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2월 28일 저녁부터 3월 1일 새벽까지 동남아시아의 미해군을 지휘하던 글래스포드 제독은 헬프리히 제독의 참모장인 동시에 영국해군을 지휘하던 팔리서 제독과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전선에서는 암울한 보고가 계속 들어왔다. 일본군은 서부 자바의 여러 지점과 동부 자바의 크라간에 상륙했다. 일본의 항모기동부대는 자바 남쪽 해상에서 작전 중이었으며 유일하게 기능을 발휘하고 있는 연합군 항구인 칠라찹에 대한 공습이 임박했다. 3월 1일에는 공습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칠라찹의 상선들은 27일부터 출항을 시작했고 미국함정들은 28일 정오에 모두 출항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일본잠수함들은 칠라찹 남쪽 해상에 잠복하고 있었다. 자바를 구할 방법은 없었다. 최선의 방책은 일본군이 탈출구를 완전히 막아버리기 전에 최대한 많은 병력을 철수시켜 훗날 다른 곳에서 싸움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하는 일뿐이었다.
하지만 헬프리히 제독은 칠라찹의 상선들은 출항을 명령하면서도 전투함정에게는 칠라찹으로 모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는 '마지막 한명까지' 싸울 작정이었다. 헬프리히의 '마지막 한명까지'가 네덜란드군을 말한다면 어리석은 비극이기는 하지만 그의 권리였다. 하지만 헬프리히의 '마지막 한명까지'에는 미군, 영국군, 그리고 호주군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글래스포드와 팔리서는 헬프리히에 맞서 미군과 영국군의 철수를 관철시키기로 합의했다.
연합국 해군의 불쾌한 마지막 회의는 3월 1일 오전 9시에 반둥에 있는 헬프리히의 사령부에서 시작되었다. 참모장 팔리서 제독은 밤새 들어온 암울한 소식을 나열한 다음 헬프리히에게 살아남은 수상함들은 즉시 호주와 인도로 보내야한다고 건의했다. 예상대로 헬프리히 제독은 거부했다. 그는 현재 잠수함들을 자바해로 모았다면서 잠수함에다가 칠라찹의 수상함 세력을 합쳐 후속하는 일본선단을 타격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미 일본군 주력이 자바에 상륙한 상황에서 후속선단을 타격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마침내 팔리서 제독이 폭탄선언을 했다. "저는 (영국)해군성으로부터 저항이 의미없어졌을 때 영국함정들을 자바로부터 철수시키라는 명령을 받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이 그때라고 생각하며 따라서 영국함정에게 인도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것이 제 의무라고 느낀다는 사실을 제독님께 통고하는 바입니다."
책상에 앉아있는 아서 팔리서 제독
아서 팔리서 제독. 왼쪽에 뒷짐진 사람이다. 중앙에 손을 앞으로 모은 사람은 영국동양함대 총사령관 토머스 필립스 제독(IWM FE 487 Admirals Phillips and Palliser)
http s://en.wikipedia.org/wiki/Arthur_Palliser
헬프리히 제독은 충격을 받은 듯 당신이 내 부하라는 사실을 알고 있느냐고 반문했다. 팔리서는 당연히 알고 있지만 지금은 해군성으로부터 받은 명령이 우선이라고 대답했다. 헬프리히는 반격했다.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말레이가 위협받을 때 내 순양함, 구축함, 잠수함, 그리고 비행기를 제공하여 당신네 영국인들이 마음대로 쓸 수 있게 해 주었소. 그 결과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 그러고도 당신네는 말레이를 잃어서 이제 싱가포르는 적의 수중에 있소. 당신네는 실패했소. 이제 가장 현명한 방책은 이 상황을 나에게 맡겨 자바를 구하는 거요."
