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수라바야 소개(1) - 인원 소개와 시설 파괴
헬프리히 제독은 1940년 5월에 네덜란드 본토가 독일에게 점령당하자 만일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가 공격받을 경우 함정이나 선박 1척도 멀쩡한 상태로 적의 손에 넘어가서 는 안된다는 명령을 내렸다. 침공을 받으면 동인도제도의 모든 함정은 힘껏 저항하겠지만 자바의 함락이 불가피해지면 탈출한 후 영국해군에 합세하여 싸움을 이어나갈 것이 었으며 상선 또한 영국상선대에 합류하여 연합국의 전쟁노력을 도울 것이었다. 이에 따라 대양항해가 가능한 함정과 선박들은 유럽 등 추운 해역에서 사용할 기구와 방한복을 갖추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실제로 진주만 기습이 일어나기 전에 대부분 준비를 마쳤다. 그러나 정작 탈출에 필요한 연료와 식량을 어느 항구에서 어느 함정이나 선박에게 언제 어떤 식으로 공급할 것인지 하는 실질적인 보급문제는 거의 연구하지 않았는데 이는 헬프리히 제독을 위시한 대부분의 고위 지휘관들이 머리와는 달리 가슴으로는 300년 이상 살아온 동인도제도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었다. 실제로 헬프리히 제독은 갈수록 자바 탈출을 신경질적으로 반대하게 되며 따라서 자신이 내렸던 함대탈출 명령은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수라바야 해군사령관인 피터르 쿤라드 해군소장(1942년 1월 1일자로 진급)은 1942년 2월 19일에 해군 인력의 철수를 위하여 관계자를 모아 회의를 하려 했으나 헬프리히 제독의 지시로 무산되었다. 그러자 쿤라드 소장은 반둥에 전문을 보내어 4척의 상선을 동원하여 아직 훈련이 끝나지 않은 장교후보생들과 기술학교학생들을 철수시키자고 건 의했으나 헬프리히 제독은 주민의 사기를 떨어뜨린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쿤라드 소장은 2월 23일과 26일에도 같은 건의를 반복했으나 역시 거부당했다. 2월 27일에 시도한 통신학교학생 및 상선해기사훈련생의 탈출도 헬프리히 제독에 의하여 저지당했다. 그리하여 결국 탈출했다면 전쟁에서 귀중하게 쓰였을 수천명이 인력이 자바방어에 아무런 실질적인 도움도 되지 못한 채 자바 함락 과정에서 죽거나 이후 3년 6개월 동안 잔혹한 포로생활을 해야만 했다.
헬프리히 제독은 도먼 제독이 죽고 연합타격부대가 참패한 이후인 2월 28일 오후에야 수라바야 철수를 승인했다. 쿤라드 소장은 즉시 관계자들을 불러모아 철수계획을 짰으며 철수는 3월 1일 아침부터 시작되었다. 수라바야에서 철수하는 병력은 칠라찹으로 가서 배를 타야 했다. 육군이 열차를 동원하여 철수병력들을 실어 날랐으며 열차를 타지 못한 인원들은 군용차량 또는 징발된 차량을 이용하여 철수했다. 차량에 탑승한 병력의 인솔자에게는 도중에 식량을 사라고 40길더(21달러에 상당)가 지급되었으며 징발된 차량 주인에게도 100길더가 지급되었다. 300년에 걸친 통치가 무너지는 순간에도 네덜란드인들은 민간인의 차량을 단순히 뺏는 것이 아니라 법에 따라 보상금을 지급하고 징발했 다. 3월 1일에서 3일에 걸쳐 수라바야에서 칠라찹으로 철수한 인원은 약 4,000명으로 주로 장교후보생, 기술 및 통신학교학생, 수라바야 포기에 따라 필요없어진 함정 및 상 선승조원, 해군시설의 기술자 등이었다. 3월 3일 오후 6시에 수라바야를 떠난 마지막 철수열차는 칠라찹에 너무 늦게 도착하여 이미 모든 선박은 출항한 이후였다. 여기에 탔 던 인원들은 며칠 후 포로가 되었다.
