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Ⅰ. 들어가는 글
Ⅱ. 사칠논변의 여섯 명제
Ⅲ. ‘소취이언’과 ‘소종래’
Ⅳ. 사단과 칠정의 선과 악
Ⅴ. 나가는 글
<국문 요약>
이 논문은 ‘소취이언’과 ‘소종래’라는 두 가지 용어들을 중심으로 사단칠정
논변에 나타난 이황과 기대승의 견해를 조명한다. 이황은 사단과 칠정을 리와
기로 분속하여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한편, 기대승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많은 성리학적 견해를 공유하고 있음에도 이렇게 상
반된 주장을 하는 이유는 이황이 소취이언이란 표현을 통해 사단과 칠정에
대해 개념적 구분을 하는 반면에, 기대승은 소종래란 표현을 통해 이황이 그
것들에 대해 사실적 분리를 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 논문의 핵
심 논제이다. 이 논문에서 우리는 이황과 기대승의 사칠논변에서 종종 언급되
는 ‘소취이언’과 ‘소종래’의 함축적인 의미를 파악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이황과 기대승이 어떤 지점에서 서로 견해를 달리 하는가를 이해하고 또한
그들이 견해를 달리 하는 정확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주제어: 사칠논변, 이황, 기대승, 소취이언, 소종래
* 계명대 인문대학 철학과 교수.
130 儒敎思想硏究第44輯
I. 들어가는 글
16세기 사단칠정논변(이하 ‘사칠논변’으로 略記)은 “사단은 리의 발이
고, 칠정은 기의 발이다(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라는 이황의 명제에
대해 기대승이 의문을 제기하면서 비롯되었음은 잘 알려져 있다. 기대
승에 따르면, 사단과 칠정을 각각 理發과 氣發로 분속하여 규정한다는
것은 결국 그것들을 서로 무관한 별개의 정들로 간주하는 것이 된다. 왜
냐하면 리는 形而上者이고 기는 形而下者이므로 서로 공통된 어떤 특징
도 갖지 않으며, 따라서 사단과 칠정을 각각 리발과 기발로 분속시켜 설
명하면 그것들도 서로 공통된 특징을 갖지 않는 것들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단과 칠정은 분명히 모두 ‘情’을 지칭하는 것이므로 그것들은
분명히 공통된 어떤 특징을 갖고 있으며, 그런 특징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기대승은 사단과 칠정을 분리시키는 듯이 보이는 이황
의 규정을 그대로 따를 수 없다는 것이다.1)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황
이 한편으로 사단과 칠정을 각각 리와 기에 분속시키는 위의 명제를 계
속 주장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리와 기는 물론이고 사단과 칠정도 서
로 분리된 것처럼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기대승의 지적에 동의한다는
것이다. 이들의 태도는 일견 모순된 듯이 보이지만, 개념과 현실을 구분
함으로써 전자는 개념적 규정으로 설명하고 후자는 현실적 규정으로 설
명하면 그것은 모순이 아니다.
이황과 기대승은 모두 리와 기가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不相離와 서
로 섞일 수 없다는 不相雜을 인정하며, 또한 그들은 사단과 칠정이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서도 동의한다. 하지만 이황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나아가 말하거나 또는 가리켜 말하는 바, 즉 所就以
言(또는 所就而言) 또는 所指而言이 다르다는 점에서 그것들을 분속시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기대승은 그것들의 所從來가 다르
1) 기대승과 이황의 동의 여부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남지만(2010), 47-48쪽; 홍
정근(2010), 294-296쪽 참조..
이황과 기대승의 사칠논변에 대한 분석적 검토 131
다는 점에서 그것들을 분속시켜 설명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아래
에서 논자는 사칠논변에서 종종 언급되는 ‘소취이언(또는 소지이언)’과
‘소종래’라는 용어들이 각각 개념적 구분과 사실적 분리를 함축하는 것
으로 규정함으로써, 사단과 칠정에 대한 이황과 기대승의 견해를 살펴
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전자가 사단과 칠정을 ‘소취이언’의 입
장에서 이해하고 후자가 ‘소종래’의 입장에서 이해했으며, 그들이 이런
개념들을 명확하게 구분했더라면 그들의 논변이 수월하게 해결될 수도
있으리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 결론을 위해, 우리는 먼저 (i) 사칠논변에서 사단과 칠정을 리와 기
로 분속하는 명제를 여섯 가지로 정리하고, 이 과정에서 사단과 칠정에
대한 이황이 소취이언의 입장을 취하는 한편 기대승이 소종래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런 뒤에 (ii) 우리는 소취이언과 소종
래가 각각 ‘개념적 구분’과 ‘현실적 또는 사실적 분리’라는 의미를 함축
하고 있음을 자세히 검토하고, (iii) 그 개념들이 사단과 칠정의 선성에
대한 논의에서도 일관되게 적용되고 있음을 본다. 특히, 우리는 ‘소취이
언’과 ‘소종래’에 대한 개념 규명 및 규정을 통해, 이황과 기대승이 어떤
지점에서 서로 견해를 달리 하고, 또한 그 이유가 무엇인가를 파악한다.
Ⅱ. 사칠논변의 여섯 명제2)
2) 이 논문의 주제가 ‘소취이언’과 ‘소종래’의 의미에 대한 규정 및 규명을 통해
사단과 칠정에 대한 이황과 기대승의 태도를 보이는 것이므로, 여섯 명제에
대한 논의가 부각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명제들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각각
의 명제가 거부되고 새로운 명제가 제시되는 이유에 대한 관심을 유지하는
것도 상당히 중요하다. 논자가 여섯 명제들을 처음 언급했던 것은 Yoo(2011
근간)이며, 그 논문에서 논의되거나 언급된 내용은 가능한 배제하려 노력했
다. 하지만 논지 전개상 불가피하게 반복할 수밖에 없는 내용은 최소한으로
축소시켜 언급했음을 밝힌다. 한편, 여섯 명제들 속에서 ‘발’의 주체가 종종
달라진다는 점에 대해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P1)과 (P3)에서
‘발’의 주체는 각각 사단과 칠정이지만, (P2)와 (P5)에서 ‘발’의 주체는 사단과
칠정이 아니라 리와 기이다. 이황과 기대승은 그런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지
132 儒敎思想硏究第44輯
주지하듯이, 이황은 정지운이 「天命圖」에 언급한 (P1) “사단은 리에
서 발하고, 칠정은 기에서 발한다.”3)란 문구를 (P2) “사단은 리의 발이
고, 칠정은 기의 발이다.”4)로 수정할 것을 제안했다. 다른 기회에 정지
운은 기대승에게 그에 대한 의견을 청했고, 기대승은 “그림과 설명에
오류가 많으니 올바른 주장이 될 수 없다.”고 평가했다.5) 이 말을 전
해들은 이황이 1559년(기미년) 1월 5일에 기대승에게 서신을 보내면
서 사칠논변이 비로소 시작된다.
… 사단과 칠정에 대해 논의한 내용을 친구들로부터 전해 들었다. 내 생각에
도 나 자신이 일찍이 그렇게 말했던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염려했는데, 비판을
받고는 거칠고 잘못됨을 더욱 깨닫게 되어 “사단의 발은 순수한 리이므로 선하
지 않음이 없고, 칠정의 발은 기를 겸하므로 선함과 악함이 있다.”로 즉시 고쳤
만, 그것들 사이에는 분명히 의미상의 차이가 있다. (P1)은 사단의 발이 리에
서 유래한다는 의미로 볼 수 있고, (P2)는 리의 발이 사단인 반면에, (P3)은
사단의 발이 리라는 것이다. 성리학적 체계에서, 리가 발해서 사단이 된다고
는 할 수 있지만, 사단이 발해서 리가 된다고는 할 수 없으므로, 엄밀하게 보
자면 (P2)는 옳지만 (P3)은 옳지 않다. 또한 사단의 발이 리에서 유래한다는
(P1)의 의미는 명확하지 않지만, 아마도 사단이 발하는 것은 기질 속의 리(따
라서 성)에서 유래한다는 것은 성이 발해서 정이 된다는 ‘性發爲情’으로 이
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황과 기대승은 그런 의미상의 차이에 주목하지 않지
만 ‘발’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체가 무엇인가를 파악해야 한다.
