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페코스 침몰
아시아 함대의 유일한 급유함인 페코스는 1942년 2월 초부터 칠라찹에서 연합군 함정에 급유해 주고 있었다. 일본군이 발리를 점령하자 함장 엘머 애버네시 중령은 페코스가 항내에 머무르면 위험하며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항구를 벗어나서도 일정 해역에 머무르면서 급유하는데는 지장이 없었다. 글래스포드 제독도 찬성했으나 네덜란 드군이 반대하여 페코스는 계속 항내에 머물러야 했다. 2월 25일에 플로레스해에서 부상을 입고 욕야카르타의 군병원에서 치료 중이던 휴스턴과 마블헤드의 부상병 30명을 포함하여 147명이 페코스에 승함했다.
카나와급 급유함 AO-6 페코스.
(USS Pecos (AO-6) off Chefoo, China, on 14 September 1928 (NH 65021).)
https://en.wikipedia.org/wiki/USS_Pecos_(AO-6)
페코스는 2월 27일 아침에 실론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고 패럿의 호위를 받으면서 칠라찹을 떠났다. 발리의 덴파사르 비행장에 전개한 일본기와 더불어 일본항모기동부대도 자 바 남쪽 해상에서 활동 중이었으므로 애버네시 중령은 출항하기 전에 승조원들에게 대나무를 구해오게 한 다음 뗏목을 여러개 만들어 갑판에 쌓아두었다. 또한 출항하자 견시 를 2배로 늘리고 모든 수밀문을 닫았으며 기름탱크에는 수증기를 불어넣어 유증기를 제거함으로써 화재나 유폭위험을 줄였다.
출항한지 몇시간 후에 페코스는 동쪽으로 60km 떨어져 있던 랭글리의 구조요청을 들었다. 뚱뚱한 급유함이 달려가 봐야 적의 전과만 올려주는 셈이었으므로 페코스는 서쪽으 로 도망쳤다.
그 직후 페코스는 크리스마스섬 북쪽에 있는 플라잉피시만으로 가서 휘플과 엣솔로부터 랭글리의 생존자를 넘겨받은 다음 호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페코스를 호위하 던 패럿은 떨어져 나와 포장된 P-40전투기 27대를 실은 수송선 시위치를 호위하여 칠라찹으로 갔다.
페코스에 앞서 플라잉피시만에 도착한 휘플과 엣솔은 그곳에 있던 인산염 채굴회사의 보트를 사용하여 랭글리의 생존자 중 조종사 32명을 모두 엣솔로 모았다. 엣솔은 이들을 싣고 칠라찹으로 갈 예정이었다. 잠시후 페코스가 도착하자 생존자를 옮겨싣는 절차를 논의하기 위하여 랭글리의 토머스 도노반 소령이 채굴회사의 도선사와 함께 보트를 타고 페코스로 갔다. 페코스에 도착 한 직후 보트의 밧줄이 페코스의 프로펠러에 걸렸다. 수십분간 씨름하다가 마침내 밧줄을 푼 순간 수마트라 방향으로부터 일본군의 육상공격기 3대가 나타났다. 일본기들 은 폭탄 6발을 부두에 떨어뜨린 후에 페코스 상공을 저공비행하면서 살펴보고는 사라졌다.
휘플에 승좌하고 있던 제57구축함분대장 에드윈 크라우치 중령은 공습이 임박했음을 알았다. 그의 명령에 따라 페코스, 휘플, 엣솔은 즉시 만을 빠져나가 남쪽에서 접근 중이 던 스콜을 향해 달렸다. 보트에 있던 도선사는 마지막 순간 페코스의 줄사다리를 잡고 옮겨탔으나 도노반 소령은 보트에 탄채 뒤에 남았다. 낙오된 도노반 소령은 결국 크리스 마스섬 함락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
스콜 속에 30분간 숨었던 페코스와 구축함 2척은 이후 남하했다. 3월 1일 새벽 4시 25분부터 3시간 동안 휘플과 엣솔에 수용중이던 400명이 넘는 랭글리의 생존자들이 구명 정을 이용하여 페코스로 옮겼다. 좁은 구축함의 한계까지 수용하는 바람에 복도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있어야 했던 랭글리의 생존자들은 보다 넓은 페코스로 옮겨서 발을 뻗을 수 있게 되자 환호성을 질렀다.