1942년 3월 1일에 헬프리히 제독은 네덜란드해군 동인도전대에게 탈출하든지 아니면 그들의 배를 자침시키라고 명령했다. 2월 말 현재 수라바야항에는 노르웨이상선 3척과 필리핀상선 1척을 포함하여 약 30척의 상선이 있었다. 수라바야 해군사령관 쿤라드 소장은 상선의 선장들을 불러모아 호주로 탈출하라고 권고했으나 모두들 도중에 격침당할 것이 뻔하다며 출항을 거부했다. 사실 떠나고 싶어도 선원들이 도망쳐서 항해가 불가능한 선박이 대부분이었다. 결국 수라바야에서 75,000톤이 넘는 약 30척의 연합국 선박이 자침했는데 나중에 일본군이 이들 중 35,756톤에 달하는 19척을 건져서 사용했다.
3월 2일부터는 수라바야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폭파작업이 실시되었다. 주로 군사시설이 목표였으나 민간시설도 포함되었다. 민간시설의 폭파를 맡은 일반폭파반은 일본군이 상륙하자 소총으로 무장한 채 자바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제너럴모터스 자동차공장, 브리티시아메리칸 담배공장같은 대규모 공장이나 유전 및 기름탱크같은 중요한 시설 뿐 아 니라 자동차나 정미소같은 소규모 민간시설까지 폭파했다.
모로크렘방간 수상기기지에 대한 폭파는 2일 오전 7시에 시작하여 오전 9시 30분에 끝났으나 격납고 대부분과 엔진과 폭격조준기 등을 보관하는 창고는 멀쩡했다. 이는 수라 바야 철수 당시 잔류명령을 받은 해군폭파반의 인원 중 상당수가 명령을 어기고 철수열차에 올라 칠라찹으로 도망쳐 버렸기 때문이었다. 3월 4일에 모로크렘방간 기지를 둘러 보고 상황을 알게된 쿤라드 소장은 육군에 요청하여 추가로 폭파를 실시했으나 효과는 미미했다. 실제로 폭탄을 견디도록 튼튼하게 지어진 격납고 같은 경우 구조를 잘 모르는 육군공병대가 빠른 시간 내에 효과적으로 폭파하기는 어려웠다.
페락비행장에 대한 폭파는 3월 2일 오전9시에 시작되었으며 오전 10시에 활주로 폭파를 마지막으로 끝났다. 그 직후 해군폭파반은 트럭을 타고 칠라찹으로 달렸다.
군항에 대한 폭파는 수라바야의 어뢰담당관인 반 데르 하브 대령의 지휘 아래 실시되었다. 1일 오전 6시부터 폭파가 시작되었는데 3번 탄약고가 폭발하지 않았다. 3월 4일에 하브 대령은 잠수함 K-XⅣ의 함장이었던 반 웰 그뢴벨트 소령 및 민간인 기술자 한명과 함께 3번 탄약고를 살펴보러 들어갔다가 폭약이 폭발하는 바람에 3명 다 목숨을 잃었다.
아드미랄렌급 네덜란드구축함 윗더위드. https://en.wikipedia.org/wiki/HNLMS_Witte_de_With_(1928)
네덜란드구축함 윗더위드는 2월 28일에 엑서터와 함께 출항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승조원이 상륙중이라 오후 7시에 엑서터가 출항할 때 같이 출항하지 못했다. 함장 쇼텔 소 령은 엑서터의 함장 고든 대령으로부터 오후 9시까지 출항하여 자정까지 엑서터를 따라잡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상륙했던 승조원들이 헛소문을 듣고 돌아와서 다음날 아침이면 건선거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하자 쇼텔 소령은 생각이 바뀌었다. 그는 자바해 해전에서 자신의 폭뢰를 떨어뜨려 폭발하는 바람에 손상을 입은 윗더위드의 프로펠러 를 수리한 후 따로 탈출하기로 마음먹고 밤새 건선거 쪽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조작원이 달아나버린 건선거는 활동을 하지 않았고 윗더위드는 3월 1일에 건선거 주변에 정박한 채로 일본기의 공습을 받아 함체 전방에 1발의 명중탄을 맞았으며 지근탄에 의하여 함체 후방의 수선하 함체에 큰 구멍이 뚫렸다. 윗더위드는 2일 아침에 어뢰정들의 어뢰를 맞고 처분되었는데 처분명령을 내린 사람이 누군지는 불확실하다.