3) 사칠논변의 서신 자료들은 <사단칠정논쟁연구팀, 퇴계․고봉, 율곡․우계: 사단
칠정논변, 파주: 한국학술정보, 2008>을 이용했다. 이 자료집에는 이황과
기대승이 주고받은 서신 12서, 그리고 이황의 문집에는 실려 있지만 기대승
에게 보내지 않은 이황의 서신 1서를 포함한다. 그것들은 예를 들어 ‘<사칠
1서(이황)>, 138-139쪽’과 같은 형식으로 언급하여, 사칠논변의 첫 번째 편지
로서 이황이 기대승에게 보낸 서신이며 138-139쪽에서 찾아볼 수 있음을 나
타낸다. <사칠 3서(이황)>, 161-162쪽과 <사칠 4서(기대승)>, 234쪽, (P1) 四
端發於理, 七情發於氣.
4) 비교: <사칠 3서(이황)>, 169쪽, (P2) 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
5) 국역 고봉집 3권, 「兩先生四七理氣往復書上篇」, 「辨錄」, 圖與說多有差誤, 恐
不得爲正論也.
이황과 기대승의 사칠논변에 대한 분석적 검토 133
다. 이렇게 말하면 문제가 없을지 모르겠다.6)
여기에서 이황은 (P1)과 (P2)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P3) “사단의 발
은 순수한 리이므로 선하지 않음이 없고, 칠정의 발은 기를 겸하므로 선
함과 악함이 있다.”7)라는 새로운 명제를 언급한다.
(P1) 정지운의 최초 명제 (1537년): 사단은 리에서 발하고, 칠정은 기에서 발
한다.
(P2) 이황의 1차 수정 (1553년): 사단은 리의 발이고, 칠정은 기의 발이다.
(P3) 이황의 2차 수정 (1559년): 사단의 발은 순수한 리이므로 선하지 않음이
없고, 칠정의 발은 기를 겸하므로 선함과 악함이 있다.
(P1)과 (P2)의 차이점은 “리에서 발한다(發於理)”와 “기에서 발한다(發
於氣)”를 각각 ‘리의 발(理之發)’과 ‘기의 발(氣之發)’로 바꾼 것이다.
한편, (P3)의 앞 구절에 언급된 ‘순수한(純)’은 사단의 발이 ‘오직 리에
서만 이루어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뒷 구절의 ‘겸한다(兼)’는 칠
정의 발이 ‘기와 리의 합에서 이루어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한
(P3)에서는 ‘리’만을 갖는 경우에는 선함만을 갖는 반면에, ‘리’와 ‘기’
를 겸하는 경우에는 선함과 악함을 모두 갖는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황이 (P1)을 (P2)로 수정하고, 그것을 다시 (P3)으로 수정해
서 제시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들 사이에는 어떤 의미상의 차이가
있는가?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이 이황과 기대승의 사칠논변에 대해 논
의했지만, 이러한 이유를 명확하게 밝힌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
나 그런 이유를 밝히는 것이 사칠논변을 이해하기 위한 선행 과제임은
6) <사칠 1서(이황)>, 140쪽, 又因士友間, 傳聞所論四端七情之說, 鄙意於此亦嘗
自病其下語之未穩, 逮得砭駁, 益知疎繆, 卽改之云, 四端之發純理, 故無不善,
七情之發兼氣, 故有善惡. 未知如此下語無病否.
7) <사칠 1서(이황)>, 140쪽, (P3) 四端之發純理故無不善, 七情之發兼氣故有善
惡.
134 儒敎思想硏究第44輯
분명하다. 우리는 이황에게 보내진 <사칠 2서(기대승)>에서 단서를 발
견할 수 있다.
(i) “사단은 리에서 발하므로 선하지 않음이 없고, 칠정은 기에서 발하므로 선
함과 악함이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리와 기를 두 가지로 구분하는 것이다. 또
한 이것은 칠정이 성에서 나오지 않고 사단은 기를 타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 그리고 (ii) “사단의 발은 순수한 리이므로 선하지 않음이 없고, 칠정의 발은
기를 겸하므로 선함과 악함이 있다.”고 고쳐 말하는 것은 (i)보다 낫긴 하지만
역시 옳지 않다.8) (알파벳과 밑줄은 논자의 것이다.)
(i)은 “사단발어리이무불선, 칠정발어기이유선악.”으로서, 앞 구절의
‘이무불선’과 뒤 구절의 ‘이유선악’이 덧붙어 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정지운의 최초 명제인 (P1) “사단발어리, 칠정발어기.”와 동일하다. 기
대승은 위 인용문에서 (i)을 옳지 않다고 말하는 세 가지 이유를 제시한
다. 첫째, ‘리와 기를 두 가지로 구분’해서는 안 되며, 둘째, ‘칠정이 성
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말해서는 안 되고, 셋째, ‘사단은 기를 타지 않는
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첫 번째는 (P1)이 리와 기를 마치 서로 분리되
어 존재하는 것처럼 다루므로 적절하지 않다는 지적이다. 둘째는 사단
과 칠정이 모두 정이므로 사단이든 칠정이든 모두 성에서 (그리고 성은
사물 안에 내재한 리이므로 결국은 리에서) 나온다고 말해야 한다는 지
적이다. 그리고 셋째는 사실상 리와 기가 서로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
재할 수 없으므로, 사단의 발함을 말할 때는 理만 전제하는 것이 아니라
氣도 반드시 전제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기대승
은 칠정을 말할 때도 오직 기에서만 발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
시 리의 존재도 전제해야 한다는 네 번째 이유를 제시해야 하지만 그
8) <사칠 2서(기대승)>, 146-147쪽, 今若以謂四端發於理而無不善, 七情發於氣而
有善惡, 是理與氣判而爲兩物也, 是七情不出於性, 而四端不乘於氣也. … 若又
以四端之發純理, 故無不善, 七情之發兼氣, 故有善惡者而改之, 則雖似稍勝於
前說, 而愚意亦恐未安.
이황과 기대승의 사칠논변에 대한 분석적 검토 135
점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다시 정리하자면, 기대승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이유에서 (P1)을 거부하는 것으로 보인다.
① 사단이 리에서 나오고 칠정이 기에서 나온다고 말함으로써 리와 기가 마
치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처럼 다룬다.
② 사단과 칠정이 모두 성(리)에서 나오는데, 칠정이 기에서만 나오는 것처럼
말한다.
③ 리와 기는 서로 분리되지 않으므로 사단을 말할 때 반드시 기를 전제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
④ ③과 동일한 이유에서, 칠정을 말할 때도 반드시 리를 전제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9)
기대승은 여기에서 선함이나 악함의 문제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으
로 보인다. 즉, 그가 지적하는 것은 (P1) 자체이지 그에 덧붙여진 ‘無不
善(선하지 않음이 없다)’이나 ‘有善惡(선함과 악함이 있다)’에 대한 것이
아니다. 한편, (ii)는 (P3)과 동일한 문장으로서, 기대승이 (ii)가 (i)보다 낫
지만 역시 옳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결국 (P3)이 (P1)보다 낫긴 하지만
그럼에도 역시 옳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기대승이 (i)에 대해 논의할
때 사단과 리의 관계, 그리고 칠정과 기의 관계만 언급하며 리의 선함이
나 기의 선함과 악함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과 마
찬가지로, (ii)에서도 “사단지발순리, 칠정지발겸기.”가 옳은가 또는 그렇
지 않은가에 대해 고찰하는 것이지 ‘무불선’과 ‘유선악’에 대해서는 무
관심하다.10) 그러므로 기대승이 실제로 관심을 갖는 명제는 다음과 같이
기술될 수 있다.
9) 위에서도 밝혔듯이, 이것은 기대승 자신이 밝힌 이유가 아니라 우리가 추론한
이유이다.