생존자를 옮겨실은 후 3척은 헤어졌다. 휘플은 서쪽에 있는 코코스제도로 가서 영국급유함 비숍데일로부터 급유를 받기로 했다. 엣솔은 32명의 전투기 조종사를 칠라찹에 내 려주기 위하여 북상했다. 페코스는 호주의 프리맨틀을 향하여 160도 방향으로 남하했다.
3월 1일 오전 10시에 페코스의 좌현 뒷쪽에서 일본기가 나타났다. 페코스는 최고속력인 14.6노트로 올리면서 5인치 양용포 2문으로 사격을 가했으나 적기는 사정거리 밖에 서 2번 선회하고는 사라졌다. 적기는 함재기였다. 자바 남쪽 해상에 일본항모기동부대가 활동 중이라는 정보는 사실이었다.
애버네시 중령은 함교에 있던 랭글리 함장 멕코넬 중령과 상의한 후 서쪽인 225도로 변침하여 30분간 항진하다가 다시 남쪽으로 변침했다. 일본기가 날아왔을 때 예상위치보 다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으려는 생각이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나구모 제독의 기동부대는 페코스에서 불과 150km 떨어져 있었다. 오전9시 55분에 견시가 네덜란드상선 모조케르토를 발견하자 치쿠마에게 격침명령이 떨어졌다. 치쿠마가 접근하여 포격을 가했으나 철갑탄이 상선의 얇은 선체를 뚫고 지나가 버렸다. 화가 치민 함장 고무라 게이조 대좌가 어뢰를 발사하여 격침했다가 나구모 제독으로부터 비전투 함을 상대로 귀중한 어뢰를 낭비했다는 질책을 들었다.
3월 1일 오전 10시 30분, 주변에 적의 특별한 지원함이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카가에서 와타나베 도시오 중위가 지휘하는 99식 함상폭격기 6대가 250kg 짜리 폭탄을 달 고 이함하여 오전 11시 45분에 페코스 상공에 도착했다. 하늘에는 조각구름만이 떠 있을 뿐 화창하여 폭격에는 이상적인 날씨였다.
아이치 D3A 99식함상폭격기(Aichi D3A Type 99 Carrier Bomber)
https://en.wikipedia.org/wiki/Aichi_D3A
일본기들은 5,000m 상공에서 선회하다가 1대씩 급강하하여 450m 높이에서 폭탄을 분리했다. 페코스는 5인치 양용포, 40mm 대공포, 20mm 기관포, 50구경 및 30구경 기관총, 브라우닝 자동소총, 45구경 콜트권총 등 모든 화기를 발사하며 저항했으며 흥분한 승조원 일부는 감자를 던졌다. 첫번째 폭탄은 좌현 후방 부근에 떨어졌다. 이 지근탄 은 침수를 일으켜 페코스는 좌현으로 8도 기울었다. 두번째 폭탄은 우현 함수쪽으로 빗나갔다. 야마가와 신사쿠 소위가 투하한 3번째 폭탄은 우현 대공포좌 부근에 명중하여 포수를 대부분 죽였으나 대공포 자체는 멀쩡했다. 이 폭발로 기름탱크 4개가 부서지고 화재가 일어났다. 소화주관과 송유관이 망가졌으며 통신기도 충격을 받아 고장났다. 나 머지 3대가 이어서 폭격했으나 애버네시 중령은 교묘한 조함으로 모두 피했다. 일본기 중 격추된 비행기는 없었으나 6대중 4대가 피해를 입었다.
이 정도면 첫번째 공격은 잘 막아낸 셈이었다. 보수반이 역침수를 실시하여 함정의 기울기를 바로잡았고 화재도 진압했다. 고장났던 통신기도 고쳤고 대공포에는 새 인원이 배 치되었다. 오후 12시 27분에 페코스는 적의 공습을 받고 있다는 구조요청을 방송했으나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다.
