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수라바야 소개(2) - 처분 및 탈출
런던에 있는 망명 네덜란드 정부의 해군참모총장인 요하네스 푸스트너 중장은 1942년 2월 중순에 헬프리히 제독에게 일부 지원함을 탈출시키라고 강력하게 권고했다. 이 권 고에 따라 913톤짜리 벤젠수송선 모지가 네덜란드순양함의 150mm 주포탄 550톤을 싣고 2월 26일에 수라바야를 출항했다. 그러나 속력이 9노트에 불과한 모지는 28일에 발리해협에서 일본군에게 포착되어 격침되었다.
5,209톤짜리 유조선 펜도포도 2월 28일에 출항했으나 도중에 모지가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왔다가 3월 2일 오후 6시에 마두라 근해에서 처분되었다. 일본군은 25 m 깊이에 가라앉은 펜도포를 1943년 7월 31일에 인양하여 에이쇼마루라는 이름으로 사용했다. 에이쇼마루는 1945년 1월 12일에 인도차이나 근해에서 미함재기의 폭격을 받고 격침되었다.
헬프리히 제독은 1942년 3월 1일에 반둥의 사령부를 떠나면서 1939년 9월 이래 정부선단(Government Marine)의 선박 중 해군에 징발되었던 선박의 소집을 해제하고 무 기는 육군에 넘기라고 명령했다. 동인도전대장직을 이어받은 수라바야 해군사령관 피터르 쿤라드 해군소장은 이 명령에 따라 3월 2일에 정부선단 중 해군에 징발되어 초계정 으로 사용되던 선박 7척의 승조원들을 소집해제하여 민간인 신분으로 되돌렸다. 그리고 초계정은 모두 수라바야 항내에 처분했는데 나중에 일본군이 이중 4척을 건져서 사용했다.
이후 쿤라드 소장도 잠수함 K-XⅡ를 타고 수라바야를 탈출하면서 3월 5일에 제2소해분대장인 조셉 르보 소령이 동인도전대장직을 이어받았다. 르보 소령이 쿤라드 소장에게 받은 명령은 탈출 가능한 함정과 선박은 탈출하고 탈출이 불가능할 경우 처분하여 일본군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수라바야에는 18톤짜리 TM-4급 어뢰정 18척이 있었다. 어뢰정기지에는 충분한 연료가 있었으나 어뢰정은 정비가 완벽하게 된 상황에서 예비연료를 한계까지 싣고 엔진 하나 만 가동하여 6노트로 항해해도 항속거리가 720km 에 불과하여 호주까지 탈출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15척은 3월 2일에 처분하고 3척은 항내에서 인원수송 등의 임무를 맡아 3월 8일까지 운용하다가 처분했다. 3월 6일에 르보 소령은 그때까지 남아있던 어뢰정 3척에게 탈출하고 싶다면 탈출하라고 허락했으나 2척은 탈출을 거부했고 TM-7은 탈출을 고려했으나 마지막 순간 엔진에 이상이 생기자 포기했다. 나중에 일본군이 어뢰정 중에서 기지 안에 처분했던 5척을 건져내어 사용했다.
173톤짜리 소형 유조선을 개조한 어뢰정모함인 모라볼리안과 페타는 탈출을 위한 항속거리가 충분했다. 하지만 현지인 선원들이 3월 5일에 소집해제를 요구하자 들어줄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모라볼리안과 페타는 마두라섬의 부두에서 처분했다. 어뢰정 기지의 어뢰와 연료도 모두 파괴했다.
미국에 주문해서 건조한 48톤짜리 히긴스급 구잠정 4척은 예비연료를 최대한 실을 경우 항속거리가 1,600km 를 넘어서 호주까지 탈출이 가능했다. 그러나 소음기가 없어서 저속에서도 몇km 밖까지 엔진소리가 들리는데다가 속력도 느렸으므로 탈출을 포기하고 3월 2일에 모두 처분했다. 나중에 일본군이 1척을 건져내어 사용했다.