10) 기대승은 이황에게 두 번째 편지를 보낸 뒤에야 자신이 문제를 제기했던 이
황의 명제에는 ‘무불선’과 ‘유선악’이란 표현이 없었음을 깨닫는다. <사칠 4
서(기대승)>, 234쪽, 今而再檢之, 則只有四端發於理, 七情發於氣二句, 而無不
善有善惡等語則無之참조.
136 儒敎思想硏究第44輯
(P3-1) 사단의 발은 순수한 리이고, 칠정의 발은 기를 겸한다.
위 인용문에서 기대승은 (P1)과 (P3-1)을 모두 거부하며, (P1)을 거부하
는 이유는 위에 언급된 ①-④인 반면에, (P3-1)을 거부하는 이유는 <사칠
2서(기대승)>에서 찾아볼 수 있다.
⑤ 이것[사단]은 진실로 순전히 천리가 발한 것이지만, [그것은] 칠정 외에서
나올 수 없는 것이며 칠정 가운데서 발하여 절도에 맞은 것이다. 그러니
어찌 사단과 칠정을 서로 대비하여 말하거나 ‘순수한 리’와 ‘기를 겸한
것’으로 대비하여 말할 수 있겠는가?11)
기대승에 따르면, 칠정 가운데 절도에 맞는 것 또는 중절한 것이 사단
이다. 다시 말해서, 사단은 칠정의 일부를 지칭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
런데 사단은 순수한 리에서 발하고 칠정은 리와 기를 겸한 데서 발한다
고 구분하여 말하는 것은 마치 사단의 근원과 칠정의 근원이 서로 다른
것처럼 말하는 것이 되지만, 그렇게 구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
단이 칠정의 일부’라는 이러한 기대승의 주장은 이황의 견해와 다르며,
두 사람 사이에서 지속적인 논란의 핵심이 된다.
한편, 위에 인용했던 <사칠 2서(기대승)>에서 기대승은 자신이 왜
(P2)를 거부했는가에 대한 이유를 언급하지 않는다. 이황은 추만이 말한
(P1)을 “순리(순수한 리)와 겸기(기를 겸함)로 수정”했다고 말하는데, 이
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듯이 그가 (P1)을 (P2)로 수정한 것이 아
니라 (P3)으로 수정했음을 의미한다.
예전에 정지운이 도[천명도]를 만들면서 사단은 리에서 발하고 칠정은 기에
서 발한다고 했는데, [나는 그것이] 분별이 지나치게 심해 논쟁의 단서가 될 것
11) <사칠 2서(기대승)>, 146-147쪽, 此固純是天理所發, 然非能出於七情之外也,
乃七情中發而中節者之苗脈也. 然則以四端七情對擧互言, 而謂之純理兼氣可乎.
이황과 기대승의 사칠논변에 대한 분석적 검토 137
을 염려했다. 그러므로 아래에서 순리(순수한 리)와 겸기(기를 겸함) 등으로 수
정했지만, 그 말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12)
이처럼 논의의 초반부에 이황과 기대승은 자신들이 각각 옹호하거나
반박하는 명제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 기억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그들이 함께 출발점으로 승인한 명제가 바로 (P3)이었지만, 위
에서 보듯이 기대승의 논의는 실제로 (P3-1)에 초점을 맞춘다. 기대승에
게 보내는 첫 번째 편지에서, 이황은 자신이 (P3)에서 사용했던 표현들
이 적절한가를 질문하고, 이에 대해 기대승은 부정적인 답신을 보낸다.
사칠논변은 처음에 기대승이 이황의 명제 (P2)가 리와 기를 분리시킨
다고 보았던 데서 시작되었으며, 그는 그러한 분리 가능성의 여지를 남
기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기대승의 그런 노력과는 달리, 우리가
이황의 주장처럼 리와 기를 분리시켜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가능
해 보인다. 예를 들어, 우리는 1, 2, 3, 4 등의 숫자를 말할 때 그렇듯이
리만을 떼어내서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1, 2, 3, 4 등의 숫
자를 말할 때, 우리는 그 숫자만큼의 사물(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숫자들만을 추상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리와 기를 서로
로부터 분리시켜 이야기하면 안 될 이유를 찾기 어렵다. 그렇게 추상화
시켜 말하거나 사고하는 것은 분명히 가능하다. 물론 기대승은 이것을
이해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만약 그것들이 둘로 나누어 귀속시키는 표
현이 널리 수용되면, 그것들이 실제로 분리될 수 있는 것들이라고 생각
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을 염려한다.13) 따라서 그는 그런 최
소한의 가능성마저 없애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이황은 자신이 리와 기의 실질적인 분리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 아
12) <사칠 3서(이황)>, 161-162쪽, 往年鄭生之作圖也, 有四端發於理, 七情發於氣
之說, 愚意亦恐其分別太甚, 或致爭端. 故改下純善兼氣等語, 蓋欲相資以講明,
非謂其言之無疵也.
13) <사칠 4서(기대승)>, 188-190쪽, 若後學見之, 指其已定之形, 而分理與氣二者,
別而論之, 則其爲悞人, 不亦旣甚矣乎.
138 儒敎思想硏究第44輯
니라 추상적인 또는 개념적인 분리 가능성만을 인정한다고 반복적으로
강조하지만, 기대승은 그의 견해가 실질적인 분리 가능성을 허용한다고
본다. 하지만 사칠논변의 과정에서 자신의 명제들이 기대승의 지속적인
비판을 받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이황은 리와 기가 서로 분리되어 존재
할 수 있는 실체들이라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는 리와 기가 현실
에서는 분명히 서로 분리되지 않지만, 대화상 또는 사고상에서 그것들
을 분리시켜 말할 수 있다고 말할 뿐이다. 이 과정에서, 그는 사단에서
는 리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이 있음을 전제하고, 칠정에서는 기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이 있음을 함축하는 (P4)를 언급한다. 아마도 여기에서 말
해지는 ‘어떤 것’은 사단의 경우에는 기를, 그리고 칠정의 경우에는 리
를 의미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리를 위주로 한다는 것은 기도 존재한
다는 것이고, 기를 위주로 한다는 것은 리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두 가지 경우에 모두 리와 기가 공존한다고 볼 수 있다. 이황이 제안하
는 또 다른 하나의 명제 (P4)는 다음 글에서 얻어진다.
사단의 발을 맹자는 심이라고 하였으니 심은 사실상 리와 기를 합한 것이다.
그러나 리를 주로 가리켜 말한 것은 어째서인가? 그것은 인․의․예․지의 성
이 순수하게 내부에 있고, 그 네 가지[사단]가 단서이기 때문이다. 주자는 칠정
의 발에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할 법칙이 있다고 하였으니 리가 없는 것이 아니
다. 그러나 가리켜 말한 것이 기에 있는 것은 어째서인가? 그것은 외부의 사물
에 감응해서 먼저 움직이는 것이 형기이고, 일곱 가지[칠정]가 그 싹이기 때문
이다.14)
이것을 이황의 새로운 명제로 볼 수 있는가에 대한 논란의 여지는 있
을 수 있으나, 최소한 기대승은 새로운 명제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
14) <사칠 3서>, 164-165쪽, 四端之發, 孟子旣謂之心, 則心固理氣之合也. 然而所
指而言者, 則主於理, 何也. 仁義禮智之性, 粹然在中, 而四者其端緖也. 七情之
發, 朱子謂本有當然之則, 則非無理也. 然而所指而言者則在乎氣, 何也. 外物之
來, 易感而先動者莫如形氣, 而七者其苗脈也.