오후 1시에 이케다 마시 중위가 이끄는 소류의 99식함상폭격기 6대가 나타났다. 페코스는 가용한 모든 화력으로 반격을 가했고 애버네시 중령은 교묘한 조함으로 이카다 중위의 첫번째 폭탄을 피했다. 그러나 침수와 역침수로 수백톤의 물을 머금은 페코스는 움직임이 둔해져 연달아 명중탄을 맞았다. 2번째 폭탄은 함교 전방 우현에 떨어져 폭발의 충격으로 함교의 유리창이 모두 깨졌다. 3번째 폭탄은 전방마스트를 관통한 후 배 중앙의 기름탱크에 명중하여 무선안테나를 부수고 중앙 격벽을 무너뜨렸다. 4번째 폭탄은 빗나 갔으나 5번째 폭탄이 5인치 양용포 사이에 떨어져 양쪽 포대의 포수들을 죽였다. 오후 1시 30분에 떨어진 마지막 폭탄은 지근탄이었는데 명중탄 못지않은 피해를 입혔다. 좌 현 후방 부근에 떨어진 폭탄의 충격으로 함체의 철판이 벌어져 바닷물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함이 왼쪽으로 15도 기울었다. 또한 보일러 2개의 불이 꺼지면서 속력이 10노트로 줄어들었다. 페코스는 2번째 폭격이 진행되던 오후 1시 24분에 다시 구조요청을 타전했으나 역시 반응이 없었다.
2번째 폭격이 끝난 직후 커다란 비극이 일어났다. 48시간 내로 2번에 걸친 심한 폭격을 받아 정신적으로 짓눌린 랭글리의 생존자 일부가 평정을 잃었다. 생존자 사이에서 퇴함 명령이 내려졌다는 헛소문이 떠돌더니 급기야 일부가 아무런 명령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구명정 2척을 내리고 뗏목을 띄워 배를 떠났다. 사람이 가득 들어찬 구명정 1척은 하 필이면 배가 기울면서 수면 밖으로 드러난 페코스의 오른쪽 프로펠러에 정통으로 갈리면서 탑승자들이 몰살당했다. 이때 페코스를 떠난 약 100명은 모두 죽거나 실종되었다.
어쨌든 페코스는 이번에도 살아남았다. 보일러의 불을 다시 붙이자 속력은 12노트로 올랐고 보수반은 다시 역침수를 실시하여 기울기를 10도로 줄였다. 하지만 침몰을 예상한 애버네티 중령은 승조원에게 물에 뜨는 것들을 전부 꺼내어 노천갑판에 쌓아 두라고 명령했다. 통신요원들은 랭글리의 통신요원들과 힘을 합쳐 다시 통신기를 복구하는데 성공했다. 페코스는 오후 2시 14분과 28분에 다시 구조요청을 방송했으나 역시 대답은 없었다.
오후 2시 45분에 치하야 다케히코 중위가 지휘하는 아카기의 99식함상폭격기 9대와 시모다 이치로 중위가 지휘하는 히류의 99식함상폭격기 9대가 나타났다. 오후 2시 50분 에 히류의 함상폭격기 9대가 한꺼번에 공격했다. 페코스는 가용한 모든 화력을 집중하여 맞섰고 애버네티 중령은 교묘한 조함으로 놀랍게도 9발을 모두 피했다. 명중탄은 없었 으며 지근탄 2발로 인하여 통신기가 다시 고장났으나 곧 고쳤다. 페코스의 대공포는 히류의 함폭 4대에 피해를 입혔으나 격추시키지는 못했다.
3월 1일 오후 3시에 아카기의 함상폭격기들이 마지막 공격을 실시했다. 아카기의 함폭들도 히류의 함폭과 마찬가지로 9대가 한꺼번에 공격했다. 이번에도 애버네시 중령의 조함술 덕분에 페코스는 1발도 맞지 않았으나 7번째와 8번째로 떨어진 지근탄 2발에 결정적인 피해를 입었다. 7번째 폭탄은 물밖으로 일부가 드러난 오른쪽 프로펠러 부근에서 폭발하여 프로펠러와 기관실에 큰 충격을 주었다. 8번째 폭탄이 치명타였다. 왼쪽 함수 부근에서 폭발한 수압으로 수선하 함체의 철판이 벌어지면서 걷잡을 수 없는 침수가 일 어났다. 페코스는 함수부터 가라앉기 시작했다.