제1소해분대의 179톤짜리 A급 소해정 4척 중 2척은 3월 1일에, 나머지 2척은 6일에 처분되었는데 일본군은 3척을 건져 사용했다.
982톤짜리 기뢰부설함 크라카타우는 3월 8일에 마두라의 보급부두 바로 옆에 처분했다. 75mm 함포 2문과 50구경 기관총 4정은 떼어내어 육군에게 넘겼다. 함장을 포함한 15명의 승조원은 소해함 아브라함 크린슨의 승조원으로 승함하여 탈출했으나 나머지 승조원들은 마두라 수비대에 편입되어 10일에 포로가 되었다.
460톤짜리 잔 반 암스텔급 소해함 4척(잔 반 암스텔, 엘란트 뒤부아, 피터르 드 비터, 아브라함 크린슨)으로 이루어진 제2소해분대는 호주로 탈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소해함 엘란트 뒤부아(드 종 중령)와 잔 반 암스텔(드 그리우 소령)은 3월 6일 저녁에 호주를 향하여 수라바야를 출항했다. 수라바야의 보급체계가 무너지는 바람에 연료공급을 받지 못하여 엘란트 뒤부아는 45톤(용량의 41%), 잔 반 암스텔은 60톤(용량의 55%)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 이는 최대한 아껴도 호주까지 아슬아슬한 양이었다. 그리 고 2척 다 현지인 승조원이 대거 이탈하여 승조원이 절반 이하였으며 엘란트 뒤부아는 보일러 파이프가 새는 등 크고작은 고장에 시달리고 있었다. 2척은 나뭇가지로 정성 껏 위장한 후 낮에는 섬의 후미진 곳에 숨고 밤에만 항해했다.
3월 7일 저녁에 드 종 중령은 드 그리우 소령과 상의한 후 엘란트 뒤부아를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엘란트 뒤부아의 승조원, 연료 및 보급품을 모두 잔 반 암스텔로 옮긴 후 침수 밸브를 열고 폭뢰 1발을 폭발시켜 처분했다. 잔 반 암스텔은 9일 오후 11시 30분에 케인지언 제도 남쪽 해상에서 일본구축함 아라시에게 들켜 포격을 받고 격침되었다. 엘란트 뒤부아에서 옮겨 탄 드 종 중령을 포함한 2 3명이 사망했고 나머지는 포로가 되었다.
소해함 피터르 드 비터도 탈출명령을 받았으나 현지인 승조원들이 대거 도망치자 함장 요하네스 데커 소령은 탈출을 포기하고 3월 6일 오후 3시 30분에 크루즈 부두 옆에서 폭약 2개를 터뜨려 처분했다. 잠수함 K-XⅡ에 타고 출항을 기다리던 쿤라드 소장이 폭음을 듣고 조사를 명했는데 피터르 드 비터가 호주로 탈출하라는 자신의 명령을 어기고 자침했음을 알게되자 격노했다. 종전 이후 데커 소령은 전시항명죄로 군사재판을 받았다. 검사는 불명예 전역과 징역 1년을 구형했으나 판사는 해군 장교로서 국가에 18년간 봉사했고 일본 치하에서 참혹한 포로 생활을 겪은 점을 감안하여 불명예 전역과 금고 1개월을 선고했다. 데커 소령은 전역 이후 고등학교 교사가 되었으며 1995년 4월 30일 에 8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291톤짜리 프린스 반 오라녀급 소해함인 고든 리우는 투반만에 기뢰를 설치한 후 수라바야에 입항해 있었다. 고든 리우는 3월 5일에 호주로 탈출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현 지인 승조원이 대거 도망친 데다가 함체가 높아 적의 눈에 띄기 쉽다고 생각한 함장 유지니어스 호르스트 소령은 탈출을 포기하고 3월 7일에 프린세스 빌헬미나 부두 남쪽 1,2 00m 지점에 처분했다. 종전 이후 호르스트 소령은 전시항명죄로 군사재판을 받았다. 