이황과 기대승의 사칠논변에 대한 분석적 검토 139
명제는 그가 종종 언급하는 ‘주리(主理)’와 ‘주기(主氣)’라는 개념과 밀접
한 관계에 있다. 사단과 칠정의 소종래(所從來)를 각각 리와 기로 분속하
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기대승의 계속된 지적에 대해, 이황은 자신의 입
장이 리와 기의 실질적인 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개념적인 구분을
말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위 인용문은 다음의 명제를 통해 그런 그
의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P4) 이황의 3차 수정 (1559년): 사단의 발에서는 리가 주이며, 칠정의 발에서
는 기가 주이다.15)
기대승은 칠정의 경우에 쓰인 ‘주(主)’라는 단어가 여전히 기만이 있
는 듯한 인상을 준다는 점을 지적한다.16) 그러나 (P4)에서 ‘리가 주(主
理)’라는 것은 문자 그대로 ‘리를 위주로 한다’는 것이고, ‘기가 주(主氣)’
라는 것은 ‘기를 위주로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리를 위주로 한다는 것
은 사단의 발에서 리는 물론이고 기도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음에도 리의
측면만을 고려하겠다는 것이고, 이와 마찬가지로 기를 위주로 한다는
것은 칠정의 발에서 기는 물론이고 리도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음에도 기
의 측면만을 고려하겠다는 것이다. 이처럼 ‘주리’는 리만을 전제하는 것
이 아니며, 또한 ‘주기’도 기만을 전제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본다면,
이황은 (P4)에서 개념적인 구분을 하고 있을 뿐이지 리와 기의 실질적인
분리를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기대승이 제기하
는 문제도 리와 기의 실질적인 분리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는 사단이
15) (P4) “四端之發主於理, 七情之發主於氣.”는 푸웨이쉰(Fu, 1985, p.19)이 주목하
여 제안한 것인데, 그것은 이황 자신의 문구가 아니라 <사칠 3서(이황)>,
164-165쪽에서 추론되는 문구이다(四端之發… 主於理, 七情之發… 在乎氣
…). 이황은 ‘주어기(主於氣)’ 대신에 ‘在乎氣’를 언급하고 있으며, 반면에 이
문구와 관련된 기대승의 글에서는 ‘발’을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명제
(P4)와 약간의 차이가 있다(<사칠 4서(기대승)>, 186-187쪽, 四端主於理, 七
情主於氣).
16) <사칠 3서(이황)>, 164-165쪽; <사칠 4서(기대승)>, 186-187쪽과 196-197쪽.
140 儒敎思想硏究第44輯
칠정 속의 선한 부분을 가리킨다고 생각하며, 따라서 그것을 리에 분속
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칠정을 기에 분속시키는 것은 반
대하고 있다. 즉, 그는 사단이 리의 발이라는 것은 인정하면서, 칠정이
기만의 발이 아니라 ‘리와 기의 발’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른바 칠정은 기와 관련된 것 같지만 리가 또한 스스로 그 안에 있
으며, 발하여 중절한 것은 천명의 성이요 본연의 체니 맹자가 이른바 사단과 내
용은 같으면서 이름은 다른 것이다. 따라서 이전에 내가 칠정 밖에 다시 사단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던 것이 바로 이것 때문이다. 또한 사단과 칠정이 애초부
터 두 가지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이것을 말함이다. 이로 말한다면 사
단이 리를 주로 하고, 칠정이 기를 주로 한다는 말은 그 대강은 같을 지라도 곡
절이 같지 않은 바가 있다.17)
위 인용문의 끝부분에 나타난 ‘곡절이 같지 않다’는 표현의 의미는 다
음 설명에서 추측해볼 수 있다.
이른바 사단이 리의 발이라는 것은 리만을 가리켜 말한 것이고, 이른바 칠정
이 기의 발이라는 것은 리와 기를 겸해서 말한 것이다. 리의 발이라는 이 말은
진실로 바꿀 수 없지만, 이 기의 발이라는 말은 기만을 가리킨 것이 아니며, 이
것이 이른바 곡절이 없을 수 없다는 것이다.18)
기대승은 ‘리의 발’과 ‘기의 발’, 그리고 ‘주리’와 ‘주기’라는 표현에
모두 곡절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곡절이란 다름이 아니라 ‘리의 발’과
17) <사칠 4서(기대승)>, 186-187쪽, 然而所謂七情者, 雖若涉乎氣者, 而理亦自在
其中, 其發而中節者, 乃天命之性, 本然之體, 而與孟子所謂四端者, 同實而異名
者也. … 是故愚之前說, 以爲非七情之外, 復有四端者, 正爲此也. 又以爲四端
七情, 初非有二義者, 亦謂此也. 由是言之, 以四端主於理, 七情主於氣而云云者,
其大綱雖同, 而曲折亦有所不同者也.
18) <사칠 4서(기대승)>, 184-185쪽, 所謂四端, 是理之發者, 專指理言, 所謂七情,
是氣之發者, 以理與氣雜而言之者也. 而是理之發云者, 固不可易, 是氣之發云
者, 非專指氣也, 此所謂不能無曲折者也.
이황과 기대승의 사칠논변에 대한 분석적 검토 141
‘주리’는 리만을 지칭하는 것이지만, ‘기의 발’과 ‘주기’는 모두 기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리와 기의 합’을 지칭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
대승에게 있어서 ‘리의 발’과 ‘주리’는 받아들일 수 있는 적절한 표현이
지만, ‘기의 발’과 ‘주기’는 받아들일 수 없는 표현이다. 이에 대해 이황
은 ‘주리’와 ‘주기’라는 표현을 사용하게 된 의도를 밝히면서, 사단과 칠
정에 대한 자신의 명제를 다시 한 번 수정한다.
사단의 발함에 진실로 기가 없는 것은 아니다. … 대개 섞어 말하면 칠정이
리와 기를 겸한 것임은 명백하다. 만약 칠정을 사단과 상대하여 각각 나누어 말
한다면, 칠정이 기에 대한 것은 사단이 리에 대한 것과 같다. … 그 주된 바에
따라 나누어 귀속시킬 수 있다. … 사단이 사물에 감응하여 움직이는 것은 칠정
과 다르지 않다. 다만 사단은 리가 발하니 기가 따르는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
하니 리가 타는 것일 뿐이다.19)
이황은 사단과 칠정이 모두 리와 기의 합에서 발한 것이며, 또한 외부
사물에 감응하여 작용하는 情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고 말한다.
위에서 보았듯이, 기대승은 사단을 ‘리의 발’로 이해하고 칠정을 ‘리와
기의 합에서 발한 것’임을 주장하는 반면에, 이황은 오히려 사단과 칠정
이 모두 ‘리와 기의 합에서 발한 것’임을 주장한다. 하지만 이황은 우리
가 리와 기를 섞어 말하거나 또는 나누어 말할 수 있으며, 그리고 그렇
게 나누어 말할 때는 리 또는 기를 위주로 말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대체로 리가 발함에 기가 따른다는 것은 리를 위주로 하여 말했을 뿐이고,
리가 기의 외부에 있음을 일컬은 것이 아니니 사단이 이것이다. 기가 발함에 리
가 탄다는 것은 기를 위주로 하여 말했을 뿐이고, 기가 리의 외부에 있음을 일
컬은 것이 아니니 칠정이 이것이다.20)
19) <사칠 5서(이황)>, 256-258쪽, 四端之發, 固曰非無氣. … 蓋渾淪而言, 則七情
兼理氣, 不待多言而明矣. 若以七情對四端, 而各以其分言之, 七情之於氣, 猶四
端之於理也. 其發各有血脈, 其名皆有所指, 故可隨其所主而分屬之耳. … 且四
端感物而動, 固不異於七情, 但四則理發而氣隨之, 七則氣發而理乘之耳.
142 儒敎思想硏究第44輯
위 인용문에서 이황은 (P4)를 대신한 새로운 명제 (P5)를 제시하지만,
그것이 기존의 자기 견해를 철회하거나 수정한 것이 결코 아니며 다만
‘주리’와 ‘주기’라는 용어를 가미함으로써 새롭게 표현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21) 어쨌든 표면적으로 보자면,
정지운의 최초 명제 (P1)은 물론이고 이황의 (P2)에서 (P4)에 이르는 명제
들이 모두 사단을 오직 리에만 분속시키고 칠정을 오직 기에만 분속시
키고 있다.
