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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야기

퇴계 “理發”설 再論- ‘理의 能動性’ 의심과 부정에 대한 반성 -/안재호.중앙대


 

<목 차>
Ⅰ. 이끄는 말
Ⅱ. ‘리의 능동성’ 의심에 대한 반성
Ⅲ. ‘리의 능동성’ 부정에 대한 반성
Ⅳ. 반성의 핵심 근거
Ⅴ. 맺는 말



<국문 요약>
퇴계학은 단지 우리 학계의 학자들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여러 전문가들
이 그 학문적 성취를 인정하는 분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주자학을 전공하는
학자들은 퇴계의 학문이 주자학의 마땅한 발전이라고 설명하고, 양명학을 전
공한 학자들은 그것이 주자학을 극복하고 양명학 내지 맹자학과 결합하는 모
습을 보인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주자학의 발전이던 혹은 양명학과의 화해이
던, 그 근거는 모두 ‘리발’이라는 주장에 있다. ‘리발’설은 비록 주자학의 체계
에서 문제가 될 수 있지만, 유학의 근본정신 - 성선설을 통해 인간이 다른 동
물과 다르다는 존엄성을 확보해줄 수 있는 주장이다. 다시 말해서, ‘리발’설은
리, 즉 도덕정감의 주체적 자발성을 강조함으로써 짐승과 다른 점이 거의 없
는 인간이 존엄성을 갖게 되는 근거를 확인시켜주는 주장인 것이다.
그런데 근자에 몇몇 학자들이 편향된 주자학적 전통에만 근거하고, 또 서
양의 심리철학 인지과학 등에서 계발을 받아 퇴계 ‘리발’설의 가장 핵심적인
의미를 의심하거나 부정하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필자는 결코 그 분들의 작업
이 의미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반드시 한 번쯤 반성되어야
하는 주장이다. 문석윤 교수의 의심과 이승환 교수의 부정은 기본적으로 주자

학 체계에만 근거하고 그 이해도 편향적인 반면, 사단과 칠정 자체의 의미 파
악에는 소홀했기 때문이다.
사단과 칠정 각각에 따라 성공적으로 행위를 완성하더라도 그 둘은 결코
같은 의미일 수 없다. 도덕 정감이 자신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드러남에, 그것
에 따라 행동한 것은 분명 도덕적 선이다. 이는 단지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여
스트레스를 푼 ‘좋음’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이와 같은 결과만 다른 것이
아니다. 사단에서는 자발성이 강조되고, 칠정은 법도에 맞는 것이 중요하다.
퇴계의 리는 분명하게 기를 조종하고 제어할 수 있다. “말은 사람이 아니면
궤도를 잃는다.” 이렇게 주재성이 강조되는데, 능동적이지 않다고 말할 수 있
는가? 주재하는 것이 피동적일 수 있다는 것인가? 어째서 ‘능동성’을 반드시
현실세계에서의 움직임운동으로만 이해해야 하는가? 퇴계의 ‘리’는 현상적인
운동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도덕주체성의 자발이라는 의미에서 능동적인 것이
다. 사단으로 표현되는 ‘리’는, 퇴계가 보기에, 적어도 심성론적 의미에서라도
반드시 능동적인 것이어야 한다.
사단과 칠정을 리와 기로 분석한다는 것 자체가 더 할 수 없이 주자학적
시도이다. 도덕정감이든 일반감정이든 결코 그런 분석틀을 사용해서 적절하
게 해석될 수 없다고 느낀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해야 한다면, 퇴계와 같이
하는 것이 “딱 좋을” 것이다. 우리의 도덕성은 저 높은 곳에서 위엄만 갖추고
동상처럼 굳어있는 것이 아니라 活潑潑하게 살아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단과
같은 도덕정감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주제어 : 퇴계, 리발, 리의 능동성, 주재성, 유학의 근본정신, 주체성과 존엄성


Ⅰ. 이끄는 말
우선 본문의 제목이 ‘재론’인 이유는 첫째, 이 주제에 관해서 너무도
많은 학자들이 너무도 많은 글들을 썼기 때문이고 둘째, 필자도 이미 관
련된 글을 발표했었기 때문이다.1) 그러나 필자는 결코 오늘날 우리 학


1) 안재호, 도덕정감은 독립적인가? - 退高 四七理氣論辯의 의의 ( 동서철학연구
퇴계 “理發”설 再論 119


계의 추세에 따라 글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마음은 추호도 없다.
한국연구재단의 선정 과제들이 그렇듯이,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새로운
것을 발굴(?)해야 한다. 연구하려는 주제가 새롭지 못하다면, 방법이나
해석이 새로워야 한다. 학자가 스스로 공부하고 연구해서 心得을 서술
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작업이 되었다. 더구나 우리의 논문은 일반인들
이 읽어서 이해할 수 있도록 작성되어야 한다. 서양인들까지도 이해하
도록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어쩌면 이런 목표는 정당하기도 하고, 또
한 꼭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철학(인문학)의 해석에 100%
정답이 없다고는 해도 객관적 이해 아니, 적어도 개연성을 지닌 해석은
있을 것이다. 퇴계의 주장은 분명 그 스스로 의도한 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온전히 밝혀내고, 밝혀진 바에 근거하여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것이 아마도 학문하는 기본일 것이다. ‘理發’을 말한다면 우선 퇴계의
그것을 말해야지, 자신이 이해한 ‘리발’을 퇴계의 그것이라고 주장해서
는 안 될 것이다. 대만의 어떤 학자2)는 맹자의 성선론을 서양인들이 전
혀 이해하지 못해서 ‘人性向善論’으로 설명하니 바로 이해했다며, 그것
이 진실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이 어떻게 맹자의 성선론이겠는가? 그 자
신의 ‘인성향선론’일 뿐이다.
필자가 보기에, 우리 민족의 역대 철학사상가 중에서 세계적으로 자
랑할 만한 이는 두 분이다. 한 분은 一心 사상으로 大乘起信論을 관통
한 元曉이고, 다른 한 분은 바로 ‘理發’을 강조한 退溪이다. 퇴계로 말하
자면, 단지 우리 학계의 학자들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여러 전문가들
이 그 학문적 성취를 인정하는 분이다. 그런데 주자학을 전공하는 학자
들은 퇴계의 학문이 주자학의 마땅한 발전이라고 설명하고3), 양명학을


제33호, 2004.09, 220~234쪽)
2) 國立臺灣大學의 傅佩榮이 박사학위논문에서부터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3) “이황은 주희의 철학을 깊이 있게 이해하였으며, 주희의 철학이 지닌 어떠한
모순에 대해서도 심도 있게 인식하였다. 동시에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적극적인 방법까지도 제시함으로써, 주희의 철학에 감추어져
있으면서 아직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던 논리적 연결 고리를 드러내 주었다.”
120 儒敎思想硏究 第45輯


전공한 학자들은 그것이 주자학을 극복하고 양명학 내지 맹자학과 결합
하는 모습을 보인다고 주장한다.4) 그것이 주자학의 발전이던 혹은 양명
학과의 화해이던, 그 근거는 모두 ‘리발’이라는 주장에 있다. ‘리발’설은
비록 주자학의 체계에서 문제가 될 수 있지만, 유학의 근본정신 - 성선
설을 통해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르다는 존엄성을 확보해줄 수 있는 주
장이다. 다시 말해서, ‘리발’설은 도덕이성의 주체적 자발성을 강조함으
로써 동물과 다른 점이 아주 조금밖에 없는 인간이 존엄성을 갖게 되는
근거를 확보해주는 주장인 것이다.5)