오후 3시 30분에 애버네시 중령은 퇴함명령을 내렸다. 동시에 통신실에서는 구조요청을 방송했으며 38분에 마지막 요청을 타전했다. 역시 반응이 없었으나 의미는 있었다.
페코스의 승조원들은 구명정을 내리고 대나무로 만든 뗏목을 포함하여 물에 뜨는 것들을 바다에 던진 다음 퇴함했다. 페코스는 오후 3시 48분에 함수부터 침몰했다. 일본기들 은 저공으로 내려와 해상의 무력한 조난자들에게 기총소사를 가하다가 연료가 떨어지자 돌아갔다.
퇴함 직후부터 페코스의 조난자들은 북서쪽에서 전투가 있음을 알리는 여러번의 폭음을 들었다. 오후 7시 10분에 수평선상에 희미한 작은 함영이 나타나더니 점점 다가왔다. 긴장하여 지켜보던 조난자들은 미국구축함임을 확인하자 환성을 질렀다. 휘플이었다.
3월 1일 아침에 페코스와 헤어져 코코스 제도로 향했던 휘플은 오후 1시 24분에 구조요청을 들었을 때 페코스로부터 서쪽으로 90km 정도 떨어져 있었다. 이후 구조요청이 이 어졌으나 페코스의 통신기가 충격에 의하여 작동이 원활하지 못해 휘플이 받은 모스 부호는 단편적이었다. 물론 휘플에 승좌하고 있던 제57구축함분대장 에드윈 크라우치 중 령은 단편적인 통신만 보고도 페코스가 공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으나 바로 달려갔다가는 휘플마저 가라앉을 것이었다. 결국 오후 3시 30분에 페코스의 침몰 위치 와 함께 퇴함명령이 내려졌다는 통신을 받자 19노트의 속력으로 서쪽으로 향했다. 그럴 경우 현장에 도착하면 해가 질 터이니 공습받을 일은 없을 것이었다.
휘플은 오후 7시 16분부터 구조작업에 돌입했으나 2시간이 지난 오후 9시 41분에 음탐병이 잠수함을 탐지했다. 휘플은 구조를 중단하고 속력을 올렸으며 48분에 폭뢰 2발 을 떨어뜨렸다. 오후 9시 52분에 휘플은 구조작업을 재개했으나 58분에 다시 잠수함을 탐지하고 4발의 폭뢰를 투하했다. 이 시점에서 크라우치 중령은 힘든 결단을 내려야 했 다. 적의 잠수함이 호시탐탐 노리는 해역에서 구조작업을 계속할 수는 없었으며 자칫하면 휘플마저 격침될 수 있었다. 크라우치 중령은 이미 구조한 랭글리의 함장 맥코넬 중령 및 페코스의 함장 애버네시 중령과 상의한 뒤 구조작업을 중단하고 프리맨틀로 철수했다. 450명 이상이 밤바다에 남겨졌으며 이들은 모두 실종되었다. 일본측에는 당시 잠수 함의 행적에 관한 기록이 없으나 현장에 일본잠수함이 있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페코스의 침몰로 인한 희생자의 숫자에는 논란이 있다. 페코스의 승조원은 125명이지만 칠라찹에서 환자 30명을 포함하여 스튜어트, 마블헤드, 그리고 휴스턴의 승조원 147 명이 승함하여 출항 당시 탑승자는 272명이었다. 이후 3월 1일 새벽에 휘플과 엣솔로부터 랭글리의 조난자 400명 이상을 받아들였는데 정확한 숫자는 불명이다. 3월 1일 저 녁에 휘플이 구조한 숫자는 233명이다. 미해군은 칠라찹 출항 이후 페코스가 받아들인 인원을 417명으로 보고 페코스의 침몰로 인한 전사 및 실종자를 456명으로 확정했다. 그러나 많은 생존자들은 랭글리에서 휘플과 엣솔을 거쳐 페코스로 옮겨탄 조난자가 430명이 넘으며 따라서 전사 및 실종자 수는 500명에 가깝다고 주장했다.
만일 휘플만이 아니라 엣솔도 구조하러 달려왔다면 페코스의 전사 및 실종자 수는 크게 줄어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엣솔은 달려올 수 없었다.