검사는 불명예 전역과 징역 1년을 구형했으나 판사는 불명예 전역과 금고 1개월을 선고 했다. 호르스트 소령은 1947년 7월 15일에 전역했으며 3년 후 4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쿤라드 소장으로부터 동인도제도 전대장직을 이어받았던 제2소해분대장 조셉 르보 소령도 3월 6일에 휘하의 모든 함정에게 탈출하라는 명령을 내린 후 자신의 기함인 아브라 함 크린슨을 타고 탈출했다. 함장 앤서니 반 미에트 소령은 출항 명령을 받자 함체에 위장색을 칠하고 그물과 나뭇가지를 이용하여 정성스럽게 위장했다. 이후 승조원들을 불러 모아 위험한 항해에서 빠지고 싶은 사람은 떠나도 좋다고 말했다. 45명의 승조원 중 현지인 전원을 포함하여 절반 가량이 함을 떠났다. 반 미에트 소령은 처분예정인 기뢰부설 함 크라카타우의 승조원 15명을 포함하여 모자라는 승조원을 수소문하여 끌어모은 후 6일 오후 9시 30분에 요트인 우라니아2를 끌면서 수라바야를 출항했다. 7일 오전 2시 에 우라니아2를 분리한 아브라함 크린슨은 7일 아침에 마두라 남쪽에 있는 길리라자섬에 도착했다. 이후 아브라함 크림슨은 낮에는 섬의 그늘에 숨고 밤에만 항해했다. 소해함 은 7일 저녁 6시 30분에 길리라자를 떠나 서진하여 8일 아침에 케인지언 제도의 무인도에 도착했다. 8일 낮동안 정성껏 위장을 추가한 소해함은 저녁 6시 45분에 케인지언 제도를 떠나 남하하여 9일 아침에 숨바와섬의 북서해안에 도달하여 닻을 내렸다. 하루 종일 정성껏 마지막 위장을 더한 아브라함 크린슨은 9일 저녁에 출발하여 롬복섬과 숨바 와섬 사이의 알라스 해협을 거쳐 남하한 끝에 인도양으로 나왔다. 10일 아침에 위장을 제거한 아브라함 크린슨은 이후 10노트의 속력으로 항해하여 3월 15일에 호주 서해안 의 제럴턴에 도착했다.
위장하고 정박중인 아브라함 크린슨. https://en.wikipedia.org/wiki/HNLMS_Ab raham_Crijnssen_(1936)
위장하고 정박중인 아브라함 크린슨 확대사진
항해중인 아브라함 크린슨
장교 2명을 포함한 어뢰정 승조원 12명은 수라바야해군사관학교의 연습용 요트인 우라니아2를 타고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우라니아2는 3월 6일 오후 9시 30분에 아브라함 크린슨에 매달려 수라바야를 출항했으며 7일 오전 2시에 분리되었다. 이후 우라니아2는 롬복 해협을 향하여 남하하다가 8일에 일본구축함에 나포되었으며 탑승자는 모두 포로가 되었다.
제4소해분대는 보조소해정 6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분대장 코르탈리스 알테스 소령은 3월 2일에 쿤라드 소장으로부터 호주로 철수하고 철수하지 못하는 함정은 처분하라 는 명령을 받았다. 알테스 소령은 휘하의 소해정들에게 연료탱크를 꽉 채우게 한 후 호주로 탈출할 예정이니 항해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떠나라고 말했다. 6척 중 5척의 정장을 포함하여 절반 가량의 승조원들이 항해를 포기했으며 이들은 모두 소집을 해제하여 민간인 신분이 되었다. 알테스 소령은 표준배수량이 51톤으로 조금 작은 아조노급 3척(아 조노, 카위, 살락)의 승조원, 연료, 식수 및 보급품을 표준배수량이 60톤으로 조금 큰 스메로급 3척(스메로, 메르바보, 린자니)에 옮겨 싣고 아조노급 3척은 처분했다. 스메로 급 소해정 3척에 대한 지휘는 제1소해분대 소속 소해정 A의 정장이었던 로트간 대위가 맡았다.