그런데 근자에 몇몇 학자들이 주자학에 대한 일반적이지 않은 이해에
근거하고, 또 서양의 심리철학 인지과학 등에서 계발을 받아 퇴계 ‘리
발’설의 가장 핵심적인 의미를 의심하거나 부정하는 논문을 발표하였
다.6) 필자는 결코 그 분들의 작업이 의미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陳來, 안재호 역, 송명성리학 , 예문서원, 1997, 475쪽) 퇴계의 견해는 ‘리발’
과 ‘사단’의 이해에 있어 주자학의 논리에 위배된다. 그러나 그는 좀 더 폭넓
은 입장에서 유학의 근본정신, 즉 성선설을 통해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르다
는 존엄성을 확보해주었다.(윤사순, 퇴계철학의 연구 , 123쪽) 퇴계의 리발설
은 體用이라는 관계를 통해 모순이 해결될 수도 있다.(최영진, 퇴계 理사상의
체용론적 구조 , 조선조 유학사상의 탐구 , 여강, 1988, 120~122쪽)
4) 퇴계가 분명하게 자각하지는 못했지만 ‘心卽理’에 다가섰다.(楊祖漢, 朝鮮朝
前期理學的展開) 주자학에 양명학의 성분을 보완했다.(Tu Wei-Ming, T'oegye's
Creative Interpretation of Chu Hsi's Philosophy of Principle , 퇴계학보 35집,
1982) 퇴계학은 주자학과 양명학을 종합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할 수 있다.(傅
偉勳, 儒家心性論的現代化課題, 鵝湖 116호, 民國74년2월)
5) 이런 유학의 정신은 맹자로부터 선명하게 드러난다. “人之所以異於禽獸者幾
希; 庶民去之, 君子存之. 舜明於庶物, 察於人倫, 由仁義行, 非行仁義也.”( 孟子
[楊伯峻譯註, 香港: 中華, 1992], 離婁下19 )
6) 필자가 논의의 대상으로 삼고자하는 논문은 아래의 두 편이다.
文錫胤, 퇴계에서 理發과 理動, 理到의 의미에 대하여 - 理의 능동성 문제 ,
퇴계학보 110집, 2001.
이승환, 퇴계 리발설의 수반론적 해명 - 고봉과의 사단칠정 논변을 중심으로
, 동양철학 34집, 2010.12.
문석윤 교수의 경우 ‘理動’과 ‘理到’의 문제까지 분석하고 있지만, 본 논문에
서는 ‘理發’에만 집중해서 ‘리의 능동성’ 문제를 논의하도록 하겠다.
퇴계 “理發”설 再論 121


다. 그러나 반드시 한 번쯤 반성되어야 하는 주장이라고는 생각한다. 이
에 따라 본문은 우선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 두 분
주장의 논리를 가능한 한 상세하게 소개하고 그것에 어떤 논의의 여지
가 있는지 하나하나 살핀 다음, 퇴계 ‘리발’설의 진정한 의미와 그것의
근거가 되는 이론들을 밝혀 보도록 하겠다. 이런 작업을 통해서 퇴계의
철학이 보다 선명하게 재조명되기를 기대한다.


Ⅱ. ‘리의 능동성’ 의심에 대한 반성
문석윤 교수(이하 직함 생략)는 퇴계가 세상을 떠나던 1570년 고봉에
게 보낸 편지7)에 근거해서 다음과 같이 판단했다.
“퇴계는 분명히 어떤 시점 ‘이전에’는, 주자가 리에 대해 제시한 한 원칙 곧
‘리는 무정의, 무계탁, 무조작하다’는 원칙을 고수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
곧 리 無爲의 원칙이다. 이는 리를, 개별적이고 경험적인 실체들과는 다른 無形
의 형이상학적 실체로 이해하는데 기인한다.” “퇴계의 ‘이전’ 입장은 리 무위
원칙에 따라 리의 능동성을 배제시키는 것이라고 하겠다.” “문제는 발언의 시
점이다. 퇴계의 이 말은 퇴계 생애의 마지막 해인 1570년 기고봉에게 보내는 편
지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문석윤은 이 문제를 해석하는데 두 가지 가능성
이 있다고 보았다. 우선 “퇴계 자신은 리발과 리동을 리의 능동성을 주장하는
명제로 이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혹은 적어도 리의 무위의 원칙을 깨뜨리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두 번째 “이는 수사적 표현일 뿐으로, 퇴계는
실제로는 리의 능동성을 끊임없이 자신의 주요 주장으로 삼아왔다는 것이다.
다만 그것은 리 무위의 원칙을 어기는 것으로 이론적 부담을 가지고 있었다. 그
는 그러한 이론적 부담으로 인해 사실은 몹시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과
연 퇴계의 말을 단지 수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는 점에서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8)


7) 答奇明彦別紙, 退溪先生文集 卷18, 30쪽: “前此滉所以堅執誤說者, 只知守
朱子理‘無情意, 無計度, 無造作’之說, 以爲我可以窮到物理之極處, 理豈能自至
於極處, 故硬把物格之格無不到之到, 皆作己格己到看.”
122 儒敎思想硏究 第45輯


문석윤의 의심은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문석윤의 말처럼, 1570년에
쓴 편지에서 “이전에”라고 쓰고 있으니, 분명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단지 “이전에”라는 단어 하나에 근거해서 ‘리발’
이라는 명제가 갖는 ‘리의 능동성’을 부정하는 것은 지나친 논리적 비약
이다. 물론 문석윤이 단순하게 “이전에”라는 단어 하나에 근거해서 의심
한 것만은 아니다. 그는 퇴계의 논리를 대단히 상세하게 분석했다. 분석
하여 얻은 결론은 다음과 같다.


퇴계가 사단을 ‘리발’로 칠정을 ‘기발’로 정의하는 것은 “그 둘 다 같은 감정
의 레벨에 속한 심리적 사실로서, 리와 기의 합으로 성립된 것이지만, 사단은
그 자체로 선한 도덕적 감정이기에 ‘리에 근원하여 발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
으며, 칠정은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는 일반적인 감정이므로 ‘기에 근원
하여 발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따르
면 이는 리기 불상리의 원칙을 훼손한 것도 아니요, (여기에서 직접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리 무위의 원칙을 훼손한 것도 아닌 것이다. ……말하자면 퇴계는 리
기 불상잡의 원칙을 강조한 것이다. 결국 사칠논변의 핵심적 쟁점은 리의 능동
성을 인정하느냐 혹은 인정하지 않느냐 하는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리와 기의
불상리를 강조할 것이냐 불상잡을 강조할 것이냐 하는데 있었다고 하겠다.”9)
“퇴계가 주로 관심을 기울인 문제는 현실 존재인 사단과 칠정의 근원을 물어
들어가 해명하는데 있었지 리의 자발성 혹은 능동성 문제에 있지 않았다. 즉 리
의 자발성 혹은 능동성 문제는 직접적인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10)


필자가 보기에도 퇴계가 직접적으로 관심을 갖고 주장하고자 한 것은
‘사단’과 ‘칠정’의 구분이었고, 주자학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리기의 불
상잡’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퇴계와 같이 ‘사단’과 ‘칠정’을 구분
하고 ‘리기의 불상잡’을 강조하게 되면 궁극적으로 리의 주재성을 강조


8) 문석윤, 위의 논문, 162 163 163 164 165쪽.
9) 문석윤, 위의 논문, 170~1711쪽.
10) 문석윤, 위의 논문, 175쪽.
퇴계 “理發”설 再論 123


할 수밖에 없고11), 나아가 그것의 자발성과 능동성을 주장할 수밖에 없
게 된다. 그래서 문석윤도 그런 측면을 고려했었다.


“리와 기의 명확한 구분에 리의 능동성이 전제되고 있다고 볼 수는 없을까?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리의 능동성을 거부하는 것이 더 적합
할 것이다. 매개 없는 능동성이란 어디까지나 기에 해당되는 개념이겠기 때문
이다. 물론, 기와 명확히 구분된 리는 그 자체 어떤 실체적인 것으로 보다 쉽게
가상될 수 있고, 따라서 기의 능동성과 별도로 리 자체의 능동성을 논의할 수
있는 가능성이 더욱 열려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것은 아직은 어디까지나 가능성일 뿐, 기와 명확히 구분된 리가 실제로 능동성
을 가지는가 아닌가 하는 것은 또 다른 하나의 문제인 것이다.”12)


안타깝게도 그것이 어떻게 “또 다른 하나의 문제”인지에 대해서 문석
윤은 설명하지 않았다. 그리고 “매개 없는 능동성”이 어째서 기에만 해
당한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이는 지나치게 주자학적 발상이다. 물론 퇴
계도 주자학적 리기관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고 또 할 수도 없었겠지
만, 적어도 심성론의 측면에서는 주자학이 아닌 오리지널 유학, 특히 맹
자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리의 능동성은, 그러므로 반드
시 주자학에서 탈출한, 주자학을 극복하고 맹자에게로 직접 나아가려는
퇴계의 노력인 것이다.
이런 노력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크게 잘못된 결론에 도
달할 수도 있다. 안타깝지만 문석윤도 그런 잘못을 범한 것 같다. 그래


11) 퇴계와 같이 구분하고 강조하는 것이 어떻게 ‘리의 주재성’을 확보하게 되는
지는 본문에서 차례로 설명될 것이다. 기실, 문석윤도 리의 주재성에 대해서
는 인식하고 있었다. “리는 현실세계 속에 있지만 현실세계와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현실세계를 규제하는 객관적 이념으로서 작용할 수 있다. 그것은 현
실세계의 행위자들이 추구하여 실현하고 도달해야 할 객관적 이념이다.”(173
쪽) 이처럼 리가 현실세계를 규제할 수 있다면, 그것이 어떻게 無爲의 원칙에
포함되는 것인지 반드시 설명해야 한다. 이런 어려움이 바로 주자학이 떨치
지 못했던 문제이다. 퇴계의 주장은 바로 이점에서부터 출발한 것이다.
12) 문석윤, 위의 논문, 179~180쪽.
124 儒敎思想硏究 第45輯


