 살아남았으나 왼쪽 프로펠러의 동력이 끊어졌다. 3월 2일 새벽 4시에 마침내 공격이 끝나자 퍼치는 부상하여 하나뿐인 프로펠러를 돌려 호주로 향했다.


하지만 퍼치는 3월 2일 오전 5시 49분에 다시 일본구축함 우시오와 사자나미에게 발견되었다. 퍼치는 다시 잠항하여 60m 깊이의 뻘밭에 앉은 채 오전 8시 30분까지 30발 이 상의 폭뢰공격을 받았다. 비록 격침되지는 않았으나 퍼치는 큰 피해를 입었다. 폭뢰의 충격으로 어뢰발사관이 사용불능이 되었고 갑판포도 부서졌다. 함체에는 균열이 생겨 침 수가 시작되었다. 축전지 용기가 부서져 유독한 염소가스가 새어 나왔으며 전선 일부가 합선되었다. 왼쪽 프로펠러에는 여전히 동력이 공급되지 않았다. 각고의 노력 끝에 퍼치 는 간신히 떠오르기는 했으나 다시는 잠항할 수 없었으며 속력도 5노트에 지나지 않았다.


이때 일본구축함 우시오와 사자나미가 다시 나타났다. 적의 구축함 앞에서 잠항할 수도 없고 공격할 수도 없는 잠수함이 할 수 있는 일은 자침 밖에 없었다. 허트 소령은 자침 및 퇴함명령을 내렸으며 승조원 59명은 전원 우시오에 구조되어 포로가 되었다. 이들은 일본에 도착하자 아시오의 구리광산에 끌려가서 강제노동을 했는데 이는 제네바 협정 위반이었다. 가혹한 노동과 굶주림 끝에 5명이 숨지고 54명이 종전까지 살아남았다.


S급 영국구축함 스트롱홀드. https://www.worldnavalships.com/ship_photo.php?ProdID=112398


영국구축함 스트롱홀드는 3월 1일에 상선 잔담과 함께 칠라찹을 출항했다. 그날 밤 스트롱홀드는 잔담과 헤어져 호주로 향했는데 연료가 모자라서 12노트로 항진할 수 밖에 없었다. 2일 아침에 일본군 수상정찰기가 스트롱홀드를 발견했고 오후 5시 40분에 중순양함 마야가 제4구축대제1소대(아라시, 노와키)를 이끌고 달려왔다. 마야는 오후 5시 42분부터 15,400m 거리에서 20cm 주포로 사격을 시작했고 아라시와 노와키는 오후 6시 21분부터 10,500m 거리에서 5인치 주포로 사격을 시작했다. 최종적으로 마야는 스트롱홀드의 우현 후방 2,500m, 아라시와 노와키는 좌현 후방 2,000m 까지 접근하여 포격을 가했다. 마야가 소모한 20cm 포탄은 635발이며 아라시는 290발, 노와키는 3 45발의 5인치 포탄을 발사했다. 취역한 지 20년이 넘은 1,075톤짜리 구축함으로 4인치 함포 4문을 보유한 스트롱홀드는 압도적인 전력차를 극복하지 못한 채 여러 발의 명 중탄을 얻어맞고 오후 6시 58분, 자바에서 남쪽으로 480km 떨어진 해상에 침몰했다. 함장 자일스 프레터-피니 소령을 포함한 74명이 사망했으며 생존자 약 50명은 일본군 에게 나포된 네덜란드 증기선 빈토한에 구조되었다가 마야로 옮겨졌다.


미국구축함 필즈베리는 글래스포드 제독의 철수 명령에 따라 칠라찹을 떠나 남하하다가 3월 2일 오전에 일본기에게 발견되었다. 제4전대의 중순양함 아타고와 다카오가 추격 하여 오후 8시 30분에 자바에서 남쪽으로 740km 떨어진 해상에서 발견했다. 몰래 접근한 아타고와 다카오는 오후 8시 55분에 5,200m 거리에서 기습적인 조사포격을 가하 여 오후 9시 2분에 격침했다. 필즈베리의 생존자는 없었다.


1,600톤짜리 미국포함 애쉬빌은 글래스포드 제독의 철수 명령에 따라 3월 1일 오후 3시에 칠라찹을 떠나 남하하다가 3월 3일 오전 8시 30분에 발리섬에서 남쪽으로 300km 떨어진 해상에서 남방부대 본대에게 들켰다. 제4구축대제1소대(아라시, 노와키)가 접근하여 오전 9시 6분부터 8.200m 거리에서 사격을 시작하여 9시 38분에 격침했다. 애 쉬빌의 생존자는 1명으로 브라운이라고만 알려진 18세의 기관실 요원이었는데 1945년 3월 18일에 마카사르 포로수용소에서 사망했다.


650톤짜리 배서스트급 코르벳인 호주해군의 버니와 벤디고는 일본잠수함의 어뢰에 맞아 침몰한 네덜란드상선 보로의 승조원 36명을 싣고 3월 1일 오후에 칠라찹에 도착했 다. 그날밤 버니에는 존 콜린스 준장이 승함했으며 벤디고에는 주피터의 승조원 77명, 콜린스 준장의 참모 10명, 영국공군장교 1명 및 민간인 1명으로 이루어진 89명이 승함 했다. 벤디고는 3월 1일 오후 11시 30분에 칠라찹을 떠났다.