콘라트 헬프리히 제독(Luitenant-admiraal Helfrich (1946)).
https://en.wikipedia.org/wiki/Conrad_Helfrich
팔리서 제독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비록 마지막 말은 터무니없는 소리였지만 앞의 내용은 대부분 진실이었다. 영국은 말레이 방어를 위하여 네덜란드에 도움을 청했고 네덜란드는 성실하게 응했다. 그러고도 말레이와 싱가포르를 잃은 것 또한 어쨌든 사실이었다. 이제 네덜란드가 자바를 구하기 위하여 도움을 청하는데 영국은 거부하고 있었 다. 헬프리히를 비롯한 네덜란드인의 입장에서는 영국에게 실컷 이용만 당하고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죄책감으로 물러서기에는 현실이 너무 엄중했다. 팔리서 제독은 마음을 다잡고 어쨌든 결심을 바꿀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헬프리히는 총독과 상의할 수 있도 록 1시간만 기다려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시간을 끌어 유야무야시킬 생각임을 알고 있는 팔리서 제독은 거부했다.
헬프리히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글래스포드 제독을 돌아보면서 당신은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물었다. 정치적인 글래스포드는 말을 빙빙 돌리면서 팔리서 제독과 같은 생각임을 밝혔다.
"제 의무는 제독님의 명령을 받드는 것이며 어떤 명령이든 즉시 실행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 생각으로는 참모장의 의견을 따르는 것 이외의 길은 없어 보입니다. 저는 (미국의) 해군참모총장으로부터 자바를 포기할 때가 되면 함정들을 호주로 철수시키라는 명령을 받고 있습니다만 자바 포기는 제독님이 결정하실 일입니다."
윌리엄 글래스포드 제독(VADM William A. Glassford).
https://en.wikipedia.org/wiki/William_A._Glassford
헬프리히 제독은 잠시 생각해 본 후 글래스포드 제독의 말에 담긴 속뜻을 깨닫게 되자 마침내 항복했다. 그는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감정에 휩쓸리는 단점이 있었으나 멍청하 지는 않았다.
"좋습니다. 팔리서 제독, 영국함정에게 필요한 명령을 내리세요. 글래스포드 제독, 당신은 미국함정에게 호주로 가라는 명령을 내리세요."
회의는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끝났다. 글래스포드 제독은 전날 정오에 출항명령을 받고 칠라찹을 떠난 미국함정들에게 집결점을 거쳐 호주로 가라고 명령했다. 집결점은 자 바와 호주 북서해안의 중간인 남위 15도, 동경 113도 지점이었는데 여기에 먼저 도착한 함정이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이곳은 경유지이며 비슷한 시간에 이곳을 통과하면서 만난 함정들은 필요에 따라 같이 행동할 수도 있었고 따로 갈수도 있었다. 목적지는 호주 서해안의 엑스마우스만이었으나 나중에 프레맨틀로 바뀌었다. 팔리서 제독도 호주로 가는 영국함정들은 같은 집결점을 통과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며 콜린스 제독에게는 바타비아를 떠나라는 전갈을 보냈다. 헬프리히 제독은 잠수함을 제외한 모든 네덜란드 함정 에게 콜롬보로 가라는 명령을 내렸다. 칠라찹에 있던 50척에 가까운 상선들은 27일과 28일에 대부분 출항했다.
회의를 마친 헬프리히 제독은 오전 9시 30분에 총독을 찾아 30분간 협의한 후 3월 1일 오전 10시에 자바의 연합해군사령부를 공식적으로 해체한다는 마지막 명령을 발했다. 오전 10시 30분에 헬프리히 제독은 글래스포드 제독을 찾아와 총독과 자신의 명의로 자바 방어에 대한 미해군의 헌신적인 지원에 감사를 표한 다음 글래스포드에게 즉시 자바 를 떠날 것을 권고했다. 같은 시각에 팔리서 제독도 같은 내용의 전문을 받았다.
오전 11시에 글래스포드 제독은 반둥에서의 마지막 명령을 타전했다. 이 명령에 따라 호주의 프레맨틀에 정박중인 잠수모함 홀랜드 함상의 퍼넬 제독이 글래스포드가 도착할 때까지 지휘권을 행사했다. 글래스포드와 참모들은 암호책, 통신기, 그리고 서류들을 파기한 다음 자동차를 타고 칠라찹으로 달렸다. 팔리서 제독은 한발 앞서 칠라찹으로 떠났다.