서 그는 “리와 기의 불상잡 원칙과 불상리 원칙은 ……상호 보완적인
것”이기 때문에 “퇴계와 고봉 사이의 이견은 사실은 그리 큰 것이 아님
을 짐작할 수 있겠다”13)고 말했다. 어떻게 그들의 이견이 “큰 것이 아
닐” 수 있겠는가? 필자가 보기에, 문석윤의 이런 오해는 당시의 고봉과
마찬가지로 퇴계 ‘리발’과 그것이 근거한 유학의 근본정신에 대한 잘못
된 이해에 근거한다. “리가 발하였으나 기가 따르지 않으면 그것은 현실
화될 수는 없다고 퇴계는 말한다. 즉 리만으로 사단이 현실화될 수는 없
다는 것이요, 따라서 리발 자체는 현실에서 일어난 어떤 사태가 아닌 것
이다.”14) 사단이 현실화될 수 없다고 해서, 즉 구체적인 하나의 행위로
완성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현실에서 일어난 사태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보다 근본적으로, 기가 따르던 따르지 않던 이미 리가 발했
다면, 리발의 명제는 현실적인 것이 되지 않는가? 문석윤은 퇴계의 말대
로 “自相矛盾”15)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기실, 심성론(정에 관한 이론을
포함해서)에서 리의 능동성이 부정된다면, 주희와 똑같은 문제, 즉 性이
나 理가 진정한 주재자가 될 수 없으며 따라서 인간의 주체성과 존엄성
- 맹자가 말하는, 칸트에서와 같은 - 을 설명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
퇴계의 ‘리발’설은 바로 이런 정신을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정신
은 도외시한 채, 오히려 퇴계는 “철저히 합리적 이성 정신에 투철하였으
며 이성의 깊이에 철저하였을 뿐, 이성을 부정하고 그 너머에서 무엇을
찾으려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외견상 보이는 그의 리기론에서의
모순적 입장을 가능하다면 다른 방식으로 해명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16)라고 주장한다면, 논의의 경중이 완전히 뒤바뀐 꼴이 된다.17) 게다


13) 문석윤, 위의 논문, 174쪽.
14) 문석윤, 위의 논문, 179쪽 注39.
15) 答奇明彦 非四端七情分理氣辯 退溪先生文集 卷16, 11쪽左.
16) 문석윤, 위의 논문, 200쪽.
17) 문석윤은 퇴계의 투철한 합리적 이성을 강조한 근거로 다음의 편지(花潭의
문인 南彦經에게 보낸)를 예로 들었는데, 필자가 보기에 그것은 학문하는 기
본적인 태도를 강조한 것에 불과하다.
퇴계 “理發”설 再論 125


가, 퇴계가 이성에 철저한 소위 ‘합리적인’ 철학자였던 것과 ‘리발’의 능
동성 문제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이는 일종의 ‘논점 일탈의 오류’라
고 볼 수도 있다.
필자가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문석윤의 최종적인 결론이다. 그
는 이렇게 말했다. “결국 필자는 리의 능동성 문제는 퇴계에 의해 후대
에 남겨진 문제라고 생각한다. 역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퇴계학에서는
하나의 열려진 문제라는 것이다.”18) 이제까지 많은 편폭으로 리의 능동
성을 의심하고 부정하다가 최종적인 결론에서 이렇게 열어놓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도 위에서 말한 유학의 근본정신(인간의 주체성과
존엄성 확보)에 대한 이해에 차이가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반드시 도대체 왜 리의 능동성 문제를 중시하고, 퇴계가 어째서 그것을
강조했는지 깊이 생각해야 한다. 기실, 리의 능동성 문제를 후대에 남긴
것은 퇴계가 아니라 주희이다. 주희는 리의 본체 됨, 그 주재성을 말하
면서도 ‘무위의 원칙’을 강조했다.


Ⅲ. ‘리의 능동성’ 부정에 대한 반성
이승환 교수(이하 직함 생략)는 일단 문석윤의 작업(혹은 의심)을 참신
하고 의미 있는 것으로 평가하면서19) 보다 철저하게 이른바 퇴계의 ‘리
발’이 갖는 ‘리의 능동성’ 의미를 부정한다. 이승환이 보기에, “‘리의 능
동성’ 테제는 퇴계사상의 독창성을 드러내기보다 오히려 퇴계에 대한
이해를 가로 막는 걸림돌이 된다.” 그래서 “과거 450여 년간 퇴계의 ‘리
발’을 ‘리의 능동성’으로 해석해오던 관행은 이제는 폐기되어야 할 오해


答南時甫彦經別幅退溪先生文集 卷14, 2쪽右: “大抵公前日爲學, 窮理太涉
於幽深玄妙, 力行未免於矜持緊急, 强探助長, 病根已成, 適復加之以禍患, 馴致
深重, 豈不可慮哉?”
18) 문석윤, 위의 논문, 200쪽.
19) 이승환, 위의 논문 193쪽 注 4).
126 儒敎思想硏究 第45輯


임을 밝히는데 본 논문의 최종 목적이 있다.”20)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승환은 우선, 퇴계의 ‘리발’이 그다지
독창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보이려고 주희의 ‘리발’과 그것이 사실은 “隨
伴論”이라는 관점을 상세하게 설명한다. 그가 보기에, “주자는 퇴계 못
지않게 ‘리’의 發에 관한 수많은 언급을 남겼다.”21) 정말 그렇다. 주희는
분명 ‘리발’이라는 표현을 많이 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표현이 과연
퇴계가 주장하는 것과 같은 ‘능동성’을 의미하는가 아닌가에 있으며, 그
런 표현이 도대체 주희의 철학체계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에 있다.
이승환이 밝힌 것처럼, 주희에게 있어 ‘발’이란 능동성이 아니라 ‘예화’
일 뿐이다. 이승환은 예를 들어, 朱子語類 卷6, 18條의 “存之於中謂理,
得之於心爲德, 發見於行事爲百行.”을 “[심] 안에 간직된 것을 ‘리’라 하
고, ‘심’에 얻은 것이 덕이니, 행위와 사건에 발하여 갖가지 덕행이 된
다.”고 해석하면서 “‘발하다’의 주어는 당연히 ‘리’”22)라고 말했다. 기실,
주희의 말을 적확하게 번역하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가운데[심] 그
것을 보존함을 리라 부르고, 마음에서 그것을 얻는 것이 덕이며, 행위와
사건에서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 (법도에 맞는) 여러 행위[훌륭한 행위]
이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여기에서 “드러나는” 것은 직접적으로 ‘리’가
아니라 ‘性’이다. 그러나 ‘성’이 곧 ‘리’이니 그와 같은 해석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주희의 ‘발’은 결코 능동성이 아니라 “드러나는” 것일
뿐이다. 반면에 퇴계의 ‘발’은 이런 “드러냄”이 아니라 ‘능동성’을 의미
한다. 그래서 그의 주장이 독창적인 것이다. 이점은 앞으로 차차 밝혀질
것이다.
주희의 ‘리발’이 능동성이 아님을 밝히기 위해서 이승환은 다시 리와
기의 관계에 주목한다. 그래서 얻은 결론은 의존共變환원불가능성이다.
그런데 이 “세 요소는 현대 심리철학(그리고 윤리학과 미학)에서 말하는