출처: http://blog.naver.com/imkcs0425/221349583468
36. 페코스 침몰
아시아 함대의 유일한 급유함인 페코스는 1942년 2월 초부터 칠라찹에서 연합군 함정에 급유해 주고 있었다. 일본군이 발리를 점령하자 함장 엘머 애버네시 중령은 페코스가 항내에 머무르면 위험하며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항구를 벗어나서도 일정 해역에 머무르면서 급유하는데는 지장이 없었다. 글래스포드 제독도 찬성했으나 네덜란 드군이 반대하여 페코스는 계속 항내에 머물러야 했다. 2월 25일에 플로레스해에서 부상을 입고 욕야카르타의 군병원에서 치료 중이던 휴스턴과 마블헤드의 부상병 30명을 포함하여 147명이 페코스에 승함했다.
카나와급 급유함 AO-6 페코스.
(USS Pecos (AO-6) off Chefoo, China, on 14 September 1928 (NH 65021).)
https://en.wikipedia.org/wiki/USS_Pecos_(AO-6)
페코스는 2월 27일 아침에 실론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고 패럿의 호위를 받으면서 칠라찹을 떠났다. 발리의 덴파사르 비행장에 전개한 일본기와 더불어 일본항모기동부대도 자 바 남쪽 해상에서 활동 중이었으므로 애버네시 중령은 출항하기 전에 승조원들에게 대나무를 구해오게 한 다음 뗏목을 여러개 만들어 갑판에 쌓아두었다. 또한 출항하자 견시 를 2배로 늘리고 모든 수밀문을 닫았으며 기름탱크에는 수증기를 불어넣어 유증기를 제거함으로써 화재나 유폭위험을 줄였다.
출항한지 몇시간 후에 페코스는 동쪽으로 60km 떨어져 있던 랭글리의 구조요청을 들었다. 뚱뚱한 급유함이 달려가 봐야 적의 전과만 올려주는 셈이었으므로 페코스는 서쪽으 로 도망쳤다.
그 직후 페코스는 크리스마스섬 북쪽에 있는 플라잉피시만으로 가서 휘플과 엣솔로부터 랭글리의 생존자를 넘겨받은 다음 호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페코스를 호위하 던 패럿은 떨어져 나와 포장된 P-40전투기 27대를 실은 수송선 시위치를 호위하여 칠라찹으로 갔다.
페코스에 앞서 플라잉피시만에 도착한 휘플과 엣솔은 그곳에 있던 인산염 채굴회사의 보트를 사용하여 랭글리의 생존자 중 조종사 32명을 모두 엣솔로 모았다. 엣솔은 이들을 싣고 칠라찹으로 갈 예정이었다. 잠시후 페코스가 도착하자 생존자를 옮겨싣는 절차를 논의하기 위하여 랭글리의 토머스 도노반 소령이 채굴회사의 도선사와 함께 보트를 타고 페코스로 갔다. 페코스에 도착 한 직후 보트의 밧줄이 페코스의 프로펠러에 걸렸다. 수십분간 씨름하다가 마침내 밧줄을 푼 순간 수마트라 방향으로부터 일본군의 육상공격기 3대가 나타났다. 일본기들 은 폭탄 6발을 부두에 떨어뜨린 후에 페코스 상공을 저공비행하면서 살펴보고는 사라졌다.
휘플에 승좌하고 있던 제57구축함분대장 에드윈 크라우치 중령은 공습이 임박했음을 알았다. 그의 명령에 따라 페코스, 휘플, 엣솔은 즉시 만을 빠져나가 남쪽에서 접근 중이 던 스콜을 향해 달렸다. 보트에 있던 도선사는 마지막 순간 페코스의 줄사다리를 잡고 옮겨탔으나 도노반 소령은 보트에 탄채 뒤에 남았다. 낙오된 도노반 소령은 결국 크리스 마스섬 함락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
스콜 속에 30분간 숨었던 페코스와 구축함 2척은 이후 남하했다. 3월 1일 새벽 4시 25분부터 3시간 동안 휘플과 엣솔에 수용중이던 400명이 넘는 랭글리의 생존자들이 구명 정을 이용하여 페코스로 옮겼다. 좁은 구축함의 한계까지 수용하는 바람에 복도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있어야 했던 랭글리의 생존자들은 보다 넓은 페코스로 옮겨서 발을 뻗을 수 있게 되자 환호성을 질렀다.