그러나 이황은 사단과 칠정이 모두 리와 기의 합에서 발하는 것임에
도 불구하고 ‘주리’와 ‘주기’로 설명하다보니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이
지 그것들이 실제로 분리되는 것은 아니라고 역설한다. 다시 말해서, 그
는 사단이 오직 리에만 분속되고 칠정이 오직 기에만 분속되는 것은 결
코 아니라고 여러 차례에 걸쳐 강조한다. 기대승은 이러한 이황의 부가
적인 설명들을 전혀 수용하지 않고 거의 비슷한 이유를 들어 (P1)-(P4)를
모두 거부했다. 그는 이황이 어떤 명제를 제시하든 근본적으로는 사단
을 오직 리에 분속시키고 또한 칠정을 오직 기에 분속시키는 것으로 ‘보
여서는 안 된다’는 이유에서 그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황은 이제 자신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명제 (P5)에서는 사단과 칠정
의 발함에 리와 기가 모두 어떤 식으로든 관여하고 있음을 보인다.
(P5) 이황의 4차 수정 (1560년): 사단은 리가 발함에 기가 따르고, 칠정은 기가
발함에 리가 탄다.22)
20) <사칠 5서(이황)>, 266-267쪽, 大抵有理發而氣隨之者, 則可主理而言耳, 非謂
理外於氣, 四端是也; 有氣發而理乘之者, 則可主氣而言耳, 非謂氣外於理, 七情
是也.
21) Fu(1985, p.21)도 (P5)를 (P4)에 대한 “단순히 또 다른 하나의-아마도 더 명료한
-표현 방법”으로 보고 있다. 비교: 김기현(1992), 50쪽과 66쪽.
22) <사칠 5서(이황)>, 257쪽, (P5) 四則理發而氣隨之, 七則氣發而理乘之.
이황과 기대승의 사칠논변에 대한 분석적 검토 143
이황은 한편으로 리 개념을 통해 사단의 선성(純善無惡)을 설명하고,
다른 한편으로 기 개념을 통해 칠정의 선함과 악함(有善有惡)을 설명한
다. 이 명제는 사단과 칠정의 발함에 모두 리와 기를 언급하고 있으므로
기대승의 비난을 피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기대승은 (P5)에
여전히 만족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단은 리가 발함에 기가 따르고, 칠정은 기가 발함에 리가 탄다는 두 구절
도 매우 정밀하지만, 내 생각에 이 두 가지 의미는 칠정이 [리와 기를] 겸해서
갖고 사단이 단지 리의 발 한 쪽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겨진다. 그러므로 나는
이 두 구절을 “정의 발함은 때로는 리가 움직임에 기가 갖추어지는 것이고, 때
로는 기가 감응함에 리가 타는 것이다.”고 고치고 싶은데, 이 말이 어떤지 모르
겠다.23)
기대승은 (P5)가 (P3)이나 (P4)와 마찬가지로 사단과 칠정을 순리와 겸
기로 대비시키고 있다고 지적하지만, 이것은 사실상 다소 억지스런 지
적으로 보인다. (P5)는 분명히 사단과 칠정의 경우에 리와 기를 모두 언
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기대승은 지금까지 언급되었던 명제들을
모두 거부하고, 마침내 자기 자신의 명제 (P6)를 제시한다.
(P6) 기대승의 마지막 명제 (1561년): 정의 발함은 때로는 리가 움직임에 기가
갖추어지는 것이고, 때로는 기가 감응함에 리가 타는 것이다.24)
이황의 명제들에 대한 기대승의 반론은 어떤 점에서는 상당히 불공정
하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비록 표현 방식은 달랐지만, 이황은 이
미 자신의 첫 번째 해석인 (P2)를 제시할 때부터 리와 기를 서로 분리시
23) <사칠 6서(기대승)>, 303쪽, 且四則理發而氣隨之, 七則氣發而理乘之. 兩句亦
甚精密, 然鄙意以爲此二箇意思, 七情則兼有, 而四端則只有理發一邊爾. 抑此
兩句, 大升欲改之曰, 情之發也, 或理動而氣俱, 或氣感而理乘. 如此下語, 未知
於先生意如何.
24) <사칠 6서(기대승)>, 303쪽, (P6) 情之發也, 或理動而氣俱, 或氣感而理乘.
144 儒敎思想硏究第44輯
켜서는 안 된다는 기대승의 의견에 동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지 이
황은 “리와 기는 실재에서는 분리될 수 없지만, 사고나 대화에서는 분리
될 수 있다.”는 입장을 제시하려 했던 것이다.25)
이황은 리와 기 개념을 통해 사단과 칠정의 성격을 규정하려고 했던
것이지, 단지 ‘정’이라는 통합적인 개념을 규정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P6)에서 기대승은 그 두 가지를 하나로 통합하여
표현하는 ‘정(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이러한 기대승의 명제는 사
단과 칠정을 구분할 수 있는 아무런 특징을 드러내지 못하며, 결과적으
로 이황은 그의 명제를 승인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기대승이 ‘정’이라
는 총체적인 용어를 사용하는 (P6)을 제시한 것은 이황의 마지막 명제
(P5)가 여전히 리와 기를 분리시킨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미 언급했듯이, 이러한 기대승의 반론에 대한 근거가 정확히 무엇인
지 알기 어렵다. 더구나 “때로는 리가 움직임에 기가 갖추어지는 것이
고, 때로는 기가 감응함에 리가 타는 것이다.”라는 표현에서 특히 ‘때때
로(或)’라는 단어는 경우에 따라 다를 수 있음을 함축하며, 따라서 그가
그처럼 포괄적인 용어를 사용할지라도 그 명제는 여전히 두 가지 서로
다른 종류의 정들을 구분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서, 기대승은
(P5)가 사단과 칠정을 분리시킨다고 비난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P6)가
두 가지 종류의 정을 함축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기
대승의 명제 (P6)이 이황의 명제 (P5)보다 더 개선된 것으로 볼만한 어떤
이유도 찾아보기 어렵다.
Ⅲ. ‘소취이언’과 ‘소종래’
이황이 제시했던 최초 명제인 (P2) “사단은 리의 발이고, 칠정은 기의
발이다.”는 사단이 오직 리만의 발이며 칠정이 오직 기만의 발이라는 의
25) 비교: 특히 <사칠 5서(이황)>, 252-256쪽.
이황과 기대승의 사칠논변에 대한 분석적 검토 145
미를 담고 있다. 그런데 기대승은 이 명제가 그러한 성리학의 기본 전제
를 위배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서, 이 명제는 “사단은 기와 무
관하고 칠정은 리와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리와 기는
그처럼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 명제를 수용할 수 없다
는 것이다. 사실상 기대승의 이 지적은 옳다. 다른 어떤 부가적인 설명
이 없이 위 명제를 보면 그가 지적하는 것처럼 사단과 칠정이 각각 리
와 기에서만 유래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이황의 새
로운 명제 (P3)을 거부하는 이유는 (P2)를 거부했던 이유와는 다르다.
대개 성이 막 발할 때 기가 작용하지 않아 본연의 선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
이 바로 맹자가 말하는 사단이란 것이다. 이것은 진실로 전적으로 천리가 발한
것이지만, 칠정의 밖에서 나올 수는 없으니, 칠정 가운데서 발하여 중절한 것의
싹이다. 그러므로 사단과 칠정을 서로 대비시키거나 ‘순수한 리’와 ‘기를 겸함’
을 대비시켜서는 안 된다. 인심과 도심은 그런 식으로 대비시킬 수 있겠지만,
사단과 칠정은 그런 식으로 대비시킬 수 없다. 대개 칠정은 오직 인심으로 볼
수 없다.26)
기대승은 (P3)을 거부하는 두 가지 근거를 제시한다. 첫째, (P3)은 ‘순
리(순수한 리)’와 ‘겸기(기를 겸함)’를 대비시킴으로써 사단과 칠정을 별
개의 정들로 취급하지만, 사실상 사단은 칠정의 일부이므로 그렇게 대
비시켜 말해서는 안 된다. 둘째, 도심과 인심의 관계를 순리와 겸기의
관계로 설명할 수 있지만, 칠정은 인심과 다르므로 사단과 칠정의 관계
를 그렇게 설명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서 기대승이 ‘순리’와 ‘겸기’를 대
비시켜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특히, 첫 번째
이유를 왜 거부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칠정이 리와 기의 합에서 유래
26) <사칠 2서(기대승)>, 146-147쪽, 蓋性之乍發, 氣不用事, 本然之善得以直遂者,
正孟子所謂四端者也. 此固純是天理所發, 然非能出於七情之外也, 乃七情中發
而中節者之苗脈也. 然則以四端七情對擧互言, 而謂之純理兼氣可乎. 論人心道
心則或可如此說, 若四端七情則恐不得如此說. 蓋七情不可專以人心觀也.