20) 이승환, 위의 논문, 195쪽.
21) 상동.
22) 이승환, 위의 논문, 203쪽.
퇴계 “理發”설 再論 127


수반이론과 정확하게 일치한다.”23) 다시 말해서, 리에 대한 기의 관계는
심리적 속성의 물리적 속성에 대한 관계, 윤리적 속성의 윤리 외적 속성
에 대한 관계처럼 수반된다는 것이다. 이승환은 수반이론을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에 근거해서 “속성 B의 변동 없이는 속성 A에도
변동이 있을 수 없다면, 속성 A는 속성 B에 수반한다.”24)고 정의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주희의 리기 관계를 평
면적으로만 이해했다. 주지하다시피 리기 관계에 관한 주희의 기본명제
는 ‘불상리’와 ‘불상잡’이다. 그런데 후자는 이승환이 이해한 것처럼 현
실적인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논리적 차원내지 형이상학적 차원에서도
특히 그렇다. 이승환이 보기에, “주자의 태극 개념은 질료 세계(氣)에 깃
들어 있는 궁극적 이유(所以然) 또는 법칙성(理)을 가리킨다.” “따라서 주
자의 ‘태극’은 질료적 세계(氣)를 떠나 독자적으로 존립하는 실체가 아니
라 다만 각 존재에게 갖추어진 ‘리’일 따름”25)이다. 그런데 인용한 문장
은 각각 주자어류 권94의 22조와 8조로, 다음과 같이 해석되어야 한
다. “태극은 달리 하나의 물건이 되지 않는다. 음양에 나아가면 음양에
있고 오행에 나아가면 오행에 있으며, 만물에 나아가면 만물에 있다. 단
지 하나의 리일 뿐이다.” “이른바 태극이란 단지 이기오행의 리일 뿐, 달
리 물건이 있어 태극이 되는 것은 아니다.”26) 여기에서 말하려는 것은
태극이 언제 어디에나 존재함이지, 태극이 “질료 세계에 깃들어 있음”을
나타내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태극, 즉 리는
기에서 독립해 있는 것이다. “물건”이 되지 않는다거나 “물건”이 아니라
고 말한 것은 현실적인 존재, 즉 형이하학적 존재가 아니라는 의미일 뿐
으로, 현실적 입장에서 리와 기의 ‘불상리’를 강조한 것일 뿐이다. 그러


23) 이승환, 위의 논문, 198쪽.
24) 이승환, 위의 논문, 201쪽.
25) 이승환, 위의 논문, 196쪽.
26) “太極非是別爲一物, 卽陰陽而在陰陽, 卽五行而在五行, 卽萬物而在萬物, 只是
一箇理而已.”
“所謂太極者, 只二氣五行之理, 非別有物爲太極也.”
128 儒敎思想硏究 第45輯


므로 결코 형이상자인 태극 혹은 리가 어디에서나 기에 의존한다고 해
석될 수 없다. 현실적인 차원[在物上看]에서는 리가 기에 “依附” “附着”
“掛塔” “安頓”하는 듯 보이지만, 논리적인 차원 혹은 형이상학적 차원
[在理上看]에서는 결코 그렇지 않고 오히려 기에 先在하는 독립된 실체
임을 주희는 강력하게 주장했다.27) 이런 주장은 단순히 현실세계에서의
‘환원불가능성’만을 말하는 것이 아님은 자명하다. 단지 ‘환원불가능성’
만을 이야기한다면 이승환 자신이 “주자는 리기 이원론자라고 할 수 있
다.”28)고 한 말은 부정해야 할 것이다.
둘째, 수반이론에 대한 오해가 있는 것 같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이해
하는 수반이론에서 “상위 단계의 모든 존재자는 무력하기 때문에, 수반
이론은 실재의 상위단계에서 하위단계로 향하는 하향인과의 가능성을
부정한다.”29) 그런데 주희의 리기 관계는 어떤가? 최소한 리의 보편성과
절대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단순한 수반관계를 긍정하기 어렵다. 이승환
도 그런 위험성을 인지하여 수반이론은 “사람들로 하여금 부수현상론을
떠올리거나” “화용론적 효과를 초래하여” ‘하향인과’나 ‘심적 인과력’을
확보하기 어렵게 만들기 때문에, “올라타고 동반한다.”는 의미의 “乘伴”
개념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30) 이승환이 이미 ‘하향인과’
나 ‘심적 인과력’을 염두에 둔다면, 당연히 수반이론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게다가 주희의 리기관계를 수반이론으로 해석하는데 있어
서 이승환은 “人乘馬”의 비유를 든다. 이 비유는 퇴계도 들었다. 그러나
퇴계의 비유는 주희와 다르다. 그 둘을 비교한다면, 퇴계가 어떻게 주희
와 다르며 따라서 어떤 점이 독창적인지 인지할 수 있는데 이승환은 이
런 비교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 것 같다. 기실, 주희의 비유는 이미 명


27) 答劉叔文1 朱子大全 卷46, 24쪽: “所謂理與氣, 此決是二物. 但在物上看, 則
二物渾淪, 不可分開各在一處, 然不害二物之各爲一物也. 若在理上看, 則雖未
有物而已有物之理, 然亦但有其理而已, 未嘗實有是物也.”
28) 이승환, 위의 논문, 196쪽.
29) 승계호, 마음과 물질의 신비 (인터넷 다운로드)
30) 이승환, 위의 논문, 202쪽.
퇴계 “理發”설 再論 129


대 초기, 특히 曹端에 의해 ‘죽은 사람이 말을 타는 것’으로 비판받았
다.31) 따라서 “마음 안에 간직된 도덕적 속성으로서 ‘리’는 감정이나 사
려와 같은 심리적 사건이 객관적 준칙에 부합하도록 방향을 지시해주는
‘합리적 성향’을 의미하고”32) 주희도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
의 이론체계는 그것을 온전히 실현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무위의 원칙’
을 준수하는 한 방향을 지시해줄 수는 있어도 주도할 수는 없기 때문이
다. 그래서 주희에게 있어 ‘리’는 ‘죽은 사람’인 것이다.
그런데 주희에 대한 이런 오해가 옳은 결론에 도달하게 했다. “주자의
‘리발’ 명제는 ‘리’의 능동성과 거리가 멀다.”33) 이 결론은 적확하다. 그
래서 주자학은 혹자에 의하면 ‘타율도덕’이라고 평가받기도 한다.34) 여
기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듯이, ‘발’을 말했다고 해서 그 모두가
‘능동성’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주희의 ‘수반론’을 설명한 다음, 이승환은 퇴계의 ‘수반론’을 설명한
다. 필자가 보기에, 만일 ‘수반론’으로 누군가의 도덕 정감론을 해석한다
면 그것은 고봉일 수 있다.35) 이 문제는 우리의 주제가 아니므로 여기에
서는 생략하겠다. 이승환이 퇴계의 ‘리발’을 ‘수반론’으로 해석하는 핵심
근거는 퇴계의 수정명제, 즉 “理發而氣隨”와 “氣發而理乘”에 있다. 이에
대해 이승환은 세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며 매우 상세한 분석을 하고 있
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너무도 당연한 작업을 어렵고 복잡하게 설
명하려는 것에 불과하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얻은 이승환의 결론은 “퇴


31) 그 내용에 관해서는 진래(안재호역), 송명성리학 (예문서원, 1997), 316~318
쪽 참조.
32) 이승환, 위의 논문, 203쪽.
33) 이승환, 위의 논문, 205쪽.
34) 모종삼의 유명한 지론이다.
35) 이 점에 관해서는 이승환도 동의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고봉은 ‘태극은
기기를 타고 동정한다.’라는 주자의 승반이론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봉의 이러한 입장을 ‘일원론적 승반론’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
다.”(위의 논문, 225쪽) 주희의 승반이론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는 것은 아니
지만, 고봉만이 진정 승반이론에 근거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30 儒敎思想硏究 第45輯


계의 ‘리발’이란 ‘리’가 독자적으로 ‘운동’하거나 ‘발동’한다는 뜻이 아니
라, ‘심’에 구비된 도덕성향인 ‘리’가 기기(氣機)에 승반하여 ‘사단’이라
는 도덕감정으로 실현(또는 예화)됨을 뜻할 뿐”36)이라는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런 결론은 적절하지 못하며, 그 까닭은 기본적인 개
념에 대한 이해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다음을 살펴보자. “수정명제에
사용된 氣隨라는 문구는 애매하기 그지없는 표현이다. ‘리’가 수반기초
인 氣機에 올라타고 실현된 것이 ‘사단’인데, ‘리가 발함에 기가 따른다.’
라고 말한다면, 乘伴의 의미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 표현이 되고 만다.
……승반관계를 표현한다고 보기에는 영 마뜩찮은 구석이 있다.”37) 우
선 퇴계의 ‘리발’을 수반이론으로 전제하고서 그것이 수반이론에 적절하
지 못하다고 탄식하는 것은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사단이라는 도덕정감은 다만 특정한 계기 혹은 조건에
따라 呈現될 뿐이다. 사단은 결코 “‘리’가 수반기초인 기기에 올라타고
실현된 것”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퇴계에 있어서 도덕정감은 생리욕구
나 물리적 속성(즉 氣)에 수반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의미를 간과했기
때문에 “마뜩찮은” 것이다.
이런 “마뜩찮음” 때문에, 이승환은 단순한 수반, 승반이론을 포기한
결론을 제시했다. 그것은 氣에 대한 두 가지 해석에 근거한다. “퇴계의
수정명제에 사용된 기 개념은 ‘기’적 성향(즉 심리적 속성)을 의미함과
동시에 수반기초인 氣機(즉, 물리적 속성)를 의미한다.”38) 이것의 근거로
이승환은 퇴계가 李宏仲에게 답하는 편지를 인용했다. “사단은 ‘리’가
발함에 ‘기’가 따르는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함에 ‘리’가 올라 탄 것이
다. ‘리’에 ‘기’라는 수반기초가 없으면 발출될 수 없고, ‘기’에 ‘리’가 타
지 않으면 이욕에 빠져서 금수가 되고 만다.”39) 그런데 이런 해석은 문