아드미랄렌급 네덜란드 구축함 방커트. https://en.wikipedia.org/wiki/HNLMS_Banckert_(1929)
네덜란드구축함 방커트는 2월 18일에 페락항에서 일본기의 공습으로 피해를 입고 3,000톤짜리 건선거에 들어앉은 채로 24일과 28일에 다시 공습으로 피해를 입었다. 이후 인부들이 달아나버려 건선거 안에 방치된 방커트는 3월 2일에 잠수함 K-XⅧ의 88mm 갑판포를 얻어맞고 건선거와 함께 처분되었다. 방커트의 승조원은 숙영선인 코닝 데르 네덜란덴에 머물다가 코닝 데르 네덜란덴도 처분되자 2일 오후에 칠라찹으로 철수했다. 일본군은 나중에 방커트를 건져서 수리한 후 제106호 초계정으로 사용했다. 종전 이후 반환된 방커트는 1949년 9월에 마두라 해협에서 표적함으로 사라졌다.
포함 수라바야는 2월 18일에 공습을 받아 항내에 착저했으나 상부구조물은 밖에 나온 상태여서 여전히 대공포대로서 기능했다. 이제 군항을 파괴하면서 수라바야 승조원들도 배를 버리고 떠났다. 일본군은 나중에 수라바야를 건진 후 사용하지 않는 항만 입구에 다시 가라앉혀 폐색선으로 사용했다.
잠수함기지도 파괴했다. 당시 기지에는 잠수함 3척(K-X, K-XⅢ,K-XVⅢ)이 수리 중이었는데 모두 처분했다. 일본군은 나중에 K-X을 건져서 부유기름탱크로 사용했다.
수라바야의 상업항인 페락항은 육군이 파괴했다. 커다란 화물기중기들이 차례로 쓰러졌고 창고가 불타는 연기가 항구를 덮었으며 기름탱크가 폭파되면서 불타는 기름이 항구 로 쏟아졌다. 선박들은 부두와 정박지를 사용하기 어렵게 만드는 위치에 처분되었다. 큰 선박은 침수밸브를 열고 폭약을 장치하여 침몰시켰으며 작은 배는 기관총으로 수선 부 근에 구멍을 내어 가라앉혔다.
작업선 로게빈은 부두 바로 옆에 가라앉았으며 옆으로는 부두를 따라 소형 범선들을 가라앉혀 부두 사용을 막았다. 항구는 불타는 선박들의 연기로 가득찼으며 그 사이를 폭파 반과 탈출한 승조원을 태운 소형 범선들이 바쁘게 오갔다.
폭발과 침몰의 난리통에 네덜란드해군이 출항시키려한 선박들마저 처분되었다. 예비부품, 탄약 및 기타 보급폼을 싣고 출항하려던 반넥은 화염에 길을 잃고 항내에서 헤매다 가 조류에 떠밀리면서 이미 처분된 유조선과 충돌하여 선미가 크게 손상되었다. 결국 선장은 퇴선명령을 내렸으며 승조원은 해군보트를 불러 탈출했다. 나중에 반넥은 처분되었다.
벤젠운반선인 966톤짜리 민잭도 60발의 어뢰와 예비부품 및 보급품을 싣고 호주로 가서 잠수모함으로 사용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현지인 선원들이 모두 달아난데다가 선장 또한 폭발물을 싣고 위험한 항해에 나서는 것을 거부했으므로 소해함 피터르 드 비터가 75mm 함포로 처분했다.
3월 2일에 소해함 엘란트 뒤부아는 서쪽수로 입구를 밝히던 등대선 웨스트의 승조원을 수용한 다음 포격을 가하여 격침했다. 서쪽수로 출구를 밝히던 등대선 폴룩스는 제노아 부두 옆에 처분했는데 나중에 일본군이 건져내어 사용했다. 3월 3일에는 정부선단(Government Marine)에서 해군으로 편입된 경비정 윌레브로드 스넬리우스가 동쪽수로의 등대선을 침몰시키고 항해용 부이를 파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