146 儒敎思想硏究第44輯
하는 것이고 사단은 그 가운데 리의 측면을 지칭하므로, 겸기인 칠정이
순리인 사단을 포함한다고 설명하고 ‘겸기’와 ‘순리’를 대비시킴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강화시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왜 그런 대비를 거
부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편, 둘째 이유의 옳고 그름을 파
악하기 위해서는 도심과 인심의 관계를 먼저 파악해야 하는데, 이황과
기대승의 논변 속에서는 그와 관련된 논의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결론
적으로, (P3)을 거부하는 기대승의 이유를 설득력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
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그의 주장은 명료하다. 사단은 칠정의 일부이며,
칠정 이외의 다른 어떤 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쁨․노여움․슬픔․두려움․사랑․미움․욕구를 가리키는 예기의 七情이나
기쁨․노여움․사랑․즐거움을 가리키는 중용의 四情은 모두 사람의 감정
을 통칭한다고 말해진다. 그런데 정은 사단과 칠정으로 구분되는데, 칠
정이 모든 정을 통칭하는 것이라면 사단은 당연히 칠정에 포함되어야
한다. 기대승은 바로 이러한 성리학의 기본 전제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자사가 말한 중용의 四情은 모든 정을 말
하는 것이며, 맹자가 말한 맹자의 사단은 그 가운데 일부를 말하는 것
이므로, ‘나아가 말한 바(所就以言)’가 같지 않을 뿐이지 칠정 이외에 사
단이라는 또 다른 종류의 정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27) 즉, 그
는 여기에서 ‘소취이언’이란 표현을 통해 ‘정’을 언급함에 있어서 전체
를 말하는 경우도 있고 부분을 말하는 경우도 있음을 지적한다. 이황은
기대승의 이 표현을 상당히 고무적인 표현으로 받아들이지만,28) 그는
‘나아가 말한 바(所就以言또는 所就而言)’라는 표현보다는 그와 비슷한
의미를 가진 ‘가리켜 말한 바(所指而言)’ 또는 ‘가리킨 바(所指)’라는 표
27) <사칠 2서(기대승)>, 145-146쪽, 子思曰, 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
節, 謂之和. 孟子曰, 惻隱之心仁之端也, 羞惡之心義之端也, 辭讓之心禮之端
也, 是非之心智之端也. … 子思之言, 所謂道其全者, 而孟子之論, 所謂剔撥出
來者也.
28) <사칠 3서(이황)>, 162-163쪽과 <사칠 5서(이황)>, 237쪽, 夫四端情也, 七情
亦情也, 均是情也, 何以有四七之異名耶. 來喩所謂所就以言之者不同, 是也.
이황과 기대승의 사칠논변에 대한 분석적 검토 147
현을 더 많이 사용한다. 그러나 그의 용법은 기대승의 용법과는 다르다.
기대승은 칠정과 사단이 각각 전체와 부분임을 설명하기 위해 그 표현
을 사용하는 반면에, 이황은 칠정과 사단이 서로 대립된다고 주장하기
위해 사용한다.29)
기대승은 이것을 因說과 對說의 차이로 이해한다.30) ‘인설’은 ‘因仍
관계,’ 즉 생물의 외연이 동물의 외연보다 넓기 때문에 생물이 동물을
포함한다고 말하는 경우처럼 하나의 개념이 다른 하나의 개념을 포함하
는 관계를 함축하는 반면에, ‘대설’이 개념들의 ‘對待관계,’ 즉 남자와
여자를 비교하는 경우처럼 서로 동등한 가치나 외연을 갖는 두 가지 개
념들을 대조하거나 대비하는 관계를 함축한다.31) 기대승은 이황이 사단
과 칠정을 각각 리의 발과 기의 발로 간주함으로써 그것들을 대대 관계
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황에 대한 이런 비난은
29) 이해영(1988, 7쪽)은 “「所指」, 즉 가리키는 바에 따라 말한다는 것은 원래 고
봉이 사단, 칠정이 부분과 전체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사단
과 칠정은 같은 情이면서 「就하여 말하는 면이 다를 뿐이다.」라고 말한 것인
데 퇴계가 도리어 사단 칠정의 구분을 주장하는 논거의 하나로 제시한 것이
다.”라고 말한다(비교: 김용헌, 1992, 130쪽과 137쪽).
30) <사칠 6서(기대승)>, 299-300쪽 참조, 盖對說者, 如說左右, 便是對待底, 因說
者, 如說上下, 便是因仍底.
31) 최영진․안유경(2008, 8쪽)은 ‘대설’과 ‘인설’을 각각 ‘대립적 구조’와 ‘통합적
구조’로 표현하는데, 여기에서 ‘통합적 구조’는 내가 규정하는 것처럼 ‘포함’
의 의미를 함축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상은(1973, 28쪽)은 인설을 설명
하는 ‘仍因’을 ‘그대로 따른다’ 또는 ‘순종한다’로 풀이하며, 한 걸음 더 나아
가 한자경(2005, 173쪽 각주5와 174쪽)은 그것을 ‘광의의 ‘因果’’이며 ‘포함’
또는 ‘포괄’의 의미도 갖는 것으로 해석한다. 한자경이 말하는 ‘인과’의 의미
가 명확하지 않고, 또한 그녀가 제시하는 ‘엄마가 아이를 잉태하는 경우’와
‘종자가 나무로 성장하는 경우’라는 두 가지 사례들은 서로 다른 관계를 갖
는다. 즉, 전자는 A라는 실체와 B라는 실체의 ‘실체-실체 관계’인 반면에, 후
자는 A라는 한 가지 실체가 B라는 상태에서 C라는 상태로 변화하는 ‘상태-
상태’ 또는 ‘속성-속성’의 관계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은 ‘인과 관계를
두 가지 사건 간의 관계로 규정하는’ 흄(D. Hume) 이후의 철학적 ‘인과’ 개념
으로 보기는 어렵다(유원기, 2005, 318-322쪽 참조).
148 儒敎思想硏究第44輯
적절하지 않다. 왜냐하면 앞에서 여러 차례 강조했듯이, 그는 리와 기가
실제로 현실에서 분리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사단과 칠정의 성격
을 고려할 때 그런 식의 개념적인 설명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황과 기대승이 보는 리와 기의 관계는 크게 차이가 없는 것
처럼 보인다. 이황은 “리와 기는 서로 떨어지지 않으며, 칠정은 리와 기
를 겸하였다.”32)와 “사단에 기가 없는 것이 아니고 칠정에 리가 없는 것
이 아니다.”33)라는 일반적인 성리학적 견해를 따른다. 따라서 그는 “성
과 정을 전체적으로 말하자면 리 없는 기가 없고 또한 기 없는 리도 없
으며, 사단을 말하자면 심은 리와 기의 합이고, 칠정을 말하자면 리가
없는 것이 아니다.”34)라고 말한다. 이처럼 리와 기가 합한 경우에만 사
단과 칠정의 발함이 가능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기대승도 동의한다.35) 하
지만 기대승은 그렇기 때문에 사단과 칠정을 나누어 각각 리와 기에 귀
속시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반면에, 이황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누어 귀속시키는 것이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황은 기대승이 “사
단과 칠정은 모두 리와 기를 겸하므로 실제로는 같지만 이름은 다르기
때문에 리와 기에 나누어 귀속시켜서는 안 된다고 여긴 것 같다.”고 평
가한다. 하지만 이황은 “다름 가운데서 같음이 있음을 볼 수 있기 때문
32) <사칠 5서(이황)>, 250-251쪽, 夫理氣之不相離, 七情之兼理氣, 滉亦嘗與聞於
先儒之說矣.