36) 이승환, 위의 논문, 231쪽.
37) 이승환, 위의 논문, 215쪽.
38) 이승환, 위의 논문, 217쪽.
39) 答李宏仲問目退溪先生文集 卷36, 2쪽右: “四端, 理發而氣隨之; 七情, 氣
퇴계 “理發”설 再論 131


제가 있다. “理而無氣之隨, 則做出來不成” 이 문장은 이렇게 직역할 수
있다. “리이지만 기의 따름이 없다면 해내도 이루지 못한다.” 다시 말해
서, 사단이라는 도덕정감은 계기가 주어지기만 하면 드러나지만 현실에
서 구체적인 행위를 할 수 있는 물리적인 조건들이 뒤따르지 않으면 도
덕정감은 도덕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한다는 뜻이다. 결코 “‘리’에 ‘기’라
는 수반기초가 없으면 발출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사단은 “수반기초”
와 상관없이 언제나 자연스럽게 “발출된다.” “수반기초”와 상관있는 부
분은 사단이라는 도덕정감이 현실세계에서 구체적인 도덕실천으로 이어
지는가의 여부에 있을 뿐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승환의 이런 곡해는 또한 리와 기 개념의 적확한 의
미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이승환은 리와 기 개념에 있
어서 ‘기’를 “질료적 토대 즉 수반기초”[물리적 속성]와 “‘기’적 성향(즉
욕구성향)”[심리적 속성]40)으로 구분했지만, 기실 ‘기’41)만이 아니라 ‘리’
개념도 구분해야 한다. 이승환의 분석대로 기는 “질료”와 그 속성 혹은
條理까지 포함한다. 그리고 리는, 주희에 따르면 ‘所以然’과 ‘所當然’을
포괄한다. 그러나 리를 맹자의 용어로 바꾼다면 ‘生之謂性’과 ‘性善의
性’(人之所以爲人의 性), 혹은 ‘命’(條理)과 ‘性’(形上의 理)으로 구분할 수
있다.42) 이를 오늘날의 개념으로 바꾸면, 전자는 본능적 생리욕구43)이고
후자는 인간만의 특성을 드러내는 도덕적 본성이다. 이렇게 볼 때 기의
속성(조리)은 곧 리에서의 조리와 같다. 리와 기의 관계는 이처럼 중층적


發而理乘之. 理而無氣之隨, 則做出來不成; 氣而無理之乘, 則陷利欲而爲禽獸.”
40) 이승환, 위의 논문, 218쪽.
41) 이승환 자신도 주희의 기를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와 비교하면서, 기가 ‘질
료인’과 ‘운동인’을 함께 갖추고 있는 ‘스스로 운동하는 질료’라고 주장했
다.(201쪽 참조.) 그렇다면 질료적 토대인 기는 또한 자연스럽게 본능적인 성
향, 즉 욕구성향도 지닌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42) 칸트의 용어로 구분한다면, 인과법칙에 따르는 他然과 자유에 근거한 자율성
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43) 생리욕구는 질료적 토대인 육체에 복속된 것으로 동일시가 가능하다.
132 儒敎思想硏究 第45輯


이다.44)


그러므로 사단이 “理發”이라고 말하는 것은 ‘도덕적 본성이 특정한
계기, 예를 들어 아장아장 걷는 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것을 얼핏 보았을
때 그 자신이 측은해하는 도덕 정감으로 표현되는 현상’을 형용한 것으
로, 이때 “氣隨”란 그렇게 드러난 도덕 정감에 ‘질료적 토대인 육체가
따른다.’는 사실만을 명기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따름’이 곧바로 도덕
실천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비록 사단이 드러났다고
해도 도덕실천이라는 행위가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반면
에 칠정이 “氣發”이라고 말하는 것은 ‘질료적 토대인 육체가 주도하여,
이에 따라 본능적인 생리욕구(조리)가 일어났다.’는 의미이고, 이때 “理
乘”이란 그렇게 일어난 생리욕구에 ‘도덕적 본성이 단지 원칙적으로 依
附됨’을 표시하는 것일 뿐이다. 그것은 中節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칠정에 선악이 있다고 말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칠정의
선악은 행위의 결과에 의해 판단된다. 그러나 사단이 선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그 실현 여부에 의해 파악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純善인
도덕적 본성의 발현으로서의 사단, 즉 도덕 정감 자체가 선이라는 의미
일 뿐이다. 결코 사단이 모두 구체적인 현실세계에서 선으로 완성된다
는 말이 아니다.
리와 기 개념 및 그 관계를 명확히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승환은 단
지 주희의 “人乘馬”를 퇴계가 인용했다는 사실만으로 퇴계의 주장과 주
희의 주장을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했다. “퇴계는 ‘리’가 ‘기’를 타고서
유행하는 승반관계를 인승마에 비유한 주자의 설명방식을 그대로 수용
하여 자신의 입론을 전개하고 있다.” 그런데 그는 또 “사람이 말에 올라
탐에 말이 사람의 조종에 따르는 광경을 상상한다면”45)이라고 말하기도


44) 퇴계와 고봉의 논변에서 구분하자면, 고봉은 조리가 훌륭하게 표현되면 그것
이 곧 형상의 리라고 생각했고, 퇴계는 결코 그렇지 않아서 조리는 조리에
그칠 뿐 형상의 리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45) 이승환, 위의 논문, 219쪽.
퇴계 “理發”설 再論 133


했다. 이런 측면이 바로 주희와 다른 퇴계의 “리발”인 것을 이승환은 인
지하지 못했다. 주희는 단지 ‘무위의 리’가 ‘유위의 기’에 타서 움직이는,
사실은 피동적인 움직임만을 설명했지만46), 퇴계는 적극적으로 ‘리’의
조종을 강조했다. “말은 사람이 아니면 궤도를 잃는다.”47) 만일 퇴계가
‘무위의 원칙’에 충실했다면 주희와 같이 단순한 ‘올라탐’만을 말했을
것이다. 그런데 퇴계는 ‘조종’을 말했다. 조종이란 무엇인가? 주재의 적
극적인 표현이다. 주재하는 것이 어떻게 ‘무위의 원칙’을 고수하는 것으
로, 능동적이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능동성을 왜 꼭 현실세계에서의
‘물리적인 운동’으로만 이해해야 하는가? 어떻게 “‘리의 능동성’ 테제를
폐기할 때 퇴계의 도덕심리학(성향이론과 감정이론)은 상식과 논리에 맞
는 합리적인 철학으로 정당한 대접을 받게 될 것”48)이라고 주장할 수
있단 말인가? 철학적 주장이 상식에 맞으면 쉽게 이해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곧 어떤 이론체계의 합리성 여부를 판가름하는 기준이 되는 것
은 아니다. 퇴계의 “리발”을 제대로 설명한 다음에야, 그것을 보완한(?)
자신의 ‘리발’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곡해했기 때문에 퇴계의 “理發氣隨”와 “氣發理乘”을 적절하지
못하게 “연쇄 어린이 성추행범”의 예로 설명하는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런 예는 우리로 하여금 혼동을 일으키게 하기 쉽다. “성추행범은 처음
에는 ‘리’적 성향이 약간 발동하기는 했으나(理發), ‘기’적 성향이 강하게
발동하여(氣發), ‘리’적 성향이 결국 ‘기’적 성향에게 압도 당해버린 것이
다(理乘而氣强). ……감정의 차원에서 말하자면, 처음에 어린 여자아이를
범하려는 순간 ‘리’적 성향에서 연원하는 측은지심이 문득 일어나기는
했으나, 곧 ‘기’적 성향이 강하게 발동하여 ‘칠정’ 중의 하나인 욕(欲)이


46) 朱子語類 卷94, 2376쪽: “太極理也, 動靜氣也. 氣行則理亦行, 二者相依而未
嘗相離也. 太極猶人, 動靜猶馬, 馬所以載人, 人所以乘馬, 馬之一出一入, 人亦
與之一出一入, 蓋一動一靜, 而太極之妙未嘗不在焉.”
47) 答奇明彦論四端七情第二書, 退溪先生文集 卷16, 32쪽左: “……馬非人失軌
途.”
48) 이승환, 위의 논문, 232쪽.
134 儒敎思想硏究 第45輯