처분된 3척의 소해정으로부터 연료와 식수, 식량을 넘겨받은 3척의 소해정은 1척당 자체의 연료 약 3,000리터에 추가로 1,500리터의 예비연료를 확보했다. 이 정도 양이면 최대 속력으로 달려도 2,100km 이상 갈 수 있었는데 목표인 호주 북서해안에 있는 브룸까지의 거리는 약 1,900km였으니 충분했다. 식수도 1척당 3,500리터를 확보했는데 이건 한달을 버티기에 충분한 양이었으며 식량 또한 한달치를 실었다.
소해정 3척은 3월 3일 저녁에 수라바야를 출항했다. 마두라 해협에는 일본함정이 매복할 가능성이 있었으므로 소해정들은 북상하여 마두라섬의 북해안을 따라 동진하다가 4 일 오전 6시 30분에 정박했다. 이후 소해정들은 낮에는 섬의 그늘에 숨고 밤에만 항해했다. 4일 오후 6시에 마두라섬 북해안을 떠난 소해정들은 동진하여 케인지언 제도에 숨 었으며 이후 남하하여 6일 아침에 플로레스섬 북서해안에 도달했다. 소해정들은 6일 밤에 플로레스섬과 링카섬 사이의 몰로해협을 강행돌파했다. 몰로해협은 좁은데다가 조 류가 굉장히 강하고 시도때도 없이 돌풍과 함께 높은 파도가 일어 대단히 위험했다. 따라서 일본함정은 낮에도 감히 통과할 엄두를 내지 못했으므로 연합군 함정이, 그것도 야 간에 통과할 수 있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몰로해협을 무사히 통과하여 인도양으로 나온 소해정들은 7일 아침에 플로레스섬 남쪽의 무인도에 숨었다. 7일 오후 5시에 무인 도를 출발한 소해정들은 꾸준히 달려 3월 10일 오후 8시 30분에 호주 북서해안의 브룸에 도착했다.
수라바야 해군사령관인 피터르 쿤라드 소장과 참모들을 싣고 수라바야를 탈출한 잠수함은 4척(K-VⅢ, K-ⅠX, K-XⅠ, K-XⅡ)였다. 가장 먼저 출항한 것은 K-ⅠX으로 3월 1일 오후 6시 45분에 7명의 장교를 태우고 출항했다. K-ⅠX은 3월 4일에 롬복섬과 숨바와섬 사이의 알라스 해협을 통하여 인도양으로 나왔으며 3월 13일에 호주 서해안의 프리 맨틀에 도착했다. K-VⅢ은 6명의 장교를 싣고 3월 3일 오후 8시에 출항했다. 역시 알라스 해협을 통과한 K-VⅢ은 3월 12일 오후 4시 30분에 호주 서해안의 제럴턴에 도착했다. K-XⅠ은 잠수함 부대의 참모 10명을 태우고 3일 오후 9시 13분에 출항했다. 롬복 해협을 통과한 K-XⅠ은 3월 17일에 콜롬보에 도착했다.
쿤라드 소장은 K-XⅡ를 타고 탈출하기로 결정하고 3월 5일에 동인도제도 전대장직을 제2소해분대장 조셉 르보 소령에게 넘겼다. 출발시간은 6일 오전 2시였으나 승조원 일 부가 도망쳐 버리는 바람에 새로 모으느라고 6일 오후 5시 50분에야 출항할 수 있었다. 원래 목적지는 콜롬보였으나 연료 부족으로 인하여 호주의 프리맨틀로 바꾸어 3월 20 일에 도착했다. K-XⅡ는 수라바야를 마지막으로 떠난 전투함정이었다. 이후 1945년까지 연합군 함정은 수라바야에 들어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