생존자를 옮겨실은 후 3척은 헤어졌다. 휘플은 서쪽에 있는 코코스제도로 가서 영국급유함 비숍데일로부터 급유를 받기로 했다. 엣솔은 32명의 전투기 조종사를 칠라찹에 내 려주기 위하여 북상했다. 페코스는 호주의 프리맨틀을 향하여 160도 방향으로 남하했다.
3월 1일 오전 10시에 페코스의 좌현 뒷쪽에서 일본기가 나타났다. 페코스는 최고속력인 14.6노트로 올리면서 5인치 양용포 2문으로 사격을 가했으나 적기는 사정거리 밖에 서 2번 선회하고는 사라졌다. 적기는 함재기였다. 자바 남쪽 해상에 일본항모기동부대가 활동 중이라는 정보는 사실이었다.
애버네시 중령은 함교에 있던 랭글리 함장 멕코넬 중령과 상의한 후 서쪽인 225도로 변침하여 30분간 항진하다가 다시 남쪽으로 변침했다. 일본기가 날아왔을 때 예상위치보 다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으려는 생각이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나구모 제독의 기동부대는 페코스에서 불과 150km 떨어져 있었다. 오전9시 55분에 견시가 네덜란드상선 모조케르토를 발견하자 치쿠마에게 격침명령이 떨어졌다. 치쿠마가 접근하여 포격을 가했으나 철갑탄이 상선의 얇은 선체를 뚫고 지나가 버렸다. 화가 치민 함장 고무라 게이조 대좌가 어뢰를 발사하여 격침했다가 나구모 제독으로부터 비전투 함을 상대로 귀중한 어뢰를 낭비했다는 질책을 들었다.
3월 1일 오전 10시 30분, 주변에 적의 특별한 지원함이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카가에서 와타나베 도시오 중위가 지휘하는 99식 함상폭격기 6대가 250kg 짜리 폭탄을 달 고 이함하여 오전 11시 45분에 페코스 상공에 도착했다. 하늘에는 조각구름만이 떠 있을 뿐 화창하여 폭격에는 이상적인 날씨였다.
아이치 D3A 99식함상폭격기(Aichi D3A Type 99 Carrier Bomber)
https://en.wikipedia.org/wiki/Aichi_D3A
일본기들은 5,000m 상공에서 선회하다가 1대씩 급강하하여 450m 높이에서 폭탄을 분리했다. 페코스는 5인치 양용포, 40mm 대공포, 20mm 기관포, 50구경 및 30구경 기관총, 브라우닝 자동소총, 45구경 콜트권총 등 모든 화기를 발사하며 저항했으며 흥분한 승조원 일부는 감자를 던졌다. 첫번째 폭탄은 좌현 후방 부근에 떨어졌다. 이 지근탄 은 침수를 일으켜 페코스는 좌현으로 8도 기울었다. 두번째 폭탄은 우현 함수쪽으로 빗나갔다. 야마가와 신사쿠 소위가 투하한 3번째 폭탄은 우현 대공포좌 부근에 명중하여 포수를 대부분 죽였으나 대공포 자체는 멀쩡했다. 이 폭발로 기름탱크 4개가 부서지고 화재가 일어났다. 소화주관과 송유관이 망가졌으며 통신기도 충격을 받아 고장났다. 나 머지 3대가 이어서 폭격했으나 애버네시 중령은 교묘한 조함으로 모두 피했다. 일본기 중 격추된 비행기는 없었으나 6대중 4대가 피해를 입었다.
이 정도면 첫번째 공격은 잘 막아낸 셈이었다. 보수반이 역침수를 실시하여 함정의 기울기를 바로잡았고 화재도 진압했다. 고장났던 통신기도 고쳤고 대공포에는 새 인원이 배 치되었다. 오후 12시 27분에 페코스는 적의 공습을 받고 있다는 구조요청을 방송했으나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다.