측은지심을 압도해버리게 된 것이다. ……이처럼 퇴계의 리발기수(理發
氣隨) 기발리승(氣發理乘) 명제는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갈등상황에서 인
간이 느끼게 되는 감정과 그 도덕심리학적 내원(성향)에 대해 훌륭하게
설명해줄 수 있는 유용한 이론체계임을 알 수 있다.”49) 퇴계는 고심 끝
에 ‘리발’과 ‘기발’을 통해 사단과 칠정이라는 도덕정감과 일반 감정의
구분을 강조했는데, 이것을 이와 같이 끔찍한 범죄자의 심리상태를 분
석하는 체제로 이용하는 것은 매우 적절하지 못하다. 물론, 억지로 끌어
당긴다면 그렇게 설명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사
단과 칠정의 기본적인 구조와 근원을 따지는 “리발”과 “기발”을 먼저 적
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사단이 “리발기수”이고 칠정이 “기발리승”이라는 의미를 구체적인 예
로 설명한다면, 다음과 같을 수 있다. 먼저 사단을 살펴보자면, 수재현장
을 보면서 측은한 마음이 자신도 모르게 우쩍 일어났다[理發]. 그래서
나는 휴가를 내서 자원봉사를 할 수도 있고, 혹은 ‘측은하긴 해도 내 삶
이 고단한데 무슨 봉사?’하면서 얼굴을 돌릴 수도 있다. 이 둘이 모두
“氣隨”이다. 사단이 純善이라는 말은 측은해하는 마음만을 가리키지 그
것이 곧 도덕실천이라는 행위 자체를 보장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칠정
에 대해 말하자면, 야구팬이 야구장에 가서 자신이 좋아하는 팀을 열심
히 응원한다[氣發인 동시에 理乘]. 경기를 관람하는 중에 그는 치어리더
들의 리드에 따라 열심히 응원하며 스트레스를 풀 수도 있고, 혹은 지나
치게 흥분하여 마시던 물병을 집어던지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中節’, 즉 법도에 적절함 여부이다. 따라서 사단과 칠정 각각에 따
라 성공적으로 행위를 완성하더라도 그 둘은 결코 같은 의미일 수 없다.
도덕 정감이 자연스럽게 드러남에, 그것에 따라 행동한 것은 분명 도덕
적 선이다. 이는 단지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여 스트레스를 푼 ‘좋음’과
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이와 같은 결과만 다른 것이 아니다. 사단에서
는 자발성이 강조되고, 칠정은 법도에 맞는 것이 중요하다.


49) 이승환, 위의 논문, 229~230쪽.
퇴계 “理發”설 再論 135


최종적으로 이승환은 “퇴계의 감정이론을 수반론적으로 재구성”한다.


“‘사단’이라는 도덕감정은 한 사람이 지닌 ‘리’적 성향이 특정한 시점 t
에 L-type 신경섬유의 자극에 수반하여 예화된 것이다. ‘칠정’이라는 일
반감정은 한 사람이 지닌 ‘기’적 성향이 특정한 시점 t에 K-type 신경섬
유의 자극에 수반하여 예화된 것이다.”50) 필자는 이승환이 어째서 앞에
서 포기했던 수반론을 다시 최종적인 결론으로 주장하는지 이해하지 못
하겠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의 상식에 부합하는 설명을 위해서인지 모
르겠지만, ‘신경섬유’가 ‘기’에 속하는 것이 맞다면 이승환 자신이 고려
했던 ‘하향인과’나 ‘심적 인과력’은 어떻게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인가?


Ⅳ. 반성의 핵심 근거
필자는 문석윤의 의심과 이승환의 부정이 기본적으로 주자학 체계에
만 근거하고 그 이해도 편향적인 반면, 사단과 칠정 자체의 의미 파악에
는 소홀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따라 아래에서 우리는 먼저 사
단과 칠정의 의미와 주자학 체계의 문제를 살펴보고, 그런 다음 퇴계의
주장을 검토해보도록 하겠다.
우선 사단이란, 주지하다시피 맹자가 자신의 성선설의 근거로 제시한
개념으로, 인간이면 누구나 지니는 도덕 정감이다. 이 도덕 정감은 인간
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본성(형식적인 개념), 즉 인의예지와 같은 고유
한 도덕성의 내용으로 절대선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교육 등에 의해
주입된 후천적인 것이 아니라 본능과 같이 선천적인 것이다. 다만, 본성
은 잠재적인 것, 즉 可能態이지 現實態가 아니기 때문에 사단이 늘 언제
나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 단서로부터 잠재적 본성을 완전하
게 실현하는 확충이 필요하다.51) 반면에 칠정은 본래 禮記 禮運에


50) 이승환, 위의 논문, 227~2788쪽.
51) 孟子 公孫丑上6: “無惻隱之心, 非人也; ……惻隱之心, 仁之端也; ……人
之有是四端也, 猶其有四體也. ……, 知皆擴而充之矣.”
136 儒敎思想硏究 第45輯


나오는 개념으로 일반감정을 말한다. 예운편에서는 다만 규범의 필요성
만 강조했지만,52) 中庸에서는 그것을 넷으로 묶고 그 양태를 둘로 구
분했다. 일반감정이 발현하지 않은 상태를 ‘中’이라 해서 세상의 근본이
라 말하고, 발현되었을 때 그것이 상황과 조건에 적절한 것을 ‘和’라 하
여 반드시 따라야할 도리라고 표현했다.53) 감정이 드러나기 전에는 선이
니 악이니 말할 수 없지만, 드러난 다음에는 過不及이 생기기 때문에 규
범에 따라야 한다. 정리하자면, 맹자의 사단은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도덕성의 내용을 드러내고 강조한 것이지만, 칠정이란 일반감정으로 그
것이 드러날 때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있기 때문에 적절한 규범에 따라
야 함을 주장하기 위해 제시되었다. 사단은 도덕실천의 근거를 확보해
주는 개념이고, 칠정은 도덕규범의 필요성과 그것의 준수가 어째서 필
요한지 그 이유를 설명해주는 개념이다.
주자학 체계에서 우리의 논의와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내용은 리기와
심성정 등의 개념 및 그 관계이다. 우선 리기에 대해 말하자면, 리는 천
지만물의 생성원리이자 그 본질로서 所以然, 즉 존재의 근거와 所當然,
즉 당위적 원리를 의미한다. 그것은 형이상의 원리로 초월적이고 절대
적이며, 현상으로써의 운동을 하지 않는 형이상학적 실체이고 절대선이
다. 반면에 기는 구체적인 천지만물 및 그 현상을 구성하는 재료이기 때
문에, 형이하자이며 끊임없이 운동 변화하는 것으로 그 자체는 선악과
무관한 몰가치한 것이다. 주희는 이 둘의 관계를 ‘불상리’와 ‘불상잡’으
로 규정했다. 현실세계의 구체적인 사물과 그 현상은 원리나 재료 한 가
지로만 구성될 수 없다. 그것들은 반드시 리와 기의 결합에 의해 이루어
진다(불상리). 그러나 형이상자인 리는 구체성을 반드시 필요로 하지 않
기 때문에 기보다 논리적으로 앞서며(理先氣後), 따라서 그 둘은 결코 동


52) 禮記 禮運第九之二: “何謂人情? 喜怒哀懼愛惡欲. 七者, 弗學而能. ……故
聖人之所以治人七情, 脩十義, 講信脩睦, 尙辭讓, 去爭奪, 舍醴何以治之?”
53) 中庸 第一章: “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中也者, 天下
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퇴계 “理發”설 再論 137


일한 차원의 개념일 수 없다(불상잡).