2월 28일 정오에 내려진 글래스포드의 철수 명령은 중순양함 휴스턴, 경순양함 피닉스, 구축함 포프, 휘플, 엣솔, 필즈베리, 패럿, 잠수모함 오터스, 포함 애슈빌, 털사, 라니카 이, 이저벨, 그리고 소해함 휘푸어윌과 라크에게 발신되었다. 가장 먼저 칠라찹을 출항한 것은 휘푸어윌, 라크, 이저벨, 그리고 라니카이로 이루어진 선단으로 패럿이 호위했다.
수라바야를 기지로 삼아 활동하던 제10정찰비행단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카탈리나들은 적의 공격에 노출된 수라바야를 떠나 칠라찹으로 이동했다. 그들은 칠라찹에서 미군 고 위장교들을 태우고 수상기모함 차일드가 정박중인 호주의 엑스마우스만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호프먼 소위와 놀런 소위가 조종하는 카탈리나 P-5는 글래스포드 제독 일행을 태우고 엑스마우스만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뒤에는 팔리서 제독 일행을 태울 카탈리나 1대 가 뒤따르고 있었다. 호프먼 소위가 3월 1일 저녁에 칠라찹 상공에 도달하여 본 광경은 혼란 그 자체였다. 부두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려 탈출할 배를 찾고 있었으며 수많은 배들이 아슬아슬하게 충돌을 피하면서 항구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지상에서는 이따금씩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으며 공기 중에는 매연이 가득했다.
카탈리나 2대는 상대적으로 조용한 수상기기지 부근에 착수하여 연료보급소로 갔다. 연료보급소 바로 뒤의 기름탱크는 무섭게 불타오르고 있었으나 보급소를 지키던 네덜란 드 장교는 혼란에 이미 익숙해진 듯 평소처럼 심드렁한 표정으로 연료를 채워 주었다.
3월 1일 오전에 반둥을 떠난 글래스포드 제독 일행은 길이 막히는 바람에 자정이 가까워서야 칠라찹에 도착하여 카탈리나 P-5에 올라탔다. 미리 도착해 있던 팔리서 일행은 다 른 카탈리나에 올라탔다. 카탈리나 2대는 조심스럽게 항구를 빠져나간 후 이수하여 2일 아침에 호주의 엑스마우스만에 도착했다. 엑스마우스만에 도착한 글래스포드 제독은 이곳이 정박지로서 여건이 나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글래스포드 제독은 자바를 탈출하는 함정들에게 엑스마우스만이 아니라 프레맨틀로 가라고 명령했다.
헬프리히 제독도 런던에 있는 네덜란드망명정부의 명령에 따라 자바를 탈출했다. 그는 3월 1일에 참모들과 함께 차량으로 가루트 북쪽의 바겐딧 호수로 갔으며 그곳에서 제16 비행전대의 카탈리나 Y-56을 타고 콜롬보로 날아갔다. 부총독 휴버투스 반 무크도 다른 카탈리나를 타고 뒤를 따랐으며 도먼 제독의 미망인과 아들도 동행했다. 콜롬보에 도 착한 헬프리히 제독은 3월 3일에 25명의 참모들과 함께 잠수모함 컬럼비아 함상에 임시로 사령부를 차렸다. ABDAFLOAT 네덜란드해군사령관 요한 반 스타베렌 소장과 자바 해군항공대사령관 제라드 보주와 대령은 카탈리나를 놓치고 자바 남서해안의 윙쿠프만으로 가서 네덜란드 상선 폴로브라스에 승선했다. 스타초워 총독은 자바에 남아 3월 8 일에 항복했다.
1942년 2월 28일에서 3월 1일 사이에 일본군이 자바에 상륙하자 자바항공사령부는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집어던져 상륙해안에서 일본군을 공격했다. 그러나 그들이 가진 것은 너무 적었고 효과는 미미했다.