33) <사칠 5서(이황)>, 253-254쪽, 夫四端非無氣, 七情非無理, 非徒公言之, 滉亦
言之, 非徒吾二人言之, 先儒已言之.
34) <사칠 5서(이황)>, 250-251쪽, 故前辯之中, 累累言之, 如統論性情則曰, 未有
無理之氣, 亦未有無氣之理, 如論四端則曰, 心固理氣之合, 論七情則曰非無理
也.
35) <사칠 2서(기대승)>, 147-148쪽, 夫理氣之主宰也, 氣理之材料也, 二者固有分
矣, 而其在事物也, 則固混淪而不可分開, 但理弱氣强, 理無眹而氣有跡, 故其流
行發見之際, 不能無過不及之差. 此所以七情之發, 或善或惡, 而性之本體, 或有
所不能全也. 然其善者乃天命之本然, 惡者乃氣稟之過不及也, 則所謂四端七情
者, 初非有二義也.
이황과 기대승의 사칠논변에 대한 분석적 검토 149
에 [리와 기] 두 가지를 섞어 말하는 경우가 많으며, [또한] 같음 가운데
서 다름이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에 두 가지로 나아가 말하려면 본래
리를 주로 하고 기를 주로 하는 다름이 있으니 나누어 귀속시키는 것이
어찌 가능하지 않은가?”라고 반문한다.36) 이것은 이황이 말하듯이 출발
점은 같으나 종착점이 다른 것으로서,37) 이황과 기대승의 견해는 바로
여기에서 갈라진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은 결코 리와 기를 서로로
부터 독립하여 존재할 수 있는 실체로 생각하지는 않았으며, 단지 나누
어 볼 수 있는가 또는 그렇지 않은가에 대한 의견 대립이 있었을 뿐이
다.
IV. 사단과 칠정의 선과 악
사칠논변과 관련해서는 특히 理發에 대한 이황의 견해가 많은 논란거
리가 되어 왔다. 하지만 최영진은 사실상 사단과 칠정을 각각 리와 기로
분속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사단과 칠정을 규정하기 위한 것이지 리발에
대한 우선적인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지적한다. 사실상 이 지
적은 기존의 이해와는 달리 상당히 중요한 논점의 전환을 시사한다.
… 퇴/고 논변의 핵심은 ‘사단을 리의 발현으로 규정할 수 있는가’라는 점에
있다. 그러나 논변 당시, 퇴계에게 리 자체가 능동적으로 발한다는 의식이 명료
했던 것 같지는 않다. 그 당시 퇴계에게 중요한 것은 리가 아니라 사단이었다.
사단의 純粹善性을 이론적 근거 지우는 일이 퇴계의 과제였다. 리발설은 리의
속성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단의 형이상학적 근거를 확립하기 위하여
제시된 명제였다. 사단과 칠정의 질적인 구분을 짓기 위하여 리기로 분속하여
말한 것이며, 그 근거를 리와 기로 각각 배속시킨 것이다. 즉, 사단의 純粹善의
36) <사칠 5서(이황)>, 252-253쪽, 公意以謂四端七情, 皆兼理氣, 同實異名, 不可
以分屬理氣. 滉意以謂就異中而見其有同, 故二者固多有渾淪言之, 就同中而知
其有異, 則二者所就而言, 本自有主理主氣之不同, 分屬何不可之有.
37) <사칠 5서(이황)>, 252-253쪽, 然其所見始同而終異者無他.
150 儒敎思想硏究第44輯
논거를 절대적인 리로서의 性에 정초시키기 위하여 사단을 리발로 설명한 것이
다.38)
이황이 사단과 칠정을 나누어 리와 기에 분속시킬 때, 그는 결코 사단
이나 칠정이 현실적으로 또는 경험적으로 분리된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
니라 개념적으로 또는 이론적으로 분리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리의 발이나 기의 발 등의 표현이 이황에게는 큰 문제가 되질 않았고,
그가 그런 표현 자체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다는 것은 위에서
보았듯이 그가 특히 ‘소취이언’이나 ‘소지이언’이란 표현을 빈번하게 사
용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보이려고 하는 데서 잘 드러나고 있다. 이황이
개념적으로나마 리와 기를 분리시키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위 인용문에
서 지적되듯이 사단의 선성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기대승은 먼저 사단이 칠정의 일부로서, 그것들은 두 가지 정이 아니
라 하나의 정이라고 말한다.39) 이것은 맹자 이래로 성리학에서 일반적으
로 수용되던 규정으로서, 이황도 사단이 칠정의 일부라는 점에는 동의
한다.40) 하지만 그는 여전히 리와 기라는 용어를 통해 그것들에 대한
‘소취이언’이 다르다고 주장하며, 그 결과 그의 ‘소취이언’을 ‘소종래’로
간주하는 기대승은 그런 식의 구분이 결국 사단과 칠정을 실질적으로
분리시키는 것으로 보인다고 간주한다.
대개 사단과 칠정을 대비하고 서로 대비하여 말하며, 그림에 게시하여 때로
는 [사단에는] 선하지 않음이 없다고 하고 때로는 [칠정에는] 선과 악이 있다고
38) 최영진(2005), 173쪽. 여기에서 자세히 논의하지는 않지만, 사실상 사칠논변의
핵심은 사단과 칠정에 대한 규정의 문제였지 리발의 문제가 아니었으며, 이
문제가 본격적으로 다루어진 것은 오히려 사칠논변의 두 번째 라운드인 성
혼과 이이의 인심도심논변에서였다.
39) <사칠 2서(기대승)>, 146-147쪽과 <사칠 4서(기대승)>, 186-187쪽, 非七情之
外復有四端也; <사칠 2서(기대승)>, 147-148쪽과 <사칠 4서(기대승)>,
196-197쪽, 四端七情者, 初非有二義也.
40) <사칠 5서(이황)>, 262쪽, 故雖不可謂七情之外復有四端…
이황과 기대승의 사칠논변에 대한 분석적 검토 151
하면, 사람들이 그것을 보면 마치 두 가지 정이 있는 것처럼 의심할 것이고, 비
록 정이 두 가지라고 의심하지 않더라도, 역시 그 정에는 두 가지의 선이 있어
서 하나는 리에서 발하고 하나는 기에서 발한다고 의심할 것이므로 아직도 마
땅치 않다고 하는 것이다.41)
기대승은 사단이 리의 발이므로 純善하고, 칠정은 기의 발이므로 선
하거나 악하다고 말하는 경우, 사단의 선과 칠정의 선이 하나의 동일한
선임을 설명하는 것이 어렵다고 지적하고 있다. 기대승은 사단이 칠정
가운데 선한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하는 동시에 사단에도 中節과 不中節
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성이 정으로 드러날 때 지나치거나 부족한 부중절의 경우에는 악이
되고, 적절하게 드러난 중절의 경우에는 선이 된다. 사단과 칠정은 모두
정에 속하므로, 모두 중절할 수도 있고 부중절할 수도 있다는 결론이 나
온다. 그러나 사단에도 부중절이 가능하다는 이러한 주장은 맹자의 성
선설을 받아들이던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적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사단
은 사람의 善性을 담보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던 반면에, 사단에도 악이
가능함을 함축하는 부중절은 맹자의 성선설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이
해되기 때문이다. 기대승은 사단이 순선이라고 주장하는 동시에 부중절
도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모순임을 스스로 인정한다.42) 하지만 그는
사단이 순선하다는 맹자의 이론을 반대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사단이
리의 발이고 칠정은 겸기의 발함(즉, 리와 기의 합에서 발함)이라는 이황
의 2차 수정 명제 (P3)도 부정하고 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순선함은 리의 속성이며, 따라서 만약 사단이 칠
정 가운데 순선한 것을 지칭한다면 사단이 리의 발임을 인정하는 것이
41) <사칠 4서(기대승)>, 189쪽, 盖以四端七情, 對擧互言, 而揭之於圖, 或謂之無
不善, 或謂之有善惡, 則人之見之也, 疑若有兩情, 且雖不疑於兩情, 而亦疑其情
中有二善, 一發於理, 一發於氣者, 爲未當也.