3월 2일 오전 11시에 야라, 줌나, MMS-51, 게마스, 안킹, 프랑콜 및 제21소해분대(발라랏, 골번, 메리보로, 툼바)로 이루어진 야라 선단이 칠라찹에 도착했다. 콜린스 준장의 명령에 따라 줌나는 입항하지 않고 콜롬보로 떠났으며 야라, MMS-51, 안킹 및 프랑콜 또한 입항하지 않고 바로 프리맨틀로 출발했다. 어뢰에 맞아 속력이 9노트로 떨어진 유 조선 브리티시 저지는 울롱공과 함께 따로 프리맨틀로 갔다. 제21소해분대는 칠라찹항에 들어가 급유를 받고 피난민들을 태운 후 프리맨틀로 출발했다. 골번과 툼바는 3월 2 일 오후 6시에 출항했다. 콜린스 준장이 승좌한 버니는 2일 오후 8시에 출항했으며 오후 10시 45분에는 매리보로가 제너럴 버스픽과 함께 출항했다.


제너럴 버스픽은 영국이 임대한 네덜란드 상선으로 영국총영사, 영국해군 승조원 149명, 엘렉트라의 생존자 45명, 영국민간인 30명이 타고 있었다. 이외에도 미해군 승조원 13명(스튜어트의 승조원 9명, 마블헤드의 승조원 1명, 수라바야 병원에서 막 퇴원한 부상자 3명), 미국민간인 5명, 그리고 약간의 네덜란드 민간인도 타고 있었다.


발라랏은 3월 3일에 출항했다. 포경선을 개조한 207톤짜리 보조소해정 게마스는 너무 느린데다가 항속거리도 짧아서 승조원, 연료, 보급품을 모두 발라랏으로 옮긴 후 칠라찹 에서 12km 떨어진 해상에 침몰시켰다.


이제 4척으로 줄어든 야라 선단(야라, MMS-51, 안킹, 프랑콜)은 8.5노트의 속력으로 프리맨틀을 향했다. 3월 3일 아침에 야라는 일본군에게 격침당한 네덜란드 상선 파리지 의 승조원 36명이 타고 있는 구명정 2척을 발견하고 구조했다. 야라 선단의 불안하지만 평온한 항해는 4일 아침에 끝났다.


4일 오전 6시 30분에 야라 선단은 제4전대(아타고, 다카오, 마야)와 제4구축대제1소대(아라시, 노와키)로 이루어진 곤도 노부타케 중장의 남방부대본대와 만났다. 선단을 지 휘하던 야라의 함장 로버트 랭킨 소령은 분산 명령을 내린 다음 다른 배의 탈출을 돕기 위하여 4인치 함포 3문을 쏘면서 적에게 돌진했다. 하지만 랭킨 소령의 의도를 짐작한 곤도 중장은 중순양함 1척으로 야라를 견제하면서 달아나는 다른 배들부터 격침했다.


수송선 안킹(3,472톤)이 가장 먼저 가라앉았다. 50구경 기관총 2정을 가진 229톤짜리 소해정 MMS 51은 적의 중순양함이 쫓아오자 저항을 포기하고 배를 자침시켰다. 중순 양함은 접근하여 침몰하고 있는 MMS 51에 25mm기관포탄을 퍼부었다. 도망치던 배 중 유조선 프랑콜(2,000톤)이 마지막으로 오전 7시 30분에 침몰했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야라는 집중사격을 받았다. 여러 발의 포탄을 맞아 화재가 발생하고 배가 왼쪽으로 크게 기울자 랭킨 소령은 퇴함 명령을 내렸다. 그 직후 함교에 포탄이 명중하면서 랭킨 소령은 전사했다. 퇴함 명령이 내려졌지만 포격 가능한 4인치 함포의 포수들은 퇴함을 거부하고 배가 가라앉는 마지막 순간까지 포격을 계속했다. 1,060톤짜 리 슬루프함 야라는 오전 9시경 침몰했다.


그림스비급 슬루프함 HMAS 야라. https://en.wikipedia.org/wiki/HMAS_Yarra _(U77)


마야에 잡혀있던 스트롱홀드의 승조원 50명은 일본군의 명령에 따라 갑판에 끌려나와 야라의 최후를 지켜보았다. 연합군의 비참한 처지와 이에 대비되는 일본군의 위용을 보 여주려는 의도였으나 승조원들은 마지막까지 포격을 멈추지 않은 야라의 분전에 더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일본군은 자신들이 격침한 배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하여 13명이 탄 프랑콜의 구명정 하나만을 구조한 후 사라져 버렸다. MMS 51의 승조원 14명이 탄 구명정 1척은 3월 7일 오후에 네덜란드 증기선 치마녹에게 구조되어 프리맨틀에 도착했다. 야라의 승조원 13명이 탄 구명정 1척은 네덜란드 잠수함 K-XⅠ에게 구조되었다. 야라에 구조되었던 파리 지의 승조원 36명은 모두 죽거나 실종됨으로써 파리지의 승조원은 2번의 침몰을 거치면서 전멸했다.


야라 선단의 남쪽에서는 버니, 벤디고, 발라랏, 골번, 매리보로, 툼바, 울롱공, 브리티시 저지, 그리고 제너럴 버스픽이 항진하고 있었다. 일부는 야라 선단의 전투 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있었지만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일본군이 자신들을 발견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최대 속력으로 달아나는 것 뿐이었다. 천만다행으로 야라 선단을 전멸시키면서 마음이 느긋해진 일본군은 추가로 남쪽을 수색하지 않았다.


석탄을 때는 증기선인 제네랄 버스픽은 자신을 호위하다가 쏜살같이 내빼는 매리보로를 따라잡기 위하여 승객인 영국해군 승조원들까지 나서서 석탄을 최대한 빠른 속도로 보 일러에 쑤셔 넣은 끝에 겨우 낙오를 면했다. 결국 제네랄 버스픽과 소해정들은 3월 9일에서 10일에 걸쳐 무사히 프리맨틀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