심성론에 있어 주희는 기본적으로 程頤의 性卽理와 心性情 三分을 계
승했고, 張載의 天地(本然)之性과 氣質之性 및 心統性情이라는 개념과
명제를 수용했다.54) 우선 ‘성즉리’란 인간의 본성이 당위 원리인 리이고,
이것이 또한 천지만물의 존재근거가 되기도 하기 때문에 초월적이고 절
대적이며 선이라는 뜻이다.55) 윤리학적 측면에서 이 명제는 도덕원리의
확고부동한 정립을 의미한다. 그러나 현실세계의 인간은 다른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리기의 결합으로 구성된다.56) 따라서 현실적 인간 본성은 특
정한 기질 안에 리가 들어있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기질지성이다.57) 기
질지성은 각각의 사람이 서로 다른 기질을 타고나기 때문에 서로 상이
하게 표현되며 선악의 구분이 있을 수 있다.58) 그러나 본연(천지)지성과
기질지성이 전혀 다른 것은 아니다.59) 현실적으로 리가 기에 부착되듯,
본연지성(도덕성)이 기질(자연성) 속에 들어있는 것이 바로 기질지성이
기 때문이다.60) 그리고 ‘심통성정’이란 기본적으로 심이 성과 정을 통섭
하고 포괄한다는 의미인데,61) 주희에게 있어 심성정은 분명하게 구분되
는 개념이다.62) 성은 절대선인 리이지만 심은 기에 속하는 것(氣之靈)이
고 정은 리와 기의 결합으로 나타나서, 심은 몰가치하고 정은 선 혹은


54) 물론, 주희가 장재의 개념과 명제를 그대로 수용한 것은 아니다. 그것에 대한
비교는 생략하겠다.
55) 朱子語類 卷五: “性卽理也, 在心喚做性, 在事喚做理.” “心有善惡, 性無不
善.” 이때의 성은 천지지성이다.
56) 同上: “人之所以生, 理與氣合而已.”
57) 朱子大全 卷五八, 答徐子融(3): “氣質之性, 只是此性墮在氣質之中, 故隨氣質
而自爲一性.”
58) 朱子語類 卷五: “若論氣質之性, 亦有不善.”
同上, 卷四: “性便是理. 人之所以有善有不善, 只緣氣質之稟各有淸濁.”
59) 朱子大全 卷四四, 答方伯謨(3): “大抵本然之性與氣質之性, 亦非判然兩物也.”
60) 同上, 卷五八, 答徐子融(3): “氣質之性, 只是此性墮在氣質之中, 故隨氣質而自
爲一性. ……向使元無本然之性, 則此氣質之性, 又從何處得來耶?”
61) 朱子語類 卷九八: “統猶兼也.”
62) 同上, 卷五三: “惻隱是情, 惻隱之心是心, 仁是性.”
138 儒敎思想硏究 第45輯


악 모두로 표현될 수 있다.63) 움직임이 있을 수 없는 절대적 리인 성은
끊임없이 활동하는, 기에 속하는 심을 통해 드러나는데, 이것이 바로 정
이다. 그래서 “정은 성에 근거하고, 성은 발현하여 정이 된다.”64) 성은
정의 내재 근거이고, 정은 성의 외적 표현이다. 성과 정은 맹자에서처럼
같은 것이 아니라, 불(성)과 연기(정)의 관계와 같이 구분되는 것이다.
주희가 보기에, 칠정뿐만 아니라 사단도 이미 발현된 정이다.65) 바로
여기에서 문제가 생긴다. 도덕원리인 성은 절대선이다. 따라서 그것이
발현된 정 또한 선해야 한다. 사단은 그 실현 여부와 상관없이 그 자체
로 리이고 선이지만, 칠정은 안으로 심의 통제를 받아야 하고 밖으로 규
범에 따라야만 선할 수 있다. 그렇다면 ①사단과 칠정은 동일하게 도덕
원리인 성으로부터 발현된 것인가? ②그것들의 선은 동일한 의미를 갖
는가? ③사단도 이미 발현된 정이라면 리와 기의 결합일 것이고, 그렇다
면 그것의 절대선은 어떻게 보장될 수 있는가? 더구나 ④운동 변화하지
않는 리인 성은 기에 속하는 심을 통해 발현하는데, 그 자신이 움직이지
(주재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선을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인가? 이런 문제
들이 있었기 때문에 퇴계와 고봉으로부터 시작된 논변이 발생했던 것이
다.
퇴계는 고봉과 달리, 주로 원칙과 이상에 중점을 둔 ‘리기의 불상잡’
에 근거하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맹자로 대표되는 유학 자체
의 기본입장(인간의 주체성과 존엄성을 강조하는)을 견지했다. 퇴계가
‘리기의 불상잡’을 강조했다는 것은 앞서 두 분도 긍정했듯이, 도덕정감
과 일반감정의 구분을 강력하게 주장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것에만
국한한다면, ‘리의 능동성’ 테제는 확인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우선
맹자에 대한 퇴계의 인식을 검토하도록 하겠다. 필자가 보기에, 퇴계는
고봉과의 논변을 두 번째에서 이미 끝냈다. 부치지 않은 세 번째 편지가


63) 同上, 卷五: “性無不善, 心所發爲情, 或有不善.”
64) 朱子大全 卷三二, 答張敬夫: “情根於性, 性發爲情.”
65) 朱子語類 卷五三: “惻隱是情.” 同上, 卷五: “仁, 性也; 惻隱, 情也.”
퇴계 “理發”설 再論 139


있긴 하지만, 그 논리가 크게 바뀌지 않았음을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이
다. 그 두 번째 편지에서 퇴계는 이렇게 말했다.


“사단의 발현은 진실로 기가 없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맹자가 가
리키는 것은 실제로 기에서 발현한 곳에 있지 않다. 만일 기를 겸해서 가리켰다
면 이미 (그것은) 다시 사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단은 비록 기를 탄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맹자가 가리키는 것은 기를 타
는 곳에 있지 않고, 오직 순수한 리가 발현하는 곳에 있다. 그래서 仁의 단서․
義의 단서라고 말했다.”66)


주자학의 세계에서 사는 학자가 어찌 쉽게 주희의 이론체계를 극복할
수 있겠는가? 퇴계는 고봉의 반박을 주자학의 체계 안에서 극복하려 했
다. 그렇기 때문에 사단에도 기가 없는 것은 아니며, 기를 탄다고도 말
했다. 그러나 그는 주희보다 유학의 기본정신에 더 집중했다. 그래서 끊
임없이 맹자가 강조하는 것이 “순수한 리의 발현”임을 주장했던 것이다.
퇴계는 비록 스스로 분명하게 언급하지 않았지만, 사단이 인간을 인간
이게 하는 근거의 표현임을 몽롱하게나마 인식했기 때문에 계속해서 맹
자를, 맹자의 취지를 드러내려 했던 것이다. 맹자의 취지는 무엇이었던
가? “사람이 금수와 다른 근거는 매우 적다. 일반인들은 그것을 버리지
만 군자는 그것을 보존한다. ……仁義로부터 실행하지 인의를 실행한
것이 아니다.”67) 사람이 사람인 근거는 인의 등의 도덕성에 있다. 그것
은 외재하는 규범이 아니라 내재하는 것으로, 계기가 주어지기만하면
스스로 드러나는 도덕원리이다. 그래서 맹자는 그것이 사단이라는 도덕
정감을 그 내용으로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孺子入井”의 예에서 나타


66) 答奇明彦論四端七情第二書, 退溪先生文集 卷16, 31쪽右: “四端之發, 固曰
非無氣. 然孟子之所指, 實不在發於氣處. 若曰兼指氣, 則已非復四端之謂矣.”
32쪽左: “四端雖云乘氣, 然孟子所指不在乘氣處, 只在純理發處, 故曰仁之端義
之端.”
67) 注5) 참조.
140 儒敎思想硏究 第45輯


나듯, 어린아이가 아장아장 걸어서 우물에 빠지는 것을 ‘유의하고 있다
가 본 것’이 아니라 “얼핏[乍見]” 보았는데 자신도 모르게 “깜짝 놀라
측은해하는 마음”이 표출되는데서 보인다.68) 이런 예는 본심의 直發을
나타낸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맹자의 이런 체계는 주자학 안에서 설
명하기 어렵다. 그래서 육구연이 주희의 학문을 “支離하다”고 했던 것이
다. 퇴계는 주자학을 신봉했기 때문에 참으로 난감했을 것이다. 그러나
계속해서 “맹자가 가리키는 것”이 “순수한 리의 발현”임을 강조했다. 우
리는 이런 강조를, 주자학에 위배되더라도 유학의 근본정신을 견지하려
는 퇴계의 의지 표명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기실, 퇴계는 그다지 분명하게 주자학의 한계를 인식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부지불식간에 주희를 떠나서 맹자에게로 나아갔다. 우
리는 다음의 인용문에서 그 실례를 확인할 수 있다.