42) <사칠 4서(기대승)>, 228-229쪽, 夫以四端之情爲發於理, 而無不善者, 本因孟
子所指而言之也.
152 儒敎思想硏究第44輯
된다. 한편, 기질의 경우에는 그것이 중절하는가 또는 부중절하는가에
따라 선과 악이 각각 결정된다. 그러므로 기대승이 사단에 중절과 부중
절을 모두 인정한다는 것은 선함과 악함을 모두 인정한다는 것이고, 선
함과 악함을 모두 인정한다는 것은 사단을 리의 발로만 설명할 수 없으
므로 기의 측면도 반드시 언급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칠정에 대해 이미 리와 기를 겸하고 선악이 있다고 규정했지만, 이제 사
단에 대해서도 칠정과 동일한 방식으로 규정함으로써 사단과 칠정이 모
두 하나의 정에 속한다고 주장하며, 무엇보다도 사단을 설명함에 있어
서 리는 물론이고 기도 반드시 언급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내 생각에 사단과 칠정은 심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없고, 심은 곧 리와 기의
합이니, 정은 진실로 리와 기를 겸한 것이다. 따로 하나의 정이 있어 단지 리에
서만 나오고 기를 겸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43)
기대승의 이런 견해를 이황이 부정하지는 않는다. 즉, 이황도 사단과
칠정의 경우에 모두 리가 없는 기는 없고 기가 없는 리는 없다는 주희
의 기본 원리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가 되
는 것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는 입장이고, ‘주가 된다’는 것은 사단이나
칠정의 특징적인 성격을 규정해주는 개념을 언급하겠다는 것이다. 순선
은 리의 속성이므로, 사단이 순선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그것을 설명하
기 위해 리 개념만을 언급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하지만 그렇다
고 해서 기가 없이 리만으로 이루어진 어떤 것이 순선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서, 리와 기로 이루어진 인간이 순선한 경우에 리적 특
성만을 강조하는 것이지, 인간이 리만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43) <사칠 4서(기대승)>, 202-203쪽, 愚謂四端七情, 無非出於心者, 而心乃理氣之
合, 則情固兼理氣也. 非別有一情, 但出於理, 而不兼乎氣也.
이황과 기대승의 사칠논변에 대한 분석적 검토 153
Ⅴ. 나가는 글
이황은 사단을 리의 발로 보고 칠정을 기의 발로 봄으로써 (개념적으
로나마) 리와 기를 분리시켰고, 결과적으로 사단을 칠정에 포함시킬 수
없게 되면서 사단과 칠정 또는 사단의 선과 칠정의 선이 별개의 정이거
나 또는 별개의 선이 아님을 설명해야 하는 부담감을 갖게 되었다는 것
이 기대승의 지적이다. 그러나 앞에서 반복하여 지적했듯이, 비록 이황
이 리의 발과 기의 발을 주장하지만, 그것이 각각 리가 없는 기나 기가
없는 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며, 더구나 그는 실질적인 분리를 주장하
는 것이 아니라 개념적인 구분이 가능하다고 말할 뿐이다. 한편, 기대승
자신은 칠정의 경우에는 물론이고 사단의 경우에도 선과 악을 허용함으
로써 사단과 칠정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만약 사단과 칠정이 모
두 리와 기의 합에서 발한 정이라면, 사실상 사단과 칠정의 구분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는 듯이 보인다.44) 발한 정 가운데 중절한 것은
선이고 부중절한 것은 악이지만, 그것은 더 이상 사단이나 칠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아니라 다만 情이라는 이름으로만 불릴 것이기
때문이다.
이황은 기대승이 문제를 제기하는 이유를 충분히 납득했을 것이다.
사단과 칠정을 설명하면서 리와 기를 완전히 분리된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은 단순히 성리학의 기본 원리를 위배할 뿐만 아니라 사실상 그것에
기초한 많은 이론들과 신념들을 모두 부정하거나 또는 새롭게 정초해야
하는 심각한 문제가 야기된다. 기대승의 이런 지적은 사실상 심각하고
도 중요한 지적임에 틀림없으며, 이황은 이에 쉽게 동의할 수 있을 것이
다. 하지만 그는 이황이 실제로 그런 중대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고 지
적하며, 그런 잘못을 저질렀음을 인정하고 이론과 주장을 수정해야 한
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비판에 대해 이황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
44) 성태용(1995), 147쪽.
154 儒敎思想硏究第44輯
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 자신은 결코 리와 기의 실체성에
대한 일반적인 성리학적 관점에서 벗어나질 않았으며, 사단과 칠정을
각각 리의 발과 기의 발로 설명하지만 현실상에서의 리와 기의 분리를
함축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가 의도했던 것은 단지 사단과 칠정의 성
격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런 방식의 개념적인 구분이 가능하다는 것이
지 현실에서 분리된다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이황은 기대승의 논지
를 이해하면서도, 그의 비난을 받아들일 이유가 전혀 없었다.
지금까지 논자는 이황과 기대승이 서로 화해하거나 교차점에서 만날
가능성이 없었던 이유는 그들이 평행한 두 개의 선상에서 걷고 있었기
때문이었음을 보이려고 했다. 즉, 이황은 사단과 칠정을 현실적으로는
리와 기를 통해 분속시켜 설명할 수 없지만 사고나 대화 속에서 개념적
인 구분을 하는 것이 분명히 가능하다는 입장을 취했고, 기대승은 이황
의 그러한 구분이 후학들로 하여금 결국은 현실적인 분리를 함축시키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을 염려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상대방의
입장을 부분적으로는 납득하면서도 받아들이지는 않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그들은 최소한의 양보를 통해 문제를 수월하게 해결할 수
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자신들의 입장만
을 고집스럽게 유지했고, 그 이유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수양론에 대한
그들의 태도 때문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45) 그러나 이황과 기대승이
수양론의 문제에 대해 사칠논변에서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은 그런 주장
을 즉각 수용하기 어렵게 만든다. 이처럼 그들이 서로 다른 평행선상을
걷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 화해할 수 없었다는 해석은 한 가지 시론적
해석이지만, 그들의 서신 내용을 통해 뒷받침될 수 있는 해석이다.
▣ 투고일: 2011.6.10 심사일: 2011.6.11 심사완료일: 2011.6.19
45) 예를 들어, 김용헌(1992, 142-143쪽)은 기대승이 사단과 칠정의 소종래가 동일
하다는 자신의 최초 입장을 고수하면서도 ‘수양 및 실천의 필요성’으로 인해
그와 모순된 이황의 견해 (P2)도 동시에 수용하고 있다고 본다.
이황과 기대승의 사칠논변에 대한 분석적 검토 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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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儒敎思想硏究第44輯
<Abstract>
Analytical Consideration of the Four-Seven Debate between Yi Hwang and Ki Dae-Seung
- Focused on the Implication of ‘Sochuiiun(所就以言)’ and ‘Sojonglae(所從來)’-
/ Yoo, Weon-ki
This paper suggests that the terms ‘Sochuiiun’ and ‘Sojonglae’ are useful to
characterise the different views of Yi Hwang and Ki Dae-Seung in the Four-Seven
Debate. Yi Hwang claims that the Four Beginnings and the Seven Feelings can be
divided and described in terms of li and ki, whereas Ki Dae-Seung claims that they
must not. The main thesis of this paper is to show that the reason for their making
such contrary claims, despite the fact that they share many views of sunglihak, is that
Yi Hwang’s division of the Four and the Seven in terms of li and ki is conceptual,
whereas Ki Dae-Seung construes himto have an actual division in mind. In this paper,
we shall first analyse the reasons for suggesting as well as rejecting the six different
prepositions describing the status of the Four and the Seven in terms of li and ki and,
also, clarify the implication of ‘Sochuiiun’ and ‘Sojonglae’ that are often mentioned in the
Debate. In course of this discussion, we shall clearly see on what points and for what
reasons they differ from each other.
Key words : Four-Seven Debate, Yi Hwang, Ki Dae-Seung, Sochuiiun(所就以言),
Sojonglae(所從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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