오후 1시에 이케다 마시 중위가 이끄는 소류의 99식함상폭격기 6대가 나타났다. 페코스는 가용한 모든 화력으로 반격을 가했고 애버네시 중령은 교묘한 조함으로 이카다 중위의 첫번째 폭탄을 피했다. 그러나 침수와 역침수로 수백톤의 물을 머금은 페코스는 움직임이 둔해져 연달아 명중탄을 맞았다. 2번째 폭탄은 함교 전방 우현에 떨어져 폭발의 충격으로 함교의 유리창이 모두 깨졌다. 3번째 폭탄은 전방마스트를 관통한 후 배 중앙의 기름탱크에 명중하여 무선안테나를 부수고 중앙 격벽을 무너뜨렸다. 4번째 폭탄은 빗나 갔으나 5번째 폭탄이 5인치 양용포 사이에 떨어져 양쪽 포대의 포수들을 죽였다. 오후 1시 30분에 떨어진 마지막 폭탄은 지근탄이었는데 명중탄 못지않은 피해를 입혔다. 좌 현 후방 부근에 떨어진 폭탄의 충격으로 함체의 철판이 벌어져 바닷물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함이 왼쪽으로 15도 기울었다. 또한 보일러 2개의 불이 꺼지면서 속력이 10노트로 줄어들었다. 페코스는 2번째 폭격이 진행되던 오후 1시 24분에 다시 구조요청을 타전했으나 역시 반응이 없었다.
2번째 폭격이 끝난 직후 커다란 비극이 일어났다. 48시간 내로 2번에 걸친 심한 폭격을 받아 정신적으로 짓눌린 랭글리의 생존자 일부가 평정을 잃었다. 생존자 사이에서 퇴함 명령이 내려졌다는 헛소문이 떠돌더니 급기야 일부가 아무런 명령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구명정 2척을 내리고 뗏목을 띄워 배를 떠났다. 사람이 가득 들어찬 구명정 1척은 하 필이면 배가 기울면서 수면 밖으로 드러난 페코스의 오른쪽 프로펠러에 정통으로 갈리면서 탑승자들이 몰살당했다. 이때 페코스를 떠난 약 100명은 모두 죽거나 실종되었다.
어쨌든 페코스는 이번에도 살아남았다. 보일러의 불을 다시 붙이자 속력은 12노트로 올랐고 보수반은 다시 역침수를 실시하여 기울기를 10도로 줄였다. 하지만 침몰을 예상한 애버네티 중령은 승조원에게 물에 뜨는 것들을 전부 꺼내어 노천갑판에 쌓아 두라고 명령했다. 통신요원들은 랭글리의 통신요원들과 힘을 합쳐 다시 통신기를 복구하는데 성공했다. 페코스는 오후 2시 14분과 28분에 다시 구조요청을 방송했으나 역시 대답은 없었다.
오후 2시 45분에 치하야 다케히코 중위가 지휘하는 아카기의 99식함상폭격기 9대와 시모다 이치로 중위가 지휘하는 히류의 99식함상폭격기 9대가 나타났다. 오후 2시 50분 에 히류의 함상폭격기 9대가 한꺼번에 공격했다. 페코스는 가용한 모든 화력을 집중하여 맞섰고 애버네티 중령은 교묘한 조함으로 놀랍게도 9발을 모두 피했다. 명중탄은 없었 으며 지근탄 2발로 인하여 통신기가 다시 고장났으나 곧 고쳤다. 페코스의 대공포는 히류의 함폭 4대에 피해를 입혔으나 격추시키지는 못했다.
3월 1일 오후 3시에 아카기의 함상폭격기들이 마지막 공격을 실시했다. 아카기의 함폭들도 히류의 함폭과 마찬가지로 9대가 한꺼번에 공격했다. 이번에도 애버네시 중령의 조함술 덕분에 페코스는 1발도 맞지 않았으나 7번째와 8번째로 떨어진 지근탄 2발에 결정적인 피해를 입었다. 7번째 폭탄은 물밖으로 일부가 드러난 오른쪽 프로펠러 부근에서 폭발하여 프로펠러와 기관실에 큰 충격을 주었다. 8번째 폭탄이 치명타였다. 왼쪽 함수 부근에서 폭발한 수압으로 수선하 함체의 철판이 벌어지면서 걷잡을 수 없는 침수가 일 어났다. 페코스는 함수부터 가라앉기 시작했다.