“옛 사람은 사람이 말을 타고 출입하는 것으로써 리가 기를 타고 다니는 것
을 비교했는데, 딱 좋다. 무릇 사람은 말이 아니면 출입하지 못하고, 말은 사람
이 아니면 궤도를 잃는다. 사람과 말은 서로 필요로 해서 서로 떠나지 않는다.
사람은 이것을 가리켜 말함이 있는데, 혹자는 몽땅 가리켜서 그것이 다닌다고
말하니 사람과 말이 모두 그 가운데 있다. 사단과 칠정을 渾淪하게 말하는 것이
이것이다. 혹자는 사람이 다님을 가리켜 말하니 말을 함께 말하지는 않지만 말
의 다님이 그 가운데 있다. 사단이 이것이다. 혹자는 말이 다님을 가리켜 말하
니 사람을 함께 말하지는 않지만 사람의 다님이 그 가운데 있다. 칠정이 이것이
다.”69)


68) 公孫丑上6: “所以謂人皆有不忍人之心者: 今人乍見孺子將入於井, 皆有怵惕
惻隱之心; 非所以內交於孺子之父母也, 非所以要譽於鄕黨朋友也, 非惡其聲而
然也.”
69) 答奇明彦論四端七情第二書, 退溪先生文集 卷16, 32쪽左-33쪽右: “古人以
人乘馬出入, 比理乘氣而行, 正好. 蓋人非馬不出入, 馬非人失軌途; 人馬相須不
相離. 人有指說此者, 或泛指而言其行, 則人馬皆在其中, 四七渾淪而言者是也.
或指言人行, 則不須倂言馬, 而馬行在其中, 四端是也; 或指言馬行, 則不須倂言
人, 而人行在其中, 七情是也.”
퇴계 “理發”설 再論 141


여기에서 우리는 사단과 칠정에 대한 퇴계의 정확한 이해를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밑줄 친 부분은 우리의 주제, 즉 ‘리의 능동성’과 직접적
으로 관련이 있다. “사람은 말이 아니면 출입하지 못한다.” 리는 형이상
학적 실체일 뿐, 현실적인 물건이 아니다. 그러므로 현실세계에서의 운
동은 리에 있어서 불가능하다. 만일 리에 대해서 현실세계에서의 운동
을 꼭 말해야 한다면, 그것은 기를 타고서야 가능하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퇴계의 리가 주희에서처럼 무
기력하지는 않다. 위에서 인용한 퇴계의 설명을 따른다면, 그것은 분명
하게 기를 조종하고 제어할 수 있다. “말은 사람이 아니면 궤도를 잃는
다.” 이렇게 주재성이 강조되는데, 능동적이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가?
주재하는 것이 피동적일 수 있다는 것인가? 어째서 ‘능동성’을 반드시
현실세계에서의 움직임운동으로만 이해해야 하는가? 퇴계의 ‘리’는 현
상적인 운동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도덕주체성의 자발이라는 의미에서
능동적인 것이다. 사단으로 표현되는 ‘리’는, 퇴계가 보기에, 적어도 심
성론적 의미에서라도 반드시 능동적인 것이어야 한다.


Ⅴ. 맺는 말
철학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우리는 철학자인가? 우리 사회에서는 그것
을 쉽게 용인하지만, 중국학자들만 해도 스스로를 철학자가 아니라 ‘哲
學史家’라고 표현한다. 그들이 겸손하다는 말이 아니라, 그만큼 적확하
게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적어도 필자는 스스로를 철학
자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니, 못한다. 자신의 이론체계가 정립되어
야만 철학자라고 생각하며, 그래서 스스로는 아직 철학 특히 동양의 전
통철학을 연구하는 학자라고만 인정한다. 그리고 전통 철학을 연구할
때 우리는 ‘나의 이해’가 아니라 가능한 범위에서라도 ‘객관적 이해’를
먼저 얻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것에 어떤 문제가 있으면 있다고 적시하
면 될 뿐, 미화시킬 이유가 없다. 옛 사람들의 이론체계가 오늘날 우리


142 儒敎思想硏究 第45輯


들의 엄밀한 기준에 적합하기는 쉽지 않다고 하더라도, 또한 동정적으
로 이해해준다고 하더라도. 그러나 이런 태도가 자신의 입장에 근거한,
혹은 오늘날의 상식에 부합시키기 위한 변형을 용인할 수는 없다. 말 그
대로 ‘객관적인’ 이해와 평가가 있어야 할 것이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사단과 칠정을 리와 기로 분석한다는 것 자체가
더 할 수 없이 주자학적 시도이다. 도덕정감이든 일반감정이든 결코 그
런 분석틀을 사용해서 적절하게 해석될 수 없다고 느낀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해야 한다면, 퇴계와 같이 하는 것이 “딱 좋을” 것이다. 우리의
도덕성은 저 높은 곳에서 위엄만 갖추고 동상처럼 굳어있는 것이 아니
라 活潑潑하게 살아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단과 같은 도덕정감이 그 내
용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퇴계는 이런 체계에 기초하는 유학의 근본정
신에 투철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나 존경해마지 않던 주희
에서 벗어나 맹자에게로 나아갔던 것이다. 퇴계가 보기에, 사단은 반드
시 칠정과 구분되어야 할 뿐 아니라, 도덕본성의 자기현현이어야 했고
그래서 그것을 주자학적으로 표현할 때 ‘리발’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우리는 이런 그의 주장을 ‘리의 능동성’ 확립이라고 정리한다.
필자는 이 글을 마치면서 맹자의 “不得已”라는 단어가 생각난다. 스스
로 생각하기에도, 이런 글을 써서 공연히 남들로부터 나대기 좋아하는
사람으로 인식될 것 같다. 그러나 퇴계의 ‘리발’은 반드시 능동성으로
해석되어야만 퇴계학의 독창성이 제대로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에 대한 의심과 부정도 생각해볼 수는 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그
런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이와 같은 필자의 “부득이”가 이렇게 이 글
을 쓰게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동양철학, 특히 유학을 업으로 하는 학자
라면 반드시 이 논의를 명확히 하여 우리 유학에서 거의 유일하게 독창
적이라는 퇴계의 논점을 확실하게 견지해야 할 것이다.


▣ 투고일: 11.9.6 심사일: 11.9.16 심사완료일: 11.9.28
퇴계 “理發”설 再論 143


<참고문헌>
孟子
禮記
中庸
朱子大全
朱子語類
退溪先生文集
陳來, 안재호 옮김, 송명성리학 , 예문서원,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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傅偉勳, 「儒家心性論的現代化課題」, 鵝湖 116호, 民國 74년 2월.
승계호, <마음과 물질의 신비>(인터넷 다운로드)
144 儒敎思想硏究 第45輯
<中文摘要>
再論退溪的‘理發’說 / 安載晧
退溪並不只是一位惟韓國學者才肯定其學問成就的哲學家, 而且是國外諸多專
家都承認其成就的幾乎唯一的韓國哲學家. 然而有意思的是, 朱子學專業的學者認
爲退溪學就是朱子學應當的發展, 而陽明學專業的學者則主張那是克服朱子學以
同陽明學或孟子學結合的哲學, 這個事實. 無論那是朱子學的發展還是同陽明學的
結合, 其根據乃在於他說明‘理發’的主張中. ‘理發’之論, 雖然在朱子學的體系中可
能會發生問題, 但是是一種能夠確保儒學根本精神 - 貞立人類的主體性及尊嚴性
- 的主張. 換言之, ‘理發’說是一種由强調理卽道德情感的主體性的自發, 來確認同
禽獸幾乎無不同的人類如何能具有尊嚴性之主張也.
然而, 近來幾個學者根據於偏僻的朱子學傳統, 又受西方心理哲學認知科學等
的啓發, 來發表懷疑甚至否定退溪‘理發’說核心意義的論文. 筆者並不認爲他們的
功作豪無意義, 但亦是該要反省的主張. 文錫胤敎授的懷疑和李承煥敎授的否定,
是由於唯據朱子學體系且其理解也偏僻, 反而忽視對四端七情確義的把握之故也.
儘管各照四端和七情而成功地完成某種行爲, 但其兩者決不可能是同樣的意義.
四端是不知不覺地自然發現的道德情感, 確是個道德的善; 七情則由生理欲求發生
的一般感情, 其‘善’並非道德的. 四端和七情不只在結果上不同, 而且强調的方面
也不同. 在四端就强調自發性, 而在七情則合於準則才重要.
退溪的理明確可以操縱制御氣. “馬非人失軌途.” 這樣强調主宰性, 怎能說非能
動的? 是說能主宰的會是被動的? 爲何必須將‘能動性’理解爲一種現實世界上的運
動耶? 退溪的理不是在現象性運動的意思, 而是在道德主體性的自發這個意義上是
能動的. 表現爲四端的理, 依退溪看, 至少在心性論的意義上, 必須是能動的.
其實, 把四端和七情用理和氣來分析的企圖, 就正是朱子學性的. 無論是道德情
感或是一般感情, 並不能用這種分析架構來確切解釋的. 但是, 一定要做, 那同退
溪這樣做“正好”. 吾人之道德性並非高高在上而威嚴地固定不動的, 而是活潑潑的.
是故, 它就表現爲像四端那樣的道德情感.
關鍵詞 : 退溪, 理發, 理的能動性, 主宰性, 儒學的根本精神, 主體性和尊嚴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