서부자바에서는 3월 1일 오전 5시 30분에 반둥의 안디르 비행장을 출격한 네덜란드군의 버팔로 9대와 글렌마틴 3대가 에레탄웨탄에서 상륙 중인 일본군을 공습했으나 거의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영국공군제242비행대대의 허리케인 12대도 에레탄웨탄에 기총소사를 가했으나 역시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칼리자티 비행장에 전개하고 있던 영국공군제84폭격비행대대는 안전하다는 반둥으로부터의 전언을 믿고 지상에서 대기하다가 일본군 보병의 기습을 받았다. 혼비백산한 조 종사와 승무원들이 폭격기를 타고 탈출하려고 했다. 록히드 허드슨 몇대가 탈출에 성공했으나 블레님 폭격기는 모두 탈출에 실패했다. 기지 점령 과정에서 제84비행대대장을 포함한 조종사 및 승무원 약 20명이 사살되었다.
록히드 허드슨 폭격기(Lockheed A-29 Hudson USAAF in flight c1941).
https://en.wikipedia.org/wiki/Lockheed_Hudson
동부자바에서는 수라바야 남쪽의 응고로 비행장에서 출격한 제17임시추격비행대대의 P-40전투기 9대가 허리케인 6대, 버팔로 4대와 함께 크라간에 상륙한 일본군을 공격했 다. 전투기들은 저공으로 내려와 기총소사를 가하여 주정 몇척을 격침했으나 강물에 침뱉는 격이었다. 일본군의 대공포에 맞아 P-40전투기 3대가 격추되었고 나머지 6대가 모 두 피해를 입었다. 이것이 자바 상공에서의 마지막 주요 항공작전이었다.
주의깊게 은폐되어 일본군의 눈을 피해온 응고로 비행장의 최후가 다가왔다. 일본군은 드디어 응고로 비행장의 위치를 파악하고 발리의 덴파사르 비행장으로부터 제로기를 보 냈다. 크라간 공습에서 돌아온 연합군의 전투기들이 착륙하자마자 타이난 항공대의 제로기들이 나타나서 기총소사를 가했다. P-40전투기 10대, LB-30폭격기 2대, 허리케인 2대, 글렌마틴 5대가 지상에서 불탔다. 이로써 제17임시추격비행대대는 모든 전투기를 잃었다. 살아남은 조종사와 지상요원들은 욕야카르타로 이동하여 B-17을 얻어타고 호 주로 탈출했다.
미국이 자바에 보낸 마지막 전투기는 너무 늦게 도착했다. 수송선 시위치는 도중에 격침된 랭글리와 달리 2월 28일 오전 10시에 무사히 칠라찹에 도착했다. 부두는 이미 탈출 하려는 사람들로 아수라장이었으므로 시위치는 부두에 접안하지 못하고 거룻배를 사용하여 포장된 P-40전투기 27대를 하역했다. 시위치는 28일 오후 8시에 하역을 마치고 즉시 출항했다.
네덜란드 공군은 아직 자바 방어를 포기하지 않았으므로 기차를 동원하여 하역된 P-40중 15대는 안디르로, 12대는 타시크말라야로 보내어 네덜란드 기술자들이 조립했다. 3 월 7일에 처음으로 3대가 안디르에서 조립되었으나 이미 늦었다. 일본군이 접근하자 네덜란드 기술자들은 조립 중이던 P-40을 모두 파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이미 조립된 3대를 포함한 몇대는 파괴되지 않고 일본군 손에 넘어갔다. 일본군은 노획한 P-40을 새로 도색한 다음 켄다리2 비행장과 발리에서 운용했다.
노획되어 일본군 도색을 하고 운용 중인 P-40전투기들. http://www.adf-gallery.com.au/researc h/nei.htm
미국은 호주에서 날려 보내거나 랭글리, 그리고 시위치를 통하여 140대의 P-40을 자바에 공급하려고 시도했다. 그 중 호주에서 날아간 36대만이 실제로 자바에 도착하여 전 투에 참가했고 모두 상실되었다. 35대는 자바로 가는 도중 탈락했고 10대는 수송선에 실려 콜롬보로 갔으며 랭글리에 실린 32대는 상실되었다. 그리고 시위치에 의하여 마지 막으로 전달된 P-40전투기 27대중 일부는 일본군에 편입되어 적의 전력을 강화시켜준 결과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