오후 3시 30분에 애버네시 중령은 퇴함명령을 내렸다. 동시에 통신실에서는 구조요청을 방송했으며 38분에 마지막 요청을 타전했다. 역시 반응이 없었으나 의미는 있었다.
페코스의 승조원들은 구명정을 내리고 대나무로 만든 뗏목을 포함하여 물에 뜨는 것들을 바다에 던진 다음 퇴함했다. 페코스는 오후 3시 48분에 함수부터 침몰했다. 일본기들 은 저공으로 내려와 해상의 무력한 조난자들에게 기총소사를 가하다가 연료가 떨어지자 돌아갔다.
퇴함 직후부터 페코스의 조난자들은 북서쪽에서 전투가 있음을 알리는 여러번의 폭음을 들었다. 오후 7시 10분에 수평선상에 희미한 작은 함영이 나타나더니 점점 다가왔다. 긴장하여 지켜보던 조난자들은 미국구축함임을 확인하자 환성을 질렀다. 휘플이었다.
3월 1일 아침에 페코스와 헤어져 코코스 제도로 향했던 휘플은 오후 1시 24분에 구조요청을 들었을 때 페코스로부터 서쪽으로 90km 정도 떨어져 있었다. 이후 구조요청이 이 어졌으나 페코스의 통신기가 충격에 의하여 작동이 원활하지 못해 휘플이 받은 모스 부호는 단편적이었다. 물론 휘플에 승좌하고 있던 제57구축함분대장 에드윈 크라우치 중 령은 단편적인 통신만 보고도 페코스가 공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으나 바로 달려갔다가는 휘플마저 가라앉을 것이었다. 결국 오후 3시 30분에 페코스의 침몰 위치 와 함께 퇴함명령이 내려졌다는 통신을 받자 19노트의 속력으로 서쪽으로 향했다. 그럴 경우 현장에 도착하면 해가 질 터이니 공습받을 일은 없을 것이었다.
휘플은 오후 7시 16분부터 구조작업에 돌입했으나 2시간이 지난 오후 9시 41분에 음탐병이 잠수함을 탐지했다. 휘플은 구조를 중단하고 속력을 올렸으며 48분에 폭뢰 2발 을 떨어뜨렸다. 오후 9시 52분에 휘플은 구조작업을 재개했으나 58분에 다시 잠수함을 탐지하고 4발의 폭뢰를 투하했다. 이 시점에서 크라우치 중령은 힘든 결단을 내려야 했 다. 적의 잠수함이 호시탐탐 노리는 해역에서 구조작업을 계속할 수는 없었으며 자칫하면 휘플마저 격침될 수 있었다. 크라우치 중령은 이미 구조한 랭글리의 함장 맥코넬 중령 및 페코스의 함장 애버네시 중령과 상의한 뒤 구조작업을 중단하고 프리맨틀로 철수했다. 450명 이상이 밤바다에 남겨졌으며 이들은 모두 실종되었다. 일본측에는 당시 잠수 함의 행적에 관한 기록이 없으나 현장에 일본잠수함이 있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페코스의 침몰로 인한 희생자의 숫자에는 논란이 있다. 페코스의 승조원은 125명이지만 칠라찹에서 환자 30명을 포함하여 스튜어트, 마블헤드, 그리고 휴스턴의 승조원 147 명이 승함하여 출항 당시 탑승자는 272명이었다. 이후 3월 1일 새벽에 휘플과 엣솔로부터 랭글리의 조난자 400명 이상을 받아들였는데 정확한 숫자는 불명이다. 3월 1일 저 녁에 휘플이 구조한 숫자는 233명이다. 미해군은 칠라찹 출항 이후 페코스가 받아들인 인원을 417명으로 보고 페코스의 침몰로 인한 전사 및 실종자를 456명으로 확정했다. 그러나 많은 생존자들은 랭글리에서 휘플과 엣솔을 거쳐 페코스로 옮겨탄 조난자가 430명이 넘으며 따라서 전사 및 실종자 수는 500명에 가깝다고 주장했다.
만일 휘플만이 아니라 엣솔도 구조하러 달려왔다면 페코스의 전사 및 실종자 수는 크게 줄어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엣솔은 달려올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